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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HUMANITIES

  •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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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93-2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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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35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356
인문과학연구
35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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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세린 ( Kim Serine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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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0-12세기 중국과 우리나라의 동과 동제공예품 관련 문헌을 검토해 중국 북송과 요로 수출된 고려산 동과 공예품의 종류, 중국 내 인식, 소비 양상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동과 동제공예품의 중국 수출은 이전 왕조인 통일신라시대부터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고려동(高麗銅)' 이라는 브랜드화 된 명칭이 중국에 통용될 정도로 높은 품질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아 많은 교역이 전개되었다.
중국은 고려에서 동광석(銅石)과 황동, 유동, 적동 등 동합금재와 동제공예품을 수입했다. 중국문헌에 등장하는 고려산 동과 공예품 관련 내용에는 모두 고려의 산품(産品)으로 동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 '고려동(高麗銅)'이라는 브랜드화 된 명칭은 중국에 유통된 양질의 고려산 동과 동합금을 중국 내에서 지칭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기 다른 문헌에서 중복적으로 등장하는 기물명을 통해 '고려동'이 붙은 대표적인 몇 가지 기종을 추릴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에 유통된 고려산 동제공예품의 형태와 제작기법, 소비상을 일부 추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료 부족으로 인한 관련 유물을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 없었던 점은 본 연구의 한계로 남았다. 앞으로 추가 연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강, 분석해 동아시아 금속공예 연구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This thesis examines the records related to copper and copper crafts in China and Korea in the 10th and 12th centuries and analyzes the types of copper minerals and crafts from Goryeo exported to China, and China's perception and consumption patterns.
China imported copper minerals, brass, red copper, and copper alloy materials and crafts from Goryeo. It was clarified that all Goryeo copper imported and crafts made from copper in Chinese records were produced in Goryeo. Also, it can be seen that the name that became the brand 'Goryeo-made copper(高麗銅)' was a name for copper alloyed with high-quality Goryeo-made copper minerals distributed in China within China. In addition, through the names of objects that are repeated in different sources, we were able to extract some representative objects that were named after 'Goryeosandong'. Based on this, it was possible to analyze the consumption patterns of Goryeo copper crafts distributed in China and their production techniques.
However, the lack of data and the inability to confirm the related artifacts in detail remained a limitation of this study. In the future, we will try to make a contribution to the study of metal crafts in East Asia by reinforcing and analyzing the missing parts through additional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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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숙 ( Shin Suk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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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宣和奉使高麗圖經』(1123) 卷15 騎兵馬 항목에는 '螺鈿爲鞍', 즉 '나전으로 장식된 안장'이 언급되어 있다. 기록은 널리 알려졌지만, 현존 유물은 보고된 예가 없고 관련 연구도 부재하여 검토가 필요하다. 고려의 나전안장은 尙乘局과 太僕寺에 소속된 마구 장인과 中尙署에 소속된 螺鈿匠과 漆匠이 협업하여 제작했으며, 거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장은 사람이 앉는 부분과 반원형의 직립한 앞가리개 그리고 말의 뒤쪽을 향해 기울어진 뒷가리개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기능이 최적화된 마구의 구조와 구성, 기본적인 형태는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공유했던 반면, 장식은 시대와 지역마다 뚜렷한 취향이 반영되었다. 고려의 나전안장은 중국의 송과 요, 원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바탕 재료는 나무로 만들고 전교의 앞면과 후교의 뒷면에 나전이 장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나전칠기의 고유한 특색을 떠올리면, 안장에는 작은 단위의 문양으로 구성된 섬세한 화문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전안장은 조선 시대 유물로 전하고 있어, 고려의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In “Cavalry Horse,” the Vol. 5 of Xu Jing's Xuanhe fengshi gaoli tujing (Xuanhe Commissioner's Illustrated Account of Goryeo, 1123), a “mother-of-pearl inlaid saddle” is mentioned. Although this record has been widely known, there are no reported examples of such relics and no studies have been conducted on the saddle described in the book. Mother-of-pearl inlaid saddles were produced by saddlers who belonged to Sangseungguk and Taeboksi, two royal bureaus in charge of palanquins, equine items, and ranches, in collaboration with the court artisans responsible for mother-of-pearl inlaying and lacquering from the office of Jungsangseo (Royal Bureau of Tableware and Valuables). There is also a possibility that Khitan artisans took part in the making. This saddle would have consisted of a seat, a semicircular upright pommel, and a cantle inclined toward the rear of the horse. The structure, composition, and basic form of saddlery optimized for functionality were shared by many regions in East Asia, while the decoration reflected the distinct tastes of respective eras and regions. Saddles inlaid with mother-of-pearl were unique to the Goryeo Dynasty and no comparable counterparts are found even in Song, Liao, or Yuan China. It is presumed that the saddletree was made of wood and the front of the pommel and the back of the cantle were each decorated with mother-of-pearl. The saddle was most likely inlaid with elaborate small flowers considering the characteristics of Goryeo lacquerware. There are extant examples of mother-of-pearl inlaid saddles from the Joseon era, which are believed to have carried on the tradition started in the Goryeo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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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황정연 ( Hwang Jung-yo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10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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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그동안 학계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고려시대 王室 書畵收藏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대해 宋·元과 교류사적 측면에서 眞殿 및 尊閣, 기타 서화작품을 대상으로 살펴본 것이다. 주요 연구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왕실에서는 신라시대 전통을 이어 先王의 영정을 보관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11세기에는 宋 경령궁 제도를 수용해 궁궐 내 경령전에 설치하고 유교식 五廟制에 따라 태조와 직계 4대조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궐 밖에는 불교식 眞殿寺院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원간섭기 이후에는 경령전의 위상이 축소되는 한편 元皇室을 위한 願堂이 등장하면서 고려 고유의 진전제도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둘째, 12세기 예종연간에 이르러 북송 휘종황실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고려왕실로 황제의 御製·御筆이 하사되어 이를 보관하기 위해 天章閣과 寶文閣으로 대표되는 尊閣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아울러 淸燕閣 등 왕실의 각종 문적과 서화작품을 보관한 전각이 건립됨에 따라 御府 소유를 확인하는 收藏印 제도가 도입되었다.
셋째, 宋·元과 활발한 교섭으로 인해 송대 회화를 비롯해 원대 명서가들의 작품, 畵論書 등이 고려로 전래되었고 이는 당대 서화사의 발달을 촉진시킨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렇듯 고려왕실에 의한 역대 先王·先后의 영정과 중국황제의 어제어필 봉안, 기타 서화를 수장한 전각의 건립은 조선왕실로 계승되어 이 세 가지 양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서화수장이 전개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historical approaches to the origin and formation of royal collection of paintings and calligraphy in Goryeo Dynasty 高麗王朝.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nd developing the royal calligraphy and painting chief system in the Goryeo Dynasty, which was the origin of the royal calligraphy and painting chief of the Joseon Dynasty, was examined for Royal Portrait Shrine 眞殿, Storage for Royal Documents and Calligraphic works 尊閣, and general paintings and calligraphy works. The main content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Goryeo royal family prioritized keeping the portrait of successive kings in order to advocate the legitimacy of the royal power. Therefore, in the 11th century, the Royal Portrait Shrine called as Gyeongryeong-gung 景靈宮 system was accommodated, installed in Gyeongryeong-jeon 景靈殿 in the palace, and the portraits of King Taejo and the four-generation of direct ancestors were enshrined according to the Confucian style. However, after the original interference period, the status of Gyeongryeong-jeon was reduced, while a shrine for Mongol emperors and empresses appeared, making many changes to the unique development system of Goryeo.
Second, after the 12th century, as diplomatic exchanges with the Huizong 徽宗, r.1100-1125 Imperial Family in North Song became more active, the Emperor granted to the royal family of Goryeo, and the system of Storage for Royal documents and calligraphy was implemented for the first time to keep them. This precedent led to the Joseon Dynasty, which led to the creation of a collection center that specialized in storing royal materials. Third, due to the active negotiations with Song-Yuan Empires, many Buddhist manuscripts, paintings and calligraphy by famous artists, and treaties on paintings were introduced to Goryeo, which were very close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art history at the time. However, because of the limitations of the surviving works and documents, it was not possible to fully examine in detail how it flowed into the Goryeo palace, the storage place, and how it affected the appreciation culture of the Goryeo royal family. This will be supplemented by further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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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재빈 ( Yoo Jaebi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5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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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는 재위 초년부터 말년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마도를 그렸다. 그러나 각 시기마다 말 진상의 의미는 차이가 있다. 우선 1743년 ≪십준도≫는 이미 청 황실과 팔기군의 일원이 된 몽고족 군왕들이 진상한 것이다. 이들은 조공의 의무를 지닌 번족이 아니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이 그림은 공마도라 부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마리 말은 모두 진상자 부족의 이름이 표시되었으며 몽고어로 이름이 부가되어 그 출산지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5년 후 1748년에 제작된 3축의 <준마도>는 준갈이와 평화 협정기간에 그려진 그림이다. 조공의 예를 통해 청 조정은 국경의 안보를 확보하고 준갈이는 무역의 이득을 꾀할 수 있었다. 준갈이의 경우는, 내신의 진상이었던 1743년 ≪십준도≫와 다른 외번의 조공이었음에도 그림은 선례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그려졌다. 이는 청이 준갈이의 조공을 대등한 협정이 아니라 이미 복속된 군신 관계로 위계 짓고 싶어했음을 보여준다. 건륭제는 준갈이 사신이 실제로 조공을 올리는 조공 장면을 포함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시켰다.
1759-1763년에 제작된 합살극, 발달산, 애오한의 공마도는 서역 정벌의 결과로 제작된 것이다. 건륭은 1757년 준갈이 전투에 이어 합살극 일대의 종족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준갈이와의 평화협정 기간과 달리 이 시기의 조공은 '복속'을 의미하였다. 예전의 어제가 건륭제의 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 표출되었던 것과 비교해 이 시기의 어제는 조공마에 담긴 서역 정복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1772-73년에 제작된 다양한 출산지의 말 그림은 1771년 토구트의 입국이 계기가 되었다. 건륭제는 토구트의 이주 요청을 '귀환'이라 부르며, 천하가 감복하여 스스로 제국의 통치아래 들어오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앞서 1748년의 준갈이 준마도 3축과 함께 이 시기 토구트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 구성원이 진상한 7마리의 준마도 7축을 합쳐서 다시 '십준도'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출신지의 십준도 '재'제작은 건륭의 초년기부터 시작된 서역 통치가 비로서 완성되었음을 상징하였다.
건륭이 낭세녕을 비롯한 선교사 화가들에게 주문한 공마도는 일관된 흐름을 보이면서도 다양한 도상과 형식으로 변주되어 나갔다. 건륭은 기본적으로 이공린의 <오마도>에 보이는 '공마도'의 도상과 백묘법의 화풍, 조맹부의 <욕마도>에 나타나는 '교원목마'의 도상과 채색 화풍을 교차하며 병행해나갔다. 그의 말은 전통 '시화합벽첩'으로 제작되어 산수화나 묵죽화와 같은 문인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수렵도에 등장하여 '고사 속 실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차와 변주 속에서 중화와 이족의 경계는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민족의 개별성을 조공마의 실증적 묘사와 한, 만, 몽, 회문의 다중 언어체계로 드러내었다. 이를 통해 공마도는 화이관이 아닌 다민족적 특성 지향하게 되었다. 황실 소유가 된 각지의 말은 다시 만주족 황실 의례와 황제 기마 초상에 삽임됨으로써 청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즉 다민족성이 동등하고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청 문화로 흡수, 귀결되는 되는 것이다.


Emperor Qianlong ordered various forms of tribute horse paintings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his reign. The horses in the paintings were tribute given by different tribes as results of consolidation, conquest war or trade between Qing and those tribes. First, in 1743, The Ten Steeds was a tribute paintings from East Mongolian generals who had already become members of the Qing imperial family and the Eight banners. Since they were not a clan with a duty of tribute, this painting cannot be called tribute paintings in a strict sense. Nevertheless, all ten horses were marked with the names of the tributing tribes, and their names were added in Mongolian to emphasize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birthplaces.
Five years later, the three of tribute horse paintings were produced in 1748, which were later included in The (Second) Ten Steeds. They were painted during the period of the peace agreements with Dzungar. Through the tribute ritual, the Qing court was able to secure the security of the border while Dzungar was able to benefit from the trade. Although Dzungar was an independent tribe different from the east Mongolia, their tribute horse painting was maintained the precedent form in 1743. It shows that the Qing considered the peace agreement with Dzungar not as an equal trade contract, but as hierarchical relationship between king and his subjects. The Emperor Qianlong reinforced its meaning by including the scene of tribute in the painting in which the Dzungar envoys pay tribute to the emperor.
The horses tribute paid by Kazakhstan, Badakhshan, and Afghanistan were produced between 1759 and 1763. They were the result of the Qianlong's Western conquest. Unlike the period of the peace agreement with Dzungar, the tribute in this period meant 'submission'. Qianlong's inscriptions on these paintings, emphasized the triumph of the war unlike the previous inscriptions on The Ten Steeds, which expressed personal appreciation and affection towards his horses.
The horse paintings of various birthplaces produced in 1772-73 was triggered the entry of Torgut in 1771. Emperor Qianlong called Togut's request for migration as "a return" and evaluated it as a phenomenon in which people of the world voluntarily come under the Qing empire. He combined the three Dzungar horses painted in 1748 and the seven horses from different ethnic groups such as Manchu, East Mongolian, Torgut, and rename it as The Ten Horses. The 're'-production of the The Ten Horses of various ethnic origins symbolized the completion of Qianlong's Western conquest, which began in the early years of Qian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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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경희 ( Jang Kyung Hee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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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청대에 유행한 박쥐문을 18세기 말 정조대에 받아들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이후 19세기 중반 조선과 청대 궁궐에서 표현된 박쥐문의 형식과 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민족적 양식을 밝히려는 연구이다. 그동안 박쥐문에 대해서는 문양사 분야의 일부 연구가 있었지만 그 기원이나 수용시기는 연구된 바 없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18세기 말 정조가 사친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환갑을 맞이하여 당시 청 건륭제의 즉위 50주년과 7-80세의 연회에 관심을 갖고 사신과 화가를 보내어 관련 의례를 기록하고 그려오게 하였다. 그 결과 혜경궁이 탈 가마를 새로 제작할 때 박쥐문이 다양한 형태로 응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 왕실은 각종 공예품에 박쥐문을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19세기 중반 조선과 청나라 궁궐 건축에 박쥐문은 다양하게 적용되는데, 특히 창덕궁 낙선재와 베이징 공왕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양자의 벽이나 기둥, 난간 및 창호 등에는 다종다양한 박쥐문이 적용되었는데, 공왕부의 경우 명확한 의미를 지닌 정확한 형상의 박쥐문이 표현된 반면 낙선재의 경우 간략하고 단순한 표현이 많았다. 이처럼 청과 조선의 박쥐문은 기복이라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어 유행했지만, 실제 표현에서는 양국의 민족성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considered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accepting the bat gate, which was popular in the Qing Dynasty of China, and attempts to clarify the national style by comparing and analyzing the format and contents of the bat gate expressed in Joseon and Qing Dynasty palaces in the mid-19th century. In the meantime, there have been some studies in the field of pattern history on bat doors, but the origin or acceptance period has not been studied. At the end of the 18th century, King Jeongjo was interested in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nthronement of the Qing Dynasty and the banquet of 7-80 years old, and sent envoys and painters to record and paint related rituals. As a result, it is confirmed that Hyegyeonggung Palace was applied in various forms under the theme of bat doors when making a new knife kiln. Since then, the Joseon royal family has used various bat doors for various crafts. In particular, the Bat Gate is applied in various ways to the architecture of Joseon and Qing palaces in the mid-19th century, and Nakseonjae of Changdeokgung Palace and the Gongwangbu of Beijing are representative examples. Various bat doors were applied to the walls, pillars, railings, and windows of the two, the former expressed accurately shaped bat doors with clear meanings, while the latter had many simple expressions. As such, it was confirmed that the bat gate of Cheong and Joseon was popular due to the projection of the human desire of ups and downs, and the ethnicity of both countries was refl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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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민주 ( Cho Minju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1-21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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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京杭運河圖>의 존재가 청대 당안檔案 전시에서 소개된 후, 절강성 박물관에도 같은 형태의 <京杭道理圖>가 소장되어있음이 밝혀졌다. 동시에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발간된 『국가박물관문물총서: 당안』 편에 만주족 화가 당대唐岱(1673-1752)가 참여한 <乾隆十六年南巡各地詳圖>가 알려지면서, 대만 고궁박물원과 절강성박물관, 그리고 국가박물관에 소장된 세권의 장권식 운하도는 원본과 임모본의 관계임이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특히 <건륭16년남순각지상도> 後記에는 참여한 화가와 제작 경위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적혀있어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건륭16년남순각지상도>는 청록산수화 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20여 미터에 달하는 장권의 회화식 지도로 예술과 지리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청대 지도문화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청대 궁정에서의 회화와 지도의 관리 및 제작방식에 대해 살펴보고, <건륭16년남순각지상도>의 분석을 통해 지도와 그림의 영역을 넘나드는 청대 시각문화의 개방적이고 통섭적인 성격에 대해서 논의해 보겠다.


Since the map of the Grand Canal 京杭運河圖 in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wan was introduced in an exhibition of Qing court documents, an almost identical version of the map in Zhejiang Provincial Museum, The route map of the Grand Canal 京杭道裏圖, has been revealed to the public through exhibition. After the Map of the Southern Inspection Tour of the 16th year of Qianlong drawn by Tang Dai has became known through the Catalogue of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scholars became aware that the three volumes of the maps stored in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wan, the Zhejiang Provincial Museum of China, and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were set in the a relationship between original and copies. Specifically, the production process and information regarding the painter were written in the scripts at the end of the Map of the Southern Inspection Tour of the 16th year of Qianlong. It provides an insight into the production process of two remaining Grand Canal maps. The Map of the Southern Inspection Tour of the 16th year of Qianlong, about 20-meters-long, which was drawn in the blue-green landscape picture technique, can be said to be the essence of visual culture in the Qing dynasty, moving beyond the boundary between art and geography. In this article, after detailing the management and production process of paintings and maps in the Qing court, I discuss the integrated characteristics of the Qing dynasty visual culture, which crossed the realms of maps and paintings. My particular focus will be on the Map of the Southern Inspection Tour of the 16th year of Qian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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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진 ( Kim Seongji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5-24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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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한국과 유라시아, 특히 러시아와의 협력 현황과 쟁점을 교역과 관광객 교류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 탈접촉 시대 ICT 기반 연결과 교류가 향후 한러관계에 주는 시사점을 찾는데 있다. 한러 교역과 인적 교류는 대러 경제제재와 같은 외적 환경변화, 국제자원가격 변동,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 19로 인한 물리적 단절이 나타나면서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 대안적 접근으로 부상하고 있는 ICT 기반 연결 증가는 물리적 단절의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행위자들 간 연결의 폭발적 증가는 네트워크의 구조적 변화, 나아가 사회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ICT관련 협력은 인적 교류, 과학기술 교류, ICT 기반 신사업 협력, 연결망 확대와 트래픽 증가를 수용할 수 있는 양질의 모바일 네트워크 구축, 그리고 이를 위한 인공위성과 우주 협력으로 연결되는 대규모 협력이다. 이러한 협력에는 기술과 사회제도 간의 친화성도 중요하며, 사회의 가치지향과 ICT의 개방성에 대한 협력 국가 간의 입장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 효과도 극대화될 수 있다. 따라서 한러 양국은 ICT 발전에 따른 보편가치 확산과 개방성에 대한 조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duct a brief review on the trend and issues of trade and tourism between Korea and Russia, and to find implications of ICT-based links and exchanges on the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volume of the trade and tourist visits between the two countries were heavily influenced by international politics and sanctions, the international market prices of raw materials, and physical disconnection by COVID-19 that claimed the dynamics of development.
In the contract-free era, ICT-based links plays a main part as a replacement of 'traditional' contact-based approaches. According to network theory, however, drastic growth of random connections, and structural changes of networks may cause social changes. ICT-based alternative approaches of cooperation facilitate human and technology exchanges, emerging ICT-based industries, and satellites and space industries that will accommodate expanding demands of links and internet traffics. In the alternative approach, the harmony between the orientation of a society and emerging technology grows to be crucial to the efficient use of technology. Furthermore, attitudes towards openness and connectivity among the party countries/societies should be harmonized to maximize the positive impact of cooperation. Employing IT-based approaches, it is demanded for Korea and Russia to pay more attention to construct the attitude towards openness and connections for the development of cooper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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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정연 ( Suh Jungyeon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8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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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우리는 프랑스 대도시 외곽지역의 이민 2세대의 언어에 나타난 아랍어 차용어의 교감적 언어사용communion phatique에 대해 살펴본다. 프랑스의 단일 언어와 문화로 구성된 공화국의 이상을 계승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사회적 중압감 속에서 발생한 이주민 2세대 청소년의 언어적 변이형으로 그들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언어적·비언어적 담화전략이 포착된다. 그중에서 본고는 다민족 기원의 차용어, 특히 아랍어 차용어의 교감적 언어사용 그리고 그 실현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담화 표지들로 언어 사용자는 주류 사회와 다문화 간의 중간지대인, 호미 바바의 '제 3공간'과 같은 고유의 담화공간을 구축한다. 이를 이 담화표지의 물리적 심리적 교감적 언어사용으로 정의한다. 본고는 야콥슨의 교감적 기능을 의사소통의 유지를 위한 '물리·심리적인 접촉과 연결'에 더해 의사소통의 성공적 완수를 위한 '발화의 지시적 공간 공유'까지 확대해 정의해야 함을 주장했다. 발화작용이론의 기제를 빌어, 이 개념을 발화지시공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았다. 본고에서 우리는 주류사회의 언어에 대응하는 단절, 혼종의 언어라는 기존의 규범적 문제적 시각이 아닌 화자의 사회적 자본으로 언어를 바라보는 새로운 언어 담론의 최근 학술 동향을 지지하고 필연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접촉지대에 놓인 화자의 다기호적 언어수행으로 교감적 기능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examine the phatic communion in the language practice of French young people in the suburban area, with their usages of the linguistic borrowing of Arabic terms. This lingual variant is mainly used by the young from immigrant family in the suburb area of big cities in France, which has been normally criticized by the traditional idealism of the republicanism. From the sociolinguistic analysis of these variants em merging to their lingual practices of the Arabic terms, we'd like to try to deeply focus on their pragmatic strategies, so to speak, creating a their proper phatic communion, 'the third space', in Homi Bhaba's term, between their ethnic origins and their French nationalities given. This concept will be described in terms of the speaker's reference spaces in the framework of the theory of enunciative operation. Finally we'd like to support the ideas that the hybridity, instability and variety in languages et cultures can be tools of interactional strategy by speaker with his own multicultural discursive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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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송지호 ( Song Ji-ho )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1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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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일본 공예에 대한 인식변화와 수용 양상을 당대 미술 문화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미술교육가이자 산업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 드레서의 일본 여행과 관련 저작을 통해 구체적으로 조망하는데 연구 목적을 두고 있다. 19세기 중 후반 유럽에서는 동양 미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태동하던 시기이다. 19세기 중반 서구의 압력으로 개항한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영국 사회에 유입된 일본 공예품은 오랜 기간 미지의 세계였던 동아시아에 대한 이국적 취향과 문화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모티브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히 개최되었던 박람회와 이를 통해 늘어난 일본 미술 수집품, 그리고 일본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통해 들어온 다양한 공예품을 통해 소위 자포니즘Japonism으로 일컬어졌던 일본 취향은 점차 변화했다. 특히 1875-76년 사이 4개월 동안 일본을 직접 여행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일본 문화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드레서의 『일본의 건축, 미술, 공예 제조(Japan Its Architecture, Art, and Art Manufactures)』(1882)에는 일본 미술, 공예, 제조업에 대한 인식변화가 잘 나타나며, 귀국 후 영국에서 제작한 다양한 디자인, 도안, 생산품을 통해 일본 공예 수용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changes in perception and acceptance of Japanese crafts in England in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the travel and related works of Christopher Dresser, an art educator and industrial designer who had an impact on the overall art and culture of the time. have. In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a new perception of oriental art was born in Europe. Japanese crafts introduced into British society through trade with Japan, which opened ports under pressure from the West in the mid-19th century, were recognized as a motif that satisfies the cultural curiosity and exotic taste of East Asia, which had long been unknown. However,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so-called Japanese taste gradually changed through the expositions actively held in Europe and America, the increase in Japanese art collections, and the various crafts imported through direct trade with Japan. In particular, Dresser's 『Japan Its Architecture, Art, and Art Manufactures』, written based on his experiences in Japanese culture after traveling to Japan for 4 months between 1876 and 1877 and returning to England. The change in perceptions of Japanese arts, crafts, and manufacturing is well reflected in Japanese art, crafts, and manufacturing, and the results of acceptance of Japanese crafts are concretely revealed through various designs, designs, and products made in the England after returning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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