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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Seowon Studies

  • : 한국서원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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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2234-8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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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11)~14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09
한국서원학보
14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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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채광수 ( Chae Gwang-soo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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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韓ㆍ中서원의 院任을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과 동아시아 서원의 모범 중국 백록동서원을 교차 검증한 것이다.
원임의 일반적인 차이점은 먼저 한국서원은 향촌 내 명망가를 자율적으로 선임하되, 주로 원장-(장의)-유사 체제로 서원을 운영했다. 반면 중국서원은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원임으로 구분하여 운영했고, 원장은 지방 관료 또는 대학자 초빙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官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또 중국서원이 한국서원보다 원임의 직제가 보다 세분되어 있으며, 조직 규모가 더 컸다. 다만 한국서원은 관의 영향력이 강한 중국서원에 비해 자율성이 크게 보장되었다.
다음은 소수서원과 백록동서원을 비교해 살펴보았다. 우선 원장-유사 직제를 지향한 소수서원은 창건부터 1900년까지 657명의 원장은 평균 5개월씩 재임했다. 이들은 주로 입원생 출신들로 2회 이상 원장을 중임한 자가 무려 225회에 달했고, 적게는 2회 많게는 7회나 역임하였다. 규약에는 文官과 司馬 합격자 중에서 원임의 자격을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유학 신분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다. 한편 이들은 주로 서원 인근 고을에 거주한 인사들이 많은 가운데, 일부 姓貫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운영되었다. 18세 중ㆍ후반부터는 외부 명망가, 현직 지방관을 원장으로 삼아 官權과 밀착했다. 유사는 상시 유사를 두면서 서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유사를 수시로 선발하여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백록동서원은 唐代 여산국학은 국자감 九經박사가 동주가 되어 교수를 관장하며, 과거 인재 양성에 교육 목적을 두었다. 서원이 복원되는 북송 대에는 당대 보편적인 흐름에 따라 관학적 성격을 띠었다. 남송 대 주자에 의해 백록동서원의 정체성과 특징이 형성된다. 그는 스스로 초대 동주에 올라 원생을 모집해 강학한 것을 비롯해 堂長과 유명학자 초빙, 강학 업무 관장 등 서원의 지향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명대는 과거 출신 동주가 무려 90%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었다. 이는 조정의 교육 통제에 따른 서원의 관학화 흐름에 조응한 현상이었다. 청대 서원의 강학 성격은 '과거 공명'을 주요 기조로 삼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 조건에 적합한 인사를 동주에 파견했다.


This researcher examined the executives of seowon in Korea and China through cross validation on Sosu Seowon, Korea's first seowon, and Bailudong Seowon in China which is one of the exemplary seowon in East Asia.
The general difference in the executives is that Korean seowon appointed men of repute in the village voluntarily while the seowon was operated mostly with the system of a director-(jangui)-yusa. On the other hand, Chinese seowon were operated by dividing the executives for education and administration. Also, the director was appointed as one of the local officials or an invited great scholar, and it was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largely. In addition, Chinese seowon had a more subdivided and larger organization about the executives than Korean ones. However, autonomy was guaranteed much more in Korean seowon than in Chinese one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strongly.
The following is a comparison between Sosu Seowon and Bailudong Seowon. First of all, in Sosu Seowon that pursued the organization of a director-yusa, 657 directors served for five months on average from its foundation to 1900. They were mostly the enrollees of it, and the cases of those who served as the director twice or more reached up to 225, and they served as few as twice and as many as seven times. The bylaws stipulate the qualifications for being one of the executives among those who passed Mungwan (文官) and Sama (司馬), but more than half of them were Confucian scholars. Meanwhile, many of them were the f igures who lived in the villages near the seowon, and it was operated exclusively by some Seonggwan (姓貫). From the mid- or late 18th century, prestigious men from outside or local officials in service were appointed as the director in order to adhere to governmental authority. About yusa, permanent yusa was there while temporary yusa were selected from time to time, too, to take charge of the duties.
Concerning Bailudong Seowon, for Yeosan-gukhak in the Tang Dynasty, the master of Gugyeong (九經) in Gukjagam became Dongju in charge of teaching with a goal of education to c ultivate persons of ability then. In the Northern Sung Dynasty when the seowon was restored, it took on characteristics as a national school according to the prevailing trend of the time. The identity and characteristics of Bailudong Seowon were established by Chu-tzu in the Southern Sung Dynasty. He put himself in the position of the first Dongju and recruited students for teaching and also suggested the direction that the seowon should pursue, for instance, Dangjang (堂長), inviting noted scholars, or supervising the lectures. The most noteworthy part about the Ming Dynasty is that Dongju who had passed Gwageo formed up to 90%. This was a phenomenon in response to the trend of seowon becoming bureaucratic due to the government's control over education. Since teaching in the seowon during the Qing Dynasty took 'Gwageo Gongmyeong' as its main principle, the court dispatched a person suitable for this condition as D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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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106 (6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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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주요 學規를 통해 16~19세기 한ㆍ중 서원의 변모 양상을 비교ㆍ검토한 것이다. 한ㆍ중 서원 모두 朱子의 <白鹿洞書院揭示>을 학규의 전거로 삼았으나, 서원의 전개 양상은 역사적 흐름에 따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선 중국 明代에는 心學이 번성하였고, 龍岡書院ㆍ大科書院의 학규가 심학자에 의해 제정되었다. 17세기 초반에는 이러한 심학의 말류를 비판하며, 理學의 道統을 강조하는 東林書院의 학규가 새롭게 제정되었다. 한편으로 관료 예비군 층 양성에 주력하는 관학화된 서원이 번성하였는데, 이는 동림서원과 비슷한 시기 학규를 제정한 共學書院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1543년 周世鵬이 최초의 서원인 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설립하고 학규를 제정하였다. 이때 학규는 관학화된 명대 서원을 모범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사대부 문화가 성숙하는 가운데 李滉ㆍ李珥 등은 관학화의 길을 걸으며 교육적 내용이 구체화 되는 명대 서원과 달리 과거 공부와 관부의 간섭을 배제한 채 經學 공부 및 사대부가 주도하는 학규를 제정해 나갔다. 청대 초기 이학자들은 명말 심학의 병폐를 지목하며, 이학의 도통을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康熙 연간 이학자에 의해 제정된 關中書院과 還古書院의 학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雍正ㆍ乾隆 연간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 속에 관학화된 서원 제도가 한층 더 정비되어 갔다. 특히 변방에도 행정력과 교화가 미치는 가운데 靑海에서는 三川書院 학규가 제정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신식 학문을 접목시킨 서원이 등장하였다. 中西書院과 格致書院 학규에서는 이 무렵 신식서원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반면, 조선 후기 서원은 교육 보다 향촌 기구 및 제향 기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향촌지배 세력은 사회ㆍ경제적 변화 속에 서원을 중심으로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고자 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서원 철폐령이 있기까지 당대 명현에 의해 여러 학규가 새롭게 제정되었지만, 그 내용은 復古的 성격이 강하였다. 오히려 유력한 몇몇 서원에서는 입원 자격에 신분적 제약을 강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학규 해석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This thesis on comparative review of the trend of changes for Korean and Chinese Seowons through the main academic regulations in 16~19th Century. All Korean and Chinese Seowons had the academic regulation established by scholars of South Song Dynasty as represented for 「Baekrokdong Seowon Post」 of Chu-tze as their role model, but the trend of deployment for Seowon displayed different shapes following the historic flows. First of all, during the Ming Dynasty era of China, Simhak was prospering and the academic regulations of Ryonggang Seowon and Daegwa Seowon were established by the Simhak scholars. In early part of the 17th century, a new academic regulation of Donglim Seowon that criticized the decadence end of Samhak and emphasized the enlightening of learnings was newly established. On the other hand, the nationalized Seowons with the focusing on advancing the government officer reserve class was popular and this could be affirmed in the case of Gonghak Seowon that established the academic regulation in a similar period with Donglim Seowon. In Joseon, Ju Se-bung established the first Seowon, Baekwundong Seowon [Sosu Seowon], in 1543 and established its academic regulation, and the academic regulation at this time had taken the nationalized Seowon in the Ming Dynasty as its model. However, with the noble scholar culture being matured thereafter, Yi Hwang and others walked the path of nationalized schooling, and unlike the general Seowons in Ming Dynasty where the educational contents were more concrete, the academic regulation for the study of Confucius classics and led by the noble scholars with the exclusion of past study patterns and interruption of government authority was established. The scholars of early Qing Dynasty pointed out the ill-effected Simhak at the end of the Ming Dynasty and placed effort to re-establish the enlightening of learnings. This type of phenomenon could be found through the academic regulations of Gwanjung Seowon and Hwango Seowon established by the scholars du ring the reign of Gang Hee. Under the reinforcement of the central power system during the reigns of Ongjeong and Geonryung, the nationalized Seowon system was even more well-established. In particular, with the administrative impact and edification influencing in the regional sectors, Cheonghae had the academic regulation of Samcheon Seowon established. After the mid-19 century, there were Seowons that blended new western learnings, and like Jungseo Seowon, such a trend was reflected in the academic regulation. On the other hand, the Seowons in the later Joseon had its importance as an organization for locale and memorial services rather than educational purposes. The local controlling forces attempted to sustain the traditional values with the Seowons leading the social and economic changes. From the late 17th century to the decree to abolish the Seowons, a number of academic regulations were newly established under the well-known sages of the Tang Dynasty, but the contents had strong retro characteristics. Rather, some of the well-established Seowons strengthened the restrictive social status for the admission qualification, and in the process, serious conflicts occurred surrounding the interpretation of such academic reg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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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병훈 ( Lee Byounghoo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52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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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서원들 가운데 한국의 서원은 방문객의 명단을 별도로 정리하여 관리해왔다. 그러나 여타 국가에서는 이러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방문객의 수와 신분 등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入院하여 과거를 준비하였던 학생들의 명단이 일부 남아있어서 서원을 출입하였던 인물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설립된 중국 廣州의 廣雅書院 《동사록》과 《동성제생하계공과부》를 보면 省내 각 주ㆍ부ㆍ현의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입원하여 일정기간 동안 수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주ㆍ부ㆍ현 소재 관학생들이지만 監生ㆍ貢生ㆍ貢士ㆍ 拔貢과 같이 國子監에서 수학했거나, 擧人과 같이 鄕試에 입격했던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의 紳士들로서 모두 중앙관료로의 진출을 위한 科擧 준비가 목적이었다. 광아서원은 광주성을 대표하는 省會書院으로서 국자감 다음의 지위를 가졌기에 관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많은 학생들이 집단으로 수학할 수 있었다.
경주 옥산서원은 동방오현으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건립직후 사액을 받으면서 국학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조선의 서원은 원칙적으로 과거준비를 배척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제향과 강학을 통한 원생들의 인성함양을 기본으로 했지만, 과거가 있을 때에는 이를 준비하기 위한 居接을 시행하였다. 이때는 다른 고을과 원외의 유생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외에도 각종 儒會의 장소로서 활용되면서 중국에 비하여 정치ㆍ사회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서원의 출입자는 대부분 士族들이었으며, 중앙관료부터 일반 유생까지 다양하였다. 이것은 서원의 위상에 따라서 차이가 컸는데 옥산서원은 영남의 首院으로서 방문객이 매우 많았다.
19세기 옥산서원은 적서 간의 분쟁이 심화되었던 1820년대 초반, 1850년대 중반과 구인당을 중건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던 1840년에 향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의 방문이 확인된다. 지역별로는 경주가 가장 많으며, 이어서 영천ㆍ대구ㆍ영해ㆍ인동ㆍ선산ㆍ군위ㆍ성주 등 영남의 중부지역 인사들의 방문이 많았다. 특히 과거가 있던 해에는 사마시에 입격하거나, 문과에 급제한 후 내방하여 알묘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주로 일족과 동행하였다. 19세기 옥산서원을 방문하는 인물들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증가하였다. 이것은 양반수의 증가도 있지만 쇠퇴하는 서원의 교육적ㆍ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유지하려던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Among the seowons in East Asia, the Korean seowon has maintained a separate list of visitors. However, in other countries, it is impossible to ascertain the number and identity of visitors because such data do not exist. However, some of the lists of students who prepared for the past remain, so we can guess the identity of those who entered the seowon. Although it is a record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ccording to the Records of Gwangseo Wondong and the Summer Engineering Department of Gwangseo Wondong, students from each Chubu Hyeonhak(州府縣學) in the province were hospitalized and studied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Most of these students were students of Chubu Hyeonhak(州府縣學), but there were those who studied at Gukjagam(國子監), Gamseng(監生) Gongseng(貢生), Gongsa(貢士), and Balgong (拔貢), or entered the Hyangsi(鄕試) like Geoin(擧人). These were the leaders of each region, and their purpose was to prepare for the past to advance into the central bureaucracy.
Gyeongju Oksanseowon was a representative ancestral rite for Lee Eon-jeok, one of the five prefectu res of the East, as w ell as as eowon representing Yeongnam. In particular, despite the fact that it was a Confucian academy of Namin ancestry, there were many visits by Noron and Soron dignitaries. People who visited the seowon simply heard about it while passing by Gyeongju, or learned about Seon-hyeon(先賢) when they went to take it in the past or passed it. Or, they visited to attend ceremonies and geojae, or to attend various banquets such as hyanghoe(鄕會) and city meetings. In the case of a local officer, he visited as an example of Seon-hyeon(先賢) when he was newly appointed, and he also adjudicated various civil complaints at this time.
In Oksanseowon, there is “Bonhyangsimwonrok(本鄕尋院錄),” which is not found in other seowons. Persons who have visited within Gyeongju are listed here. In particular, it is useful to identify the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Confucianism between the Confucianists and the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Confucianism and the Spring Festival in the 19th century. Through this, the range of powers that were involved in the operation of the seowon can be confirmed. In addition,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visitors who participated in irregularly held large projects such as Chije(致祭) and heavyweight, so a separate Dogi(到記) was written and recorded. In the 19th century, Oksan Seowon was visited by many people from inside and outside Hyangsa(享祀) in the early 1820s and mid 1850s, when the dispute between Jeokseo intensified, and in 1840, when Guinang was reconstructed and inaugurated. By region, Gyeongju had the largest number of visits, followed by people from the central region of Yeongnam, such as Yeongcheon, Daegu, Yeonghae, Indong, Seonsan, Gunwi, and Seongju. In particular, in the past year, there were many people who entered Samasi(司馬試) or came to visit after taking a high grade in the Department of Liberal Arts, and they mostly accompanied the clan.
In the 19th century, the number of people visiting Oksanseowon increased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This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yangbans, but it can also be seen that the symbolism of the Confucianism as a base for Confucianism that remained even when Daewongun's original samurai was destroyed and the hearts of Confucian students who felt sorry for the decline of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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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수환 ( Jung Su-hwa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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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동아시아의 가치 중 서원이 차지하는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한국의 조선시대를 기반으로 중국, 일본, 베트남의 같은 시대 서원에 대한 성격을 상호 비교 분석했다. 연구 범위는 대한민국 학계에 소개된 국내와 국외 학자들의 동아시아 서원과 관련한 성과와 조선시대 서원의 몇 가지 사례를 대상으로 한다.
동아시아는 각국의 역사적 배경에 따른 교육 기관 전통을 갖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서원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서원에서의 교육 내용이나 정부와의 관련성에 있어서는 중국, 일본, 베트남의 지역적 다양성은 존재한다. 서원 제도와 현대교육과의 연결성의 문제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부분은 오늘날 동아시아의 다양성을 위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In order to track the meaning of Seowon among East Asian values, this study compared and analyzed the characteristics of Seowon in China, Japan, and Vietnam based on the Choson Dynasty in Korea.
East Asia has educational institution traditions according to each country's historical background, but there is a possibility that it will be included as a confucian academy. However, there is regional diversity in educational content, relevance to the past, and spatial composition. Paradoxically, the characteristics of continuity and disconnection in the connection between Seowon and modern education have become a background for the diversity of East Asia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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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병석 ( Jung Byung-seok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1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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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淸의 교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遺民 李顒의 근본 문제의식은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는 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근본 원인을 儒家사상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옹은 당시 사람들이 학문하는 내용이나 목적이 科擧에 치중하여 개인의 名利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것을 俗學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여기에서 正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正學은 단순히 개인의 명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밝히고 백성과 사회를 교화하는 학문을 말한다. 正學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이옹은 書院 講學에서 찾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강학은 다름 아닌 경세관의 기본적인 실천 내용이고 방식이다. 강학을 통해서 민중과 사회를 敎化하는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明體適用의 經世觀이다. 이옹이 주장하는 講學의 내용이나 방향은 어떤 사상이론을 傳播하려는 것이 아니라 心身을 올바르게 하거나 절제하는 실천적인 측면에 초점이 있다. 즉 유학이론을 구체화하고 실천화하는 방식을 통한 사회교화 혹은 민중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강학 활동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옹은 사회교화라는 목적을 위해 悔過自新이라는 관점을 제기한다. 회과자신은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悔過自新의 제기는 직접적인 救世가 아니라 救心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救世의 간접적인 방식인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明體適用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李顒은 회과자신이라는 自我點檢의 수양방법을 靜坐를 통해서 실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자아점검을 위한 靜坐의 공부법이 바로 默坐澄心이다. 이옹은 회과자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靜坐法을 중요하고 그것을 효과적인 수양방법으로 삼고 있다. 이옹의 정좌에 대한 강조는 어떤 의미에서 고도의 복잡한 유가의 철학적 사유 체계들을 日常 生活化하고 公共 敎學化하는 과정을 통하여 보통 사람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유학의 실천화와 대중화를 의미한다.


In the historical condition of the replacement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Liyong's fundamental problem consciousness begins with reflection on reality. He starts with a reflection on Confucianism, the root cause that resulted in the collapse of the country. Liyong criticizes that the content or purpose of what people studied at that time was to pursue only personal honor and interests by focusing on passing the imperial examination, and that it was a vulgar study. He emphasizes the need for correct learning here. Correct learning does not simply pursue individual honor and interests, but refers to learning that fully reveals one's mind and enlightens the people and society. Liyong is looking for the most effective way to realize the correct learning in his lecture at Academy of classical learning. The lecture he refers to is the basic practice content and method of the statecraft. This is the doctrine of statecraft in the making practical use of truth(mingtishiyong), which he claims to teach the people and society through lectures at Academy of classical learning. The content or direction of the lecture that Liyong argues is not intended to spread any theory of thought, but rather to focus on the practical aspect of correcting or restraining the mind and body. In other words, it is a lecture activity with a strong social enlightenment or popular enlightenment character through a method of embodying and practicing the theory of Confucianism. In this context, Liyong raises the view of Huiguozixin for the purpose of social enlightenment. It means that you repent of your mistakes and renew yourself. Huiguozixin can be seen as a change of direction to saving of the mind, not direct saving the world, which is both an indirect method of saving of the world and the most fundamental method of the making practical use of truth(mingtishiyong). Liyong is talking about practicing method of self-scrutiny, called Huiguozixin itself, through sit still as a form of therapy(Jingzuo). This method of self-scrutiny is to sit still and cleanse the taste buds. He uses the Jingzuo method as an important and effective method of training in practicing Huiguozixin. In a sense, Liyong's emphasis on sit still as a form of therapy(Jingzuo) can be said to be an attempt to make it easy for ordinary people to practice through the process of daily life and publicizing highly complex Confucian philosophical thinking systems. This means the practice and popularization of studying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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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명근 ( Cho Myung-keu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4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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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인 경주 옥산서원은 일제강점기 들어 재정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원노비와 원속 등을 상실하였고, 관의 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었던 옥산서원은 오로지 소작료 수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서원 소유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송비를 감당하기 위해 거액의 채무를 지게 되면서 옥산서원의 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산서원은 1940년 서원 운영의 기본 원칙인 규약을 다시 제정하여 운영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규약의 핵심은 재정을 전담하는 이사를 두고 평의회를 새로 설치하여 서원의 각종 현안을 심의하는데 있었다. 이후 옥산서원은 평의회 의결을 통해 채무 조정을 단행하여 기존의 고리채 개인 차입을 조선신탁주식회사 저리 차입금으로 차환함으로써 이자 부담을 대폭 경감하였다. 또한 이 기회에 종가 재산을 서원 측에서 관리하고자 했으나 종가 측의 거부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서원의 채무 정리와 더불어 서원 재산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위탁 관리하였다. 일제 말 옥산서원은 일련의 제도 정비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 서원의 존속을 도모하고 있었다.


Gyeongju Oksan Seowon is a representative Seowon in Yeongnam dedicated to Hoejae Lee Eon-jeok, and served as the center of the society of country villages. However, its status declined in the internal and external environments changed after the Japanese occupation, and in particular, it was in a very difficult state financially. Lost the Seowon slaves, who were the economic foundation of the Seowon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could not receive any assistance from the governmental office, Oksan Seowon could not but rely solely on income from farm rents. In the mid-1930s, disputes over land arose, and in the process, the Oksan Seowon's finances deteriorated further as they owed large amounts of debt to cover the costs of litigation. In order to solve this problem, Oksan Seowon re-enacted its rules, the basic principles of Seowon operation, in 1940 to reorganize the operating system. The core of these rules was to have a director in charge of finance only and to deliberate on various issues of the Seowon through a council. Thereafter, Oksan Seowon convened a council to carry out debt adjustment to drastically reduce the burden of interests by replacing the existing high-interest loans with low-interest loans from Chosun Trust Company. In addition, on this opportunity, the Oksan Seowon tried to manage the head family's property, but it was not successful due to the head family's refusal. Along with the settlement of the debts of the Oksan Seowon, the Seowon's property was entrusted to the Chosun Trust Company. It was the result of satisfying the interest of Oksan Seowon which was trying to solve various problems through the policy goal of wartime agricultural administration of increasing rice production during the war period and consigned administration. At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Oksan Seowon tried to overcome the difficult situation and promote the survival of the Seowon through a series of system re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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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다빈 ( Bae Dabin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7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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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서원 문화의 본원(本源)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서원 문화는 당대(唐代)로부터 오랜 기간 변화를 겪으며 발전과 확장을 거듭해왔다. 그 발전의 배후에는 민(民), 관(官)으로 구분되는 운영 주체의 상호 협력과 유(儒), 불(佛), 도(道)의 긴장 및 융합, 그리고 유가 학술 사조의 변천이라는 다양한 요소 및 역사적 사건들이 변화 기제로 작용하였다. 본고는 중국의 여러 지역 가운데 전통 서원 문화 완비의 중심지이자 송명(宋明) 신유학과 함께 발전한 강서(江西)지역의 주요 서원에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각 서원 제향 인물의 변천 양상을 확인, 상호 비교해봄으로써 강서지역의 사상적 특징과 지역성을 고찰해본다. 강서지역 서원 문화의 대표성과 지역성은 중국 서원 문화의 개방성과 다양성, 그리고 선진 유학, 정주이학 및 양명학이라는 다양한 유가 사상의 역사적 지층(地層)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Chinese confucian academy, which can be said to be the origin of East Asian Confucian academy culture, has undergone long-term changes since Tang dynasty and has continued to develop and expand. Behind its development were various factors and historical events, such as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the private and government agencies as the founders, tension and convergence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In this paper, among many regions in China, attention is paid to major Confucian academies in Jiang-xi, which are the center of the completion of the traditional Confucian academy culture and share the development and history of Confucianism. Among them, the ideological characteristics and locality of Confucian Academy in Jiang-xi area are examined by confirming and comparing the changes of figures in the ancestral rites of each Confucian academy. The representation and locality of the Confucian academy culture in the Jiang-xi region embodies the openness and diversity of the Confucian academy culture in China, as well as the ideological strata of Pre-Qin Confucianism, Cheng- Zhu Li xue, and Yang Ming X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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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劉明明 ( Liu Ming Ming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9-33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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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淸河南府和开封府書院在明淸河南書院發展史中占有重要地位, 具有代表性. 明淸河南府和开封府書院数量大, 名書院众多, 祭祀内容详实. 祭祀是書院的重要活动, 河南府和开封府書院祭祀对象包含孔孟、程朱、地方名宦、文昌帝君、奎星等. 二府書院具有祭祀规章详密, 祭祀仪式制度化等特点. 書院祭祀活动的开展, 需要坚实的祭祀经费支持, 其中學田收入对祭祀活动影响较大. 二府地方官员也积极通过捐资等方式支持書院祭祀活动. 二府書院祭祀不仅敎化生徒进德修业和表达对地方名宦支持書院祭祀活动的感激之淸, 而且积极传承儒家道统和服务于地方治理, 实现道统对治统的促进作用. 河南府和开封府是明淸河南省重要的府级单位, 当时河南省较多有代表性的書院均位于二府, 通过探析二府書院祭祀活动的情形, 更好地揭示了明淸河南書院的祭祀情况.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in Ming and Qing Dynasties played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development history of Henan Province Academies in Ming and Qing Dynasties.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had a large number of famous academies and detailed sacrificial contents. Sacrifice is an important activity of academies. The sacrificial objects of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included Confucius and Mencius, Cheng Hao, Cheng Yi, Zhu Xi, Local famous officials, Wenchang, Kui star and so on. The academies of two prefectures had the characteristics of detailed and dense sacrificial rules and institutionalization of sacrificial ceremony. The development of academy sacrificial activities needed solid support of sacrificial funds, among which the income of school fields had a great impact on the sacrificial activities. local officials in the two prefectures also actively supported the academy sacrificial activities through donations. The academies of two prefectures sacrifice activities not only educated students to study morality and expressed their gratitude to the local officials to support the academy sacrifice activities, but also actively inherited the Confucian tradition and served the local governance, and realized the promoting role of the Confucian tradition on the governance.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were important prefectural units in Henan Province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At that time, many representative academies in Henan Province were located in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By analyzing the sacrificial activities of Henan Prefecture and Kaifeng Prefecture, the sacrificial contents of Henan Province Academies in Ming and Qing Dynasties were better revealed.

KCI등재

저자 : 이우진 ( Woojin Lee )

발행기관 : 한국서원학회 간행물 : 한국서원학보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3-37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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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_하와일록_이라는 유학자의 성장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양반 가의 젊은 유학자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그 성장일기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는 내용이 '죽음'이라는 사실에 집중하였다. 류의목은 성장하면서 조선을 강타한 전염병에 따른 수많은 이들의 사망을 목도하였으며,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친과 사별해야 했다. 류의목의 이러한 경험은 '트라우마(Trauma)'가 될 수도 있었는데도, 그는 건강한 유학자로 성장하였다. 이 글은 류의목이 그토록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했다.
먼저, 류의목이 '죽음의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은 문화'에서 성장했음을 밝혀냈다. 우리의 현 시대가 '죽음이 금지되고 추방된 시대'라면 류의목의 시대는 '죽음이 친숙하게 살아있는 시대'였다. 그의 시대는 어린이들과도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어린이도 죽음과 관련된 의례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죽음의 의례와 의미에 대해서도 학습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유가의 사생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유가는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올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였기에, 죽음과 사후 세계의 문제보다는 지금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요청하였다. 즉 이 차안(此岸)의 현실에서 '인간의 길[人道]'을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유가적 사생관을 학습한 류의목은 아버지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마주했음에도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이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유학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가의 상례와 애도과업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유가의 상례(喪禮)는 상실의 상황에서 유족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제공해주는 장치였다. 바로 상례의 주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애도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었다. 류의목은 아버지의 상례를 통해 애도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유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This paper attempts to examine the growth diary of a youth named 'Hawa Illok' and to analyze how a young Confucian scholar of a noble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I concentrated on the fact that 'death' is at the center of that growth diary. While growing up, Ryu-Uimok witnessed many deaths of thousands of people due to the epidemic and he even lost his father at the age of 15. Although Ryu's these experience could be 'trauma', he grew up as a very healthy Confucian scholar. I tried to explore the factors that made Rye grow healthy.
First, I looked at the chrono-cultural context in which Ryu grew up. He grew up in culture where “death is not dead.” As a result, he had conversations about death from an early age, and was even able to participate in death-related ceremonies. In this process, he learned about the meaning of lfe and death as well. Second, I examined the Confucianism's view on life and death. Confucianism understood that death is a natural phenomenon that can come to humans at any time, and they urged people to do their best in the present reality of life rather than dwell on the problems of death and the afterlife. Finally, I compared Confucian funeral rites with tasks of mourning. haiku with the lamentation section. Thus, it was confirmed that Confucian funeral rites are institutional devices that provides comfort and healing to the berea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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