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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2)~30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57
가라문화
30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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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담정 김려의 진해현 유배기 문학 현장 연구

저자 : 노성미 ( Noh Seong Mi )

발행기관 :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가라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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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정 김려는 조선 후기 패사소품 문장으로 주목받았으며 그의 독특한 문체는 한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는 1801년 4월에서 1806년 10월까지 경상도 진해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치유하고 정신적 피폐함을 회복하였으며 부령과 진해에서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진해현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우해이어보」와 유배지의 연가(戀歌) 「사유악부」, 바다 사람들의 삶을 읊은 '우산잡곡', 유배 생활을 마치고 엮은 「의당별고」, 「귀현관시초」등이 탄생한 문학 현장이다.
김려는 부령 유배지에서 겪은 고문과 절망감으로 인해 생긴 울화병을 진해 유배지에서 스스로 치유해 나갔다. 배소의 창을 '생각하는 창'이라 이름하고 부령의 연인 연희와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을 시로 그려냈다. 또 어촌 주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삶의 현장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물고기의 생태와 어로작업, 조리법 등을 기록하였고 그것을 시로 표현했다. 그는 유배지에 놓인 자신의 시간 속에 온전히 몰입하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또 유배객의 처지에 함몰되지 않고 지역의 서사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선비들과 교유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휴양의 시기에도 여항산 의림사에 들어가 스님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논했다. 그의 유배지 작품에는 진해현의 인문과 지리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연구는 김려의 진해 유배기 문학에 등장하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고증한 것이다. 이로써 시의 의미와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를 더욱 깊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학자의 시선이 그려낸 진해현의 자연과 사람, 풍속은 바로 그의 창작 현장이었고 문학의 소재였다. 이로써 그의 문학유산은 문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Damjeong Kim Ryeo drew attention as paesasopum literary styl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his unique literary style occupies a unique posi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He lived in exile in Jinhae-hyeon, Gyeongsang-do from April 1801 to October 1806. There he recovered his ailing body and mind, and ended his ten years of exile. Jinhae-hyeon is the literary field of Kim Ryeo, where first Korean fishbook 'Uhaeieobo', exile's love song 'Sayuakbu' and 'Usanjabgok', and songs about the lives of the sea people 'Gwihyeongwansicho' were written.
Kim Ryeo healed himself from the pent-up anger caused by the torture and despair he suffered in a place of exile, Buryeong. He named window in a place of exile 'thinking window' and wrote poems about Yeon Hee, the lover in Buryeong, and the people he remembered. He also recorded the ecology, fishing operations, and recipes of fish through his affectionate gaze on the lives of the fishing village residents and exploration of the real life, and expressed them in poetry. He accepted his plight of being thrown into his exile. Nevertheless, he did not fall into the exile's plight, and had fellowship with local scholars and monks. He captured the life of Jinhae beach as it was in the poem. For this reason, humanities and geography of Jinhae-hyeon are abundantly reflected in his exile literature.
This study examines Kim Ryeo's life during his exile in Jinhae, and researches the places that appear in his literature in detail. In this way, it was possible to understand more deeply and clearly not only Kim Ryeo's literary tendencies and themes of his works, but also his attitude toward life. The nature, people, and customs of Jinhae-hyeon drawn from the eyes of a practical scholar were the fields of his creation and the subject of literature. Hereby his literary heritage should be highly valued in terms of cultural history.

2<불굴가(不屈歌)> 연구 현황과 시사적 의의

저자 : 변종현 ( Byun Jong Hyun )

발행기관 :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가라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6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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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불굴가>에 대한 기존 논의를 살펴보고, <불굴가> 관련 자료를 검토한 뒤, <불굴가>의 시사적 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황패강의 <불굴가> 논문 발표 이후에 강전섭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었으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대은의 <불굴가>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문헌 기록이 후손들의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전하기는 하나, 전해지는 기록을 소중하게 여겨 <단심가>와 더불어 고려말 충절을 드러낸 장시조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굴가>는 최초의 기록된 문헌이 1800년(정조 24)에 간행된 『경신보』잡록에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하여가>, <단심가>, <불굴가>를 다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1617년(광해군 9) 심광세의『해동악부』에는 <하여가>와 <단심가>만 기록되어 있다. 포은이 순절 후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심광세가『해동악부』에 이방원과 정몽주가 시조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었다고 기록하였고, 다시 200여 년 뒤에『경신보』에 대은의 <불굴가>가 덧붙여진 채로 수록되어 있다.『경신보』에서는 성종 때 대은의 5세손 변희리의 <전가록>을 보고 기록했다고 하나 현재 <전가록>은 전하고 있지 않다. 만약 <전가록>이 나타난다면 대은과 포은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기 때문에 세 시조 작품의 창작 배경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시조들은 시조집에 전하는 대로 작자를 인정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시조는 오래전부터 사대부 계층이나 기녀들에게 불려지다가 악부시집이나 시조집에 수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악부시집이나 시조 편찬자들은 구비전승되어 오던 시조의 작자를 수록하면서 오류를 범할 수 있고, 과거 역사에서 흥미 있는 이야기나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재구성하여 수록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김저 사건은 고문을 통해 조작된 것이지만, 김저를 고문한 행위는 <불굴가> 형성 과정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변안열을 고문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변안열도 김저가 당했던 가혹한 고문 못지않게 가혹한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불굴가>로 표현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대은의 <불굴가>와 포은의 <단심가>는 두 작품의 작가로 두 사람이 인정된다고 여겨지나,『해동악부』에 수록된 내용이나『경신보』에 수록된 내용은 좀 더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대은의 <불굴가>는 비록 한역되어 전하기는 하지만 장시조 형태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불굴가>는 문학사에서 장시조의 효시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포은의 <단심가>와 함께 문무충절가(文武忠節歌)의 대표적인 시조로 문학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 <단심가>는 짧은 노래(단시조)로 충절을 드러내었다면, <불굴가>는 긴 노래(장시조)로 충절을 드러낸 시조라는 것이다. 앞으로 <불굴가>에 대한 연구는 최초의 기록이 실려 있다고 언급된 <전가록>을 발굴하고, 관련 문헌들을 더 찾아내어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더 보완하여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This paper looked at the existing discussion of "Boolgulga(不屈歌)", reviewed the data related to Boolgulga, and examined the current status of "Invincible". After Hwang Pae-gang's thesis on Boolgulga, Kang Jeon-seop raised a counterargument, but it can be seen that academia generally recognizes Dae-eun's Boolgulga" Although the records of the literature are recorded in the Sebo of the descendants, it can be seen that the transmitted records are valued and recognized as Jang Sijo(長時調). who revealed loyalty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Boolgulga is published in 1800 (the 24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in the first recorded literature of the book, Gyeongsinbo(庚申譜). More than 200 years after Poeun's death, Shim Kwang-se recorded that Yi Bang-won and Jeong Mong-ju revealed their intention as a poet in the Haedongakbu(海東樂府), and again, more than 200 years later, Eun's Boolgulga was added to Gyeongsinbo. According to the Gyeongsinbo, it was recorded after seeing the Jeon Ga-rok(傳家錄) of Byun Hee-ri, the fifth-generation descendant of Dae-eun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but the Jeon Ga-rok is not currently reported. If The Record of Jeon Ga-rok appears, it is the oldest record of the creation of the three sijo works because it is a record more than a hundred years after the death of Dae-eun and Po-eun. There are many works in which the author cannot be recognized as they are told in the collection of poems. Sijo has long been sung by the nobility and gisaengs, and has been included in Akbu poetry and sijo books. In this process, it is believed that the writers of Akbu poems and sijo compilers may make errors by containing the author of the old poem and reconstructing interesting stories and stories from past history. Dae-eun's Boolgulgal is believed to be a song sung by Byun An-yeol, who was involved in the Kimjeo incident, while being severely tortured. Dae-eun's Boolgulga and Po-eun's Dansimga(丹心歌) are considered to be recognized as two authors, but the contents contained in the Hae-dongakbu shinbo are considered to require empirical research based on more data. Dae-eun's Boolgulga has a significant value in its existence alone, as it is said to be in the form of Jang Shi-jo it is translated into Korean. Boolgulga is mentioned as a work of the filial piety of Jang Sijo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has established itself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s a representative poet of Moon Moo-chungjeolga(文武忠節歌) along with Po-eun's Dansimga showed loyalty with a short song, Boolgulga is a poem that reveals loyalty with a long song. In the future, the research on Boolgulga remains to be explored, found more related literature, and supplemented further through empirical data, which is mentioned as the first record.

3마산의 상남동에서 발전한 근대 종교의 양상 - 호주선교사회의 기독교와 중국의 일관도 -

저자 : 유장근 ( Yu Jang Keun )

발행기관 :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가라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5-115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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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마산의 상남동에서 20세기에 발전한 근대의 외래 종교 두 종류를 분석하였다. 하나는 대한제국기에 호주선교사회를 통해 들어온 개신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8.15 해방 뒤에 중국에서 들어온 일관도이다. 개신교는 오랜 전통의 종교임에 비해 일관도는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중국에서 발전한 신흥 종교이다.
이들 종교는 모두 전통적으로 종교성이 강한 상남동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제비산 일대는 무학산의 줄기로서 신성이 강한 데다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주변으로 맑은 하천이 흘러 종교시설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상남동은 마산중심부의 외곽에 위치해 있어서 포교할 대상이 많았고, 또 넓은 터가 있어서 필요한 시설을 세우는데 큰 장애가 없었다. 이 중 호주선교사회는 선교본부 뿐만 아니라 문창교회,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의신유치원 등을 세워 이곳을 종교단지처럼 활용하였다.
호주선교본부의 개신교와 일관도는 모두 절대신에 의한 창조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타락, 최종적으로 절대신에 의한 구원이라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무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곧 이러한 구원 프로그램에 의해 공통의 공간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들을 상남동이라는 공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This paper analyzed two types of modern foreign religions developed in the 20th century in Sangnam-dong, Masan. One is Protestantism that came through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ary society during the Korean Empire, and the other is Yiguandao(一貫道) that came from China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Protestantism is a religion with a long tradition, but unlike that, Yiguandao is emerging religion that developed in China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All of these religions have been established in Sangnam-dong, which is traditionally religious. In particular, the area of Jebisan Mountain was a stem of Muhaksan Mountain, and it was perfect for religious facilities to be built with strong divinity, a panoramic view of the sea, and a clear river flowing around it. In addition, Sangnam-dong was located on the outskirts of the center of Masan, so there were many targets for missionary work, and there was no major obstacle to building the necessary facilities due to its large site. Among them,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ary society established not only the mission headquarters, but also the Munchang Church, Changsin School, Uishin Girls' School, and Uishin Kindergarten, and used it as a religious complex.
Both Protestantism and Yiguandao developed a program called creation by absolute God, corruption by human desire, and finally salvation by absolute God. Shamanism was no different from this. In other words, this relief program laid the foundation for recognizing and coexisting each other in a common space. I think these factors gave them an important meaning in the space of Sangnam-dong.

4조선후기 <의림사 도형>과 김려의 장소시(場所詩)

저자 : 한정호 ( Han Jeong Ho )

발행기관 :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가라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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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후기 의림사(義林寺)의 장소성 고찰과 김려(金鑢, 1766-1821)의 장소시를 대상으로 창원(마산) 귀양살이, 특히 의림사 요양 체험과 시적 형상화에 대해 고찰했다. 이에 글쓴이는 조선후기 제작된 <의림사 도형(義林寺圖形)>을 통해 의림사의 면모를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런 다음 김려의 의림사 장소시를 중심으로 당시의 요양 체험과 장소 형상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에 있는 의림사의 창건설과 사찰명 변경에 대해 짚어보았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 또는 위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의림사의 사명(寺名)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림사 창건 주체와 사명 변경의 시기 등이 확실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선후기에 제작된 채색지도 필사본인 <의림사 도형>은 의림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단서였다. 이를테면 조선후기 쇠락의 길에 접어든 의림사였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당우 시설을 두루 갖춘 대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김려의 창원 귀양살이 행적 가운데 2년 6개월가량 머물렀을 것으로 사료되는 의림사에서의 요양 체험과 장소감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문집 『의당별고』에 수록되어 있는 의림사 관련 장소시를 대상으로 요양 체험과 장소 형상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장소시에 따르면, 김려는 '여항산 남쪽 기슭에 새로 띠집을 짓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고, '여항산 북쪽 기슭에 들어 육행자의 토실'에 머물기도 했다. 그리고 의림사 '종수좌의 서엄장실'과 '헌수좌의 노자암 감실'을 찾아가 친분을 쌓기도 했다. 또한 '의림사 위 석굴에 보조국 사상'을 보았고, 국사봉에 올라 '보조선사가 하늘에 예를 올리던 신단'을 찾아가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김려는 창원 귀양살이 도중에 의림사에 머물며 그곳의 스님·행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인근의 주요 장소들을 탐방했던 것이다.


This paper discussed the placeness of Uyrimsa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exile of Changwon(Masan) in Kim Ryeo's place poems, especially the experience of Uyrimsa care and poetic formation. I examined the aspect of U in detail through 'Uyrimsa figure' produc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n examined the experience of nursing care and the shape of place of Kim Ryeo, focusing on Uyrimsa place poems.
First, I examined the Uyrimsa's change of the name of the temple in Ingok-ri, Jinbuk-myeon, MasanHappo-gu, Changwon-si, Gyeongsangnam-do. There were theories that Monk Uisang or Monk Wiwoong of the Unified Silla period was founded, and that the Monk Jinul of the Goryeo Dynasty was founded, and that Uyrimsa's temple name was used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addition, the manuscript of the color map produc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Uyrimsa figure' was a valuable clue to know the arrangement and size of Uyrimsa.
Next, I became interested in the experience of medical care and the sense of place in Uyrimsa, which is thought to have stayed for about 2 years and 6 months among Kim Ryeo's exile in Changwon. So I examined the Uyrimsa related place poetry in Kim Ryeo's literary book Uydangbyulgo, and examined the experience of Uyrimsa medical treatment at the time. According to these places, Kim Ryeo built a new band at the southern foot of Yeohangsan, and he joined the monks or ascetic of the Buddhist temple, and visited the main places nearby.
In the future, the community should be able to use it as storytelling or cultural contents by turning attention not only to the first fish book of Korea, Woohaerieobo but also to Kim Ryeo's exile and place literature. In addition, I hope that you will pay special attention to cultural assets including millennium temple Uyri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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