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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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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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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2)~28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242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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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근대 초 네덜란드의 해부학 극장 연구

저자 : 김소희 ( Kim So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3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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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해부학 극장을 근대 초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일종의 대중 매체로 보고 그 형성과 사회적 기능을 고찰함으로써 해부학 극장의 대중 미디어적 실상을 복원 및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연구는 해부학 극장의 참여자들을 분명하게 드러낸 그룹 초상화 작품들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룹 초상화 중 외과 의사들의 그룹 초상화의 배경이 해부학 극장이라는 사실은 당대 해부학 극장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룹 초상화에 재현된 등장인물들의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소란스러웠던 당대 해부학 극장의 실제 모습과 매우 다르다. 본 연구는 해부학 초상화를 과학 정신의 표상으로 해석한 기존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해부학 극장의 사회적 기원과 발전 과정 및 해부학 극장에 대한 당대 대중의 수용 양상들을 간과할 수 있다고 파악한다.
해부학 극장의 대중성 및 관객성과 관련하여 본 연구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자 하는 점은 해부학 극장 및 그와 유사한 전시와 퍼포먼스를 소비했던 대중들의 정서와 반응 양식이다. 본 논문은 당대 해부학 극장의 대중적 기능을 다음의 세 가지로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해부학 극장은 해부가 시연되고 강의가 진행되는 실험과 교육의 장을 넘어 수집과 전시를 통해 오늘날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 둘째, 해부학 극장은 해부 시연이 필연적으로 연상시키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통해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대중들의 회심(回心)을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해부학 극장은 해부학 강연과 시연의 퍼포먼스를 통해 대중들의 카니발적 욕망을 분출시키는 축제의 장으로 기능했다.


This study examines the anatomy theater of the early-modern Netherlands as popular media, focusing on how it mediated medical science with a public taste for a spectacle. This study examines group portraits that present the physicians engaged in the performance of the anatomy theater. The group portraits suggest the anatomy theater's widespread appeal in that the subjects, the physicians, chose to be represented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anatomy theater. However, the solemn and grave atmosphere they embody in the group portraits is unfaithful to the reality of the anatomy theater where people of all social standings had a clamorous gathering. While acknowledging that the group portraits manifest scientific spirit underlying the anatomy theater, this study argues that this traditional view risks overlooking how the anatomy theater originated in the social context and how the general public responded to it.
This study attempts to restore the spectatorship that anatomy theaters would have evoked by examining how citizens consumed anatomy theaters as well as exhibitions and performances of similar kinds. Three conclusions are drawn from this analysis: first, not only did the anatomy theater function as an educational arena where scientific experiments and lectures were provided, but it also formed collections and organized exhibitions, prefiguring today's museums; second, the anatomy theater prompted spectators to reflect on the meanings of life and death, guiding them to religious repentance; third, the anatomy theater satisfied the participants' cannibalistic desire as it was often an occasion for a great fes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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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리버티의 이중 정체성과 차별화 전략: 제국주의/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런던 백화점

저자 : 류지이 ( Ryu Jiyi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61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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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위치한 리버티(Liberty)백화점은 1875년 5월 15일 '동인도하우스(East India House)'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이래 상품, 디자인, 건축 요소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초창기 리버티가 이국적인 상품들을 판매하는 오리엔트 아트샵으로 명성을 얻었다면, 오늘날에는 1924년에 완공된 튜더 양식의 목조 건물이 역사와 전통, 문화유산의 이름으로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본 논문은 19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리버티백화점이 자기정체성을 구축해 온 방식을 시공간적 변이 속에서 살펴본 글이다. 리버티백화점은 물건을 수입·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점차 사업을 확장하여 자체 공방에서 상품을 제작하는 전략을 통해 '리버티'라는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본 논문은 19세기 유미주의운동(Aesthetic Movement)의 주축이 되었던 '아트샵'으로서의 정체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하여, 리버티백화점이 '디자인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역사화하고 다양한 전시를 통해 일반적인 상업 공간을 넘어 백화점과 디자인 미술관 사이에 자리매김했음을 밝힌 것이다. 본 연구는 선행 연구들과 달리 리버티백화점을 제국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리버티백화점은 가장 '잉글랜드적(English)'인 과거, 즉 튜더 양식을 통해 리버티 브랜드의 문화적 순수성과 대표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안에 진열된 다양한 문화권의 상품과 디자인을 통해 영제국(British Empire)이 담고 있던 '혼종성'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리버티의 이중적 정체성은 21세기에도 유지되고 있다.


Liberty & Co., which opened to the public on 15 May 1875 under the name East India House, differentiated its identity and brand image from competitors in terms of goods, design, and architecture. Liberty once enticed customers into the Orient art shop, but nowadays the shop attracts people into its Tudor building in the name of history, tradition, and heritage. This study discusses spatio-temporal variations in the positioning of the shop by tracing how Liberty built its own identity from the nine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day. Liberty's aesthetic ideal as a tastemaker led the company to its dual mission as an artistic retailer and art manufacturer. Liberty's self-awareness places it on the boundary between being a shop and a museum by writing a biography of the company and visualizing its self-identity in the form of exhibitions. This article contextualizes Liberty's position in a wider global framework, particularly in colonial and postcolonial contexts, and defines Liberty as the epitome of a dual identity. It then demonstrates how such a sense of duality plays an important role, even in the twenty-first century, in featuring Englishness and imperial 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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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보 〈송시열 초상〉의 이상화 양상

저자 : 강관식 ( Kang Kwanshi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2-113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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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39호 〈송시열 초상〉은 문제적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제작 시기에 대한 편년이 연구자마다 달라 17세기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고 18세기 초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는 등 편차가 커 혼란이 심한 편이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 1607-1689) 45세 때인 1651년에 화양서옥(華陽書屋)에서 썼다고 하는 화면 오른쪽 상단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1778년 3월에 송시열의 영정에 치제하며 썼다는 화면 상부의 어제(御製) 절구(絶句)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탁하여 써넣은 것이다. 왜냐하면 화양서옥은 송시열이 60세 때인 1666년에 세워져 1651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가 화상자경을 쓴 것은 77세 때인 1683년에 한 시각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1778년 3월에 썼다는 어제 절구는 본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1707년 7월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영정에 치제할 때 쓴 것이나 훗날 송시열 추숭 사업을 가장 많이 벌인 정조의 어제로 와전되어 이와 같이 써 넣은 것이다. 가탁의 시점으로 설정된 1778년은 정조가 송시열을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묘정에 배향한 해이고, 3월은 명 의종(毅宗, 재위 1628-1644)의 기일인 3월 19일에 만동묘에 제향할때 부근의 화양서옥이나 화양서원에 봉안된 송시열의 영정에도 같이 제향했던 의미 있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선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 국보 〈송시열 초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사실적 모습을 전해 주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송시열 초상과 비교할 때 용모가 많이 다르며 이상적인 귀인의 상으로 고쳐 그려진 것이다. 또한 심의와 복건의 도상이나 화법도 17세기의 평면적이고 고졸한 조형에서부터 18세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조형은 물론 19세기 초의 다소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의고적 조형까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적 현상과 특수한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18세기 중·후반 이후 송시열에 대한 추모와 숭배 의식이 고조되며 송시열의 초상을 의도적으로 이상화시켜 이모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상화 현상은 문자와 이미지의 양면에 걸쳐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국보 〈송시열 초상〉의 가장 고유하고 핵심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This essay discusses how Portrait of Song Siyeol, now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henceforth referred to as National Treasure No. 239), idealized Song Siyeol (1607-1689) through two methods: text and image.
Two texts written on the painting, Song's own inscription and a poem by King Jeongjo (r. 1776-1800), were borrowed from other paintings to legitimate National Treasure No. 239 and eventually Song himself, the subject of the painting. According to the painting's accompanying text, Song's inscription, a hwasang jagyeong (self-admonishing portrait inscription), was composed by Song himself at the Hwayang Pavilion in 1651. The Hwayang Pavilion, however, did not exist in 1651; Song's hwasang jagyeong was therefore most likely written much later, in 1683 when Song had an opportunity to view another portrait of his by the renowned court painter Han Sigak (1620-after 1690). Moreover, the poem attributed to King Jeongjo was originally penned by King Sukjong (r. 1674-1720) as an inscription for a portrait of Jeong Mongju (1338-1392). The painting disguised this poem as written by Jeongjo in 1778 when he enshrined Song Siyeol into the king Hyojong's (r. 1619-1659) room in Jongmyo (Royal Confucian Shrine). The decision to incorporate these texts reflects the high esteem that Song was accorded during the reign of Jeongjo and represents one method of idealization at work in the painting.
The image of Song depicted in National Treasure No. 239 also aims to idealize Song Siyeol through the use of specifically codified imagery. The physiognomy found in this painting, depicting Song as an ideal nobleman, is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ore realistic portrayal of Song that is found in his earliest portraits, which date from the late seventeenth to the early eighteenth centuries. The iconography of, and drawing techniques for, Song's sim'ui bokgeon (formal Confucian dresses) also adopt abstract and conceptual styles that do not belong to any period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National Treasure No. 239's idealization of Song through the synthesis of diverse iconographies and drawing techniques taken from several periods has resulted in the coexistence of heterogeneous styles within a single painting: from the flat and unadorned style of the seventeenth century, to the realistic and graphic sty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o even the ideological and archaistic style of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deployment of these dual methods of idealization in National Treasure No. 239 is the result of a sharp rise in enthusiasm toward commemorating and venerating Song Siyeol after the mid-to-late eighteenth century. Consequently, painters of the late Joseon dynasty began deliberately idealizing him in their works. National Treasure No. 239 is a noteworthy example of just such an act of idealization, one realized via the dual methods of text an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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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국 가요(哥窯) 자기에 대한 조선의 인식과 시각화

저자 : 장남원 ( Jang Namw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4-143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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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요(哥窯) 자기는 송대(宋代) 절강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일대에서 제작된 청자의 일종으로 얇고 짙은 태토에 유약을 두텁게 입혀 전면에 강한 빙렬(氷裂)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본고에서는 송대 이후 중국과 조선, 일본 등지에서 관심을 받았던 가요 자기를 중심으로 조선에서의 수용 과정을 통해 그 의미와 시각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가요 자기는 17세기에 명(明)으로 사행(使行)을 다녀온 허균(許筠, 1569-1618)의 문집에 화기(花器)의 사례로서 일찍이 나타난다. 18세기 이후에는 연행(燕行)을 다녀온 실학파들을 통해 가요 자기에 대한 경험담이나 실물의 소장과 감상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후기 문방청완(文房淸琓)의 풍조 속에서 도자기, 방고동기(倣古銅器) 등은 각종 문방 용품이나 장식품, 화분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현전하는 실물보다는 오히려 도자기의 문양이나 문방책가도(文房冊架圖) 및 기명도(器皿圖) 등 장식화(裝飾畵)에 포함되어 전하는 것이 가장 많다. 동체(胴體)의 빙렬(氷裂)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가요의 속성이 직관적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이 명요(名窯)임에 공감할 수 있었으며,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가요 자기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도자, 품격 있는 소장품, 탈속한 선비의 소유물 등으로 인식된 것이다.
조선에서 가요 자기는 장식화 등을 통해 그 이미지가 확산되었는데, 본래 가요 자기가 지닌 유색이나 조형의 실체보다는 짙은 녹색, 청색, 빨강, 분홍과 같은 다채로운 색의 도자기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빙렬문은 강조되었다. 문인의 청아한 심성과 탈속적 기개는 얼음장이 갈라진 것 같은 결기(結己) 있는 무늬와 서로 상응하였다. 나아가 가요와 비슷했던 송대 관요(官窯)에 대한 선망과 이미지마저 호환되면서, 수백 년을 거쳐 중국에서 조선으로 온 가요 자기는 이미지를 통해 청완과 길상의 상징이자 문인의 이상적 서재의 중요한 시각적 키워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Ge ware (哥窯) is a made in the Longquan Kiln site of Zhejiang Province during the Song dynasty (960-1279). The glaze is thickly applied to a piece made of thin and dense clay soil, and it is characterized by the formation of numerous lines that look like cracked ice on the entire surface. In this paper, the acceptance process and visualization of Ge ware ceramics during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ere examined with a focus on how they gained popularity in China, Korea, and Japan. In the 17th century, Ge ware was mentioned as an example of a flower pot in the collection of works of Heo Gyun (1569-1618), who visited the Ming dynasty as an envoy. After the 18th century, through the silhak (practical learning) scholars who visited Beijing as envoys, it led to stories of their experience of looking at Ge ware ceramics as well as the collection and appreciation of real objects. And in the trend of pure enjoyment of scholars' accoutrem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Ge ware imitation ceramics and antique products were diversified into various stationery items, ornaments, and flowerpots.
However, in the Joseon period, Ge ware is visually represented in ceramic patterns and decorative paintings such as chaekgeori (scholars' accoutrements) screens. Since the characteristics of Ge ware could be intuitively revealed just by depicting ice patterns on the surface of the ceramics, anyone could know that it was a famous Ge ware piece. So, from the royal family to wealthy merchants and commoners, the value of Ge ware was shared through various media. It was recognized as an antique ceramics, a priceless item in a precious collection, and a part of the belongings of a scholar. In Joseon, the image of Ge ware was spread through decorative paintings rather than the original colored or figurative substance. Ge wares were represented as colorful ceramics decorated in dark green, blue, red, and pink. However, the ice crack pattern was still emphasized. The pure spirit and refined taste of a high-minded scholar overlapped with the textured pattern that looked like a cracked ice sheet. Furthermore, Ge ware pieces and official wares of the Song dynasty produced in imperially-sponsored kilns were compatible through their images. Ge ware, which came to Joseon Korea, is not only a symbol of integrity and auspiciousness through its image, but also has become an important visual keyword in the ideal library of a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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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경성의 결절점: 식민지 시기 조선은행 앞 광장에 대한 연구

저자 : 성효진 ( Sung Hy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4-171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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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은행(朝鮮銀行) 앞의 광장과 그 일대가 경성(京城)의 도시 이미지와 맺고 있는 관계를 논의하려는 시도이다. 조선은행 앞의 광장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지점에 있다. 조선은행 앞의 광장은 한성(漢城)이 경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교통의 중심지이자 문명의 통로였다. 미츠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이 지어져 광장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된 1930년대의 조선은행 일대는 경성을 대표하는 시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 중점을 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조선은행 앞의 광장과 그 일대는 이른 시기부터 도로가 정비된 이후 문명 시설이 갖추어졌다. 둘째, 당대인들이 조선은행 앞 광장에 대하여 가진 복합적인 감정은 경성의 도시 이미지 형성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당대인들은 조선은행 앞의 광장에서 극대화된 문명과 그로 인한 소외 모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의 초점은 조선은행 앞의 광장이 이상과 현실이 중첩된 장소로서 경성의 도시 이미지의 한 단면임을 살피는 데에 있다.
조선은행과 남대문통(南大門通)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은행 앞의 광장은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부상한 지역이다. 조선은행 앞을 지나는 가장 중요한 도로인 남대문통은 이른 시기부터 정비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대문(南大門)에서 조선은행으로 이어진 도로는 경성의 도시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1912년 이전부터 그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는 세 가지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남대문통은 일본인 거주지인 본정(本町, 혼마치)으로 이어졌기에 일본인들은 남대문통 일대의 정비에 주력했다. 둘째, 본정에 있던 조선총독부는 남대문 일대를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셋째, 남대문에서 조선은행 일대를 지나 경성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문명의 통로로 만들어져야 했다. 이로 인해 남대문통이 지나는 조선은행 앞 광장은 점차 높은 건물, 반듯하고 넓은 도로, 밤에도 붉을 밝히는 전등 등으로 채워졌다.
1930년대에 들어 조선은행 앞 광장은 문명이 극대화된 번화가가 되었다. 이는 두 상황을 통해 비롯되었다. 첫째, 미츠코시백화점이 1930년대에 지어져 조선은행 앞 광장을 이루는 요소가 되었다. 당시 백화점, 특히 미츠코시백화점은 선망의 대상으로서 경성의 유행을 선도하며 도시문화를 이끌었다. 둘째, 조선은행 앞 광장이 번화가가 되자 교통난을 해결한 과정에서 그 일대는 다시 한번 정비되었다. 광장 가운데는 로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통행 방식이 바뀌었으며 분수대가 자리하며 작은 공원으로 꾸며졌다. 심지어는 지하도를 만드는 계획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행 앞 광장은 경성의 중앙시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인들의 조선은행 앞 광장에 대한 인식 및 반응은 한 방향으로만 귀결되지 않았다. 당대인들에게 조선은행 앞 광장은 근대 도시 경성으로 기대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문명의 그늘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은행 앞을 부유하는 부랑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 예이다. 인텔리와 룸펜의 경계에서 관찰자라고 불린 이들조차도 조선은행 일대를 배회하며 광장에 쉽게 발을 디디지 못했다. 이는 당대인들의 인식 및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경성의 도시 이미지에서 조선은행 앞 광장이 이상과 현실 사이를 매개하는 결절점(結節點)과 같은 지역임을 알려준다.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laza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and the city image of Gyeongseong (present-day Seoul). A plaza is an open space in the city and located at the center of urban culture. However, the plaza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is an unusual area. The plaza, a hub of transportation, was the passage of civilization which was formed during the transitional period from Hanyang (the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to Gyeongseong. In the 1930s, the Mitsukoshi Department Store was built and became a part of the plaza. As a result, the plaza was also considered to be the representative place of Gyeongseong. There are two main focuses in this study. Firstly, the plaza was a hub of transportation and came to be transformed into the center of urban culture. Secondly, people's various feelings about and perceptions of the plaza are linked to the formation of the city image of Gyeongseong. In the plaza, people could experience both civilization and alienation. Therefore, the main focus of the study is to examine that a fragment of the city image with the plaza is the node between ideal and reality.
The plaza, centering around the Bank of Joseon and Namdaemun-tong (the Southern Gate District), is an area that emerged during the transition from Hanseong (Hanyang) to Gyeongseong. Namdaemun-tong, the most important road passing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has been maintained since an early age. The road from Namdaemun to the Bank of Joseon was made before 1912, when the urban planning of Gyeongseong began. As the Bank of Joseon was built, the plaza already had a basic form. The main roads which were connected to the plaza were also repaired early. This is due to three situations. First, the Japanese focused on the maintenance of Namdaemuntong because it was connected to their residence. Second, the building for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Joseon was located on Namsan (South Mountain) and wanted to make the Namdaemun area a center. Third, the road from Namdaemun to the Bank of Joseon area had to be built as a path to civilization. The plaza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was filled with tall buildings, straight and wide roads, and street lights to illuminate at night, like the entrance to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In the 1930s, the plaza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had become a bustling downtown. There are two reasons. Firstly, the Mitsukoshi Department Store was built in the 1930s and became a part of the plaza in front of Joseon Bank. Department stores were the center of trendy urban culture. Secondly, the road was completely renovated in the process of resolving traffic difficulties around the plaza. A rotary was built and the city space changed. Above all, it should be focused on the fact that the plaza is the entrance to Gyeongseong and the central city.
The perception and reaction of the people of the time towards the plaza varied in its layers. In the postcards portraying the attractions of Gyeongseong, the plaza in front of the Bank of Joseon appeared as the central place of Gyeongseong. However, the plaza was both a symbol of modernized Gyeongseong and a place to reveal alienation. One of the examples is the appearance of the low-class people wandering around the square. This depicts the plaza in the city image of Gyeongseong as an area like a node that mediates between ideal and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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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기계, 우주, 전자: 1960년대 말 한국미술과 과학기술

저자 : 신정훈 ( Shin Ch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2-209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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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과학기술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을 확인하고 그 양상과 의미를 파악하는 목적을 갖는다. 아폴로 프로그램의 연이은 성공은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렸으며 컴퓨테이션,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이론 등을 통해 새로운 전자시대의 개막과 정보화 사회의 도래가 예견되었다. 동시에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도시화와 공업화가 착수되고 과학기술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과학기술진흥법의 수립과 함께 과학기술 관련 정보나 담론, 문학이 확산되는 '과학기술의 붐'이 있었다. 이렇게 국내·외 과학과 기술 발전의 새로운 국면에 대한 인식 내지 실감을 배경으로, 해외의 테크놀로지 지향의 미술에 관한 논의와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그 결과 한국미술계에는 '테크놀로지', '과학', '기술', '과학기술' 등의 표현이 빈번하게 통용되었다. 이 글은 1960년대 말 한국미술에서 과학기술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양상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전개에 있어서 주요한 담론적 장을 '기계', '우주', '전자'로 제시하고 관련 경향과 논의를 소개한 것이다. 아울러 이 논문은 60년대 말 이와 같은 전환에 이르는 한국미술의 전사(前史)를 상술하고 이후의 효과를 시사함으로써 20세기 한국미술과 과학기술이라는 보다 일반화된 문제에 놓인 쟁점을 파악하고자 한 글이다.


In the late 1960s Korean artists became invested in science and technology, incorporating machine aesthetics, industrial products and materials, mechanical devises for their art making and discussing the artistic ramifications of technological change in their writings. The importance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the late 1960s' artistic imagination, however, remains largely ignored in the existing literature, in which unconventional approaches of art fall under the neutral, overarching concept of 'experimental art.' This paper explores what can be called a 'science-technological turn' among Korean artists in the late 1960s, when an ever-growing public attention to science and technology was fueled by international news on the Apollo missions to the moon and the electronic environment of networks and computation as well as the anticipation of urbanization,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This paper provides three discursive points of reference―'machine,' 'space,' and 'electronics'―around which Korean artists' investment in science and technology came into play, seeking to understand the 'science-technological turn' within a long history of Korean art's relationship to science and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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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오칭(誤稱)된 그림 제목의 위력: 양해(梁楷) 필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 재고(再考)

저자 : 장진성 ( Chang Chin-su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0-231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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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토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양해(梁楷, 13세기 초에 활동)의 〈이백행음도(李白行吟圖)〉는 시를 읊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이백(李白, 701-762)을 감필체(減筆體)로 그린 작품이다. 〈이백행음도〉는 현존하는 양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이백행음도〉의 주제가 과연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다. 본래 〈이백행음도〉에는 그림 제목이 적혀 있지 않다. 중국의 회화 작품 대부분에는 제목이 쓰여 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개별 그림의 제목은 모두 후대에 편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백행음도〉도 마찬가지로 후대에 붙여진 그림 제목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이백을 주제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술을 마시고 있는 또는 술에 취한 이백을 그린 그림들이다. 이백을 주제로 한 그림의 화제(畵題) 중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시를 읊는 모습인 '취음(醉吟)', 즉 '이백취음(李白醉吟)'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백행음(李白行吟)'은 존재하지 않는다. 토쿄국립박물관에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15-1868)에 카노파(狩野派) 화가가 임모(臨摹)한 〈양해이백행음도모본(梁楷李白行吟圖模本)〉과 〈양해동방삭도모본(梁楷東方朔圖模本)〉이 소장되어 있다. 이 두 그림은 본래 대폭(對幅)으로 한 세트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동방삭(東方朔, 기원전 154-93)의 상대가 되는 인물은 이백이었을까? 동방삭과 이백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동방삭은 굴원(屈原, 대략 기원전 343년경-277년경)의 추종자였다. 그는 굴원과 마찬가지로 충직(忠直)한 관료로 서한(西漢)의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에게 조정의 시책에 대해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인물이다. 동방삭은 『초사(楚辭)』에 들어 있는 시인 「칠간(七諫)」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칠간」은 굴원의 『이소(離騷)』를 모델로 한 시이다. 굴원은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리는(行吟澤畔)' 인물로 그림과 판화에 주로 그려졌다. 따라서 〈이백행음도〉에 그려진 인물은 이백이라기보다는 굴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Li Bai Chanting a Poem by Liang Kai (active early 13th century) in the Tokyo National Museum is an imaginary portrait of the eminent poet Li Bai (701-706) walking with head raised and reciting. Simple and abbreviated brushwork is employed to portray the poet. The drawing is extremely simplified. Li Bai Chanting a Poem is his best known work. But, the identity of the figure in the painting has not yet been fully scrutinized. The painting has no original title. Thus, it is not clear whether the figure in the painting is Li Bai. The title of the painting was given later, most probably during the early twentieth century. Most of the extant paintings portraying Li Bai show him drinking wine or being heavily drunken. Li Bai Chanting a Poem and Dongfang Shuo, a set of two hanging scrolls, currently in the Tokyo National Museum, are Edo-period (1615-1868) close copies of the originals by Liang Kai. They are known to have been created by an unidentified painter of the Kano school.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Li Bai and Dongfang Shuo (154-93 BCE)? There is no clue to illuminating their relationship. Dongfang Shuo was an admirer of Qu Yuan (approximately 343 BCE-approximately 277 BCE), a Chinese poet and politician in the state of Chu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475-221 BCE). Passionately concerned with the fate of his state, he argued for an alliance with Qi. He was slandered by rivals and banished to the Miluo River region, where he wandered about in great distress of mind through mountains, plains, and marshes and finally drowned himself. Like Qu, Dongfang Shuo was an unsuccessful politician. He periodically offered admonitions to the emperor Wu (r. 141-87 BCE) of the Western Han dynasty. But they were never accepted. He is credited with a poem in the Chuci (Songs of Chu or Songs of the South) titled “Qijian (Seven Admonitions)” that is modeled on the long poem “Lisao (Encountering Sorrow)” by Qu Yuan. Qu is often depicted as a solitary man strolling by a marshy bank in paintings and woodblock prints.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figure in Li Bai Chanting a Poem is not Li Bai but Qu Y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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