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항도부산 update

  •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 : 사회과학분야  >  인문지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2093-1875
  • : 2713-8925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42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393
항도부산
42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통일초(統一初) 신라(新羅)-일본(日本) 교류와 '東萊斷層'路

저자 : 서영교 ( Seo¸ Young-kyo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6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물자 수취에 있어 수로 운반의 효율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신라는 울산항을 주로 이용했다. 하지만 대일교섭에 있어서는 부산항을 이용했다.
통일 후 구백제 지역은 그야말로 왕실ㆍ진골귀족ㆍ大寺刹의 재산이 집중된 곳이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면서 획득된 이 지역은 신라지배층들에게 재분배되었다. 그 곳에서 생산된 잉여물의 상당량은 서해→남해→동해를 통해 울산항에 하역되어 왕경으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남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들어서는 항로가 쉽지 않다고 해도 수도가 가까운 곳에 있는 울산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화물운송과는 달리 國書나 고가의 물품을 소지한 양국사절의 항해에는 안전이 우선시 되었고, 부산항이 이용되었다. 이유가 있었다. 첫째 對馬島가 일본의 출입국 창구였다. 다음으로 남쪽에서 東北北 방향으로 흐르는 동안난류의 방향 때문에 울산에서 對馬島로 향하는 항해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부산과 對馬島 사이의 항로는 안정적이었다. 조선 초 對馬島에 개방한 삼포(乃而浦[진해 熊川]ㆍ釜山浦[부산]ㆍ鹽浦[울산]) 가운데 倭船의 부산포 편중은 심각했다. 조선정부는 三浦分泊 준수를 對馬島에 강력히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對馬島와 부산 사이의 항로가 그만큼 접근성이 놓았던 것이다.
전성기 금관가야의 김해가 국제무역항이 아니라 외항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부산 다대포(多多羅)였다. 未斯欣 탈출 후 왜군이 신라의 양산을 공격하기 전 먼저 상륙한 蹈鞴(津)을 일본말로 읽으면 타타라(鐵)노츠(津)이고 그것은 多多羅와 음이 통한다. 그곳은 금관가야가 일본열도로 철을 수출하던 浦口였다. 김해의 금관가야도 부산에 외항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843년 對馬島 북쪽 해안을 지키던 일본 防人들이 저녁에 부산방향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목격했다. 그것은 남해안에서 동해안(울산)으로 북상하는 신라 배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한 烽火였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직후에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가 한창일 때 그 불빛은 對馬島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국의 활발한 교섭의 계기는 이러했다. 672년 羅唐戰爭이 한창이던 때 일본에서 내란(壬申亂)이 일어났다. 天智계가 밀려나고, 天武가 정권을 잡았다.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백제인들을 주변에 두고 있던 天智의 아들 大友皇子가 제거되었다. 등 뒤에 있는 일본열도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신라에게 도래했다. 그해 11월 신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天武의 신정권을 인정했다.
673년 5월 15일 天武의 즉위를 축하하는 신라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향했고, 675년 2月 新羅 文武王은 王子 忠元을 天武에게 파견하였다. 忠元은 4개월 간 奈良의 飛鳥에 머물렀고, 天武天皇을 만난 자리에서 성대한 외교적 儀禮를 행했다.
당시 신라와 일본의 이해는 일치했다. 唐과 전쟁 중인 신라는 등 뒤 일본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고 했고, 일본은 신라가 唐이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방파제가 되어주길 원했다. 683년 忠元이 東萊斷層(부산 동래→울산→王京)을 따라 북상한 기록이『삼국유사』에 보인다. 여기서 부산에 입항한 일본사절의 王京으로의 移動路程이 드러난다. 부산항에 내려 북상하면서 일본 사절이 첫 번째 들린 곳은 東萊溫泉이고, 여기서 자고 다시 출발한 그들은 노포동을 경유하여 울산 靈鷲寺에서 하루를 묵고, 王京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靈鷲寺址에 대한 발굴이 행해졌다. 울산박물관은 5개년계획으로 발굴조사를 시행해, 2016년 12월 23일 완료하여 가람의 전모가 드러나 영축사의 사역 규모가 경주 感恩寺와 거의 동급임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講堂址와 그것을 둘러싼 주거공간으로 보이는 다수 건물터들을 확인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차 조사에서 강당지 동편의 방 구조 건물지가 확인되어 승방으로 추정했는데, 서편과 북편에서도 중복이 심한 다수의 건물지가 발견됐다.
필자는 靈鷲寺의 주거공간들은 入京하는 일본사절들의 숙박시설을 겸했다고 보고 싶다. 703년의 入京한 일본사절의 규모는 204명에 달했다. 울산이 신라 왕경의 물류항구였다면 통일초 부산은 일본과 교섭하는 외교의 항구였다.


Shilla, which was unable to give up the efficiency of waterway transportation in receiving supplies, mainly used Ulsan Port. Unlike freight transportation, the envoy made safety a priority and used Busan Port. There was a reason. First, Tsushima Island was the immigration window of Japan. It was difficult to sail from Ulsan to Tsushima Island due to the direction of the Kurushio Current flowing from the south to the north. However, the route between Busan and Tsushima Island was stable.
There was a separate port in Geumgwan Gaya. It was a Tatara(多多羅:다대포) port in Busan.
In 843 Japanese Soldier guarding the northern coast of Tsushima Island witnessed a sparkling light toward Busan in the evening.
The lighthouse is thought to have served as a guide for ships from Tsushima Island to Busan when the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Japan was good. There was a reason for active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at that time. In 672, the interests of Silla and Japan matched. Silla, which was at war with Tang China, tried to eliminate uncertainty in Japan. Japan wanted Silla to be a breakwater to stop the expansion of Tang China.
The first stop by the Japanese envoy who arrived at Busan Port was Dongnae Hot Spring, and they took a rest here and stayed for a day at the Ryeongch temple in Ulsan, and headed to Silla Capital.
In 2011, excavation of the Yeongchwi temple was carried out. There were traces of many buildings that appeared to be residential spaces. I would like to see the temple as a hotel facility for Japanese envoys. In 703, 204 Japanese envoys entered Silla. If Ulsan was a port of supplies for the Silla Kingdom, Busan was a port of diplomacy negotiating with Japan.

KCI등재

2고려시대 동남해지역 해양사와 중심 포구의 이동 - 조선 초기 부산포 개항과 관련하여 -

저자 : 한정훈 ( Han¸ Jeong-h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1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내이포(乃而浦)와 함께 개항하는 부산포의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고자 작성하였다. 이를 위해 부산지역이 포함된 '동남해 해양사'의 관점에서 고려시대 동남해의 포구와 해양활동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 동남해지역은 일본과의 외교와 통상활동의 중심 권역으로, 그 중심지는 남포(南浦)가 있던 김해와 합포(合浦)가 있던 마산지역이었다. 12~13세기 중반에는 객관(客館)과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있던 금주(金州)에서 대일 외교·통상 업무를 관할하였다. 13세기 후반의 원간섭기 이후는 왜구 침입의 방어 거점인 합포진변만호부가 있던 회원현(會原縣)이 동남해 수군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신라~조선 초기 동남해지역 중심 포구의 이동 양상을 살폈다. 신라의 대외 교섭은 울주 태화강변의 율포(栗浦)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왕조 개창 이후 태종 7년에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을 위해 내이포와 부산포를 개항하였고, 16세기 중엽이 되면 부산포 단일 왜관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신라~조선 초기 동남해지역의 중심 고을과 포구는 울주(율포), 금주(남포), 회원현(합포) 그리고 동래현(부산포)으로, 오늘날의 울산-김해-창원(옛마산)-부산 순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동남해 해양사의 중심 포구의 이동 속에서 부산포의 개항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historical background for the opening of Busan Port along with Naeipo in the 7th year of King Taejong's reign (1407) during the Joseon Dynasty. For this purpose, this study examined the status of ports in the southeast coast and marine activities during the Goryeo Dynasty from the 'sea history of the southeast coast' perspective, including the Busan area. The southeast coast region during the Goryeo Dynasty was the central district for foreign policies and trading activities toward Japan, and the center was Gimhae where Nampo was located and Masan where Happo was located.
To go back to the Silla Dynasty to examine the aspects of changes in the central ports in the southeast coastal region, foreign negotiation was made in Yulpo in the Taehwa riverside in Ulju. Next, in the first half and the middle period of the Goryo Dynasty, Geumju where the Southeast Sea and Islands Division and guest houses were located supervised foreign policies and trade affairs toward Japan. After the Yuan intervention period in the late 13th century, Hoewon-hyeon where the defensive work against Japanese invasion, Jinbyeon Manho-bu in Happo was located was the center base of naval forces' activities in the southeast coast. Also, after the opening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7th year of King Taejong's reign, Naeipo and Busan Port were opened for Heungri-woein (Japanese Traders), and in the mid-16th century, the single Waegwan period was opened in Busan Port.
As above, between the Silla Dynasty and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he central counties and ports in the southeast coast region moved from Ulju (Yulpo) through Geumju (Nampo) and Hoewon-hyeon (Happo) to Dongnae-hyeon (Busanpo), respectively, Ulsan, Gimhae, Changwon (Former Masan) and Busan today.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opening of Busan Port in changes in the central ports in the southeast coast Sea history.

KCI등재

3조선 후기 부산에서의 표류일본인 접대 - 『조선표류일기(朝鮮漂流日記)』(1819)를 중심으로 -

저자 : 심민정 ( Shim¸ Min-j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조선후기 야스다처럼 직급이 있는 일본인이 표착하였을 경우 부산에서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조선표류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야스다로 대표되는 표류일본인이 부산에서 어떤 접대를 받았는지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야스다일행은 경상우도를 거쳐 온 관계로 부산 경내에서는 '가덕도-다대포-부산포-우암포' 포구를 거치거나 체류했다. 이 중 다대포에서 한 달을 머무르며 기본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부산포를 거쳐 우암포에서 머무르며 일공 및 접대를 받고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기다렸다.
둘째, 야스다는 중급무사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류일본인보다 우대하여 접대를 받았다. 기본적으로 일공 중 요미는 일반 표류인들에게는 하루 2되 지급되었으나 야스다는 세견1송사선의 예에 따라 하루 4되가 지급되었다. 연향 음식 및 동래 부사의 선물도 추가 지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표민수수는 우암포에 설치된 별도의 영막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마도 관원인 관수, 재판, 대관이 육로로 접대 인원을 호송하여 전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야스다는 조선의 전별 의례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일본식 예법에 따라 읍례를 행하기도 하여 상호간 예법으로 의례를 실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이후 대마도 외의 표류일본인에 대한 표민수수 실태는 기존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본 자료를 통해 부산 지역 표류민수수 제도 운영 및 접대 양상이 보다 선명해졌다. 이는 해양도시 부산의 특수성 및 교류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This study focused on The Joseon Diary of the Drifting (1819) on how Japanese people with ranks in the late Joseon Drift received reception in Busan. The following is a brief summary of what kind of reception the drifting Japanese received in Busan.
All of Yasuda passed through Gyeongsang-Udo and arrived in Busan. For this reason, the drifters went through or stayed at the port of 'Gadeok Island - Dadae - Busan - Uam' in Busan. These people stayed for a month after receiving basic research at Dadae Port. Also, at Uam Port, these people stayed until they returned to Japan and received various receptions.
Yasuda was an intermediate warrior. So, Yasuda gave the reception more preferential treatment than ordinary drifters.
When sending drifters to Japan, a separate tent was installed at the Uam port to handle the business. At this time, the officials of the Tsushima Islands, Gwansu, Jaepanwae, and Daegwan, moved overland and went to Uam Port with a large number of personnel. They joined together in a party to receive the drifters. At this time, Yasuda tried to follow Japanese etiquette rather than Joseon's etiquette.
Through this study, it was possible to know in detail how the Japanese adrift was received in Busan in the late Joseon Dynasty.

KCI등재

4제국 일본의 교통망과 부산항의 군사적 역할

저자 : 김윤미 ( Kim¸ Yun-mi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3-140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근대 부산과 부산항의 역할을 군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부산항은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형성과 변화를 거듭해왔지만, 이것으로 부산항의 역할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를 먼저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항구가 철도와 항로를 연결한다는 점이다. 즉 항구는 철도라는 물리력을 기반한 대륙과 항로라는 물리력을 기반으로 한 해양이 교차하는 공간임에도 우리는 흔히 항구라고 하면 바다로 나아가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부산이 식민지 도시를 넘어 제국의 도시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부산항도 조선의 한 지역에 위치한 항구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교통망 속에 있었다는 점을 전제하고자 한다.
부산은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을 가졌던 시기 전략적으로 만든 도시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산은 동북아라는 권역 안에서 더 의미와 역할이 컸던 지역이다. 경부선과 부관연락선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물자가 부산에서 들고 나갔다. 부산은 상업 도시로 성장해나가는 한편 군사 전략적 거점으로 일본 군사력이 집결되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과 '시베리아출병',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과 아시아태평양전쟁 속에서 부산항의 군사적 역할은 강화되었고, 도시도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산항은 식민지 조선의 지역항이자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국제항의 면모를 내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근대에서 현대로 재편되는 지점의 한국 전쟁시기에도 분명해진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role of modern Busan and Busan ports from a military perspective. Busan Port has repeatedly formed and changed in terms of political and economic aspects. However, this does not explain the role of Busan Port.
Before we get to the point, we would like to discuss two things first. The first is that ports connect railways and routes. In other words, a port is a space where continents and oceans intersect. But we often think of a port as a point of sea. Second, Busan was an imperial city beyond the colonial city. Therefore,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Busan Port was not a port located in an area of Joseon, but was in the transportation network of the Japanese Empire.
Busan was strategically created during the period when Japan had hegemony in Northeast Asia. Therefore, Busan had a greater meaning and role in Northeast Asia. Many people and supplies moved from Busan through the Gyeongbu Line and the Gwan-Bu Ferry Ship). While Busan was growing into a commercial city, Japanese military forces were gathered as a military strategic hub.
The military role of Busan Port was strengthened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World War I and the Siberian War, the the Manchurian Incident and the Sino-Japanese War, the Second World War and the Asia-Pacific War. The city has also expanded. In the process, Busan Port became a regional port of colonial Joseon and an international port connecting various ports. This is also evident in the Korean War period, which was reorganized from modern to modern times.

KCI등재

5임진왜란 시기 가덕도의 위상과 조선 수군의 활동

저자 : 제장명 ( Je¸ Jang-myeo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7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가덕도는 임진왜란 시기 경상우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낙동강과 함께 경상좌도와 경계를 이룬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덕도는 일본 왜구들이 한반도를 침략할 때 반드시 거치는 곳이자 주둔한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곳이다. 조선시대 16세기 들어 일본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해지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1544년에는 이 지역에 수군진으로 가덕진과 천성진이 설치되어 운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가덕도는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그 사실을 전파한 최전방 통신수단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아 가덕도는 조선 수군 활동의 중심 대상지로써 전라도-경상도-(가덕도)-부산을 잇는 수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가덕도는 조선 수군 활동의 주 목표지역으로 중요한 위상을 가졌던 곳이다.
본고에서는 가덕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활동을 임진왜란 초기와 강화기, 정유재란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가덕도 봉수대에서 일본군의 침입 장면을 확인 후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최초로 알린 지역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의 4차례 출전 목표지로 선정되어 수많은 해전의 배경이 된 곳이다. 특히 임진년 마지막 해전인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위해 조선 수군은 3일 동안 가덕도에 주둔하여 작전계획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강화기에 접어들어 한성에서 남하한 일본군이 경상도 남해안 포구와 섬에 왜성을 쌓고 주둔함으로써 가덕도도 일본군에게 장기 주둔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수군은 부산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덕도를 점령해야 하지만 강화교섭 기간이라는 이유와 조선 수군의 전력 약화로 인해 가덕도는 점차 조선 수군의 목표지로부터 멀어져갔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초기 가덕도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대규모 도해(渡海)를 차단하기 위해 부산으로 진출하는 데 중간 기항지 역할을 하였다. 부산으로의 출전과정에서 가덕도 근해에서 몇 차례 해전이 벌어졌는데, 축조된 왜성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가덕도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에게나 일본군에게나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상을 가진 곳으로 인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Gadeok-do (do = island) is the easternmost island of Gyeongsang-U-do, and borders Gyeongsang-Jwa-do along with the Nakdong river. Historically, Gadeok island has served as a strategic choke-point, through which invading Japanese naval forces approaching the Korean peninsula must contend. In the 16th century during the Joseon dynasty, Japanese invasions became severe, leading to the Imjin war and in 1544 Gadeok-jin and Cheonseong-jin (jin = fortification) were installed and operated as Naval fortresses in this area to defend against Japanese invasions.
When the Imjin war broke out, Gadeok-do was the first to recognize the fact of the war and performed the function of front-line communication. In the wake of the Imjin war, Gadeok island was a central destination for the Joseon naval forces' activities, and was located on the waterway connecting Jeolla-do-Gyeongsang-do-(Gadeok-do)-Busan. Therefore, Gadeok island had an important status as the main target area for the Joseon naval forces' activities. In this paper, the activities of the Joseon navy, centered on Gadeok island, are divided into the early period of the Imjin war, the Ganghwa (truce) period, and the Jeongyujaeran period (second Imjin war).
In the early days of the Imjin war, Gadeok-do Bongsudae (signal fire) was the first to announce the outbreak of the Japanese invasion. In addition, it was selected as a target for the Joseon naval forces' four battles and became the background for numerous naval battles. In particular, for the victory of the Busanpo naval battle, the last naval battle in Imjin year, the Joseon naval forces were stationed on Gadeok island for three days to discuss operational plans.
After entering the period of the truce of the Imjin war, Japanese forces from Hanseong(漢城) to South Korea peninsula built a dwarf castle and stationed at the port and island of the southern coast of Gyeongsang-do, and Gadeok-do became the target of long-term presence by Japanese forces. The Joseon naval forces had to occupy Gadeok Island to advance to Busan, but due to the period of truce negotiations and the weakened power of the Joseon Naval Forces, Gadeok-do gradually moved away from the target of the Joseon Naval Forces.
Gadeok island in the early days of the outbreak of the second Imjin war(Jeongyujaeran), served as an intermediate port of call for the Joseon naval forces to advance to Busan in order to block the large-scale movement of Japanese forces. There were several naval battles on the coast of Gadeok island in the process of participating in Busan, but due to the dwarf castle built by the Japanese, it was not possible to achieve great results.
In this way, it was confirmed that Gadeok-do was recognized as a very important strategic position for both the Joseon navy and the Japanese during the Imjin Wars.

KCI등재

6초기 한국영화사에서 '부산'이 지니는 의의

저자 : 함충범 ( Ham¸ Chung-beom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7-203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1920년대 중반까지의 '초기 한국영화사'에 있어 '부산'이 지니는 의의를 고찰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본고에서는 1900~1910년대의 활동사진 상영 및 촬영 양상, 그리고 1924년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이곳에서의 영화 제작 활동이라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관련 내용들을 둘러싼 재검토 및 해석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먼저, 개항 이후 일본 거류민 문화가 형성된 부산에서는 인천, 목포, 마산 등 여타 지역들의 경우처럼 일본식 극장이 들어서며 활동사진의 상영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몇몇 기록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로케이션 촬영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당대의 문헌 자료들을 참조하건대, 전자와 관련해서는 늦어도 1903년 시점에 일본식 극장인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가 운영 중에 있었고 1910년에는 부산 이사청령으로 흥행취체규칙이 공포되었으며 1914년부터는 욱관(旭館)을 시작으로 활동사진 상설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후자에 대해서는, 1908년 통감부의 의뢰로 요코타상회(横田商會)가 <한국관(韓国觀)>(별제:<한국일주(韓国一週)>)을 만들면서 부산항이 카메라에 담긴 바 있었고 1916년 미일 공동제작으로 기획·제작된 장편 기록영화 <해뜨는 나라(日出の國)>(총 12편) 속에 <부산 경성의 전경(釜山, 京城の全景)>(9, 10편)이 포함되었으며 1920년에는 김도산 일행에 의해 <부산 대구 전경(釜山 大邱 全景)>과 <부산 범어사(釜山 梵魚寺)>가 제작·상영되기도 하였음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그동안의 한국영화사에서는 1924년 부산에 세워진 조선키네마주식회사(朝鮮キネマ株式會社)가 '최초의 영화 제작사'로 인정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920년에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가, 1923년에는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가 경성에 세워졌고 1920년대 초부터 조선총독부, 경성일보사 등의 통치 기구 내에도 활동사진반이 조직되어 영화 제작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영화사적 의미에 대한 재고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사적(史的) 가치는 그 활동의 중심이 영화 제작에 두어졌다는 점과 더불어, 특히 총 4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윤백남, 안종화,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남궁운 등 '한국인'의 역할이 컸다는 점에서 찾을 만하다. 즉, 이들 영화는 제작 및 배급, 상영 과정에서 동시기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노출시키면서도, 192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의 영화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지점에서 영화사적 의미망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This thesis is the result of a study examining the significance of “Busan” in “early Korean cinema history” until the mid-1920s. In this paper, I tried to review and interpret the related contents by dividing it into two main aspects: screening and filming of Motion pictures from the 1900s to 1910s, and the meaning of the establishment of Chosun Kinema Co., Ltd. in 1924 and film production activities there.
In Busan, where Japanese inhabitant culture was formed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Japanese-style theaters were built and screening of motion pictures were carried out as in Incheon, Mokpo, Masan and other regions. In addition, during the production of some documentary films, Busan was used as a filming location. We can know these facts through the current literature sources.
Meanwhile, in Korean cinema history, Chosun Kinema Co., Ltd. (Joseonkinemajusighoesa) established in Busan in 1924, has been recognized as the “first film production company”. However, in the early 1920s, several film production companies and agencies were established in Gyeongseong(Seoul), so Therefore, it is required to reconsider the meaning of cinema history about Chosun Kinema Co., Ltd. On the one hand, in the process of making four movies at Chosun Kinema Co., Ltd., the role of “Koreans” played a large role, and they led film activities in colonial Joseon after the mid-1920s. At this point, we can see the cinema history value of Chosun Kinema Co., Ltd.

KCI등재

71951년 유엔묘지 전몰장병 헌정식 - 1950~1951년 임시 유엔묘지의 통합에서 헌정식에 이르는 과정 고찰 -

저자 : 이정선 ( Lee¸ Chung-s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40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과 더불어 2021년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유엔군 전사자들의 공식 묘지인 재한 유엔기념공원이 조성된 지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러한 기념비적 사건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유엔기념공원의 위상을 고찰하는 작업은 이 장소의 역사적 함의를 시의 적절하게 되짚어 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본고에서는 한국전쟁기인 1950년 7월 이후 한반도에 산재하던 임시 유엔묘지의 조성과 통합을 거쳐 현재 유엔기념공원의 전신인 유엔묘지가 1951년 4월에 준공되는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간 학계에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1951년 4월 6일 유엔묘지 헌정식의 양상을 최초로 자세히 짚어보았다. 임시 유엔묘지의 조성 과정과 본 헌정식에 관해서는 선행연구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으나, 이 논문에서는 다각도의 멀티 아카이브(multi-archival) 조사를 통해 발굴한 헌정식 관련 문서와 영상사료를 처음으로 교차 분석함으로써 차별화를 두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유엔기념공원은 2030년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부산광역시가 추진하고 있는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주요 구성자산 중 하나인 점을 감안할 때 논문에서 제시하는 1951년 헌정식 사료는 향후 세계유산 등재에 필요한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로써 본 연구는 1950년대 유엔묘지 연구의 공백을 보완하고 학술 담론의 외연을 넓히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고가 유엔묘지 건립 70주년을 맞이하는 2021년, 한국전쟁이라는 국제 규모의 군사(軍史)와 대한민국 현대사, 그리고 부산 역사가 중첩되는 교차로를 재점검하고 향후 한반도와 참전국 간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탐색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1 marks the 70th anniversary of establishing the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the official cemetery of UN soldiers who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As these monumental events intersect, it would be timely to re-examine the status of the UNMCK and reflect on the historical implications of the place.
This research explores the integration progress of temporary UN graveyards scatter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July 1950 to the completion of the Tanggok UN Cemetery in April 1951. I attempted to examine the aspect of the dedication ceremony of the UN Cemetery held on April 6, 1951, which has not been thoroughly investigated in the existing literature. Notably, this study looks into unreleased historical documents and video materials conducted through multi-archival surveys.
The study thus seeks to fill the research gap of the UN graveyards in the 1950s and expand the scope of academic discourse. Considering that the UN Memorial Cemetery is one of the major components of the “War-time Capital Busan Heritage” in Busan in preparation for the UNESCO's World Heritage listing in the 2030s, this study is expected to be vital for World Heritage listing. This research will also play a consolidating role for the future-oriented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the UN allied nations in 2021, commemorating the 70th anniversary of the construction of the UN Cemetery.

KCI등재

81980년대 부산지역 노동운동에서 학출활동가의 노선과 실천 -'실-반실' 논쟁을 중심으로-

저자 : 이광수 ( Lee¸ Kwang-su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1-26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부산에서의 '실-반실' 논쟁에 대한 평가는 80년대 부산지역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실-반실' 논쟁은 선도 투쟁을 통해 조직을 강화한다는 소위 '실' 진영과 역량이 갖추어질 때까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준비에 몰두해야 한다는 '반실' 진영 사이에서 벌어진 노선 논쟁이다. 하지만, 전위대를 만들고 조직하여 변혁 운동을 꾀한다는 같은 목표도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독재 정권에 맞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의 씨를 뿌렸고, 그 결과가 모여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져 왔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되면서서 학출활동가들이 몇 년 동안 조직해 온 소그룹 활동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고, 그 학출활동가들의 외부 조직이 상당한 역할을 해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부산지역에서의 그들의 활동이 그들이 애초에 추구했던 정치 투쟁으로서의 변혁 운동 차원에서의 조직 활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 노동운동에 영향을 남길만한 큰 대중 투쟁을 만들지 못했고, 끝까지 살아남아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맞이하지도 못했다. 결국, 학출활동가들의 활동은 이후의 부산지역 노동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들은 맑스 이론에 경도된 채 운동의 주체성이나 대중의 위치 등을 이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로 인해 운동과 대중과의 분리를 심화시켰다. 결국, 그들이 추구한 급진적 정치 투쟁으로서의 운동의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한 채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경제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 운동이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장의 선도투나 소그룹운동을 통해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길러냈고, 그렇게 성장한 '선진노동자'와 함께 이후 많은 노조 결성을 이끌었으며 이후 부노련-부산노련과 같은 연대체 결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The evaluation of the 'Sil-Bansil' debate in Busan is a tactical one between the so-called 'sil' camp, which reinforces the organization through leading struggles and the 'anti-sil' camp, which requires immersion in preparation through small-group activities until competency is established. However there was also the same goal of creating and organizing a vanguard team to pursue a transformation movement. No one can deny that the university student labor activists formed a secret society against the dictatorship to sow the seeds of the labor movement and the results were brought together to the Great Workers' Struggle in 1987 in Busan. However it is also clear that the student activists pursued social transformation by being obsessed with unrealistic ideologies that did not fit into Korean society. They were obsessed with Marx's theory failing to recognize the difference in the time-space context of history thereby deepening the separation between the movement and the masses. Contradictory to this point, the labor movement based on economicism and trade unionism by liberals led to a great explosion of the labor movement in 1987, without exerting any influence of the movement as a radical political struggle they pursued. The most important evaluation of them should be that they raised conscious workers through small-group movements and there were awakened workers who grew up through the process. It should be that they were able to succeed in their work and they were able to actively engage in the struggle for wage increases or improving working conditions.

KCI등재

9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활용한 역사문화콘텐츠 원형복원 사례연구

저자 : 조정윤 ( Cho¸ Jung-y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1-302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한일 평화 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한일 공동등재 되어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등재를 주도한 부산의 경우 역사적으로 한일 교류의 거점도시로서 조선통신사는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 기록물의 보존을 넘어 활용을 통해 가치를 확산해야하는 과제를 부여 받고 있다. 기록물의 활용을 통해 유산이 가지는 성신교린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세계인이 공유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한일 공동등재 기록물 중 행렬도, 선단도, 마상재 관련 기록물의 현황과 그림자료를 분석하여, '보존의 기록물'이 조선통신사 행렬 복원, 통신사선 항해, 마상재 재현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통해'활용의 기록물'로 역할하게 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조선통신사 주요 기록물의 원형 복원은 新조선통신사로 태어나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개선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 할 것이다.


Joseon Tongsinsa, a symbol of peaceful relations by overcoming conflicts and warfare between Korea and Japan from the 17th to 19th Century, is significant cultural heritage for mankind and the documents have been jointly registered as a UNESCO Memory of the World by both countries. In the case of Busan city, leading the registration process, Joseon Tongsinsa has historically been a priceless cultural asset for Korea-Japan exchange. The task of not only well preserving the documents but also utilizing the records and archives of the UNESCO Memory of the World is to spread its value, significance and authenticity. Through the use of the archives, people around the world need to share the universal value of human beings, which is the peaceful relationships between neighbouring countries.
In the respect, this study analyzes the inscribed painting documents, focusing on the journey of Joseon Tongshinsa such as the parade and sailing, Masangjae, the horse riding performance, and provides a perspective of the documents of utilization through the reenacting cultural contents. The restoration of the key records of Joseon Tongshinsa envoys will suggest a new future for improving future-oriented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KCI등재

10부산 지역 원효 설화의 의미 고찰 - 『삼국유사』 설화들과 비교를 통해 -

저자 : 정천구 ( Jung¸ Chun-koo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3-331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원효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부산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설화들이 전하고 있다. 원효 설화에 대한 연구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부산의 원효 설화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원효가 입적한 뒤로 1,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전승되고 있는 설화들은 민중이 원효를 어떻게 생각하고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다시 말해 민중의 심리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다.
이 연구에서는 금정산 일대에 전하는 <원효대>, 기장 지역 사찰들의 내력을 알려주는 <척판암>, <안적사>, <석탑사>, <옥천사> 등 설화들을 『삼국유사』의 설화들과 비교하며 논의했다. <원효대>는 원효가 살생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왜구를 물리친 설화인데, 이에는 복수를 바라지 않는 민중의 마음이 반영되었다. <척판암>은 원효를 통해 신라의 승려가 중국의 승려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담아내 오래도록 지배적이었던 화이론, 즉 중국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며 주변의 오랑캐 나라들은 열등하다는 논리에 대담하게 반론을 폈다. <안적사>는 원효와 의상이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임을 보여주면서도 원효가 도력에서 의상보다 낫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는 민중이 왕실 및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의상의 귀족불교보다 민중들과 함께했던 원효의 민중불교를 더 우위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석탑사>와 <옥천사>는 관음보살이 '예쁜 아가씨'와 '아름다운 처녀'로 각각 나타나서 원효와 의상 두 스님에게 감로수 같은 물을 주어 갈증을 해소해 주는 설화다. 이 설화는 두 스님이 성불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숭고하게 추구했음을 보여주며, 특히『송고승전』과『삼국유사』 등에서 계율을 벗어난 행동을 거침없이 하여 비속한 승려로 묘사되었던 원효까지 숭고하게 보았음을 말해준다.
민중은 설화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인식이나 견해를 표현해 왔다. 부산 지역의 원효 설화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교를 비난할 때면 등장하는 '기복신앙'의 요소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도 승려들이나 지식인들 못지않게 불법에 또 이치에 밝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Folktales of Wonhyo(元曉) who lived during 7th century are handed down from 8th century to these days and spread all over the country. In Busan region we can find some of them which are unique and universal but have hardly been studied by scholars. Those folktales are written down quite recently, and as follows: < Wonhyodae(元曉臺, Wonhyo's lookout >, < Cheokpanam(擲板庵, Thrown a tray hermitage) >, < Anjeoksa(安寂寺, Easily calm temple) >, < Seoktapsa(石塔寺, Stone pagoda temple) >, < Okcheonsa(玉泉寺, Jade water temple) > etc.
In this study, I analyzed folktales of Wonhyo in Busan region and elucidated the phases and the meaning of them in comparison with folktales of Samgukyusa(三國遺事). This work showed up folks' thinking of Wonhyo and their understanding the Buddhism. In < Wonhyodae >, Wonhyo repelled Japanese invaders in the way of minimizing killing the enemy. It means that folk didn't have a will to pay off an old grudge against them. < Cheokpanam > have a purpose to refute Sino-Barbarian doctrine(華夷論) which is the claiming the supremacy of its central culture and the consciousness of intellectuals and ruling class from middle age to modern age. It insisted that Silla Buddhism is superior to Chinese Buddhism.
In < Anjeoksa > folks are willing to express their mind being more favorable to Wonhyo than Uisang(義湘). It means that Buddhism for folks is more close to Buddha's teaching and superior to Buddhism for king and noble. < Seoktapsa > and < Okcheonsa > have the same element of story that a pretty lady or a beautiful virgin gives sweet water or fountain water to Wonhyo and Uisang being thirsty. These two tales acknowledge that two monks exerted themselves to achieve the sublime and ultimate goal to be Buddha. Especially, it is notable that Wonhyo whose saying and behavior had been considered vulgar and beyond religious discipline is described as sublime.

12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