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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부산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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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41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378
항도부산
41권0호(2021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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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피란수도 부산의 '유산화'와 국내외 자료의 현황 및 활용 방안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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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1876년 개항에 의해 근대 도시로 변모되기 시작해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의 근현대사 중 일부를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으로 범주화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세계유산으로 '유산화(Heritagization)' 하려는 시도는 가치 있다. 즉, 유산을 기존의 문화재보호법 하의 국가, 민족, 지역에만 한정하지 않고 유산과 함께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은 물론 보편적 인간과 세계로 확장하고자 하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런데 세계유산 등재라는 목적 때문에 유산의 긍정적인 점만 부각시키고 관련 자료만 선별적으로 찾는다는 점에서 유산의 확장과 가치를 제한하고 있다. 더군다나 '유산화'의 목적이 '피란수도(열전시대)'에서 '평화도시(평화시대)'로의 전환이라면 열전의 아픔을 드러내는 기억과 유산을 애써 모른 채할 것이 아니라 전면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반성적 성찰과 새로운 미래로의 도약을 위해서도 유산의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함께 드러내어 유산의 확장된 가치와 내용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피란수도 부산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모습을 새롭게 조사 발굴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당대의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종합해 교차 분석하는 한편, 새로운 자료는 다시 조사 발굴해야 한다. 유산의 지속가능성은 유산의 범주 확장은 물론 가치의 확장과도 상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의 발굴과 수집을 토대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장치를 통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속적인 국내외 자료의 추가 조사·발굴 및 수집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국내외 자료군 별로 키워드 색인 및 해제(번역)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어서 자료의 원문까지 디지털화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료군별 데이터베이스를 집대성하는 한편, 유산별 종합 데이터베이스(개요, 내용, 자료)를 구축한다. 궁극적으로는 이와 같은 정형의 데이터베이스는 물론 비정형의 데이터를 모두 망라한 빅데이터 체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Busan began to be a modern city gradually by the opening of the port in 1876, and became the same form as now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Korean War. In this sense, the attempt to categorize some of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Busan as 'the heritage of Wartime capital Busan' and to 'Heritagization' it as a sustainable world heritage is meaningful. In other words, it is meaningful to expand the heritage to the universal human being and the world as well as the person who has lived with the heritage, not limited to the nation, state, and local under the existing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Act.
However, because of the purpose of listing the World Heritage, it emphasizes only the positive poin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restricts the expansion and value of these heritages in that they have only found the facts related to them selectively. Moreover, if the purpose of Heritagization is to switch from the Wartime capital (the heat war era) to the Peace City (the peace era), it is necessary to fully embrace the memories and heritage that reveal the pain of war. For reflection on this and a leap forward to a new future, it is necessary to reveal the positive and negative poin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to include them in the value and contents of the heritage.
Then, it is necessary to investigate and discover the multi-layered and multi-faceted aspec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to confirm the value of heritage and heritage that can reflect on its value and meaning. For this purpose, it is necessary to cross-analyze the data that can confirm the facts of the time more specifically, and to investigate new data again. Sustainable Heritagization requires not only expansion of heritage but also expansion of value, so it is necessary to utilize it through institutional devices based on the discovery and collection of these data. First, additional investigation, excavation and collection of domestic and foreign data should be conducted continuously. And the collected data should be indexed and released by data groups. Then, based on the Database that adds the original text of the data, the databases by data group should be made into a digital archive or digital library, and then the Big Data system should be constructed by converting them into comprehensive databases by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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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피란학교 연구 - 학교경영방침, 교육과정, 학교일상을 중심으로 -

저자 : 안경식 ( An¸ Gyeong-si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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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부산은 피란수도이자 교육수도였다. 부산의 피란학교 교육은 당시의 한국교육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피란학교의 교육을 두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나는 학교의 경영방침과 그를 구현할 교육과정의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과외활동으로서 학교의 일상을 고찰하였다. 피란학교 개설 초기인 1950년 9월의 학교경영방침은 전력(戰力) 증강과 같이 전쟁을 위한 교육이었고, 교육과정 편성은 임시적이었다.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 피란학교가 개설된 1951년 초부터의 피란학교의 경영방침도 전쟁 승리를 위한 교육 등으로 정해졌다. 이를 위해 당시 문교부에서는 전시교재를 제작, 배포하기도 하였다. 1951년 하반기부터는 점차 정규적이고, 교과중심의 피란학교 운영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교재, 교실이 부족하여 신문, 잡지 등을 교재로 활용하였고, 이를 광복 후 새교육운동에서 강조하던 생활중심교육이라고 명명하였다. 1952년부터는 미국 교육사절단이 부산 등지에서 생활중심교육과정과 수업법에 대해 연수를 하면서 생활중심교육과 민주주의 교육의 이념을 일선학교에 전파하려 노력했다.
초등피란학교가 개설되던 초기의 학교의 과외활동은 위문편지 쓰기, 나무하기, 빨래하기 등이었다. 점차 피란학교가 안정되면서 자치회, 문예부, 소풍, 운동회 등의 과외활동이 행해졌지만 전쟁의 분위기가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중등피란학교도 초기에는 교사(校舍)가 없어 교과 활동보다는 교사 건설을 위한 노력봉사 등의 과외활동이 많았다. 중등학교에서는 1951년 하반기부터 정부의 정책에 따라 특별교육으로 '1인1기'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는 정규 교육과정의 운영에 차질을 초래하였다. 중등학교의 과외 활동으로는 군인 위문 행사 참여가 많았고, 이는 당시 학생의 일상이었다. 1952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등 정치에 많은 문제가 있어 고등학생들도 데모 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정부는 학생들의 정치참여는 금지시키면서도 여전히 관제 데모에는 동원했다. 데모 참여는 학생들의 일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광복 이후 민주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전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민주주의교육, 생활중심교육의 이념을 지속시켜 가려 했다. 그러나 정치가 독재로 나아가고 있었고, 교육 역시 집권자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교육의 진전은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In the 1950's, Busan was a representative refugee shelter and center of Korean education. The situation of refugee school in Busan i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Korean education at the time. This thesis examines the education of refugee school in Busan from two aspects. First, I studied the refugee school management policy and the curriculum. Second, I studied the daily life of the refugee school as extracurricular activities. The management policy of the refugee school in September 1950 was related to the reinforcement of combat power. At this time, the curriculum of the refugee school was organized irregularly. The management policy of the refugee school in early 1951 was related to education for victory in the war. At that time, the Ministry of Education produced textbooks called 『War Time Life』 and 『War Time Reader』. From the second half of 1951, it was possible to operate a regular refugee school. However, due to the lack of textbooks and classrooms, newspapers and magazines were used as textbooks, and this was called life-oriented education. Originally, life-oriented education was emphasized in the 'new education movement' after Korean liberation. From 1952, U.S educational missions such as the U.S.C (Unitarians Service Committee) taught life-oriented curriculum and teaching methods in Busan. This was an effort to disseminate democratic education. Elementary school students daily activities include writing consolation letters, gathering firewood, and doing laundry. Secondary school students also tried to build a new classroom rather than studying. From the second half of 1951, the government emphasized technical education, and 'One Person One Talent' education movement was emphasized in secondary schools. The extracurricular activities of the secondary school student at that time were mainly to participate in events to consolation of soldiers. Since 1951 there have been many changes in politic situations, and high school students have become political critic force. The democratic education movement began after Korean liberation, but it was forced to be stopped due to the Korean War. The government tried to sustain the idea of life-oriented education despite the war situation. However, politics was moving toward dictatorship, education also became a political tool for the incumbent, and democratic education during the Korean War faced a li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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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피란수도 부산의 고아원과 고아의 삶 - 한국 사회복지의 제도적 시원(始原)에 관한 연구 -

저자 : 김영종 ( Kim Young-jo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11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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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피란수도 부산이라는 시공간에서 나타난 고아 문제와 그에 대응했던 사회적 양식으로서의 고아원을 조명한다. 연구의 내용은 당시 발생했던 고아 문제와 고아원에 대한 실태를 정리하고, 이를 역사적 제도주의와 정치경제적 접근 관점에서 설명해보는 것이다. 연구에 활용된 자료는 정부기록물이나 법령 등 역사적 문헌들과 함께, 기존 연구들에서의 이차자료, 본 연구자의 2002년 수집 인터뷰 자료(1950년대 고아원 창설자 7개 파일)를 포함한다. 연구 결과, 당시 고아원의 발흥은 기존의 제도적 경로 하에서 국내·외 정치경제적 역할 구성자들의 다양한 이해 작용에 따른 결과로 설명된다. 이는 한국전쟁 고아와 고아원에 대한 외국원조가 일방적이고 시혜적이었다는 기존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설명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사회복지 제도의 시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부여한다. 비록 역사적 자료의 부재나 제한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설명 가능성을 제시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This study deals with the subjects of the problem of orphans and the orphanages as the social countermeasure mode at the space time of provisional capital Busan. It could contribute to the purpose of this study which is to explain the origin of the social welfare system in Korea. The content of the study consists of arranging the nature, scale, and realities of the problems of orphans and orphanages that occurred in the space time, and explaining their relationship through the institutional path dependence approach and the plays of political economy role constituents. The data used in the study include historical documents on government records and laws, secondary data from existing studies, and interview data (7 files) of the directors of the orphanage at the time collected by the author in 2002. The results of the study confirmed that the rise of orphanages at that time was a phenomenon that emerged from the interests of the constituents of political economic role constituencies at home and abroad based on the existing institutional path. It also suggests that the internal and external role constituencies themselves received considerable influences and benefits, transcending the limitations of the existing perception of unilaterally beneficial foreign aid to orphans in the Korean War. This study has several implications. One of them is to suggest that in order to understand the institutional formation of Korean social welfare at present, it is important to explain the historical institutionalism surrounding orphanages and orphanages that occurred in the space time of provisional captial Busan. This study also contributes to confirm the significance of using political-economic approach in this kind of historical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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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전쟁기 피란지 부산과 전시문학담론

저자 : 이순욱 ( Lee Soon-woo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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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반공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아니라 동일한 가치로 인식하였던 한국전쟁기 부산의 문화지형과 매체 환경, 피란문단의 실체와 문학 활동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기 부산 지역문학의 실체에 다가서는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으로. 문학사회의 지역 재편이 격심하게 진행되었던 만큼, 갑작스러운 문단 이동과 대규모 피란문인의 유입은 지역 문학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피란이 집중되었던 부산은 충격 여파를 깊이 헤아릴 여유도 없이 피란문인과 토박이 문인이 중층을 이루었으며, 부산 문학사회는 한국문단 전체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새로운 문학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 후방지 부산에서 피란 문인들은 전선의 변화에 따라 종군 또는 참전하였으며, 문총 주최의 문화 행사에 참가하거나 작품 활동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런 까닭에 대체로 전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보다는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적극적으로 고취하고 선양함으로써 문화전선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In this article, I reviewed the cultural topography and media environment of Busan during the Korean War, where anti-communism and liberal democracy were recognized as the same values ​​rather than as independent ideological systems, and the reality and literary activities of the refuge literary circles. Through this, we tried to build a foundation for approaching the reality of local literature in Busan during the Korean War. As the regional reorganization of the literary society proceeded violently, the sudden movement of paragraphs and the influx of large-scale refugee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local literary society. In Busan, where the refugee was concentrated, there was no room to measure the aftermath of the shock, and it was possible to build a new literary society as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Busan literary society has moved the entire Korean literature intact.
In the rear area of ​​Busan, the literary men of refugee warned or participated in the war according to the change of the front line, participated in cultural events hosted by Munchong or made their lives through art works. For this reason, it can be said that the cultural front was established by actively promoting and promoting nationalism and patriotism, rather than critical reflection o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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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방 이후 서영해의 국내 활동과 역할

저자 : 김민호 ( Kim¸ Min-ho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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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는 1945년 8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프랑스 언론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당위성과 장차 한국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사명을 알렸다. 그동안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후원을 해준 프랑스 인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중국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활동을 모색하였다.
서영해는 1947년 5월 국내로 환국하였다. 그는 학계·언론계·정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우리 실정에 맞는 프랑스어 교재 제작에 나서 두 권의 책을 발행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또 각종 신문 관계 행사에 참석하여 강연을 펼쳤다.
서영해는 임시정부와도 지속적인 협력·협조 관계를 이어갔다. 임시정부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추진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UN한국임시위원단 파견에 따른 향후 대책과 추진 방향을 논의하였고, 국외 인사들과 만남에서 '가교'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확한 의사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48년 9월 21일 파리에서 개최되는 UN총회 파견을 추진하자, 선발대의 임무를 맡았다. 중국에서 발생한 여권 문제로 인해 UN총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외무부 아시아-대양주국장을 만나 한국과 프랑스의 협력 관계 구축을 위해 힘썼다.


Seo Young-hae went through Korea's liberation in Paris, France on August 15th, 1945. He had a strong presence in the French press and let people know the historical justification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Korea's role and mission to play in the future through the press. He delivered his gratitude to French figures who supported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He also looked for activities through communicating with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located in Chongqing, China.
He returned to his home country, Korea in May, 1947. He had done a variety of activities across academic, political and media sectors. He published two French textbooks according to the situation at that time and devoted himself to nurturing younger generation at university. He gave lectures at events related with newspapers and taught students at his private office.
He continued to have a close cooperative relationship with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wards. He strongly endorsed the move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erms of establishing an unified government. He also strived to discuss future measures and directions with other leading figur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hen UN dispatched the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and also acted as a bridge in mediating with key figures from abroad. He came in on a dispatch party whe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ried to announce a strong will of our nation for establishing an autonomous government at UN General Assembly held in Paris on September 21st, 1948. The entry procedure problem in China disturbed him on his mission in attending the UN General Assembly but he still strived to construct a cooperativ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France by having a meeting with a chief of the Asia-Pacific Affairs Bureau from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of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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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삶과 교육활동 연구

저자 : 최두진 ( Choi¸ Doo-ji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7-21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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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徐嶺海, 1902~1956?)는 3·1운동을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열렬히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활동가로, 본 연구는 그의 삶과 교육활동을 조명해보고 그 교육적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서영해의 삶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부산에서 태어나서 서당과 학교를 통해 학창시절을 보낸 제1의 학생으로서의 삶, 둘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프랑스 정규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한 제2의 학생으로서의 삶, 셋째, 파리에서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여 임시정부 주 프랑스 특파원의 임무를 다하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기 위해 저술 활동도 더불어 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넷째, 해방 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에서 프랑스어 교재를 만들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등 교사로서의 삶이다.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살펴본 그 교육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초를 탄탄하게 하는 것, 둘째, 바른 과정을 걷는 것, 셋째, 인류애를 위하는 것, 넷째,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Seu Young-hae (徐嶺海, 1902-1956?) was an independent activist and education activist who was active in France starting with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As a result, Seu Young-hae's life was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as a first student who was born in Busan and spent school days through Seodang (書堂) and school. Second, as a second student who completed all of the French regular education courses up to education. Third, he established a Korean news agency in Paris to fulfill the mission of the French correspon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to write an independent activist to write about the history and tradition of Korea. Fourth, after Independence, she moved to Korea, made French teaching materials in Seoul, and taught French.
The educational significance that we looked at based on this life is as follows. First, solidifying the foundation, second, walking the right process, third, for humanity, and fourth, living a life of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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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산 지역 여성교육가 황순조(黃順朝)의 교육실천과 교육사상 연구

저자 : 양지원 ( Yang¸ Ji-w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66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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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과 사회 변화에 따라 국가사 중심에서 지역사 중심으로 교육적 관심이 이동하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교육, 인물 등을 재조명하여, 지역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 지역의 여성교육가인 황순조는 1950~1980년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데 제약이 많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부산 최초의 여성 장학사로 활동하였고, 이후 부산 최초의 여성 교장이 되어 지역사회인 부산의 교육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실천하였던 인물이다. 황순조의 교육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교육, 양성평등의식의 함양을 위한 성교육,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한 모성교육[부모교육]을 들 수 있다. 부산 지역의 여성 교육가인 황순조에 대한 연구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활동한 한 인물을 통해 부산의 교육과 역사, 문화 등을 다시 인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지역사 교육, 향토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찰하게 만들어 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ducational interests are shifting from the history of the nation to the history of the local according to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social changes. It is providing an opportunity to re-illuminate the history, culture, education, and characters of the region and discover new values of the region. Hwang Soon-jo, a female educator in Busan, acted as Busan's first female school inspector in the 1950~1980s era, when there were many restrictions on women's entry into society. Subsequently, becoming the first female principal in Busan, she continued to strive for the development of Busan education and practiced it in various directions. Hwang Soon-Jo's educational thought is largely divided into three types. It is education to prepare for the future society, sex education to cultivate gender equality awareness, and maternal instinct education[parent education] to form correct values. A study on Hwang Soon-jo, a female educator in Busan, can provide an opportunity to recognize Busan's education, history, and culture through a person born and active in Busan. It also has significance in making the importance of local history education consid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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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산 초량왜관요 출토유물 연구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

저자 : 권주영 ( Gwon¸ Ju-yeo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7-30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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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는 부산 초량왜관요 출토유물 184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크게 자기류와 요도구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기류는 대부분 소편이지만 관찰을 통해 기면의 무시유 장식, 굽 내측의 나선문장식 등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으며 기종에 있어서도 한계성을 보이고 있다. 요도구류는 초량왜관요가 운영되었던 17세기대 경남지역 가마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백토 갑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통기공을 가진 갑발 등이 관찰되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지미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대체로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보여지는 제작기술과 비교가 가능하며 백토 갑발의 경우 광주 충효동 가마터, 광주 분원리 가마터 등에서 확인되는 기술이다. 또한 초량왜관요가 운영되던 시기에 부산경남지역에서 운영되었던 가마는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는 단계로 초량왜관요에서 보여지는 제작기술의 다양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당시 부산 초량왜관요로 입역한 사기장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에 의해 시도된 다양한 기술로 파악된다.
일본 대마도의 종가문서사료 중 「御誂物控」과 「御注文㨨」에는 당시 부산 왜관요로 보내는 도자기 주문서가 확인되는데 부산 초량왜관요 출토유물은 이들 문헌기록의 견본그림과도 비교가 가능하다. 대부분이 도편이지만 이러한 문헌자료에서 엿볼수 있는 기형의 유사성은 당시 주문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번조기술을 차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독특한 자기문화를 꽃피우는 시기로 다양한 도자기술이 탄생하였고 수요층 또한 확대되었다. 부산 왜관요는 대마도에서 요구하는 주문품의 생산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개발이나 창출은 기대할 수 없는 내재적 한계성을 안고 있었다. 결국 부산 초량왜관요는 조선의 도토와 기술에만 집착한 나머지 급속도로 변화하는 도자산업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폐요에 이른다.
폐요 이후 부산과 경남일대 가마터와 대마도에서 운영된 가마터에서 기면의 무시유장식이나 굽 내측의 나선문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기술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급격하게 변해가는 도자산업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


The Seokdang Museum of Dong-A University has 184 relics excavated from Choryang Waegwanyo in Busan and can be divided into porcelain and pottery. Most of the porcelain flows are small pieces, but through observation, features such as mushiyu decoration on the base surface and spiral gate decoration on the inside of the heel can be found, and the model is also limited. As for the Yodogu style, porcelain Gapbal(A large bowl for baking pottery), Gapbal with ventilation holes of various shapes and sizes, etc., which are difficult to find in the 17th century Gyeongnam area where the Choryang Waegwanyo was operated, were observed, and various types of dojimi were also used.
These points can be compared with the manufacturing technology found in the Buncheong-sagi kiln, and in the case of the white clay, this is a technique found in the kilns in Chunghyo-dong, Gwangju and the kilns in Bunwon-ri, Gwangju. In addition, the kilns that were operated in the Gyeongnam region of Busan during the period of operation of Choryang Waegwanyo were in the stage of mass production, and the diversity of manufacturing techniques shown in Choryang Waegwanyo is difficult to find. This is understood to be a variety of techniques attempted by the various efforts of the fraudulents who served as Choryang Waegwanyo in Busan at the time.
Among the records of the closing family documents of Tsushima, Japan, < Eojomulgong(御誂物控) > and < Eojumunlyu(御注文㨨) > confirm orders for ceramics sent to Waegwanyo in Busan at that time, and the relics excavated from Choryang Waegwanyo in Busan can be compared with sample drawings from these documents. Although most of them are pottery, the similarity of the deformity that can be seen in these literature data is thought to have been borrowed from several production techniques in order to improve the completeness of the order. However, in Japan at that time, as a period when a unique porcelain culture blossomed, various pottery liquors were born, and the demand group also expanded. Because Waegwanyo in Busan focused on the perfect implementation of custom-made products required by Tsushima, the development or creation of new technologies had inherent limitations that could not be expected. Eventually, the Choryang Waegwanyo in Busan was obsessed with the ceramics and technology of Joseon, and could not keep up with the rapidly changing trend of the ceramic industry, leading to a waste of life.
After the end of the year, it seems that technology exchanges were made in the kiln sites in Busan and Gyeongnam areas and in the kiln sites operated in Daema-do, such as the decoration on the inside of the heel or the decoration of the spiral gate on the inside of the heel, but it could not keep up with the rapidly changing trend of the ceramic industry at the time and eventually disappe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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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제하 김명룡의 동래지역 사회운동과 적우사 사건

저자 : 한종민 ( Han¸ Jong-mi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9-34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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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김명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의 동래지역 사회운동을 추적하고, 그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한 비밀결사 적우사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했다. 김명룡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년운동의 후속세대로서, 1928년 동래청년동맹으로 지역 청년운동 조직을 단일화한 이후, 이를 이끌었던 주도세력의 활동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신간회 동래지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간회가 사실상 해체된 이후에도 동래노동조합을 통해 여전히 동래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 가운데 김명룡은 수차례의 검속을 당했고, 이후 운동조직을 이끄는 대신 적우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적우사의 주된 활동은 선전 격문을 제작, 배포하는 것이었다. 적우사는 비록 소규모였으나 인근 신간회 부산지회, 부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함께 결성한 조직이었으며, 인근 언양, 울산지역까지 격문을 배포하는 등 활동영역도 좁지 않았다. 이때 그들이 제작한 격문에는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지향과 만주사변에 반대하는 반전주의가 표출되었고, 일본과 중국의 노농자, 농민과의 연대의식 또한 담겨있었다. 다만 김명룡은 적우사 활동으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게 되는데, 그가 체포되어 공판을 받는 과정은 당시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폭력성과 견제 없는 기소권력에 수반한 근대적 사법체계의 폭력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고는 비록 김명룡의 생애 전반을 다루지 못했으나, 상대적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인물을 통해 1930년대 초반 동래지역 사회운동의 한 단면을 조명하고자 했다. 새로운 관점, 사료발굴 등을 통한 지역 연구 활성화에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도 계속해서 한 부분을 차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study attempted to trace social movements of Dongnae in the late 1920s and early 1930s through a figure named Kim Myung-ryong, and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secret organization 'Jeokwoosa' that unfolded along the lines of such movements. As one of successor generation heavily influenced by socialism, Kim Myung-ryong's action at the time easily reflect the activities of the emerging socialist forces that have led the local movements since the foundation of the Dongnae Youth league in 1928. The league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Dongnae branch of Shinganhoe and even after its disbandment, the league still led social movements through an organization called Dongnae Labor Union in their region.
Kim Myung-ryong was prosecuted several times in the process and organized a secret society called 'Jeokwoosa' instead of leading Dongnae Labor Union. Primary activity of the group was to produce and distribute propaganda pamphlet. Although 'Jeokwoosa' itself was a small organization, it not only cooperated with Busan branch of Shinganhoe and Busan Youth league, also covered as wide as including neighboring areas such as Eonyang and Ulsan. Their pamphlet manifest potent arguments to overcome Japanese imperialism and capitalism and anti-warism regarding the Manchurian Incident. It also contains a sense of solidarity between Japanese and Chinese proletariat. Kim Myung-ryong eventually arrested for the activity of 'Jeokwoosa', and the process of his trial shows the very presence of colonial violence under Japanese imperialism and how brutal the modern legal system and prosecution rights can be if uncontained.
Although this study could not cover Kim Myung-ryong's entire life, it is an attempt to illuminate an aspect of the social movement in the early 1930s through a new figure. It is hoped that more studies in socialist activities such as this can attribute to local studies as a relevant part.

KCI등재

10김법린의 서양철학사상 수용을 통한 대중불교 혁신운동 - 동서사상의 해석학적 지평융합을 중심으로 -

저자 : 엄연석 ( Eom¸ Yeon-seo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1-3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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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과 불교혁신운동으로 독립을 성취하고자 여러 실천적 활동을 했던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이 서양철학을 수용한 양상과 불교혁신운동을 동서사상의 지평융합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는 서양철학과 서양근대불교학에 대한 김법린의 연구가 어떤 측면에서 그의 독립운동과 불교대중화 운동에 철학적 기초를 이루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추론하고자 하였다. 김법린은 근세철학의 비조이자, 근대자연과학과 수학의 학문 방법으로 인간의 인식 근거와 진리성을 탐구한 데카르트의 인식론 철학의 구체적 내용을 해명하였다. 또한 그는 근대서양의 불교학이 연구영역의 광범위함, 언어학적 고증 방법이용, 역사적 사료비판 진행, 연구결론의 자유로운 도출을 특징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실증적인 연구방법론 또한 수용하였다. 그는 이론적 연구 불교와 실천적 신앙불교가 상호의존적인 연결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구미의 연구 불교가 미래의 위대한 신앙불교의 기초가 되어 신앙운동을 활성화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점에서 그의 데카르트 철학과 서양근대불교학 연구는 동서사상의 지평융합을 위한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법린은 서양근대철학과 근대불교학에 기초하여 당시 조선 불교계의 폐단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를 개선하는 불교혁신운동과 민중불교 및 농촌계몽운동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종교의 신앙을 인권의 자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불교신앙을 서양 민주주의 정치사상과 결합함으로써 두 가지를 해석학적으로 융합시켰다.


This essay intended to explain Kim Beoprin's aspect of acceptance of western philosophy and his movement of Buddhism reformation in the viewpoint of Horizontverschmelzung of east and west thought. He carried forward establishment of modern buddhist studies and popular buddhism movements founded on new research methodology together with independence movement. He suggested that the modernization of Buddhist studies was a significant and pressing tasks. "With a new approach and a fresh perspective, we should develop Buddhist studies to maintain prevail thoughts and new thoughts of the general public" said Kim Beoprin, emphasizing the necessity of a new attempt to Buddhist studies.
Kim Beoprin's analytical explanation of Descartes philosophy has the significant meaning in that it fused together horizon of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and thought by reflecting on the traditional idea in national crisis. He accepted empirical research methodology from western Buddhist studies of modern times. Kim Beoprin understood that theoretical research Buddhist and practical faith Buddhism are not an independent and separate relation each other and have an interdependent continuity. He was confident that Euramerican research Buddhist would become a foundation through which one revitalizes religious movement by becoming the base of practical faith Buddhism. In this point, his research of Descartes philosophy and western Buddhist studies of modern times is enough to be a theoretical basis for Horizontverschmelzung of east and west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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