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항도부산 update

  •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 : 사회과학분야  >  인문지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2093-1875
  • : 2713-8925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44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422
항도부산
44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저자 : 이지영 ( Lee Ji-yo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8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러일전쟁에 임박한 일제가 대륙으로의 진출과 한반도 식민화를 목표로 부산 및 진해만을 요새화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대비하여 해상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 및 진해만 일대에 영구적인 군사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군용지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존재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한일의정서를 비롯하여 일제가 규정한 여러 조항 및 요령을 빌미로 군용지의 무단점거 및 점탈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국유지 및 관유지는 무상으로 영구 수용하고 가덕도 민가등급표 등을 통해 민유지는 강탈에 가까운 금액으로 보상하는 행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군항을 건설함에 있어 진해만 군항 예정지를 일본 통감부의 주도하에 군항지를 조사, 군항 경계를 수립 계획하였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한반도의 식민지화 및 대륙진출의 전초작업으로 '진해만요새'를 신설하였으며 그 산하의 외양포포대와 저도포대가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요새의 건설공사를 담당한 조직은 육군 축성부이다. 이들은 요새를 단기간에 건설하기 위해 '요새건설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설설계요령서'를 제작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일대의 빠른 점령을 위해 요새화를 진행하였다. 러일전쟁이 임박하여 임시요새를 단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해야하는 업무 특성으로 제3임시축성단의 포대 건설공사 일체를 나카타니 히로키치(中谷廣吉)가 독점으로 청부받았으며 한국인 역부의 강제동원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러일전쟁이 임박한 이 시기에 대한제국의 국권이 존재함에도 군용지를 무단으로 점탈하고 각종 포대를 건설하는 등 부산 및 진해만 일대를 요새화하여 장악하였다.


Japanese imperialism expanded naval ports and made them into fortresses in order to use these areas as strategic points for the colon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entry into the continent.
Imperialist Japan constructed firstly the military installations of Jeo-do(猪島) and Oiyang-po(外洋浦) against the Russo-Japanese War. After the moving of the artillery headquarters into Masan(馬山) in 1911, these installations had been maintained for the defense of Busan and Jinhae Bays.
The study looked into the procedure of forcible occupation by Japan, involving the background of the designation and forcible accommodation of military reservations, and forced eviction by the purchase of land. Concerning Oiyang-po, carefully planned compensation for land and forced eviction was made according to the 'Table of Folk Houses Rating(民家等級表)' (1905).
It is recorded on the documents, so the amount of construction for each construction can be identified and reasons and timing for each construction project, the budget or repair expenses related to the construction are recorded. In addition, the layout and current status of the artillery positions are compared through drawings and 'design tactics'(設計要領書) attached to the annex. Data on the purpose of each military facility, weapons, and attached facilities were also available.
In 1904, the artillery headquarters and position were constructed by the 3rd Temporary chookseong-dan (第3臨時築城團) under the command of Matsui, a military engineer officer. The executional constructions were accomplished by the Japanese construction contractors.
It is the 'Chukseong-bu' (築城部, the Department of Castle Construction) that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fortresses. Also, the study reviewed the administrative flow as well as the installation process of the Chukseong-bu of the Department of the Army.
A Japanese contractor 'Nakatani Hirokichi'(中谷廣吉) was in charge of the construction for the quick completion of the Oiyang-po and Jeo-do artillery position. As the Pacific War approached, numerous caves were dug in key military sites in addition to the existing artillery. Many Koreans were forced to work in the cave, making it very difficult for there lives.

KCI등재

저자 : 김윤미 ( Kim Yun-mi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2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전후부터 1945년까지 부산이 군사기지화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부산에는 청일전쟁시기 일본군 부산병참부가 설립된 이후, 1945년까지 일본과 대륙의 군사수송과 병참지 역할을 했다. 일본군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과 대륙을 잇는 수송이 중요했다. 이에 따라 병참선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항로와 철도를 연결하는 부산항에 요새를 건설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부산요새사령부를 떠올린다. 이에 따라 요새의 의미, 요새사령부의 임무, 부산요새사령부의 설치 배경과 역할을 분석했다. 다음으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의 현황과 역할을 고찰했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과 군사시설은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대한해협과 부산항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1924년 부산항 방어를 위한 요새가 건설된 후, 1937년을 전후로 부산에 대규모 요새와 군사시설 구축이 이어졌다. 1941년 진해만요새사령부가 부산으로 이전하고, 부산요새사령부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1만여 명의 군인들이 부산에 주둔했다. 이에 따라 군사구역은 계속 해서 확장되었고, 부산은 군사기지화되어 갔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process of Busan's military base from before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to 1945. During the Pacific War, Japanese troops were concentrated in Busan, and military facilities were built rapidly. Starting with a review of the Busan Fortress Command, which comes to mind first when it comes to the Japanese military stationed in Busan, it analyzed the meaning of the fortress, the mission of the fortress command, and the background and role of the Busan Fortress Command. Next, the current status and role of the Japanese military stationed in Busan during the Pacific War was examined, and the impact of such military base on the Busan community was examined.
The Japanese military and military facilities stationed in Busan were intended to defend the Korean Strait and the port of Busan, which connects Japan and the continent. After the fortress was built in Busan in 1924, large-scale fortresses and military facilities were built around 1937. Only Jinhae in 1941Starting with the relocation of the new command to Busan and the renaming of the Busan Fortress Command in 1942, about 10,000 soldiers were stationed in Busan until 1945. Accordingly, the military zone continued to expand and create a close network with the local community.

KCI등재

저자 : 홍보식 ( Hong Bo-si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18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회의 발굴조사 성과에 의하면, 고촌리 유적은 기원후 3세기 후반부터 마을을 이루고 본격적인 수공업 생산활동을 영위한 생산전문 집단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2회의 공백기를 제외하면,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까지 목기·칠기·골각기·토기·유리·방직·기와 등의 수공업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고촌리 취락은 수공업품 생산에 적합한 자연환경이 갖춰진 지형을 선택하여 관련 시설과 완성품 보관 및 운송을 위한 창고시설과 도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수공업품생산과 저장·운송에 특화된 경관을 갖추었다. 연유도기·햇무리굽청자완 등의 고급 물품이 소비되었고, 초석이 있는 기와건물이 세워진 점 등을 고려하면, 고려 전기까지 수공업 생산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집단의 사회적 위상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니었다. 고촌리 유적을 통해 삼국부터 통일신라까지 수공업 생산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취락을 고려 전기에 특수행정 단위인 부곡으로 국가의 수취체제에 편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로서 주목할 수 있었다.


In Gochon village, landscapes specialized for the production, storage, and transportation of goods so that goods production-related facilities and warehouse facilities and roads necessary for storage and transportation of finished goods could be organically connected formed by selecting a terrain equipped with a natural environment suitable for goods production can be identified. According to the results of the excavation investigations conducted twice, in the case of Gochon ruins, a village was form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3rd century AD and a production-specialized group that engaged in full-scale handicraft production activities appeared. Thereafter, in partial excavation investigations, it was identified that although there were two periods of inactivity, handicraft items such as wooden containers, lacquer ware, bone implements, earthenware, glass, textiles, and roof tiles were professionally produced here from the epoch of the Three Kingdoms through the period of Unified Silla and to the early Goryeo period. Given that luxury goods such as lead-glazed porcelains and sun halo bottom celadon bowls were consumed, and tiled buildings with foundation stones were erected, the social status of the group that specialized in the production of handicraft products until the early Goryeo period was not at all low. Gochon village could be noticed as a case that enables the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organization of villages specialized in handicraft production from the epoch of the Three Kingdoms to the period of Unified Silla into the country's receiving system as a special administrative unit, Bugok in the early Goryeo period.

KCI등재

저자 : 진상원 ( Jin Sang-w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66 (4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7세기 초에 동래부 沙川面에서 결성된 면단위 洞契의 좌목이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 참여자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연구는 그 후손들의 사회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그 참여자의 사회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이 지역의 동계 문서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이 「구동계좌목」이다. 이 문서책은 1612년, 1623년, 1629년에 각기 작성된 좌목들을 구봉상이란 19세기의 인물이 수합해 1권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내지의 제명에는 “洞中座目”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17세기 초에 이 조직의 명칭은 '동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행정단위 역시 면이 아니라 그 하위의 동이었을 것이다.
출생 순으로 성명이 기재된 이 3개의 좌목에는 모두 63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들 중 동래부의 향청과 서원 및 향교의 임원 명단에서 그 성명을 찾아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는 이들 중에 양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을 단위에서 위세가 있는 양반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임은 때로 향사례를 행하고 계원들의 喪事에 부조하는 등 지역 엘리트들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위한 조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문서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에 부과된 잡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동계의 참여자들 중 그 후손의 존재가 확인되는 이들을 선별해 그 후손들의 사회지위와 가계분화를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17세기 초 동래부의 사천면 동계 참여자와 그 후손들은 주로 이서이거나 무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고을 단위에서 위세를 지니지 못하고 향리나 무임으로서 활동한 이들이 많았다.


There remains the membership list of participants of the community society as a Myun面 unit in the area of Sacheon of Dongrae County of the age of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However, there was not any information or life records about the participants, so the research tries to figure out their social characteristics by analysing their descendents' social positions.
These documentary texts as the data of the research were written in the year of 1612, 1623, and 1629, remaining as the oldest ones among regional historic texts of the community society. As the title of the documentary text is Dongjungzwamok洞中座目, we can suppose the name of the organization would be Donggye洞稧 as not administrative Myon面 unit but its sub-administrative Dong洞.
The names of 63 participating members of the society are listed in the text. Among them there was not any name of high members in the list of Hyangchong鄕聽, Seowon書院, and Hyanggyo鄕敎. It means that there were some low class yangban양반, but there were not any highbrow yangban. The organization sometimes would do village ritual ceremonies and help mourn with its members on the funeral ceremonies as one the regional societies of friendly gatherings and mutual assistance. Though we can find out the trace of proof in the documentary text, the community society would be organized to achieve out the regional labor projects.
In the research I tried to analyze some phenomenons of gaping social positions of the descendents of the organization by choosing some cases of their recognised descendents. Being on the track of the residential people and their family lineage, those society members would be considered as local clerks(鄕吏) or local military officers(武任). Though some of them came from aristocratic family (the yangban) or they would get the social position of the yangban, most of them would live as local clerks and military officers.

KCI등재

저자 : 권영은 ( Kwon Yeong-e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215 (4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구청(求請)이란 일본에서 세견선을 보낼 때 특정 물품을 조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행위를 말하며 대마도가 조선과 맺은 전통적인 외교관계에 근거하여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바쿠후(幕府) 등이 필요한 물품을 조선에서 조달해 가던 무역 방식의 하나이다. 기유약조(己酉約條) 체결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구청이 발생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진상(進上), 회사(回賜), 공무(公貿) 이외에 별도로 물품을 요청하는 일을 가리켜 구청이라 한다.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구하기 어려운 것을 대마도가 간절히 요청하면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가능한 것은 허락하였다. 이에 조선 측에서는 구청을 증급(贈給) 혹은 증물(贈物)이라고도 불렀다.
왜인의 각종 구청에 관한 내용을 동래부사, 경상감사 등이 올린 장계(狀啓)와 이에 관한 호조(戶曹) 및 비변사(備邊司)의 회답을 기록한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과 『변례집요(變例集要)』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유약조 체결 이후 일본은 다완(茶碗) 공급에 관하여 정식으로 조선에 구청(求請)하였다. 신해년(1611) 2월, 귤지정(橘智正)이 무역 담당자로 왔고 구청 물목에 김해 장인을 특정해 다기(茶器), 보아(甫兒), 와기(瓦器) 등을 구청하였다는 내용이 『동래부접왜장계등록가고사목록초책(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錄抄冊)』에 기록되어 있고, 같은 해 3월에 『변례집요(變例集要)』에 왜인이 서계(書契)를 지참하여 위와 같은 내용을 구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조선에서는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가 김해부사에게 부탁하여 도자기 장인에게 만들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다완(茶碗) 구청의 근거와 요구 주체에 관한 내용은 경진년(1640) 5월 19일에 역관 홍희남(洪喜男)과 김근행(金謹行)의 수본 등서(手本謄書)와 같은 해 10월 18일에 동래부사의 장계(狀啓)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위 내용에 의하면 왜관(倭館)의 개요(開窯)는 바쿠후의 쇼군(將軍) 이하 다이묘(大名)들이 간절히 구청하고 대마도주가 적극적으로 나선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마도주가 참근교대(參勤交代)를 위해 에도(江戶)로 갈 때 쇼군을 비롯한 바쿠후의 유력층에게 진상하기 위한 용도와 바쿠후 측의 의뢰나 지시를 받은 경우라고 보여진다. 이처럼 일본에서 서계를 지참하여 동래부로 구청하면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은 후에 다완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자기(瓷器)의 시작은 임진왜란 때 피랍된 조선인 이삼평(李參平)에 의해 1616년 백자(白瓷)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자기의 흐름 중 청자(靑瓷)가 빠져있다.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어지며 발전했던 분청자기의 다양한 기법과 연질백자에서 경질백자로 진화하는 과정에 나타났던 유약 조성과 환원 소성 등 다양한 기법들이 생략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 도공에 의해 자기의 생산이 가능했지만 와비차(わび茶)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민요(民窯)에서 생산되었던 독창성·대담함·자유분방함을 가진 조선 사발을 왜관을 통하여 다시 찾고자 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따라 1639년~1677년까지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에서, 1678년~1717년까지 초량왜관(草梁倭館)에 가마를 만들어 번조(燔造) 하였다.
이처럼 왜관에서는 구청에 의한 자기를 생산했다. 일본에서 견본이 오거나 주문서에 치수 등을 명시해 주문했기 때문에 왜관에서 생산된 다완을 일반적으로 어본다완(御本茶碗)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 연구자는 당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구청에 의해 제작된 다완이기 때문에 '구청다완(求請茶碗)'으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사료된다.
이후 이 시기 김해와 왜관에서 생산되었던 다완의 성격에는 구청다완이라 부르며, 왜관에서 생산된 다완명에는 어본다완이라는 기존의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또한 초기 와비차의 성립 과정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다완명에 의한 고려다완의 분류를 도자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검토하여 분류하였다.


The term request(求請) refers to the act of requesting Joseon to procure certain goods whenever Japan sent a trading ship(歲遣船) to Joseon, and it was one of the trade methods used to procure the items needed in Tsushima Island (對馬島) and Bakufu(幕府) from Joseon based on the traditional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sushima Island and Joseon.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were normalized after the Treaty of Kiyu(己酉約條 1609), and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resumed, with Japan making a request to Joseon. The act of Japan asking Joseon for certain goods in an unofficial way rather than via official trade(公貿) was called a request.
The Joseon government tended to comply as much as possible with requests from Tsushima Island for items that were not produced or difficult to obtain in Japan. Thus, a request from Japan was also called a donation to Japan on the side of Joseon.
『倭人求請謄錄』 and 『變例集要』 contain detailed records on requests such as replies from Bibyeonsa(備邊司) to requests as well as the Janggye(狀啓) posted by the governors of Dongnae and Gyeongsang in relation to various requests made by Japanese people. After the Treaty of Kiyu, Japan made an official request to Joseon for the supply of Dawan.
According to 『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錄抄冊』, in February 1611, GyuljiJeng (橘智正) came as a Japanese trade officer to make a request with a list of items asking for Dawan from a specific potter in Gimhae. It is recorded in 『變例集要』 that in March of the same year, a Japanese trade officer brought a diplomatic document(書契) requesting the above items. The request was that the governors of Dongnae and Busan in Joseon should ask the governor of Gimhae to have a pottery craftsman produce the above items.
What the basis of the request for Dawan was and who made the request are recorded in detail in the document on May 19, 1640 written by the translators Hong Hee-nam(洪喜男) and Kim Geun-haeng(金謹行) as well as in the Janggye(狀啓) on October of the same year written by the governor of Dongnae. The above records show that Bakufu's Shoguns(將軍) or Daimyos(大名) eagerly wanted to have kilns open(開窯) in Waegwan(倭館) and that Tsushima Island avtively made the request to Joseon.
It is likely that the Tsushima Lord would offer the items to the Shogun and other influential people when he went to Edo(江戶) for Chamgeun shifts(參勤交代) or he received a request or instruction for the items from Bakufu.
As can be seen from the above records, Dawan could be produced with the permission from the Joseon government based on a request from Japan to Dongnaebu with a diplomatic document.
It is known that porcelain production in Japan began with white porcelain in 1616 by Yi Sam-pyeong(李參平), a Korean who was kidnapp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For this reason, the flow of porcelain in Japan lacks celadon(靑瓷). This means that the flow of Japanese porcelain does not include various techniques used to produce Buncheong porcelain that developed from celadon to Buncheong porcelain, and various techniques such as glaze composition and reduction firing(還元燒成) that appeared in the process of evolving from soft white porcelain to hard white porcelain.
Since the history of Japanese porcelain began with the highest level of white porcelain by the kidnapped Joseon potters, Japan tried to find the originality, boldness, and free spirit of the Joseon folk kilns that were thought to be most suitable for the senti ment of Wabi tea(わび茶) in kilns located in Waegwan, Joseon. In this way, kilns were built and operated in Dumopo Waegwan from 1639 to 1677, and in Choryang Waegwan from 1678 to 1717.
As such, porcelains were produced for a request in Waegwan. And Dawan produced in Waegwan is generally called Eobon-Dwan(御本茶碗) because the order sheet from Japan specified the dimensions of Dawan in detail.
However, it is argued in this study that considering the historical situation at the time, it would be appropriate to call this Dawan Request-Dawan(求請茶碗) because it was produced at the request of Japan.
So 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call Dawan produced in Gimhae and Waegwan during this period Request-Dawan and use the existing term Eobon-Dawan for Dawan produced in Waegwan. In addition, this study aimed to review the existing classification of Goryeo-Dawan using the above terms and to present its new classification.

KCI등재

저자 : 이희정 ( Lee Hee-j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57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안적사(安寂寺)는 범어사의 수사찰로, 기장군 장산의 북쪽 연봉 앵림산(鶯林山)에 위치해 있다. 의상대사 창건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존하는 대부분의 유물은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이하 안적사 상)은 17세기에 제작된 상임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근대기 작품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1654년 조각승 나흠이 만든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근대기 불상으로 추정하게 된 것은 1919년에 완호와 시찬에 의해 행해진 수리로 인한 것임을 밝힐 수 있었다.
안적사 상의 원작자인 나흠은 조선후기 17세기 최고(最古)의 불석제 불상인 양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조성했는데 원래 통도사에 봉안되었던 상이다. 지금까지 이 상 이외에 그의 다른 제작 사례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안적사 상이 나흠의 작품임을 확인하게 된 것은 본 연구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통도사와 안적사 상 이외에 범어사 나한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이 나흠이 조성한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은 안적사 상과 대동소이한 조각적 특징으로 1919년 수리 이전 안적사 상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무엇보다 본 연구에서 17세기 후반 대표적인 석조조각승인 승호(勝浩)와 경옥(敬玉)라 한다면 17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석조조각승은 나흠(懶欽) 그리고 동시기에 활동한 영이(靈賾)였음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도 주요한 내용이다.


Anjeoksa Temple, a branch temple of Beomosa Temple, is located at Aengrim mountain which belongs to northern mountain range of Jangsan mountain in Gijang province. In 661(1st year of Munmoo King), prominent buddhist monks, Weonhyo and Yisang found a group of nightingales blocking their way when they arrived near Jangsan during their religious training. Recognizing auspicious atmosphere nearby, they decided to build underground cave and started to practice religion. Current Anjeok Temple is same place where they built underground cave. Even though, there are no remains of that time, buddhist statue is still preserved in Daewoong-jeon after Korea-Japan War in 1492.
Until quite recently, this statue was known to have been built in modern times, however, this research showed that sctupture monk named Naheum made the statue in 1654. This fallacy regarding the time of sculpture resulted from the repair work executed by sculpture monk Wanho and Shichan in 1919. The two sculpture monks mainly having worked around Gyeongsang Province, sculptured and painted many statues and buddhist paintings.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master pieces is breaking typical style and reflecting the outcomes of their own personal religious training and experiences based on tradition. The original sculptor Naheum also made the sitting stone Buddha at Weonhyo-am in Yangsan City which is the oldest stone Buddha statue made of zeolite stone .Even though there has been no other statue found made by Naheum, it is quite meaningful that the staute at Anjeok Temple is made by Naheum through this study. Furthermore, by the comparison of two stone statues at Anjeok Temple and Weonhyoam, we can find out that the statue in Nahan-jeon at Beomeosa was made by Naheum and also confirmed the original shape of the statue in Anjeok Temple.

KCI등재

저자 : 정진희 ( Jung Jin-hee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298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치성광여래도상은 신앙의 형태에 따라 화면의 구성을 달리하는 특징이 있어 도상을 통해 신앙의 시대적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19세기 그려진 200여 점의 치성광여래도 가운데 현재 확인 가능한 부산지역의 사례는 모두 4점으로 선종이 1861년에 그린 <범어사 치성광삼존과 칠성각부도>는 불교 북두본명소재 신앙의 전통을 반영하여 11폭으로 화면을 나누어 그려낸 형태이고, 1885년 기전이 그린 <국청사 치성광삼존도> 역시 각부도상을 전승하여 10폭으로 작품을 구성한 사례이다. 하나의 화면에 치성광여래를 비롯한 제요성수가 함께 그려진 국박 소장 <치성광여래회도>는 도불의 성수신앙이 혼습 되었던 시기 경상도 지역에 나타나는 불교 성수신앙에 대한 보수성을 반영하고, 1891년 민규가 그린 <범어사 극락암 치성광여래회도>의 도상은 세속화된 신앙의 성격을 칠원성군만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통해 확실히 보여준다.
서울과 경기지역 사찰의 칠성각이 도교의 성수초례를 위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던 것에 반해 경상도 지역 사찰의 칠성각은 수복을 빌고 재수를 기원하는 장소로 불교 「佛說北斗七星延命經」 말미에 소개된 칠성하강일에 맞춰 칠성을 공양하고 축원하기 위한 전각이었다. 19세기 초 기장으로 유배되었던 심노숭이 삼재팔난이 소멸되고 복덕과 건강을 기원하며 생일과 정초에 장안사 칠성전에서 올렸던 기도는 북두본명신앙이 반영된 불교 성수신앙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19세기 중반 부산지역에서 조성된 치성광여래회도의 도상은 불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성향이라는 신앙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앙의 전통성은 19세기 말 단순화된 기복적 성격으로 바뀌면서 당시 서울과 경기지역을 비롯한 전국 치성광여래 도상에 나타나는 일반적 보편성을 보이는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19세기 말 조성된 <범어사 극락암 치성광여래회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부산지역 사찰에 봉안되었던 4점의 19세기 치성광여래도 도상은 부산의 불교 칠성신앙에 나타났던 전통성과 보수성이 산업화와 근대화에 따른 종교성의 퇴화현상으로 인해 世俗化를 나타내며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Tejaprabha painting is good data to infer the characteristics of the faith through times, as the composition of the painting varies depending on the form of faith. Among 200 Tejaprabha paintings in the 19th century, the paintings of the Busan area are two in Beomeosa Guekramam and one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Tejaprabha painting, in 1861 by Seonjong is a painting that is divided into 11 sections in order to reflect Buddhism's faith in the Bukdu. Chiseong Gwangyeoraehodeo, kept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ainted Chiseong Gwangyeorae and Jeyo Seongsu together reflecting the conservatism of the Buddhist holy spirit in Gyeongsang-do region during the time when the Taoist holy spirit was mixed. The Tejaprabha painting by Mingyu in 1891, clearly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of secularized faith through the distinct feature that when Chilwonseonggun is emphasized. The prayer held at Chilseongjeong Hall of Jangansa Temple was for good luck and health after the disappearance of Simnosong Samjaepalnan, who was exiled to Gijang in the early 19th century, is based on the tradition of Buddhist holy faith. The two paintings of Chiseong Gwangyeorae, painted in the Busan area in the mid-19th century, show the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conservative tendencies that follow the Buddhist traditions. The Buddhist tradition that could be seen in faith was changed to a simplified Gibok belief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it can be seen in Beomeosa Temple Geungnakam Chiseonggwangyeoraehoedo, that it was changing to a form showing the general universality seen across the country, including Seoul and Gyeonggi Province.
These changes examined through the three Tejaprabha paintings in the 19th century in the Busan area are meaningful in that they show the secularization of faith, a phenomenon of deterioration of religious nature due to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as a practical relic.

KCI등재

저자 : 선우성혜 ( Sunwoo Sung-hye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43 (4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서면 지역의 부산부 편입 이후 공업화에 관하여 부전리, 가야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는 서면이 부산부가 공업도시이자 전시군사적 역할 할 수 있었던 주요 무대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래 동래군의 행정구역이었던 서면은 1936년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시가지계획 아래 부산부 내 인구의 밀집, 용지의 부족 등 문제의 해결과 부산부의 군사적, 산업적 역할 강화라는 목적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서면은 부산부와 인접한 평지로 부산부의 거주 환경 개선을 위한 각종 위험시설과 공장지대가 형성될 수 있는 곳으로 주목받았던 곳이었다. 서면은 부산도시계획에 따라 부전리, 부산진, 적기만 등의 토지구회 정리, 교통가로망 정비를 통해 산업지대, 임해공업지대로 형성되었다.
편입 후 서면 지역의 사업체 설립이 급증하였으며 업종의 경우에도 전시통제경제에 편승할 가능성이 높은 업체가 많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부전리, 가야리를 제외한 지역의 편입전후 사업체 현황을 보면 서면 북부 지역(당감, 부암, 범전, 전포)은 1939년 이후부터 사업체 설립이 많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경부선, 동해남부선 주변으로 사업체 설립이 많아지고 있었고, 철도 주변으로는 군용지로 이용되었다. 서면의 동남부 지역(문현, 감만, 우암, 적기, 용호)의 경우 부산진, 적기 매축이 진행되고 임항철도가 건설되는 시기 사업체 설립이 많았다.
부전, 가야에 설립된 사업체 역시 1939년 이후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전시통제물자이지만 일상생활에 소비되거나 전시 편승 가능성이 높은 물자를 취급하는 업체가 많았다. 부전의 경우 부산시가지계획 단계부터 집중적으로 정비 대상이 된 지역이다. 가야의 경우 부전과 같이 부산부 편입 단계부터 집중 정비지역은 아니었지만 1943년 조차장 가야역의 개통 전후 군수동원 가능 업체가 집중 설립되었던 지역이다. 또 부전리, 가야리에 설립된 사업체 위치는 '부산진-구포/동래-항만'을 잇는 교통 결절지로 여객뿐만 아니라 화물의 이동도 빈번한 곳이다. 요컨대, 부전리, 가야리의 사업체는 물자 운·수송에서 교통편의성이 높고, 여러 업종 또는 유사업종이 집적되어 있는 곳으로, 특히 동양연료(주) 부산공장 설치와 조선전기제강(주)의 군수회사 제2차 지정 대상 및 방직관련 업체의 집적 모습은 서면 설립사업체의 전시 협력 또는 편승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attempted to examine the industrialization of Seomyeon after the incorporation of Busan-bu, focusing on Bujeon-ri and Gaya-ri. Seomyeon, originally an administrative district of Dongnae-gun, was incorporated into Busan-bu in 1936. This was done in accordance with the Busan-bu Metropolitan Government's plan b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with the aim of solving problems such as the concentration of the population in Busan-bu and the lack of land, and strengthening the military and industrial role of Busan-bu. At that time, Seomyeon was a flat land adjacent to Busan-bu and attracted attention as a place where various dangerous facilities and factory areas could be formed to improve the residential environment of Busan-bu. Seomyeon was formed as an industrial zone and a marine industrial zone through land compartmentalization such as Bujeon-ri, Busanjin, and Jeokgi Bay, and maintenance of a traffic path network according to the Busan City Plan.
Since it was incorporated into the Busan Ministry, the establishment of businesses in Seomyeon has increased, and companies that are likely to jump into the wartime control economy have emerged.Looking at the current status of establishment of companies before and after the incorporation of Busan-bu in areas other than Bujeon-ri and Gaya-ri, the northern areas of Seomyeon (Danggam, Buam, Beomjeon, and Jeonpo) tend to have more workplaces since 1939. In particular, the number of workplaces was increasing around the Gyeongbu Line and the Donghae Nambu Line, and it was used as a military site around the railroad. In the southeastern part of Seomyeon (Moonhyeon, Gamman, Wooam, Jeokgi, and Yongho), there were many companies established at the time when the Busanjin, Jeokgi Reclamation, and Imhang Railroad were built.
Companies established in Bujeon and Gaya have tended to increase since 1939, and many companies were dominated by wartime and handled goods that could be consumed in daily life or jumped on the battlefield. In the case of Bujeon, it is an area that has been intensively maintained in Busan-bu's urban planning. In the case of Gaya, it was not an intensive maintenance area from the stage of incorporation into Busan-bu like Bujeon, but it is an area where power increase companies were intensively established around the opening of Gaya Station in 1943. In addition, the location of the business offices in Bujeon-ri and Gaya-ri is a traffic nodule area connecting "Busan-jin-Gupo/Dongrae-Port" and is convenient for not only passengers but also cargo movement. In addition, various industries or similar businesses are concentrated. In particular, Dongyang Fuel Co., Ltd., which produces chemical products to reduce coal fuel efficiency, installed a factory in Busan, and Chosun Electric Steel Co., Ltd. became the second designated military company, or the concentration of textile-related companies is an example of the wartime economy.

KCI등재

저자 : 김준배 ( Kim Joon-bae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45-38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진행된 전근대 최대 규모의 동아시아 삼국 간의 국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피침략국이었던 조선, 명은 물론 침략국 일본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수많은 관련 문헌의 생산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쟁 초기 동래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일화가 『징비록』 을 통해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국가에 충성을 다한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감동을 주어, 에도 시대 일본에서 용맹스럽고 충절을 갖춘 인물로 여러 문헌 속에 그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송상현 표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유입된 다양한 조선의 문헌에 의해 보충되어, 송상현은 보다 더 용맹하고 충절을 갖춘 인물로 근대 일본 문헌 속에 그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보다 더 장렬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심지어 어떠한 문헌에서는 그를 '국사(國士)'로 칭하여, 송상현은 근대 일본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훌륭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송상현에 대한 평가의 배경에는 그의 죽음과 매장의 방식을 높게 평가 했던 일본인들의 태도가 있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키다가 당당하게 순절한 것은, 무사로서 주군을 위해 전장에서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일본의 전통적 무사관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일본에서 매우 훌륭하게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죽은 뒤 이루어진 그의 매장이 일본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점이었다. 침략자의 입장에 있던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그의 매장은 적군에 대한 진혼(鎭魂) 행위로서, 승자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일본에서 칭송받는 일이었으며, 또한 이는 스스로의 침략군으로서의 속성을 약화시키고, 정벌군으로서의 속성을 강화시키는 행동이었다. 송상현은 일본인들에게 있어 동래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훌륭한 인물임과 동시에, 결국 패배하여 자신들에게 진혼됨으로써 자신들의 자비심도 보여주게 만들어 준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죽음과 매장의 방식으로 인해 송상현의 일화는 에도 시대는 물론, 근대에도 일본 문헌에 상세히 기록될 수 있었으며, 이순신(李舜臣)보다도 일본인들에게 비판받지 않는 인물로서 현재까지 일본 문헌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The Imjin War was the largest international war between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in the pre-modern era, which took place from 1592 to 1598. This war had a tremendous impact on the invaded countries such as Joseon and Ming, as well as the aggressor Japan, and sparked the production of numerous related documents. In this process, the anecdote of Song Sang-hyeon who passed away while protecting Dongrae fortress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was transmitted to Japan through 'Jingbirok', and the fact that he was loyal to the country even risking his death moved the Japanese people, He was portrayed in various literatures as a brave and loyal character in Japan. This image of Song Sang-hyeon was supplemented by various Joseon literatures introduced to Japan after the Meiji Restoration, and Song Sang-hyeon was portrayed in modern Japanese literature as a more valiant and loyal person, and his death was portrayed more fiercely. Some literatures even called him 'A great scholar representing the country', and Song Sang-hyeon was evaluated as a great figure representing Joseon in modern Japan.
The background of this evaluation of Song Sang-hyeon was the attitude of the Japanese who highly valued his death and burial method. The fact that he bravely sacrificed while guarding the castle at the risk of death was in line with the traditional Japanese samurai, who took it for granted as a samurai to die on the battlefield for his lord, and was worthy of a very good evaluation in Japan. It was also important to note that his burial after his death was by Japanese soldiers. His burial by the Japanese soldiers in the position of the aggressor was praised in Japan as an act of remembrance to the enemy army and as an act of showing the victor's compassion, and this weakened its own character as an aggressor and served as a conquest force. It was an action that strengthened the attribute. To the Japanese, Song Sang-hyeon was a great figure who died while defending Dongrae fortress, and at the same time, he was a person who made Japanese show their compassion by eventually being defeated to them. Because of his death and burial, Song Sang-hyeon's anecdote could be recorded in detail in Japanese literature not only in the Edo period but also in modern times.

KCI등재

저자 : 박현수 ( Park Hyun-soo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83-414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萬歲前」에서 동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이인화의 여로 가운데 부산이라는 공간에 천착해 그 실상과 의미를 해명하려 했다. 「萬歲前」에서 이인화가 부산시가를 구경하는 장면의 의미에 관한 논의는 이루어진 바 있지만 여전히 미진한 느낌을 준다. 이 글은 이인화가 부산으로 갈 때 탔던 관부연락선의 실상과 의미에 대해서도 주목을 했다. 연락선에서 삼등실 승객은 식당이 아니라 선실에 차려진 식탁에서 돌아가면서 아침을 먹어야 했다. 이와는 달리 일등실, 이등실 승객들은 전용 식당에서 종업원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했다. 연락선은 승선권의 등급에 따라 객실, 세면실, 갑판 등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 글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인 갑판이 어떻게 구분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이인화는 선박이 부두에 접안할 수 있게 한 잔교를 통해 부산 부두에 직접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층집만 가득한 부산 시가를 보고 흰 옷 입은 백성들의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는데, 당시 '신호(神戸)'에서 부산을 방문한 시찰단이 남긴 언급 역시 그것과 겹쳐진다. 이인화가 걸었던 곳은 부산항 매축공사를 통해 조성된 매축지 대창정이었다. 일본 국숫집에 들어간 그는 술을 마시다가 종업원들이 무례한 행동이 계속되자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느낀다. 소설에 등장한 일본 국숫집은 조선에 우동집이나 소바집이 유입되었던 초창기의 그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하나는 카페였고 다른 하나는 우동 갈보집이었다. 이인화가 일본 국숫집을 방문한 장면은 「萬歲前」이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모습을 핍진하게 그렸다는 평가와 어긋나지 않는다.


In < Mansejeon(萬歲前) >, Lee In-Hwa visited Busan city. Discussion about Lee In-Hwa's route in the railway ferry, Busan port, and Busan city has been made, but it is not enough. < Mansejeon(萬歲前) > showed the details of Busan city in the late 1910s. This article also demonstrate the railway ferry operating from Shimonoseki to Busan at the time. This article also tried to reveal the personality of the third-class cabin of the ferry, the bathhouse, and the passengers. The railway ferry on which Lee In-Hwa rode left 'Shimonoseki' at 10 pm and arrived in Busan at 9 am the next morning. This article reviewed the cabin layout of the railway ferry and demonstrated that there was no restaurant for third-class passengers on board. All spaces of the railway ferry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class of the boarding pass. At that time, the Busan Station was right next to the Busan pier. Arriving in Busan, Lee In-Hwa took a tour of the city. The place filled with Japanese houses was a reclaimed land created by the reclamation work of Busan Port. He visited the japanese noodle restaurant there, it wa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and differentiation of restaurants in the Joseon. In 1908, Japanese railways were connected from Hokkaido to Kyushu. The role of the railway ferry at the time was to link Busan with the railroad leading to Shimonoseki from all over Japan. The purpose of the reclamation work of Busan Port was also to move smoothly from Busan to the mainland via Gyeongseong. The role played by the railway ferry operating from Shimonoseki to Busan was to connect the broken railroad. Busan was a bridgehead for colonizing Joseon and advancing into the continent. Also, it was a space that internalized not only national discrimination but also class hierarchy.

12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