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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부산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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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43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408
항도부산
43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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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피난지 부산에서의 조산사 양성 - 일신부인병원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임하 ( Lee¸ Im-ha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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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부산'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염두 하면서 부산 일신부인병원의 조산교육을 살펴본 것이다. 부산 일신부인병원(IL SIN Women`s Hospital) 관계자가 연간 보고서에서 '한국 유일의 조산 교육을 실시한다'라고 소개했듯이 일신부인병원은 1950년대 이론교육과 함께 임상실습이 가능했던 곳이다.
일신부인병원은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인 제임스 노블 맥켄지와 메리 켈리의 딸들인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52년 2월 부산에 들어온 매혜란과 매혜영은 9월 17일에 일신부인병원을 개원했다.
전쟁으로 간호사와 조산사의 1/3 가량이 행방불명된 상황에서 이들의 양성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런데 조산교육은 이론교육과 함께 임상교육이 병행되어야 했다. 일신부인병원이 내세운 강점 중 하나는 1인이 최소 20명 이상의 산모를 관리하고 출산을 관찰하도록 교육 과정이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일신부인병원 조산 교육은 1954년 이후 자리 잡아갔다. 일신부인병원은 1950년대 산전·산후 관리와 산과 병상을 갖추었고 교육생은 전국 각지에서 조산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다.
부산 일신부인병원이 자리잡기까지 다양한 단체와 인물들의 지원이 있었다. 호주 장로교, AFAK, UNKRA, OEC, 미국과 호주에서의 다양한 기부품과 기부금, 미군 군의들, 부산미군군수기지사령부, 부산지역 병원들, 옥스팜 등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지원은 피난지 부산이 병참기지이자 임시수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산교육생들은 일신부인병원 직원이었으며, 직원 중 이들의 비중은 1/3에 달했다. 이들은 모두 간호사 자격을 갖춰 병원이 토대를 마련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위의 다양한 지원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지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sheds light on midwife education carried out at IL SIN Women' Hospital in Busan, paying attention to the locality and historicity related to Busan. This hospital was where clinical practices were carried out alongside theoretical education in the 1950s during the Korean War and a relevant annual report referred to it as “The only place in Korea where midwifery service-related education is carried out.”
IL SIN Women' Hospital was run by Helen P. Mackenzie(Mae Hyeran) and Catherine Mackenzie(Mae Hyeyeong), the daughters of James Noble Mackenzie, a missionary dispatched by 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and his wife Mary Kelley. The two sisters arrived in Busan in February 1952 and opened the hospital in September 17 of the same year.
Back then, about a third of nurses and midwives of the country went missing in the turmoil of the war, and thus the professional training of people for such services was needed above all else. For midwifery service-related education, clinical practices had to be carried out along with theoretical education. A specialty that this hospital was known for was its educational program designed so that one midwife could take care of at least twenty mothers and watch their delivery process.
The midwifery service-related education of this hospital came to be firmly established in 1954 and onward. During the 1950s, the hospital came to be equipped with obstetric beds and a pregnancy care clinic. The hospital became flooded with aspiring midwife candidates from across the country.
During the Korean War, Busan served as the provisional capital of the country and a military logistics base, while the hospital received support from many organizations and benefactors including 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AFAK, UNKRA, OEC, and U.S. Army surgeons, the Pusan(Busan) Military Post, local hospitals, Oxfam, etc.
At that time, the midwife trainees accounted for a third of the personnel at IL SIN Women' Hospital. They eventually became qualified as midwives and nurses and played critical roles in the hospital's operation. We should commemorate all those who provided generous support for this hospital, which has set an example for national midwife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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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피란수도 부산의 전염병과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방역 지원활동

저자 : 조성훈 ( Cho¸ Sung-h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7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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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한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산시에는 늘어난 피난민과 함께 전염병이 크게 늘어났다. 1951년 6월 초 부산시 인구는 피난민 약 27만 명을 포함해 883,339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천연두 백신 접종은 시민 전체의 69.3%, 장티푸스 접종은 62.6%, 발진티푸스는 75.7%였다. 1951년 1월 1일부터 1954년 7월 1일까지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의 천연두 예방 접종은 인구 160%, 장티푸스는 200%, 발진티푸스는 98% 수준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효과적인 방역으로 1951년 10월 이후에 부산시에서는 전염병 통제가 안정적인 단계로 이어졌다. 이는 부족한 의료 인력, 낮은 의료시설, 냉장고 부족 등을 극복한 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공공보건 지원정책의 성공을 의미한다. 인구 수보다 많은 백신을 확보해 경찰 관서까지 동원한 접종 외에도 개인별 뿐만 아니라, 주택, 공공건물, 화장실 등에 DDT 살포를 실시했다. 한국 정부 및 부산시와 협조해 상수도 소독 및 확장, 청결운동을 비롯한 분뇨와 오물, 쓰레기 수거를 위한 인력과 트럭, 손수레, 우마차 등 확대로 위생여건의 개선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부산시 피난민을 초기 35만 명에서 27만 명 수준으로 적절히 분산시켰던 점도 의미있는 대책이었다.
1952년 말까지 성공적으로 보였던 방역 성과는 1953년 2월초에 이르러 특히 천연두는 부산시에서 69명이 발생해 24명이 사망한 경우처럼, 아동에 대한 접종 누락, 격리 기피 등 방역대책의 허점이 있었다. 한편 결핵은 급성 전염병 방역에 밀려 195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1952년 2월 하순 부산시에서 검사를 시작해 10만 명이 검사를 마쳤고, 아동들에게도 접종을 확대했다. 이처럼 대상이 제한되어 전쟁 이후에 본격적인 예방조치가 필요했다.


After the outbreak of the war, the number of epidemics increased seriously in Busan with the rushing number of refugees. The population of Busan was 883,339, including about 270,000 refugees in the early June 1951. Among them, smallpox vaccination accounted for 69.3%, typhoid vaccination 62.6%, and typhus 75.7%. From January 1, 1951 to July 1, 1954, smallpox vaccination in Gyeongsangnam-do including Busan, reached 160% of the population, 200% of typhoid, and 98% of typhus.
With such an effective control, after October 1951, the infectious diseases in Busan had been stable. This means the success of the UNCACK's public health policy overcoming shortages of medical personnel, low medical facilities, and refrigerators. In addition to vaccinations that have secured more vaccines than the population and mobilized even policemen, DDT was sprayed not only on individuals but also on houses, public buildings, and toilets. In cooperation with the Korean government and Busan City, the improvement of sanitary conditions was also helped by the water disinfection and water supply expansion and cleaning campaigns, as well as manpower to collect excrement, filth, and garbage, and trucks, handcarts, and oxcarts. Also, it was a meaningful measure to adequately disperse the refugees in Busan from the initial 350,000 to 270,000.
The epidemic prevention performance that had been successful until the end of 1952. But there were loopholes in the prevention measures such as omission of vaccination for children and avoidance of quarantine in early February 1953, the case of 69 smallpox outbreaks and 24 deaths in Busan. On the other hand, tuberculosis was pushed aside by the epidemic prevention and control, and full-scale measures were not implemented until 1952. In late February 1952, the test started in Busan, and 100,000 people completed the test, and the vaccination was expanded to children. As the target was limited, full-scale preventive measures were necessary after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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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국전쟁기 보건·위생교육과 현실

저자 : 이창영 ( Lee¸ Chang-you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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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보건·위생교육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전쟁은 남한의 의료체계를 붕괴시켰고, 개인의 위생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 역시 대부분 파괴되었다. 단기적으로는 긴급 구호와 치료로 당면한 보건·위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보건·위생 환경과 개개인의 인식을 개선시킴으로써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정부는 위생경찰을 통해 청소를 감독하고 전염병 환자를 단속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1951년 6월 보건진료소설치계획을 통해 보건진료소를 개설하고자 했지만 1952년에도 보건진료소는 보건·위생 사상을 높일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보건부는 1951년 9월부터 내무부로부터 위생 관련 사무를 재이관 받았다.
보건부는 단독으로 보건·위생교육을 실시할 수는 없었지만, 유엔민사원조처(UNCACK)의 협력을 통해 1952년 세계 보건의 날 행사를 진행하고 각종 교육 자료를 배포했다. 책자와 포스터는 전국에 각각 약 16,000부, 2,000부가 배포되었고, 영화는 4편이 상영되었다. 교육의 내용은 주로 전쟁 초기부터 지적되어 왔던 환경위생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개인의 청결과 불결은 각각 건강과 질병으로 대비되었고, 위생적인 환경을 위해 개인은 상수 및 우물 관리, 거리 청소, 쓰레기 정리, 변소정리 및 분뇨 처리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서도 질병의 전파 경로, 물 등에 대해서 지식을 습득해갈 수 있었다.
교육의 내용들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이전에 비해서 증가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 내용은 개인의 일상을 개조하는 것이었고, 교육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에 계속 재생산 될 것이었다. 교육은 단속과 처벌보다는 민주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보건·위생교육은 비상시국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애국반, 위생 감찰원, 위생반의 지도와 감독이 뒤따랐으며, 개개인은 보건·위생의 내용을 내면화해야했다.
보건·위생 사상의 내면화는 문명세계와 한국을 대비시켰고, 새로운 한국인의 모습을 만들도록 추동했다. 그것을 만드는 기제는 수치스러움이었다. 수치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보건·위생 사상은 반드시 내면화되어야 했다. 한국전쟁기 실시된 보건·위생교육은 기본적으로는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과제였다. 여기에 개개인의 행동이 규정되었으며, 개개인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행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내면화는 한국이 서구 문명처럼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행동이 되어갔다.


The Korean War and public health and hygiene education had a close relationship. The Korean War collapsed the Korean medical system, which destroyed most of the environments that could maintain public health and personal hygiene, causing problems. In the short term, emergency relief and treatment were able to withstand it, but in the long term, it was necessary to prevent diseases and improve the public health and sanitation environment. However,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the government focused on supervising cleaning through sanitary police and cracking down on infectious disease patients. In June 1951, a health clinic was intended to be opened through a plan to establish a health clinic, but in 1952, the health clinic was not playing a role in enhancing public health and hygiene ideas.
The Ministry of Health has been transferred hygiene-related affairs from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since September 1951. In addition, through cooperation with the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UNCACK), the World Health Day event in 1952 was held to promote public health and hygiene enlightenment through brochures, posters, and movies. About 16,000 and 2,000 books and posters were distributed nationwide, respectively, and four films were prepared. The content of education was mainly related to environmental sanitation, which had been pointed out since the beginning of the war. Individual cleanliness and uncleanness were prepared for health and disease, respectively, and for a sanitation environment, individuals acquired behaviors such as water and well management, street cleaning, garbage cleaning, toilet cleaning, and manure treatment. Through movies, Koreans gained knowledge about the spread of diseases and water.
The contents of education were quantitatively and qualitatively increased and systematically organized compared to the previous one. The content was to modify an individual's daily life, and it would continue to be reproduced in individuals and society through education. This should have been a democratic education rather than crackdown and punishment as before. However, in the face of war, personal health and hygiene were only necessary tools to overcome emergency situations. This was followed by guidance and supervision of the Patriotic Corps, the Sanitation Inspector, and the Sanitation Team. Public Health and hygiene ideas had to be internalized, which had to be voluntary, but continuous monitoring followed. In addition, the internalization of public health and hygiene thoughts contrasted the civilized world and Korea, and encouraged them to create a new image of Koreans. The mechanism for making it was shame. In order to overcome shame, public health and hygiene ideas must be internalized. As such, public health and hygiene education conducted during the war defined individual daily life, was included in the logic of war, and furthermore, it was an essential task to be overcome for moderniz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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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세 부산의 역사와 “만덕동 사지”

저자 : 이종봉 ( Lee¸ Jong-bo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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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만덕동 사지의 공간적 장소와 출토 유물 등을 통해 검토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덕동 사지는 고려에서 조선초기까지 東萊縣ㆍ郡과 梁州ㆍ梁山郡의 속현이었던 東平縣의 공간적 범위 내에 있었다. 동평현은 仙岳寺鐘銘을 통해 戶長과 諸長吏 등의 향리세력이 존재하였고,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동평현에는 동평이씨 등의 土姓이 존재하였고, 이들 세력은 낙동강을 기반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다. 동평현의 지배세력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덕천동 고분군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덕동 사지와 선악사 등의 주요 단월로 존재하였다.
둘째, 만덕동 사지는 국장생, 당간지주, 3차의 발굴에서 드러난 금당, 사지 주위의 유물 산포지 등을 고려할 때 상당한 범위의 사역을 가지고 있었다. 만덕동 사지의 사명은 '祇毗寺'의 기와 명문과 <金山寺香完銘>에 '祇毗寺'의 기록, 그리고 부산ㆍ경남지역에서 최근 발굴된 사지의 명문과 문헌에 기록된 사명이 일치하는 사례 등을 고려할 때 '기비사'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만덕동 사지는 3차에 걸친 발굴에서 금당지의 규모, 그리고 고급의 상감청자, 치미, 잡상 등의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고려할 때 高麗 12ㆍ1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최고의 사세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rough a place of the Mandeok-dong temple site and excavated objects, it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from the Goryeo to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Mandeok-dong temple site was within the extent of Dongpyeong-hyeon(東平縣) where was Dongrae-hyeonㆍgun(東萊縣ㆍ郡) and Yangju·Yangsan-gun`s Sokhyeon (屬縣). In the Dongpyeong-hyeon, according to Seonaksa-Jongmyeong(鐘銘), there were Hyang-Ri(鄕吏) group -Hojang(戶長), Jejangri(諸長吏) and others-, it was governed under them. And also an indigenous family name of Dongpyeong Lee Clan existed, this power would have accumulated economic wealth stand on the basis of Nakdonggang River. Based on this economic wealth, Dongpyeong-hyeon`s ruling power not only built the Deokcheon-dong Ancient Tombs but also existed as the Mandeok-dong temple site and Seonaksa temple`s major Danwol(檀越).
Secondly, contemplating that Gukjangsaeng(長生標), Danggangiju(幢竿支柱), Geumdang(金堂)(was revealed in three-time excavation), an area of scattered antiquities around temple site, the Mandeok-dong temple site had a considerable range of temple domain, Considering that the name of the temple site in Mandeok-dong coincides with the inscriptions of the roof tiles of 'Gibisa', the Geumsansahyangwanmyeong, and the inscriptions and documents of the recently excavated temple site in Busan and Gyeongnam, it can be seen that the temple`s name is 'Gibisa'.
Thirdly, the scale of the Geumdang site was found in the three-time excavation of the Mandeok-dong temple site, and also important relics such as high-quality inlaid celadon porcelain, Chimi(鴟尾), Jabsang(雜像). Considering that, it would have maintained the supreme influence in the period around the 12th and 13th centuries of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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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시기 기비사의 건립과 기능

저자 : 조명제 ( Cho¸ Myung-je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7-17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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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사지'라는 명칭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를 유배하였던 만덕사를 부산의 만덕동에 있었던 사찰로 본 추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전근대에 만덕사가 전국에 몇 군데나 존재하였고, 고려시기에는 백련결사의 중심지였던 강진의 만덕사가 유명하다. 정사 기록만으로 석기가 유배된 만덕사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고, 부산에 있던 사찰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더욱이 발굴 조사를 통해 기비사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나왔기 때문에 사찰의 명칭은 만덕사가 아니라 기비사가 옳다.
기비사는 『장아함경』에 붓다가 설법하던 곳에서 유래한 사찰 명칭이다. 이와 비슷한 명칭은 경주에 세운 기원사, 기림사 등이 있으며, 사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작명이다. 1178년에 기비사 주지가 금산사 향완을 조성하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기비사는 유가종에 소속된 사찰이었다.
기비사가 건립된 배경은 후삼국 전쟁기에 동남해 연안과 낙동강 하류 지역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과 관련된다. 고려왕조는 후삼국을 통합한 후에 후백제와 세력다툼을 벌였던 낙동강 하류 지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비사를 건립하여 주지를 파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비사는 동래와 구포를 연결하는 고개에 있으며, 육로와 수로를 통해 부산, 양산, 김해로 이어지며, 나아가 동남해 항로로 연결되었다. 기비사는 이러한 교통 네트워크와 연관된 원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기비사는 빈민 구제, 여행자를 위한 다양한 사회사업을 수행하였으며, 그러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보를 운용하였다. 한편, 김해의 낙동강 하구(현재 부산 녹산)에 일본과의 외교 기능을 담당하던 동남해도부서가 설치되었고, 일본과의 불교 교류가 인근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기비사는 일본과의 불교 교류에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The name of Mandeoksa(萬德寺) Temple Site originated from the record in Goryeosa(高麗史) that Seokgi(釋器), the son of King Chunghye, was exiled to Mandeoksa Temple. However, in the pre-modern period, there were several temples called Mandeoksa Temple nationwide, and Mandeoksa Temple in the Goryeo Dynasty was famous as the center of a religious association led by Yose(了世) in Gangjin, Jeollanam-do. Therefore, there is no basis for considering Mandeoksa Temple, to which Seokgi was exiled, as a temple in Busan. Moreover, the claim that name of temple is Mandeoksa cannot be valid as a tile engraved with Gibisa(祇毗寺) Temple was uncovered by an excavation team of the Busan Museum,
The origin of the name, Gibisa Temple, can be traced back to the place known as where Buddha preached as described in Digha Nikāya. This is also the case with the name such as Giwonsa(祇園寺) Temple and Girimsa (祇林寺) Temple, which were built in Gyeongju during the period of Silla dynasty. In 1178, the chief monk of Gibisa Temple played a central role in creating the incense burner of Geumsansa(金山寺) Temple. Considering this, Gibisa Temple can be seen as one of the temples that belonged to the Yuga Order(瑜伽宗).
The background of the construction of Gibisa Temple is related to the strategic importance of the southeast coast and the downstream Nakdonggang River during the Later Three Kingdoms War. The Gibisa Temple seemed to be built by the active support of the new regime, Goryeo Dynasty as an attempt to control the area of down the Nakdonggang River, the former centre of power struggle between Goryeo and Hubaekje.
Gibisa Temple is located on a pass that connects Dongnae and Gupo, and leads to Busan, Yangsan, and Gimhae through land and waterways, and further connected to the Southeast Sea route. Gibisa Temple functioned as lodgings, which can be attributed to its location associated with the transport network, Furthermore, Gibisa carried out various social projects for the poor and travelers, and had a financial foundation for implementing such projects. Meanwhile, it is presumed that Gibisa Temple performed functions related to Buddhist exchanges with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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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산 만덕사지 가람배치와 창건연대

저자 : 양은경 ( Yang¸ Eun-gye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7-21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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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사지는 1990년부터 2002년까지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지와 강당지 그리고 회랑지 일부가 확인되었지만, 탑지는 그 위치조차 찾지 못하였으며 나머지 건물지도 구체적인 내용이 파악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금당지는 심각한 유구 훼손으로 인해, 건물복원과 관련된 내용은 파악하기 힘든 상태이다. 그러나 금당지의 기단석은 원상에 가깝게 남아 있었던 이유로 인해, 전체적인 평면구조와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였다. 금당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유구 자체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금당의 웅장한 규모는 이 곳에서 출토된 대형 치미를 통해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으며, 만덕사지의 위상과 규모를 상상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만덕사지 석탑은 사찰의 중심 사역이 아닌 주변 지역의 여기저기서 수습된 석재들을 모아 하나의 탑으로 복원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서는 중심 사역 내에서 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석탑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고증작업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동시에 조속히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탑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필자는 만덕사지 금당지 북쪽에 위치한 강당지와 좌우 부속건물지는 사찰의 연대와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당지와 좌우 건물지의 평면 형태와 건물구조만을 기준으로 만덕사지의 창건연대를 판단하면, 고려시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본고에서 살펴본 만덕사지 가람은 산지 자락의 지형을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평평하게 조성한 후, 남쪽에서 북쪽으로 금당과 강당을 배치하고 회랑이 이들을 둘러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기존 학계에서 강조한 것처럼 만덕사지와 선종 가람의 연관성은 크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또한 필자는 본고에서 만덕사는 범어사, 통도사 등 부산지역의 대규모 가람과 더불어 통일신라 왕실 혹은 고려 왕실 불교와 관련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만덕사와 고려 왕실과의 연관성은 고려시대 동래 정씨 세력과 왕실과의 밀착된 배경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부산지역 사찰의 큰 후원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The Mandeoksa Temple site was excavated on three occasions between 1990 and 2002, resulting in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of the main dharma hall (Golden Hall), the lecture hall, and parts of the galleries. However, the pagoda and other temple facilities have yet to be identified or confirmed.
The excavation of the site of the main dharma hall revealed that the remaining structures had been heavily damaged, leaving no clues or information about its origin, history or restoration. Fortunately, the foundation stones had been preserved almost fully intact, providing evidence about the floor layout and the size of the building. What is particularly notable about the discoveries made at this site is the fact that the remaining structure of the main dharma hall is impressively large. In this context, the remarkably large ridge-end tile (chimi) found at the site is regarded as decisive proof of the status and sheer size of Mandeoksa Temple.
The surveys conducted as a part of this study revealed that the stone pagoda of Mandeoksa Temple, currently held at the Busan Museum, was once restored using stones collected from the vicinity of the temple site, rather than from the central area where it was presumed to have been located. The surveys also revealed that originally there was no pagoda at the center of the temple's sanctuary, which means that any future restoration of the pagoda will have to be rigorously based on precise historical evidence and, therefore, that further research will be required to answer various questions regarding the pagoda.
This study shows that the remains of the lecture hall situated behind the main dharma hall and the other temple facilities on both its sides are important resources for studies on the origin and background of Mandeoksa Temple. In fact, the architectural layout and structures of the buildings suggest that the temple was originally built during the Goryeo period. Furthermore, the structural remains and artifacts discovered at the sites of the buildings that originally flanked the lecture hall suggest that they had nothing to do with the actual daily life of the monastic community.
The archaeological study of the site shows that Mandeoksa Temple was built on a tract of land that was levelled out by building retaining walls and making the most of the topographical features of the mountainous area in which the temple was located, and that the temple's principal buildings, notably the main dharma hall and the lecture hall, were built on a south-north axis and surrounded by galleries. The architectural layout also suggests that, contrary to the conventional view, Mandeoksa Temple was not connected with the Seon (Chan, or Zen) Buddhism of the Goryeo period in any significant way. Meanwhile, the study concludes that it is highly possible that Mandeoksa Temple wa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royal households of Unified Silla or Goryeo, as was the case with Beomeosa Temple, one of the largest and oldest Buddhist temples in the Busan area, and Tongdosa Temple in Yangsan. The connection between Manseoksa Temple and the royal family of Goryeo can be explained by the close relationship maintained between the royal family of Goryeo and the Dongnae Jeong clan, which was - or so it is conjectured - the major patron of Buddhist temples in the area around present-day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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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와로 본 부산 만덕동사지의 성격

저자 : 최정혜 ( Choi¸ Jeong-hey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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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사찰인 만덕동사지 출토 기와를 통해 유적의 창건과 폐사시기, 사격(寺格) 등 전반적인 성격에 대해서 검토한 것이다.
만덕동사지는 부산박물관의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금당지·회랑지·계단지·추정 강당지·배수로 등이 확인되었으며, 여기서 다량의 기와를 비롯하여 도자기·토기·도기·석제유물 등이 검출되었다.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기와는 기종에 따라 명문기와·막새·연목기와·치미·귀면문장식기와·용두·잡상·암키와 수키와 등으로 구분된다.
사찰의 명칭과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기비사(祇毗寺)명문기와는 분석결과 기비사는 역사문헌에 보이지 않지만,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금산사명금동향완의 명문을 통해 고려시대에 실존하였던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막새와 암막새는 고려 초기부터 고려후기까지의 다양한 형식이 존재하며, 지붕마루를 장식하는 치미·용두·잡상·귀면문장식기와는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 주는 형식이다.
만덕동사지는 명문기와를 통해 볼 때 기존에 알려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만덕사가 아니라, 고려 중기에 삼중대사가 주지로 주석하였던 기비사임이 분명하다. 막새의 형식적 특징으로 보아 사찰의 창건 시기는 고려초기인 10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되며, 이후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만덕동사지는 사찰의 규모를 포함하여 치미가 황룡사지 출토품과 크기가 유사하고 용두·잡상 등이 지붕 장식기와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려왕실 관련 사찰에 버금가는 위계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Based on the roof tiles excavated from the Mandeok-dong Temple remains, a representative Goryeodynasty temple in Busan, this study reviews the temple's general features, including how it was constructed and fell into ruins and its current status.
Three excavations by the Busan Museum identified sites of the temple's main building, the corridor, a staircase, a lecture hall, and the drainage.A large number of roof tiles, ceramics, earthenware, pottery, and stone artifacts were also discovered. The tiles, which made up a greater proportion of the relics, were classified into inscription tiles, roof-end tiles, rafter tiles, pheasant tail tiles, gargoyle tiles, dragon head tiles, small figure tiles, and concave and convex tiles.
An analysis shows that the Gibisa Temple inscription tiles, which apparently reflect the name and characteristics of the temple, are not mentioned in the historical records. However, an inscription tile of Geumsan Temple's gilt bronze incense burner,currently housed in the Tokyo National Museum, confirms that the temple indeed existed during the Goryeodynasty. There are various forms of convex and concave roof-end tiles belonging to the early to the late Goryeoperiod, and the pheasant tail tiles, dragon head tiles, small figure tiles, and gargoyle tiles that decorate the roof ridge have a form exhibiting typical Goryeo-style characteristics.
Based on the inscription tiles, the Mandeok-dong Temple remainsare not the Mandeoksa Temple recorded in History of Goryeo and Essentials of Goryeo History, but must be Gibisa Temple, where the monk Samjung presided as a Buddhist Master. Given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roof-ends, the temple must have been founded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10th century during the early Goryeodynasty, and probably existed until the late Goryeo or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pheasant tail tilesfrom Mandeok-dong Temple remains are similar to the items excavated from the Hwangnyong Temple ruins,including their size, and given that the dragon head and small figure tiles were used as roof decorators, they must have had a status comparable to that of the temple closely related to the Goryeo royal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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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산 동래에서 출토된 새로운 고려 기와 명문 - 기와의 조달, 공공 건물로서 오리정(五里亭)과 관련하여 -

저자 : 구산우 ( Koo¸ San-woo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9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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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330번지에서 고려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전체적으로 건물지가 중심을 이룬다. 두 구역으로 이루어진 이 유적에서 하나의 구역에서는 대형 건물지가 만들어졌고, 다른 구역에서는 여기에 부속되는 건물로서 亭子나 그에 준하는 소규모 건물이 지어졌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 중 대부분은 고려시기의 대표적 유물인 靑瓷였고, 총 176점의 기와 중 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24점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기와 명문은 禑王 13년 이전에 만들어진 東萊郡 治所城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우왕 13년 이전에 건설된 동래군 치소성과 같은 시점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왕 13년 이전에 조성된 동래군 치소성과 이 유적은 직선으로 5.8km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기와는 동래군의 州縣軍을 동원하여 조달하였을 것이다. 두 명의 戶長들이 주현군과 白丁 농민, 불교사원의 신도를 지휘하여 동래군 치소성을 건설하는 데 사용한 기와를 만들고, 또 그 기와를 이 유적까지 운반하여 이 유적의 건설에 필요한 물자로 공급했을 것이다.
우왕 13년 이전에 조성된 동래군 치소성의 客舍 건물에서 출토된 기와 명문과 鄕吏의 가장 우두머리인 호장의 표기에서 성씨와 이름을 모두 기록한 점을 동시에 감안하면, 동래군 치소성이 건설된 정확한 시점은 1373년(恭愍王 22)으로 추정된다. 그 14년 후인 1387년(우왕 13)에 동래군 치소성을 내륙으로 옮겼고, 그것이 조선시기의 동래 邑城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이 유적은 고려시기의 동래군 치소성에서 5里의 거리에 있는 공공 건물인 五里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기의 오리정의 존재와 그 기능은 과거에 급제한 進士가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 거행한 환영 행사인 榮親儀를 통해 알 수 있다.


Recently, Goryeo ruins were excavated at 330 Oncheon-dong, Dongnae-gu, Busan. The building site is situated at the heart of the ruins. In this two-zone ruins, a large building site was built in one zone, and in the other zone, a pavilion or similar small buildings were built as a building attached to it.
Most of the relics excavated here were celadon, a representative relic of the Goryeo Dynasty, and 176 rooftiles, 24 of which were inscribed. Most of the rooftile inscriptions were the same as those used in Chiso Castle in Dongnae-gun, which were made before the 13th year of King Wu's reign.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this relic was built at the same time as Chiso Castle in Dongnae-gun, which was built before the 13th year of King Wu's reign.
These ruins and Chiso Castle in Dongnae-gun, built before the 13th year of King Wu's reign, are 5.8km away in a straight line. The rooftiles might have been made and carried by mobilizing Juhyeon-gun(州縣軍). Two Ho-jang(戶長) might have led Juhyeon-gun, Baekjeong(白丁) farmers, and Buddhist worshippers to make tiles used to build Chiso Castle in Dongnae-gun, and carry them to the ruins as necessary supplies for the construction of these ruins.
Considering that both the family name and name were recorded in the rooftile inscription excavated from the guesthouse building in Chiso Castle in Dongnae-gun, which was built before the 13th year of King Wu's reign, and the notation of Ho-jang, the head of Hyangni(鄕吏), it is estimated that the exact time of the construction of Chiso Castle in Dongnae-gun was 1373 (the 22nd year of King Gongmin's reign). Fourteen years later, in 1387 (the 13th year of King Wu's reign), Chiso Castle in Dongnae-gun was moved inland, and it continued to be used as Dongnae-eupseong(邑城)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is possibly argued that this relic was Orijeong(五里亭), a public building located 5-ri(里) away from Chiso Castle in Dongnae-gun during the Goryeo Dynasty. The existence and function of Orijeong in the Goryeo Dynasty can be seen through Yeongchinui(榮親儀), a welcoming event held when Jinsa(進士), who passed the state exam in the past, returned to his home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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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18세기 왜관의 연료 소비 양상과 연료 지급 방법

저자 : 여민주 ( Yeo¸ Min-ju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7-32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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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의 관점에서 왜관에서 사용하는 연료의 소비 형태와 지급받는 인원과 지급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했다.
왜관에 상주하거나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왜관에 거처하는 동안 일상생활을 위해서 연료가 필요했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겨울철 난방을 위해서 땔나무와 숯이 사용되었다. 의식주뿐만 아니라 수공업용으로도 연료가 사용되었는데, 조선은 이를 우호적으로 지급하고자 했다.
조선이 왜관에 연료를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1611년부터이며, 송사부터 관수 왜, 별차왜까지 연료를 지급했다. 왜관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직책이 늘어나는 만큼 조선은 연료를 지급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연료를 지급받는 인원들이 늘어나면서 연료가 부족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연료 지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연료로 사용하는 땔나무와 숯은 봉산과 시탄가포를 통해 마련했다. 조선은 부산진에 양산 내포와 화제리에 탄봉산을 절급하였고, 여기서 숯을 마련해서 왜관까지 운반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 땔나무는 절영도에서 마련하였다. 시탄가포를 통해 시탄을 마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경상 좌·우도의 각 진에서 시탄을 마련해서 부산진에 수납하고, 부산진이 왜관에 지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시탄을 마련하기 어려워지면서 시탄가포를 부산진에 지급하여 구매해서 지급하였다.
왜관에 연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왜관과 조선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했다. 연료 지급날짜 지키지 않자 난출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은 계속해서 왜관의 시탄 지급에 대한 규정을 추가·개정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에서는 왜관에 거처하는 일본인에게 지급하는 시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This study attempted to examine the consumption type of firewood used in Waegwan from the perspective of Joseon, the number of people paid, and the method of payment.
Japanese residents or visitors to Waegwan needed fuel for their daily lives during their stay in Waegwan. Firewood and charcoal were used to cook food and fire in winter. Fuel is used not only for food, clothing, and shelter, but also for handicrafts. Joseon wanted to provide it amicably.
It was in 1611 that firewood began to be provided to the Japanese, and From gwansuwae to songsa and chawae entering Waegwan, firewood was provided. As the number of Japanese entering Waegwan increased, Joseon tried to provide fuel to them. However, as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amount of firewood paid, there was a shortage of firewood, and in this situation, Joseon tried to provide coal so that the payment of firewood would not be disrupted.
This payment method was prepared through 封山, 柴炭價布. Joseon provided Bongsan to Busanjin, Naepo and Hwaje-ri in Yangsan, and here, charcoal was loaded and transported to Waegwan for use. The firewood was prepared in Jeolyeongdo. As for how to prepare fuel through 柴炭價布, each team in the left and right provinces of Gyeongsang Province cut down firewood, dug up charcoal, and received it and paid it to the Waegwan.
However, the fuel could not be provided in time, so it was paid to Waegwan through Gapo. However, in the process of supplying fuel to Waegwan, friction occurred between Waegwan and Joseon. Failure to comply with the fuel payment date resulted in a nanchul(闌出) and murder. In order to prevent such social problems, the Joseon government continued to add and revise regulations on the fuel payment of Waegwan. Through this,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Joseon government considered the fuel paid to the Japanese living in Waegwan as impor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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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역지통신 교섭기 간사재판 시게마쓰 고노모(重松此面)의 활동 검토

저자 : 윤유숙 ( Yoon¸ Yu-soo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9-35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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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1807년 조선에 건너온 쓰시마의 간사재판 시게마쓰 고노모(重松此面)의 활동상을 검토하는 것이다. 조선과 쓰시마의 역시통신 교섭이 결렬된 채 3년째로 접어든 1807년, 막부의 확인과 추궁이 계속되자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쓰시마가 파견한 것이 간사재판 시게마쓰이다. 번의 존망(存亡)이 걸린 상황에서 쓰시마는 조선이 주장하는 '별서계(別書契) 제출'을 수용하는 안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런 의향은 시게마쓰에게 '내명(內命)'의 형태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시게마쓰는 별서계를 조선에 송부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번청에 설명하여 수빙사 이래 꽉 막혀있던 조선과의 교섭에 물고를 텄다. 또한 구체적인 협의 과정에서 시게마쓰는 조선 역관들이 작성한 '각서(覺)' · '전령(傳令)' 등을 확보하여, 쓰시마가 별서계를 제출한 이후 '조선의 역지통신 합의'가 확실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쓰시마 번청은 그의 활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강사사 오우라와 재강사 고지마에게 시게마쓰와 함께 교섭하도록 지시했다.
시게마쓰 이전에 조선에 건너간 간사재판들의 임무는 대개 조선과 쓰시마 사이에서 종결되는 사안에 대한 협의였으나, 시게마쓰는 전례가 없던 통신사의 '역지사행(易地使行)' 교섭을 담당하여 조선과 일본 차원의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이것이 역대 간사재판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시게마쓰는 간사재판, 문위행영송재판, 통신사영(通信使迎)재판까지 연이어 담당한, 독특한 경력의 재판이었다. '역지통신' 교섭에서 간사재판으로서 거둔 성과가 이후의 경력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Sigematsu Konomo (重松此面) in 1807 when he was dispatched to Joseon as a Gansa jaepan, or Kanji saiban (幹事裁判). Three years prior to 1807, Tsushima Domain's negotiations with Joseon to switch the destination of the next Tongsinsa mission to Tsushima Domain had ruptured. Sigematsu was therefore sent to resolve the situation and relieve the pressure the Edo bakufu was applying on Tsushima Domain to make progress. Because the domain believed that its existence was at stake, it had been leaning toward the option of accepting Joseon's request for the domain to submit a separate diplomatic document called byeolseogye (別書契). Such intentions were most likely shared with Sigematsu by way of an unofficial order.
Sigematsu convinced Tsushima Domain's political leaders that the only solution was to send a byeolseogye to Joseon, which succeeded in reopening the gate to negotiations with Joseon that had been closed because of Subingsa(修聘使) Hurukawa(古川). While negotiating with Joseon interpreters, Sigematsu secured un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they'd drafted such as gakseo (覺書) and jeollyeong (傳令) in order to plant devices that would guarantee an agreement with Joseon once Tsushima Domain submitted a byeolseogye. The domain's political leaders recognized the progress Sigematsu had made and ordered Oura Heizaemon (大浦兵左衛門) and Kozima Uzaemon (小嶋宇左衛門) to help Sigematsu with the negotiations.
Prior to Sigematsu, gansa jaepans were dispatched to Joseon in order to facilitate the friendly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Tsushima Domain. While Sigematsu also served as a gansa jaepan, he played a rather different role that dealt with the preliminary negotiations necessary for the Joseon Tongsinsa's next visit to Japan, which was more of a diplomatic matter between the governments of Joseon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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