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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education

  • : 한국교육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교육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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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1461
  • : 2713-6019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2권0호(1978)~44권2호(2022) |수록논문 수 : 709
한국교육사학
44권2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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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저자 : 강명숙 ( Kang Myung-sook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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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이후의 연희전문학교의 변화를 전시기 조선의 선교계 사립 전문학교의 지배구조 변화 중심으로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과 1940년 3월 공립사립전문학교규정 개정을 계기로 연희전문학교는 학칙을 개정하여 교련을 강화하고, 일본학 교과를 도입했으며, “충량유위한 황국신민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하였다. 이 시기 원한경 교장 아래서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국체명징 정책에 부응하면서도 학교 운영에서 선교사 주도권을 유지하며 대학 창설을 꿈꾸고 있었다. 1941년 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권유로 최초의 조선인 교장으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선교단체의 기부금 수혜를 거부하며 연희전문학교의 기독교 선교학교로서의 성격을 탈각시키고자 하였다. 윤치호는 「1941년도 연희전문학교 경영상 노력사항(안)」을 작성하여 재정확보, 교수와 훈련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되었으나 전시기 황국신민교육정책을 선제적으로 수용하였고, 학교 운영에서 “기독교적 원칙”은 존중되지 못했다. 1942년 8월 17일 이후 연희전문학교는 적산으로 관리되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적산관리인으로 임명되고,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여 학교 운영을 담당하였다. 1944년 5월 전시교육비 상방책에 따라 연희전문학교는 폐교되고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가 새로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폐교 후 신설이라는 형식을 취하며 교명이 바뀌고 적산관리인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는 여전히 기독교 연합 재단법인의 학교라는 점에서 연희전문학교와 연속성을 지닌 학교라 할 수 있다. 전시기 연희전문학교는 제국 일본의 정책 방향의 대척점에 서서 천황제나 국가주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This study traces the changes of Chosen Christain College(CCC) after 1937 from the perspective of the vulnerability of private mission schools during wartime. The changes can be classified into four periods. The first period (1938.4~1941.2) is structured by the Enactment of the Third Chosen Educational Ordinance in March 1938 and the Enactment of the Public-Private Professional College Regulation in March 1940. Principal H.H.Underwood amended the charter of CCC to reinforce military training, introduce Japanese Studies as a subject, and set “Education for Loyal and Useful Subjects of Japanese Empire” as the college's official purpose. While abiding by the Kokutai Theory Policy of the Japanese Empire, the college seized the initiative in its management and planned to establish a university. The second period(1941.2~1942.8) started when the Chairman of the Educational Ministry in Chosen Colonial Government General appointed Yun Chi-ho as the first Korean principal of CCC. Principal Yun attempted to part with the college's identity as a mission school by declining donations from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He also wrote a document named “1941 CCC Management Improvements” to improve its finance, faculty, and training. During this period, CCC was run by the local Korean principal, but it selectively accepted educational policies for Japanese Imperialism and failed to accord with The Christian Principles. CCC was managed as the vested property from August 17th, 1942, which was the start of the third period(1942.8~1944.5). As its administrator, the Secretary of educational ministry in Chosen Colonial Government General was appointed. A new Japanese principal was also appointed to be in charge of its management. In the final fourth period(1944.6~1945.8), CCC was closed and Kyungsung Industrial Management School was newly established conforming to the wartime emergency program in effect from May 1944. Despite the name change, Kyungsung Industrial Management School had continuity with CCC, as it still belonged to Christian Union Zaidan Hojin. This study demonstrates that CCC during wartime was hardly possible to stand against the Japanese Empire's educational policies, and correspondingly, to resist the Japanese Emperor system, or the totalitarian ideology beneath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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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영희 ( Park Younghee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4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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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교육의 관계를 생각할 때 로마는 위대한 그리스 문화와 교육을 지중해 세계에 전달해준 매개자 정도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된다. 또는 로마문화의 위대함은 독창성보다는 희랍문화를 재조직하여 지중해 세계에 확산시킨 능력에 있다고 평가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평가의 의미를 재검토하고자 했다. 즉 로마가 희랍문화를 수용할 때 로마는 희랍문화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품고 모종의 갈등과 고뇌를 겪으며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기원전 2세기 테렌티우스의 희극 『형제』는 로마가 겪고 있던 교육 문제의 갈등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형은 자유와 친애함으로써 희랍식 교육을 대변하고, 동생은 절제와 근엄함으로써 로마식 교육을 대변한다. 형제간에 서로 다른 양육 방법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다. 테렌티우스는 로마식 교육과 희랍식 교육의 장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지나칠 때 오는 허점에 대해 경계한다. 즉, 지나친 로마식 교육이 가져오는 딱딱함이나, 지나친 희랍식 교육이 초래하는 무절제와 방탕 모두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When we think the relation between ancient Greece and Rome, the role of ancient Rome has usually been recognized as a mediator of ancient Greek civilization. Or Rome's historic function was not to create a new civilization but to take the Hellenistic civilization which had conquered her and to establish it firmly on the whole of the Mediterranean world. This study aims at the re-consideration of above-mentioned evaluations about ancient Roman civilization. That is, I attempted to show that ancient Rome had not received Greek morality unconditionally, but suffered somewhat conflicts since they had appreciated their tradition and ancestors. Terence's < adelphoe > is a comedy which describes sharply the conflicts that ancient Rome suffered when the Greek civilization had tided in Rome. The elder one represents Greek education as freedom and friendship, the younger one does Roman traditional education as temperance and dignity. They suffer a conflict for different educational views. Terence's conclusions: Rome's traditional education and Greek foreign one have their own values. But he warns the problems occurred when they take off from the Aristotelean means. That is, Rome's traditional education is subject to no humanitas, Greek one, on the other hand, is subject to no authority and debauch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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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종배 ( Park Jong-bae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7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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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의학의 설치, 교관의 파견, 생도의 배정 등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 전기의 지방의학교육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 초부터 지방 의학교육이 본격화한 이래 조선 전기까지 중앙정부는 의약(醫藥)이 인정(仁政)의 중요한 과제임을 내세우며 지방 의학교육 진흥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고려의 경우, 지방 의학교육과 관련하여 태조 때의 서경 의학원 설치, 성종 6년(987)의 12목 의학박사(醫學博士) 파견, 계수관[도호부와 목, 3경 등]에의 의사(醫師) 파견, 방어진과 지주 군에의 의학(醫學) 배정, 전국에 걸친 약점사(藥店史) 배치 등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 김희선(金希善, ?∼1408)이 새 왕조 지방 의학교육의 청사진을 제시한 이래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전국 주ㆍ부ㆍ군ㆍ현에 의학생도가 배정되고, 각 도의 감영과 병영에는 심약(審藥)을 1명씩 파견하는 식의 지방 의학교육 체제가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15세기 말 『대전속록』단계에 이르러서는 외방의생의 교육을 유학 교관[교수ㆍ훈도]이 겸하여 관장하고 수령과 관찰사가 지원ㆍ감독하며, 5년마다 고을별로 일정수의 연소하고 총민한 의학생도를 선발하여 서울의 전의감과 혜민서에 보내 교육하는 지방 의학교육 체제가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지방 의학교육이 관(官)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면,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의 시행과 사적 의료의 성장 등 의료 환경의 근본적 변화와 함께 지방 의학교육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In this paper, local medical educat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Goryeo Dynasty was considered, focusing on the establishment of medical schools, the dispatch of medical instructors, and the allocation of medical cadets. From the beginning of the Goryeo Dynasty when local medical education began in earnest to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central government promoted various policies to promote local medical education, claiming that medicine was an important task in politics. First, in the case of Goryeo, a medical center was established in Seogyeong during King Taejo's reign and in the 6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a Doctor of Medicine(醫學博士) was dispatched to 12 Mok(牧), and then a Doctor(醫師) was dispatched to major regions nationwide. In addition, Yakjeomsa(藥店史) was placed in each village across the country, and Yakjeomsa was a lower-level local official, a low-grade doctor, and a medical student at the same time. In the case of Joseon, Kim Hee-sun (?-1408) presented a blueprint for medical education in the new dynasty, and with the completion of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medical cadets were assigned to each village, and a medical instructor named SimYak(審藥) was dispatched to each province. By the end of the 15th century, when the DaejeonSokrok(大典續錄) was published, the education of local medical students was also managed by Confucian instructors and supported and supervised by the regional administrative officers. In addition, a certain number of young and intelligent medical students were selected by region every five years and were sent to be educated in the Seoul Jeonuigam(典醫監) and Hyeminseo(惠民署). If local medical education from th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led by the government, a major change occurred in local medical education along with fundamental changes in the medical environment such as enforcement of the Daedong Law(大同法) and the growth of private health care, etc after the 17th century. This will be discussed separately nex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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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미종 ( Lee Mi-jong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1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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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13세기 고려 대몽항쟁기에 불교계에서는 백성들을 불교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13세기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승려 일연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삼국유사』의 교육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일연은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중심으로 조동종이나 운문종 등 다양한 선수행을 폭넓게 닦은 선사일뿐만 아니라, 화엄사상ㆍ유식사상ㆍ법화사상 등 교학에도 밝은 승려였다. 이 덕분에 일연은 재조대장경 조판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그 참여로 인하여 더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의 교종과 선종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선종 사이의 갈등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는 선종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중심으로 하여 선종을 통합하고자 한 교육적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연이 '자력수행'(또는 자기교육)(自力修行)에 의하여 당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타력신앙'(他力信仰)에 의하여 대몽항쟁기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기 위한 교육적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聖이나 神', 그리고 불교적 영험을 기록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에 들어있는 불성에 대한 믿음과 그 불성을 완성형 불성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what efforts the Buddhist community made to make the people Buddhist human beings during the war between Goryeo and Mongolia in the 13th century. In order to achieve this purpose, this study examined the life of Il-yeon(一然), the most active monk in the 13th century, and the educational significance of his representative work, Samgukyusa(『三國遺事』). Ilyeon was not only a Seon practitioner who widely performed various Seon practices around the practice of Kanhwaseon(看話禪), but also a monk who be knowledgeable in'teaching and learning'(敎學). Thanks to this, Ilyeon was able to participate in the Jaejojanggyeong composition project, and its participation led to a broader perspective. Thus, he tried to resolve not only the conflict between the Kyojong(敎宗) and the Seonjong(禪宗), but also the conflict between the Seonjong. Gusanmundo Society(九山門徒會) can be said to be an educational measure to resolve conflicts between Seonjong and integrate Seonjong around Gajisanmun(迦智山門). And this can also be said to be an effort by Ilyeon to solve the problems of the time by self-power practice (or self-education, 自力修行). On the other hand, Samgukyusa can be said to be an educational measure to comfort the people's hard lives during the war between Goryeo and Mongolia through the other-power belief(他力信仰). By recording Sacredness, God, and Buddhist spirituality, Samgukyusa made the people believe in the Buddhahood contained in themselves and make their potential Buddhahood a complet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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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용길 ( Lee Yong-gil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2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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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사역원의 역학(譯學)으로서 외국어 교육의 목적은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은 해당 외국어의 각 영역에서 움운론과 구문론을 바탕으로 회화 중심의 교육이었다. 사역원의 교육과정 구성은 유학(儒學)의 소양과 각 해당 국가의 정치ㆍ역사ㆍ문화ㆍ윤리ㆍ인물ㆍ설화(說話) 등을 망라한 교육내용을 담고 있으며, 외교문서 작성의 실무교육도 하였다.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방법은 암송(暗誦)ㆍ회화(會話)ㆍ강독(講讀)ㆍ번역(飜譯)ㆍ사자(寫字)이다. 암송은 언어 연쇄에 의한 이해와 말하는 능력을 향상하는 것이고, 강독은 토론과 발표능력을 향상하는 수업이었다. 회화는 대화의 역량을 기르는 것으로 '우어청(偶語廳)'을 별도로 두어 학습의 효율성을 높였다. 번역은 어휘와 문법뿐만 아니라 음운의 표기까지 가르쳤다. 사자는 문서작성의 '쓰기'를 통한 의사소통에 중점을 두었다.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평가는 원시(院試), 고강시(考講試). 취재시(取才試), 역과시(譯科試)를 통해 이루어졌다. 원시는 사역원 자체 평가로 형성평가와 총괄 평가를 종합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고강시는 생도에게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할 수 있는 혜택을 주고, 현직관리에게는 장학을 위한 평가였다. 취재시는 예조에서 사역원 생도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하급관리로 임용하는 평가이다. 역과시는 역관을 선발하는 사역원 외국어 교육의 최종적이며 종합적인 평가이다. 이와 같은 조선 시대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은 500년 동안 지속 되어 외국어 교육체제를 발전시켜 오면서 국가 외교정책의 전문실무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As Translations(譯學) of the Sayeogwon(司譯院) of the Joseon Dynasty, the purpose of foreign language education was to train talents for the efficient implementation of foreign policy. The Sayeogwon's foreign language education was conversation-oriented based on umun theory and syntactics in each area of the foreign language. The curriculum structure of the Sayeogwon includes educational content covering the literacy of Confucionism and the politics, history, culture, ethics, people, and of each country, and practical training for the preparation of diplomatic documents. The methods of teaching foreign languages of the Sayeogwon are recitation, dialogue, reading, translation, and writing. Recitation was to improve comprehension and speaking skills by speech chains, and reading was a class that improved the ability to debate and present. Dialogue is the cultivation of the capacity of conversation, and the 'Wu Ercheng(偶語廳; Dialogue's Study Hall)' has been set aside, which has increased the efficiency of learning. Translation taught not only vocabulary and grammar, but also the notation of phonology. The Writing focused on communication through the writing of documentation. The evaluation of the foreign language education of the ministry is carried out by the Sayeogwon(司譯院) test, gogang(考講) test, the chwijae(取才) test, and the yeokgwa(譯科) test. The Sayeogwon examination is a Sayeogwon self-assessment that combines the formation assessment and the general assessment to qualify for the past exam. The gogang exam gave the cadet the benefit of being able to perform diplomatic missions, and for the incumbent officials, it was an assessment for scholarship. The chwijae test is an assessment that tests the talents of the cadets of the Sayeogwon in the preliminaries and is appointed as a junior official. The yeokgwa examination is the final and comprehensive evaluation of the foreign language education of the Sayeogwon that selects the interpreter. The foreign language education of these Chosun era Sayeogwon has been going on for 500 years, and has played a pivotal role in cultivating talents with professional practical skills in national foreign policy while developing the foreign language educ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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