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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education

  • : 한국교육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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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1461
  • : 2713-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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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2권0호(1978)~44권4호(2022) |수록논문 수 : 723
한국교육사학
44권4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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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저자 : 김우영 ( Wooyeong Kim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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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국의 교육방송이 미국의 냉전시기 교육원조전략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국은 1960년 케네디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기존 교육원조사업을 좀 더 조직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국제개발처를 설립해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한 기존 교육원조사업을 관리하게 했다. 미국의 교육원조 대상국 중 하나였던 한국 역시 미국의 이러한 교육원조사업의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 연구는 미국의 국제개발처 관련 아카이브 자료와 한국 국가기록원과 국회도서관, 교육개발원 자료실 등에 소장된 자료를 분석하여 진행되었다. 한국의 교육방송은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설립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송출하는, 독립된 교육방송국 설립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 한국 초중등 학교의 취학률, 그리고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기존 미 국제개발처와 한국 문교부 사이의 기존 계획은 변경되었고, 1981년 독립 교육방송국이 아닌, KBS-3 채널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KBS-3 채널은 이원화된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프로그램 제작을 교육개발원이 맡고, 프로그램 송출을 KBS가 담당하는 형태였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미국 USAID의 전략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 최대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고자 했다. 한국은 초중등교육이 양적으로는 이미 상당히 확산된 상황에서, 기존 엘살바도르나 미국령 사모아에서 교육방송을 학교교육의 양적 확대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과는 달리,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기타 유아 및 성인교육에도 많은 초점을 두었다. 한국은 교육방송의 주 목적을 단순히 학교교육의 비용효율성 증대라는 미국의 교육원조전략의 목적에 가두지 않고 좀 더 넓게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교육방송의 역사는 한국이 어떻게 미국의 교육원조전략에 대응하고 그것을 기존의 나름의 배경 속에서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This study mainly examined how educational television in South Korea was established in the Cold War era within the educational aid strategies of the United States. By using archival sources in both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is study sought to figure out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nd South Korea to change the educational system in Korea focusing on educational television. In American modernization theory, educational television was perceived as an instrument to enhance the quality of schooling and develop the entire educational system. Based on the modernization theory, U.S. educational aid strategies attempted to construct a new educational system in Korea to figure out the effect of mass media on education.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in 1972, the plan for educational broadcasting in South Korea directed to construct of an independent educational broadcasting channel. Due to the technical problems, political turmoil, and responses of local educators, however, the original plan of USAID was changed and KBS-3 channel was launched as an education specialized channel in Korea. In addition, KBS-3 had dualized structure that had separate divisions for program production and broadcasting. In conclusion, the rise of educational television in South Korea represents the process of localized modernization in developing countries during the Cold War era. In other words, the case of South Korea shows how local educators and policymakers responded to external effects, and how these interactions affected the beginning and development of educational tele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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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자중 ( Kim Ja Joong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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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10-1920년대 신교육이론이 조선 내로 수용되고 실천되는 양상을 데즈카 기시에의 자유교육론이라는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 교육사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10-1920년대에 조선교육계와 일본의 다이쇼자유교육운동 간에는 교류가 있었다. 그 경로로는 조선교육계의 일본교육시찰과 다이쇼자유교육운동 이론가들의 조선 강연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데즈카의 조선 강연 이전에도 이미 조선교육계에는 그의 자유교육론이 수용되고 있었다. 즉 당시 조선에는 이미 100명 이상의 백양회 회원이 있었으며, 여러 교육단체의 회원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그의 조선 강연은 성사될 수 있었다. 그는 강연을 통해 아동의 자학을 중시하는 자신의 자유교육론을 알리려 했다. 또한 그는 조선에서도 자유교육론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의 강연 이후 조선에서 자유교육론은 단순히 소개나 수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까지 옮겨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구수창보통학교의 모리카와와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의 이기능의 실천이다. 이 사례는 지금까지 1910-1920년대 조선을 다이쇼자유교육운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지역으로 간주했던 기존 인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앞으로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일본 내에서 다이쇼자유교육운동의 세례를 받은 일본인의 조선 이주(조선 내 각 교육기관으로의 부임 등) 등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This study aimed to analyze on the acceptance and practice of new education theory in the 1910s and 1920s through a case study of Tezuka Kishie's theory of liberal education. The results were as follows. In the 1910s and 1920s, there was an exchange between the Korea education community and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The main routes were inspections of Japanese education in the Korea education community and lectures by theorists of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in Korea. Accordingly, even before Tezuka's lecture in Korea, his theory of liberal education was already accepted by the Korea education community. There were already more than 100 members of Baekyanghoe(白楊会) in Korea at that time, and many of the members of various educational organizations agreed with it. Against this background, his lecture in Korea could be held. He tried to publicize his theory of liberal education, which values children's self-education. He also emphasiz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practice the theory of liberal education in Korea. After his lecture, the theory of liberal education in Korea was not merely introduced or accepted, but was practiced. The representative examples were the practice of Morikawa of Daegu Suchang Primary School and the practice of Lee Kineung of Primary School Attached to Gyeongseong Normal School. This case calls for a change in the existing perception that Korea was regarded as an area that was not very related to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in the 1910s and 1920s.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he relocation of the Japanese affected by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in Japan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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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종배 ( Park Jong-bae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8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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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필자가 한국교육사 연구에서 부딪혔던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기자조선'문제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논문의 제Ⅱ장에서는 주로 공자의 동천설과 관련하여 기자조선 문제에 대해 검토하였으며, 중국 측 역사서의 기록들을 통해 기자조선의 실체와 관련된 쟁점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공자의 동천설을 방증 자료로 삼아 초기국가시대의 교육에 대해 서술하는 것은, 좁은 의미이든 넓은 의미이든, 기자조선의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의 교육사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제Ⅲ장에서는 먼저 기자조선이 관·사찬 역사서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기자에 대한 숭배가 국가적 차원에서 고조되어 가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문묘 향사 제도상에 나타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중화 보편주의 입장 및 이에 따른 중화 문명 적통 의식과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이에 따르면'기자'와 '기자조선'에 대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높은 평가는 그들의 비주체적인 모화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니라 강렬한 주체성과 자긍심, 사명감의 발로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기자 숭배는 자신들이 중화의 적통을 이을 자격이 있다는 것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문의 한계를 넘어 한국교육사 연구와 관련하여 기자조선 문제에 대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 번역본을 <부록>으로 첨부한다.


In this thesis, the so-called "Gija-Joseon”problem was reviewed, focusing on the two problems I encountered in the study of Korean educational history. Chapter II of this thesis mainly deals with the issue of “Gija-Joseon” in relation to the story that Confucius wanted to move to the eastern country and live. And through the records of Chinese history books, several issues related to the reality of “Gija-Joseon”were examined. In this chapter, I emphasized that describing education in the early state era, using the story that Confucius wanted to move to the eastern country, could have meaning as our educational history regardless of the existence of “Gija-Joseon”, whether in a narrow or broad sense. And in Chapter III, I first looked at the situation in which “Gija-Joseon” occupied the first page of government-private Korean history books, and the worship of “Gija” was increasing at the national level. And investigated how it related to the universalist position of Confucian scholars and the succession consciousness of Chinese civilization that appeared in the ritual system of Confucian temples in the Joseon Dynasty. According to this, there was plenty of room to say that the high evaluation of the Joseon Dynasty's Confucian scholars on "Gija”and "Gija-Joseon”was not the expression of their non-subject worship of Chinese civilization or toadyism(worship of the powerful), but the expression of their strong subjectivity, pride, and mission. The worship of "Gija” by Confucian scholars during the Joseon Dynasty meant strengthening the historical legitimacy of their qualifications to succeed the Chinese civilization. Beyond the limitations of this article, it is hoped that more extensive and in-depth research on the issue of "Gija-Joseon”will continue in relation to the research on Korean educational history, and I attach a translation of Yulgok Yi Yi's "Gija-Silgi(The Real Story of Gi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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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나래 ( Seo Narae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1-12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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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맛바람”은 자녀의 학업과 입시를 위해 극성을 부리는 어머니들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1960년대 특정 시기를 중심으로 신문에서 자녀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려내는데 “치맛바람”이라는 은유를 활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교육계의 특정 사건을 설명하며 자주 언급되었다. 그 이후로 “치맛바람”은 현재까지 어머니들의 교육열, 교육계의 이슈와 여성혐오, 가부장제 등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1960년대 교육 분야에서 “치맛바람”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떠한 사건과 상황을 논의하면서 등장하였는지 그 구체적인 맥락을 추적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1960년 1월 1일부터 1969년 12월 31일까지 10년간 “치맛바람” 키워드가 포함된 기사 총 364건을 추출하였으며 연도별, 지면별, 용례별로 구분하였다. 그 결과 신문기사 속 “치맛바람” 키워드는 1960년대 자모회의 교내 잡부금 수금 업무와 서울시내 일류 중학교 입시전략, 그리고 “6학년 담임교사 헌장”과 같은 교육계 이슈를 아우르고 있었다. 또한 “치맛바람” 어머니 이미지는 신문기사를 통해 부정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당시 교육 현장 전면에 나서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인 동시에, 주체성을 가진 여성에 대한 혐오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신문기사에서 재현한 “치맛바람”의 어머니는 식민지 시기에 초등교육을 받은 서울 시내 중산층 이상의 유한계급 출신으로 한정되었다. 결국 1960년대 신문기사 속 “치맛바람”은 당시의 사회의 지배적인 현상으로 치환할 수 없고 “치맛바람” 어머니 역시 보편적인 어머니 표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Skirt Wind" represents mothers who are enthusiastic about their children's academics and entrance exams. In the 1960s, newspapers began to use the metaphor "skirt wind" to portray mothers eager to educate their children negatively, and it was frequently used to explain certain events in the educational community. Since then, "skirt wind" has become a symbol for mothers' enthusiasm for education, educational issues, misogyny, and patriarchy all at the same time. In this study, we tracked the specific context of how the expression "skirt wind" first appeared in the field of education in the 1960s, as well as the events and situations that occurred while discussing them. In this study, 364 articles with the keyword were examined. In this study, 364 articles containing the keyword "skirt wind" were extracted over a 10-year period from January 1, 1960 to December 31, 1969, using the Naver News Library and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s Korean History Database. As a result, the keyword "skirt wind" in the newspaper article covered educational issues such as the mother's association's collection of miscellaneous funds in the school in the 1960s, the top middle school entrance strategy of th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and the "6th-grade homeroom teacher charter." Furthermore, the image of the "skirt wind" mother was negatively portrayed in newspaper articles, which reflected the social view of women at the forefront of the educational field at the time, and the process of building misogyny began. The mother of "Chimatbaram," as depicted in the newspaper article, was restricted to Seoul residents from the middle or upper classes who had received elementary educa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fter all, the "skirt wind" mother in 1960s newspaper articles cannot be replaced as a dominant phenomenon in society at the time, nor can the "skirt wind" mother be regarded as a universal representation of the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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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성철 ( Oh Seongcheol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5-14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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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education' 개념이 서구 사회에서 어느 시기에 어떤 의미 내용으로 출현했고 그것의 라틴어 및 그리스어 어원은 무엇이며, 근대 이후 어떤 의미 변화를 보였는지를 다루었다.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educare(=기르다)'에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어 'τϱοφή(트로페: 영양)'의 계보에 속하는 말이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education'이 'nourriture'(프랑스어) 또는 'nourish=bring up'(영어)와 같은 의미의 신조어로 등장한 이후에 점차 그것은 어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18세기 이후 'schooling(=학교화)'의 본격적인 전개를 통해 'education'은 학교에서의 조직적인 교수와 훈련을 의미하는 근대적 개념으로 진화되어 나갔다. 근대에 'education' 개념이 출현하여 확산되면서, 이전까지 생활 세계에서 다양한 양식을 통해 전개되던 인간 형성 과정을 경험한 민중들은 'uneducated'로 주변화되는 사회적 차별이 전개되기도 했다. 한편,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교육사상의 영향으로 'education'의 의미는 그 라틴어 어원과는 무관한 'educere'의 계보에 따라 'drawing out, educing(끌어내다)'의 의미로 전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교육학설, 교육론의 영역에서 급속하게 증폭되어 갔으며,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교육학' 언설 안에 일부 남아 있다.


In this article, the conceptual history of 'education' in Western society was examined. In what meaning and content at what period, the conecpt of 'education' has emerged in Western society? What was its Latin and Greek etymology, and how the meaning changed after modern times? The Latin etymology of 'education' is 'educare' (= to bring up), and if it goes back further, it belongs to the genealogy of the Greek 'τϱοφή' (trope, =nurture). However, after the 16th century, 'education' appeared as a neologism with the same meaning as 'nourriture' (French) or 'nourish=bring up' (English). Through the full-scale development of 'schooling', 'education' has evolved into a modern concept that means systematic teaching and training of students in schools. As the concept of 'education' appeared and spread in the modern era, social discrimination that the people who experienced the process of human formation that had been developed through various forms in the living world was marginalized as 'uneducated', developed. On the other hand, under the influence of the 18th century British Romantic educational thought, the meaning of 'education' tends to change to the meaning of 'drawing out or educing' according to the genealogy of 'education',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Latin etymology. This has been rapidly amplified in the field of pedagogy and some traces of it remain in the discourse of 'education' even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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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재흥 ( Jae Heung Yu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6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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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한글의 보급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근 국어학계에서 활발하게 정리되고 연구되고 있는 한글편지(諺簡)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한글의 보급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글편지의 주도적 사용자였다. 둘째,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약하였다. 셋째, 한글사용을 장려하는 촉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넷째, 한글사용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역할을 통해서 한글은 한문에 비해 열악한 위치와 천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보전되었다. 여성들은 한글의 보전과 보급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여 오늘날 한글에 기초한 우리문화와 교육의 발전을 가능케 한 공헌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intends to clarify the role of women in the process of Hangul distribution. This paper focuses on letters written in Hangul, which is recently organized and researched frequently in the field of Korean language studies. The participation of women in the process of Hangul distribution can be distinguished into four major roles. First, women in the Joseon era were the dominant user of letters written in Hangul. Second, they served as teachers who educated hangul. Third, they were facilitators who promoted the usage of Hangul. Fourth, they set an example as a Hangul user. By the roles of these women, Hangul was preserved throughout the Joseon era, in spite of the its relatively poor social status compared to Chinese characters, and how it was poorly treated throughout the era. Therefore women had served as a central role in the preservation and distribution of Hangul, and can be evaluated as contributors who made the bloom of Korean culture and education, based on Hangul,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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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전유찬 ( Yu-chan Jeon ) , 위자이 ( Ziyi Wei ) , 김경현 ( Kyunghyun Kim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1-189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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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우리나라 초ㆍ중등학교에서의 수업분석 역사를 기술하고 재조명하였다. 다만 사료의 제한으로 인해 1960년 이후 시점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빅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하는 수업분석의 동향을 제시하는 순서로 제시하였다. 1960~1979년 간 우리나라 학교현장에서 적용된 수업분석은 외국 이론의 수입의 역사임과 동시에, 수업분석의 볼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교실에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수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약 20년간의 이 시기는 질적인 측면에서의 분석보다는 양적인 측면에서의 분석 툴이 주로 소개되었는데, 이로 인해 1980년부터 우리나라 초ㆍ중등학교 교실에 양적 분석 방법이 주류를 이루는 토양을 제공한 시기이기도 하다. 1980~1995년간 우리나라 학교현장에서 적용된 수업분석은 1970년대의 외국 이론의 소비지가 아니라 국내에 실정에 맞는 다양한 이론과 방법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산출물들은 이후 정보화와 맞물리면서 우리나라의 수업분석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1996~2011년의 약 15년간은 수업분석의 과학화와 전문화가 촉발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수업분석 시스템과 소프트웨어의 개발이었다. 이 시기에 개발된 수업분석 도구는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2022년 현재도 여전히 학교 현장의 연구와 수업분석에 널리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수업분석과 관련한 교사 동아리가 급속도로 많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주로 교수나 연구자들에 의해 수업분석 연구가 이뤄졌다면, 2000년에 들어서는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동아리에 의해 수업분석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장되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는 기존의 수업분석 패러다임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빅데이터, AI, 학습분석의 개념이 수업분석의 개념을 점점 대체할 것으로 예상된다.


This study intends to describe and re-examine the history of class analysis in elementary and secondary schools in Korea. However, due to the limitations of historical sources, the trend of class analysis based on recent big data and AI, starting from the time point after 1960, was described in order of presentation. Class analysis applied in the school field in Korea from 1960 to 1979 is the history of import of foreign theories, and at the same time, it is a period when Korean classrooms, which can be said to be hostages of class analysis, have a different perspective on class from the existing ones. It can be said that In this period of about 20 years, analysis tools from a quantitative aspect rather than a qualitative aspect were mainly introduced. do. Class analysis applied to Korean school sites from 1980 to 1995 was not the consumer of foreign theories in the 1970s, but a period when various theories and methods suitable for the actual situation were poured out in Korea. The output of this period became a driving force for raising the level of Korea's class analysis to the world as it was interlocked with informatization. For about 15 years from 1996 to 2011, the scientificization and specialization of instructional analysis was triggered, and the representative example of this was the development of instructional analysis system and software. It was found that the class analysis tool developed during this period is difficult to find worldwide, and it is still widely used in school field research and class analysis as of 2022. This period is also the period when the number of teachers' clubs related to class analysis rapidly increased. In the 1990s, class analysis research was mainly conducted by professors and researchers, but in the 2000s, class analysis was expanded quantitatively and qualitatively by clubs organized by teachers voluntarily. The period from 2012 to the present is developing in a direction quite different from the existing class analysis paradigm, and specifically, the concepts of big data, AI, and learning analysis are expected to gradually replace the concept of class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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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용진 ( Hahn Yong-jin )

발행기관 : 한국교육사학회 간행물 : 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1-21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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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민족 활쏘기'의 교육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연구문제로 먼저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하여, 둘째로 다양한 전거를 통해 한민족의 활쏘기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마지막으로 활쏘기의 교육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민족은 단군의 후예라는 입장도 있지만, 고려시대 이후 형성되었다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다. 하지만 상고시대 한민족의 형성은 예맥족뿐만 아니라 민족이동적 관점에서 동이족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에서의 활쏘기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통해 7000년 전부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중국 사서에 나타난 상고시대 한민족의 활쏘기 영역은 산동과 요동, 화북,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한민족은 일찍부터 단궁(檀弓)이라는 좋은 활을 만들고 있었으며, 사서와 신화적 내용 속에서도 많은 명궁(名弓)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활쏘기의 교육사적 의미로는 다음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사냥과 전쟁 도구라는 현실적 용도, ② 심신수련을 위한 기본 소양(素養), ③ 공식적 교육과정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하나, ④ 기능적인 것을 넘는 자기 수양(修養)을 통한 도학적 요소, 그리고 ⑤ 현대적 의미에서는 건전한 놀이와 운동이라는 여가교육적 성격 등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educational characteristics of Hwalssogi(Korean Archery). In this study, I tried to find the educational meaning of Korean archery through the origin and formation of the Korean people and various sources of Korean archery. [For three research questions, firstly, the origin and formation of the Korean people, secondly, through various sources, I tried to find archery-related data of the Korean people, and finally, I tried to find the educational historical meaning of archery.] The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s; First, despite the existing notion that the Korean people are descendants of Dan'gun, the idea that the formation of the Korean people took place after the Goryeo Dynasty is more commonplace. However, the formation of Koreans in the ancient times should include not only the Yemaek(濊貊) people, but also the Dongyi(東夷) from the perspective of tribal migration. Second, it can be confirmed that archery in the Korean Peninsula has existed for around 7,000 years through Bangudae Petroglyphs in Ulsan. In addition, it can be seen that the area of Korean archery in the ancient times, which appeared in various Chinese histories, included Shandong, Liaodong, Huabei, and Manchuria. Third,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Korean people have been making good bows called Dankung from early times, and there were many expert archers in historical and mythological contents. Fourth, the educational meanings of archery include the following. ① Practical uses as tools of hunting and war, ② Basic knowledge for training the mind and body, ③ One of the official curriculum of Six Arts(六藝:禮樂射御書數) in ancient China. ④ Dohak(道學=neo-confucianism) elements through self-cultivation beyond functional purposes, ⑤ Leisure educational characteristics of wholesome play and exerc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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