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동아문화재단> 문물연구

문물연구 update

Journal of cultural relics

  • : 동아문화재단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975-6852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7)~39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88
문물연구
39권0호(2021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1보라국(保羅國)과 문화량현(蚊火良縣) 위치(位置) 시고(試考)

저자 : 심봉근 ( Sim Bong-geu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삼국유사』 물계자전 포상팔국 기사에서 보라국, 고자국, 사물국이 함께 가라와의 전쟁에 참가하였다 하고, 같은 책 지명 주석에 보라국을 나주(羅州)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문화량현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고성군 영현(領縣)이나 위치미상이라 하였다. 그런데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지도에서 고성군 상리면 오산(奧山)에 문화(文和)와 함께 표시하고 있다. 양설 모두 큰 반론 없이 통설처럼 현재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관계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한 새로운 시론(試論)을 제시하게 되었다.
먼저 보라국은 삼한시대 사천 늑도에서 시작되었다. 늑도의 배경에는 청동기 시대 과거 삼천포시 권역과 오늘날 고성군의 하일·하이면에 집중해서 분포하는 지석묘 사용집단이었다고 생각된다. 보라국이라는 명칭은 고려사에 나타나는 구라도를 참고하면 모라도(동음의 보라도)에서 연유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3세기 후반경에 편찬된 『삼국지』에 보이는 변진구야국이나 변진고자미동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가락국, 가라, 고자국 등으로 명칭한 것을 고려하면 보라국도 삼한시대에는 동음의 모라국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보라국은 원래 모라도에서 비롯되어 뒷날 모라국으로, 모라국은 다시 동음의 보라국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한시대 보라국은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지역의 대소 국가를 상대하는 국제무역국으로서 기원 전후 1세기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번성하던 보라국이 2세기 말엽에서 3세기 초반경에 갑자기 늑도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파악된다. 3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유적이 늑도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3세기 전반은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포상팔국의 전쟁시기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행방이 묘연하게 된 셈이다. 혹시 가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보라국은 국제교역권을 상실하고 농경지 부근으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다 후대의 일이지만 인접한 사등동(毛羅嶝)과 향촌동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주거지와 고분 그리고 산성 등 관계유적이 확인되어 주목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3세기 정도 공백기가 인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기한 유적들이 모라등 또는 모라골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보라국으로 등재하고 있으나 이동된 곳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동음운의 모라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일본서기』의 문모라(汶慕羅)와도 상통하여 보라국의 이동으로 파악해도 무리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다음 문화량현이다. 신라는 가야지역 병합과 삼국통일 전쟁을 완성한 이후 지방군현을 개편한다. 소가야지역에 위치했던 보라국은 문화량현으로 편제되고 치소가 고성 사곡리(모라실)로 다시 이동한다. 문화량현이라는 명칭은 전대의 모라와 보라에서 차용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동된 곳도 역시 모라실이다. 따라서 삼한시대 늑도에서 시작한 보라국이 삼국시대 사천 사등동(사등산성)에 위치하였다가 신라시대 문화량현으로 개편되면서 고성 사곡리(사곡산성)로 이동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보라와 모라라는 지명은 삼한이나 삼국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함께 사용되고 고려시대에는 보령과 모라, 조선시대에는 모라로 통일해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문화량은 모라의 동의운(同意韻)을 차용해서 경덕왕 이후 신라시대에 한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치소는 고성군 하이면 사곡리이다.


There is a story of Posangpalguk, the biographies of Mulgyeja in 『Samgukyusa』. It was said in the story that Boraguk, Gojaguk, and Samulguk had engaged in war against Gara. In annotations on place name of the same book, Boraguk was designated as Naju. Munhwaryanghyeon was marked a Yeong-hyeon of Goseong-gun in 『Samguksagi Jiriji』. But, it was written that the place was unidentified. By the way, Kim Jeong-ho marked it with Munhwa in Osan, Sangri-myeon, Goseong-gun on 『Daedongjiji』 and a map. Both theories are now cited as common view without much objection. However, I have thought that designation of location was wrong. Therefore, using related documents and archaelogical data, I came to present an essay.
First of all, Boraguk began in Sacheon Neuk-do in the period of the Three Hans. It is believed that the background of Neuk-do was on the area of Samcheonpo-si in the past of the Bronze Age and a group using dolmens that concentrate on the Ha-il-myeon and Hai-myeon in Goseong-gun today. It might be assumed that Boraguk was been derived from Morado(Borado of the same sound), referring to Gurado, which appears in history of Goryeo. Byeonjinguyaguk or Byeonjingojami dongguk were written in Samgukji compiled around the late 3rd century. They were named Garakguk, Gara, Gojaguk, and etc in Samguksagi and Samgukyusa. In light of this, it is thought that Boraguk also was Moraguk of the same sound in the Three Hans period. In other words, Boraguk originated from Morado and later was recorded as Moraguk, and Moraguk was recorded as the Boraguk of the same sound. Archaeological data have proved that it enjoyed a golden age in the time of the 1st B.C. and A.D. centuries. It was a trading nation dealing with large and small countries in Northeast Asia such as China and Japan. Even if it had flourished so, it is considered that it suddenly disappeared from Neuk-do around the late 2nd and early 3rd centuries. In other words, the remains that have been dated at the 3rd century have not been identified in Neuk-do. However, it is noteworthy that the first half of the 3rd century was the time of war Posangpalguk, which appears in literature data. At this time, the whereabouts were unknown. Perhaps Boraguk lost the war against Gara, it was deprived of trade power and moved near farmland. Although it was of later generations, related relics such as residential areas, tombs, and fortresses, which are dated at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have been identified in the adjacent Sadeung-dong and Hyangchon-dong and are being noted. Currently, it is true that a three-century hiatus is recognized, but the historic remains are located in Moradeung or Moragol. Although it is clearly listed as Boraguk in 『Samgukyusa』, the place where it was moved has been named Mora of the same sound from the past until now. It is also in line with Munmora of 『Nihonshoki』, so it is not too much to identify it as the movement of the Boraguk.
Next is Munhwaryanghyeon. Silla reorganized the local Gun and Hyun after the annexation of Gaya and the war fo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Boraguk located in the Sogaya area was organized into Munhwaryanghyeon and Chiso was moved back to Sagok-ri(Morasil) in Goseong. The name of Munhwaryanghyeon is believed to have been borrowed from the former Mora and Bora, and the place where it was moved is also Morasil. Therefore, Boraguk, which started from Neuk-do in the Three Hans period, was located in Sacheon Sadeung-dong (Sadeung Mountain Fortress)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was reorganized into Munhwaryanghyeon during the Silla period and moved to Goseong Sagokli(Sagok Mountain Fortress). And the place names of Bora and Mora are thought to have been used together from the Three Hans or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Silla Period, and Boryeong and Mora during the Goryeo Period, and Mora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the end, it is assumed that the Munhwaryang was once used during the Silla Period since King Gyeongdeok by borrowing Mora of the same meaning and rhyme, and Chiso is Sagok-ri, Hi-myeon, Goseong-gun.

2부장과 인골분석에 의한 예안리 사회 연구

저자 : 김민수 ( Kim Min-su ) , 김재현 ( Kim Jae-hyu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88 (2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등 다양한 묘제들이 묘광을 겹쳐서 조성되어 묘제 변천의 규명과 고분에서 출토된 자료를 기반으로 한 고분 및 삼국시대 토기의 상대편년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각각의 분묘에서 인골과 부장품이 함께 출토 되어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장례습속을 복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골을 통해 김해 예안리 고분군의 계층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편중된 자료를 중심으로 개별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형질인류학적 자료와 부장품과의 전체적인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 연구에는 다양한 묘제를 아우를 수 있는 시간축 설정을 통해 형질인류학적 및 부장품자료를 개별 분류한 다음 유기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김해 예안리 고분군의 장례습속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본 결과 부장품과 피장자의 형질적 자료를 함께 분석하여 기존 연구와 다른 기준을 적용하였다. 그 결과 피장자의 직업이라 할 수 있는 기층농민 또는 반농반전의 직위 즉 외부적인요인이 발생하였을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계층이라는 가정하였을 때 전쟁 및 자연재해의 빈도수와 예안리 고분군의 피장자의 시대별 개체수와 상이한 결과를 도출하였다.
이는 단순히 부장품으로 피장자의 직업을 유추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며 이에 따른 검토 혹은 분석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례습속과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유·소아와의 부장양상을 다른 연령과 비교해보았을 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더욱이 유·소아 피장자 중 괴혈병이 걸린 피장자가 괴혈병이 걸리지 않은 피장자 보다 부장품이 더 다양하다는 것은 괴혈병의 병력이 결코 신분적인 열세에서 발병된 것이 아니며, 병력과 무관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피장자가 살아있을 당시 영양섭취를 위한 자원의 분배가 사후 부장품의 양과 질에 비례하지 않는 결과를 확인하였다. 끝으로 재차 확인되는 예안리 고분군의 장례습속 매장패턴에서는 초기 고분을 이루는 4세기에서부터 고분 형성의 마지막 확인단계인 6세기 까지도 田中良之가 주장한 바와 같이 혈연적 누대에 의한 친족집단의 묘광이 중첩되는 패턴을 계속 유지하는 사실 피장자의 직업 혹은 역할등이 적어도 예안리 사회는 개인보다 집단에 우선한 장례습속이 행해졌으며 부장품이나 형질적 분석을 통한 검토에서는 부장품과 형질적 특징이 피장자 개개인 자체를 규명하는 것을 어려운 것으로 추정되었다.


Excavations of ancient tombs in Yean-ri, Gimhae, located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led to the discovery of 210 sets of human remains in variable condition. The Yean-ri tombs is an important site that has contributed to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funeral practices during the Geumgwan Gaya period (A.D. 43-532), which is a part of the broader Korean Three Kingdoms Period (57 B.C. - A.D. 668). The conventional norm in Korea is that all past Korean societies operated under a patriarchal system. However, through an analysis of the Yean-ri tombs we find this may not have always been the case. Using biological classifiers (sex and age) and grave goods (presence/absence of certain artifact types) from the Yean-ri tombs, we were able to reconstruct the social and hierarchical systems. These data were then compared over time (seven temporal divisions) to document changes in the social structure. Of the 210 individuals, 115 were in good enough condition for sex estimation (50 males, 65 females). The results indicate that over time the proportion of women and men in the cemetery remain constant, and that there is no clear difference in the types of grave goods between the sexes. An exception to this was that more women with grave goods are present in periods II and III, representing 64%-72% of the total number of graves with artifacts. We draw the conclusion that during the Geumgwan Gaya period, the society did not necessarily follow a clear patriarchal system.

3금관가야 토성에 관한 일고찰(一考察)

저자 : 박미정 ( Park Mi-jou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9-116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제까지 금관가야에 대한 연구는 대성동고분군에 왕묘급 대형 목곽묘가 집중적으로 조성되는 3~4세기 대에 편중되는 경향이 많았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대성동고분군에서 5세기 대 이후 왕묘급 고분이 조사되지 않았다는 점과, 고구려 남정 이후 대가야와 신라의 성장, 부산 복천동고분군의 급격한 성장 등을 근거로 5세기 대 금관가야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였을 것으로 해석하였다.
400년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고구려 남진정책에 의한 내륙 교역 발전과 교역 주체의 다원화는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중계이익을 독점해오던 금관가야의 정치·경제력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변화된 국제 정세를 체감한 금관가야 지배층은 금관가야 사회를 좀 더 집약적인 정치구조로 변화시켜야 할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금관가야 지배층은 5세기 대 봉황대 일원에 대한 대규모 간척사업과 토성 축조 등을 통해 중심지를 재정비하였다. 문헌상에서도 5세기 중엽 질지왕대왕실 사찰과 왕후사 건립 등 국가체제 정비 노력이 기록된 점은 기존 고구려 남정 이후 금관가야 세력이 급격히 쇠락한 것으로 보는 견해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최근 발굴 조사된 적심건물지의 경우 가야지역 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목탑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며, 이 역시 5세기 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를 종합할 때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금관가야 세력은 대성동고분군과 봉황동유적 일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으며 치소의 정비를 통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Until now, the researches on Geumgwan Gaya tended to be concentrated in the 3rd and 4th centuries which is the period when large-scale wooden royal tombs were built in Daesung-dong ancient tomb cluster. It was interpreted that Geumgwan-Gaya's influence in the 5th century would have declined rapidly based on the fact that no post - 5th century royal tombs were investigated in Daeseong-dong ancient tomb cluster before 2000s, the growth of Dae-Gaya and Silla after Goguryeo's southern Conquest, and the rapid growth of Bokcheon-dong ancient tomb cluster in Busan.
The development of inland trade and the diversification of trading entities by the southward policy of Goguryeo after 400 years of Gwanggaeto the Great's Southern Conquest would've gave a massive damage to the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of Geumgwan-Gaya who has been monopolizing the relay profits around maritime trade. In addition, the Geumgwan-Gaya's ruling class must have felt the urgent need to transform the Geumgwan-Gaya's society into a political-intensive structure after experiencing the changed international situation through the war against Goguryeo.
In response, Geumgwan-Gaya's ruling class reorganized Geumgwan Gaya's administrative office area through the reclamation projects at Bongwhangdae area and constructions of earthen fortifications in the 5th century. In addition, the recorded document of King Jilji's efforts to organize the national system like the construction of royal temple and royal Wanghusa were shown in mid - 5th century which shows a lot of instigation to the view that Geumgwan-Gaya's power have fallen rapidly since the Goguryeo's Southern Conquest. Especially, the Jeoksim Building Site, which was recently excavated, is believed to be the first wooden pagoda to be discovered in the Gaya region, and is also believed to have been built in the 5th century.
Considering this, it is estimated that the Geumgwan Gaya forces were still in place centering the Daeseong-dong ancient tomb cluster and the ruins of Bonghwang-dong after the Goguryeo's Southern Conquest, and that efforts were made to organize the state system through the maintenance of the administrative office and the construction of temples.

4금관가야 생활상 연구

저자 : 이재호 ( Lee Jae-ho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59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금관가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는 대부분 양동리고분군, 대성동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 죽음의 공간인 무덤에 집중되어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무덤을 조영한 사람들이 생존하여 삶의 공간으로 활용한 주거시설, 식생상태, 생산품 등을 비롯하여 실제 경제생활에 필요한 각종 시설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상대적으로 집중도와 관심도가 미약한 상황이다. 생활유적은 당시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함께 영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물질문화의 흔적으로 과거를 이해하는데 보다 많은 정보와 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이에, 본고는 금관가야의 권역인 김해와 인근지역의 생활유적에서 조사된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하여 당시 생활상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금관가야는 당시 다른 가야에 비해 발전된 고대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번 연구는 금관가야의 생활유적에서 고고학 자료에 근거한 분석을 통하여 그들의 생활역이 주거역과 생산역, 제의역 등이 환호와 인공구로 구획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 생활유적 별로 그 기능이 달리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식생활과 생산품, 제의활동, 가축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생활유적 특징을 통하여 다른 가야들의 생활유적과 비교검토 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금번 연구의 중요성과 기여도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Archeological surveys and investigations into Geumgwan Gaya have mostly focused on tombs, space of death, including the Yangdong-ri Tumuli(Historical Site No. 454), Daeseong-dong Tumuli(Historical Site No. 341), and Yean-ri Tumuli(Historical Site No. 261). There is relatively less focus and interest in surveys and investigation into housing facilities, in which the people that built these tombs lived and which were used as places of living by them, states of vegetation, products, and all sorts of facilities needed in actual economic life. The remains of life are traces of material culture that took place in the course of people living together for many years, and are a medium that delivers more information and wisdom to understand the past.
This study thus set out to analyze archeological materials surveyed in living relics of Gimhae and its neighboring areas within the territory of Geumgwan Gaya and review the aspects of life those days comprehensively. As noted, Geumgwan Gaya maintained an advanced ancient state system compared to other Gaya at the time. This study found that their living areas were divided into residential areas, production stations, and ritual stations through analysis based on archaeological data from these living sites of Geumgwan Gaya. It was shown that each living site had a different function. It was also shown that their diet, production, ritual activities, and domestication were significant. Therefore, it is believed that the importance and contribution of this research will be made in that the standards for comparison and review with the living relics of other Gaya through the characteristics of the living relics of Geumgwan Gaya.

5『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 백제(百濟)관계 기사 검토 - 『백제본기(百濟本記)』 분석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재용 ( Park Jae-yo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93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日本書紀』 繼體·欽明紀는 많은 부분이 한반도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백제관계 기사이며, 6세기 대 한반도제국과 왜국의 관계를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러한 백제관계 기사의 기초자료가 된 것이 『百濟本記』이다. 『백제본기』는 7세기 후반 일본에서 의자왕의 후손인 善光이 武寧王부터 威德王까지의 백제역사를 정리한 사서이다. 그러나 『백제본기』는 편찬단계부터 백제의 대외활동과 영역확장이 모두 일본 천황의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되었다.
『백제본기』는 크게 다섯 가지 성격의 기사군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백제가 6세기 대 己汶·帶沙를 거쳐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백제가 安羅에 있던 反백제적인 日本府의 활동을 억제하면서 가야제국에서 우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日本府는 당시 왜국정권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집단이었다. 세 번째가 고구려·신라와의 전쟁 속에서 왜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기사이다. 네 번째는 백제 왕력 기사이고, 다섯 번째는 고구려 내란 기사가 있다. 이러한 『백제본기』에는 『삼국사기』의 원자료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기사도 적지 않다.
『백제본기』는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편찬될 때 비록 일본천황 중심으로 윤색 되었지만, 백제 내에서 정리된 원자료를 바탕으로 6세기 대 임나를 둘러싼 한반도제국 및 왜국의 상황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이러한 『백제본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계체·흠명기를 작성하였다고 판단된다.


Many parts of Keitai-ki and Kinmei-ki of Nihonsyoki consist of articles related to the Korean peninsula. Most of them are articles on the relations of Baekje and are important historical sources that show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Waeguk in the most detail in the 6th century. Baekjebongi became the basic data for these articles on Baekje relations. Baekjebongi is a research which was written by SeonGwang the history of Baekje from King Muryeong to King Wudeok of Baekje in the late 7th century. However, from the stage of the compilation of the Baekjebongi, Baekje's external activities and domain expansion were written as if they were under the influence of the Japanese emperor.
Baekjebongi includes a group of articles with five main characteristics. First, the process of Baekje into the Gaya region after passing Kimoon and Daesa in the 6th century. Second, Baekje is trying to secure an upper hand in the Gaya Empire while restraining the activities of the anti-Baekje-lik Japanese governments in the antebellum. The third is an article requesting military support from Waeguk during the war against Goguryeo and Silla. The fourth is an article on the royal calendar of Baekje, and the fifth is an article on the civil war in Goguryeo. Many of these documents were written many differences between the raw materials and the basi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Although the Baekjebongi was distorted around the Japanese Emperor at the stage of compilation, it describes the situ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Japanese countries surrounding Imna in the 6th century based on the original data organized in Baekje. Due to these characteristics, the editor of Nihonsyoki had absolute trust the Baekjebongi in writing for Keitai-ki and Kinmei-ki

6세조 때 밀양(密陽) 만어사(萬魚寺)에서 조성된 불교기록유산의 역사·문화적인 성격

저자 : 최영호 ( Choy Young-ho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17 (2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는 세조 12·14년 밀양 만어사에서 판각된 六經合部·二經合部에 각각 새겨진 원천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정리한 다음, 당대 해당 경판의 조성불사에 담긴 역사·문화적인 성격을 처음으로 밝혔다.
우선, 이들 원천정보는 현존 관찬 사서·지리지 및 개인 문집에 누락된 세조 때 밀양지역사회와 만어사의 역사·문화적인 실체를 풍부하게 보완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다음으로, 이들 원천정보는 세조 때 만어사에서 조성된 불교기록유산의 역사·문화적인 실체를 밝히는 동시에, 당시 만어사가 밀양지역 사회에서 불교기록유산을 선도적으로 간행·유통하는 공간으로 기능한 사례를 진단하는 핵심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만어사는 세조 때 밀양지역사회의 사원들 가운데 불교기록유산을 선도적으로 판각·유통한 공간으로 역할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시문집의 책판을 보관하는 장소로도 기능하는 등 15세기 후기 지역사회에서 기록유산의 판각·유통·보관을 분담하는 핵심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만어사는 인적·물적 기반을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확보·운영하였으므로, 조성불사를 선도할 수 있었다. 조직체계는 正心·金祖林의 각수와 함께 시주질도 승려·세속인으로 구성된 敎·俗 이원적인 협조체계로 운영하였으며, 지역사회의 다양한 출신성분과 긴밀한 연계망을 맺고 있었다. 만어사는 당대 다양한 출신성분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불교경전과 기원의식을 조성불사에 반영하여, 지역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에 조성불사에 참여한 구성원들은 사회적인 계층과 함께 사상적 경향도 다양하였다. 더구나 성리학적 학문을 실천하던 孫肇瑞의 집안까지도 시주질로 참여하였다. 이로써 세조 12·14년 만어사는 지역사회에서 사회·계층적 통합과 儒·佛의 사상적 조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사원 자체의 위상과 역할을 새롭게 모색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었다.


This paper attempt to analyze into the historical & cultural character of the Buddhist Heritage that the Maneo―Temple was created in the King―Sejo's reign of the the Joseon Dynasty. the Buddhist Heritage is the Yukgyeonghapbu(六經合部) & the Igyeonghapbu(二經合部) that it was created in the 12th(1466) & 14th(1468) year of King―Sejo's reign. the Yukgyeonghapbu has been combined six kinds : the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金剛般若波羅蜜經), the Bodhisattva Samantabhadra's Vows of the Avatamsaka―Sutra(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the Avalokiteśvara―Yemun(觀世音菩薩禮文), the Śūraṃgama ―dhāraṇī―Sutra(大佛頂首楞嚴神呪), the Sukhavati―Vyuha-Sutra(佛說阿彌陀經), the Avalokiteśvara―vikurvạna―nirdeśaḥ of the Saddharma―pundari―ka―Sutra(妙法蓮華經觀丗音菩薩普門品). and the Igyeonghapbu has been combined two kinds : the Bulseol―jangsu―myeolje―hojedongja ―dhāraṇī―Sutra(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the Sakyamuni's teaching ―Sutra on parental love(佛說大報父母恩重經). this paper systematically analyzed these Buddhist Heritage for the first time. in this process of analysis, the existed studies have been reviewed, and the original information has been newly organized the surface configuration form & bibliographic information the imprint(刊記) that these woodblocks―Printing have been existing.
First, the source information can supplement the historical & cultural reality of the Miryang(密陽)'s community & the Maneo―Temple during the reign of King―Sejo. in addition, the source information can be used as key data that the Maneo―Temple was initiatively created the Buddhist Heritage in the Miryang's community.
the Miryang's woodblocks have been engraved by a Buddhist monk named the Jeongsim(正心) & a secular Kim―Jorim(金祖林), have been enshrined together by monks and secular people participated as a donation, etc. the organization system of this Buddhist project have been operated the cooperation of a Buddhist-monk and a officialdom(敎俗), had a network of human connections with various members of the Miryang's community. especially, the Son―Joseo(孫肇瑞) has also participated in this Buddhist project, he was versed in a knowledge of Neo―Confucianism(性理學). the participated members of this Buddhist project have varied in social class and ideological trends. as a result, the Maneo―Temple was able to promote a social integration and ideological harmony in the community, was able to newly look for the status of its Temple.

7사천 매향 유적의 역사관광자원 활용방안

저자 : 최연주 ( Choi Yeon-ju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44 (2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경남 사천시에는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와 향촌동 매향암각이 있다. 고려말 조선초 사천 지역 실상과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천은 남해 연해안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연근해 해상교통의 거점이며, 서부 경남일대의 조세를 모아 개경으로 운반하던 물류 중심지이기도 하다. 교통 요충지로서 국가 재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천 지역은 고려말 왜구의 주된 노략질 대상지가 되었다. 당시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당시 埋香 활동은 지역 사람들이 새로운 분위기를 도모하려는 발원이었다. 매향을 통해 지역공동체 정신을 결속시켜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흥사리 매향비의 매향 목적을 고려 국왕의 안녕과 나라의 안정, 백성의 평안이라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 사천은 제왕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安宗과 함께 살았던 곳이 사천이기 때문이다. 한편 13세기 중엽 강화경판『고려대장경』(이하 『고려대장경』으로 줄여 부름) 彫成事業 당시 경남 진주, 남해 등지에 분사도감이 설치 운영되었다. 사천은 진주와 접해 있고 남해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국가를 수호하려는 의지 및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주도의 조성사업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었을 것이다. 흥사리 매향비에 새겨진 國泰民安의 기원 의미는 지역 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천의 매향 유적이 갖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관광콘텐츠로서 활용 가치는 크다. 흥사리 매향비와 향촌동 매향암각의 내용은 원천자료로서 다양한 창작활동에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매향 유적의 대중성 확보는 관광콘텐츠로 활용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관련 연구의 활성화는 물론 전문인력을 양성해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웰빙 등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점을 고려해 매향비와 매향암각 간 사이클 경주 대회, 단축마라톤, 걷기 등과 같은 지역축제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 매향 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역사관광콘텐츠 개발에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There are Gyeongnam(慶南) Sacheon Maehyang tombstone and Maehyang Petroglyphs. These are valuable cultural records that realize the change process of the Sacheon area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Sacheon was a center of the logistics to carry taxation of West Gyeongnam region to Gaegyeong(開京). And also it was a center of maritime transportation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southern coast in Korea. Considering all these conditions, Sacheon would have been the main target of Waegu(倭寇). After public order had deteriorated, and it caused Maehyang to turn the tide of the local community. By Maehyang, the local community united each other and recognized activity as a peace of the public and stabilization of the state.
The purpose of Maehyang at Sacheon Heungsari Maehyang tombstone is seen as a peace of the public and stabilization of the state. Sacheon was a hometown of the royal family in the early Goryeo Dynasty. Hyeonjong King(顯宗) had lived Sacheon with his father Anjong King(安宗) ahead of being the king. And Bunsadogam(分司都監) had been constructed for carving Tripitaka Koreana near Gyeongnam Jinju(晉州) and Namhae(南海). Jinju is beside Sacheon, Namhae has Sacheon across the sea. Maehyang has a background for protecting the nation, and so it is a national ceremony for the king. The ritual meaning carved in Sacheon Maehyang tombstone considers as a kind of ritual had maintained continuously in the local community.
Maehyang heritages in Sacheon must never be seen simply as a just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Further, it is worth using as tourism content. The extension of popularity for Maehyang heritages should be based on tourism content. Considering the recent high interest in well-being, local fairs such as cycling, marathon, walking between Maehyang tombstone and Maehyang Petroglyphs should be developed. The local government of Sacheon needs support for the development of historical tourism content utilizes various cultural heritages including Maehyang heritages.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동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경북대학교 서울대학교
 27
 20
 16
 16
 13
  • 1 동국대학교 (27건)
  • 2 이화여자대학교 (20건)
  • 3 명지대학교 (16건)
  • 4 경북대학교 (16건)
  • 5 서울대학교 (13건)
  • 6 경상대학교 (12건)
  • 7 목포대학교 (12건)
  • 8 동아대학교 (12건)
  • 9 연세대학교 (9건)
  • 10 공주대학교 (8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