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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cultural re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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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975-6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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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7)~41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201
문물연구
41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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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후보

저자 : 정동락 ( Jung Dong-lak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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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관은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1971년에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소장처는 리움미술관(LEEUM, 구 호암미술관)이다. 지금까지 출토지는 '傳 고령'으로 소개되었고, '고령 지산동고분군' 출토품으로 파악되어 왔다. 지산동 45호분과 44호분이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술논문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달성 현풍' 출토설이 제기됐지만,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가야금관은 도굴품이라는 한계점과 근거자료의 부족 등으로 정확한 출토지를 확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금관과 함께 일괄 지정된 일부 장신구와 지산동고분군 출토품을 서로 비교하였다. 그 결과 리움 소장 半球形장식과 외씨 모양 장신구 등은 형태와 크기가 지산동 45호분의 그것과 일치하였다. 아울러, 금제 귀걸이 역시 거의 동일한 형식이었다. 따라서, 가야금관은 고령 지산동고분군, 그 중에서도 지산동 45분에서 출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가야금관이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세움장식의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지산동 44호분 출토품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이 글이 가야금관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대가야의 문화적인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National Treasure No.138 Gaya Golden Crown was designated as the title of 'Former Goryeong Golden Crown and Accessories' on December 21st in 1971. The place that holds it presently is LEEUM which is previously known as Ho-Am Art Museum. So far, the find-spot of Gaya Golden Crown has been introduced as 'Former Goryeong', and it has been known as one of the articles excavated from 'Goryeong Jisan-dong Ancient Tombs'. Jisan-dong No.45 and No.44 Tombs are often pointed out, but this has not been published in journals or such. Some have suggested it should have been excavated from 'Dalseong Hyeonpung', but this has failed to receive favorable responses. There are limitations that Gaya Golden Crown is an illegally excavated article and there is lack of ground materials, so it has been hard to fix the exact excavation of it firmly.
As a way to solve this problem, this author compared the Golden Crown and some accessories designated along with it with articles excavated from Jisan-dong No.45 Tomb. According to the results, the hemispheric accessories that LEEUM holds and cucumber seed-shaped accessories are exactly the same as those found in Jisan-dong No.45 Tomb in terms of the forms and sizes. Furthermore, the golden earrings, too, have very similar forms. Therefore, it is highly possible that Gaya Golden Crown was excavated from Goryeong Jisan-dong Ancient Tombs, particularly Jisan-dong No.45 Tomb. Yet, as far as the fact that Gaya Golden Crown and such are illegally excavated articles are concerned, it is even more possible that they were excavated from Jisan-dong No.44 Tomb in consideration of the f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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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윤정 ( Chang Yoon-chung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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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고분군 내에서 매장주체부가 수혈식석곽묘인 것에 주목하여 그것의 규모를 중심으로 2개의 그룹 즉, 길이 900㎝ 이상에 해당하고 너비 160㎝ 이상에 해당하는 고분은 초대형(Ⅰ류) 유형, 길이 600~900㎝에 해당하고 너비 120~160㎝에 해당하는 고분을 대형(Ⅱ류) 유형으로 계층을 분류하였다. 또한 시간적으로 5세기 중후엽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3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로 출토된 마구의 특징을 살펴보고 마장의 변천을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매장주체부의 계층성이 마구의 각 요소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1단계에서는 마구의 재질이나 복수 세트의 마장 소유 등에 근거하여 초대형(Ⅰ류) 유형이 대형(Ⅱ류) 유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요소가 뚜렷하지 않다.
2단계에는 초대형(Ⅰ류) 유형과 대형(Ⅱ류) 유형 사이에 계층적 차이가 마구에서도 확연하며 그 가운데 행엽의 형태로 신라, 대가야지역 등 다른 지역과의 다양한 교류 및 영향을 추정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초대형(Ⅰ류) 유형의 특징은 1)철지금동장제 행엽(편원어미형)을 중심으로 1세트분의 마장을 갖추고 있으며 안장, 운주 및 식금구 등 개별요소에서 금동제 혹은 철지금동장제를 포함하고 있다. 2)철지은장제 편원어미형행엽 혹은 심엽형행엽을 중심으로 2세트분 이상 복수의 세트 마장을 구성하며 마갑과 마주를 공반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형(Ⅱ류) 유형의 특징은 3)철지은장제 행엽(편원어미형)을 중심으로 2세트분 이상 복수의 세트 마장을 구성하고 있으나, 마갑과 마주는 공반하지 않는다. 4)철지은장제 행엽(심엽형, 검릉형)을 중심으로 1세트분의 마장을 기본으로 한다.
3단계의 경우, 전단계와 마찬가지로 철지금동장제, 철지은장제의 행엽을 각각 중심으로 복원한 마장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초대형(Ⅰ류) 유형 내에서 철지금동장제 행엽을 중심으로 2세트분 이상 복수 세트의 마장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를 제외한 초대형(Ⅰ류) 유형은 마장으로 대형(Ⅱ류) 유형과 구분되거나 계층적 차이를 규정하기 어렵다.


In the Marisan Ancient Tombs at the of Haman, two groups of tombs with a length of more than 9 meters and a width of more than 160 centimeters were divided into ultra-large tombs(Ⅰ), and tombs with a length of 6 to 9 meters and a width of 120 to 160 centimeters were divided into large tombs(Ⅱ). From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the characteristics of horse trapping unearthed in each stage are divided into three stages, and the changes in horse trappings seen in the hierarchy are investigated.
As a result, in the first stage, it is unclear whether the ultra-large type (Ⅰ) is superior to the large type(Ⅱ) due to the material of the horse trappings or the possession of a large number set of horse trappings. In the second stage, there is a clear hierarchical difference between ultra-large type(Ⅰ) and large type(Ⅱ), and various exchanges and influences with other regions such as Silla and Daegaya can be envisaged from the form of horse strap pendent.
Specifically, the ultra-large type(Ⅰ) consists of 1)a set of horse trappings centered on the circular and fishtail shaped iron base metal copper coating, and Individual elements such as saddle, Unzu and ornaments include gilt-bronze or iron-bronze copper coating. 2)Two or more sets of multiple sets are composed of the circular and fishtail shaped or the shape of the heart made of iron and silver, and the horse helmet and horse armor are accompanied together.
On the other hand, the large type(Ⅱ) consists of 3)two or more sets of centered on the circular and fishtail shaped made of iron and silver, and does not accompany horse helmet and horse armor. 4)A set of horse trappings is based on the shape of the heart or the shape of the sword tip made of iron and silver.
In the case of the third stage, as in the previous stage, the biggest difference can be seen in horse trappings restored with horse strap pendents made of iron-metal copper or iron-metal silver coating at the center. It is two or more sets of compound sets of horse trappings centered on horse strap pendents made of iron-metal copper coating among the ultra-large type(Ⅰ). Other than that,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between ultra-large type(Ⅰ) and large type(Ⅱ)by horse trappings or hierarchical different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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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형태 ( Kim Hyung-tae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5-8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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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6세기 전반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과 그에 따른 가라국 및 토착세력의 대응방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기존 연구에서는 백제와 가라국이 섬진강 유역에서 충돌한 배경을 교통로 확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가라 국은 성장을 거듭해 479년에는 南齊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일어난 정세변화에 따른 대응책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은 6세기 전반에 본격화 되었다.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남해안을 따라 섬진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는 방식으로 이는 당시 백제-영산강유역-가야-왜로 이어지는 교역망을 장악하고 있던 가야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하나는 내륙교통로를 이용해 섬진강 중류지역으로 진출하는 방식으로 이는 가라국과 주변세력을 연결하는 관문인 기문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에 대한 가야제국의 대응에는 차이를 보였다. 섬진강 유역 토착세력인 4현 및 기문은 기존 외교노선을 바꾸어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반면, 가라국은 우륵 12곡을 작곡한 사례와 같이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백제, 왜에 대해서는 군사행동을 수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advance of Baekje(百濟) into the Seomjin River basin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and how Gara-guk(加羅國) and indigenous forces responded accordingly.
In the late 5th century, Gara-guk continued to grow and expanded its influence Seomjin River basin. Based on this, an envoy was dispatched to Nam-je(南齊) in 479. On the other hand, the southwest coast of Jeollanam-do used new negotiating route with Japan, from after the mid-fifth century. Then, Baekje's advance into the Seomjin River basin can be seen as a countermeasure to the change in the situation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late 5th century.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Baekje's advance into the Seomjingang basin was carried out along the southwest coast, and it is understood that this was to check the Gaya force, which was controlling the trade network connecting Baekje-Yeongsan River Basin-Gaya- Waea(倭) at that time.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Gaya Empire's response to Baekje's advance into the Seomjin River basin. 4 Hyeon and Ki-moon, the indigenous forces in the Seomjin River basin, changed their diplomatic routes and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s with Baekje. On the other hand, as in the case of composing 12 Uruk songs, Gara-guk strengthened internal unity and actively responded to Baekje and Japan by carrying out military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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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창민 ( Koh Chang-mi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9-11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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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라 성덕왕대 대일관계의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일반적으로 신라 성덕왕대 대일관계는 원만하게 이어지다가 당과의 우호 관계 강화, 친일본정책 추진자였던 김순정의 사망, 신라의 왕성국 표방 등을 원인으로 악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700~710년대 신라·일본의 사신 교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이전의 교류와 달리 양 국의 교류에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大寶令을 반포하고 이에 맞는 빈례를 신라에 적용하려 하였다. 신라에서도 이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715년의 경우에는 실제로 마찰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신년례 중 元日 朝賀에 당시 체류중이던 신라 사신이 참석하지 않은것이다. 이후 양 국은 3년의 공백기를 거치고 나서야 교류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관계가 유지되지는 않았다.
720년대에 들어서 신라의 견일본사에 대해 일본이 천황 사망의 이유 등으로 방환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신라 역시 722년에 일본 사신들의 이동로인 경주 남쪽 모벌성에 성을 쌓으면서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경고의 메시지를 동시에 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국의 관계를 중재하던 김순정이 사망하고, 대일 관계를 주도하던 宗室·戚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어갔다. 결국 727년 발해와 일본의 공식 접촉, 731년 신라·일본의 군사 충돌로 신라는 일본을 적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양 국은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으나, 더 이상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이후 733년 당의 군사 동맹국 자리를 확보한 신라는 735년 '왕성국 표방'을 통해 일본에 자국의 우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결국 성덕왕대 양 국의 관계는 여러 상황에 의한 점진적 변화와 신라 내부 정국의 변화로 인한 결과였다.


This study analyzed the causes of the change in Japanese relations with King Seongdeok(聖德王) of Silla. It was considered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Silla's King Seongdeok and Japan continued smoothly, but deteriorated due to the strengthening of friendship with the Tang(唐), the death of Kim Soon-jung, a pro-Japanese policy promoter, and Silla's “representation of a Wang Seong-guk(王成國)”. However, looking at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the envoy exchange between Silla and Japan in the 700s and 710s, it can be seen that the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are changing, unlike previous exchanges. Japan promulgated Daeboryeong Pass and tried to apply the appropriate Binrye (賓禮) to Silla. Silla was aware of this, and in 715, friction actually occurred. The envoy of Silla, who was dispatched at the time, did not attend the New Year's greeting ceremony(元日朝賀依例) in Japan. After that, exchanges resumed only after a three-year hiatus between the two countries. However, it seems that the relationship was not the same as before.
In the 720s, Japan released Silla envoys for reasons of the emperor's death. Silla also heard a message of caution and warning against Japan at the same time in 722 when it built a castle in Mobeolgun castle, south of Gyeongju, a route for Japanese envoys. In this situation, Kim Soon-jung, who medi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died, and the political influence of the Jongsil(宗室) and Chuckli(戚里) forces, who led the relationship with Japan, weakened. Eventually, the official contact between Balhae and Japan in 727, and the military conflict between Silla and Japan in 731, Silla became hostile to Japan. Since then, the two countries have signed diplomatic treaties to improve relations, but they are no longer friendly. Since then, Silla, which secured the position of the Tang's military ally in 733, tried to clarify its dominance over Japan through the "representation of a Wang Seong-guk(王成國)" in 735.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of King Seongdeok was the result of gradual changes due to various situations and changes in the internal political situation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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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심봉근 ( Sim Bong-keu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5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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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난 1996년 4월 거제시 둔덕면에 위치하는 거림리유적을 조사하였다. 당시 조사는 경지 정리작업 도중 우연히 유적이 발견되어 긴급히 수습한 것이었다. 그 뒤 인접한 둔덕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수차에 걸쳐 실시되면서 상호 유관함이 밝혀져 기존의 거림리유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먼저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대부분 건물지와 관계되는 축대, 담장, 주구, 초석 등이었다. 남-북 축으로 사전에 철저히 기획한 규모와 형태로 축조한 건물지로 파악된다. 대형이며 일부 귀목문 막새기와 사용은 사찰과 같은 공공적인 건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축조 시기가 고려시대 중기로 한정되고 문헌상에 나타나는 고려 의종 유폐시기(A.D.1170)와 상호 매우 근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건물지는 의종의 피난시절 처소(處所) 마련을 위해 축조한 행궁(行宮)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추정된다.
다음 출토유물이다. 유물은 토기와 순청자편, 상사리 명문기와를 비롯한 암수막새기와, 평기와 등 고려시대로 편년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소량의 분청사기는 건물지와 직접 관계없는 조선전기 것이다. 주종을 이루는 순청자는 고급품에 속하고 귀목문 암수막새기와 출토는 법당과 같은 불교적인 성격을 가진 건물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유물의 편년은 전기한 고려 의종의 유폐시기와 대차가 없고 순청자, 막새기와, 명문기와 사용은 민가보다는 사찰과 관계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마지막 상사리(裳四里) 명문기와이다.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제작 특징상 고려시대로 편년되는 것이다. 인접한 둔덕기성 동문지에서도 동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둔덕기성 동문지는 신라시대 현문지(懸門址)를 고려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발굴조사에서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의종의 거제도 유폐시기 거림리유적 건물축조와 둔덕기성 수개축이 병행되면서 동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상사리는 기와 제작과 인력을 이용한 운반거리를 고려하면 명문기와가 출토된 거림리유적과 둔덕기성을 크게 벗어 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진다. 필자는 이번 거림리유적 재검토과정에서 상군의 치소를 둔덕기성으로 파악하였다. 둔덕기성에 대한 발굴조사 이전에는 명문기와가 출토된 거림리유적으로 추정하였으나 거림리유적은 고려시대에 한정되고, 반면 둔덕기성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연속되고 있다. 또 상군은 신라 문무왕대에 처음 설치되고 경덕왕대에 거제군으로 개명되어 고려 중심의 성격을 가진 거림리유적과는 우선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특히 7세기 중반 축조로 파악되는 둔덕기성의 경우 바른층쌓기 축조 수법과 현문시설의 동문지, 평면 원형의 성내 집수지 그리고 출토된 유물이 신라시대로 편년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신라시대 상군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 둔덕기성이 축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지역 군현의 치소성도 마찬가지 현상이라는 점을 확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림리유적 역시 거제군 치소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둔덕기성과의 거리, 신축부지 내의 기존건물, 유구잔존 등 그 특징에서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한편 지금까지 신라와 고려시대의 거제군현치소는 물론 삼한시대 독로국의 위치 비정에 이론이 많았다. 그러나 명문기와의 발견은 최소한 고려이전 거제군현의 치소가 둔덕기성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한 시대 변진독로국도 상사리가 새겨진 명문기와의 발견으로 '상(裳)'이 독로라는 어원을 한역(漢譯)한 것이라는 종래 거제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따라서 상사리 명문기와는 독로국이 거제도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In April 1996, Dong-A University Museum excavated the Georim-ri site located in Dundeok-myeon, Geoje-si. Since the archaeological artifacts were accidentally found during the readjustment of rice field, the investigation was urgently made. About 10years later, excavation surveys on the Dundeokgiseong Fortress located near the Georim-ri site were conducted several times, and the correlation between two sites was revealed, making it inevitable to reconsider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existing Georim-ri site.
At first, most of the archaeological remains identified in the survey were foundations, fences, trenches, and cornerstones related to the building site. It is believed to be a building built and planned thoroughly. moreover, it can be assumed that large scale of site and Gwimokmun roof tiles excavated in the site shows that the building had been used as temples and government offices. What is noteworthy is that the building was built during the middle of the Goryeo Dynasty and is very close to the period of exile of Goryeo Uijong (A.D.1170), which appears in the historic records. Therefore, it is presumed that the building site has the same characteristics as Haenggung, which was built to prepare a place during the exile of King Uijong.
Considering artifacts, most of the them are of the Goryeo Dynasty, including earthenware, celadon pieces, roof tiles, and the roof tiles with inscriptions in Sangsa-ri. A small amount of Buncheong ware is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which is not directly related to the building site. Since high quality celadon pieces and roof tiles engraving Gwimokmun excavated from the site make up most of the excavated artifacts, it is thought that the building site was used as Buddhist temples. The archaeological chronology of artifacts is same as the exile period of the Goryeo Uijong, 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use of celadon, roof tiles is closely related to the temples rather than private buildings.
In terms of roof tiles with inscription “Sangsari”, the roof tiles are dated to the Goryeo Dynasty based on their production features. The same roof tiles were also excavated from the east gate of Dundeokgiseong Fortress located near the Georim-ri. The excavation results shows that the east gate of Dundeokgiseong Fortress was reconstructed during the Goryeo Dynasty from the Hyeonmunji of the Silla period. Perhaps, it is understood that the same materials were used as the construction of the historic building in Georim-ri and the reconstruction of Dundeokgiseong Fortress during the exile of Geoje island of Uijong.
Considering the manufacture and transportation system of roof tiles, the location of 'Sangsari' can be seen near Georim-ri and Dundeokgiseong Fortress. In the process of reviewing the artifacts of Georim-ri, administrative center of Sang-Gun is believed to be in Dundeokgiseong Fortress.
Prior to the excavation of Dundeokgiseong Fortress, Georim-ri site where inscription roof tiles were excavated was thought to be a center of Sang-Gun. But Georim-ri site had been built during the Goryeo Dynasty, while Dundeokgiseong Fortress had been started from the Silla Dynasty . According to the historical records, Sang-Gun was install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of Silla dynasty and renamed Geoje-gun during the reign of King Gyeongdeok, so it is hard to think of Georim-ri built in Goryeo period as Sang-Gun. In particular, analyzing the shape of building site, type of reservoirs and the method of building walls, Dundeokgiseong Fortress can be seen as being constructed in the mid 7th century. This can be regarded that Dundeokgiseong Fortress and Sang-Gun were built around the same time. It is also the same a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dministrative base in other regions of the Silla Dynasty.
There have been many theories about the location of Dokroguk of Samhan period and administrative base of Geoje Island during the Silla and Goryeo periods. However, discovery of inscription roof tile excavated from the Georim-ri site can prove that the Dundeokgiseong Fortress had been used as administrative center of Geoje-gun before Goryeo period. Moreover, the roof tile engraved with 'Sangsa-ri' also supports the conventional theory that "sang" means Dokro in Korean. Therefore, 'Sangsa-ri' inscription roof tile is a key data that makes it more clear that the Dokroguk is Geoje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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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문열 ( Park Moon-year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8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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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연산조의 정치·문화적 사정을 비롯하여 『警策臣工文』의 제진과 제진자 및 간행과 반사 그리고 그 가치 등에 관하여 고구한 것이다.
연산군은 재위 12년의 통치 기간에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등을 겪으며 치적도 적지 않았으나, 이는 그의 폐정에 비하면 보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책신공문』은 연산군 10(1504)년 6월 4일에 金勘과 姜渾에 의하여 제진된 장문의 警策文이며, 그 내용은 敬·誠·忠·直 등 4가지를 표상으로 세우고 이에 역행하는 不敬·不誠·不忠·不直 등에 관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경계할 사항을 유시한 내용이다.
목판본 『경책신공문』은 연산군 10(1504)년 7월에 의금부 또는 척흉청에서 35행 561자의 목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제진본에 비하여 문장이 더 세련되고 명확하게 몇몇 글자가 수정되었을 뿐 내용이 變改될 정도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목판본 『경책신공문』은 연산군 10(1504)년의 갑자식년시에 생원 3등 26위로 급제한 '趙文瑀'에게 사급되었던 것이며, 당시 최소한 1만부 이상이 인출되어 사급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목판본 『경책신공문』은 학계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귀중한 자료이며, 문화재로 지정하여 연구하고 보존할 만한 가치도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analyzes on the Gyeongchaeksingongmun by Woodblock printed in King Yeonsan era, Joseon Dynesty. The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1) King Yeonsan left considerable administrative achievements during his 12-year reign. However, they have been undervalued because of his maladministration, such as the Literati Purges in 1498 and 1504.
(2) The Gyeongchaeksingongmun is a long manuscript of warning written by Kim Gam and Gang Hon on June 4, 1504 (10th year of King Yeonsan's reign) according to the king's order. It gives warnings to the king's subjects by providing examples of their irreverence, unfaithfulness, disloyalty, and dishonesty toward the king.
(3) The woodblock edition of Gyeongchaeksingongmun was published by Uigeumbu (state tribunal of the Joseon Dynasty) or Cheokhyungcheong (temporary government office installed to punish felons who committed treason) in one sheet woodblock edition with 35 verses and 561 characters. Compared to the royal edition, its sentences are polished and clarified. Other than this, however, there are no changes in the content.
(4) The woodblock edition of Gyeongchaeksingongmun was bestowed to Jo Mun-u, who ranked third at the literary licentiate category of the triennial state examination. It is presumed that at least more than 10,000 copies were printed and distributed at the time.
(5) As such, the woodblock edition of Gyeongchaeksingongmun is a precious document that is being introduced to the first time. Moreover, it is considered a valuable material that should be designated as a regional and national cultural heritage for research and pre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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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영진 ( Bae Young-jin )

발행기관 : 동아문화재단 간행물 : 문물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1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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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불교미술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운강석굴 제5ㆍ6굴의 조영 배경을 밝히고, 석굴 구조의 특성과 도상적 근거를 살펴 관련 경전을 통한 성격과 의례를 이해하고자 한다.
운강석굴은 담요오굴을 시작으로 시기에 따라 굴의 구조 형식과 내부 장엄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 1기인 담요오굴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의 단일굴 형식으로, 왕즉불 사상이 담긴 영묘굴의 성격을 가진다. 2기가 되면서 쌍굴 형식이 등장하고, 여러 경전을 전거로 만들어진 도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2기의 제5ㆍ6굴은 서로 다른 구조 형식이 세트를 이루고 있어 특이하다. 제5ㆍ6굴은 황제 추선을 위한 존상굴과 석가예배를 위한 탑주굴이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부처와 왕의 두 이미지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1기의 왕즉불 사상을 시각적으로 더욱 잘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제5ㆍ6굴의 조영은 『법화경』을 근거로 하는 조불ㆍ탑 공덕 및 조상주의 입장에서 실질적 권력자인 문명태후의 여인왕생과 효문제의 안녕을 바라는 국태민안의 목적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제5ㆍ6굴의 독특한 구조는 누각식 구조의 입구를 비롯해 전실과 주실의 2실 구조, 거대한 불상과 탑의 조성 등에서 사찰의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찰 예배굴로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본격적인 의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제5ㆍ6굴은 헌문제의 추선굴이기 때문에 타자의 왕생을 바라는 추선 예배로서 반주삼매와 같은 의례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더욱이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이 조성된 이곳은 관상보다 관불적 성격의 공간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커다란 불상과 탑 중심의 특징적인 구조를 가진 제5ㆍ6굴에는 『법화경』의 내용을 형상화한 이불병좌상과 16감 16불, 미륵보살상, 천불 등이 표현되어 있다. 도상의 크기와 배치 등의 중요도를 종합해봤을 때 『법화경』은 제5ㆍ6굴 전체의 성격을 주재하는 신앙의 배경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법화경』에는 여러 의례 방법이 소개되고 있으며, 수행 방법과 작법에 있어서 지의의 법화참법과 매우 비슷하다. 『법화경』에서 기술한 의례 방법을 조직화한 것이 법화참법이므로, 제5ㆍ6굴에서는 법화참법과 유사한 『법화경』 관련 의례가 행해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This study aims to find effective clues about functions in Buddhist art through rituals, Buddha statues, and space as religious practices. Therefore, before Buddhism was introduced and rituals were systematized, it illustrates the situation of Nánbeaicháo's times well and pays attention to the royal court-made Yongang Grotto.
Starting with Five Caves of Tanyao, Yongang Grotto shows great changes in the structural form and interior decoration of oysters depending on the period. The first phase, Five Caves of Tanyao, is a relatively simple composition in the form of a single cave, and has the character of Chusun-cave, which contains the idea of 'king is Buddha'. As the second phase approaches, twin cave forms appear, and there are many different statues made based on various scriptures. In particular, the 5th and 6th caves in the second phase are twin caves, but they are unique because different structural formats form a set. Therefore, I would like to clarify the background of the 5th and 6th cave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function of Buddhist art, find the structure and ideological basis of the stone cave, and examine its nature and rituals through related scriptures.
The 5th and 6th caves, which are twin caves, were uniquely made for one emperor, not for two emperors. What was made of double caves for one emperor was that the emperor-cave and the Sakyamuni-cave were made into a set, which is understood to better reveal the idea of King is Budha visually by arranging two images of Buddha and king side by side. Also, the creation of caves 5 and 6 contains the virtue of building Buddha images and pagodas based on the 『Lotus-Sutra』. And I think Wénmíng tàihòu contains the purpose of 'The stability of the country' hoping 'To be reborn as a woman' and to be well-being of Emperor xiaowowén.
On the other hand, the unique structure of the 5th and 6th caves can be understood as the nature of the temple in terms of the entrance to the pavilion structure, the two-room structure, and the construction of a huge Buddha statue and tower. Above all, it suggests the possibility of full-scale ceremony in terms of function as a Temple cave. Since The 5th and 6th caves are Chusun-cave of Emperor xiawnwéni,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same ritual as Banjusammei of Chusun-ceremony where others hope to be reborn.
The 5th and 6th caves are full of various Buddha statues that can be understood based on various scriptures. In particular, Buddha statues such as Seated State of Two Buddha States, Sixteen Buddha States in the Sixteen Gods, MaitreyanaathaBodhisattva, and A Thousand Buddhas Buddhas are directly and indirectly shaped 『Lotus-Sutra』. When looking at the importance of the size and arrangement of the Buddha statues comprehensively, it is judged that 『Lotus-Sutra』 is the background of the ideological faith that presides over the characteristics of the 5th and 6th caves as a whole.
In addition, although unorganized ceremony is introduced in 『Lotus- Sutra』, the method of performing Fahuachanbeop of Zhi-yi is similar. Therefore, it is believed that in The 5th and 6th caves, a ceremony related to 『Lotus-Sutra』 in the same order as Fahuachanbeop was performed. In particular, the emergence of Corridor of The 5th and 6th caps, which was not in the Five Caves of Tanyao, further increases the possibility of such a cer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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