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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ASAN Studies

  • : 다산학술문화재단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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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598-8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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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0)~38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309
다산학
38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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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정약용의 『사례가식四禮家式』을 통해 본 시속時俗ㆍ국제國制 인식

저자 : 이병유 ( Lee Byeong-yu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7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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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유일한 행례서인 『사례가식四禮家式』에 언급된 시속과 국제를 조사ㆍ분석하고, 거기에서 드러난 정약용의 시속 인식의 특징과 예학적 대응을 밝힌 논문이다.
『사례가식』은 「관례작의」ㆍ「혼례작의」ㆍ「상의절요」ㆍ「제례고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례가식』에 언급된 시속과 국제는 총 92회로 「관례작의」ㆍ「혼례작의」ㆍ「상의절요」ㆍ「제례고정」 각각 6회(6.5%), 10회(10.9%), 24회(26.1%), 52회(56.5%)로 파악된다. 시속과 국제에 대한 『사례가식』의 대응은 크게 '설명'ㆍ'수용'ㆍ'비판'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 22회(23.9%), 40회(43.5%), 30회(32.6%)로 나타났다. 예서별로 보면 「제례고정」이 52회(56.5%)로 가장 많았고, 대응별로 보면 '수용'이 40회(43.5%)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사례가식』에 나타난 정약용의 시속 인식의 특징은 첫째, '교속矯俗에 대한 강한 의지와 국제國制 준수'이다. 정약용은 고례를 기준으로 시속을 분석하고 바로잡고자 했다. 그리고 국제를 준수하는 것을 교속의 가장 기본적인 조치로 여겼다. 둘째, 정약용은 시속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예학적 대안도 함께 제시했다. 이는 사치와 과례를 경계하는 '절검'과 신분의 등급을 분별하는 '변등辨等'으로 압축할 수 있다. 시속에 대한 정약용의 예학적 대응은 약 3가지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시속의 내용을 ❶ 예문에서 배제하는 방법, ❷ 시속을 교정하거나 절충하여 제시하는 방법, ❸ 새로운 예문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다.
『사례가식』을 통해 알 수 있는 다산예학의 경세적 지향은 교속을 통하여 절검節儉을 이루고, 예禮의 변등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즉 '교속, 절검, 변등'은 정약용의 경세예학을 지탱하는 핵심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정약용은 가례 차원에서 『사례가식』을 통해 '국제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방례 차원에서 『경세유표』를 통해 국제를 바루고 새롭게 고안함으로써 예학을 통한 경세를 완성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This article investigates and analyzes the contemporary customs and national systems of the era mentioned in Saryegasik , the only practice of ritual books written by Tasan Jeong Yak-yong, and determines the characteristics and ritualistic responses of Jeong Yakyong's perception of the customs of the era.
Saryegasik consists of Gwallyejagui (『冠禮酌儀』), Hollyejagui (『婚禮酌儀』), Sanguijeoryo (『喪儀節要』), Jeryegojeong (『祭禮考定』). The contemporary customs and national systems mentioned in Saryegasik total 92 times; 6 times(6.5%) in Gwallyejagui (『冠禮酌儀』), 10 times(10.9%) in Hollyejagui (『婚禮酌儀』), 24 times(26.1%) in Sanguijeoryo(『喪儀節要』), 52 times(56.5%) in Jeryegojeong(『祭禮考定』). The responses of the comtemporary customs and national systems in Saryegasik are divided into 3 parts―explanation, acceptance and criticism[22 times(23.9%), 40 times(43.5%), and 30 times(32.6%) respectively]. For each ritual book, the largest number was 52 times(56.5%) of Jeryegojeong (『祭禮考定』) and for each response, “acceptance” accounted for the largest portion with 40 times(43.5 percent).
The characteristic of Jeong Yak-yong's perception of Saryegasik is, first, his strong will for the edification of customs and his compliance with the national systems. Jeong Yak-yong intended to analyze and edify the contemporary customs based on ancient practices, and adherence to the national system was considered the most basic measure of edifying customs. Second, he also presented ritualistic alternatives along with criticism of the contemporary customs. This can be divided into three types. First, the method of exclusion from the text of courtesy, second, the method of correcting or compromising the contemporary customs, and finally replacing with the new text of courtesy.
It can be determined that the administrating ideal of ritual study of Tasan through Saryegasik is to achieve frugality and to clearly reveal social stratification of rites during the process of edifying customs. In other words, 'edifying customs', 'frugality', and 'social stratification' are the key elements that support Jeong Yak-yong's ritual study of administration. Jeong Yak-yong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ompliance with the national system” through Saryegasik (『四禮家式』) at the level of family rituals, and tried to complete the administration process through the study of rites by correcting and redesigning the national system with Gyeongse yupyo(『經世遺表』)at the level of national rit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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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례고정祭禮考定』을 통해 본 다산 예학의 성격

저자 : 정현정 ( Chung¸ Hyun-jung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9-9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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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가례』는 주희 초년의 미완성작으로 간주되어, 조선시대 『가례』 연구는 가례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단순히 『가례』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예서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데, 다산의 『사례가식』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산은 당시 과례가 만연한 상황에서, 절검의 방향으로 『가례』를 보완하고자 했던 성호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과례나 절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예의 정신에 부합하는 가례를 새롭게 제정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다산은 고례에 근거하여 『가례』의 성격을 규정하고 조선에 적합한 예제를 재정립하였는데, 이러한 작업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례가식』의 『제례고정』이다.
『제례고정』에서 다산은 『가례』 및 관련 문헌들이 천자국 신하의 저술임을 강조한다. 천자국의 신하는 그 지위가 제후에 해당하기 때문에, 결국 『가례』는 제후의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제후국이기 때문에 『가례』의 규정은 조선의 신하와 백성에게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산은 조선의 과례 풍조가 『가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에 따른 결과라고 진단하고, 『제례고정』에서 봉사 대수, 제사의 시기와 횟수, 제례절차, 제사 음식과 기물 등 당시 제례규범 전반에 대한 하향 조정을 진행한다.
『제례고정』에서 다산은 고례에서 조선에 걸맞은 대부의 예를 추출하여 새롭게 제안하였다. 특히 '삼대봉사'와 '춘추시향'을 규정하면서 다산은 고례를 면밀히 재검토하는 한편, 인지상정과 실행의 효율성을 함께 고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주소에 구애되지 않고 경전을 그 자체의 맥락에 따라, 그리고 내적 정합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음을 볼 수 있다.


In the late Joseon dynasty, books on family rituals appeared to replace Garye, and Tasan's Sarye gasik(『四禮家式』) i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work. Tasan tried to establish new rules of family rituals consistent with the original meaning of Ye(禮), with criticizing both excessive extravagance and excessive simplication. Jerye gojeong in Sarye gasik shows Tasan's critical view of Garye. In Jerye gojeong, through referring to ancient rites, Tasan defined Garye as a family rituals of the Jehu(諸侯) and insisted that the family rituals of the Daeboo(大夫) was appropriate for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noblemen of Joseon. Accordingly, the level of the ritual regulations regarding the number of ancestors that could be worshiped, the timing and frequency of the rites, the procedure of ancestral rites, items and food of the rites, etc. were downgraded In Jerye gojeong. In particular, the regulations on 'rites to three generations of ancestors' and 'ancestral rites held in spring and fall' show that Tasan not only took ancient rites as the most important ground, but also considered human emotions and practical efficiency and actively reinterpreted confucian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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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순조대 가순궁嘉順宮 상례와 복제服制 논의 ─ 다산 정약용의 「가순궁상례문답嘉順宮喪禮問答」을 중심으로

저자 : 김윤정 ( Kim Yun-jung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5-13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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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순궁상은 조선시대 유일한 재위 중인 왕의 생모이자 후궁의 상례로서,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가는 논쟁적인 사안이었다. 순조의 상복은 존존을 중심으로 시마삼월로 정해졌지만, 그 외 구체적인 의절들은 은혜와 인정에 따라 논의되면서 가순궁의 신분을 넘어서는 유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정의 유례 논의가 예경과 인정의 갈등 구도 속에서 인정의 제약을 강조했던 반면, 다산은 고례의 범주 내에서 인정을 표출하는 합당한 방법을 찾는 데 주목했다.
대표적인 유례로 간주되었던 빈궁과 혼궁의 문제에 대해, 다산은 정비의 적침인 '전殿'이 아니라면 궐내에 가순궁의 빈궁과 혼궁을 설치하는 것은 예경과 인정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복無服인 백관은 '곡례'가 아닌 '조례'를 통해 가순궁 상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정의 논의는 '상생지의'를 근거로 백관의 배곡을 결정했지만, 다산은 '왕의 친상'에 조례하는 방식으로 고례와 인정에 합당한 의례를 제안했다. 다산은 '시마삼월이지만, 친상'이라는 점에서 예경과 인정의 조율에 주목했던 것이다.
가순궁과 혈연적 유대를 갖는 순조와 중전,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숙선옹주의 복제는 존존을 중심으로 결정되었다. 다산은 고례를 근거로 왕가王家의 복제를 사가私家와 구분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순조와 중전의 시마삼월을 인정하면서도, '서자왕'을 특정하는 연관무복의 의미를 자세히 고증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무복이라는 점에 동의하면서, 서조모를 위한 기년복의 규정은 사가례이므로 왕조례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숙선옹주는 '선군의 남겨진 존귀함'에 눌려 대공복을 입어야 함에도 출가로 인한 강복에 따라 기년복을 입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가순궁이 후궁이지만, 옹주의 시가보다는 존귀하기 때문에 출가로 인한 강복은 불가하다고 해석했다.
다산은 가순궁상의 복제 논의에서 존존의 원칙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친친을 중심으로 시마삼월의 본의에 따라 3개월간 종묘제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순궁상의 낮은 위상을 지적하는 비판들에 대해, 다산은 시마삼월에서 허용된 만큼의 친친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3개월 동안 종묘제사를 중단하는 행위를 통해, 시마복의 명실名實을 확보하고 존존과 친친의 조율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The funeral of Gasungung was the only case that birth mother of a king and concubine died during the king's lifetime. So it was a controversial issue that created a new ritual. While the discussion of state affairs emphasized the constraints of recognition in the conflict between principles and feelings, Tasan noted finding a reasonable way to express feelings within the category of ancient ritual.
Tasan argued that if it was not a jeon(殿) of queen, it would not be a matter of principles to install bingung and hongung inside the palace. He also proposed a way for bureaucracy to participate in the funeral of Gasungung through jorye, not gokrye. Tasan paid attention to the coexistence and coordination of principles and feelings.
The reproduction of King Sunjo and queen, the crown prince and crown prince, and the princess Sukseon, who had blood ties with the Gasungung, was determined mainly to jonjon. Tasan distinguished the royal mourning system from the gentry based on ancient ritual. While acknowledging the sima for 3months of King Sunjo and queen, he also elaborated on the meaning of the associated yeonkwan without mourning cloth that specifies the 'Seoja(son of a concubine) King'. He thought the crown prince and the crown prince had no mourning, and the princess Sukseon had to have 9months mourning because of the dignity of a king.
Tasan emphasized true intentions of sima for 3 months and insisted that Jongmyo Shrine should be suspended for 3 months. In response to criticisms pointing to the low status of the Gasungung, Tasan emphasized the coexistence of jonjon and chinchin in the position that chinchin should be guaranteed as much as allowed in sima for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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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다산茶山 상복제도喪服制度에 대한 복식사적 고찰 ─ 『상례사전喪禮四箋』, 『상복상喪服商』을 중심으로

저자 : 차서연 ( Cha Seo-yeon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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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상례사전喪禮四箋』, 「상복상喪服商」을 중심으로 다산茶山이 재해석한 상복喪服의 형태와 관점을 파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산이 제시한 남자 상복의 원칙은 『주례周禮』, 「사복司服」에 “무릇 흉사凶事에는 변복弁服을 입는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상복喪服이 변복弁服이고, 옛날 변복弁服이 조선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이라는 것이다. 이 원칙의 의미는 말 그대로 상복의 기본적인 형태는 변복과 같다는 것이고, 상복 가운데 변복과 같은 요소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또 다른 원칙을 파생시킨다.
다산은 이 원칙 아래 십삼경十三經을 중심으로 『가례家禮』와 조선의 시속까지 참작해서 상복의 형태를 논증하였는데, 그 특징과 함의含意는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상복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다산이 제시한 상복은 조선의 조복과 제복의 형태로, 길례吉禮에 조복과 제복을 착용하듯 흉례凶禮에 조복과 제복의 제도에 따른 상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조복과 제복에 조응하는 것으로 보는 다산의 제안은 상복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이다. 심의深衣의 요소도 적극 활용하여 논증하였는데, 이는 상복을 단순히 슬픔을 표상하는 복식만이 아닌 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옷과 동등한 위상을 갖는 복식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두 번째로 상복 제도를 표준화하고 실용적인 부분을 강조하였다. 다산은 상복의 표준 치수를 제시하고 이를 기준으로 사람의 몸집에 따라 줄이거나 늘릴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실용적인 부분을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상복이 최고의 예복禮服임과 동시에 상례 기간 동안 실제로 입고 생활하는 일상복이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례의 수행가능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조복과 제복, 심의의 형태로 상복을 해석한 이면에는 조선 사람들에게 익숙한 형태를 제시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조선 사람들에게 익숙한 형태라면 제작에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상례에 대한 거부감도 줄일 수 있어 상례의 수행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다산은 고례古禮인 『의례儀禮』와 『예기禮記』의 주소注疏에 대한 비판적 고증을 통해 상복의 원형을 재현하고 『가례家禮』가 시의時宜를 반영하여 예제를 구성했던 방식을 계승·극복함으로써 古禮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조선의 시의를 반영한 상복을 만들어 입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This research aims to examine the forms of mourning clothes that Tasan reinterpreted in the chapter titled “Sangboksang” in his Sangraesajeon. The mourning cloth for men Tasan suggested, called Byeonbok, was what he re-interpreted from the “Sabok” chapter in Jurye, which states “people wear Byeonbok during bad occasions,” and he wrote that Jobok and Jebok in contemporary Joseon are, in principle, same with Byeonbok in the past. This new principle means that the basic form of mourning cloth is following that of Byeonbok so that unnecessary is such an additional statement on which aspect of the mourning cloth can be the same with Byeonbok.
There could be three implications of Tasan's suggestion for mourning clothes, which he derived from his reference to the thirteen ancient books and Garye, not from the twofold annotations. First, he wanted to raise the status of mourning clothes. Jobok and Jebok he suggested as proper forms for mourning were what people had used to wear as ritual clothes for good occasions. By allowing the clothes for bad occasions to be the same with those for good occasions, he intended to raise the status of mourning clothes. He also argued this by mentioning certain elements of Simui hoping that the mourning clothes would stop being simply functional for mourning rituals but have equal status with other attires that Confucian scholars deemed important.
Second, he emphasized the standardization of mourning clothes and their practicality. He suggested standard sizes of the clothes, which can be modified according to the size of the wearer's body. It was enable everybody to wear a standardized cloth no matter how large or small one's body is so that everybody could participate in the funeral rites with proper clothes. The mourning clothes Tasan suggested were also practical since they were, for him, not only the finest clothes people could wear during the funeral but the everyday clothes they could wear in daily routines.
Lastly, his suggestion was also to increase the performability of the funeral rites. His re-interpretation of ancient mourning clothes as those corresponding to the contemporary clothes in Joseon, such as Jobok, Jebok, and Simui, was to encourage people's actual performances of the rituals not only by making the mourning clothes easy to produce but also by removing people's repulsion to the rites.
Tasan seems to have tried to reproduce the original mourning costumes which did not deviate from the spirit of old rites, but ref lected the situations of the contemporary Joseon society by critically investigating notes of Uirye , and Yegi, the books describing ancient rites, and by following the method of Garye which constituted ritual procedures by considering contemporary con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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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다산과 연담 유일

저자 : 정민 ( Jung Min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2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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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산 정약용과 대둔사 승려 연담과의 교유와 인연에 대해 살핀 글이다. 다산이 친필로 남긴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그간 확인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만남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확인코자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 대둔사와 만덕사 승려들과 벗 또는 사제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를 통해 『대둔사지』와 『만덕사지』 등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지휘했고, 문집에는 누락되고 없는 수많은 불교 관련 시문들을 남겼다.
다산이 불승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아암 혜장과의 교유가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16세 때 화순 현감으로 내려가 있던 아버지의 임소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만났던 연담과의 인연이 다산과 불교의 고리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연담은 아암의 스승의 스승이었고, 아암 자신이 연담에게 직접 배운 인연이 있다.
다산은 16세 때인 1777년에 연담과 처음 만났다. 그는 대강백으로 명성이 높았고, 시문에도 능했다. 부친 정재원의 문집에 연담과 주고받은 시가 적지 않고, 연담의 문집에도 화답시가 남아 있다. 또 이 시기 어린 다산에게 준 시도 실려 있다. 다산도 자신의 문집에 연담과 주고받은 시를 실어, 그의 고결한 모습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시했다. 연담은 다산 형제의 과거 시험 공부를 위해 장소를 제공해주고, 자주 찾아보며 형제를 북돋워주었다.
이후 24년 뒤인 1802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내려온 다산이 연담을 찾았을 때, 연담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이에 그의 문집을 구해 읽은 다산은 그 체제와 편집에 실망을 표시했고, 오류를 바로 잡아 새로 간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편집본의 작성을 직접 진행했고, 이 과정을 적은 여러 통의 편지와 산문이 친필로 남아 전한다. 이들 자료의 대부분은 다산의 문집에는 누락 되었는데, 승려들과 가깝게 교유했다는 혐의를 꺼렸던 이유로 보인다. 다산과 연담의 문집 간행을 상의한 상대는 연담의 제자인 완호와, 그의 제자인 호의였다. 하지만 연담 문집의 재간행은 아마도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결실을 맺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산은 연담을 호남 강맥의 중심 줄기에다 놓고, 서산대사에서 내려온 도맥이 연담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렇게 嫡傳의 계보를 설정하여, 그를 다시 아암과 초의가 이었다고 보아, 도맥의 정통성을 분명하게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대둔사 도맥의 복잡한 구도 정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본고는 연담에 대해 다산이 남긴 각종 시문을 한 자리에 수집해서 소개하고, 향후 도맥과 관련된 논의를 심화하기 위한 전제적 논의에 해당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asan Jeong Yakyong and Yeondam, a Buddhist monk of Daedunsa Temple. We would like to collect various materials left by Tasan in his own handwriting, restore the meeting between the two, which has not been confirmed before, and confirm the meaning thereof. Tasan continued his friendship with monks from Daedunsa Temple and Mandeoksa Temple during his exile in Gangjin. Through this work, he led the organization of the temple's history, including Daedunsaji and Mandeoksaji, and left a number of Buddhist-related poems that were not left out in his collection.
Tasan's relationship with the Buddhist monks was ostensibly the starting point of his friendship with Aam Hyejang.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asan and Yeondam, who met when he was studying in his father's post, who was down to Hwasun at the age of 16, became the medium of connecting Tasan with Buddhism. Yeondam was the teacher of Aham's teacher, and Aham himself learned from him.
Tasan first met Yeondam in 1777, when he was 16 years old. He was well-known as a famous lecturer and was good at poetry. There are many poems exchanged with Yeondam in the literary collection of his father, Jeong Jae-won, and there are still poems left in the literary collection of Yeondam. It also contains poems given to young Tasan during this period. Tasan also expressed his deep respect for his noble appearance in his literary collection. Yeondam provided a place for the Tasan brothers to study for their past exams, visited frequently, and encouraged them.
24 years later, in 1802, when Tasan, who came down to exile at Gangjin, asked about him, Yeondam had already passed away. In response, Tasan, who obtained and read his literary works, expressed disappointment with the editing, and insisted on correcting the errors and publishing them anew. As a result, the new edited version was prepared directly, and several letters and prose writing this process remained as handwritten letters. Most of these materials were omitted from Tasan's collection, apparently because they were reluctant to engage with monks closely. Tasan's counterpart in discussing the publication of Yeondam's literary works was Wanho, a disciple of Yeondam, and Hoyi, a disciple of Wanho. However, the publishing a new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probably did not pay off due to financial problems.
Tasan put Yeondam on the central stem of the Honam instructor's genealogy, and saw that the central genealogy from the great Monk Seosan led to Yeondam. Considering that he had established the central genealogy and that Aam and Choyi had been established again, he wanted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the central genealogy. This is complicatedly intertwined with the complex compositional arrangement of the Daedunsa central genealogy. This Paper is a prerequisite discussion to collect and introduce various verses left by Tasan in one place and to deepen discussions related to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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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발굴 자료 『고금비언古今鄙諺』의 분석(1) ─ 「고금비언古今鄙諺」을 중심으로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간행물 : 다산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75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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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박물관에 소장된 『고금비언』은 「고금비언」, 「백언시」, 「아언지하」를 수록한 다산의 저작이다. 본고는 3편 중에서 「고금비언」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이담속찬』〔중국속담〕과 대조 및 분석하여, 「고금비언」에서 『이담속찬』〔중국속담〕으로의 저술 과정을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다산은 『이담유증』(왕동궤)에 누락된 '경사속담'이 많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에 직접 경사를 열람하면서 원전의 자구 그대로를 수록한다는 원칙 하에서 속담을 채록했다.
「고금비언」은 이즈음에 생산된 판본이다. 이학래와 황지초가 함께 교정에 참여했으므로, 그 시기는 다산이 초당으로 이거하기 이전의 강진 유배기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110수의 '경사속담'이 실렸다. 속담은 서명별로 분류되었고, 저작의 목차 순으로 배열되었으며, 세주에는 대체로 출처가 부기되었다.
「고금비언」을 저술한 이후, 다산은 기왕의 110수 중에서 일상적인 층위로 그 의미를 확장하기 어려운 속담 8수를 제외했다. 또한 왕동궤의 『이담유증』 및 여타 저술을 참고하여, 그간 수집하지 않았던 '중국 민간속담'을 채록했다. 아울러 이상의 결과물을 신작에게 보내어 누락된 속담의 증보를 요청했다. 다산은 이후 신작에게서 '10여수'를 받았다고 밝혔는데, 그 범위는 「고금비언」이과 『이담유증』에는 없으나 『이담속찬』 〔중국속담〕에는 실린 16수로 한정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본고에서는 『고금비언』 전체의 성격, 그리고 『이담속찬』 및 『아언각비』가 저술되기까지의 경로를 다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고금비언』에 실린 나머지 두 편〔「백언시」와 「아언지하」〕에 대한 후속의 분석을 통해 해명할 예정이다.


Gogeum bieon(『古今鄙諺』) newly collected in Tasan Museum is a book authored by Tasan Jeong Yak-yong, which consists of three separate chapters, “Gogeum bieon”(「古今鄙諺」), “Baekeonsi”(「百諺詩」), “Aheon jiha”(「雅言指瑕」).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trast and analyze “Gogeum bieon”, one of three chapers of Gogeum bieon with Chinese proverbs loaded in Idam sokchan(『耳談續纂』).
Tasan was aware that there were many proverbs not collected from Confucian scriptures and ancient hitory books in Idamryujeung(『耳談類增』) written by Wang, Dong-gwe. Accordingly, Tasan collected proverbs under the principle that the sentences in Confucian scriptures and ancient hitory books should be contained as they are.
“Gogeum bieon” is a version produced around this time. Lee Hakrae and Hwang Ji-cho participated in the correction together, so it is presumed that the book produced before Tasan moved to Chodang. “Gogeum bieon” contains 110 proverbs which were categorized by book name, arranged in the order of chapters. Also proverb's source was written in note.
After writing “Gogeum bieon”, Tasan excluded 8 proverbs that are difficult to extend their meaning to everyday levels. In addition, referring to several books including Idamryujeung, he collected 'Chinese folk saying' that he had not collected before. Then he sent the result to Sin-Jak, and asked for the supplement of the missing proverb. At this time, he received 'about 10 proverbs' from Sin-Jak, whose scope is 16 proverbs loaded in Idam sokchan, which are not included in “Gogeum bieon” and Idamryujeung.
The other two chapters Gogeum bieon will be analyzed in subsequent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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