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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론 update

Journal of Korean History Hankuk Saron

  •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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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9-5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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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3)~67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456
한국사론
67권0호(2021년 09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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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과거제도의 시행

저자 : 플라센 라헬 ( Rahel Plassen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0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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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0세기 고려의 과거제도 시행을 재조명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과거제도의 시행 목표를 일관되게 '왕권 강화'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설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내적인 의미만을 염두에 둔 이해방식이다. 동시에 과거제도의 시행 자체가 유발하는 의문도 있다. 광종대는 왜 소수의 급제자만을 선발하였는가? 이들은 왜 광종대에 의미 있는 관직을 역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가?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진 광종대는 외교를 활발히 펼친 시기이기도 하다. 광종은 오대십국 시기의 여러 국가와 '전방위적 외교'를 펼쳤으며, 이 사실은 당시의 국제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게 한다. 10세기는 당의 멸망으로 인해 다수의 황제국이 세워진 시기이다. 광종대의 여러 개혁과 제도 시행은 황제국의 표방과 보조를 같이한 것이었다. 이에 논문의 1장에서는 광종의 전방위적 외교와 황제국 체제의 수립을 연결지어 검토하였다.
여기에 과거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외교문서의 작성과 전달이 중요해진 시기에 이를 담당할 인재들은 줄어든 상태였다. 광종대 쌍기의 주도하에 치러진 과거 시험과목을 살펴보면, 당시 제술과는 四六騈儷體의 작성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이는 국내 공문서와 외교문서에 대표적으로 쓰이던 문체였다. 2장의 핵심 논점은 외교문서 작성 역량이 과거제도를 통해 길러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광종은 당시의 인적 수요를 관료 선발을 통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0세기 후반 과거제도의 운영은 당시 당면한 외교 과제와 상호작용적인 관계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송 관계에서 과거급제자들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종대 송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966년에서 972년까지는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고려에서 과거제도의 시행도 정체되었다. 이 사실은 과거제도가 오로지 국내적인 요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송의 중원 통일을 계기로 재시행된 과거제도 역시 위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마지막으로 지공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쌍기, 왕융과 같은 귀화인의 역할이 광종 초기의 과거를 넘어서 성종대 말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 10세기 후반, 성종 16년을 기점으로 지공거의 역임 시 관직이 변화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제도가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광종이 과거제도의 시행을 통해 추진한 외교 역량의 강화를 보여준다. 이렇게 국제 관계를 함께 고려했을 때, 10세기 과거제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This article reinvestigates the establishment of the examination system under King Gwangjong (r. 949-975) in the light of 10th century diplomatic relations. As the fourth ruler of the newly founded Goryeo dynasty, Gwangjong conducted a series of reforms that have been interpreted as designed to strengthen royal power. Reasonable as this assumption may appear, the relatively small number of graduates as well as their rather modest role under the king's reign suggest that it does not sufficiently explain the function of the examination system during his times.
As recent research has shown, Gwangjong's rule can be characterized by active engagement in diplomacy. He maintained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Five Dynasties as well as the Ten Kingdoms. After the collapse of the Tang dynasty, a power vacuum on the mainland allowed for the formation of several states, not few of them imitating the Great Tang imperial state. Hence, the first part of this article aims at discerning Gwangjong's imperial ambitions. Formally accepting investiture, he effectively positioned Goryeo as an equal player on par with the Chinese states.
In his effort to further increase Goryeo's prestige, Gwangjong seems to have faced a shortage of capable diplomats. Until the downfall of Tang, the Silla kingdom sent students abroad, making them attend the imperial examinations for foreign visitors. Educated in the “four-six parallel ornate style” (saryukbyeollyeoche, 四六騈儷體), those who returned were qualified for writing official documents. During Gwangjong's times, the state could no longer rely solely on this reservoir of talents. By introducing the examination system, Gwangjong established an institution that would provide him with officials capable of writing state documents.
The second part of this paper focuses on this particular function of the examination system, tracing its development throughout the second half of the 10th century. The first successful candidates initially seem not to have played any significant role in civil service. Only some 20 years later, under King Seongjong (r. 981-997), their names appear among the roster of higher ranking officials. An analysis of their career paths, however, discloses their importance in the field of diplomacy. The Goryeo-Song relationship seems to have exerted direct influence on the frequency with which the examinations were conducted. When the exchange of envoys was sparse, the examinations came to a halt, too. Lastly, changes in the background of the examiners (jigonggeo, 知貢擧) have to be taken into account. For decades, those appointed examiners were selected from the ranks of the Hallim (翰林) scholars. This changed at the end of the 10th century, when the diplomatic equation was altered fundamentally by the Khitan expansion.
Even based on the aforementioned observations, it might be biased to claim that the examination system was established for diplomatic purposes only. Nevertheless, a consideration of Gwangjong's imperial policies an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10th century can help to shed some new light on an ancient institution.

2고려 현종대 현화사 창건과 그 의의

저자 : 김동이 ( Kim Dong-Yi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1-9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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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려 전기의 시대적 격동기였던 顯宗代의 특수성이 당대 추진되었던 불교진흥정책의 결과물이자 왕실 원찰인 玄化寺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현화사는 현종의 치세가 중반에 접어드는 동왕 9년부터 왕이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재의 황해도 월고리에 해당하는 영취산 자락에 약 5년에 걸쳐 조성한 고려 왕실의 원찰이었다.
고려 사회에서 불교는 물질적·정신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왕을 비롯한 고려 지배층은 개인의 신앙과 민심을 수습하는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여 불교를 진흥하는 정책을 펼치는 한편으로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 불교정책의 기조는 성종 연간 화이론적 사조가 대두하면서 변화하였으나, 현종 연간 고려 사회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외부적 충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기조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종을 비롯한 당시의 지배층은 대내외적인 국가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태조<訓要>의 존재가 사회 전반에 인식되어 불교정책의 시행 근거로 자리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거란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불교는 사상적 통합과 정통성을 선전하는 정치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현종 9년을 전후로 시행되었던 국가 체제의 제도적 정비 과정에서도 불교는 현종을 비롯한 고려 조정의 정통성과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현화사는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었다. 현종의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도덕적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들을 매개로 하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그것에 기반한 지배 체제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양자의 관계를 사회 전반에 공개적으로 정당화하는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원묘인 경령전을 조성하여 안종 내외의 추존과 부묘를 추진하는 한편 왕실 원찰인 현화사에 비문과 종교적 성물을 봉안하여 기존의 현실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 사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부모의 관계를 윤색하고 사회적으로 정상화하였다.
현화사의 창건에는 당시 고려 조정을 구성하였던 관료사회 전반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국왕 중심의 지배 질서에서 관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회적 특권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보장하는 지배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긍정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왕실의 원찰인 현화사를 조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사원전이나 보를 비롯한 현화사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현화사는 왕실 원찰임과 동시에 관료사회가 불교계와의 접점을 형성하는 배경으로도 기능하였다.
고려불교계의 무게중심 또한 현화사와 그곳을 본찰로 하는 법상종으로 옮겨졌다. 이후 현화사는 왕실뿐 아니라 문벌과의 접점도 크게 확대하였고, 특히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혜덕왕사 소현과 도생승통 정으로 대표되는 자제들의 사제관계를 통해 고려 왕실과 관료사회의 결속이 강화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현화사는 왕실 선조들을 추모하는 의례공간의 기능과 지배층 내부의 사회적 연결망을 강화하는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This study focuses on how the peculiarity of the reign of Hyunjong(顯宗), which was a turbulent period in the early Goryeo period, was projected into the royal Buddhist temple Hyeonhwasa(玄化寺). Hyeonhwasa, the result of the Buddhist promotion policy promoted in the period, was a temple for the royal family(Wonchal, 願刹) of Goryeo built to pray for the condolences of Anjong(安宗) and Heonjeong-wanghu(獻貞王后), who are Hyeonjong's parents, at Mt. Yeongchwisan located in Wolgori, Hwanghae-do, from the 9th year of the Hyeonjong's reign.
In Goryeo society, Buddhism exerted enormous influence both materially and spiritually. So ruling class of Goryeo focused on the social function of acquiring individual beliefs and public sentiment, and implemented policies to promote Buddhism while controlling them.
The stance of this Buddhist policy in Goryeo has changed with the rise of the historical perspective with Hwairon(華夷論) in the year of Seongjong(成宗), but it has returned to its original stance in the process of overcoming the internal political turmoil and external shocks caused by the invasion of the Khitan. The ruling class of the time including Hyeonjong actively used Buddhism to overcome the internal and external crisis of the state system, and in this process, the existence of Taejo's injunctions(Hunyo, 訓要) was recognized throughout society and became the basis for implementing Buddhist policy. As a result, Buddhism reaffirmed its value as a political ideology that promotes ideological integration and legitimacy of reign by resolving social chaos and repelling the invasion of Khitan.
Based on this, Buddhism played an ideological role in the process of institutional improvement of the national system around the 9th year of Hyeonjong, to justifying the legitimacy and ruling order of the Goryeo court, and Hyeonhwasa was a representative result. Hyeonjong's parents had moral limitations in the general notions of society at the time, so in order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which was based on their royal bloo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was openly justified to the whole society. Accordingly, Gyeongnyeongjeon(景靈殿) was created to enshrine their ancestral tablets, and Hyeonhwasa was established to reinforce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that could not be justified by the Confucian ideology that was the practical politic ideology. Therefore, The stele and Buddhistic relics were placed in Hyeonhwasa to socially normalize and declare the relationship between Hyeonjong's parents.
Hyeonhwas was the royal temple of Goryeo dynasty, but its foundation was formulated not only Hyeonjong but also the entire bureaucratic society that formed the Goryeo court. Most of ruling class in Goryeo period gained social privileges by carrying out government offices in the king-centered ruling order, so they were positive in stabilizing the ruling system that guaranteed their privileges. Therefore, the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construction of Hyeonhwasa which the original temple of the royal family, and cooperated in establishing the economic base of Temple like Sawonjeon(寺院田) and Bo(寶). Based on this relationship, Hyeonhwasa served as a royal temple, and as a background for the bureaucratic society to form a contact with the Royal family and Buddhistic society.
The center of the Buddhistic society of Goryeo was also moved to Hyeonhwasa. Since Hyeonjong's reign, Hyeonhwasa has greatly expanded the contact not only with the royal family, but also with the whole ruling class. In particular, at the time of Munjong(文宗), it has been reborn as a space where the solidarity between the royal family and the bureaucratic society is strengthened through the Buddhist order. Especially Sohyeon(韶顯) who was born in Inju Lee family became the chief monk of Hyeonhwasa in the reign of Munjong, adopted Prince Jeong(竀) as a pupil. Through such a series of processes, Hyeonhwasa served as a ceremonial space to commemorate the royal ancestors and as a political space to reinforce the social network within the ruling class.

315세기 중엽 조선과 명의 정국과 수양대군의 대명외교

저자 : 장대근 ( Jang Dae-Geun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41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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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수양대군이 유동적인 국내외 정세를 기민하게 활용하면서 즉위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1449년 토목의 변으로 정통제는 포로가 되고 정통제의 이복동생 경태제가 즉위했다. 정통제는 이듬해 귀국했으나 남궁에 유폐되었다. 이후 태상황제의 존재와 후계자 선정 문제는 경태제의 지위를 흔드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세종대 후반 왕세자가 섭정하면서 종친이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관직에 임명되지 않고도 왕명을 출납하거나 국정 논의에 참여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 두 대군은 이미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였다.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직후 고명사은사로 북경에 갔다. 종친을 고명사은사로 보낸 전례가 없음에도 수양대군은 강력하게 사행을 자청했다. 그는 북경에서 조명관계의 중요한 행위자인 조선 출신 환관과 접촉했다. 수양대군은 이 사행에서 대내적으로 국왕의 숙부로서 두터운 대우를 받는 동시에 명에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上國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이미 조선의 실질적인 권력자였으나, 결코 섭정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선양의 장은 명 사신이 서울에 체류하는 중에 펼쳐졌다. 두 사신 중 한 명은 수양대군의 사돈이자 皇親인 한확과 관계가 있었다. 조선에서 수양대군의 지위를 알고 있었던 명 사신은 왕위 교체를 지지 혹은 최소한 묵인하였다.
세조 책봉은 중종과 인조의 사례와 비교할 때 상당히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세종대 후반 종친의 대두라는 대내적 배경과 동시에 토목의 변과 명황실의 계승 문제라는 대외적 배경이 작용했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배경에서 조명관계를 자신의 집권에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This paper analyzed how Prince Suyang of Joseon used the everchanging international and domestic situations to be crowned king of Joseon.
After the Tumu Crisis(土木之變), Emperor Zhengtong's half-brother acceded to the throne and became Emperor Jingtai. He put the returning Emperor Zhengtong into confinement and made his son the crown prince instead of his nephew. Meanwhile, in Joseon, the crown prince acted as regent at the end of King Sejong's reign, which led the royal relatives to return to the fore of politics. Prince Suyang and Prince Anpyeong, in particular, had already established their positions in politics when King Danjong succeeded the throne.
Prince Suyang volunteered to visit Beijing as Gomyeongsaeunsa(誥命謝恩使). In Beijing, He intended to garner respect as the uncle of the king domestically and make a strong impression in the Ming court to use the authority from the Ming dynasty in the future. Prince Suyang's usurpation took place during a visit from the Ming envoy. He formed good relations with the Ming dynasty by reaching out to the Ming eunuch from Joseon and becoming family with the relatives of the Gongnyeo(貢女) by marriage.
In comparison to King Jungjong and Injo, the approval process from the Ming dynasty was more straightforward for Prince Suyang. The external factors, the Tumu Crisis and the problems in the succession of the Ming throne, played pivotal roles in the approval. Thanks to such circumstances, Prince Suyang was able to lead the Joseon-Ming relations to better support his power.

4조선 후기 족보의 여성 정보 등재 추이와 그 의미 -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1476~1907)를 중심으로 -

저자 : 강나은 ( Kang Na-Eun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8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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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부터 간행된 족보는 조선 후기에 더 활발히 간행되면서 구성상 변화를 보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외손 가계 기록에는 제한이 생기는 반면, 처 정보를 기재하는 인물들이 늘어갔다. 안동권씨 족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넓은 범위의 인물들을 포함했지만 동시에 족보 간행을 거듭하며 족보 입록이 번복되거나 뒤늦게 족보에 입록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한미한 지위거나 가문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안정적인 족보 입록을 보장받지 못했던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 비하여 조선 후기는 더 많은 성관이 족보 간행에 참여했고 족보 입록 인물의 범위도 더 넓어졌다. 동시에 외손 가계의 입록에는 제한이 생겼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족보 입록을 통한 사회적 지위 보장 가능성은 낮아졌다. 이에 따라 족보에 입록되는 인물들은 점차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처 정보 또한 그 가운데 제공되는 정보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처 정보를 기재하는 인물의 비율은 점차 높아졌다. 처 정보 기재 초기는 이전 족보에 이미 입록되었던 인물들의 처 정보 제공이 더 중요했고 이후로도 이입 인물의 처 정보는 지속적으로 추가되었다. 이는 처 정보가 계통 고증의 문제 속에서 중요성을 부여받은 결과이다.
처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인물의 대다수가 처의 가계 정보에 해당하는 본관과 아버지 정보를 제공하는 데 주목적을 두고 있었다. 족보를 통해서 사회적 지위를 입증하려는 인물들에게 처의 가계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필요한 정보가 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까지 외가와 처가가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및 이권 획득에서 영향을 주고 있었던 사회적 배경 속에서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This thesis aims at analyzing the phenomenon of registering wife's informa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genealogy. Genealogy[族譜], which started the early Joseon Dynasty, changed composition being widely published in the late Joseon period. While there is a restriction on registering daughter's children, a growing number of people provide wife's informa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analyzing the increasing trend of the people enrolled wife's information and the specific content of the information, this thesis sought the meaning of description of the wife.
Andong Kwon's genealogy broadened enrolled members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t the same time, a reversal of registration or the late-registration also existed. Braodening the size of the genealogy based on the homogeneous groups accompanied the limition in the scope of the daughter's descendants. Throughout the change, the possibility of guaranteeing social status has been lowered. As a result, enrolled people started to provide detailed information. The 'wife's information' was one of the provided information.
The percentage of the people who have their wife's information gradually increased as the publication continues. Wife information was usually for those who already registered at the first phase and continuously supplemented for the pre-registered one. This mean that acquiring wife's information itself was crucial, and the information gets its utility in relation to lineage.
The majority of the people who offered the wife's information focused on providing information about the wife's choronym[本貫] and father, which correspond to the wife's lineage information. The wife's information, especially about the wife's lineage, was needed for those who tried to demonstrate their social rank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could be related to the social background in which maternal families and wife's families have an influence on individuals' social status and interests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518~19세기 지산리 서계(庶系) 동성촌락의 형성과정 - 경상도 대구부 수동면 호적대장 분석 -

저자 : 김미영 ( Kim Mi-young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2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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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8~19세기 대구부 수동면 호적대장을 활용하여 지역민의 성관 및 부계 혈연관계를 분석하여 이를 바탕으로 동성촌락을 검토하고 그 형성 과정을 고찰했다.
19세기 후반 대구 수동면 지산리에는 중화 양씨가, 범물리에는 밀양 박씨가 모여 살았다. 집거가 명확한 지산리 중화 양씨와 범물리 밀양 박씨의 혈연관계를 확인해본 결과 지산리 중화 양씨는 모든 호에서 혈연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범물리 밀양 박씨는 다섯 가계로 혈연관계가 나뉘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대구부 수동면에서 동성촌락은 중화 양씨가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지산리였다.
호적 자료에 따르면 18세기 지산리 중화 양씨 호는 다른 성관의 호수에 비해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급격하게 호수가 증가하여 19세기 후반이 되면 중화 양씨 호가 지산리 전체 호의 1/3을 차지하게 된다. 그 중 중화 양씨 달화 후손들이 지산리 중화 양씨 동성촌락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양달화는 18세기 인물로 양경렴과 현풍 곽씨 사이에서 난 서자였다. 18세기까지 지산리에는 중화 양씨 嫡系와 庶系가 함께 공존하였으나 점차 적계 호는 사라지고 서계인 양달화의 후손들이 주가 되어 중화 양씨 동성촌락을 형성했다.
19세기 지산리에서는 본격적으로 양달화의 자손들 호가 증가한다. 이 중 지산리에는 양달화의 장남 계열 후손보다 삼남 계열의 후손이 많았다. 장남 계열이 수동면의 여러 리에 흩어져 거주했던 반면 삼남 계열은 모두 지산리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한편 지산리 중화 양씨는 수동면 내 다른 중화 양씨와도 관계를 맺어 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지산리의 중화 양씨와 향덕리 중화 양씨가 혈연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This paper studied the household registers of Sudong-myeon, Daegu-bu, during the eigh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to analyze the surnames and patrilineality of local residents to examine the single-lineage villages and their formation process.
Jisan-ri became a single-lineage village for the Junghwa Yang Clan in approximately the nineteenth century. Among the many Yang households, the descendants of Yang Dal-hwa were the most significant contributors in transforming Jisan-ri into a single-lineage village of the Junghwa Yang Clan. Yang Dal-hwa lived in the eighteenth century and was an illegitimate child born between Yang Gyeong-ryeom and a woman from the Hyeonpung Gwak Clan.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number of households descending from Yang Dal-hwa began to increase in full-scale. Among such households, there were more descendants from the third son of Yang Dal-hwa than the descendants from his first son. The descendants of Yang Dal-hwa's first son also resided in villages other than from Jisan-ri, such as Hyangdeok-ri and Ducheon-ri, whereas most of the third son's descendants lived in Jisan-ri. The Junghwa Yang Clan, who resided in Jisan-ri, also interacted with the other Junghwa Yang Clans in Sudong-myeon. They were especially close with the Junghwa Yang Clan that lived in Hyangdeok-ri because the two clans had close blood ties with each other.

6백제 국가형성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제안

저자 : 권오영 ( Kwon Oh-young )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7-25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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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국가 형성사를 연구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지≫이다. 이 두 개의 사서가 전하는 백제 국가형성의 시점과 내용은 판이하게 달라서 둘 중 어떤 사서에 무게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한국고대사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21세기에 들어와 급증한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결과 백제 국가형성사에서는 ≪삼국지≫의 사료적 가치가 ≪삼국사기≫보다 높음이 명확히 판명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8년 부여-고구려계 이주민인 온조에 의해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과거의 믿음은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낡은 견해를 버리지 못한 채, 전문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모순이 심화되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기존의 낡은 도그마를 버리고 백제의 국가 형성을 기원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국가형성은 소수의 건국 위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청동기시대 이후 한강유역의 여러 정치체 사이에서 전개된 다양한 교섭의 양상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렇듯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The most basic sources for studying the history of the formation of Baekje state are “Samguksagi” and “Samgukji”. The timing and contents of the formation of the state by the two documents are quite different, and it has been a long-standing controversy in Korean ancient history.
As a result of the rapid archaeological excavation in the 21st century, the historical value of “Samgukji” turned out to be higher than that of “Samguksagi”. Thus, the past belief that Baekje was founded by Onjo, a Buyeo-Koguryo immigrant, in 18 B.C. could no longer work. Without abandoning this old view, many problems and inconsistencies have arisen in the historical circles.
For full-fledged research in the future, the existing old dogma should be abandoned and the formation of Baekje state should be understood as a process, not origin. It should be acknowledged that the formation of Baekje state was not led by a small number of founding greats, but by various interactions among various polities in the Han River basin after the Bronze Age. Only after acknowledging the obvious will scientific research be carried out successfully.

7校勘譯註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저자 : 남동신

발행기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간행물 : 한국사론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327 (7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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