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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연구 update

  •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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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3820
  • : 2714-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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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4)~119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541
대동문화연구
119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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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崔珍烈 ( Choi Jin-yeoul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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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소위 後漢의 '창업군주' 光武帝가 추진한 郡都尉 폐지와 郡縣 통폐합, 봉록삭감 등의 정책에 주목하여 폐지한 관직의 봉급과 봉록삭감액을 계산하여 光武帝의 官制 改編이 재정문제와 관련 있음을 밝혔다. 皇甫謐의 『帝王世記』에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光武帝의 後漢 건국 초 戶口가 前漢 元始 2년 戶口의 20%로 줄었다고 기록하였다. 光武帝는 호구를 늘리는 정책을 실시하여 中元 2년(57) 戶口는 4,271,634戶, 21,007,820人로 늘었다. 그러나 이는 前漢 元始 2년 戶口의 32.3%와 35.5%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호구의 급감은 재정수입의 감소를 뜻하기 때문에 光武帝는 재정지출을 줄여야 했다. 官制와 지방행정제도 개편이 재정지출 감소를 위한 조치였다.


I proved that the Emperor Guangwu's abolition of commandery defender(duwei), commanderies and prefectures and reduction of official salary was related to financial problems by calculating the salaries and cuts of government posts. Although no specific figures were given in history book called Diwangshiji by Huangfu mi(215 A.D.~282 A.D.), the scholar, doctor and historian in the period of Xi Jin Dynasty, it was recorded that the numbers of households in the founding of the Latter Han decreased to 20% of that of households in 2 A.D., the period of Former Han dynasty. Emperor Guangwu implemented a policy to increase the number of households, and succeeded in increasing numbers to 4,271,634 households, and 21,007,820 persons in 57 A.D.. But it was only 32.3% of households and 35.5% of persons in 2 A.D. This sharp decline in households meant a decline in fiscal revenue, so the Emperor Gwangmu had to reduce fiscal spending. The reorganization of the government post and abolition of local administration systems was a measure to reduce fiscal expenditure. Liao Boyuan, Taiwan scholar, criticized that the Emperor Guangwu's transfer of the capital from Chang'an to Luoyang lead to no interest in territorial expansion, instead, he took a policy of complacency by removing some commanderies and prefectures of the northern provinces and moving the people to the inland, resulting in the decline of Guanzhong and Liangzhou regions, and frequent rebellion. Though his criticisms are sufficiently valid, the Emperor Gwangmu system could not have taken active foreign policy due to a decrease in households and fiscal income during the first stage of the Latter H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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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朴哲珉 ( Park Cheol-m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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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577년(선조 10) 鐵原 深源寺에서 간행한 『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이하『恩重經諺解』)의 저본과 특징을 살펴본 것이다. 『恩重經諺解』는 그간 42종의 판본이 알려졌으나, 이번 연구를 통해 총 44종의 판본이 확인되었다. 새로 추가한 2종의 판본 중 철원 심원사 간행의 『恩重經諺解』(이하 심원사본)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본이 현전 유일본으로 확인된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 심원사본은 제12~15장, 제17~20장이 결락되어 있으나, 연화질, 간기 등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어, 간행 시기와 장소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심원사본을 살펴보았을 때, 해당 문헌은 조선시대 강원도에서 간행된 『恩重經諺解』의 한 판본이며, 현재까지 확인되는 여러 판본 중 강원도에서 간행된 가장 오래된 판본이기도 하다. 심원사본의 간기 말미에는 留板이라고 되어 있으나, 간행에 참여한 인물, 심원사본의 간행이 이루어지기 3년 앞서 『묘법연화경』을 심원사에서 간행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보아 심원사본은 심원사에서 간행이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심원사본은 본문 및 도상의 특징으로 보아 1553년 간행된 華藏寺本을 저본으로 삼았으리라 여겨지며, 종성의 'ㆁ'을 바로잡은 흔적이 특징적이다. 심원사에서 화장사본을 저본으로 삼은 까닭은 지리적 특징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는 심원사본의 소개 외에도 전주본과 흥복사본의 새 소장처를 소개하였으며, 『恩重經諺解』 판본 중 1583년 槐山 小馬寺 간본을 추가하여 현재까지 확인된 판본을 정리하였다.


This study examined the source text and characteristics of Bulseol daebo bumo eunjunggyeong (eonhae) [佛說大報父母恩重經(諺解), Sakyamuni's Teaching on Parental Love (Korean annotation]] (hereinafter Eunjunggyeong eonhae) published in 1577 (10th year of King Seonjo's reign) at Simwonsa Temple in Cheorwon. While 42 editions of Eunjunggyeong eonhae were known meanwhile, a total of its 44 editions have been confirmed by this study. Of the two newly added editions, a volume owned by Jon-gyeonggak, Sungkyunkwan University is the only extant volume of Eunjunggyeong eonhae published at Simwonsa Temple in Cheorwon (hereinafter Simwonsa Temple edition).
As for the Simwonsa Temple edition housed by Jon-gyeonggak, Sungkyunkwan University, the period and location of its publication can be easily identified because yeonhwajil (緣化秩, a list of involved individuals) and gan-gi (刊記, colophon) have been preserved relatively intact, though Chapters 12~13 and Chapters 17~20 are missing. From them, it is confirmed that the Simwonsa Temple edition is one edition of Eunjunggyeong eonhae published in Gangwon-do during the era of the Joseon Dynasty, and is the oldest edition published in Gangwon-do. Although Edition stored (留板) is written at the end of the gangi (colophon) of the Simwonsa Temple edition, it is presumed that the Simwonsa Temple edition was published at Simwonsa Temple, considering that Saddharmapundarika Sutra (妙法蓮華經, The Lotus Sutra) was published at Simwonsa Temple three years before the publication of the Simwonsa Temple edition.
In view of its text and the characteristics of its iconography, it is presumed that the source text of the Simwonsa Temple edition was the Hwajangsa Temple edition published in 1553, and the Simwonsa Temple edition is characterized by the trace of correcting 'ㆁ' in the final consonant placed under a vowel. It is deemed that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also had some effects on the reason why the Simwonsa Temple used the Hwajangsa Temple edition as the source text. Besides introducing the Simwonsa Temple edition, this study also introduces new locations that house the Jeonju edition and the Heungboksa Temple edition, and summarizes the editions of Eunjunggyeong eonhae identified until now, with adding the 1583 edition of Eunjunggyeong eonhae published at Somasa Temple, Goe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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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劉順英 ( Yoo Soon-yo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5-10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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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吳姬百媚』(1617)와 『金陵百媚』(1618)의 내용과 성격, 시각화 양상을 살피고, 시각적 재현에 근거하여 명 말기 기녀 이미지를 세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두 서책은 기녀를 꽃에 빗대어 품평하고 과거 합격자의 품계처럼 등급을 정한 뒤 각종 시문과 삽도를 수록한 花案의 일종이다. 이들의 출판에 관여한 周之標, 馮夢龍, 李雲翔은 과거제도 바깥에서 양명학의 자장 하에 청루의 유흥문화와 통속문학을 즐기고 상업 출판에 나선 이들이다. 삽도의 시각화 방식은 오위와 당인의 작품과 특히 친연성이 깊고, 통속문학의 삽도와도 관련을 보인다.
두 서책의 기녀 이미지는 문사형 기녀, 고전적 사녀 이미지와 낭만적인 로맨스, 성적 욕망과 에로티시즘 측면을 분석하였다. 시서화를 창작하고 고급 물질을 향유하는 문사형 기녀는 새롭게 부각된 여성성으로, 기녀들은 남성들의 예술 장르를 자기표현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난을 기녀의 메타포로 전용하는 문화 맥락을 생산했다. 기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움의 정조는 고전적 사녀 이미지를 차용했으며, 簪花와 秉花는 기녀의 시각 코드로 부각되었다. 동시대 기녀와 문사의 낭만적인 로맨스는 옛 명사와 기녀의 일화를 빌어 표현했으며, 성적 욕망과 에로티시즘은 春情圖와 에로틱한 신체 표현과 관음적인 시선, 노골적인 애정 표현과 신체 접촉에서 드러난다. 두 서책은 강남의 주변부 문인들이 당대 기녀들에게 발견한 여성성과 그들에게 투영한 욕망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이다.


This thesis examines the contents, characteristics, and visualization aspects of Wujibaimei and Jinlingbaimei. And based on the visual representation, I analyze the image of courtesans in th late Ming Dynasty from three aspects. The two books are a kind of Hua an in which various poems and prints are recorded after evaluating courtesans by comparing them to flowers and ranking them like the ranks of national exam. The people who took the lead in publishing were those who were influenced by Yangming Studies, enjoyed entertainment culture and popular literature, and started commercial publishing. The visualization method of prints is particularly closely related to the works of Wu Wei and Tang Yin. And it seems to be related to the prints of popular literature.
I analyze the images of courtesans, in terms of literary courtesan, classical female image and romantic romance, and sexual desire and eroticism. A literary courtesan who creates poems and paintings and enjoys high-quality materials, is a newly emphasized femininity. The courtesans used the artistic genre of male elites as a means of self-expression, and produced a cultural context that diverted the orchid as a metaphor for the courtesan. The love, parting, and longing of courtesans borrowed the classic image of a woman. Putting flowers in a woman's hair and holding flowers by hand were highlighted as the visual codes of the courtesans. The romantic romance between a contemporary courtesan and a literary man was expressed by borrowing the anecdote of an old male elite and a courtesan. Sexual desire and eroticism are revealed in prints of the lusts of men and women, erotic body expressions and voyeuristic gazes, and explicit expressions of affection and physical contact. The two books are visual materials that complexly show the femininity that literary man from the periphery of Gangnam discovered in contemporaneous courtesans and the desire they projected on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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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劉美那 ( Yu Mi-na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3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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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전김시필 산수풍속도'라는 표제로 함께 수장되어 있는 27점의 채색 산수인물도 중에는 9점의 사녀도가 포함되어 있다. 수목과 괴석이 배치된 잘 다듬어진 정원에서 편지를 쓰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혹은 어린 아들을 돌보는 여성을 그린 그림들로서 다채로운 채색과 금니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그린 작품들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성과 공간감, 그리고 비수차가 큰 필선의 사용 등이 조선 중기 절파화풍의 소경산수인물화 유형을 띠고 있어서 제작 시기는 17세기로 추정되는 작품들이다. 이는 현존하는 사녀도 중 시기가 가장 이르고, 한 화가에 의해 아홉 점이 일괄로 제작된 세트로서 다양한 도상의 仕女像을 보여주는 귀중한 회화 자료이다.
이들 사녀도의 도상을 검토해보면 그림 속 여인은 떠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 원망을 품고 있다. 주제 및 회화 양식에 있어서 중국 宋代에 발달했던 閨怨을 주제로 한 사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명대에 유행한 미인도 양식을 보인다. 명 중기 구영의 미인도가 17세기에 조선에 전래되었음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화풍에 있어서도 깊은 관련성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녀도가 아름다운 여성의 용모를 담아내어 성적 매력을 대상화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군자로서 '성색을 멀리해야한다'는 절제의 준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의 선비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상하였을까. 이에 조선의 문사들이 사녀도 감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유를 짚어보았다. 첫째, 歲畵이기에 완상하였고, 둘째, 故事圖로서 감계의 효능을 지녔기에 완상하였으며, 셋째, 중국으로부터 입수된 대가의 명품이기에 완상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9점의 사녀도의 제작과 감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들 작품은 宮怨詩를 시각화한 송대 사녀도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명말 臨宋人畵帖의 제작 및 유행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채색사녀도를 '고전적 미인도의 재현'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Among the 27 paintings in the “Figures in the Landscape attributed to Kim Shi” album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nine are shinuhua (paintings of beauties). The overall composition and the brushwork are characteristic of the mid-Joseon-period Che-school style of painting, which dates the album as a work of the seventeenth century. Thus, the nine shinuhua represent the earliest extant examples of the genre from the Joseon Dynasty. The female figures are rendered in the Ming painting style best represented by Tang Yin and Qiu Ying. However, rather than showing women from the chongru brothel district or illustrating swordswomen from then-popular novels, all of the women depicted are respectable, and they are rendered with a sense of longing and desire, a treatment reminiscent of Song Dynasty figure paintings. While such a treatment undoubtedly reflected the taste of the literati who commissioned these paintings, how exactly are we to understand the desire of Confucian men for these shinuhua paintings? Confucian principles instruct that men must stay away from women. Nevertheless, we may surmise that it would have been hard for these men to resist their desire to enjoy paintings of them. Though some literati have argued that they had reason to enjoy shinuhua paintings when such works also functioned as New Year's paintings, when they had didactic meaning, or when they were the work of master painters of the past, none of those reasons seem to apply to the nine shinuhua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collection. This paper therefore proposes that these nine shinuhua paintings were most likely accepted as romanticized images from the classical painting tradition, arguing that this album was probably intended to represent copies of the Song paintings popular in the late Ming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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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柳旻定 ( You Min-j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6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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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의 『孟子古義』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경학의 한 방법으로서 수사학적 경전 해석의 보편성을 究明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수사학적 경전 해석이란 '글의 구조적 특징을 통해 경문을 해석하고, 이에 대한 어휘 배열, 문장 구조, 표현 기교 등을 注解한다'는 의미를 지향한다. 철학가나 문학가를 막론하고 유학자라면 경전을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았으며, 이토 진사이 또한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다.
이토 진사이의 수사학적 『맹자』 해석은 그의 경학관이 갖는 특징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맹자』의 수사법을 『논어』의 수사법과 연관하여 설명하였으며, 경문의 문세를 근거로 주희 등 다른 경학가들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어맥을 통해 '古義[공맹의 본의]'를 밝혀야 한다는 저술 목적 또한 그의 수사학적 『맹자』 해석에 반영되었다. 어법이나 어세보다도 '어의'를 많이 언급하였으며, 표현 기교나 문장 구조가 주는 심미적 감상평이 드물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일본의 수사학적 경전 해석에서 이토 진사이의 『맹자고의』는 기초 성격을 띤다. 맹자가 사용한 요약법이나 비유법 등을 강조하며 설명하였지만, 괄진법이나 정보대기법 등 고차원의 수사법을 논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이토 진사이의 수사학적 『맹자』해석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그의 경전 해석은 후대 일본 경학가들의 문의 중심 경전 읽기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고, 그 결과 히로세 탄소의 『독맹자』 등과 같이 수사학적 접근이 전문화된 형태의 주석서가 등장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universality and speciality of the rhetorically oriented exegeses centering on Itō Jinsai 伊藤仁齋's the Mōshi kogi 孟子古義. Rhetorically oriented exegeses aim to interpret the Classics based on the textual features such as lexis, sentence structure, literary embellishment. and etc. Also, regardless of philosopher or literary figure, Confucian scholars regarded the Classics a writing model. The Mōshi kogi shows that Itō Jinsai had these two perspectives.
Itō Jinsai's rhetorically oriented exegeses on the Mencius also implies the characteristics of his thought on the study of the Classics. He explained the rhetoric of Mencius in relation to the rhetoric of Analects, and presented different views from orthodox scholars such as Zhu Xi based on the original text. In addition, his rhetorical interpretation also reflected his purpose of writing a commentary that “the original intention of Confucius” should be revealed through textual features: in details, the author's intention or thought was mentioned more than grammar or the mood of the text.
Among the Japanese rhetorical interpretations of the Classics, Itō Jinsai's the Mōshi kogi is a stepping stone. Although he emphasized and explained the summary method or metaphor used by Mencius, it is rarely discussed high-dimensional rhetoric such as the parentheses method or the information waiting method. However, the rhetorical interpretation of the Mencius made by Itō Jinsai is meaningful in itself. His interpretation contributed to the reading of the Classics of later Japanese scholars, and as a result, it served as a priming water for the emergence of the rhetoric-centered commentaries such as Doku Mōshi written by Hirose Tansō in the late Edō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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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朴晶愛 ( Park Jeong-ae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21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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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기 동아시아 문인지식인들은 名勝을 매개로 한 지적 탐구와 문예활동을 다채롭게 전개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의 관료문인들이 주도한 명승지 유람과 詩文書畵의 창작 및 향유 양상은 당대 사회의 집단지성과 예술적 지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韓中名勝圖帖》은 그와 같은 사회문화적 배경 아래 제작된 작품이다. 서두의 詩 한 편 외에 한국과 중국의 명승 경관을 담은 실경산수화 10폭이 실린 이례적 구성의 화첩이다. 그림의 畵題는 '關西八景'으로 일컬어지는 평안도 명승들과 충청도 보령 永保亭 같은 국내 명승, 그리고 岳陽樓와 黃鶴樓, 三峽 등 유서 깊은 중국 강남지방의 명승들이다. 한편 화첩을 개장하면서 추가한 詩의 款識에 등장하는 李敦中 집안과 혼맥으로 연결된 徐命膺의 官歷이 충청도와 평안도 양 지역에 걸쳐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돈중과 서명응 집안이 화첩의 제작과 전승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승도의 구도와 세부 표현법에 나타나는 특징은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화풍과 상통한다. 요컨대 《한중명승도첩》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의 명승까지 포괄했던 조선 후기 명승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주목을 끄는 繪畵史料라 하겠다.


The literati (intellectuals) of East Asia in the pre-modern era engaged in diverse intellectual explorations and literary activities that focused on scenic spots. Particularly in and after the seventeenth century, scholar-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took sightseeing trips to such scenic spots and practiced the creation and appreciation of poems, prose, calligraphy, and paintings related to the sites. This allows us a glimpse into the collective intelligence and artistic pursuits of the society of the time. This is also the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behind Album of Paintings of Scenic Spots of Korea and China in the collection of the British Library. The album's unusual compilation features a poem at the beginning and ten real-scenery landscape paintings of scenic sites in Korea and China. It includes some of the eight Korean scenic sites around Gwanseo in Pyeongan-do Province and Yeongbojeong Pavilion in Boryeong, Chungcheong-do Province, as well as historic scenic spots in the Jiangnan region of China, such as Yueyang Pavilion, Huanghe Pavilion, and the Sanxia Gorges. When the album was remounted, a poem was added. The signature following the poem includes the name of Yi Don-jung whose family was connected by marriage to the family of Seo Myeong-eung. Seo's career record indicates that he served as an official both in Chungcheong-do and Pyeongan-do Provinces. Accordingly, it seems highly probable that the families of Yi Don-jung and Seo Myeong-eung might have been involved in the production and transmission of Album of Paintings of Scenic Spots of Korea and China. The composition and depictions of details in this album's paintings correspond to styles popular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This artwork thus provides a notable historical source for studying the late-Joseon practice of appreciating scenic spots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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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金秀珍 ( Kim Soo-jin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1-2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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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安州 자수가 크게 부상했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 이왕실이 안주 자수를 주문한 역사를 검토하였으며, 다시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이를 부흥하려 한 역사를 논의했다. 본 논고는 이를 위해 첫째, 대한제국 황실이 전통적인 궁수를 대신하여 평안도 특산인 안주 자수를 경성으로 주문한 역사를 검토했다. 둘째, 왕실이 서울 아닌 평안도에 있는 안주까지 자수를 주문할 수 있었던 것이 철도의 개통과 기차의 운행을 통해 가능했음을 논의했다. 셋째, 대한제국기에 근대 군주의 표상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안에서 자수라는 매체와 새로운 화제가 사용된 역사를 조명할 수 있었다. 넷째, 황제의 서북 순행이 가졌던 정치적·경제적 의미를 논의함으로써 안주 자수가 재발견될 수 있었던 배경을 검토했다. 다섯째 안주 자수가 평양과 경성을 거쳐 전국적으로 유행한 후에 다시 쇠퇴하게 되는 역사를 조명했다. 본 연구를 통해 19~20세기에 대한제국 황실에서 왜 자수라는 매체를 활용했으며, 그것이 품고 있는 근대화·산업화·자본화의 의미에 대해 밝힐 수 있었다.


This study aims to illuminate the history of the rise and fall of Anju embroidery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while discussing the history of the imperial family ordering it and the colonial government reviving it. For this, first, this study reviewed the history of the royal family ordering Anju embroidery, a specialty of Pyŏngan-do province, instead of traditional royal embroidery made by court ladies. Second, it was discussed that it was possible through the opening of the railway and the operation of the train that the royal family could order embroidery to Anju in North Korea, not Seoul. Third, it was possible to illuminate the use of embroidery as a new medium and new topics in the task of creating a representation of a modern monarch during the Korean Empire. Fourth, by discussing the political and economic significance of the emperor Sunjong's tour to the northwest, the reason for the rediscovery of Anju embroidery was examined. Fifth, this study sheds light 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gain after Anju embroidery became popular nationwide after going through Pyŏngyang and Seoul. Through this study, it is discussed why embroidery was used by the imperial family of the Korean Empire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and the meaning of modernization, industrialization, and capitalization that it embr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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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許洙 ( Hur Soo ) , 金惠珍 ( Kim Hea Jin ) , 鄭瑜炅 ( Jeong Yoo Ky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85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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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대한제국기 '집단적 주체'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토픽모델링을 사용해서 '집단적 주체' 상호 간의 관계 및 장기지속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사설 기사를 정제하고, 고빈도 단어 중 '인민', '국민', '동포', '민족'의 4개 단어를 '집단적 주체'로 설정했다. 3장에서는 2,341개 사설로 구성된 말뭉치 자료로부터 11개의 주제('토픽')를 도출하고, 이를 근거로 13개년의 기간을 4개 시기로 구분했다. 4장에서는 우선, '단어의 토픽 구성'으로 '집단적 주체' 상호 간의 시기별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국민'과 '동포'의 높은 연관성이 1기(1898~1900년)에서 3기(1904~1907년)까지 지속된 반면, 4기(1908~1910년)에는 네 단어 간의 이질성이 심화되었다. 다음으로, 유사한 토픽끼리 묶는 '토픽그룹화'를 통해 '집단적 주체'의 장기지속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인민'은 주로 '근대 국가의 구성 및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국민'과 '동포'는 '동아시아 국제정세'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양분했다. '국가와 民'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국민'(2기), '인민'(3기), '민족'(4기)으로 계기적으로 변화했다.


In this study, we investigated the meaning of “collective subjects” by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and the continuity of the meaning. To this end, we, firstly, collected the editorial articles from the Huangseong-Shinmun and the Daehanmaeilsinbo published from 1989 to 1910 and carried out natural language processing. Then, we chose 'people' (inmin), 'nation' (gukmin), 'brotherhood' (dongpo) and 'nationals' (minjok), as the representative four terms meaning collective subjects. Secondly, we detected 11 topics from a total of 2,341 editorial articles using the topic modeling technique and divided 13 years (from 1989 to 1910) into four periods based on distributions of the detected topics: 1898 to 1900 (P1), 1901 to 1903 (P2), 1904 to 1907 (P3), and 1908 to 1910 (P4). As a result of the change and continuity of the meaning in the four collective subjects, we found that 'nation' (gukmin) and 'brotherhood' (dongpo) were highly correlated from P1 to P3, whereas the semantic heterogeneity of each term increased in P4. We also found that the meaning of 'people' (inmin) covered “composition and membership of the modern country”. 'Nation' (gukmin) and 'brotherhood' (dongpo) shared the meaning in terms of “East Asia international situation”. In this study, the meaning of “the nation and people” appeared in 'nation' (gukmin) in P2, 'people' (inmin) in P3, and 'nationals' (minjok) in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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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權東祐 ( Kwon Dong-woo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1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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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사회에 유입되어 포교를 전개했던 교파신도는 모두 11개 교파였다. 그 가운데 그나마 토착화에 성공한 교단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天理敎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천리교의 조선 내 토착화는 근대 천리교 본부와 지도부에서 의도했던 '세계보편종교'의 방향이 해외포교를 통해 실행된 결과물일까? 아니면 그들이 주장해 왔던 조선포교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천리교적 종교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신앙의 토착화로 이어진 것일까? 본고는 이러한 천리교의 '토착화'를 화두로 일제강점기 천리교에서 의도한 조선포교의 방향과 실제 포교의 양상이 어떠한 간극을 보이는 가운데 조선인 포교를 실행해 왔는지 그 실상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업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천리교가 조선사회에서 다른 교파신도에 비해 가장 많은 조선인 신자를 포교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본 정부에 의해 비근대적 의료행위로서 '비문명'으로 규정했던 '치병'이었다는 점, 이에 대해 오히려 천리교의 조선포교에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천리교 지도부와 조선총독부가 천리교를 세계 보편종교로 정립하기 위해 내세운 사해동포의 '동화' 논리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ere were total 11 sects that flew into and propagated the religion in Joseon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mong them, Tenrikyo could be pointed out as a sect succeeded in naturalization.
Should the naturalization of Tenrikyo in Joseon be regarded as an outcome of executing the direction of 'world universal religion' through overseas propagation, which was intended by the headquarters and leadership of Tenrikyo? Or was the religiosity of Tenrikyo naturally formed in the direction totally different from the propagation in Joseon they had argued, which was led to the naturalization of religion? This thesis aimed to examine the actual status of propagation in Joseon based on the gap between Tenrikyo's intended direction of propagation and the actual aspect of propagation in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under the subject of 'naturalization' of Tenrikyo.
As a result, the secret in which Tenrikyo could propagate the most Joseon believers compared to other sectarian shinto in Joseon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was the 'treatment of sickness' defin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as non-modern medical treatment and 'non-civilization'. Tenrikyo's biggest obstacle to propagation in Joseon was the 'assimilation' logic of universal brotherhood used by the leadership of Tenrikyo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or establishing Tenrikyo as a world universal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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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崔喜英 ( Choi Hee-young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간행물 : 대동문화연구 11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5-33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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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34년 삼남 수재민을 위한 기생들의 구제 활동을 고찰하였다. 1934년 삼남 수재는 '최악의 수해'로 기록된 재해 중 하나로 광범위한 전라, 경상, 충청 지역에 걸친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준 사건이었다. 국내 최초로 비행기 취재를 통해 생생한 참상이 전국에 알려지며 전 국민의 구제 손길이 이어졌고 이 중에서도 기생조직은 약 3개월에 걸쳐 구제 활동에 동참하였다. 1934년 삼남 수재민 구제 활동에 참여한 권번은 약 30곳에 달하여 수재로 인해 기근의 선상에 헤매고 있던 동포들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대부분의 구제 활동은 공연을 개최하여 번 수익금을 수재민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물자 보급과 방문을 통해서도 기생의 수재민을 위한 활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특히 구제 공연 개최에 있어 피해지인 삼남 외에 서북 지방 기생의 공헌이 두드러진 점이 특기할 만하다.
공연, 의연품 지급, 방문 등을 통한 기생의 1934년 삼남 수재민 구제 활동은 주최나 후원을 담당했던『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문 기사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관련 기사문에서 기생은 “공익에 보탬이 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제 활동에 뛰어들기 전 정면을 응시하고 의연한 모습을 담은 기생의 사진은 당시 연애로 인한 자살, 도주, 치정극, 사기, 폭행 등의 사건, 사고 속에 묘사된 기생 이미지와는 전연 다른 모습이었다.
기생의 1934년 수재민 구제 활동은 『장한』 글에서도 표출된 바 있는 신여성으로서 공익활동에 힘쓰는 한 국민으로서의 긍정적 이미지 구축 욕망을 담고 있으며 이는 경성이나 평양에 비해 그 활동 기록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삼남과 서북 지방 기생을 포함한 전국 기생에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구제 활동을 알리며 공익활동에 찬사를 보내는 신문 기사문에서조차 여전히 기생집단을 부정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34년 기생들의 삼남 수재민 구제 활동은 도움을 직접 받았던 수재민과 구제 활동에 후원 혹은 주최로 참여한 신문사 인사들에게 기생을 향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 일조하였으나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This study examines gisaeng's activities to help the 1934 flood victims in Korea's Southern Provinces. The flood, recorded as one of the worst disasters in Korean history, had a damaging impact on residents of southern parts encompassing Jeolla, Gyeongsang, Chungcheong. As its terrible scenes―they were filmed from the helicopter for the first time in Korean history―were revealed to the public, a series of relief supplies were sent to the victims. Among such moving stories, the gisaeng's three-months-long relief activities are noticeable. Gisaeng from almost thirty gwonbeons (institutions set up for the training and oversight of gisaeng) participated in relief activities for the flood victim, giving a great deal of help to the locals stricken with famine. Gisaeng hosted a series of benefit concerts to send all the proceeds to the victims. Also some gisaeng helped the 1934 victims by providing relief money/products and even visiting the affected areas. It is noteworthy that not Gyeongseong or Pyeongyang gisaeng, who have been known as the most popular ones, but gisaeng of the southern parts and northwestern areas markedly contributed to hosting the benefit concerts.
All these relief activities of the gisaeng were recorded in newspapers like Maeil-sinbo, Donga-ilbo, Joseon-ilbo, which were a (co)-host or sponsor of the gisaeng's benefit concerts. In the articles, gisaeng were described as “those who are contributing to the public interest” with photos of them staring straight toward the camera and standing in a resolute manner. Such images are totally different from other gisaeng photos inserted in articles mostly illustrating disgraceful incidents (e.g., suicide, runaway, enchantment, fraud, violence) that had often happened to gisaeng.
The 1934 gisaeng's relief activities reflect the desire of gisaeng to establish their image as new women (sin yeoseong) and citizen that benefit society, which is obviously expressed in the journal Janghan edited and published by gisaeng themselves. Ironically the newspaper articles documenting the relief activities still tend to have negative connotations of gisaeng. The 1934 gisaeng's social activities played a role in creating positive gisaeng images at least among the beneficiaries and newspaper officials; but not to the point where they could erase negative images that had long been associated with gisa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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