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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tzsche Younku

  • : 한국니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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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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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41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345
니체연구
41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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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니체사상의 수용 -《학지광》을 중심으로

저자 : 김정현 ( Kim Jyunghyun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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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몇몇 젊은 지식인들이 니체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1914년 4월 최승구는 최초로 니체를 언급하며 자아혁명과 개인주의를 강조하면서 생활개량과 사회개량의 문제를 다뤘다. 주종건은 조선의 멸망의 원인을 다루면서 우리가 세계문명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며, 멸망된 조선에 니체의 초인을 호명한다. 현상윤 역시 조선이 세계문명의 흐름 속에서 혁신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니체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강한 힘('강력주의')을 찾았다. 이광수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년이 새롭게 태어나야하며 청년의 영적 원기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영택은 전통과 구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덕을 건설해야 하며, 노동과 사랑과 종교가 일체가 되는 전적 생활론을 주장했다.
한국에서의 초기 니체 수용은 주로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니체사상이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전이되는 첫 발자취에는 1910년대 '다이쇼 생명주의'라는 일본의 담론이 배경으로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변용하며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조선 청년들의 고뇌와 문제의식이 함께 담겨 있다.


In Korea, some young intellectuals from colonial Joseon in the 1910s began to mention Nietzsche. In April 1914, Choi Seung-gu first mentioned Nietzsche, emphasizing the self-revolution and individualism, and dealt with the problems of improvement of life and society. Joo Jong-geon dealt with the cause of the collapse of Joseon, stressed that we must have the power to know the world civilization, and called Nietzsche's superman in the destroyed Joseon. Hyun Sang-yoon also saw that Joseon needed to be innovated in the flow of world civilization, and through Nietzsche, he found a strong power (of self-actualization) that enables individuals to exercise their abilities. Lee Kwang-soo emphasized that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s of colonial Joseon, young people must be reborn and the spiritual vitality of young people needs to be restored. Jeon Young-taek insisted on a holistic life theory in which work, love, and religion must be united, while destroying tradition and old customs and building a new morality.
Early acceptance of Nietzsche in Korea was mainly through Japan. The first traces of Nietzsche's thought transferred from Japan to colonial Korea was based on the Japanese discourse of 'Taisho Vitalism' in the 1910s, but at the same time, contained the concerns and consciousness of the youth of Joseon who tried to solve the problems of colonial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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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니시 마스타로의 니체와 톨스토이 수용과 일본 정신사적 의미

저자 : 조성환 ( Jo Sung Hwan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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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이름이 일본에 처음 알려진 것은 러시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고니시 마스타로(小西增太郞)에 의해서였다. 고니시는 1893년 12월과 1894년 1월에 니체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는 두 편의 글을 썼는데, 여기에서 'ニツシェ(닛세)'라는 일본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부터 니체는 러시아를 경유해서 톨스토이와 비교되는 형태로 일본에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니시는 이 글에서 한편으로는 니체와 톨스토이를 '도덕 개량가'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물론과 유심론의 극단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면서 양자를 조화시킨 새로운 철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고니시 이후에 니체 해석은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출신들에 의해서 '생명철학'으로 새롭게 해석되는데, 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의 '미적생활론'과 그 뒤를 이은 와쓰지 데츠로(和辻哲郎)의 『ニイチェ研究(니이체연구)』(1913)가 대표적이다. 특히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는 조규의 니체 해석을 옹호하면서 톨스토이의 비전론(非戰論)에도 공감하는 등, 니체와 톨스토이 모두를 수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고니시가 제기한 양자의 조화론이 아네사키에 의해서 다른 형태로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The name Nietzsche was first known to Japan by Konishi Mastarō, who returned from studying in Russia. Konishi wrote two articles comparing Nietzsche and Tolstoy, in 13 March 1893 and in January 1894, where the Japanese word 'ニツシュ(Nietzsche)' appears for the first time. From this, it can be seen that Nietzsche was introduced to Japan via Russia in a way compared to Tolstoy. In these essays, Konishi, on the one hand, affirms Nietzsche and Tolstoy as 'moral reformers', and on the other hand, criticizes them for being biased towards the extremes of materialism and spiritualism, raising the need for a new philosophy that harmonizes the two. After Konishi, Nietzsche is newly interpreted as a 'philosophy of life' by those who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Philosophy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The representative works are Takayama Chogyu's 'Theory of Aesthetic Life'(1901) and Watsuji Tetsuro's 『二イチェ研究』(Nietzsche Studies, 1913) that followed. In particular, Anesaki Masaharu advocated Chogyu'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and sympathized with Tolstoy's anti-war theory. In this way, he accepted both Nietzsche and Tolstoy, and it can be seen that the demand for harmony between the two proposed by Konishi was realized in a different form by Ane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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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다카야마 조규의 「미적 생활을 논하다」와 니체사상

저자 : 이와와키리벨도요미 ( Toyomi Iwawaki-riebel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0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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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가 종합잡지 『태양』의 주필로서 「미적 생활을 논하다」를 발표한 것은 메이지 34년(1901) 8월, 프리드리히 니체 서거 1년 후, 조규 사망 1년 전의 일이었다. 조규는 메이지 시대에 니체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에 짧고도 역동적인 집필과 평론활동으로 '낭만주의', '일본주의', 그리고 '개인주의·니체주의'라는 세 시기로 변천하면서, “본능의 만족이야말로 미적 생활이다”라는 「미적 생활론」으로 문단에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청일전쟁(1894-95) 후에 근대 국가체제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확립으로, 근대 자아적 개인주의가 의식화 되어가는 과도기의 일본 사회에서, 비록 학술적 니체 연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조규의 니체사상 수용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조규의 니체상은 주로 유럽 초기의 니체 연구자 테오바르트 지글러의 저서 『19세기의 정신적 사회적 사조』위에 성립하고 있다. 니체를 '위대한 시인', '문명비평가', '개인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메이지 시대의 낭만주의 사조에도 영향을 받아, 조규 특유의 개인주의적 미학, 본능론, 행복론을 구상해 간다. 이 글은 지글러의 저작을 살펴봄으로써 조규가 어떻게 니체를 「미적 생활론」 안에서 '본질적으로(intrinsic)' 받아들이고, 새로운 '초인'과 '도덕가치 전향' 사상을 가지고 자아실현을 하려고 했는지를 고찰한다.


高山樗牛(1871-1902)が総合雑誌 『太陽』の主筆として 「美的生活を論ず」を発表したのは、明治34年(1901) 8月、フリードリッヒ·ニーチェ(1844-1900)逝去の一年後、樗牛本人死去の一年前だった。樗牛は日本における最初期のニーチェ思想肯定者のひとりとして知られているが、東京帝国大学卒業後の、短くも躍然たる執筆·評論活動で、「ロマン主義」、「日本主義」、そして 「個人主義·ニーチェ主義」の三時代と変遷しながら、この 「本能の満足こそ美的生活である」という 「美的生活論」で文壇に大論争を惹き起こした。
日清戦争(1894-95)後の近代国家体制および資本主義経済体制の確立により、近代自我的個人主義が意識化されていく過渡期の日本社会で、学術的ニーチェ研究とは言えないものの、樗牛がもたらしたニーチェ思想受容への影響は大きい。
樗牛のニーチェ像は、主に、ヨーロッパ初期のニーチェ研究者テオバルト·チーグラーの 『十九世紀文明史』上に成立している。ニーチェを 「大いなる詩人」、「文明批評家」、「個人主義者」と紹介しながら、明治ロマン主義的思潮にも方向づけられて、樗牛独自の個人主義的美学、本能論、幸福論が構想されていく。チーグラーの著作を見ることによって、樗牛が如何にニーチェを 「美的生活論」内に 「イントリジック」に受容し、新しい 「超人」や 「道徳価値の転倒」の思想をもって、自己実現をしようとしたか考察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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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우키타 가즈타미(浮田和民)의 애기/애타 해석과 윤리적 제국주의론

저자 : 유지아 ( Yoo Jia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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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메이지 후기에서 다이쇼 초기의 '국민국가' 형성기에 일본에 들어온 독일사상, 그 가운데에서도 '개인주의'가 근대일본의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일본에서 '개인주의'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후반에 니체철학을 소개하면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구윤리학의 조류를 흡수하면서 '도덕의 진보'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급격히 확산되어 가는 제국주의 발흥기에 도덕은 일본 사상가들에게 중대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우키타 가즈타미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 일본의 제국주의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홉스, 독일의 니체 등이 기초는 삼는 애기와 독일의 피히테, 쇼펜하우어를 기초로 삼는 애타에 대해, 모두 극단적으로 달리는 도덕론이라고 평가하면서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 안에 도덕의 기초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키타는 제국주의가 일국의 독립을 완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계의 문명 및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주의라고 규정하면서 반드시 침략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는 제국주의가 윤리성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며, 20세기에는 '밖으로는 제국주의, 안으로는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에 유행한 다이쇼데모크러시에 나타난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의 패권을 요구하는 이중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우키타의 윤리적 제국주의가 봉건적인 침략을 부정했다하더라도 일본의 전쟁논리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 후기부터 일본사회는 서구의 도덕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 가운데 우키타는 기존의 제국주의론자들과 다른 특성을 보였지만, 일본이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면서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지성인들의 사상적인 전환과 전이가 일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이후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진정한 화를 위해 개인주의 및 개인을 국가에 복속시키고, 그 안에서 일본국민은 국가의 정책과 이념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influence of German 'individualism' accepted during the formation of Japan's 'national state' on modern Japanese intellectuals. Discussion on 'individualism' in Japan was fiercely conducted with the introduction of Nietzsche's philosophy in the late 19th century. At that time, Japan embraced Western ethics, and discussions surrounding the 'progress of morality' were actively developed. This is because in the period of imperialism that rapidly spread after Japan won the Sino-Japanese War, morality was a major task for Japanese thinkers. Among them, Kazutami Ukita was a figure who led the theory of imperialism in Japan from the late 1890s to the early 1900s. He evaluated Hobbes and Nietzsche's selfishness and Fichte's and Schopenhauer's altruism as extreme moral theories. He emphasized that the basis of morality lies in the moderate, unbiased on either side.
In addition, Ukita defined imperialism as a state that not only can achieve the independence of a country, but also seeks to participate in world civilization and politics. Thus, imperialism is defined as not necessarily having an aggression connotation. He said that imperialism could be harmonious with socialism if it emphasized ethics. And he argues that in the 20th century, nation-states should practice 'imperialism on the outside, socialism on the inside'. This perception influenced the duality of Taisho Demonstration. The duality of the Taisho Demonstration is to demand Asian hegemony from the outside while developing a people's movement claiming the rights of the people inside. Therefore, even if Ukita's ethical imperialism denied feudal aggression, it would not be possible to avoid the evaluation that it contributed to Japan's war logic.
In this way, since the late Meiji period, Japanese society has developed various discussions in the process of accepting Western moral concepts. Among them, Ukita showed different characteristics from the existing imperialists, but ideological change occurred when Japan started the war. Could this ideological shift and transfer of intellectuals be the cause of Japan's 'Nevertheless progress to war'? When the Sino-Japanese War broke out, the Japanese government published 『The Inheritance of the National Government』 to teach that individuals should be subordinated to the state for peace. As a result, the Japanese people became a means of carrying out war in accordance with the national policy and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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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양계초 사회진화론과 니체사상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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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근대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니체사상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사회진화론을 중국에 유행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전개했던 양계초의 사상에서 사회진화론에 비판적이었던 니체 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발견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양계초는 진화사상의 주체, 동력, 과정을 얘기하면서, 인간자신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고, 능동적이며 주체적 변혁을 강조했는데, 노예도덕에서 벗어나 고상한 도덕을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한 니체를 연상시킨다. 또한 양계초의 심능에 대한 강조는 외부에 대한 적응이나 자기보존 보다는 인간 내부에서 힘에 의지가 발현된다고 한 니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양계초와 니체의 사상은 표면적으로 매우 다르지만, 인류의 도덕과 가치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출발점은 같았다.


This article is to examine how Nietzsche's thoughts is connected with the social evolution theory of Liang Qichao, a prominent Chinese thinker in modern times. It is interesting to find something in common with Nietzsche's idea, which was critical in the social evolution theory of Liang Qichao, who made the social evolution theory popular in modern China and developed his political thought based on it. Liang emphasized the free will of man himself, emphasizing the subject, power, process of evolution, and active and subjective transformation, which reminiscent of Nietzsche, who argued that noble morality should be realized away from slave morality. In addition, Liang's emphasis on the function of the mind is in line with the argument that the will is expressed in power within human inside rather than adaptation to the outside or self-preservation. The ideas of Liang and Nietzsche are different on the surface, but the fundamental starting point was the same that human morality and value should be rene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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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세기 말 러시아 사상지형과 니콜라이 그롯의 니체와 톨스토이 해석

저자 : 문준일 ( Moon Joonil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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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니체의 사상이 유럽에 미친 영향의 강도와 폭은 매우 깊었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이 가장 큰 반향을 얻은 곳은 러시아였다. 니체가 세기 전환기의 러시아 문화와 문학 그리고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러시아에서 니체 사상이 유입된 시기는 1890년대 초반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러시아 사상에 대한 니체의 영향력은 점차 증대되어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논문은 러시아에서의 니체 수용, 그중에서도 초기 수용단계인 1893년에 발표된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그롯(Nikolai Grot)의 니체 해석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러시아가 니체를 수용할 당시의 사상지형이 니체의 수용과 해석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는지 고찰하였고, 이 맥락 속에서 니콜라이 그롯의 니체 해석의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많은 러시아 철학자와 문학가들의 니체 연구가 있지만, 그롯의 니체 해석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러시아에서 니체와 다른 러시아 사상가와의 비교를 진행한 첫 번째 연구라는 것이다. 그롯은 그의 논문에서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이타주의를 니체의 반기독교적 개인주의와 대비시켰다. 두 번째는 그롯의 이러한 톨스토이와의 비교를 통한 니체 해석이 이후 동북아에 니체의 사상 수용에서 전형이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의 러시아라는 독특한 정신사적, 시공간적 특성이 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토양이 되었고, 이후 일본을 거쳐 동북아로 전해진 이 담론 구조는 각 나라의 상황에 변형되어 수용되어 동북아 니체 수용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지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The intensity and breadth of the influence of Nietzsche's ideas on Europe was very deep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However, it was Russia where Nietzsche's ideas had the greatest repercussion. It is a well-known fact that Nietzsche had a tremendous influence on Russian culture, literature and thought at the Silver Age.
Nietzsche's ideas were introduced into Russia in the early 1890s. Nietzsche's influence on Russian thought that started from this time gradually increased and reached its peak in 1914 when World War I broke out. This thesis examines the acceptance of Nietzsche in Russia, especially Nikolai Grot'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published in 1893, which is the initial stage of acceptance of Nietzsche. To this end, it was first examined how the ideological topography at the time Russia accepted Nietzsche had an effect on acceptance and interpretation of Nietzsche in Russia, and in this context, the cause and result of Nikolai Grot'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were to be derived.
Although there are many studies of Nietzsche by Russian philosophers and writers, the reason for paying attention to Grot'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is as follows. The first is that it is the first study in Russia to compare Nietzsche with other Russian thinkers. Grot contrasts Tolstoy's Christian altruism with Nietzsche's anti-Christian individualism in his thesis. The second is that Grot'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through comparison with Tolstoy became a model for later acceptance of Nietzsche's ideas in Northeast Asia.
The unique spiritual and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Russia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became the basis for creating discourse of Nietzscheanism and Tolstoyanism, and this discourse structure, which was later transmitted to Northeast Asia via Japan, is transformed and accepted in each country's situation. In this way, a huge map of Nietzsche acceptance in Northeast Asia was fo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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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니체의 진정한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

저자 : 허현숙 ( Hur Hyunsook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2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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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교육의 이상과 목표는 스스로를 교육하는 인간, 즉 자기 해방이다. 당시 독일 교육풍토 혹은 교육제도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한마디로 '반시대적'(unzeitmäß)이다. 니체는 1872년 「우리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ü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에서 현행 교육제도의 문제점, 교양교육의 허구성, 참된 교양의 의미, 그리고 미래의 교육에 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니체는 1874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진정한 교육자의 모습을 어떠해야 하는지 찾고자 하였다. 니체는 자신이 학습자로서 교육자 쇼펜하우어를 만나 자기 도야의 길을 거쳐서 교육자로서 니체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니체에게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는 차라투스트라의 원형이자 전형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 영웅적 인간은 '가르침'에 의한 교육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교육목적으로 제시된다. 위버멘쉬는 현실의 대지에 발을 단단히 고정하고 무한한 힘으로 자연으로 돌아가 이 대지와 그 위에서 삶을 존재의미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삼는 인간, 니체의 위버멘쉬가 그런 인간이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쇼펜하우어에게서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교육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For Nietzsche, the ideal and goal of education is the self-education of man, that is, self-liberation. At that time, his attitude toward the German educational climate or educational system was, in a word, 'unzeitmäß'. On the Future of Our Educational Institutions in 1872 Nietzsche developed in a way that explains the problems of the current education system, the poor composition of liberal arts education, the true meaning of culture, and education for future. And Nietzsche tried to find out what kind of education should be done and what a true educator should look like In Schopenhauer as an Educator in 1874. Nietzsche confesses that he, as a learner, met the educator Schopenhauer and went through his own path to reach Nietzsche as an educator. For Nietzsche, Schopenhauer as an educator is archetype of Zarathustra. Übermensch, as Nietzsche speaks of, a heroic human being is presented as a new educational purpose that goes beyond the limits of education through 'teaching'. Übermensch is a human being who firmly fixes his feet on the real earth, returns to nature with infinite power, and takes life on this earth and on it as the source of the meaning of existence and all values. Nietzsche discovered the figure of a great philosopher and a great educator in Schopenhauer with this 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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