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한국니체학회> 니체연구

니체연구 update

Nietzsche Younku

  • : 한국니체학회
  • : 인문과학분야  >  서양철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9364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42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358
니체연구
42권0호(2022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저자 : 김정현 ( Kim Jyung Hyun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54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1950년대 한국에서 실존주의가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살피며 니체사상이 어떻게 실존사상의 궤도에서 수용되고 해석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50년대 니체수용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박종홍, 안병욱, 조승순 등의 니체 수용의 내용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60년대 초 하기락, 조가경의 니체 해석을 비롯해 니체철학을 동양사상과 비교하면서 주체적 해석을 모색하는 비교연구의 경향 등을 논의할 것이다. 50년대와 60년대 초 한국에서 실존주의와 연관해 이루어진 니체해석에는 실존적 이슈가 다루어지는 시대적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실존주의적 니체해석의 영향과 관심의 강도가 지속되면서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니체사상에 접근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meaning of the emergence of existentialism in Korea in the 1950s and discuss how Nietzsche thought was accepted and interpreted in the trajectory of existential thought. This article will first examine the contents of Nietzsche acceptance by Park Jong-hong, Ahn Byeong-wook, and Cho Seung-soon, who can be called representatives of Nietzsche acceptance in the 1950s. This thesis will further discuss the Nietzsche interpretations of Ha Gi-rak and Jo Ga-gyeong in the early 1960s, as well as the tendency of comparative studies to seek a subjective interpretation while comparing Nietzsche's philosophy with Eastern thought. The Nietzsche interpretation made in Korea in the 1950s and early 1960s in relation to existentialism had the significance of the times in which existential issues were dealt with, but at the same time, the influence and intensity of interest in the existentialist Nietzsche interpretation caused a blockage that prevented a new interpretation of Nietzsche's thought.

KCI등재

저자 : 남재민 ( Nam Jae-min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7-80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니체는 출간된 저작에서뿐만 아니라, 출간되지 않은 많은 저술들에서 칸트(Immanuel Kant)의 사유를 다양한 측면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의 칸트 수용은 칸트의 저작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주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쿠노 피셔(Kuno Fischer), 프리드리히 알버트 랑에(Friedrich Albert Lange)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제3자로부터 매개된 것이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니체의 칸트철학 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니체가 단지 쇼펜하우어를 따르지 않고 칸트 자체를 연구했더라면, …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은 칸트 한 사람뿐 이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인식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니체의 칸트 철학 수용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니체의 사유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야스퍼스를 비롯한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여전히 칸트철학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의 칸트 해석을 둘러싼 정당성에 대한 문제나, 니체의 사유에서 칸트철학의 영향력과 관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논의들은 이미 기존의 연구자들을 통해 다양하고, 폭넓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두 사상가의 사유, 특히 도덕에 대한 두 사상가의 이해의 간극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즉,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니체와 칸트의 도덕철학에 대한 세부적인 개념의 접점을 찾아 두 사상가의 사유를 화해의 장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상가의 도덕철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Nietzsche mentions Kant in various ways. However, Nietzsche's acceptance of Kant was not directly read by Kant's works, but was mainly mediated by third parties by thinkers such as Arthur Schopenhauer, Kuno Fischer, and Friedrich Albert Lange. In this context, Martin Heidegger criticizes Nietzsche's understanding of Kant's philosophy, arguing that it is distorted from Schopenhauer.
Nevertheless, what we want to focus on here is not the question of the legitimacy surrounding Nietzsche's interpretation of Kant, or of Kant's influence in Nietzsche's thinking. This is because such discussions have already been discussed variously and widely through existing researchers. Therefore, the writer intends to focus the discussion on the gap between the two thinkers' thoughts, especially those of the two thinkers about morality, which can never be reconciled. In other words, the center of the discussion here is never to seek reconciliation through the interface between Nietzsche and Kant's detailed area of moral philosophy. It is a gap between human understanding and moral interpretation, which is the basis of the moral philosophy of the two thinkers.

KCI등재

저자 : 양해림 ( Yang Hae-rim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7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니체의 불교에 대한 논의들은 『비극의 탄생』(1871)에서부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 『선안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 『이 사람을 보라』(1887), 『안티크리스트』(1895), 『유고』등 거의 모든 저작에서 유럽의 도처에 조용히 확산되어 나갔다. 불교에 대한 니체의 해석과 비판의 내용들은 국내에서도 비교적 많은 연구물들이 축적되어 왔다. 특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의 제 20, 21, 22, 23구절에서 불교를 기독교와 비교를 통해 두 종교의 기원과 본질적 성격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구명하고 있다. 니체는 많은 저서에서 불교에 대해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안티크리스트』에서는 불교의 기원과 본질적 성격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니체가 『안티크리스트』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불교의 허무주의적 데카당스의 종교관에 대한 논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Nietzsche's discussions on Buddhism range from 『The Birth of Tragedy』 (1871) to 『The Human Too Human』(1878-1880), 『Thus Said Zarathustra』(1883), 『Beyond the Lines』 (1886), 『The Genealogy of Morality』'(1887), 『Look at this Man』(1887), 『Antichrist』 (1895), 『Yugo』, and almost all of his works, spread quietly throughout Europe. The main contents of Nietzsche's interpretation and critique of Buddhism have been accumulated in Korea. In particular, in Nos. 20, 21, 22, and 23 of Der Antichrist, Nietzsche compared Buddhism with Christianity and explored its origins and essential characteristics in more detail. Although Nietzsche sporadically mentions Buddhism in much of his writings, his Antichrist discusses the origins and essential nature of Buddhism in more detail. Therefore, I would like to consider the discussion on the religious view of Buddhism's nihilistic decadence, which Nietzsche is developing around 『Antichrist』.

KCI등재

저자 : 이방연 ( Lee Bang-youn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38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우리는 니체와 괴테의 관계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중심으로 다룬다. 니체는 괴테가 자신의 핵심 개념인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요소를 예술과 결합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선이해를 지닌 괴테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자연의 모방과 관련된 예술과 상상력을 그가 오인했다는 니체의 입장에서 찾는다. 반면에 괴테의 의도는 자연을 인간의 인식 능력에서 추측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 예술의 관계에서 니체에게는 모방적 이해가, 괴테에게는 인간의 인식능력이 부각된다는 차이가 있다.


In dieser Abhandlung werden wir das Verhältnis zwischen Nietzsche und Goethe erörtern, das in der Schrift Die Geburt der Tragödie dargestellt wird. Anhand von Nietzsches Goethe-Interpretation stellen wir folgende These auf: Obwohl sich Goethe eigentlich der zwei Kunsttrieben der Natur, nämlich des Apol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bewusst ist, verbindet er diese beiden Triebe nicht mit der von Nietzsche anvisierten “Kunst”. Was ist der Grund für sein Scheitern, wenn Goethe die Verknüpfung dazwischen vernachlässigt? Meines Erachtens liegt der Grund dafür darin, dass er in Nietzsches Augen die Begriffe “Kunst” und “Phantasie” missversteht, die sich wesentlich auf die Nachahmung der Natur beziehen. Dagegen zielt Goethes Absicht darauf, die Natur primär aus dem Erkenntnisvermögen des Menschen heraus zu vermuten. In Hinsicht auf die Beziehung zwischen Natur und Kunst wird also der Vorrang des mimetischen Verstehens bei Nietzsche deutlich vom Vorrang der Fähigkeit der menschlichen Erkenntnis bei Goethe unterschieden.

KCI등재

저자 : 정낙림 ( Chung Nak Rim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77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예술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술과 삶의 관계는 미학의 어원이 그리스어 aisthesis, 즉 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예술이 일차적으로 감각과 관계한다는 점은 그리스에서 최초의 예술이 koreia, 즉 춤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춤은 인간이 대지위에 서고 걷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촉각이 주는 쾌감에서 출발하는 춤은 신체의 박자와 리듬을 통해 쾌감의 증대를 획득했고, 박자와 리듬은 소리를 통해 변형된 형태로 창조된다. 이것이 음악이다. 춤과 합창이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이 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예술이 감각에서 멀어진 것은 예술이 의식 및 초월자와 결합하면서 시작된다. 예술은 진리와 선과 분리될 수 없다. 미의 기준을 완전성(perfectio), 비례(harmonia), 명료성(claritas)에서 찾는 중세의 전통은 칸트와 헤겔의 예술철학에서도 발견된다. 헤겔은 예술을 절대정신을 감각으로 직관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정신이다. 감각에서 출발한 예술은 이렇게 전도된다. 니체는 감각의 복원을 그의 예술철학, 특히 예술생리학을 통해 보여준다. 니체에게 예술은 생리학의 일종이고,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징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준다. 힘은 예술의 출발이자 평가의 기준이 된다. 니체의 이런 생각은 들뢰즈에게 계승되고 보다 급진적 형태를 보여준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힘을 그리는 것이다. 이 힘은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들려지게 된다.


Art cannot be separated from life. The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life can also be seen from the fact that the etymology of aesthetics is derived from the Greek aisthesis, that is, the senses. That art is primarily concerned with the senses is also reflected in the fact that the first art in Greece was koreia, that is, dance. Dance begins with the act of standing and walking on the ground. Dance which starts from the pleasure of tactile sense, acquires an increase in pleasure through the beat and rhythm of the body, and the beat and rhythm are created in a transformed form through voice. This is music. The fact that dance and chorus are Dionysian art once again confirms that art originates from the senses.
Art's departure from the senses begins when art unites with consciousness and the transcendent. Art cannot be separated from truth and goodness. The medieval tradition of finding the standard of beauty in perfection, proportion, and clarity is also found in Kant and Hegel's philosophy of art. Hegel defines art as the intuition of absolute spirit as the senses. What is important to Hegel is the absolute spirit. Art that started from the senses is inverted in this way. Nietzsche shows the restoration of the senses through his art philosophy, especially physiology of art. For Nietzsche, art is a kind of physiology, and art directly reveals the manifestation of the will to power. Power is the starting point of art and the standard of evaluation. This idea of Nietzsche was inherited by Deleuze and shows a more radical form. For Deleuze, art is drawing power. This power is seen and heard by us through the senses.

KCI등재

저자 : 임연정 ( Lim Youn-jeong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9-210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니체철학의 중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 사상의 명제는 '신은 죽었다'이다. 니체의 명제는 예리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어떤 명제를 명확하게 공식화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필연적인 반대 명제를 부른다. 헤세는 그 명제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고,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사람도 신이 될 수 있다'라는 오류의 명제로 변환하여 『유리알 유희』를 구성한다. 먼저 헤세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작품 속에서 구분하고, 그 두 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헤세는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를 유비 논증적 문법으로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그 존재를 대체 한다. 그 작중의 인물이 요제프 크네히트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는 크네히트가 속한 이상세계를 카스텔리안의 세계라고 명명한다. 헤세는 모든 정신적 엘리트들의 교류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카스텔리안을 학문과 예술 혹은 종교를 화해시켜려는 목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이상세계의 인간은 유리알 유희를 통해 신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의 역설을 헤세의 언어로 다시 재해석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Hermann Hesse's Das Glasperlenspiel connotes the main idea of Nietzscheanism: God is dead. Nietzsche's proposition is incisive and obvious. However, the more clearly a proposition becomes to formulate, the more inevitable it brings about a contrary proposition. Hesse went to the heart of the proposition, and composed Das Glasperlenspiel, transforming Nietzsche's proposition, God is dead, into an erroneous proposition; man can also be God. First, Hesse distinguished the ideal world and the real world in his work and described human beings living in both worlds. Then, Hesse ontologically replaced Nietzsche's Übermensch with the Magister in Das Glasperlenspiel in accordance with parallelism. It is Joseph Knecht who is the embodied character in the novel. In Das Glasperlenspiel, Hesse denominated the ideal world that Knecht belongs to as the Castalian world. While Hesse described Castalia as the world providing the venue for exchanges among spiritual intellectuals to reconcile science, art, and religion, he also stressed that men in the ideal world eventually become closer to God's image through Das Glasperlenspiel. Therefore, this thesis aims to reinterpret Nietzsche's paradoxical proposition, God is dead, by the language of Hesse.

KCI등재

저자 : 손유나 ( Son Yu-na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3-245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인간이 겪는 실존적 고통이 지닌 의미와 고통의 본질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인간과 시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 중 하나로 “고통”에 주목한다. 고통은 나쁜 것일까? 고통은 우리 삶에서 없어져야 마땅할까? 고통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가 말해온 것처럼 우리 삶에서 고통이 악이라면, 그것은 우리 삶을 좀먹고 병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철학에서 고통을 삶과 실존의 자극제로 설명한다. 그는 더 나아가 고통을 오히려 긍정(사랑)할 것을 요청한다. 니체가 극심한 병과 고통 속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고유한 건강을 발견해냈듯이, 고통은 자기 실존에 대한 새로운 사랑 속에서 인간을 삶의 궁극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논문은 고통받는 인간이 고통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니체 철학에서 고통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자기모순적 처방을 밝혀내면서 고통의 정신적 승화로서의 사랑을 제시한다.


This paper begins with a problematic recognition of the meaning of existential suffering and the nature of suffering. Nietzsche pays attention to 'suffering'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criteria to distinguish humans and times. Is suffering bad? Should suffering be removed from our lives? Can we be happy when the suffering is gone forever? If suffering is evil in our lives, as metaphysics and Christianity say, it will corrode and make our lives sick. But Nietzsche in his philosophy describes suffering as a stimulus to life and existence. He goes further and asks us to rather affirm(love) suffering. Nietzsche did not give in easily in the face of extreme disease and suffering, but rather discovered his own unique health from the experience of suffering. In this way, suffering moves man toward the ultimate in life in a new love for his own existence. This paper is an attempt to find out how suffering humans change their love for themselves while changing their perspectives on suffering. To this end, we try to uncover misunderstandings about suffering and self-contradictory prescriptions through Nietzsche's philosophy, and present love as a spiritual sublimation of suffering.

KCI등재

저자 : 강용수 ( Yong Soo Kang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73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니체의 철학에서 질병의 의미를 현재의 상황과 연결해서 되짚어 봄으로써 행복한 죽음의 조건을 분석하고자 한다. 행복은 잘 드러나지 않다가 상실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실존이 질병으로 무너질 때 건강의 소중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평생 '자유정신'을 주장했던 철학자 니체도 병원에 누워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논자가 주목하는 것은 니체의 작품에서 다루었던 행복의 조건이 그가 쓰러진 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쓰러진 후 그가 평생 비판했던 국가, 가족, 여성, 의술 등을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10년 넘게 필요로 했던 점은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1880년 건강의 상실 이후 10년 동안 니체가 죽기 전까지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니체의 작품에서 건강과 행복의 조건으로 여겼던 것이 어떻게 반박되고 자신의 삶과 모순되는지 밝히고자 한다.


This article attempts to analyze the conditions of a happy death by revisiting the meaning of disease in Nietzsche's philosophy in connection with the present situation. Happiness is not well revealed, but its meaning is revealed through loss. The importance of health is revealed when human existence, taken for granted, is destroyed by disease. Philosopher Nietzsche, who advocated for a “free spirit” throughout his life, is inevitably in need of someone's help when he is lying in a hospital. What i pay attention to is the fact that the conditions for happiness that Nietzsche has dealt with in his works reveal several contradictions when compared with the situation after he collapsed. It can be said that it is a paradox that Nietzsche needed the country, family, women, and medicine, which he criticized throughout his life, for over 10 years regardless of his will after Nietzsche's fall.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from the loss of health in 1880 to the death of Nietzsche for ten years, and attempts to refute what Nietzsche considered as conditions for health and happiness in Nietzsche's work and to reveal how it contradicts his own life.

KCI등재

저자 : 김주휘 ( Kim Joo-whee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우리는 이 글에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삶의 지혜를 위한 잠언」에 기술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니체의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관심이 있으며, 장차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행복론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을 위한 예비적 시도로서 이 글을 위치시키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니체는 쇼펜하우어 사상과의 조우를 통해 철학에 입문하였고, 현상세계에서 개체적 의지들이 벌이는 각축과 그들이 겪는 불가피한 고통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기술은 니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니체는 개체적 의지들로서 인간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동물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쇼펜하우어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제안하는 구원의 길, 즉 인도적 체념과 의지의 부정의 길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대신에 고대 그리스인들을 범례로 하여 나름의 독자적인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 그런데 사실 쇼펜하우어는, 비록 『의지와 표상』에서 종교적 성자들의 삶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결코 그 스스로 직접 그러한 삶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성자보다는 예술가의 것에 가까운 삶을 영위했고, 이를 바탕으로 노년에 「삶의 지혜를 위한 잠언」을 썼다. 우리는 바로 이 글에서 쇼펜하우어가 행복한 삶의 경험적 지침을 발견하는 데에 다름 아닌 그리스인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와 달리 독자적인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 의지하는 바로 그 그리스인들 말이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잠언」에서 제시하는 행복의 사유가 어떤 요소들을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상당 부분 -변형을 거치면서- 니체에게로 전승된다. 우리는 이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하는데, 하나는 「잠언」에서 쇼펜하우어가 의존하는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들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In this article we showed that Schopenhauer depends heavily on the Greek philosophers, Epicurus and Aristotle, in his search for the empirical way to happiness, which is considered to be impossible in principle, given his metaphysical system of will and representation. Schopenhauer's formula of happiness is, to be brief, to follow Epicurus' teaching of restraining one's unnecessary and unnatural desires in everyday lives and to follow Aristotle's thoughts on the special pleasure accompanying self-realizing activities, which transcends and cuts off the vicious circle of want and boredom. When Schopenhauer has recourse to Epicurus' principle of negative hedonism, and when he gives notice to the pleasure accompanying mental activities, he turns back on the modern pursuit of happiness and desire. Schopenhauer shows very well the predicament modern understanding of happiness leads to, and his revival of the ancient wisdom implicates criticism of the materialistic ethics and positive hedonism of the day. Despite the complex relationship of Nietzsche and Schopenhauer, it is certain that Nietzsche is the pupil of Schopenhauer in this criticism of the modern way of life. With Schopenhauer, Nietzsche stands firmly against the levelling tendency and insists on the hierarchy of the soul. Furthermore, we think, Nietzsche himself has recourse to Epicurus and Aristotle in his composing of the Dionysian happiness.

KCI등재

저자 : 양대종 ( Yang Dae-jong )

발행기관 : 한국니체학회 간행물 : 니체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1-346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니체가 파시즘의 역사적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와 독일 우파 정당 등의 형태로 다시 돌아와 현대의 정치 상황과 연관 지어질 수 있다는 의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니체적 의미의 자유 정신의 추구가 사실은 부자유의 은폐된 옹호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 여전히 니체 사상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니체를 정치적 주제들과 연결하려는 최근의 다양한 학문적 시도들 역시 이러한 의심의 연장선에 있거나 아니면 이 의심을 불식시키려는 시도들로 이해할 수 있다. “명백하게 현재적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고는 니체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라는 호르크하이머의 말처럼 니체에게서 정치적 도구를 발견하려는 유혹은 여전히 크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니체의 언명들을 어떤 의도로든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리하지 않고 살피면 니체를 인종주의에 기반한 반유대주의자나 파시즘의 원형으로 보는 해석들은 정합성을 가지고 지지되기 어려워 보인다. 본고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니체 저서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는 유대인과 관련된 니체의 언명들의 맥락을 자세히 살피고 분석하여 밝히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Der alte Verdacht, dass es sich bei Nietzsche nicht nur um den Vordenker des historischen Faschismus handle, sondern er auch mit der politischen Situation der Moderne in Verbindung zu bringen sei, schwebt immer noch über die Philosophie von Nietzsche. Seine Freigeistigkeit läuft die Gefahr, als ein verstecktes Plädoyer für die Unfreiheit angesehen zu werden. Die vielen wissenschaftlichen Untersuchungen über das Verhältnis von Nietzsche und Politik stehen entweder im demselben Zusammenhang dieses Verdachtes, oder sie stellen eben den Versuch dar, Nietzsches Philosophie von dem Verdacht zu befreien. Wie der Satz von Horkheimer: “Man kann von Nietzsche nicht sprechen, ohne ihn eindeutig zur Aktualität in Beziehung zu bringen.” andeutet, ist die Versuchung immer noch sehr gross, Nietzsche's Philosophie politisch zu instrumentieren.
Betrachtet man jedoch Nietzsches Äußerungen über die Juden, ohne sie absichtlich aus dem Gesamtkontext herauszulösen, scheinen Interpretationen, die Nietzsche als Archetypus des Antisemitismus oder des auf Rassismus basierenden Faschismus sehen, nur schwer schlüssig zu vertreten. Die vorliegende Arbeit wurde mit dem Ziel entworfen, den Kontext von Nietzsches Aussagen über Juden, die sporadisch in Nietzsches Schriften zu finden sind, im Detail zu untersuchen und zu analysieren, um die Grundlage für diese Behauptung aufzudecken.

12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