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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Mun Hak 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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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9)~47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653
한문학보
47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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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저자 : 진재교 ( Jin Jae-kyo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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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조 후기에 새롭게 문예의 주요한 담당 층으로 등장한 서얼과 중인〔京衙前과 技術職 中人〕을 함께 묶어 새롭게 보자는 취지로 작성하였다. 기존 논의는 서얼 문학과 여항문학을 나누어 논의함으로써 당대 조선조 후기 사회에서 사대부와 상대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의 사회적 위상과 문학적 지향을 함께 주목하지 못하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얼과 중인의 사회적 처지는 물론 그들이 생성한 문학적 성격은 사대부와 다르지만 이루어 놓은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서얼과 중인을 중간계층으로 묶고, 이들의 국내의 문예적 성취와 활동은 물론, 국외에서 문예와 관련한 활동과 성과를 확대해 고찰하였다.
그간 사대부를 중심에 두고 閭巷文學을 비교해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국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았다. 庶孽文學 역시 조선조 후기 사회에서 지나치게 국내적 시각에 사로잡혀 고립적 형태로 바라보는 문제도 있었다. 사실 일부 서얼은 중인과 같은 처지로 존재하고, 사회적 대우와 위상은 중인과 같았다. 그런 점에서 서얼과 중인을 하나로 묶어 중간계층으로 파악하여 그들의 문예적 성취를 일국 안팎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조선조 후기에 부상한 그들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방법의 하나다.


This thesis describes with the aim of developing a new perspective by tying 'Seol (庶孼)' and 'jungin(中人)', who emerged as the main class of litera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Specifically, the middle class was grouped into 'earthly elders(庶孼)' and 'jungin(中人),' and their literary achievements and activities were expanded to overseas as well as domestically, and the thesis was developed.
This is because there has been a problem that evaluating 'Yeohang Literature' from a domestic point of view is too nationalistic. In the late Joseon Dynasty, 'Seo-Eol(庶孼)' was in the same position as middle-class people, and their social treatment and status were not different from those of middle-class people. In this respect, 'Seo-Eol (庶孼)' and middle-in-class(中人) were combined into one and identified as the middle class, and their rising statu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objectively looked at. This is because their literary achievements achieved while participating in 'Sahaeng(使行)' can be evaluated histor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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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용태 ( Kim Yongtai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6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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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문학 비평사에서 文과 道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중요한 주제였다. 文以載道의 개념 파악, 載道論과 貫道論의 논쟁, 道文分離論의 제기 등 주요한 연구 과제를 통과하며 이제는 상당한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와 함께 문제점도 있었다. 도와 문의 '합일'과 '분리'를 종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연구자의 성향에 따라 어느 한쪽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도문합일'은 중세적 사유이고 '도문분리'는 근대적 사유라는 도식적 이해도 생겨났다. 이로 인해 자료 해석에 무리가 따르기도 하였다.
중세의 문이재도론이 문과 도의 즉자적 연결을 전제하거나, 도의 자리에 배타적으로 정주학만을 위치시킨 것은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문과 도의 긴장감 있는 상호 작용을 통해 문과 도의 깊이와 넓이를 함께 확장해 나간다는 의미에서의 '문과 도의 적절한 관계'는 현대문학에서도 버려서는 안 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도와 문의 즉자적 연결을 넘어 도와 문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모색을 추구하는 흐름이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문학을 정치 등 보편적 가치와 창조적으로 연결하려는 문학 현장의 움직임이 있다.
그러므로 한문학계도 이제는 '문도론'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문도합일과 도문분리를 통합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역사상의 몇몇 사례를 보았을 때, 문과 도의 분리가 극심하던 때에 문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한문학은 문과 도의 극심한 분리 상태에서 종말을 맞았지만, 그 속에서도 문과 도의 새로운 연결을 고민했던 소중한 흐름이 있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The relation between Mun文 and Do道 had been major research topic i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criticism. Numerous studies have been conducted on important subjects such as 'understanding concept of Mun-i-jae-do文以載道', 'debate between Jaedo-lon載道論 and Gwando-lon貫道論', or 'proposal of Domunbunli-lon道文分離論', and considerable amount of research are accumulated.
Along with these results, few problem still exists. There were tendency of emphasizing either 'unity合一' or 'division分離' of do and mun based on personal opinion of research conductor. Some opinions came up with schematic structure that 'Unity of Do and Mun道文合一' comes from medieval thoughts and 'Division of Do and Mun道文分離' is modern concept. In result, some interpretations suggest inapposite explanation.
It is possible to point out few problems of 'Mun-i-jae-do-lon' as it put direct connection between mun and do as precondition or placing Cheng-Zhu Studies程朱學 in exclusive throne of do. However, maintaining balance between mun and do can be said as a major task of contemporary literature also. In fact even in late Choson appeared a certain trend to find newer relationship rather than direct connection between do and mun, and in these days some movements in literature field try to find relatively creative connection of literature with universal values such as politics.
Therefore we need to adopt the term 'Mundo-lon 文道論' and approach to 'Unity of Mun and Do' and 'Division of Do and Mun' with integrative thoughts. Based on examples in history, literature could not carry out its role when mun and do were severely divided.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of late Choson has met its end among severe division of mun and do, but there were surely and even precious attempts to find new connection of mun and do. This part should be focused and followed with more intense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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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하라 ( Kim Hara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7-10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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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晩柱는 1775년 1월 22일부터 1787년 8월 2일에 걸쳐 『西廂記』와 관련된 언급을 『欽英』에 남겼다. 그는 일기를 쓴 13년 내내 이 희곡의 독자로 살았던 셈이다.
처음 그는 『서상기』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金聖嘆의 評批라든가 소설 『水滸後傳』의 서문에서 이 책의 가치를 언급한 내용을 조사했다. 이처럼 독서에 앞선 정보 수집의 과정은 『서상기』에 대한 그의 기대를 키웠고, 유만주는 『三國志演義』와 『水滸傳』, 『金甁梅』에 『서상기』를 더해 자신만의 필독서인 '四大奇書'의 목록을 만들었다.
『서상기』에 대해 언급한 지 3년째 되던 1778년 윤6월 3일, 유만주는 비로소 이 책을 입수했다. 1갑 8책이라는 서지사항으로 보아, 그가 읽은 것은 당시 조선에 가장 널리 유통되던 판본인 김성탄 평비본 『第6才子書 西廂記』로 판단된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781년 9월 17일의 시점에 『서상기『의 구절을 암송하여 인용한 것을 보건대 유만주의 독서는 상당히 밀도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妙法蓮華經』과 『서상기』의 비교독서를 통해 불경과 稗書(=소설)가 서사문학으로서 양식상 공통점을 갖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소설이 불경에서 기원한다는 이론화의 근거가 되었다. 그가 보기에 산문과 운문이 교차되거나, 章回體를 취하는 것과 같은 소설의 형식이 불경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여겨졌다.
이렇게 애초에는 『서상기』를 소설과 구분하지 않고 明淸의 서사문학 일반에 포함시켜 이해했으나, 점차 그는 이 작품이 희곡이라는 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조선의 희곡에 해당하는 산대희와 『서상기』를 포함한 중국 희곡을 비교하는 작업도 수행했다.
한편 유만주는 李卓吾 평비본 『서상기』 및 『會眞六幻』에 수록된 董解元, 王實甫 등의 작품 등 다양한 『서상기』의 판본도 접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애호하며 깊이 있게 읽고 영향을 받은 것은 단연 김성탄 평비본 『제6재자서 서상기』였다. 그는 『서상기』 正文의 서사와 문장은 물론, 이에 대한 김성탄의 비평과, 비평을 빙자한 김성탄의 문장론과 문예산문 자체에 매료된 독자였다.


From January 22, 1775 to August 2, 1787, Yu Man-ju left comments related to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in Heumyeong. He lived as a reader of this play for the entire 13 years he wrote the diary.
At first, without reading the play, he researched Jin Shengtan's critical writings and the content that mentioned the value of this book in the preface of the novel Sequel to Water Margin. Like this, the process of collecting information prior to reading raised his expectations for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and Yu Man-ju added this play to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ter Margin, and The Plum in the Golden Vase to make a list of his must-read 'Four Major Novels of Wonder'.
On June(intercalary month) 3, 1778, the third year of mentioning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Yu Man-ju finally obtained this book. Judging from the bibliography of the eight volumes, what he read was the critique of Jin Shengtan, the most widely circulated version in Joseon at the time. Three years later, on September 17, 1781, as can be seen from his reciting and quoting verses from the book, Yu Man-ju's reading was quite profound.
In addition, he discovered that Buddhist scriptures and novels have a common style as narrative literature through comparative readings of Lotus Sutra and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This discovery became the basis for the literary-historical theory of Yu Man-ju's that novels originated in the Buddhist scriptures. In his view, the form of the novel, such as the intersecting of prose and verse, and the taking of the chapter-titled form, was regarded as the result of the influence of the Buddhist scriptures. At first, he understood the play,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as being included in Chinese narrative literature in general, without distinguishing it from novels. However, he gradually became clear that this work was a play, and he also performed comparisons between Joseon plays and Chinese plays.
On the other hand, Yu Man-ju encountered various versions of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including the critical version of Li Zhi's, as well as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of Dǒng Jiěyuán, Wáng Shífǔ, which were included in The Collection of Six Classical Imaginary Romance of the Western Chamber. However, it was by far the edition criticized by Jin Shengtan that he loved and read deeply and was influenced by. He was a reader fascinated by the main text of the drama, as well as Jin Shengtan's critique of it, as well as his literary theory and literary prose itself under the guise of cri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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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혜리 ( Son Hye-ri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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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후반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동한 成大中·成海應·朴宗善·李箕元을 중심으로 서얼이라는 신분적 처지가 끼친 사회 경제적 영향을 살펴보고 문학적 성향이 다기한 사실을 규명하였다.
성대중은 조선 후기 서얼 출신 중 가장 높은 품계를 제수받은 인물로 40여 년 동안 벼슬하면서 정치, 사회, 제도상 모순과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기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여 경세가의 길을 걸었다. 성해응은 검서관으로 재임하면서 각종 국고 문헌을 교수, 편찬하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학적 역량을 제고하였다. 그 결과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관심은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기록하는 데 집중되었으니, 이는 사의식의 소산이다. 이기원은 가난 때문에 과거를 포기한 뒤 40대가 되어서 출사하고 최종 관직은 종6품 찰방이었다. 서얼 출신의 한미한 문사가 걸어갈 수 있는 전형을 보여준 셈이다. 따라서 그의 시문은 고단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한탄과 애상이 주된 정조를 이룬다. 박종선은 영조의 부마인 朴明源의 서자이다. 신분적 제약 때문에 뜻을 펼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정치적 굴곡이 적고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처지가 난삽한 전고와 특이한 시어, 새로운 어휘를 구사하는 데 치력하여 시문의 험벽함을 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이들 네 사람은 서얼 출신이긴 하되 각자 사회 경제적 처지가 다르고, 문학세계 또한 다기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조선 후기 한문 작가층과 서얼 문학의 장을 확대하고 나아가 일면에 치중된 서얼 문학의 구도를 재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paper focused on Sung Dae-jung, Seong Hae-eung, Park Jong-sun, and Lee Ki-won, who participated in Kyujanggak and were active during late 18th century, examining the socio-economic impact of their social status(Seo-ul 庶孼) and diversity of their literary tendencies.
Sung Dae-jung, who was ordained the highest rank among the late Joseon seo-uls, participated in the Court for about 40 years and passionately recorded political, social, and institutional irregularities and sought solutions with attempts to be a great governor. While serving as Geomseogwan, Seong Hae-eung improved his capabilities by editing and revising national publications or interacting with the best intellectuals of the time. As a result he left a vast amount of writings. His focus was to leave records of the unnoticed among the world, which also comes from his identity as social leader. Lee Ki-won gave up his National Exam due to poverty and was not able to participate in administration until he was around 40s, and the final position was a sixth-class officer. In other words, his path represents what wealthless Seo-ul literati would end up with. Therefore, his poems are mainly composed of lamentation and sorrow from a weary life. Park Jong-sun is seoja(庶子) of Park Myeong-won, son-in-law of King Yeongjo. He did not have a chance to express his thoughts due to social restrictions, but thanks to less ups and downs of his wealthy household he did not suffer much. It is known that his such situation made his poetry tough and have ruggedness by using difficult transcripts, unusual phrases and original expressions.
In short, these four people are seo-ul, but each has a different socio-economic situation and the literary world is also diverse. Through the examination in this paper, it will be helpful to broaden the field of Sino-Korean literature authors and seo-ul litera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furthermore reorganize the composition of rather one-sided Seo-ul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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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유승 ( Jang Yoo-seung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7-17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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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은 저자가 평생에 걸쳐 창작한 저술의 집합이며, 여기에 저자 사후에 제작되는 묘도문자 및 추숭과 현양을 위해 생산된 기록이 추가된다. 상당수의 문집은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기록의 집합이며, 기록이 누적되는 과정에서 후인의 창작과 과장이 개입하기 쉽다. 본고는 이를 '누적성'이라 명명한다.
본고는 박대덕의 묘도문자를 창작시기순으로 배열하여 생애 서술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 『합강집』 수록 시문을 타 문헌과 교차 검증하여 그 신빙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상당 부분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는 비단 『합강집』에 국한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 논문은 문헌이 전승, 누적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가능성을 도외시한 채 문집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연구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추가, 변형된 내용이 어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는 것을 향후 문집 연구의 과제로 제안한다.


The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is a collection of writings created by the author throughout his life and contains records of additional biography made after the author's death. The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is a collection of records accumulated over hundreds of years, and it is easy for later creation and exaggeration to intervene in the process of accumulating records. This paper names this process as cumulativity.
This thesis aims to check the changes in the contents by arranging records of Hapgangjip, the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by Park Daedeok, in chronological order and to examine their authenticity through cross-examination with other literature. It was confirmed that a considerable portion Hapgangjip was likely added to later generations. This result will not be confined to Hapgangjip.
This thesis warns against the study of accepting the contents of the literature without regard to the cumulativity of the literature. This thesis presented as a research topic to examine the intentions and implications of additional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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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안대회 ( Ahn Daehoe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7-20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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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7세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설총의 사상과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설총은 문묘에 처음으로 배향된 유학의 종장이자 <화왕계>를 지은 유가적 문인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현존하는 금석문과 역사 문헌을 근거로 기왕의 평가를 재검토하여 설총은 유학을 포함하여 불교와 도교를 융합하려 하였고, 변려문을 창작한 문인이었음을 밝혔다.
설총이 지은 <甘山寺阿彌陀像造像記>의 문장과 현존하는 원효의 문장을 분석하여 원효와 설총이 변려문 문체를 구사하였고, 내용상으로는 유가와 불교와 도교의 三敎를 융합한 사유를 펼쳤음을 확인하였다. 설총이 지은 작품으로 추정한 5언시 1편에서는 불교적 사유를 확인하였다.
고려 초기에 설총은 홍유후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또 <화왕계> 1편만이 설총의 저작으로 전해져 설총은 유학의 종장이란 인식이 굳어졌다. 조선시대 이후 현재까지 설총을 보는 시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불교나 도교의 관점에서 보거나 변려문 문장가로 이해한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최근 들어 <화왕계>의 작자가 설총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변려문 문체의 관점에서 설총의 작품으로 재확인하였다. 경서의 교육을 담당하고 한림으로서 국가를 위한 문장을 짓는 위치에 있었던 설총에게 유학자의 정체성은 당연하다. <화왕계>는 한림의 위치에서 국왕의 처신을 경계한 구술을 나중에 정리한 문장으로 이해하였다. 논의의 결과 설총은 신라 당시의 주류 문체였던 변려문을 잘 구사한 문인이자 유교와 불교, 도교를 두루 받아들인 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This paper aimed to gain new understanding of the ideology and literature of Seol Chong, a scholar and writer of the 7th century. The general consensus is that Seol Chong is a Confucian writer who was first enshrined in Munmyo, and the author of Hwawanggye, which literally means “Admonition to the King of Flowers.” Based on existing epigraphs and historical documents, Seol Chong was found to have attempted to integrate the three teachings, namely,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nd identified as a writer of pianliwen (four- and six-character rhymed clauses).
The differences in pianliwen writing styles were analyzed based on Seol Chong's sentences in the inscriptions on Amitabha of Gamsansa Temple and Won Hyo's sentences. Their ideologies were found to be a combination of the three teachings: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One five-character poem presumed to have been written by Seol Chong was consistent with Buddhist ideology.
In the early Goryeo dynasty, Seol Chong was given the pen name Hong Yuhu and enshrined in Munmyo. His status as a leading Confucian writer grew widespread when it became known that he wrote only Part 1 of Hwawanggye. The general view of Seol Chon has remained largely the same since the Joseon dynasty, and there have been no attempts to study him from a Buddhist or Taoist perspective, or to understand him as a pianliwen writer.
In response to recent claims that Seol Chong may not have authored Hwawanggye, this study reviewed his works in relation to the pianliwen style. He held the title of Hallim, which involved creating sentences for the nation and upholding Confucian values. Hwawanggye is comprised of oral admonitions delivered to the king by an official holding the Hallim title. The discussions confirmed that Seol Chong clearly practiced the pianliwen style that was mainstream in the days of Silla, and that he was a scholar who embraced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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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방현아 ( Bang Hyun-a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5-24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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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19세기 尙州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詩社의 전통과 그 史的 전개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특히 1828년 悅雲社의 結社와 1832년 船遊詩會까지의 계승에 주목하여 菊圃, 慕軒, 息山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남인문단의 시맥이 19세기말까지 이어졌음을 밝히는 것이 주목적이다.
1784년에 결성된 秋水社는 菊圃 姜樸, 慕軒 姜必愼, 息山 李萬敷 가계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사이다. 이 시사는 이전 17세기 洛江詩會의 전통을 이어받고, 皓隣 姜世白, 林下 李敬儒가 주축이 되어 始創하였으며, 1804년에 竹雨社로 개명된 뒤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竹雨社는 竹雨原社와 竹雨續社로 활동하였고 1816년 竹雨續社 12명의 문우들은 『竹雨社詩集』에 일백여수의 시를 남겼다. 「竹雨詩社序」를 쓴 李升培는 이들의 시의 특징으로 '淸平豐融', '遒麗淸絶'을 들고, 우리나라 詩契의 융성함이 바로 이 시사에서 나왔으며 중국 사람들이 평가해도 東音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竹雨社는 강세백과 이경유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강세백의 동생인 姜世綸과 강세백의 아들 姜長欽이 함께 悅雲社를 재결성하여 8명을 시작으로 그 전통을 이어갔다. 1823년 낙강시회의 船遊者들과 시회 참석자들은 모두 이들의 자제이거나 친족으로 그날의 시회는 「洛遊帖」으로 남았다. 열운사의 전배이자 낙강시회의 次韻者로 전통을 이어준 이들은 芝園 姜世綸, 過庵 姜世誾, 半醒 姜長欽, 渾齋 姜哲欽 雪堂 李正煥 등이다.
본고는 17세기 상주와 낙동강을 중심으로 개최된 낙강범월회의 오랜 전통이 국포가와 모헌가 식산가를 중심으로 18세기에 추수사와 죽우사의 시맥을 이어 19세기 중반 열운사까지 계승되는 사적 전개과정을 고구하였다. 이들의 문단형성은 관방문학의 중요성 못지않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상주지역의 이들 시사는 18~19세기 지방 사림의 문단형성과 활동이 세대를 거쳐 가며 체계적으로 이어진 예로 菊圃詩脈을 조선 말기까지 내린 대표시사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tradition of Sisa formed around the literati of the Sangju area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In particular, it is the main purpose to reveal that the Namin literary circle, which inherited the literary traditions of Gukpo, Moheon, and Siksan, continued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paying attention to the succession of the society of Yeolunsa in 1828 and Seonyusihoe in 1832.
Chususa, formed in 1794, is a current poetry centered on the descendants of Gukpo Gangbak, Moheon Kang Pilsin, Siksan Lee Manbu family. This poetry inherited the tradition of the Nakgang Poetry Society of the 17th century, and was sung by Horin Kang Se-baek and Imha Lee Gyeong-yu. In 1816, the 11 poat group of Jukwoo Soksa left over 100 poems in 『Jug-usa Poems Collection』. Lee Seung-bae, who wrote 「jug-usasiseo」 'Cheongpyeong Pungyung(淸平豐融) and 'Junryeocheongjeol(遒麗淸絶) as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poems, and mentioned that the prosperity of Korean watches came from this current situation, and that even if China evaluates them, they are by no means small. After Kang Se-baek and Lee Gyeong-yu passed away, Kang Se-baek's younger brother Kang Se-ryun and Kang Se-baek's son Jang-heum Kang re-established Yeolunsa and continued the tradition starting with eight members. In 1823, people on boat and society participants of the Nakgang Poetry Meeting were all their children or relatives, and the poetry meeting of that day remained 『Nakyucheop』. Those who passed on the tradition as the predecessors of Yeolunsa and the coaches of the Nakgang Poetry Society were Jiwon Kang Se-ryun, Gwaam Kang Se-eun, Banseong Kang Jang-heum, Honjae Cheol-heum Kang, and Seoldang Lee Jeong-hwan.
This paper examines the historical development process in which the tradition of Nakgang Beomwolhoe(洛江泛月會) held in Sangju and Nakdong River in the 17th century was passed down to Yeolunsa in the mid-19th century, following the lineage of Chususa and jug-usa in the 18th century centered on Gukpoga(菊圃家) and Moheonga(慕軒家) and Siksanga(息山家).
The formation of their literary circles occupies a position no less important than that of government literature. These Sisa in the Sangju area are examples of the systematic succession of the literary circles and activities of local Sarim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rough generations, and the Gukpo poetry line that were passed down to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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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강석 ( Lee Kang-seok )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7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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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충절을 증언한 남효온의 「六臣傳」은, 사육신의 복권을 통해 그들의 충절이 사회적으로 공인되기 이전까지 불온의 비전으로 취급되었다. 「육신전」이라는 텍스트 자체는 물론, 그 주인공들에 대한 언급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상황은 「元生夢遊錄」과 같은 텍스트의 탄생을 추동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비분함과 충절을 그려내는 데에 주력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육신전」이 그려낸 사육신의 형상은 역사적 진실로 자리매김하여 지금까지도 굳건히 각인되어 있다.
『東野彙輯』에 실린 「六臣立節仗危忠」은 「육신전」을 모본으로 하지만, 찬자의 편찬의식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동반하고 있다. 사육신의 형상에서 비분함을 지워내고, 「육신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단종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이러한 차이는 기존의 서사를 해체하여 재조직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해 편폭을 확대하는 서사적 변화에 기인한 것임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가 갖는 모본과의 차이는, 세조의 불의에 대한 항거가 곧 단종에 대한 충절이라 오랫동안 각인되었던 '忠節'의 딜레마를 해결함과 동시에 사육신의 충절이 향하는 방향을 명확히 가리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육신이라는 같은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은 달랐지만, 이 역시도 사육신을 그 옛날 백이와 숙제, 엄광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으며 천명했던, '죽음을 아껴 大賢의 이름을 인멸시킬 수 없다'는 공언은 이렇듯 「육신입절장위충」에서도 여전히 구현되고 있었다.


「Yuksinjeon(六臣傳)」 which testified to Sayuksin(死六臣)'s fidelity, was treated as a disturbing secret story before Sayuksin was restored. The situation in which not only the text of 「Yuksinjeon」 itself but also the main character Sayuksin could not be free to mention caused the birth of 「Wonsaengmongyurok(元生夢遊錄)」. It also focused on portraying Sayuksin's indignation and fidelity. For this reason, Sayuksin's figure revealed in the 「Yuksinjeon」 has become a historical truth and still firmly imprinted.
「Yuksinipjeoljangweichung」 in 『Dongyahwijip』 is based on 「Yuksinjeon」, but there is a certain difference. It was the point that erased the indignation and highlighted the image of the fidelity. This is because Sayuksin's image removes resentment and features King Danjong(端宗), who did not appear in the 「Yuksinjeon」. This difference does not seem to have received much attention even though it is due to narrative changes that dismantle and reorganize the existing narrative and expand the width by adding new stories.
The difference between this story and the original was that protesting against King Sejo's injustice was fidelity to King Danjong, which solved long imprinted dilemma of 'Fidelity', and at the same time clearly pointed to Sayuksin's fidelity. Although the method of portraying the same object as Sakyuksin was different, but this also putting Sayuksin in the same class as Bo-yi(伯夷) and Shu-qi(叔齊), Yán Guāng(嚴光). Nam Hyo-on's vow, which he declared by making an 「Yuksinjeon」, "It cannot destroy the name of the loyalist to avoid death,” was still being implemented in 「Yuksinipjeoljangweichung」.

KCI등재

저자 : 시미즈노리오

발행기관 : 우리한문학회 간행물 : 한문학보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7-30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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