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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dy of Korean History of Thought

  • : 한국사상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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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6-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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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70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728
한국사상사학
70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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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송기식 『유교유신론』의 집필 계기와 '유교청년' 기획

저자 : 이현정 ( Lee¸ H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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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유교 담론 중에서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송기식의 『유교유신론』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유리된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유신론』에서 제시하는 '유교 현대화론'은 저자를 비롯한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이자, 1920년대 신문 매체의 담론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였다.
송기식은 자신이 지닌 유교 지식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다수의 서간문을 주고받았다. 선배그룹으로부터의 영향은 물론이고, 특히 동료/후배그룹과는 서간문을 통해 후진 양성에 방점을 둔 교육 사업을 중시하고 있음을 논했다. 이러한 후진 양성에 대한 관심은 종국에 『유교유신론』 집필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집필 내용은 다시 동료에게 요약 전달되면서 주변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유교 지식인 내부의 논의와 더불어, 『유교유신론』은 집필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 신문 매체의 유교 비판 논쟁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 후 현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후속 세대 양성에 관심을 갖고 청년들의 비판과 세대론에 주목하였다.


Song Ki-sik's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1921), considered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among the modern Confucian discourses in Korea, did not appear apart from the context of the time.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 presented in 'Confucian Modernization Theory' was a discourse within the author and other Confucian intellectuals, and a result of being deeply conscious of the discourse of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Song Ki-sik exchanged a number of letters using his network of Confucian intellectuals. In addition to the influence from senior groups, he discussed in a letter with colleagues and junior groups that he emphasized educational projects focusing o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This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ventually served as an opportunity to write Confucian Theology. As the contents of the writing were summarized again to colleagues, it became a discourse within the surrounding Confucian intellectuals.
Along with the discussions within Confucian intellectuals,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reflects the context of the period at the time of writing. The text recognized the controversy over Confucian criticism presented by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critically reviewed the contents, and suggested a modernization plan. In particular, it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and generational theory of young people with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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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지식인의 서양 번역서 독해방식: 전병훈,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소진형 ( Soh¸ Jean-h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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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의 분석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은 조선 지식인의 서양서적 독해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한 글로 평가되어 왔지만, 실제 이 텍스트의 서양사상 부분을 검토해보면 그가 서양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기존 번역서 중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발췌하고 모아서 구성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특히 『정신철학통편』의 2권 14장, 15장을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출판되었던 번역서 및 개론서와 비교해보면, 전병훈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서양사상을 수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발견된다. 전병훈이 인용한 책들은 『법의(法意)』, 『철학요령(哲學要領)』, 『철학강요(哲學綱要)』, 『심리학개론(心理學槪論)』 등으로, 그 번역자들은 엄복, 채원배, 왕국유였다. 이들은 서양 철학 개념에 대한 번역어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태극(太極), 리(理), 성(性)과 같은 동양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번역에 반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어의 선택은 전통적인 언어로 책을 독해하는 전병훈과 같은 사람들의 자의적 독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전병훈의 서양철학서의 독해방식을 검토하고 근대 초기교육의 체계 없이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양 사상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This article aims to scrutinize how Korean intellectuals who did not acquire a Western-style education read translated Western texts through an examination of Jeon Byeonghun's Jeongsin cheolhak tongpyeon. His book has been praised for integrating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however, when we compare it to the translations he read, we can see that he wrote his book by taking bits and pieces from the translations he read and weaving them together. He had mostly read Western books translated by Yan Fu, Cai Yuanpei, and Wang Guowei, in which the translators intentionally and unintentionally borrowed the core terms of Eastern philosophy to use for the translation of Western philosophical terms. The translators' practice contributed to Jeon's liberal reading of Western philosophy and his own way of interpretation; due to the terminology, he came to believe that Western philosophy was concerned with li, xing, xin, and taiji and that he was free to read the works. Jeon's instance is significant because it demonstrates how intellectuals who did not receive a contemporary education would place Western literature in Eastern intellectual contexts and read them through an Eastern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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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저자 : 이정민 ( Lee¸ Jung-m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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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편찬된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의 여성교육서 『소녀필지(少女必知)』를 통해, 식민지시기 유교 관습의 척결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지식인이 집필한 여성교육서의 특징과 여성 인식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신구 문명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족의 붕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현실로 야기된 여성 빈곤의 현실을 분석하고, '신구 문명의 공존' 및 '노동을 통한 가난의 극복'이라는 두 화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 기존의 여성교육서와는 매우 다르다. 성현의 언행 대신 본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술하였고,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녀(聖女)' 대신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의 사례를 수록하였다. '가문의 번성을 위한 여성 교육'을 중시한 종래의 여성교육서와 달리 여성 교육을 '여성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남녀유별 의식보다 부부간의 애정과 위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도 이 책의 근대적 특징이다.
저자는 구여성과 신청년 간의 갈등으로 인한 이혼과 별거의 증가, 구여성 시모와 신여성 며느리 간의 갈등 등 신구 문명의 충돌에 주목하였다. 이에 구여성에게는 구습의 탈피와 신지식 습득을 강조하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혼당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반면 신여성에게는 서구 문명과 가난한 조선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구생활의 노동과 살림을 배워 현실에 안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둘 다 여성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조언이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또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식민지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이에 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가난을 합리화하지 말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가족의 붕괴를 막고 가난을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의 멸망을 막는 것이 식민지하에서 종족을 보전하는 궁극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Female Education text called So'nyeo Pilji (少女必知, What Every Girl Should Know), authored in the 1920s by a Korean modern intellectual named Jo In-seok(趙寅錫, 1879-1950).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Jo In-seok called for the abolition of old Confucian practices, and strongly supported the idea of cultural enlightenment. This text effectively reveals Jo's perception of females, as well as certain 'tasks' which he thought women should take on in the future. In his eyes, the two biggest problems that were threatening the very survival of the Korean females were collapse of families and poverty, which were brought on by clashes between old and new ways and not to mention the advent of modern capitalism to a colonized land, so his suggestions were all based on that very observation.
This book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other female educative texts of the time, which had mostly dealt with traditional values. Words from 'Past sages,' the usual component of traditional texts, were replaced by stories and episodes from the author's past experience and even imagination. Instead of promoting females who could only be called as Women saints(聖女) symbolizing Confucian values, Jo's book is filled with stories of females stuck in tough economic situations. Unlike past female educative texts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female education onlhy in terms of 'Building prosperous families,' Jo claimed that female education was imperative because it was vital to the women's survival. He also discussed the importance of 'love(affection)' between spouses and the issue of sanity, instead of stressing on traditional notions like 'different roles of spouses.'
Jo In-seok was keenly aware of the 'clashes' that were happening between old and new ways, represented by sudden increase in separation and divorces between spouses (especially between new-age males and old-style females) or conflicts between females (particularly between old-style mothers-in-law and new-age daughters-in-law). He asked the old-age females to break free from old customs and learn new things, and especially not to allow themselves to be divorced in economically handicapped situations. Then he also asked the new-age females to acknowledge the rift between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Joseon society's reality, and try to eventually fit in by familiarizing themselves with old labor and living styles. Both suggestions were of a nature that prioritized female survival.
Jo was also very concerned about female poverty in colonized Joseon, which was also witnessing at the time the onset of Capitalist aspirations unfolding on a larger scale. He pleaded that the Joseon people let go their prejudice and misconception of money, do not in any way justify poverty, and engage in proper labor to overcome their poor reality. It was his belief and his suggestion, that only by doing so the Joseon society could prevent collapse of the families, further spreading of poverty, and ultimately keep the economy in tact and save the Korean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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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탐라기년』에 담긴 심재 김석익의 의식과 시각에 대하여

저자 : 김새미오 ( Kim¸ Saemi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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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탐라기년』의 서지사항을 정리하였고, 실증적 사실추구, 유교문명의 제고, 표류에 대한 재인식의 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시각을 정리하였다. 이어 저작이 차지하는 학술적 위치를 정리하였다.
『탐라기년』은 필사본과 연활자본이 전해진다. 원본인 필사본은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연활자본은 1918년 영주서관에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탐라기년』은 탐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심재는 본격적인 제주 역사기록에 앞서 「외서(外書)」라는 항목을 두어 탐라시대를 따로 구분하였다. 탐라는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지만, 문헌기록은 많다고 할 수 없다. 심재는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외서」를 써 내려갔고, 이를 통해 탐라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심재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해석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탐라기년』을 서술하면서, 부족하거나 보충 서술이 필요한 부분은 '부(附)' '안(按)'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기술하였다. 이런 방식을 통해 심재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 후세의 검증을 기다렸다.
유교문화에 대한 심재의 기술은 제주도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제주는 무속 문화가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재는 병와 이형상의 신당철폐 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유교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교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조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며, 이는 일제강점기 유교지식인의 문투(文鬪)로 평가할 수 있다. 바다에 관한 인식 역시 주목된다. 이는 제주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재가 기록한 표류와 표착에 관한 자료는 예전에 있던 다른 서적들 보다 그 양이 많다. 그만큼 심재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재의 『탐라기년』은 지금까지 제주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다. 기존에 있던 역사저술이 대부분 외부인이 제주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면, 『탐라기년』은 제주사람이 제주를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amlaginyun written by Shimje Kim Suk-Ik. It first identifies the three bibliographic items of Tamlaginyun and further examines their meanings. The items identified are: seeking for positivist truth, improvement of Confucius civilization and perceptions regarding floating. Tamlaginyun has currently both a transcript copy and a lead printed copy. The original transcript copy being located in Jeju National Museum, the lead printed copy was published in Yongjuseogwan in 1918, this further being widespreadly recognized. Tamlaginyun documents, in a chronological form, historical facts for the periods from Tamla to modern. Prior to getting into recording history of Jeju, Shimje put Tamla period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a foreign book. Even though Tamla is very critical to the identity of Jeju islanders, documented records are not impressive. Shimje aimed to put in order Tamla history under the heading of a foreign book drawing upon evidence-based documents. Shimje put himself significantly cautioned to interpreting as a history those unidentifiable through documents. In this reason, in writing Tamlaginyun, he prepared separate appendix headings(附, 按) in order to provide supplementary explanations. Through this, he corrected existing misguided perceptions and waited further verification by leaving the unidentifiable for future generations.
In describing confucius culture, Shimje looked into a specific situation of Jeju. It is because Jeju is a place in which shamanism culture is very strong. He believed that the abolishment of shamanism temples by Byungwha Lee Hyung-Sang would bring Jeju into a place where confucius culture could prosper. Shimje's emphasis upon confucius culture can be read as considering Joseon positively, which is also a literary battle through which confucius scholars kept their identities living the Japanese occupation years. It is worthwhile to pay attention to his perception of seawater. This is because the geographic perceptions of Jeju islanders got to broaden. The volume of materials that Shimje recorded concerning floating and drifting ashore are much greater than the previous ones. We can be hinted that Shimje made a great effort in documenting these subjects. Shimje's Tamlaginyun transforms the way Jeju is perceived so far. While Jeju and its history having been documented by non-native scholars to Jeju, Tamlaginyun holds very important implication in that it is written by Jeju island born native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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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와 의미

저자 : 이민기 ( Yi¸ Min-ki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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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圜丘)제사는 유교적 성격을 가진 국가의례 가운데 위상이 가장 높은 제사이다. 고려왕조는 정월 상신일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인 상제와 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송아지[犢]을 잡아 바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물을 처리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가운데 특이점을 도출하여 환구제사의 성격과 의미를 가늠해 보았다.
고려 환구제사에서는 희생이 신을 맞이하기 위해 적합한 상태인지 점검하고, 도살한 뒤 머리·피·몸통을 분리한다. 분리된 희생의 머리와 피는 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신단계에서 사용되었다. 몸통은 삶은 후 별도의 제기에 담아 각 신좌 앞 제사상에 올렸으며, 국왕·태위·광록경이 헌작한 다음, 요단에서 제사상에 올렸던 고기와 제물들을 태워 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쳐 제사를 종결하였다.
고려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희생의 머리를 태워 연기를 내는 행위로서 신을 맞이 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이 행위는 고려초 성종대 환구제사 설행 초기가 아닌 고려중기 예종대부터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 번째는 모혈, 그 중에서도 '피'의 문제이다. 고기로부터 분리된 피가 '생명력', '생동감'이라는 본연의 상징성을 토대로 희생의 신선함을 부각시키는 실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피가 제거된 깨끗한 희생물로써 제사대상에 대한 예우를 극대화한 외양 또한 연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The Round-Altar Rite(圜丘祭祀) was the most important and in fact highest Confucian ritual a government of a pre-modern dynasty could ever hold, and so it was in Goryeo as well. Every Sangshin day in January, the Goryeo King would offer a calf(犢) to the Heavenly King(Sangje) and the Founder King Taejo Wang Geon, hoping for a generous yield that year.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those sacrifices were processed, while the nature and meaning of the rite itself is contemplated as well.
The animal to be offered as a sacrifice was first examined to make sure it was in adequate shape to be offered to deities in the ritual. Then it was killed, and the head would be severed from the body while blood was removed as well. The head and blood were later used to invite the deity, and the body was boiled to be offered in bowls. After the King and officials paid respect, the meat and other items were all burned in an act of bidding farewell to the departing spirits.
There were two unique aspects in Goryeo Round-altar rites, in terms of the treatment of the sacrifice. First, the animal's head would be burned to make smoke that would guide the spirit to the service. This practice does not seem to have originated with the initiation of the ritual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but instead later on during King Yejong's reign. Secondly, the blood of the animal seems to have harbored a fairly symbolic meaning. Other than its own image of vitality and liveliness, blood separated from the meat signified the freshness of the sacrificed animal, while a cleanly processed bloodless body would generate the appearance of honoring the deities with the utmost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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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정국(金正國)의 『성리대전서절요』 편찬과 대체군주론(大體君主論)

저자 : 최민규 ( Choi¸ Min-gy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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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정국이 편찬한 『성리대전서절요』를 통해서 기묘사림 내부의 군주론, 군신관계론의 한 특색을 살피고자 했다.
김정국은 기묘사화 이후에 기묘사림들의 『성리대전』 연구를 계승해 『절요』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지주제의 확산 속에서 몰락하는 농민들, 그리고 반정과 사화가 연쇄하는 정국 현실을 목도하면서 군주 주도의 정치론 모색 차원에서 『성리대전』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절요』의 체재 역시 원래 『성리대전』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대」, 「군도」, 「치도」 등 정치사상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을 긍정하는 목차와 언설을 활용해서 요약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김정국은 『성리대전』에 담겨 있는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긍정하면서 『절요』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요』의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강조하는 특색이 드러난다. 그는 군주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는 군주가 정무의 최고 주재자로서 대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군신 간의 협력을 촉구하는 대체군주론을 바탕으로 『절요』의 군주론을 정리했다. 실제로 그는 군주수신론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실질적인 정무주재자로서 군주가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군신관계에서도 군주의 독단에 의한 정치는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신료들의 자정을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그는 군주와 재상이 같이 정치할 것을 말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는 재상은 경세적 자질인 재와 도덕적 능력인 덕을 겸비한 실무재상이었다. 그는 실무재상론을 통해서 관료층의 실무에 대한 자질 강화, 그리고 그 내부의 자정 촉구를 통해 관료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요약하자면, 김정국의 『절요』는 중종 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절요』가 양반사대부 일반의 정치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군주권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한 명종 대 집권세력이 주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This paper tried to examine one characteristic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uler and the subject through the 〈Seongri daejeonseo jeolyo〉 compiled by Kim Jeong-guk.
Kim Jeong-guk succeeded in the study of 'Seongri Daejeon'(『性理大全』) of the Gimyo sarim(己卯士林) and compiled 'Jeolyo'(『節要』). However, while witnessing the decline of peasants amid the spread of the land tenure system, and the political reality of a chain of 'literati purges'(士禍) and 'The Restoration of Righteousness'(反正), he paid attention to 'Seongri Daejeon' in terms of seeking a monarch-led political theory. Accordingly, the format of 'Jeolyo' was also summarized into political ideologies, which occupies a small proportion in the original 'Seongri Daejeon', and in the table of contents affirming the monarchcentered political operation and Much of the content structure was quoted. From this, it can be seen that Kim Jeong-guk compiled 'Jeolyo' while affirm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contained in 'Seongri Daejeon'.
Also, in terms of the content of 'Jeolyo', the characteristic of emphasiz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is revealed. In the part related to the monarch theory, he arranged the monarch theory of 'Jeolyo' while supposing the role of the monarch as the supreme ruler. In fact, he said that the monarch should be moral, but he emphasized that it was the means by which the monarch could function as a de facto ruler rather than constraining the monarch. At the same time, in term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his subjects, he criticized the monarch's arbitrary politics, but similarly urged the rectification of the subjects' excessive media activity. Based on this position, he said that the monarch and the prime minister should govern together. His ideal prime minister was a working-level prime minister with both governmental and moral capabilities. He urged the normal operation of the bureaucracy by strengthening the qualifications of the bureaucrats in practice through the theory of practical re-employment, and by urging for self-correction within the bureaucracy.
In summary, Kim Jung-guk's 'Jeolyo' was an idea to solve the political and social problems of the reign of King Jungjong by strengthening the monarchy. However, this fact caused the attention of the ruling powers of the Myeongjong era, who sought ways to strengthen the monarchy within the framework of Neo-Confucianism, rather than being accepted as a general political theory by the yangbansadae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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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동법에 동조했던 '공(貢)'의 경세 담론들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43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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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제를 대체했던 대동법은 조선 후기 다수의 유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전국적 단위의 세제로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대동법에의 동조'라는 지점에서 본다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만, 그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전후의 맥락을 조망한다면 이 지점을 교차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논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에 본고는 고법(古法)에 대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개혁의 지향(指向)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대동법에의 동조'를 경유했던 경세 담론들을 분별적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확인된 상이한 네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고법으로 간주했으나, 현실에서는 이를 '시의(時宜)'에 맞게 경장(更張)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서인계 경세가들을 중심으로 한 유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고법에 있어 임토작공(任土作貢)은 제후가 천자에게 납부했던 후공(候貢)에 한정되는 한편, 백성이 군주에게 진납하는 민공(民貢)의 경우에는 대동법과 마찬가지로 수미(收米)의 방식이 시행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법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시 둘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토지 사유의 현실을 용인하는 바탕 위에서 대동법을 전조와는 별도의 세목으로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토지에 대한 차등적인 재분배를 달성한 토대 하에서, 대동세의 명목을 전조의 일부로 용해시키는 입장이다.
넷째는 삼대에는 9직(職)이 전업을 이루었으며, 공(貢)은 이들에게 각자가 생산한 물품을 납부케 한 직공(職貢) 즉 직업세였다는 견해이다. 정약용이 이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러한 고법으로서의 직공을 경세의 지향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조선은 사회적 분업이 전업적 산업체계로 성숙되지 못했던 까닭에 이것이 당장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산은 한편으로는 직공의 시행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조선 산업의 다각화와 전업화를 추동할 방안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동법이 비록 그에게 이상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직공 시행의 이전 단계에서 그것이 지니는 제도사적 의의를 긍정했다.
공(貢)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유학적 이상과 조선 후기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유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경세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로써 펼쳐진 스펙트럼은 경세라는 유학의 본령과 시대적 요구에 당시 유자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었음을, 또한 지향하는 목표의 근거와 모델을 고법의 재해석을 통해 '발견'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경세학을 유학적 이상과 조선적 현실, 그리고 미래적 지향 사이의 다층적 학술 담론으로서 입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Gong(貢), Daedong Law(大同法), Imposing Tribute upon Regional Products(任土作貢), Old Law(古法), Tribute System, Hwang Shin(黃愼), Lee Yoo-tae(李惟泰), Kim Yuk(金堉), Jo Ik(趙翼), Yu Hyeoung-won(柳馨遠), Jeong Yak-yong(丁若鏞), Occupational Tax(職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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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저자 : 나종현 ( Na¸ Jo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7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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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윤증의 배사 문제는 노론에서 끊임없이 소론에 대한 공격 논리로 활용하였던 것이었다. 『가례원류』 사건을 거치며 숙종의 처분으로 윤증의 배사가 '공식화'되면서, 배사론은 단순한 공격 논리를 넘어 하나의 정치론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사문(師門)의 입장을 수호하려 하였던 호론계 권상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배사론은 호론계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스승에게 학문적으로 반발한 혐의를 가지고 있던 권상하 문하의 이간은 스승에 대한 글을 지어 윤증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낙론 계열의 이현익 또한 윤증의 배사 문제를 논하면서 윤증과 그를 옹호한 나양좌를 비판하였다.
경종대의 신임옥사와 영조대 초반의 의리 문제를 거치며 배사론은 충역론과 결합하여 노론 의리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권상하로부터 호론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한원진은 배사의 문제를 충역과 연결하고, 스승과 군주를 배신한 난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과는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여 논쟁을 벌였던 이간 또한 배사론과 충역론에 근거하여 노론 의리의 관철과 소론에 대한 강한 징토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배사론이 단순히 그들의 태생적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국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영향력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development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problem of Yun Jeung's betrayal of his master, Song Si-yeol, was that Noron had constantly used as an attack logic against So-ron. However, after the fact that Yun's betrayal was formalized by King Suk-jong through the controversy over 『Garyewonryu(家禮源流)』, it could served as the political theory of Ho-ron. Here, Kwon Sang-ha, who tried to defend the position of his school, played a great role. This allowed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had a greater effect than before. Yi Gan, Kwon's diciple, who was accused of protesting against his master, wrote a text about the master. In this text, Yi criticized Yun and defend his own position. Yi Hyun-ik, a member of the Nak-ron, also criticized Yun Jeung and Na Yang-jwa, and defended the position of his own school.
Through the King Gyeong-jong's reign and the early King Yeong-jo's reign,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was used as a mechanism to emphasize the legitimacy of Noron loyalty. Han Won-jin, who was considered as the heir of Horon, argued that the So-ron had betrayed the master and King Gyong-jong and King Yeong-jo should punished them drastically. This appearance was also revealed without much difference in Yi Gan, who was philosophically arguing with Han. Yi also revealed same political ideas with Kwon-Han line's, which runs from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to the theory of 'betraying own king'. Consider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it can be seen that the theory was not simply due to Ho-ron's inherent exclusivity, but the status and influence of the theory changed according to the changes in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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