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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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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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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45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373
대구사학
145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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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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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Ryu Ui-mok(1785~1833) contracted influenza on January 7, 1799 at the age of 15. The next day, the family of an elder brother of his family, the family of a younger brother of his father, and families of his father's cousins all contracted it at once when his grandfather returned after going out. A few days later, seven of eight governors including the governor of Gyeongsang Province died. The number of deaths reached 400 in Andong and 63,000 in Seoul.
King Jeongjo(正祖) of Joseon determined that it was a national disaster and crisis, taking on relief works first. He gave an order to relieve people to Jinhyulcheong(賑恤廳) on January 13, 1799 and had Yeoje(厲祭) and Wuije(慰祭) held. These were traditional approaches, but they had much influence on the opinions of the people. He also had the bodies of the deceased due to the infectious disease isolated and buried in private land that was owned by people and purchased by the government for the purpose. The regular spring military campaign was suspended altogether. These measures were taken during a period of approximately 20 days.
Under this miserable situation, interesting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It is difficult to trace the origin of an infectious disease. It must have been even more difficult in the traditional society. The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during a severe infectious disease must reflect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Ryu Ui-mok at age 15 called this cold "Hoyeok(胡疫)" writing down what he heard. He believed that the cold was transmitted from China. The government made fast reactions to the influenza spreading around the nation, and the people seemed to have trusted the government.
(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 jeongu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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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1911년 봉천(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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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With the spread of COVID-19 around the world in December 2019, the prevention measures taken by the governments had a significant impact on slowing the spread of COVID-19 in each country. However, not only the national prevention measures, but also the awareness and behavior of citizens who accept prevention measures are very important. In this regard, this paper examines the spread of plague in the northeastern China, the implementation of prevention measure, and the people's response to plague and authorities' prevention measure during 1910-1911.
After an outbreak of plague on October 25, 1910 in Manchouli(满洲里), the plague spread along the railroad to Heilongjiang(黑龍江) and Jilin(吉林) Provinces. In December, it spread to Fengtian(奉天), the political center of the three northeast provinces, and then to Tianjin(天津), Shandong(山東), and Beijing(北京). In Fengtian(奉天), quarantine stations and hospitals were installed to control the source of the plague, and efforts were made to block the transmission route.
When authorities implemented modern prevention measures, people expressed skepticism about western medications and modern prevention measures, due to their conflict with the Chinese conventional traditions, as well as the economic damage such measures cost. However, after the death of a medical missionary, Jackson, experiments that risked the lives of merchants, and authorities' propagation, the people's skeptical perception and behavior changed. People began to protect themselves by preparing effective prevention measures devices on their own. The people's cooperation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prevention success.
Examining the transition of people's skeptical consciousness and resistance to preventions is very important in their success and the modernization of public health in the northeastern China. In addition, examining people's awareness and effort in preventing the plague would give a strong message for the prevention on COVID-19.
(HK Research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 kimhyunsun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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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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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Thucydides did, however, overlook the issue of what kind of leadership should be required in a situation of war and plague, particularly in a plague disaster. Pericles clearly boosted patriotism and nationalism by appealing to traditional distributive justice, religion, and law, while the plague destroyed the traditional values and ideology that held Athens together. However, many people criticized Pericles' leadership in this regard. One such critic was Euripides, who saw Pericles as nothing more than the insane Heracules. Because Heracles mainomenos is a work that emphasizes the prudence-based leadership required in times of war and plague. Given its long history, the plague had a positive impact by allowing for introspection and insight into what is just and how to live.
(Seoul National University, numeni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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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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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This thesis aims to estimate the population sizes over time each region had during the Bronze Age on the basis of settlement data in the Hyeongsan River and aims to trace the population trends and the social structures as the settlement data that have been accumulated recently.
In estimating the population of the Hyeongsan River basin during the Bronze Age, five square meters has been used as the spatial size a person needs according to the generally used average floor size per a person. According to the population estimation results, the population size of the Late Bronze Age turns out 40.7% of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Although the Late Bronze Age witnessed 60% decrease in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in the Hyeongsan River basin, there had been some variations in the basin. That is, there had been the population increases in the central Gyeongju region and the northern Gyeongju region including the Ahngang basin from the Early Bronze Age to the Late Bronze Age, which is an interesting population trend. It is considered that this population increase in the two areas might be related to the integration of settlements including population nucleation by the emerging center located at Gyeongju area. In addition, it might mean that the settlement structures got bigger and more complex. This phenomenon the population increase in the central Gyeongju area might be the dawn of the emergence of the regional polity consisting of the village clusters or settlement networks called 'euprak' because the population increase could stimulate not only diverse social integrations but also long distance trades.
(Youngnam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 mcjin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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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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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Research on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14th reign of King Jinheung(553) has been studied despite the lack of relevant records.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see the general ideas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However, it is also seen that some parts could not have been thoroughly examined when looking at previous research. For instance, it was hardly considered the impact of international activities, was briskly conducted on the foundation of Hwangnyongsa Temple in the King Jinheung era. Therefore, this research will examine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external context.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literature records and archaeological data, it can be seen that the construction plan for Singung - new palace, which had been finished laying the foundation, was changed its usage to a temple. The temple firstly consisted of a huge building with small buildings on the north side and a wall on the rest of the sides. Then, they gradually built Buddhist sculptures and Geumdang(Goden Hall, 金堂). King Jinheung changed the palace plan into the temple because of the emergence of 'Hwangnyong - yellow dragon.' The emergence of the Hwangnyong could be created by combining the Silla's traditionally auspicious creature 'Yong - dragon' with the Chinese auspicious creature to reveal that king Jinheung dominated the Hangang River basin and took over the power in the competitive relationship with the king Seong(聖王) in Baekje. However, Hwangnyongsa Temple's construction took some time to build as Silla was more focused on stabilizing newly secured territories.
The establishment of the Hwangnyongsa Temple by King Jinheung was related to worshiping Buddhism as a policy of Emperor Wu(武帝) of Liang(梁). Like King Seong in Baekje, King Jinheung intended to reveal the royal authority through Buddhism as Emperor Wu did political actions through Buddhism. One of the cases was that King Jinheung sacrificed his palace to build the Hwangnyongsa Temple. In that respect, the temple can be considered a significant temple since King Jinheung.
(Kyo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schoihi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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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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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a famous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Rome, wrote letters of advice to his son who went to Athens to study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The publication of these letters in three volumes had a great effect on modern Western thinkers, and this is De Officiis (BC 44).
As the ancient culture was revived and regenerated after Renaissance, the British Islands saw re-illumination of classical books, and especially De Officiis was widely spread in English and Scotland both in the original version and in English-translated version of 1534. There was a trend to publish letters of advice to sons or daughters by being modeled after De Officiis, and the representative work of the tendency was Basilikon Doron (1599) by James Ⅵ (1567-1625), King of Scotland. Basilikon Doron is a Greek word meaning 'the royal gift', and it is a conduct book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Prince Henry (1594-1612).
At first, this conduct book was printed for private purpose, so there were only seven books in secret. However, by the time King James succeeded to the king of English after Queen Elizabeth Ι (1533-1603), the attention of this book was spread not only in Scotland but also England and European continent. Even fabricated copies and abridged editions were popular. Finally, Basilikon Doron was officially published in London for general public and translated into Latin, French and German, being distributed throughout English and Europe as a bestseller of the time.
Why do we need to read Basilikon Doron now?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As Basilikon Doron appeared as a conduct book from the king to his son, this book can help to understand king's education and ideal king in those days. In addition, it is an important resource to find out how King James, who was a king and intellectual, recognized his era and kingship. It also gives an opportunity to see a device to express the ideal about his kingship during the period of the conflicts among Divine Right of Kings, 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and authority to depose the King.
This study is intended to focus on political and religious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advent of Basilikon Doron, and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asilikon Doron around 1603 when King James succeeded to thro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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