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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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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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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43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354
대구사학
143권0호(2021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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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왕경(新羅王京)에서 고려(高麗)의 지방도시(地方都市)로, 경주(慶州)

저자 : 李泳鎬 ( Lee Young-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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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왕경에서 고려의 지방도시로 떨어진 역사도시 경주의 모습을 살펴본 것이다. 그래서 신라 왕경은 어떻게 소멸되고 어떻게 지방도시로 재탄생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 격변기의 변화상을 그려보았다.
삼국통일 후의 신라 왕경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78,936호라는 인구가 말해주듯이 사람과 물화가 집중된 거대한 국제도시였다. 9세기 말 헌강왕대에는 서울에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았다. 또한 京師에서 海內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 있고, 草家는 하나도 없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로써 신라 왕경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외관상의 번영을 나타내며, 생산도시에서 거대한 사치성 소비도시로 변한 왕경의 실태를 말해줄 뿐이었다.
급기야 진성여왕 3년(889)에는 貢賦가 들어오지 않아 이를 독촉하자 사벌주에서 처음 반란이 일어났다. 나아가 본격적인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927년의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경애왕은 피살되고 신라의 궁궐과 왕경은 약탈당하였다. 후삼국 항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이에 따라 핵심 지배세력들과 수많은 물화가 개경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신라 왕경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떨어졌고, 명칭도 慶州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고려 현종 때 새로운 거점으로서 경주부성이 축조되었다. 도시의 중심도 신라 궁궐 주변이 아니라 서북쪽에 새로 축조한 경주부성으로 이동하였다. 고려시대 축조한 南古壘는 북천의 범람을 막아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제방이란 설과 새로 건설한 읍성을 방어하는 성곽이란 설이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자의 기능을 가졌다고 판단하였다.
고려시대 경주는 전 왕조 신라에 비해 한적한 도시로 바뀌었다. 신라를 지탱해왔던 왕경의 핵심 인물들은 거의 개경으로 떠났고,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이 남게 되었다. 인구가 줄고 도시가 퇴락하였다. 궁궐은 방치되고 사원은 폐사되거나 경영이 어려워졌다. 그런 가운데 일부 새로 창건된 사원도 나타났다. 그러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 황룡사 9층탑은 여러 차례 개축되면서 유락 시설로 변하였다.


This study seeks to describe the transformation of the historical city of Gyeongju that was the royal capital city of the Silla dynasty and then reduced to a local town of the subsequent Goryeo dynasty, with focus on its demotion. After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the Silla capital reached its zenith. As the 178,936 households in the ninth century suggest, the capital was a huge international city in which people and goods were concentrated. It is said that in the late nin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Heongang, in the capital there was not a single thatched-roof house but, instead, unbroken lines of tiled-roof and tiled-wall houses, and the sounds of music and song filled the streets day and night. People cooked rice with charcoal instead of wood. Also, there were long lines of houses and walls without a break from the capital to the coast, with no thatched house. These historical records illustrate how much the capital prospered. But they only show its superficial prosperity, and indeed the real fact is that the capital was transformed from a production city into a luxurious consuming city.
In a desperate attempt to overcome its financial crisis, the central government in the capital used force to collect taxes from the peasant population, which caused the first peasant rebellion to erupt in the present-day Sangju in 891. As Korean history entered the period of the Later Three Kingdoms, Silla began to decline rapidly. In 927, Later Baekje's Gyeonhweon pillaged the Silla capital, forced King Gyeongae to commit suicide, and seized large quantities of treasure and arms. Amidst a fierce three-way contest for mastery of the Korean Peninsula, King Gyeongsun, the last Silla king, voluntarily surrendered to Wang Geon, King Taejo of Goryeo, in 935. As a result, a significant number of ruling elites and a large quantity of goods moved to the Goryeo capital of Gaegyeong. Now the Silla capital was reduced to a local town of Goryeo and was renamed Gyeongju.
During the reign of King Hyeonjong of Goryeo, the fortress of Gyeongju-bu was constructed. Thereafter, the center of the town moved from the vicinity of the royal palace to the newly built fortress in the northwest. Regarding the south high mound that was built in the Goryeo period, two views have conflicted with each other: first, the embankment intended to safeguard against inundation of the Bucheon River; second, the newly constructed citadel intended to defend the town. This study judges that it might fulfill the second function.
In the Goryeo period, as almost all the key figures who had ruled Silla left for Gaegyeong and a small number of the aristocracy and common people remained, Gyeongju was transformed into a quiet local town. Its population decreased and the city itself fell into decay. The former royal palace was left uncared for, and Buddhist monasteries were ruined or faced bad management. In the meantime, some new temples were built. But the nine-story wooden pagoda of the Hwangryong-sa temple, which represented Silla's Buddhist temple of state protection, underwent several rebuilding works and finally was degenerated into an amusement facilit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leeyho@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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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16세기 인재의 부고(府庫), 선산

저자 : 김성우 ( Kim Su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5-8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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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선산은 경제가 선순환하는 가운데 인구 증가 → 인재의 배출 → 새로운 혁신의 출현 → 새로운 사조의 도입과 외부세계로의 전파라는 도미노 현상을 낳았다. 이런 구조에 힘입어 선산은 내부에서 응축된 긴장과 에너지가 외부로 팽창하여 주변부로 강하게 뻗어 나가는 중심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의 악순환 함정에 빠진 18~19세기의 선산에서는 반대 양상이 펼쳐졌다. 경제가 쇠퇴하면서 인구 지지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인구 유출 → 인재의 감소 → 혁신의 위축 → 낡은 사고와 인습의 기승이라는 역(逆) 도미노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결과 선산은 이제 중심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주변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14세기 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600여 년 동안 선산의 성쇠 과정은 경제와 사회, 문화가 서로 별개로 움직이는 파편적인 요소가 아니라, 한 묶음이 되어 움직이는 구성요소들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In the 15th century, Sŏnsan saw a virtuous economic cycle of population growth leading to the births of many national talents, the proliferation of new innovations and innovative practices and the expansive dissemination of them. Thanks to this virtuous cycle, Sŏnsan became a regional hub whose surging creative energies had a spillover effect on its peripheral regions.
However, the opposite pattern unfolde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when Sŏnsan fell into the trap of a vicious economic cycle. As the economy declined, it failed to meet the population pressure, resulting in an outflow of population → a decline in human capital → a paucity of technological innovations → a reliance on outdated, conventional thinking. As a result, Sŏnsan regressed into a periphery that could not sustain itself without motivation from the center.
The rise and fall of Sŏnsan over a period of 600 years from the first half of the 14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imparts to us a meaningful historical lesson that the economy, society, and culture are not fragmented parts separated from one another but rather integrated components that constitute a whole system.
(Daegu Haany University / kswu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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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시대 경상우도의 중심지, 진주

저자 : 김준형 ( Kim Junhy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2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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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신라 이후 경남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진주의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곳인 지리산은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었고, 지리산을 배경으로 여러 저항세력들이 활동했던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는 진주 주민들의 저항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주는 토질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요로워 주민의 생활기반이 탄탄했고, 조선 초기부터 조정의 높은 관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6세기 후반 진주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南冥學派의 중심지였다. 남명은 '敬義'와 실천을 강조하였고, 이같은 학풍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이어졌다. 남명학파 인물들은 임진왜란 때는 각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대에는 '대북'세력으로서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면서 남명학파는 침체되고 대거 남인화하였다. 남명학파는 이후 『南冥集』 훼판사건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면서, 여기에서 소외된 그룹은 서인·노론화되었다.
18세기 이후 향족과 서얼층의 집요한 저항과 신흥계층의 지속적인 신분상승 도모로 인해 향촌사회에서 사족들의 지배권이 점차 약화되었다. 경남 서부지역은 이 현상이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경남 서부지역의 사림들은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남명학풍을 진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Since Silla(新羅) Jinju(晉州) has functioned as the center of the western part of Gyeongnam(慶南). Jirisan(智異山) which was an important place in the history and culture of Jinju was known as a mysterious mountain, and there were many cases where various resistance forces were active in the background of Jirisan. It also affected the resistance of Jinju residents. Jinju has a solid living base because of its fertile soil and abundant products, and many high officials of the central government came from Jinju since the early Joseon Dynasty.
In the late 16th century, Jinju was the center of Nammyeong(南冥) school, which represents Gyeongsang-udo(慶尙右道) Province. Nammyeong emphasized 'gyeongeui(敬義)' and practice, and this attitude continued to his disciples. The Nammyeong school figures carried out military activities in each regio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y took control of the political system as a force of 'Daebuk(大北)' in the Gwanghaegun(光海君) era. However as Injo-revolution(仁祖反正) was raised, the Nammyeong school was stagnated and turned into 'Namin(南人)'. Since then, the Nammyeong school has been involved in various events such as the case of woodblock damage of 'Nammyeong literary collection', and the group that was alienated here has turned into 'Seoin-noron(西人-老論)'.
Since the 18th century, due to the persistent resistance of the 'hyangjok(鄕族)' and the 'seoeul(庶孼)' classes, and the continuous rise of the emerging classes from the bottom, the exclusive control of the 'sajok(士族)' in the local community has gradually weakened. In the western part of Gyeongnam, this phenomenon was inevitable. As the power was stagnating, 'sarim(士林)' in the western part of Gyeongnam tried to promote the Nammyeong school by gathering around Deokcheon Seowon(德川書院).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jukim@g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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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체제의 읍치 동래와 식민도시 부산진으로의 분화와 통합 : 부산의 근현대와 새로운 지역연구 성과

저자 : 손숙경 ( Son Suk-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5-15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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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부산의 근현대의 특성에 주목하여 부산의 근현대 형성의 배경과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하여 부산지역의 역사상에 대한 새로운 경험적 연구 대신 이와 관련된 중요 연구 성과와 문제점을 논의하였다. 부산의 근현대는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진 일원이 식민도시 부산으로 변모하여 구체제의 중심지인 동래와 나누어진 후 해방 이후 양자가 부산으로 통합하여 한국 제 2의 도시로 성장하는 역사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제 2의 도시라는 위상을 넘어서서 부산이 해양 문명과 만나는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부산지역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면에서 많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럼에도 부산의 근현대 형성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새로운 논의와 대화가 필요하다. 먼저 동래지역에 하나의 사회 집단을 형성한 무임들에 대한 연구 성과는 한국사에서 주변부 지역의 인간집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 설치된 군사기지인 水營에 속했던 무임과 이서집단들에 대한 연구 성과는 미미한 실정이다. 동래지역의 무임 및 이서집단과 수영, 釜山鎭 소속의 이들 집단은 상호 연동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조사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면 근대 이후 부산의 형성에 또 다른 배경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산의 근현대 형성은 1876년 개항 이후 구읍치 동래로부터 주변부 지역인 부산진이 중심이었다. 부산진을 중심으로 초량 등지에 인구가 집중되고 상공업이 이루어지면서 식민도시가 형성되었다. 식민도시 부산의 형성에 관한 다양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산지역에 최초로 근대병원이 세워진 사실과 이 지역 기독교와 상공업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 이와 관련하여 지역의 관점에서 근현대의 형성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또한 식민도시의 성장과 배후지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수준이 늦은 지역에 대해서 시선을 확장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끝으로 개항 이후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배후지 향반의 중요한 경제적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이 계속 이루어지면 부산의 근현대의 모습을 한층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부산의 근현대의 형성과 특성을 몇 개의 주제에 집중하여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 한 지역이 만들어가는 근현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데 지역의 시점을 강조하였다.


This research reveals background of formation of modern-contemporary Busan and its meaning by focusing on a characteristic of modern-contemporary of Busan. For this research, instead of new experimental research about history of Busan, research discussed major research outcomes about Busan' history and its problem. Busan's modern-contemporary was differentiation of Busanjin from Dongnae, a center of old regime, as colonial city, and development of Busan to second city of Korea, after integration of both city follow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The more important thing is that Busan was not only second city of Korea, But also played an important historical role of meeting with marine civilization.
Plenty of researches about Busan has been accumulated in various aspects. Nevertheless, We still need new discussion and conversation about the meaning of formation of Busan's modern-contemporary era.
First, research outcome about military, which formed a social group in Dongnae, shows new historical images about Busan and suggests a new point of view about human groups of suburb area in Korean history. But the research outcomes about military belongs to Sooyoung, which was navy base founded at Dongnae, and clerk groups is few. Military and clerk groups were mutually related with these groups in Sooyoung and Busanjin, but research about this fact are not quiet enough. If research about this fact are advanced, it can suggest another background of formation of Busan after modern times.
Next, the center of modern-contemporary formation of Busan was Busanjin, which was suburb of anceint county seat, Dongnae. Centering around Busanjin, population was concentrated on and commerce and industry was started in Choryang and like places. Despite various research outcomes about formation of colonial city Busan, the researches about the fact that the first modern hospital was established in Busan and relation between local christianity and commerce are insufficient. So this research suggested the need of discussion about formation of modern contemporary in the view of local. Also, widening up views to areas, which had low level of development in spite of development of colonial city and extension of hinterland, will be needed.
Finally, Because cases that show economical trend of local elites of hinterland who responded actively to changes after opening a port are being discovered, If these works are continuous, we will be able to identify the shape of modern-contemporary Busan in deeper level.
This research centrally discussed about research outcomes about formation and characteristics of modern-contemporary Busan focusing on several subjects. By this research, a writer emphasized a view of local area on looking into a subject about what is modern-contemporary era made by one local area.
(Catholic University of Pusan / skyungs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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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 대 성골의 출현과 그 배경

저자 : 성준선 ( Seong J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3-18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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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골품제에서 최상위 신분으로 존재했던 성골이 언제 어떤 배경에서 출현했는지를 검토하여, 성골과 골제 연구에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성골이 하나의 신분으로 실재했다는 기본 사실과 다른 신분의 상위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신라 중고기 왕권이 강화되던 상황과 관련지어 검토하였다. 성골의 출현 배경을 정치, 사회, 사상의 변화 속에서 살펴보고, 특히 종교적 신성 관념을 이용하여 기존 골제 내에서 다른 귀족들과 차별성을 드러내려 한 것이 성골 관념과 신분의 등장을 야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가 신라 사회에 처음 공인된 법흥왕 대가 성골 출현의 상한선이 될 수 있겠지만, 법흥왕 대는 기존 육부 체제가 무너져간 시기이기는 해도 불교가 막 공인된 시점이라 아직 불교적 신성 관념으로 새로운 신분 관념이 창출되었을 것 같지 않다. 학계에서 폭넓게 지지를 받는 진평왕 대성립설 역시 마찬가지로, 폐위된 진지왕의 뒤를 이어 국인의 추대로 즉위한 진평왕이 어느 순간 갑자기 불교적 신성 관념을 내세우며 성골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은 다소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적 신성 관념은 진평왕 대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에 앞서 진흥왕 대에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에 진흥왕 통치 시기에 나타난 불교적 왕자관으로서의 전륜성왕 관념을 주목하여, 이것이 곧 성골 관념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신분으로서의 성골 출현을 가져온 직접적 배경이 되었음을 알아보았다.


In the process of Silla's development into a centralized aristocratic state, a rigid system of social status called the gol-pum system was formed.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Silla society is gol-pum system society, as it is a unique system of status based on ancestry in which people were regulated throughout their daily lives including not only political status but also food, clothing, and shelter. In the gol-pum system, “Seonggol” was the highest status, and only a few of the royal family occupied. Seonggol is a status derived from the gol-system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Beopheung. King Jinheung, who succeeded King Beopheung, led the rapid development of Silla. King Jinheung promoted Buddhism, strengthened his kingship, and expanded the territory of Silla through active conquest activities.
Hwangnyongsa was constructed with his ideals and principles of governance. He sanctified his lineage by using the idea of Chakaravartin, the ideal king of Buddhism, and called it the “Seonggol”, emphasizing that he was of divine lineage. Through this process, he wanted to continue his stable succession to the throne in the Jinheung royal family. Prince Donglyun was crowned prince. When Donglyun died, however, King Jinheung called his second son Geumlyun and prepared him to succeed to the next throne. Geumlyun would have appeared around the time of the creation of the Jangyukjonsang, the peak of Chakravartin ritual. Jinheung termed his blood-related group Seonggol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and to ensure a stable succession to the throne. The privilege of the Seonggol, which emerged in this way, was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Department of History, Daegu Catholic University / junsunny1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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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제강점기 노명우(盧明愚)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저자 : 許宗 ( Heo J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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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는 일제강점기 충남 부여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재학 중 공주의 3·1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 유학 중에도 학생단체의 간부를 지내며 당시 풍미하던 문화운동을 벌였다. 졸업 후에는 원산과 익산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의 봉건 의식 타파, 신지식 교육과 근대 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방략을 모색한 끝에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1920년대 중반 충남 강경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사회운동 단체의 간부로서 무산대중의 권익 옹호와 사회의식 고취에 앞장섰으며, 언론인으로서 지역 문제를 제기하고 일제 관헌의 횡포를 고발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0년대 후반 귀향하여 침체에 빠져 있던 사회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동·청년운동 단체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청년운동의 연합조직과 신간회 지회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30년대 초기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사회운동의 전환에 발맞추어 사회운동을 벌였다. 혁명적 대중운동으로서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자신 소유의 토지를 무상 제공하는 등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농민조합이 해체 당하자 공개 활동을 중지하고, 계급 해방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지향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성격의 비밀결사 공산주의연구협의회와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혁명적 대중운동과 비밀결사 활동으로 피체되어 장기간의 구금 속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그는 지역 차원을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Roh Myung-woo is a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and social movements in Buyeo, Chungcheongnam-d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orn in Buyeo, Chungcheongnam-do, he developed a national consciousness from an early age. During his school years, he prepared fo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for Gongju and led the protests. While he was studying in Seoul, he served as an executive of a student organization and held a cultural movement that was at the time. After graduation, he worked as a teacher in Wonsan and Iksan to break through the feudal consciousness of students, educate new knowledge and inspire modern consciousness. In this process, he accepted socialist ideas after seeking new ideologies and strategies of social movements.
He started a social movement in earnest in Ganggyeong, Chungcheongnam-do in the mid-1920s. As an executive of a social movement group, he took the lead in advocating the rights and interests of the masses and raising social awareness, and as a journalist, he raised issues of local issues and carried out activities to accuse the tyranny of the Japanese colonial constitution. In the late 1920s, he returned home and led the formation of a labor and youth movement group in order to revitalize the social movement that was in stagnation. He further led the local community movement, promoting the establishment of the youth movement coalition and the Shinganhoe branch.
In the early 1930s, he held social movements in line with the changes in domestic and foreign circumstances and social movements. As a revolutionary mass movement, he formed and worked as a Farmers'union, and showed a dedication to providing his own land for free. When the Farmers'union was disbande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he stopped his public activities and formed a secret organization of communist research councils and communist councils aimed at class emancipation and communist society and researching socialist ideas.
He was subjugated by revolutionary mass movements and secret organization and was subjected to cruel torture in prolonged detention. He eventually died at a young age due to the aftereffect of torture. He was a figure that showed the epitome of national and social movem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eyond the regional level.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hjong@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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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제강점기 경주 소재 문화재의 지정 현황과 성격

저자 : 김신재 ( Kim Sinja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5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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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때 '보물'과 '고적'으로 지정된 경주 소재 문화재의 현황을 파악하고 해방부터 1960년대 말까지로 국한하여 경주 소재 문화재의 지정 추이를 분석하여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보존 성격을 고찰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정된 경주 소재 문화재가 문화재보호법 제정 전후로 지정 해제된 것은 없다. 민족의식을 고취할 우려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다가 해방 후 지정된 경주 소재 문화재는 없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문화재가 재지정된 후 1960년대 말까지 경주 소재 문화재로 금관총 금관, 감은사지 삼층석탑 등이 '국보'로, 양동마을의 무첨당과 향단 등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이 '보물'로, 신라 왕릉 다수가 '사적'으로 신규 지정되었다.
일제가 경주 소재 문화재를 지정하여 보호한 것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주 소재 문화재 보존정책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테두리 안에서 신라문화 유산과 석조건축물 중심이었다.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관아 등의 목조건축물은 소홀히 취급되고 신라문화 유산은 민족동화와 문명동화 차원에서 보존과 개발이 되고 제국의 유산으로 관리되었다.
철로와 도로로 인해 훼손된 신라문화 유적지의 원형 회복과 조선시대 및 근대의 문화유적의 복원과 정비에 보다 힘을 기울이는 것이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보존정책을 극복하는 길임을 밝혔다.


This paper examines the current status of cultural assets in Gyeongju, which were designated as 'treasures' and 'historic sit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t also analyzes the designation trend for cultural assets in the city from the day of liberation to the end of the 1960s in order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cultural asset preservation.
No cultural asset in Gyeongju has lost the designation before and after the enactment of the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Act. Additionally, there has been no cultural asset in Gyeongju that had not been designated as a cultural treasure due to concerns over promoting national consciousness but received the designation after the day of liberation. By the end of the 1960s, the Gold Crown from the Geumgwanchong Tomb and the East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at Gameunsa Temple Site in Gyeongju were designated as National Treasures. In addition, wooden structures from the Joseon Dynasty period, such as the Mucheomdang House and the Hyangdan House in the Yangdong Village, were designated as 'treasures' and many of the royal tombs of Silla were newly designated as 'historical landmarks'.
Part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cultural policy involved protecting the cultural assets in Gyeongju by assigning them designatio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cultural heritage preservation policy was centered on the cultural assets and stone structures from the Silla period. While wooden structures, such as the magistrate's offices, which symbolize the Joseon period, were neglected, the Sillan cultural assets were preserved and protected as assets of the Japanese Empire to promote national assimilation and civilization assimilation.
The study came to a conclusion that making greater efforts to restore the original Sillan cultural and historical sites damaged by railways and roads is the preferable way to overcome the Japanese Colonial Era's policy of preserving cultural assets.
(Dept. of korean history, Dongguk University / ksj@dongg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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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당(唐) 태종(太宗) 정관년간(貞觀年間)의 제왕(諸王) 관리

저자 : 金澔 ( Kim 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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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왕조의 諸王은 皇室을 보호하는 울타리일수도 있지만, 皇權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 요소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唐 太宗 李世民은 武德 9년(626) 秦王 신분으로 玄武門의 變을 거쳐 즉위했기에 政變 재발 방지를 위한 諸王 통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太宗이 정변 방지를 위해 諸王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爲民政治라는 명분 아래 宗室의 작위를 강등시키는 降封을 단행했다. 아울러 宗室 인물 가운데 두각을 보이는 諸王들을 교묘히 통제하고, 宗室 유력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조처를 취했던 것이다. 태종은 그와 비슷한 年輩이거나 태종보다 연상인 宗室들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자신의 동생들에 대한 통제도 진행하였다. 貞觀 初 봉건에 관한 논의를 통해 왕조의 藩屛으로서 諸王의 역할에 동의한 태종은 親王들에 대한 봉건을 유지하되, 改封을 단행했다. 책봉의례에는 황제의 사여물이 동반되는 것이기에 高祖가 특별히 총애했던 皇子들을 개봉했던 연장선에서 태종 역시 改封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종실을 포함한 皇弟 諸王의 봉록은 皇子보다 적었기 때문에 개봉은 매우 형식적이며 施恩을 과시하려는 조처에 불과했다. 이와 더불어 皇弟 親王을 刺史나 都督으로 임명하여 어린 나이에 부임시킴으로써 일종의 유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또한 태종은 皇子들이 자신과 같은 정변을 겪지 않도록 皇子 親王에 대한 관리도 필요했다. 그러나 태종의 魏王 泰에 대한 특별한 총애는 황태자를 비롯한 皇弟·皇子 사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던 것 같다. 결국 貞觀 17년(643) 承乾을 폐위하고 나이 어린 治를 황태자로 책립하면서 貞觀 初 어린 황자들을 부임시키지 않았던 것과 달리 10세의 황자도 임지로 보냈다. 게다가 새로운 황태자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魏王을 일시적으로나마 郡王으로 강등시켰고, 濮王으로 進封시킨 후에도 王府를 개설해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태종은 즉위한 이후 貞觀年間 내내 宗室 諸王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親王인 皇弟들을 통제하는 한편, 결국 皇子들에게도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이와 같은 태종의 諸王 관리로 인해 통치기간 皇子나 諸王에 의한 치명적인 정변이 일어나지 않고, 황권 안정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武周革命 과정에서 李唐皇室의 저항이 쉽게 진압 당했던 배경에는 貞觀年間 지속적인 諸王 통제로 인한 諸王 세력의 약화가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control over the Kings in Tang Taizong(太宗) Period. During the founding process of the Tang dynasty, Gaozu(高祖) Liyuan(李淵) installed all of the young members as Junwang(郡王) in order to establish a fence for the royal family under the heavens. However, after the throne, Taizong demoted the title of the royal family in the name of being for the people. In addition, the kings who stood out among the royal figures were skillfully controlled. By emphasizing public interests and morality rather than real relations, and reducing the benefits, it brought about the effect of encouraging obedience to the officials. It seems that the court's reproach is minimized, and the royal family or the royal family's criminal acts have not granted the court's legal privileges. In addition to controlling the royal family, Taizong proceeded with control over his younger siblings. Taizong, who agreed to the role of the king as the king of the dynasty through discussions on feudalism, maintained the feudality of the kings, although the re-installation of the kings was accompanied by imperial gifts, it was only a formal measure to show off grace. By appointing qinwangs as a sheriff(刺史) or a county governor(都督), he was appointed at a young age, making it a kind of exile. Besides, the strict punishment for the actual criminal acts committed by the congregation was no different from other royal family. In this way, compared to Taizong's strict management of the royal family and the royal family, the sons of the emperor were placed in a relatively loose control. According to the statute, the sons, who were also reprimanded as a Qinwang(親王), were assigned to the posts at a relatively mature age than those of the emperor's siblings, and the punishment for criminal acts was not as severe as that of the royal family and the courts. However, Taizong deposed the Chenggan(承乾) and established the younger Zhi(治) as the crown prince, and sent the young sons to the new post. Temporarily demoted Weiwang(魏王), who was a threat to the new prince, to Junwang. Even after he was relegated to Puwang(濮王), he applied strict control, such as not opening a government. Taizong weakened the power of the royal kings throughout the years after his ascension and took control of the kings of the royal family. It is undeniable that such a monarchical administration of Taizong did not cause a fatal confrontation by the king or sons during the reign, and brought a positive result to the stability of the royal power.
(Kyungnam University, The Institute on Choechiwon's Studies / coolkim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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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화대혁명과 파리코뮌(Paris Commune)

저자 : 孫承會 ( Son Seungho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1-32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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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성립 이후 지속적으로 파리코뮌을 기념하고 찬양하며 선전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산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정권이었으며 마르크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었고 특히 파리코뮌 원칙의 실천을 강조한 문혁기간에 더욱 강화되었다. 문혁 초기인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파리코뮌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매우 높았다. 이점은 공산당의 공식 선전 매체에 잘 드러났다. 하지만 파리코뮌 성립 100주년이 되는 1971년을 즈음하여 양상은 크게 달라졌고 공산당의 평가 역시 동요의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문혁 초기의 '造反'과 '奪權'의 논리로 작용했던 파리코뮌의 원칙이 상해인민공사라는 실천적 경험을 통해 좌절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상해인민공사의 실질적 형해화와 상해혁명위원회로의 명칭 변경은 좌절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문혁기간 파리코뮌에 대한 이상은 사라지지 않고 일부 극좌파로 이어졌다. 비록 그들과 그들의 이상은 문혁파에 의해 탄압을 받고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이후 '신좌파'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그것은 '당ㆍ국체제'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문혁을 '당ㆍ국체제'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로 파악하는 알랭 바디우에게 파리코뮌은 새로운 공산주의사회를 가능케 하는 '가설'로 설정되었다. 반면 문혁을 직접 경험한 顧准은 파리코뮌의 직접 민주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


Since its establishment, the Chinese Communist Party has consistently celebrated, praised and promoted the Paris Commune. Because it was the first regime established by the proletariat and was highly regarded by Karl Marx.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is trend has continued and has been strengthened especially during the period of the Cultural Revolution emphasizing the practice of the Paris Commune principle. The interest and enthusiasm for the Paris Commune was very high from 1966 to 1967 at the beginning of the Cultural Revolution. This was well demonstrated in the official media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However, around 1971,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Paris Commune, the aspect changed greatly, and the evaluation of the Communist Party for it also showed a fluctuating appearance. This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the principles of the Paris Commune, which served as the logic of the “revel(造反)”and the “seizing of power(奪權),” in the early years of the Cultural Revolution, were frustrated through the practical experience of the Shanghai Commune(上海人民公社). The actual destruction of the Shanghai Commune and the change of the name to the Shanghai Revolutionary Committee(上海革命委員會) would be a concrete expression. However, the ideal of the Paris Commune did not disappear during the period of the Cultural Revolution and was inherited to some extreme leftists. Although they and their ideal were suppressed by the “clique of the Cultural Revolution(文革派)” and erased from the history of the Cultural Revolution, they were later summoned again by the “New Left”.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problem of the “system of the party-state(黨ㆍ國體制)”. For Alain Badiou, who considered Cultural Revolution as a meaningful attempt to break through the limits of the party-state system, the Paris Commune was set as a “hypothesis” that would enable a new communist society. On the other hand, Gaozhun(顧准) who experienced the Cultural Revolution in person pointed out the limitations of direct democracy in the Paris Commune and suggested a new prospect for democracy.
(Yeungnam University / sonshoi@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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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마르틴 뤼케, 이름가르트 췬도르프, 정용숙 역, 『공공역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20)

저자 : 김건우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3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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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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