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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 : 대구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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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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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9)~144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366
대구사학
144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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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저자 : 서호준 ( Seo¸ Ho-j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 (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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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이래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응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간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기법을 어떻게 하면 역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연구의 목적이라할 수 있다.
사실 역사학은 방대한 사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 데이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관성을 추구하는 빅데이터와 인과성에 대한 탐문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간에는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빅데이터의 위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으로 역사연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역사연구는 한층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간의 접목을 위해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약75년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경향을 크게 7개 시기로 구분하여 텍스트 마이닝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하였다. 빅데이터 기반 분석결과를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에 관한 기존의 논의결과와 비교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분석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논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최근으로 올수록 그 정확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국가사의 활성화 정도를 직관적으로 논의하는 경우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보충적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은 기본적으로 키워드(노드) 분석을 위한 것이므로 문장단위 분석이나 고차원적인 개념분석에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사실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요망되는 고대사 연구를 계량적으로만 분석한다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반 연구는 이와 같은 단순 계량적 접근을 넘어 사료나 연구경향 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키워드 도출을 통해 가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네트워크내 키워드들의 위상과 영향력 그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증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긴 하였지만, 본 연구가 제시한 분석의 프레임 자체는 양질의 후속연구를 태동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Since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ppeared as a hot topic at the Davos Forum in 2016, various academic fields have been in a hurry to respond to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Interest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is also increasing in the humanities field including history, but it is thought that the response to this is still sluggish.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a link between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nd history, and more specifically, how to incorporate big data techniques into the field of history, especially ancient Korean history
In fact, historical science has the longest character of data science in that it uses vast historical sources for research.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it will not be easy to find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big data seeking correlation and history studies aiming to investigate causality.
However, this view overestimated the status of big data, and it was thought that if big data was used only as a tool for conducting historical research, historical research could be carried out more efficiently.
This study performed big data-based text network analysis to combine such big data with research on ancient Korean history.
The research trend of Korean ancient history, which spans about 75 years from independence to the 2010s, is largely divided into 7 periods, and attemped text mining and social network analysis. The results of analysis based on big data were compared with the results of previous discussions on the research trend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fact, if the research on ancient history, which requires close and careful consideration of historical sources, is analyzed only quantitatively, it can be seen as a risk of distorting the historical truth.
However, the big data-based research went beyond such a simple quantitative approach to construct a virtual network by deriving keywords for historical sources or research trend papers to understand the status and influence of keywords in the network and their relationship to each other.
Although some limitations have been exposed during the demonstration process, the frame itself of the analysis presented by this study is expected to function fully as a link to initiate quality follow-up studies of good quality.
(Korea Credit Guarantee Fund / hora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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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고승비 음기의 문도 검토 -경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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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 고승의 문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고자 고승비 음기를 살폈다. 선봉사대각국사비 음기, 운문사원응국사비 음기, 중수용문사기 음기, 인각사보각국존비 음기 등 4 사례의 문도 직명을 살펴본 결과, 다양한 직명의 문도를 확인하였고, 크게 법손[사법제자, 부법제덕], 집사제자, 세속제자[수법유경사대부] 등의 부류가 있었다.
다양한 직명의 유래를 추적한 바, 고승의 강회, 담선 활동 및 승정제도, 승록사, 결사 등과 연관하여 그 고승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문도 중에서도 법손주지가 수법제자의 학풍을 유지하면서 문도 형성에서 중심이었다. 집사제자 문도 형성은 고승의 승정 관여와 연관되었다. 승정제도가 성립된 靖宗代를 기점으로 이러한 문도의 분열 이동이 많아지면서 사원 소속이 명시되는 등 종파분쟁의 조짐도 보였다. 승단이 확장되면서 결사 운동과 관련하여 세속제자도 문도로 기재되었다.


To understand the association of master monks` students this thesis studies their back-epitaph in Goryeo. By exploring the students` official names there were many kinds which were dharma-son, manager-pupil, general student.
With chasing the origin of the status names the disciples were related to high monks` activities and Buddhist institutions and associations. Among the followers the dharma-son chief was the dharma-keeping disciple and core-student. Manager-pupils were combined with the masters` intervention of Buddhist administration. After Jeongjong(靖宗) who constructed the priest administration the followers divided and sect-conflicts showed. Enlarging sect-group secular persons were registered on the learning disciples with the relation of association movemen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hkm@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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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 의종대 왕제(王弟) 대녕후(大寧侯) 사건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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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寧侯 사건은 의종대 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차자인 대령후를 지지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의종은 이러한 관계로 태자 시절부터 대령후와 왕위 계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의종은 인종의 지지와 정습명의 보좌로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즉위 초부터 정안 임씨와 대령후를 견제하였다. 대령후의 견제는 즉위 초인 동왕 5년부터 재위 후반기인 동왕 21년 '流矢의 變'으로 이어졌다.
의종의 측근인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와 그 족당인 정서·최유청·임극정·이작승 등을 참소하여 유배와 좌천시켰다. 이어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의 세력 기반을 점차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의종은 다른 동모제인 익양후(명종)와 평량후(신종)도 의심하였다. 그만큼 王弟는 의종대 국정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The Post Incident Daelyeonghu had a significant impact on Uijongdae a political phase. The mother of Uijong Gong-yetaehu, wanted to establish her second, Daelyeonghu, as the Prince. For this reason, Uijong completed with the Daelyeonghu to succeed to throne since the day of Prince.
However, he ascended the throne with the support of the race and the throne of Jeong-seubmyeong. Therefore, Uijong checked the Empress Gong-yetaehu and Daelyeonghu from the beginning of the throne.
In Particular, the Daelyeonghu Post was checked, from the Dongwang 5th year of the King' crown to the second half of his reign, 'yusiui byeon' the Dongwang 21st year of King's regin. Uijong' side poles Jeong-ham and Kim Jonjoong destroy the foundations of power after the Daelyeonghu by driving exile and relegstion by driving Jeong-seo· Choi Yoo- chong· Im Geuk- jeong, the family members of the Daelyeonghu, as a counterfeit.
Uijong's check against Daelyeonghu is because the other monarchs, IK Yang- hu and Pyeong nyang- hu, approached as threats to the Kingship.
Furthermore, these royal trends acted was the Jeongbyeon of Gyeongin-nyeon. served as an important variabl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jangs20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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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읍지(邑誌)와 방목(榜目), 호적(戶籍)을 통해 본 대구 출신 급제자들

저자 : 한상우 ( Han¸ Sa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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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구에서는 몇 명의 문과급제자들이 배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이후 편찬된 대구의 邑誌, 市史, 榜目과 대구부호적대장 등을 활용하여 대구 출신 급제자들을 확인하였다. 읍지와 시사, 방목을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대구 출신 급제자들은 총 79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료들마다 급제자들의 명단과 정보가 상이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대구에 거주한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1681년부터 1876년까지에 걸쳐 남아 있는 대구의 호적에서 17세기 후반 이후의 급제자들과 그 가족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읍지와 방목 속 대구 급제자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로 대구에 거주했더라도 읍지에서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즉, 대구 출신 급제자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실제 대구 거주 여부뿐 아니라 다면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 급제자 확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잦은 이주였다.


This study finds the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civil exam who resided in Taegu during the Chosŏn Dynasty. The information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of Taegu was collected from gazetteers published in 1768, 1832, 1924, 1995 Taegu and the rosters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As a result, this study makes the list of 79 successful candidates of Taegu. However, it is interesting that records and lists of the successful candidates in each source are different. This study traces the successful candidates in the Taegu household registers published from 1681 to 1876 to check their residence in Taegu and finds that gazetteers recorded the successful candidates selectively. One reason for the selective record is the frequent migration of successful candidates. The migration cases of the Sunch'ŏn Pak family, the most successful family in the civil exam in Taegu, show us that even successful candidates were apt to leave their hometown due to their political attitude and reputation in local society. This is why difficult to ascertain how many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civil exam Taegu produced for 500 years.
(Dept. of History, Ajou University, hansw@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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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전반 호패법 시행 과정 연구

저자 : 설현지 ( Seol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1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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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 전반의 변화를 논의하였다. 본고에서는 광해군대와 인조대 호패법의 논의와 시행, 중단 과정을 살폈다.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였다. 이는 전쟁으로 유실된 백성들의 거주지와 국역을 다시 정해주고, 국가의 개별적 백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었다. 호패법은 조선 초부터 시행하고자 한 법이었지만, 置廢를 반복하다가 숙종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호패법은 고려말기에 도입된 제도로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호패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인조대까지 이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호패법은 중단되었지만, 인조대 호패법 시행으로 정해진 각종 규칙들은 『호패사목』으로 남아서 숙종대 호패법 시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선조대 후반부터 인조대까지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그 사이에 일어난 다양한 논의를 살핀 후, 『호패사목』을 통해서 호패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호패법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법이었기에,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호패법으로 인해 새롭게 군역의 의무가 생겼기 때문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도 敎生考講에 탈락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지만,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서는 호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부 백성과 유생들의 반발에도 호패법은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호패법의 시행을 위해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호패사목』이다. 『호패사목』의 내용은 오가작통법, 단자식, 운영 규정과 특수민의 호패에 관한 것들이다. 단자식을 봤을 때 조선 정부는 관료-관료 예비군-군역 대상자로 분류해 백성들을 파악했음을 확인하였다. 『호패사목』을 통해 조선 정부가 호패법으로 군역을 보충하고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임진왜란 후 무너진 국가 질서와 세금 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시행하고자 한 제도였다.


Joseon society faced a major change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壬辰倭亂). Joseon discussed changes in the overall system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This article wanted to examine the discussion, implementation, and suspension of Hopae in the Gwanghaegun and King In-jo. The Hopae Act was a law that required all men over the age of 16 to wear HoPae. This law was designed to reestablish the residence of the people lost in the war and strengthen the individual rule of the nation. The HoPae Act was intended to be implemen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was completely established in King Suk-jong after repeating the period of persecution.
The HoPae Act was introduced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and was repeatedly implemented and abolished. Discussions on the Hopae law continu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continued until the reign of King In-jo. Although the HoPae Act was discontinued after First Manchu Invasion in 1627(丁卯胡亂), various rules about Hopae established by the King Injo. Ho-Pae Act remained as "Ho-Pae-Sa-mok"(號牌事目) and greatly influenced the implementation of the Ho-Pae Act of King Sukjong. In the main article, the Ho-Pae Act was implemented through the "Hopae Samok" after examining the implementation and suspension of the Ho-Pae Act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to King Injo and various discussions that took place in the Ho-Pae Act was implemented.
The Ho-Pae Act was the easiest law to identify the people individually, so the government actively tried to implement the Ho-Pae Act. However, the Ho-Pae Act led to the resistance of the people who were newly obliged to serve in the military.
"Hopae Samok" is a historical material containing regulations on the enforcement of the King Injo's Hopae Act. The contents are about organizing five houses(五家作統), terminal types, operating regulations and special class. Based on the official formula, it was confirmed that the Joseon government identified the people by classifying them as bureaucrats, candidates of bureaucratcy, and military personnel. The "Hopae Samok" shows that the Joseon government wanted to supplement its military service with the Hopae Act and identify the people individually. The Ho-Pae Act was intended to restore the state order and tax system that collaps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shj56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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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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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purpose and the negotiation activities in Hanyang of Qing Dynasty's Envoys dispatched to Jose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Qing Dynasty's Sahaeng(使行) toward Joseon was investigat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requested an end to the Qing's request for conscription through Sahaeng(使行) in April and September 1637. In October 1637, the Qing dispatched an envoy to Joseon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ithout Joseon's resquest, and the Qing dynasty's envoys negotiated with Joseon focusing o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Naturalized jurchen(向化人), Chinese(漢人), Joseon people who captured by the Qing tried to come back Joseon(走回人). The issue of repatriation was an important negotiation issue even in later Sahaeng(使行) toward Joseon. It can be said tha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most urgent task of Joseon was the resolution of the issue of conscription. However, what the Qing dynasty considered important was the maintenance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a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Besides exemption from conscription, Joseon's other concern is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In September 1637, Joseon requested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 but was rejected by the Qing Dynasty. In February 1639, an envoy was sent with a request for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crown prince, and it was also expected that the crown prince could return to Joseo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After that, Injo's illness also made it a reason to request the crown prince to return to Joseon. However, from Qing's point of view,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the crown prince was a procedure that could settle a hierarchical relationship of Joseon and Qing Dynast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Qing Dynasty mentioned the installation of Crown Prince before Joseon's request.
In November 1639, the Qing dynasty's envoy who came for the monument of Samjeondo(삼전도비) stayed in Hanyang until December 5 and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ll work was completed on December 8th. From the Qing point of view, the monument of Samjeondo was regarded as a symbolic space for the success of the Manchus and the victory of the war to Joseon. From the point of view of Joseon, it was the result of the defeat and a symbol of obedience to the Qi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the Qing dynasty dispatched a envoy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discussed the standard of treatment for the Qing dynasty's envoy. At first, it was intended to use the rules of treatment for Tangcha(唐差), but it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reatment for Ming dynasty's envoys(明使).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this time seemed to be satisfied with the reception of Joseon. In October 1637, the reception to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as the first step in making the reception of Qing dynasty's envoys regular.
In September 1639, the reception for Qing dynasty's envoy who is named Mandaerhan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previous treatment for Qing dynasty's envoys. It was because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差官) who came to visit King Injo. Joseon viewed Mandaerhan 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who came under the emperor's orders, but the lowest level department(접대소) was installed to entertain Mandaerhan. This is different from the case of the reception for officials who were temporarily dispatched and served the Ming emperor's orders. It can be said that this was influenced by the the reception for Jin dynasty's envoys, and the antipathy towards Qing was reflected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 of Mandaerhan in September 1639 and Maputa in November 1639 is another point worth noting. King Injo did not go out for greeting the two envoys. In September,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so there was no need for Injo to greet according to the ceremoni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a precedent that Injo did not greet envoy on the excuse of his illness from November 1639. Afterwards, Joseon recorded cases in which the king did not greet envoy and made it a custom.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lixiaoqing03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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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저자 : 이재현 ( Lee Jae-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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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This study identifies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The period ranges from the time of King Yeongjo's accession to the throne to around the time of Sinyu Daehun. The regional range was centered on Andong and around Andong such as Yean, Yeungyang and Yeunghae. The regional range is in line with the extent to which key figures reside within the Lee Hyeon-il's followers.
King Yeongjo promoted Tangpyeong policy(蕩平策) after his ascension, and many political events took place, including the Eulsa Regime Change in 1725(乙巳換局), Jeongmi Regime Change in 1727(丁未換局), Musin Revolt(戊申亂), Kiyucheobun(己酉處分), Sibguhagyo(十九下敎), Hondongaebyeok(混沌開闢), Gyeongsincheobun(庚申處分), until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led Tangpyeong regime. However, in the case of Namin group of Yeongnam, he failed to recover after Gabsul Regime Change in 1694(甲戌換局), and thus had little rol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Furthermore, relevant to Musin Revolt put the entire region at risk of being defined as "Rebellion." In general, it was understood that the political cause of Namin group of Yeongnamwas completely destroyed due to Musin Revolt.
However, Namin group of Yeongnam centered on Andong was appointed because of King Yeongjo's consideration after Musin Revolt. Kim Seong-tak was a representative figure. However, Namin in Andong were intertwined with Lee Hyun-il's followers at that time. If Lee Hyun-il is not innocent, They were always likely to be branded as 'the remnants of the year of Gisa'. In 1737, Kim Sung-tak's banishment due to Yeongjo's anger while explaining Lee Hyun-il shows the weak political foundation of Namin in Andong.
Due to the ripple of the Kim Seong-tak's banishment, there was confrontation between Namin and Noron over the construction of Hagdong Seowon in Andong. Noron, who had a weak power in Andong, push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under the support of the government office, but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was thwarted by Namin's physical force. King Yeongjo gave relatively lenient treatment to Namin in this case.
King Yeongjo's attitude showed King Yeongjo's intention to reign as 'Master King(君師)' on the party platform. However, despite King Yeongjo's intentions and consideration,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began to stagnate in the 1740s, which meant that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group of Yeongnam had stagnated.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orpsel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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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기철의 통일운동 역정과 생애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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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195,60년대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김기철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우익계열 단체를 통해 정치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나, 북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46년 3월 월남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 민족자주연맹에 몸담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기철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출마 때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 조봉암과 서상일이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혁신정당을 창당할 때 김기철은 창당 추진을 위한 핵심인물로 활약했고,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 후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58년 진보당사건 당시 검찰이 진보당의 이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고, 당국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으로 진보당 관계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일시 정치 사회운동의 장을 떠났던 김기철은 4월혁명으로 혁신계의 활동공간과 기회가 확보되자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세력의 이합집산 와중에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통일사회당을 거치면서 역시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 그가 구상했던 통일안을 좀 더 구체화한 중립화통일방안을 내세워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실시한 혁명재판에서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기철은 1963년 3공화국 출범 뒤 단행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한 후에도 당 내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거의 전 생애를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하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김기철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적 사회건설이었다.


This study set out to discuss Kim Gi-cheol that devoted his entire life to the unification movement as an active member of reformist parties such as the Progressive Party and the Socialist Party for the National Unification in the 1950s and 1960s. He began his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in a right-wing organization in his hometown of Hamheung, Hamgyeongnam Province right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and defected to South Korea in March, 1946 to avoid the suppression of the North Korean regime. Since then, he engaged in activities to set up a unified government in the Left-Right Coalition Committee and the National Independence Federation and participated in the South-North Joint Conference in 1948 in the process.
In 1952 in the middle of the Korean War, he joined the election polling committee formed to support Cho Pong-am that ran for a presidential election, forming his relations with Cho in full scale. When Cho and Seo Sang-il formed a reformist party in conjunction with reformist figures in 1955, he played an essential role to push the party forward and lavished his financial supports on it. After the formation of the Progressive Party, he devised his own unification plan that placed importance on international solutions for the issues of North and South Korea as the president of the Research Institute for Unification Issues. His plan was, however, used as a material to prove that the Progressive Party worked to benefit the nation's enemy by the prosecutors in the Progressive Party incident of 1958 and then as a pretext to cancel the registration of the Progressive Party by the authorities.
Individuals involved in the Progressive Party scattered around after Cho's death penalty, and Kim left the field of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temporarily. Once the progressive forces secured spaces and opportunities for their activities after the April Revolution, he resumed his political activities. As the progressive forces repeated the process of meeting and parting, his active involvement focused on unification issues in the Socialist Mass Party(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party) and the Socialist Party for the National Unification. He also voiced his opinions with his neutralization-based unification plan that was a further detailed version of his old unification plan at various venues of public debates.
Kim received a prison sentence for his involvement in the "Central Unification Socialist Party Incident" at the revolutionary trial by the military regime after the May 16 military coup. After serving his sentence, he was released with a special pardon by the Third Republic founded in 1963. He then joined the New Democratic Party in 1971 and was put in charge of unification issues. Devoting almost his entire life to the issues of divided Korea and its unification after its liberation through his inquiry, research, and activity efforts, Kim Gi-cheol was oriented toward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establishment of a democratic society.
(Kyungpook Natioanl University /zadoo9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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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진(天津) 죄범습예소(罪犯習藝所)의 건설과 '근대' 감옥의 탄생

저자 : 조병식 ( Cho¸ Byung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7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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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光緖30년(1904)에 건설된 중국 최초의 신식 감옥인 天津罪犯習藝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죄범습예소를 전통 감옥에서 근대 감옥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천진의 경우 '근대' 감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감옥학자였던 오가와 시게지로오(小河滋次郞)의 고대/'근대' 감옥을 판별하는 3가지 기준을 차용하였다. 첫 번째 기준인 수감 대상에 있어서 천진 죄범습예소 건립 당초 기결수와 부랑자들을 함께 수감하였는데, 성격이 상이한 집단을 한 공간에 수감한다는 점에서 전통 감옥의 雜居와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光緖32년(1906) 遊民習藝所가 설립되어 부랑자 수용 시설이 별도로 마련되면서 죄범습예소는 기결수만을 감금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번째 기준인 감옥의 목적과 관련해서 천진죄범습예소는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통 감옥의 목적에서 탈피하고 수감자의 갱생과 출소 후의 생계 도모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생과 방범에 중점을 둔 감옥 건축물이 건조되었고, 직무에 따라 관리 인원의 직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죄범습예소 내 총 6곳의 공장을 설립하여 수감자들이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기준인 경비 조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州縣에 할당한 수감자 비용은 죄범습예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비용이었지만 연체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죄범습예소에서는 수감자들의 역량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추진하였다. 죄범습예소의 공장화에 대한 直隷總督 袁世凱의 경고가 있었으나 죄범습예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천진 죄범습예소는 오가와 시게지로오의 3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를 충족하였다. 그리고 경비 조달의 문제는 천진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근대' 감옥을 표방하여 설립된 模範監獄 또한 동일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진 죄범습예소는 '근대' 감옥으로의 과도 기적 존재라기보다는 '근대' 감옥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analyzes and investigates the character of the Tianjin Criminal Workhouse(TCW), the first new style prison in China built in 1904. Previous studies considered the Criminal Workhouse as a transitional institution from a traditional prison to a modern prison, but in the case of Tianjin, it had the characters of a “modern” prison. To prove this point, this article borrowed three criteria for distinguishing traditional/modern prisons by Ogawa Shigejiro who was a prominent penologist at that time. The first criterion is who was detained. At the outset of the TCW, the convicted and the vagrant were imprisoned together. It was similar to the characteristic of traditional prison in that groups of different features were detained in one space. However, the Vagrant Workhouse, which accommodated only the vagrant, was established in 1906, and the TCW became a space where only the convicted were confined. The second criterion is the purpose of the prison. The TCW sought to break away from traditional prisons pursuing “retaliation for crimes” and to rehabilitate the convicted and prepare their livelihood after their release. To this end, new buildings were built with an emphasis on hygiene and crime prevention, and the positions were subdivided according to the roles of personnel. Furthermore, six factories were operated in the TCW so that inmates could learn handicraft. However, the financial problem, which is the third criterion, was not solved. In particular, the detention costs which were essential for the operation of the TCW and allocated to each counties were often unpaid. For this reason, the TCW used the inmates' abilities to actively promote the production and sale of goods. Even though Yuan Shikai, the Zhili Governor-General, warned that the TCW would be transformed into a factory, but it was an avoidable choice for the stable operation of the TCW. In short, the TCW met two of the three criteria of Ogawa Shigejiro. The cost shortage was that the TCW could not be solved alone, and the Model Prison established under the guise of a “modern” prison also faced the same problem. Therefore, the TCW was a starting point for “modern” prison, rather than a transitional institution for “modern” prison.
(Seoul National University/ pumkpie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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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고대 성곽 공방전에 관한 군사 공학적 전략론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1-4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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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프론티누스와 베게티우스의 글을 군사 공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프론티누스는 군지휘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이 있으므로, 베게티우스는 고위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이들의 글이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성곽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전략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비교, 분석했다.
프론티누스의 글은 적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공성전 중에서도 포위전에 관한 전략을 상세히 서술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포위전은 아군에게도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아군에게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고, 적을 경계해야 하는 심리적인 긴장도 상당하다. 또 그가 활동하던 1세기에 로마군은 포위전만 한 것이 없고, 공격전 위주로 전쟁했다. 따라서 프론티누스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지휘관이어서 실질적인 전략을 서술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의 글은 당대의 전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베게티우스의 글에는 공격적인 전략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 있다. 4세기의 전투 사례들을 볼 때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하든 공격전을 펼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공격전을 강조한 당시의 상황이 베게티우스의 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의 수성전 전략도 전략의 현실성과 유익성 면에서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빈도를 볼 때 그의 수성전 전략은 그렇게 활용 가치가 높은 전략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게티우스 글의 유익성은 로마군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공격전에서 두드러진다.


This study analyzed the writings of Frontinus and Vegetius from the perspective of military engineering. Since Frontinus has practical experience as a military commander, and Vegetius has experience as a high-ranking administrator, their writings are said to have influenced future generations. Focusing on the battle for the castle that they commonly discuss, the strategies they claim and the strategies used in actual battles were compared and analyzed.
Most of Frontinus's writings were about siege warfare attacking the enemy. During the siege, he detailed the strategy for the encirclement warfare. From a strategic point of view, the siege was a difficult combat method for the Roman army. Establishing a encirclement imposes considerable physical labor on the Romans, and there is also considerable psychological tension to guard against the enemy. Also, in the first century when Frontinus was active, the Roman army fought mainly in attack. Therefore, the evaluation that Frontinus was a military commander with combat experience and described a practical strategy is wrong. It can be seen that his writings did not reflect the battle situation of the time at all.
Vegetius' writing has a lot of information about offensive strategies. In the case of battles in the 4th century, most of the battles were offensive, whether attacking after establishing a encirclement or immediately. This means that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emphasizing offensive warfare was reflected in Vegetius's writings.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his strategy of a castle defense battle was valid in terms of the practicality and profitability of the strategy. However, when looking at the frequency of actual battles, his strategy was not so valuable to use. The usefulness of the Vegetius writings stands out in the most frequent strikes of the Romans.
(Keimyung University / jejs@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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