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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SULSA (The Art History Journal)

  •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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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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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8)~57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666
강좌 미술사
57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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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흥천사(興天寺) 불교 건축의 성격

저자 : 문명대 ( Moon Myung-da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30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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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의 건축성격은 황화방 흥천사와 성북사을한 새 흥천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황화방 흥천사의 건축의 성격은 사찰의 사상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대웅전과 이 보다 더 중요시된 사리전이 잘 알려주고 있다. 바로 석가불과 석가불사리 신앙을 실천하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조계종과 선종의 도회소로써 선종 수행인 참선을 행하던 승당 이른바 참선당도 흥천사의 가장 중요한 건축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북 사을한 새 흥천사(신흥사=흥천사)의 건축적 성격은 황화방 흥천사의 사상과 제도를 계승했기 때문에 주불전이 석가불을 봉안한 대웅전이었다고 판단된다.
이 대웅전은 1855년 극락보전으로 개명되면서 건축의 성격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황화방=흥천사가 조계종과 선종의 종찰이었으므로 이를 계승한 사을한 새 흥천사도 선종의 성격을 당연히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종의 참선 수행을 행하는 공간인 승당은 H형 대방이 그 역할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방의 참선 수행공간은 1855년 이후에는 염불수행도 함께 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판단된다.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Heungcheon-sa temple are examined by dividing it into Hwanghabang Heungcheon-sa temple and Seongbuksaeulhan Sae Heungcheon-sa temple.
The architectural character of Hwanghabang Heungcheon-sa temple is well illustrated by the Main Buddha Hall, which shows the ideological character of the temple, and the sarira hall, which is more important than this. It could be revealed that the Shakyamuni Buddha and the character of space of practicing the Shakyamuni Buddha sarira faith were well represented. Also, as the Dohoeso (total headquarters) of Jogye sect and Zen sect, the monk chamber, the so-called Chamseondang, where Zen Meditation, the Zen sect discipline, was practiced, was also the most important architectural space of Heungcheon-sa temple.
Because the architectural character of Seokbuk Saeulhan Sae Heungcheon-sa temple (Shinheung-sa temple=Heungcheon-sa temple) inherited the ideas and systems of Hwanghabang Heungcheon-sa temple, it is believed that the main Buddha statue was the Main Buddha Hall where Shakyamuni Buddha was enshrined.
As this Main Buddha Hall was renamed Geungnakbojeon in 1855, it can be said that the nature of the architecture also changed. As Hwanghabang=Heungcheon-sa temple was a subordinate temple of Jogye sect and Zen sect, Saeulhan Sae Heungcheon-sa temple, which succeeded it, must have naturally inherited the character of Zen sect.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H-type Daebang succeeded the role of the monk chamber, a space where Zen sect's Zen Meditation discipline was practiced. However, it is judged that Daebang's Zen Meditation discipline space was used as a space for invocatory disciplines after 1855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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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흥천사 극락보전의 재건역(再建役)과 장엄(莊嚴)에 관한 연구

저자 : 이강근 ( Lee Kang K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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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에는 대웅전 중창 이전 두 시기에 걸쳐 각기 다른 법당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2016년 극락보전을 수리할 때 나온 3건의 지본 상량문으로 확인되었다. 현 흥천사(興天寺) 극락보전(極樂寶殿)은 1853년(철종 4) 3월에 완공되었는데, 1854년 4월에 단청을 하고 나서 적은 상량문에는 '신흥사대웅전(新興寺大雄殿)'이라고 적혀 있다. 또 1885년(고종 22)에 건물 내부를 중수할 때에는 '흥천사 극락보전'으로 기록하였다. 신흥사가 흥천사로 바뀐 때는 1865년(고종 2), '대웅전'이 '극락보전'으로 바뀐 때는 아미타불회도를 봉안한 1867년인 듯하다. 그런데 사명(寺名)과 전호(殿號)는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혼용되었다.
현재 극락보전 내부에는 1867년에 조성된 불단에 삼존상, 후불벽에 아미타불회도, 좌우 측벽과 불단 우측 뒷벽에 여러 불화들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우협시보살상은 사중에 전래되어 온 것이나, 본존상과 좌협시보살상은 다른 사찰에서 옮겨온 것이다. 후불벽에 봉안된 아미타불회도와 좌우 측벽과 불단 향우측벽에 봉안된 여러 불화들은 대방을 중창한 지 2년 뒤인 1867년(고종 4)에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다. 천개는 1900년에 단청을 중수할 때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현재 극락보전의 내외 장엄, 구조와 장식, 형식과 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만한 계기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불전 건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50년 가까이 진행된 불사를 거치면서 크게 중흥된 흥천사에는 지금도 놀라울 만큼 많은 기록물들이 문서와 현판의 형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직 완벽하게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다.


The fact that different Buddhist Main Halls were built in Heungcheonsa Monastery over two periods before the reconstruction of Daeungjeon Hall was confirmed by three Sangryangmun made of paper that came out when Geungnakbojeon Hall was repaired in 2016. The current Heungcheonsa Geungnakbojeon Hall was completed in March 1853 (King the 4th year of Cheoljong's reign), and the Sangryangmun, which was written after painting dancheong in April 1854, reads "Shinheungsa Daeungjeon." In addition, when the interior of the building was remodeled in 1885 (the 22nd year of King Gojong's reign), it was recorded as Heungcheonsa Geungnakbojeon. Sinheungsa was changed to Heungcheonsa in 1865, and Daeungjeon was changed to Geungnakbojeon in 1867, when the Amitābha Buddhist Painting was enshrined. However, even after the name of the temple and the name of main Buddhist Hall were changed, they were continuously used interchangeably.
Currently, the inside of Geungnakbojeon Hall is almost filled with Main Buddha statue of the altar, Amitābha Buddhist Painting on the back wall and various Buddhist paintings on the left and right sidewalls. Among them, the statue of Right Attendant Bodhisattva was handed down to this monastery, but the statue of Main Buddha Statue and the statue of Left Attendant Bodhisattva were moved from other temples. The Amitābha Buddhist Painting enshrined on the back wall and various Buddhist paintings enshrined on the left and right sidewalls and on the right sidewalls of the altar were painted and enshrined in 1867 (the 4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two years after the construction of Daebang. The Canopy was newly built when Dancheong was repainted in 1900.
Currently, it is judged that there was no opportunity for major changes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tructure and decoration, form and style. Therefore, the Geungnakbojeon Hall of Heungcheonsa Monastery is a representative Buddhist monasyery building in the mid-19th century. Heungcheonsa Monastery, which was greatly revived after nearly 50 years of Buddhist reconstruction in the late 19th century, still has surprisingly many records in the form of documents and signboards. However, there are still record data that have not been fully investig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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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흥천사 명부전의 특징과 의미

저자 : 손신영 ( Sohn Shinyoung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5-8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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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명부전은 1855년 시왕전으로 창건되었으나 1894년 중건 당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은 당대 최고 권력자 김좌근의 애첩 나주 양씨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 중건공사에는 150여 명이 시주하였는데, 시주물목에 건축부재가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건축장인은 중건기록에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니편수 마백룡이 1902년의 경운궁 중화전 중건과 1904~1907년의 경운궁 중건에 개와편수로 참여한 바를 확인하였다.
19세기 중반기 이후로는 경복궁 중건공사를 비롯한 각종 관영 공사가 이어져 수많은 장인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관영 공사 종료 이후, 건축유형을 가리지 않고 공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활동 양상은 건축형식에 영향을 미쳐, 흥천사 명부전을 비롯한 19세기 근기지역에 조성된 불전들에 궁궐건축 요소가 등장케 하였다.
흥천사명부전에서는 궁궐과 관아 등에서 주로 보이던 새부리 형태의 익공형식이 결구 된 것을 비롯하여, 다듬은초석·낙양각·교창·운궁형첨차·지붕의 취두 등이 궁궐건축적 요소이다. 이밖에 정면의 모든 기둥에 용두가 결구되고, 배면 운공의 봉두·낙양각 아랫부분의 용두·주칠 바탕에 금색으로 세로로 글자가 쓰여진 편액·편액의 봉에 용두조각이 있는 점 등은 흥천사명부전만의 특징이다.
1894년 흥천사명부전 중건은 왕실원찰로서 창건 당시의 위상을 되찾은 흥천사의 정체성을 다시 천명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건축적으로는 당시 부불전의 보편적 요소에 궁궐건축 조형요소가 다수 채택된 불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Myeongbujeon of Heungcheonsa was built as Siwangjeon in 1855, but it appears to have been renamed when it was rebuilt in 1894. It assumes that it was founded by Ms.Yang, the concubine of Kim Jwa-geun, the most powerful man at the time. In 1894, about 150 people contributed, and it is noteworthy that construction materials were included in the donation list. The architectural artisans were not mentioned in the first construction records, but they were specifically listed in the reconstruction records. Among them, it was confirmed that Nipyeonsu, Ma Baek-ryong participated in the reconstruction of Junghwajeon of Gyeongungung Palace in 1902 and the reconstruction of Gyeongungung Palace in 1904-1907 as Gaewapyeonsu.
Since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various state-run construction projects including Gyeongbokgung Palace had been carried out, and numerous artisans had participated. After the completion of the state-run construction, they appeared to have participated in any types of construction. This influenced the architectural style at that time. Palace architectural elements were adopted in Buddhist architecture including Myeongbujeon of Heungcheonsa which were built in Seoul and Gyeonggi areas in the nineteenth century
Myeongbujeon of Heungcheonsa has the palace architectural elements. They are the bird's beak-shaped Ik-kong style which was mainly used in architectures of palaces and government offices, trimmed cornerstones, Nag-yang, Gyochang, Ungung-shaped Cheomcha, and Chwidu on the roof. In addition, Yongdu is attached to all the pillars in the front. Bongdu of the Ungong on the back, Yongdu of the lower part of Nag-yang, Pyeonaek with vertical letters written in gold on the main lacquer background, and the fact that there is a dragon sculpture on Bong are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Heungcheonsa Myeongbujeon.
The reconstruction of Myeongbujeon, Heungcheonsa in 1894 could be regarded to reaffirm the identity of Heungcheonsa, and regained its status as the temple supported by the royal family at the time of its foundation. Architecturally, it is meaningful in that it is the Buddhist temple which has many elements of palace architecture as well as the universal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Buddhist temple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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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흥천사 대방(大房)의 건축적 특징

저자 : 이혜원 ( Yi Hyewo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2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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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興天寺)는 원래 1397년(태조 6)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원찰로 지금의 덕수궁 자리인 황화방에 세워졌다. 조선후기에 신덕왕후의 추봉과 더불어 다시 지금의 자리에 중창되었고, 19세기 왕실의 지원으로 여러 전각의 중수와 불사를 통해 그 면모가 일신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발원으로 대방건물이 중건되었는데, 기존의 건물을 확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건축은 예불의 형태, 사찰의 경제적 지원자와 관련하여 서울·경기지역 사찰에서 보여지는 특수한 형태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점차 하나의 건물에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는 경향이 궁궐과 주택에서 나타나며 사찰건축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대방이다.
불교건축에서 '대방'은 대중방(大衆房)의 의미로 사찰 내에서 승려들이 한데 모여 좌선, 설법, 식사 등을 할 수 있는 규모가 큰 건물을 지칭한다. 기존의 조선 후기 4동 중정형 사찰에서는 누각이 자리하던 곳에 대형 온돌방과 누각과 부엌 등이 부속된 독특한 건축이다. 19~20세기 초라는 시간적 범위와 서울·경기지역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방은 여기서 더욱 특화된 고유성을 지닌다.
흥천사의 대방은 이처럼 19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조와 건축양식, 사찰 내의 입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특징은 첫째, 대방은 본 불전인 극락보전의 전면에 놓이며, 대방의 건물이 사찰의 정면성을 갖도록 구성되었다.
둘째, 하나의 건물에 각각 성격이 다른 공간이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긴밀히 동선이 연결되도록 구성되었다.
셋째, 목구조의 간결성이다. 지붕에서 꺽음부가 네 군데 있어 지붕구조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몸채의 중앙은 넓은 통칸의 실로 되어 있으며 바닥구조가 마루가 아닌 온돌이다.
넷째, 건물 구성요소에 표현되는 위계성이 점차 무너지고 건축주가 원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부가하는 경향이 보인다.
다섯째, 지붕의 회첨부에서 중부지역의 특징인 회첨추녀를 설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처마를 구성하였다.
대방은 조선시대 말 염불성행과 접대공간의 필요성에 따라 사찰의 여러 기능을 통합 수용함으로써 경제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근대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불교건축의 건물 유형이다. 흥천사 대방은 이러한 기능적인 특성에 잘 부합되도록 공간을 구성했으며, 건물의 구조와 장식에 있어서 19세기라는 시대성을 반영하는 사례이다.


Heungcheonsa was originally built in 1397 (the 6th year of King Taejo's reign) in Hwanghwabang, the site of Deoksugung Palace, as a temple of Jeongneung Royal Tomb, the tomb of Queen Sindeok.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was rebuilt in its current location along with Queen Sindeok's Chubong, and with the support of the royal family in the 19th century, its appearance was renewed through the reconstruction and Buddhist service of various halls. Daebang Building was rebuilt in 1865 with the origin of Heungseon Daewongun, and it is presumed that the existing building was expanded.
Daebang Architecture is a special form in temples in Seoul and Gyeonggi-do in relation to the form of worship and economic supporters of temples. Since the mid-19th century, the tendency to gradually accommodate various functions in one building has emerged in palaces and houses, and this trend can be seen in temple architecture.
In Buddhist architecture, "Daebang" means a large-scale building where monks can gather together in a temple to perform seated lines, sermon, and meals, etc. A temple with a yard surrounded by build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a unique architecture with large ondol rooms, pavilions, and kitchens attached to the place where the pavilion was located. The temporal range of the 19th to early 20th centuries and the Daebang, which can be seen in limited areas such as Seoul and Gyeonggi areas, have a more specialized uniqueness here.
The Daebang of Heungcheonsa i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typical floor plan structure, architectural style, and location in the temple newly emerging in the 19th century.
First, Daebang is placed in front of Geungnakbojeon Hall, the main Buddhist temple, and Daebang's building is configured to have the frontality of the temple.
Second, spaces with different personalities in one building were configured to be closely connected while maintaining independence from each other.
Third, it is the brevity of the wooden structure. There are four bent parts on the roof, so the roof structure is bound to be complicated. The center of the body is made of a wide whole compartment thread, and the floor structure is not a floor, but an ondol.
Fourth, the hierarchicality expressed in the building components gradually collapses, and there is a tendency to intensively add colorful decorations to the place desired by the owner.
Fifth, eaves were built in a way that does not install Hoecheomchuyeo, a characteristic of the central region, in the roof valley.
Daebang is a building type of Buddhist architecture that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 era pursuing economic feasibility and rationality by integrating and accepting various functions of the temple according to the necessity of Buddhist worship and hospitality space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Heungcheonsa Daebang is an example of the 19th century in the structure and decoration of the building, and the space is constructed to fit these functional characteristic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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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흥천사(興天寺)와 행호(行乎)에 관한 연구

저자 : 문무왕 ( Mun Mu-wang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14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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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의 역사에 관한 부분은 앞서 선행연구를 통해 살펴보았었다. 흥천사는 왕립사찰로 창건되어 조선 시대 불교 전반기의 중요한 사찰로 자리 잡았다. 그 속에는 조선 전기 불교계의 흐름과 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흥천사의 역사에 등장하는 행호(行乎)는 이러한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고승이자. 역사적 문제점도 같이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왕실에 의해서 등용된 행호는 백련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행호의 행적을 흥천사를 통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행호가 흥천사의 주지직을 수행한 것은 1년에 불과하지만, 행호의 활동과 사상을 볼 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제도권 내에서 불교의 위상을 보존하고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여 불교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불교계의 견해를 정책에 반영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회복 · 유지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행호는 당시 불교계의 영수로서 흥천사에서의 활동 기간은 짧지만, 불교계를 이끄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흥천사가 수사찰로서의 역할을 한 것은 행호의 업적이다. 많은 반대에도 조선 불교계의 입장을 세운 점에서는 다시금 평가가 필요하다.


The history of Heungcheonsa temple has been examined through previous studies. Heungcheonsa temple was established as a royal temple and established as an important temple in Buddhism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period. It can be said that right here, there is the flow and thought of Buddhism in the Buddhism world in the first half period.
Haengho (行乎), who appears in the history of Heungcheonsa temple, is a priest of high virtue representing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period, and it can be said that he also has historical issues. Haengho, appointed by the royal family, is closely related to Baekryeonsa temple, and it is meaningful to examine Haengho's record of performances through Heungcheonsa temple.
Although Haengho carried out the office of temple head of Heungcheonsa temple for only one year, looking at Haengho's activities and thoughts, his influence can be said to be enormous.
He preserves the status of Buddhism within the national system and revitalizes the Buddhist denomination by defending the rights and interests of monks, whereas by reflecting the views of the Buddhist community in the policies, h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restoring/maintaining the tradition of Buddhism.
In this process, Haengho, as the head of the Buddhist world at the time, provided the driving force to lead the Buddhist world, although his period of activities at Heungcheonsa temple was short.
It is Haengho's achievement that Heungcheonsa temple served as the head temple. He needs to be evaluated again in that he has established the position of Joseon(朝鮮) Buddhism despite many objection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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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용인 화운사(華雲寺) 목조아미타불좌상 연구

저자 : 고승희 ( Koh Seung Hee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65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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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화운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불좌상에 대한 연구이다. 이 불상 복장물에는 여러 쪽으로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간기(刊記)가 기록된 다수의 『법화경』과 『화엄경』 등 시주자 명단 1매가 남아 있다. 비록 조성년도와 조각승, 조성이력 등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조성기는 없지만, 간기가 있는 경전 및 시주질이 남아 있어 조성년대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된다.
화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에 대하여 고찰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불복장물에 간기가 있는 4종의 경전과 시주자 명단이 발견되어 이 불상의 조성년대와 참여자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1628년(崇禎 元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밝힐 수 있어서 조선 후반기 초기의 불상으로 편년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둘째, 불상 밑바닥에 '西方佛'이라고 묵서되어 있어 정확한 불상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화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西方佛'과 목조약사불좌상 '東方佛'은 도상과 양식특징으로 보아 동일 시기에 동일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석가모니불상의 좌우 보처불상으로 조성한 삼세불상(三世佛像)일 가능성이 있어 불상조성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셋째, 17세기 초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비교분석하여 화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양식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특히 '현진' '무염' '수연' 유파가 조성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어 영향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조형특징 및 작풍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최고의 조각승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품격 있고 예술성이 뛰어난 불상임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조성시기를 1628년으로 편년해 보았다는데 연구 의의를 두고자 한다.


This study is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enshrined in Daeungjeon of Hwaunsa temple located in Yongin-si, Gyeonggi-do. Although the contents-kept-inside of this Buddha statue are separated in many ways, there are a number of Lotus Sutra, Avatamsaka Sutra, etc. with imprints recorded, and also, a donator list remains. Although there is no creation document that clearly shows creation year, sculptor monk, and creation record, etc, sutras with imprint and a list of donation remain, which is the basis for understanding the chronology.
In the results of examining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at Hwaunsa temple,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drawn.
First, four Sutras and a list of donators with imprints on the contents-kept-inside were discovered, allowing the chronology of the Buddha statues and some of the participants to be examined. In particular, it is possible to reveal the possibility that it was created in '1628 (崇禎元年)', and so the academic value is very high in that the chronicle can be set as Buddha statues in the early period of the late Joseon era.
Second, the ink inscription of 'western Buddha (西方佛)' is written at the bottom of the Buddha statues, so the exact theme of the Buddha statues can be seen. Therefore, according to the iconography and style features of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western Buddha (西方佛)' and the wooden seated Bhaisajyaguru statue 'eastern Buddha (東方佛)' in Hwaunsa temple, it can be seen that they were created at the same era by the same sculptor monk, a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y are the left and right attendant Bodhisattva statues of the Shakayamuni Buddha statue in the Three Worlds Buddha statues (三世佛像), which brings about an understanding of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Buddha statues.
Third, by comparing and analyzing the Buddha statues created in the early 17th century, it was possible to grasp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at Hwaunsa temple, and in particular, by peeping at the possibility of being created by the school of 'Hyeon-jin', 'Mu-yeom', and 'Su-yeon', it was possible to predict the influencing relationships.
The research significance is in that based on the formative art features and style of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at Hwaunsa temple, it is possible to grasp that it was a classy and artistic Buddha statue made by the best sculptor monk at the time, and try to chronicle the time of creation to 1628.
The fact that the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tatue at Hwaunsa temple can greatly contribute to the studies of the Buddhist sculpture history in the second half of the Joseon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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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용인 화운사 목조아미타·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의 고찰

저자 : 주수완 ( Joo Soowa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8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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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화운사는 원래 고려시대부터 유래한 고찰을 계승하여 우암거사 차재윤이 1938년 창건하여 월조당 지명 스님께 기증하였다. 1962년부터 강원 겸 선원으로 운영되면서 현재의 대웅전과 선원에 각각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목조약사여래좌상을 김제 금산사에서 이운해 왔다고 한다. 한편 2002년 개금 당시 복장물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법화경, 화엄경 등의 전적류와 함께 조성기로 추정되는 문서 1점 및 시주질 1점이 확인되었다. 조성기는 '법화경서품'이 제목처럼 기재된 1장짜리 문건인데, 주요 내용은 목판인쇄이지만, 끝에 별도로 시주자 명단을 필사한 것이 주목된다. 불상의 제작연대는 이 필사한 첫 머리에 숭정원년(1628년) 기록이 있어 아마도 불상조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번에 재차 화운사 목조아미타·약사여래상의 복장물이 조사된 바, 이에 대해 보다 세밀한 고찰을 시도해보았다. 아쉽게도 이번 복장조사에서 두 불상을 금산사에서 이운한 것이라는 확실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김제 금산사에서 멀지않은 부안 실상사판 법화경 및 은진(논산) 쌍계사판 법화경이 발견됨에 따라 이들 두 구의 목조불좌상이 김제 금산사에서 옮겨왔을 개연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복장물은 대체로 법화경과 화엄경이 주류를 이루며, 법화경의 경우는 세종대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조성한 법화경을 목판으로 번각한 판본과 성달생 필사 법화경의 목판번각판으로 인경한 법화경, 그리고 용장사간 목판본 법화경의 세 종류가 발견되었고, 화엄경은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시대에 들여온 대방광불화엄경소를 후대에 번각한 판본을 인경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전적류는 비교적 조선시대에 많이 간행되어 희귀본은 아니다. 그러나 화운사 복장물은 경책으로 제본된 경전이 아닌, 인경만 된 상태의 낱장 경전을 반복적으로 여러 장 묶어 납입하였고, 아마도 1628년에 이렇게 복장에 납입하기 위한 용도로 인경을 하면서 밝힌 조성기가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 17세기의 경전 납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Hwaunsa Temple in Yongin inherited an old temple originated from the Goryeo Dynasty, and was re-established in 1938 by grhapati Cha Jae-yoon and donated to Monk Woljodang Jimyong. Since 1962, it has been operated as a Buddhist school and monastery, and it is said that the two wooden Buddha statues of Amitabha and Bhaisajyaguru, which are currently each enshrined in Daeungjeon Hall and Zen Hall, have been shifted from Geumsansa Temple in Gimje.
Meanwhile, when gold plating was newly conducted in 2002, the inside of the Buddha statues were investigated, and through this, one document presumed to be a production record and a list of participants were confirmed along with scriptures such as Lotus Sutra and Avatamska Sutra. The production record is a one-piece woodblock print with the title of Introduction of Lotus Sutra, which is important because the transcript list of participants is attached at the end. At the beginning of this transcribed list, it is recorded as the first year of Sungjeong(1628), so it is presumed that the Buddha statue was also made during this period.
This time, I reviewed the literature from the Buddha statues of Hwaunsa Temple in more detail. Unfortunately, there was no clear clue that the two Buddha statues were transported from Geumsansa Temple. However, as Lotus Sutra which were printed by woodblocks made at Silsangsa Temple in Buan and Ssanggyesa Temple in Eunjin (Nonsan) were found, the possibility that the two wooden Buddha statues were moved from Geumsansa Temple in Gimje increased.
Documents are mainly composed of parts of the Lotus Sutra and Avatamska Sutra. In the case of Lotus Sutra, three types were found: a reprinted woodblock version based on the metal type print in the period of King Sejong, a woodblock print by the transcript writing of Seong, dalsaeng(成達生, 1376~1444), and a woodblock print of Yongjangsa-temple. Avatamska Sutra is mostly printed with a later version of The Guide of Avatamska Sutra brought by monk Uicheon(義天, 1032~1083) during the Goryeo Dynasty.
These records were published relatively often during the Joseon Dynasty, so they are not rare cases. However, Hwaunsa documents were not printed for binding as books, but were repeatedly printed some pages for the purpose of putting them inside the Buddha statue, and contain composition records that can be assumed to have been printed in 1628, which can be evaluated as valuable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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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시대 국난극복을 위한 신상(神像):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

저자 : 강영주 ( Yeong-ju Kang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5-21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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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 관왕묘에 봉안된 <관우도>가 중국의 전통적인 관우 도상의 수용과 변화를 거쳐 조선식으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글이다. 조선 시대 국가 주도로 건립된 서울의 관왕묘는 총 4곳으로 건립된 시기는 다르지만 건립과 관우도 제작 목적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위중한 사태에 국난의 극복을 위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전반기 선조대에 중국의 요청에 의해 건립된 남묘, 동묘의 <관우도>는 당대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중국에서 유입된 관우도나 삽화가 포함된 『삼국지』류의 소설 등의 도상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관우 도상은 숙종의 어제시 표현대로 큰 키, 대춧빛 붉은 얼굴에 봉황의 눈, 누워있는 누에 같은 눈썹, 삼각으로 길게 뻗은 수염을 하고 청건에 녹색 전포를 입고 지물로는 『춘추』와 청룡언월도를 갖추고 적토마를 곁에 두고 있다. 즉 이 시기 <관우도>의 유형은 유존작과 문헌기록을 통해 보면 3가지로 요약된다. 앞에서 언급한 도상형식을 갖춘 '전신 단독상'과 삼국지 주요 이야기가 도상화된 '고사인물도상' 및 윤두서의 작품으로 전하는 '반신 성현초상류'로 나눌 수 있다. 또한 '甲冑 장군상' 등의 유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근대기 남묘, 동묘 및 고종대에 건립된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는 도상과 성격이 유사하다. 필자는 북묘, 서묘 조각상과 아울러 근대기 사진으로 전하는 관우도상을 적극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서는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가 이전 시기 3가지 유형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분화된 유형과 양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당시 유행한 관성교와 같은 관우를 신앙하는 천수사나 충진사 등의 종교단체나 조직의 경전이나 판화와 같은 인쇄물에 묘사된 관우 도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 관우도상의 특징은 유비, 장비를 같이 그리거나 소나무, 춘추가 올려진 바위 등의 배경에 관평과 주창 등의 협시가 같이 등장하는 '삼존상', 관우와 주창을 그린 '이존상' 및 '전신단독상', '반신상' 등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반기 관우도가 장군의 모습을 한 무장이나 충신상이 주류였다면 근대기의 관우상은 巫神圖의 성격과 양식으로 제작된 황제나 왕의 복식을 한 군왕상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상인 조각상 뒤에 영정을 걸어 전당을 장엄하였다. 당시 관우상의 복식은 청대의 것을 모방하기보다 조선의 복식과 지물 및 장식, 문양을 융합해 조선화된 관우도를 제작하였다. 특히 익선관, 금관, 빗관, 면류관에 황색, 홍색 곤룡포나 면복 등 고종과 순종의 복식을 형상화한 도상이 주목된다. 근대기 관우도상의 이러한 특징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후 1901년 관왕묘를 관제묘로 격상시키고 악장을 새로 제정하여 관우 신앙을 위태로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왕실 주도로 창건된 관왕묘에 무당을 祭主로 두면서 관우가 武神, 장군신, 재물신 등 기복 신앙의 예배 대상으로 민간층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는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This study is the research on Guan Yu's faith and Painting of Guan Yu of the Kwanwang Tomb in Seoul. This article identifies the political character of Guan Yu's faith, which was used as a medium for overcoming national difficulties by the ruling class in the Joseon.
Historically, Guan Yu died in spite of numerous meritorious deeds and achievements, which became popular as Guan Yu's folklore and religious belief since his death. Since then, after the popularity of the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ts prestige has expanded, becoming one of the most popular objects of worship in shamanism as an all-around god who is versatile and achieves all wishes. In this regard, Guan Yu looked into the causes and processes worshipped in China as the god of loyalty, the god of war, the god of wealth, and the god of protecting the country. And it was politically utilized by King Sukjong, King Yeongjo, King Jeongjo and King Goj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at the request of China.
In Joseon era, 'Icon of Guan Yu' was designed to decorate or honor Guan Yu Shrine, with illustrations and scrolls drawn for the enjoyment and understanding of novels due to the influx and trend of the Three Kingdoms. This paper focused on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ortrait of Guan Yu" of Gwanwang Tomb in Seoul, which is used for the political purposes of the royal family, into a Joseon style. Through this article,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paintings of Guan Yu which were produced in the Joseon era, were identified to examine the process of integrating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with the folk shamanism and becoming indigenous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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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방사선 투과 이미지를 활용한 서울 화계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구조 해석

저자 : 이화수 ( Lee Hwa Soo ) , 정참희 ( Jung Cham Hee ) , 최학 ( Choi Hak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4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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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화계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에 대해 2015년 「중요동산문화재 불상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과학적 분석조사를 토대로 하여, 목조불상의 구조 및 제작기법을 파악하였다. 방사선 조사결과, 접목구조 등 부재 구성에 따른 제작기법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권속별 제작특징에 대한 경향을 고찰하였다. 또한 목재 균열 상태와 못의 사용 등을 통해 내부 결함 및 보수행위 흔적 등을 확인하여 향후 보존관리 및 연구를 위한 정보를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불상은 안면부 및 몸체와 다리 등 하부구조를 따로 접합한 접목구조로 확인되며 입상 등은 안면을 제외한 몸체가 일목구조로 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도명존자입상의 경우 목리의 방향과 결구방식으로 보아 안면을 제외한 후두부와 몸체가 하나의 목재로 제작된 일목구조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 후령통 및 종이 등 유기질로 추정되는 복장유물이 관찰되었고 하단 복장공 덮개에서 공장제 못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복장공이 개봉된 후 다시 고정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제4오관대왕의좌상의 경우 안면과 몸체, 다리의 총 3개의 부재로 제작된 접목구조를 보이며, 후면 내부에 심화된 수직 할렬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를 다수의 공장제 못을 사용하여 수평으로 고정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일목조는 주로 입상에서 나타나지만 안면부를 별도 제작하거나 복장공을 파내지 않고 불상의 모든 요소를 하나의 나무로 조각한 것은 장군상이 유일하다.


Based on the scientific analysis and investigation conducted as part of the conservation status recording of "Wooden Ksitigarbha Bodhisattva Triad and Ten Underworld Kings of Hwagyesa Temple" in 2015, the structure and manufacturing technique of the wooden Buddha statues were identified. As a result of a radiation inspection,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characteristics of the manufacturing technique according to the composition of wooden elements such as the assembling structure. Through this, the tendency of the manufacturing features of Ten Underworld Kings's kith and kin was considered. In addition, information for future conservation management and research was unearthed by identifying/checking internal defects and traces of repair activities through the use of nails and cracks in wooden elements. Most of the Buddha statues were identified as assembled structures in which substructures such as the face, body and legs were separately joined. It was discovered that the Standing Buddha statues were made with a one-piece structure except for the face. Judging from the direction of the wood grain and assembly methods, it was found that the Saint Domyung standing statue was made using a log type technique in which, except for the face, the back of the head and body were made from one piece of wood. Furthermore, sacred objects such as huryeongtong and organic materials(estimated paper) were observed. A factory-made nail that appeared on the cover of a lower hollow brought to light the finding that it was fixed again after the hollow was opened. In the case of the seated statue of the 4th Underworld King, there is an assembling structure made of a total of three wooden elements, the face, body, and legs, and an in-depth vertical check was confirmed inside the rear. In addition, considering that some nails made in the factory were used and fixed horizontally, it can be seen that repairs were made sometime before. Most of the Standing Buddha statues are one-piece structures, but they are partially assembled by the composition of facial or hollowed features. On the other hand, the General statue is the only statue in which all the elements of the Buddha statue are carved into one piece of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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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70년대 이후 조일(朝日) 요업 근대화 비교 고찰

저자 : 방병선 ( Bang Byungsun )

발행기관 :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간행물 : 강좌 미술사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5-27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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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70년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요업 근대화 과정을 분원과 아리타를 중심으로 비교, 고찰하여 조선의 요업 근대화 문제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먼저 일본은 개항과 통상조약의 체결, 유럽내 자포니즘의 유행으로 국내외 도자 수요층이 확산되었다. 1870년 폐번치현 이후 번요가 폐지되면서, 새로운 민요가 등장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해외 만국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도자산업 육성을 목표로 직수출 정책을 펼치는 한편, 『온지도록』같은 공예 디자인 도록을 발간, 배포하고 민간 수출 가마에 도안 지도를 하였다. 또한 생산 주체로 상인들이 등장하여 근대적 회사조직을 설립하거나 관과 공동으로 무역회사를 창립하였다. 관민 협동으로 유럽산 선진 요업 기계와 기술을 수입하고, 외국인 고용을 통한 기술 지도로 요업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여기에 요업 관련 은행과 공예전문학교가 아리타에 설립되어 정부와 민간의 협업에 정점을 찍었다.
다음 조선 역시 개항과 통상조약체결, 만국박람회 참가 등을 시도했으나 도자 생산과 기술개발에는 별반 영향이 없었다. 다만 누적된 폐단을 시정코자 상인들의 왕실용 자기 생산 참여를 허용하여 1883년 사옹원 분원을 상인물주와 일부 변수가 운영하는 분원공소로 민영화하였다. 일본과 같은 선진 요업 기계와 기술 도입, 요업 금융기관 설립 같은 요업근대화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다만 1900년대 이후 일본 주도의 관립 공업시험소가 설립되어 요업기술 인력 양성이 일부 시도되었다.
결국 1870년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요 민영화와 근대화 과정은 도자를 산업화하여 부국강병의 근본으로 삼을 것인가라는 인식과 국가와 민간의 협력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본 논문은 확인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official kiln's privatization and modernization of the ceramic industry of Korea and Japan since the 1870s. By comparing the ceramic production affairs of Korea Bunwon with Japan Arita, this paper addresses the background,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the reason why Korea could not modernize the ceramic industry successfully like Japan.
Through the opening port and popularity of Japonism in Europe, Japan expanded the ceramic market and abolished the Han(藩) official kiln by the act of “Haihanchiken(廢藩治縣)” as private kilns advanced. After employing the foreign specialist who guided advanced ceramic technology and participated on several international expositions, the government made a direct trade policy, published the design catalogue of crafts, and established the private-public mix trading company. In addition, the merchants launched their own modern ceramic company. Through the cooperation of the government and the civil, advanced European techniques and pottery machines were imported from Europe to establish the financial banks and ceramic schools in Arita.
The Korean government demonstrated few implementations such as opening port and commercial treaty. However Korea could neither export ceramics to the foreign countries nor expand production of ceramics. In 1900, Korea was invited to participate at the Paris international exposition to improve the production technique but failed to exploit that chance. Some merchants and potters joined to manage the public-private Bunwon ceramic company but it closed before long. There were neither import of the European advanced ceramic machine nor establishment of the ceramic bank and ceramic education school. Only the engineering lab center was established by Japan during the 1900's to educate the ceramic technicians.
Finally, this paper offers the modernization of ceramic industry of Korea and Japan since the 1870's was dependent on the awareness of industrialization of ceramic production and the policy intention of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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