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영남학 update

  •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 인문과학분야  >  민속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738-7760
  • : 2713-8070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1)~80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554
영남학
80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옥소 권섭의 세계인식과 영남관

저자 : 정우락 ( Jeong Woo-la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3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玉所 權燮(1671-1759)의 세계인식과 영남관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권섭은 옹주와 재상의 집에서 경화사족의 문화풍토 속에 성장하였지만, 기사환국과 신임사화로 커다란 좌절을 맛본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볼 때, 그는 대체로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록벽과 기행벽을 갖고 산수에 탐닉하였다. 현실정치가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오히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등 자신의 취미생활에 있었다.
권섭의 세계인식은 주체적 개방성으로 요약된다. 도통론과 화이론으로 대변되는 그의 주체성은 자기 세계 속으로 매몰되지 않고 사상적으로는 유불도가 상호 공존하고 신분적으로는 중인이나 천인도 포용하였다. 또한 권섭의 작품에는 기호학과 영남학이 서로 소통하는 기령학적 회통성 또한 잘 나타난다. 그의 영남관은 이로써 확인이 가능하다. 기호학이 영남학에 뿌리를 두지만 그 완성은 결국 기호학이 담당했다고 보고, 영남지역에는 이황의 도맥을 이은 정구의 학문을 크게 인정하였다.
권섭의 삶과 사유에는 주체성과 개방성 사이, 기호학과 영남학 사이,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은사, 고사, 신선 등으로 조롱까지 받으면서 과거장에 나아갔으니,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권섭은 科場仙이었고, 그를 地上仙이라며 칭송하던 사람들에게서는 세정을 떨치지 못한 涕泣仙이었다. 그의 세계인식이 주체성과 개방성 사이에서 개방성으로, 영남관이 기호학과 영남학 사이에서 기호학으로 귀결되지만, 권섭은 언제나 중간자적 존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그를 산수 속에서 방황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was designed to explain Okso Gwon Seop(1671-1759)'s perceptions of the world and the viewpoint of Yeongnam. He grew up in a family of a princess and prime minister amid the culture and climate of distinguished Gyeonghwa nobility, but he suffered a huge frustration after Gisahwanguk and Sinimsahwa. Throughout his history, he generally kept an attitude of conforming to reality and was indulged in mountains and rivers according to his passion for recording and traveling. He did not show much interest in issues around the direction of real politics, and his main interest was in his hobby life involving writing and painting.
Gwon Seop's perceptions of the world are summarized in independent openness. Represented by the Dotong and Hwai theories, his independence prevented him from being buried in his world and made him embrace the mutual coexistence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ideologically and that of Jungins and lowly men in the social ranks. His works well reflect the Giryeonghak-based Hoitongseong of communication between Giho and Yeongnam studies. This shows his viewpoint of Yeongnam. Believing that Giho studies were rooted in Yeongnam studies and eventually completed Yeongnam studies, he recognized highly the studies of Jeong Gu that inherited Lee Hwang's Domaek in the Yeongnam region.
His wandering between independence and openness, between Giho and Yeongnam studies, and between the mundane world and transcendence is often found in his life and thinking. He went to take the state exam, being bombarded with such ridicules as a hidden scholar, clean scholar, and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 He was a Gwajangseon to those who criticized him and a Che-eup-seon that could not leave the affairs of the world behind to those who admired him as a Jisangseon. His perceptions of the world ended in openness rather than independence, and his viewpoint of Yeongnam ended in Giho studies rather than Yeongnam studies, but he was always shaking as a middle being between them. The shakes seem to have made him wander in mountains and rivers.

KCI등재

2玉所 權燮과 18세기 가족문화

저자 : 박영민 ( Park Yeong-min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5-87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玉所 權燮(1671-1759)의 가문을 통해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조선시대의 가부장제와 가족문화의 한 양상을 고찰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옥소가 생존하였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가부장제가 嫡長子中心으로 硬化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소 가문을 살펴보면, 과연 이 시기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적장자중심 일변도 였던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옥소는 자신이 사후에 묻힐 자리에 초취부인과 재취부인의 자리는 두었으나 소실의 자리는 두지 않았다. 또 적자의 자손에게 가문을 일으킬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옥소 집안에서 소실과 소실 소생들을 대하는 방향은 적장자와 분명한 차별을 두면서도 가부장제의 경계 밖으로 몰아내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가문의 일원으로 이끌었다. 옥소는 소실 이씨와 60여 년을 함께 하였고 재취부인 조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약 30여 년을 소실 이씨와 함께 하였다. 또 옥소는 노년에 서자인 善性과 서손인 信應에 의지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래서 분재를 할 때에도 선성과 신응에게 그들의 효도와 재능을 인정하며 서책, 예술품, 전답을 나누어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17세기 중엽 이후 18세기 중엽까지의 조선사회의 가부장제, 가족문화의 실상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각 가문 내부의 다양한 문화를 세밀하게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옥소 가문의 가족 관계를 통해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시대의 가부장제의 저변에 다양한 가족문화가 존재하였음을 주목하는 계기를 열고자 하였다.


This study examined aspects of patriarchy and family culture in the Joseon Dynasty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mid-18th century through the family of the Oakso(玉所) Gwon-Seop(權燮). Currently, academia says that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mid-18th century, when Oakso survived, the patriarchal system was harden into the legitimate child(嫡長子). However, if you look at the Oakso family, it is questionable whether the patriarchal system of Joseon society during this period was a one-sided the legitimate child(嫡長子). Oakso had the seats of his wife in the place where he would be buried after his death, but did not have the seats of concubine. It also emphasized the responsibility to raise a family to the legitimate child. However, the direction of dealing with the concubine and child of a concubine of the Oakso family clearly discriminated against the legitimate child, but it was not driven out of the boundaries of the family. Rather, he was very active in leading the family. Therefore, in order for us to properly approach the reality of patriarchy and family culture in Joseon society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mid-18th century, we must be able to capture and explain various cultures within each family in detail. This study attempted to open an opportunity to note that various family cultures existed at the base of the patriarchal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after the mid-17th century through the family relations of the Oakso family.

KCI등재

3옥소 권섭의 <화지구곡가>에 나타난 구곡 형상과 그 의미

저자 : 조유영 ( Jo Yu-young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9-112 (2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권섭의 화지구곡 경영과 <화지구곡가> 창작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권섭의 문경 화지동에서의 생활과 화지구곡 경영을 그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살펴보고, <화지구곡가>에 나타나는 구곡 형상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 후기 구곡문화 속에서 권섭의 <화지구곡가>가 보여주는 구곡 형상이 가지는 의미를 논의하고자 하였다.
<화지구곡가>에 나타나는 구곡 형상은 각 구비마다 나타나는 마을의 실경과 승경을 강조함으로써 성리학적 이상세계보다는 무릉도원과 같은 선경으로서의 모습에 더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권섭은 구곡이 가진 성리학적 관념성을 일정 부분 배제하고, 구곡의 실경이 가진 외면적 아름다움에 주목함으로써 현실과는 이격된 선경으로 자신의 구곡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지구곡가>의 구곡 형상은 산수의 외면적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조선 후기 구곡문화의 새로운 경향성을 담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This study was attempted to discuss Kwon Seop's management of Hwajigugok and the creation of < Hwajigugokga >, which have not received much attention in our research history so far. To this end, Kwon Seop's life in Hwajidong and the management of Hwajidong were first examined through the records he left, and based on this, we tried to specifically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the Gugok shape shown in < Hwajigugokga >. And based on this, we tried to discuss the meaning of the Gugok shape shown by Kwon Seop's < Hwajigugokga > in the Gugok culture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shape of the Gugok in < Hwajigugokga > emphasized the real scenery and scenic beauty of the village in each district, confirming that it is closer to the appearance of a Zen landscape like Mureungdowon than to the Neo-Confucian ideal world. In other words, it can be seen that Kwon Seop's < Hwajigugokga > excludes the Neo-Confucian ideology of Gugok and appears as an ideal space different from reality through the external beauty of Gugok's landscape. In addition, the shape of the Gugok in < Hwajigugokga > showed a new trend of Gugok cul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ing on the outward beauty of landscape.

KCI등재

4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저자 : 김수태 ( Kim Soo-tae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65 (5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김유신(595~673)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글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신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부족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필자도 그에 대한 견해를 밝혔지만, 신라의 삼국통일론과 관련해서 계속적으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때문에 김유신의 삼국통일론이 어떠하였는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김유신이 당시의 외교정세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서 활동하였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김유신을 당나라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자주적인 인물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파악하기만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유신의 대외인식과 관련해서 시기적인 변화양상을 제대로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유신의 사상적 기반에도 새로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와 유교의 관련성을 다룬 글이 나와 있어서 주목되지만, 그가 신라 중고기의 유교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가 원광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신라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적 결합을 크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김유신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사적으로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가로서, 외교가로서, 사상가로서도 크게 활동한 또 다른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It can be said that full fledged interests in Kim Yusin arose after entering 2000s. This is because of published articles that depicted the overall picture of him.
However, there seems to be still a lack of interest in Kim Yusin's thoughts regarding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Although the present author's view on that matter has been expressed, there is an ongoing controversy surrounding the theory of Silla'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clarify what Kim Yusin's theory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was. For this, attention should also be paid to what kind of interest Kim Yusin had in the diplomatic situations at that time. In general, Kim Yusin is understood as an independent figure with a negative perception toward the Tang dynasty. However, that would only be a partial understanding of Kim Yusin. This is because it will be necessary to properly follow the temporal change of Kim Yusin's perception of international relations.
On the other hand, it will be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Kim Yusin's ideological basis. Although there is an article that deals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Kim Yusin and Confucianism, the fact that this relationship was based on Confucianism of the Middle Ancient period of Silla has not been properly handled. This relation is demonstrated in the fact that he led Silla'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based on Won Gwang's Sesok Ogye. Through this, he greatly emphasized the communal bonding of the members of the Silla society.
Therefore, through this approach, it further enables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Kim Yusin's other major activities in the East Asian World at that time, not just as a military general, but also as a politician, diplomat, and thinker.

KCI등재

5錦溪 黃俊良의 역사의식과 의리관 고찰 - 士宦期 前期의 글들을 중심으로 -

저자 : 이규필 ( Lee Gyu-pil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198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錦溪 黃俊良(1517~1563)은 퇴계학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이제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주로 황준량이 퇴계에 받은 영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본고는 이에 대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였다. 황준량의 본래 모습을 먼저 조명하고, 그것이 퇴계를 만나 어떻게 변모, 확장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황준량의 사환기 초기 작품을 중심으로 선비와 역사가에 대한 사유를 탐색하고 유난히 밀도 높은 그 역사의식과 의리관을 고찰해 보았다. 황준량은 퇴계학의 여러 국면 가운데 특히 『주자서절요』와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는다. 본고에서는 이 연구를 통해, 황준량이 퇴계를 만나 학문을 완성하였지만 그 바탕에는 자신 특유의 역사의식과 의리관이 지속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함을 논증하려 하였다.
황준량과 퇴계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Geumgye Hwang Jun-ryang(錦溪 黃俊良, 1517~1563) is a very important person in Toegye School. However, for that reason, so far, research on him has mainly focused on finding out how Toegye Lee Hwang(退溪 李滉, 1501~1570) affected Hwang Jun-ryang. This paper raised some objections to this issue. This is because I thought it would be a desirable direction to illuminate Hwang Jun-ryang's original appearance first and to meet Toegye to find out how it transforms and expands.
Under this awareness of the problem, we explored the thoughts of scholars and historians, focusing on the early works of Hwang Jun-ryang, who entered the government office, and considered the very dens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loyalty. Among the various aspects of Toegyeology, Hwang Jun-ryang receives a lot of attention, especially in relation to 『Jusseojeolyo』(朱子書節要). This paper tried to argue the following facts through this study. It is highly likely that Hwang Jun-ryang met Toegye to complete his studies, but his uniqu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rue loyalty continued to work on the basis.
How the meeting between Hwang Joon-ryang and Toegye took place and how it proceeded remains a future task.

KCI등재

6정유재란기 정경운의 호남 체험과 그 의미 - 『고대일록』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종구 ( Kim Jong-gu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의는 정유재란기 孤臺 鄭慶雲(1556-?)의 호남 체험과 그 의미를 분석했다. 『고대일록』은 정경운이 1592년부터 1609년까지 김성일의 소모유사, 김면의 소모종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 정유재란과 관련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유재란기의 피난민으로서의 기록은 전쟁 생활사에 중요한 부분이다.
정경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구체적으로 피난 계획을 세우며, 깊은 산의 계곡 · 암자 · 사찰을 이용해 호남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茶洞과 六十峴 등은 피난 여정의 거점 지역이었고, 쉽게 한곳에 거처할 수 없었다. 피난한 지 5개월이 지나서 용담현에 피난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피난민 정경운의 호남 체험은 첫째, 위기의 삶과 궁핍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쟁으로 일어난 전염병과 궁핍에서 오는 질병을 감수해야 했고, 딸과 늦게 태어난 아들도 잃게 되는 불운을 감지해야 했다. 그는 나머지 식솔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마을과 시장에 가서 구걸하는 설움을 참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둘째, 피난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소금 장수가 되어 상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금을 매입하여 다시 되팔기도 하고, 그 외 장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하는 일 없이 同類와 시장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전쟁 등 정보와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지만, 그 수확은 미미했다.
셋째, 개인의 心狀을 드러내며, 전쟁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제사 등 일상이 파괴된 점을 통곡하고 있었다. 하지만 벗들과 교유를 하며 전쟁 피난민의 울분을 극복하고 있었다. 山水를 통해 잠시 그 仙境을 만끽하며, 역설적인 心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읊으며 마음을 中和하고자 했다.


This discussion analyzed the experiences and meanings of Honam experience of Jeong Yujaerangi (1556-?). '孤臺日錄' records the events related to the Imjin War and the Jeongyujaeran, while Jeong Gyeong-un served as Kim Seong-il's Confucian scholar from 1592 to 1609 and Kim Myeon's so-called Confederate officer. In particular, the records of refugees during the period of Jeongyu disaster are an important part of the history of war life.
When the Jeongyu disaster occurred, Jeong Kyung-woon made a detailed evacuation plan and was crossing to Honam using deep mountain valleys, hermitages, and temples. Tea 洞 and 六十峴 were base areas for evacuation journeys, and they could not easily live in one place. Five months had passed since he had been evacuated, and he was able to find refuge in Yongdam County.
Refugee Jeong Kyung-woon's experience in Honam was first, continuing a life of crisis and poverty. He had to bear the plagues caused by war and the diseases of poverty, and he had to sense the misfortune of losing his daughter and his late-born son. He had to take care of the rest of the household, so he was living his life by enduring the pain of going to villages and markets to beg.
Second, in order to survive as a refugee, he becomes a salt merchant and becomes a merchant. He bought salt and reselled it, and he continued his other long-term activities. He went to the market with his partner without doing anything and spent a lot of time devising ways to live with information such as war. He farmed himself, but the harvest was minimal.
Third, it revealed the individual's heart and desires to overcome war. He was weeping for the destruction of daily life such as ancestral rites. However, he was overcoming the resentment of war refugees by socializing with his friends. Through the mountains and waters, he enjoyed his love for a while, revealing his paradoxical heart. He tried to reconcile his mind by writing poetry.

KCI등재

7晦堂 張錫英의 滿洲·露領 기행시의 시적 구현 양상 -『遼左紀行』을 중심으로-

저자 : 한길로 ( Han Gil-r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이승희·곽종석 함께 한주 이진상의 학맥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근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회당 장석영의 해외 기행시에 주목하는 논문이다. 그는 국망의 현실을 극복하고 유도의 쇠퇴를 막기 위해 해외 이주를 모색했던 유림이었다. 그는 북만주 蜜山에 머물던 한계 이승희와 더불어 해외 한인공동체를 논의할 계획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대로 향했고 그곳을 주람했다. 약 100일간 15,000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그의 『요좌기행』은 중화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의 재현과 고국의 독립 및 이민자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던 1910년대 한국 유림의 현실인식과 그 내면을 웅변하고 있다. 그의 기행시는 식민지가 되어 버린 고국을 뒤로한 채, '떠남을 위한 기행'을 시작한 遺民의 憂愁로 시작된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한·중 '동지'들을 만나 잠시 마음의 안정을 갖고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60대 老儒의 몸으로 북만주 및 노령과 같은 낯선 이역을 기행하는 과정은 唐 玄奘과 비견된다고 할 만큼 고된 길이었다. 여기에 이역을 전전하며 流民이 되어버린 한인들이 겪고 있던 삶의 실상이 목도되면서, 비감과 통한 그리고 客愁의 서정은 배가 되어 온전히 시에 담기게 된다. 동시에 시에는 移居地에 대한 모색과 고뇌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고 확대되어 나타났다. 요컨대 그의 기행시는 근대기 유림이 실행한 독립운동의 일면과 함께 해외 이거를 모색하던 당대 유림의 내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한·중'과 '중·러'의 경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한인 이민자와 난민을 바라보며 나타난 다양한 내적 갈등과 자기 정체성의 모색, 또 고국에 대한 깊은 향수까지를 모두 담고 있었다. 즉 그의 작품은 근대기 한문학의 특징적 국면들을 대단히 잘 반영하고 있다.


Hoedang Jang Seok-young is a person who inherited the studies of Hanju Lee Jin-sang together with Lee Seung-hee and Kwak Jong-seok. He is also a modern Confucian scholar and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He traveled to China in 1912 for the liberation of his country and the revival of Confucianism, which in fact meant immigration. In other words, for him, China was not just a travel destination, but a base for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and preservation of Confucianism. His destination was Milsan, North Manchuria, where his colleague is located, but he even visited Far East Russia. His travel poems were full of sadness and lamentation about the reality of his country, and he met his comrades and expressed his inner psychology. At the same time, his poems also had concerns and serious reflection. about the place of migration. Finally, it also reflects the difficult pain and lifestyle of the Korean diaspora. In conclusion, his literary work contains new contents and themes of Modern Sino-Korean Literature, so it is especially worthy of notice.

KCI등재

8제사 설화의 전승의식과 가족공동체의 문화적 의미

저자 : 류명옥 ( Ryu Myeong-o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9-295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제사 설화는 조상에 대한 의례인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구비 전승되는 제사 설화의 유형으로 '정성이 부족해서 혼령이 해 끼치는 이야기'가 있다. 구비 설화에 전승되는 제사 설화는 제사의 격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제사를 지내는 정성 또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제사 설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정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주로 제사 음식을 깨끗하게 준비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제사를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주제의 이면에는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야 하는 대상이 며느리인 여성으로 한정되어 나타난다.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여성에게 제사라는 의례는 과도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게 하여, 정성이라는 의미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제사 설화에서 정성은 여성들에게 노동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지만 제사 설화는 현재에도 여전히 구비 전승되고 있으며 변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는 설화들도 있다. 금기시되어 온 제사 음식을 올리는 설화나 제사 지내는 시간을 현대에 맞게 바꾸는 설화를 통해서 제사의 의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현재 전승되는 제사 설화를 보면 여성이 제사의 불필요함을 남편에게 토로하면서 과거에는 고부 사이에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 부부의 갈등으로 관점이 변화되었다.
그리고 제사 설화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설화에서 바쁜 생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제사 날짜를 까먹는 남성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남성들은 점점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남성들의 빈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남성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제사에 여성이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주도적으로 지낸다. 장자 또는 남성 중심적이었던 제사의 세대 간의 연대는 약화 되고 여성들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세대 갈등의 관점으로 변화되면서 남성들은 관심이 없어지고, 여성들은 이전의 책임감으로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처럼 세대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하지 못한 지금 시대에 제사 설화는 더 이상 전승되지 않을 것 같지만 여전히 제사 설화는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변화되고 있다. 부계중심의 제사 문화가 현재에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제사 설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현대가족의 구심점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The legend of the rite is passed down around the ritual for ancestors. One type of ritual tale that is handed down is 'a story that the spirit causes due to lack of sincerity.' The folktale of the rite, which is handed down in the oral tale, tells little about the formalities of the rite, and mostly about the sincerity or mindset of the rite.
The meaning of devotion, which is regarded as important in the folklore of ancestral rites, is mainly to require the preparation of food for ancestral rites. nyone can agree that they should pay close attention when holding a memorial service. However, behind the preceptual theme of preparation of sacrificial food with due care is limited to women who are daughters-in-law. For women who had to pay close attention, the ritual of sacrificial rites had an excessive sense of responsibility and burden, and the meaning of devotion had to be rigid. In the folktale of the rite, sincerity is taken as the meaning of labor by women.
However, the tales of ancestral rites are still handed down today, and some are handed down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changing times. According to the folktale of the current rite, women's perception of the meaning of labor continues. However, problems that were limited to women appear to change in two directions. First of all, women raised the issue of the need for ancestral rites, leading to marital conflict, which changed their view from women to marital problems.
And the folktale of the rite changes into a conflict between generations. The folktales criticizes men who are unable to participate in the ritual due to their busy lives or forget the date of the rite. Men increasingly don't value ancestral rites and women fill their vacancies. Women prepare food for ancestral rites that men cannot participate in and take the initiative in holding rituals. The solidarity between generations of ancestral rites, which were either the eldest or male-centered, weakened and the role of women expanded. As the view of generational conflict changes, men become less interested, and women perform ancestral rites with previous responsibilities.
In this era of weakening intergenerational ties, the tales of ancestral rites seem unlikely to be handed down anymore, but they are still changing in line with the changing times. It is meaningful in that it shows how the culture of paternal ancestral rites is changing in the present, and it is meaningful in that it shows how the center of modern families are changing.

KCI등재

9김세환 시조에 나타난 노년기, 질병 속 希求

저자 : 이순희 ( Lee Soon-hee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의 목적은 김세환 시조를 대상으로 노년기 질병에서 관점의 변화에 따라 삶의 질이 다름을 밝히는 데 있다. 김세환 시조를 분석한 결과, 『어머니의 치매』에 나타난 어머니는 자아 통합을 하지 않은 까닭에 삶의 질이 떨어졌다. 치매를 앓기 전까지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恨과 그리움 해소의 희구가 있었지만, '자아 통합'을 하지 못하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고 이어서 치매를 앓게 된다. 치매를 앓게 되면서 恨과 그리움의 해소 희구는 서러움, 두려움, 분노, 슬픔, 외로움 등으로 표출되어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에 비해 『바람꽃』에 나타난 김세환 시인 자신은 천식을 앓지만, 희구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 順命의 자세, 자기 성찰, 감사 정서, 창작의 산실 등이 그것이다. 김세환 시인은 끊임없이 '자아 통합'을 한 결과이다. 천식을 '동반자' 또는 '친구'로 여기면서 천식 앓는 것을 順命의 자세로 자기 성찰과 감사의 기회로 여기며 절실한 시조 창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노년기, 삶의 질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된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reveal that the quality of life differs according to the change of viewpoint in old age disease targeting Kim Se-hwan's Sijo. As a result of analyzing Kim Se-hwan's Sijo, the quality of life of the mother declined because she did not integrate herself. On the other hand, poet Kim Se-hwan himself developed rather as a result of continuous self-integration. Therefore, it was analyzed that old age and quality of life are affected by the individual's point of view.

1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