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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s of Korean Studies

  •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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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8)~58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603
한국학논총
58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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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병호 ( Lee Byongh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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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기와 연구는 수막새나 암막새 등의 기와 문양을 중심으로 한 분석이 중심이 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암키와나 수키와에 관한 고고학적 분석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문헌사학 분야에서는 문자기와의 명문 판독이나 문자의 해석 자체에 매몰되어 기와가 사용된 시설물의 명칭이나 제작시기를 파악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기와는 마치 木簡처럼 고고학 발굴에 의해 드러난 문자자료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연구 방법론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한국 고대 문자기와의 전개 과정을 그 출현기인 4세기부터 9세기까지를 대상 시기로 하여, 문자나 기호가 기재된 내용이나 기술적인 특징, 생산과 유통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고구려의 문자기와는 集安과 평양의 도성이나 고분, 사원 등지는 물론, 남한의 성곽에서도 출토된다. 백제는 공주 대통사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자기와가 출토되며, 사비기에는 부여와 공주, 익산의 왕궁과 사원, 성곽 유적에서 도장을 찍은 듯한 독특한 형태의 문자기와가 출토된다. 신라는 7세기 후반, 삼국 통일을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문자기와가 생산되어 왕궁과 관청, 사원, 성곽은 물론 가마터에서도 다양한 문자기와가 출토된다. 고대의 문자기와들은 기와를 제작한 집단이나 제작 시기인 연호를 표기한 사례가 많고, 생산 수량이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검수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또 문자의 기재 내용과 기와 제작기술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변화하고 있다.


Studies on ancient roof tiles in Korea have tended to focus on their patterns, although in recent years, the number of archaeological analyses of concave and convex roof tiles has increased. On the other hand, studies in the field of bibliographic history have overemphasized the decoding of inscriptions or the interpretation of the letters or characters written on roof tiles, so such studies are really limited to merely identifying the name of the facility which used the roof tiles or their date of production. However, as roof tiles with an inscription are written materials discovered during archaeological excavations, such as wooden tablets inscribed with a text, such studies naturally rely on an archaeological research methodology.
This study attempted to shed light on the development process of ancient roof tiles with an inscription from the fourth century, when they first appeared in Korea, to the ninth century by examining the contents of their letters or symbols, technical characteristics, and production and distribution. Goguryeo roof tiles with an inscription have been excavated from the remains of ancient capital cities, ancient tombs, and temples in Jiban (集安, present-day Ji'an in Jilin province, China) and Pyongyang in North Korea, as well as fortresses in South Korea.
The earliest inscribed roof tiles from the Baekje period were discovered at the Daetongsa Temple Site in Gongju, while inscribed roof tiles with a unique form resembling a stamp, which were made during the Sabi period of Baekje, have been found at the sites of royal palaces, temples, and fortresses in Buyeo, Gongju, and Iksan. Silla started to produce roof tiles with an inscription in earnest in the late seventh century, immediately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and diverse types of inscribed roof tiles have been discovered at the archaeological sites of its royal palaces, government offices, temples, fortresses, and kilns. In particular, many of the tiles discovered at sites in Buyeo and Gyeongju bear an inscription of the name of the tile's producer and/or its production date, so it would appear that such inscriptions were mainly made to control the quantity and/or quality of the t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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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재홍 ( Kim Jae 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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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묵서토기를 대상으로 그 제작 방식, 시기별 묵서토기의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한국 고대 묵서문화의 보급을 검토한 논문이다.
묵서토기는 삼국시대에 거의 제작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묘지명 등을 통해 묵서문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十', '卍' 등 간단한 부호를 새긴 예가 있으며, 신라에서도 “上撰干徒 忔叱丁次”이라는 명문이 적힌 고배가 알려질 정도로 수량이 적었다.
신라 통일기에 묵서토기는 삼국시대에 비해 실생활에서 사용예가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 왕경과 지방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다. 왕경에서는 월지나 월성 등 궁궐에서 주로 발견되며, 지방에서는 산성이나 건물지 등 州治나 縣治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토기의 묵서는 창고, 제의, 吉祥句, 도량형, 지명, 궁궐명 등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신라 통일기의 묵서토기는 일본 고대에 비해 수량이 적고 일반 주거지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 신라 문자문화가 지방사회까지 보급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신라에서는 당시 종이문서가 널리 보급되어 지방사회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토기에 묵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 삼국에서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라 6세기 금석문에는 書人, 文尺 등 전문 서사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spread of ancient Korean writing culture by analyzing the production method and period of earthenware with letters excavated from ancient Korean ruins.
Earthenware with letters was rarely produc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but it can be seen that writing culture was at a considerable level through the names of tombs of Goguryeo.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earthenware with letters was used more in real life than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it was found locally in both royal and local areas. It is mainly found in palaces such as Wolji and Wolseong in the royal palace, and in the provinces, it was found in areas corresponding to the state or capital, such as fortresses and building sites.
Earthenware with letters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is smaller in quantity than in ancient Japan and has not been found in general residences. In Silla, paper documents were widely distributed at that time and expanded to local communities, so there was no need to write on earthenw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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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지영 ( Seo Jiyou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11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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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에서 형성된 즉위의례는 柩前에서의 즉위, 策命의 봉독, 璽綏의 양도, 백관의 조회와 사면, 謁廟 등의 의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의례는 『後漢書』 예의지 大喪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국식 즉위의례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柩前卽位儀禮는 태자 책봉을 통한 嗣位에 의한 즉위 상황을 반영한다. 이 즉위의례는 三公이 『상서』 「고명」을 아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주 무왕과 문왕, 그리고 선황제가 행했듯이 후계자 또한 유가적 덕치를 계승하고 이를 실현할 것임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의 遺詔에 구전 즉위의례가 보여 이때부터 중국식 즉위 의례가 실시된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문무왕이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각별했음을 나타내며, 태자가 선왕의 遺志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조를 통해 이때부터 중국식 즉위의례가 도입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학적 이념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전통적 방식에서 변화된 즉위의례를 실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물왕 즉위 이후 孝悌에 남다른 행실이 있는 자에게 職을 수여하였으며, 租調의 감면, 賜爵, 曲赦 등을 실시하였다. 나물왕이 孝悌를 살펴 직을 내린 것은 유교적 덕목을 사회의 지배원리와 연계하려는 노력이었다. 소지왕 대에는 중국의 사례와 같이 즉위 원년 大赦와 賜爵이 행해졌다. 소지왕의 자질로 孝行과 謙恭, 법흥왕의 성품을 寬厚愛人이라 한 것은 유가적 덕목이 강조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또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元子로 칭해졌으며, 紫極之殿에서 즉위하였다는 것은 신라에서 중국식 즉위의례를 일정부분 수용하여 실시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A coffin-facing enthronement ceremony (柩前卽位儀禮) is a set of formal acts for indicating stable succession to the throne based on proclamation of the crown prince. This ceremony, which was derived from a Chinese enthronement ceremony, reflects ideological willingness for achieving the Confucian rule of virtue as shown in its beginning process where Three Excellencies (三公) informed the crown prince about the section of the As the coffin-facing enthronement ceremony was described in the will (遺詔) of King Munmu who wasexisting studies analyzed that a Chinese enthronement ceremony was implemented from the period of King Munmu. However, the action of King Munmu, who adopted the coffin-facing enthronement ceremony, only indicates that he showed exceptional expectations and affection for the crown prince, who was expected to succeed to the throne. In other words, the will of King Munmu is no more than a historical record that reflects the situation where the crown prince stably succeeded to the throne by carrying on the long-cherished desire (遺志) of the previous king. Thus, it is difficult to affirm that the will of King Munmu serves as a proof for the first implementation of a Chinese enthronement ceremony i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era of King Munmu. This study analyzes that an adjusted enthronement ceremony from an existing traditional enthronement ceremony took place in Silla when the ideology of Confucianism began spreading in this kingdom due to the influence of China. Before the era of King Namul, succession to the throne was performed mainly by selection of the following king by retainers. In addition, Beolhyu of Silla, was called a saint (聖人) because he exhibited a capability of predicting good or bad harvest by foretelling the weather. As indicated these cases, Confucian aspects were not emphasized in the processes of evaluating the qualifications of the king in Silla before the era of King Namul. Then, after King Namul ascended to the throne, the kings of Silla began performing an enthronement ceremony affected by the Chinese enthronement ceremony and ruling their kingdom under the Confucian influence. For example, King Namul granted a position (職) to people who showed their outstanding devotion to their parents and affection for their siblings. He also reduced the tax (租調) on fields and implemented a special amnesty system (曲赦) for criminals which was applied in a specific region. King Soji, granted a pardon (大赦) to criminals and official ranks (賜爵) to those designated for these ranks in the first year of his accession to the throne, as done in China. It was also found that King Beopheung, was named Yuanzi (元子, the first son) before ascending to the throne and that he came to the throne in Jageukjijeon (紫極之殿, the palace with the king's throne). These historical records serve as grounds for verifying that King Namul and the Silla kings who followed him implemented an enthronement ceremony that reflected the Confucian rule of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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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준수 ( Han Jun-su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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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3군호는 군사 조직을 이해하는데 있어 기본적 토대가 되며. 숫자나 지역 등을 명칭에 표기하여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궁 역시 그에 해당하는데 궁병 부대의 독립적 편성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이궁은 한산주궁척과 하서주궁척을 지칭하며 신라에서 처음으로 투사 무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궁병 군단이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투사 무기로는 弩와 弓이 있었는데, 노는 唐에서도 제작 기술을 탐낼 만큼 우수한 성능을 지녔으며, 궁 역시 노와 비슷한 수준의 무기였다. 신라는 그러한 노와 궁을 집약하여 전문적인 군사 조직으로 편성하였는데 노당과 이궁이 그것이었다. 투사 무기의 효율성을 군사적으로 극대화 하고자 전력화 했던 최초의 군단이었는데, 당과 일본에서도 보이지 않는 신라적 특색인 강한 군단이었다.
이궁 가운데 처음 설치된 것은 진평왕대 하서주궁척이었다. 영양왕대 고구려가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남하를 시도하자 그에 대응하고자 동북 변방인 동해안 지역의 방어를 위해 창설한 것이다. 한산주궁척은 진덕여왕대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인해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실권자 김춘추가 국가적 생존을 위한 외교적·군사적 교두보였던 한강 하류지역의 지배력을 보다 확고히 하고자 설치한 군사 조직이었다. 한산주궁척의 설치는 궁병 전문 군단인 이궁의 완성인 동시에 신라 중대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투영된 첫 번째 군단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Silla's 23rd Army is a basic foundation for understanding military organizations, and features numbers and regions in their names. I-Gung(二弓) also falls under this category, but it has a unique meaning in that it is an independent organization of archery units.
I-Gung was the first unit in Silla to specialize in the use of fighter weapons, the archery corps, under the name of Hansanju-gungcheok and Haseoju-gungcheok. The representative weapons of Silla were the Nho(弩) and the Gung(弓), but the Nho were excellent enough to want the crafting techniques of the Tang(唐) Dynasty, and the Gung believed to have been the same level as the Nho.
Silla formed a specialized military organization by combining such Nho and Gung, but Nhodang(弩幢) and I-Gung were the ones. It was the first military force to maximize the efficiency of projection weapons.
The first I-Gung to be installed was the Haseoju-gungcheok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It was first established on the northeastern frontier because Goguryeo, the reign of King Yeongyang, moved south to the border area with Silla to restore its territory. To cope with this situation, Silla established it to defend the East Sea shoreline.
Hansanju-gungcheok was a military organization established by Kim Chun-chu, the real ruler, to strengthen control of the lower Han River, which was a diplomatic and military bridgehead for the survival of the nation when the kingdom was under pressure from Goguryeo and Baekje. The establishment of the Hansanju-gungcheok was significant as the completion of I-Gung, a corps specializing in archery, and as the first corps to substantially project the order of Silla's middl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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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채민석 ( Chae Min-suk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8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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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眞國師 承逈은 그의 활동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당대 高麗를 좌우했던 崔氏武臣政權에 협력한 승려로 단순하게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당시 정치 변동 양상과 함께 자세히 조사해 보면, 그가 최씨무신정권과 맺은 관계는 세 단계의 형태로 점차 변화해 갔음을 알게 된다.
첫 단계는 최씨무신정권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고 그에 맞설 종교적 움직임을 모색했던 시기이다. 승형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던 숙부 申光漢과 禪宗 승려들이 明宗 폐위 과정에서 희생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를 주도했던 崔忠獻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수도 開京에서 벗어나 재야에서 수행하기를 선호했고, 무신정권에서 소외된 문인들을 최충헌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에 끌어들이고자 李資玄의 居士佛敎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이 호감을 가졌던 왕실과의 협력을 내세워 최씨무신정권의 포용 정책에 일정 부분 부응했던 시기이다. 승형은 최충헌의 반대 세력에 대한 감형과 자신에 호의적인 왕실 및 문인들의 권유를 계기로, 金剛山 楡岾寺 住持 임명 명령을 수용해 주변의 眞表系 法相宗 세력들을 달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과거에는 꺼렸던 개경에서의 法會에도 참여한다.
마지막 단계는 최씨무신정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와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도모한 시기이다.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熙宗의 폐위와 여기에 가담한 승려들의 희생은, 승형이 최씨무신정권에 대한 입장에 큰 변화를 주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승형은 최충헌의 측근이었던 崔俊文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의 고향 인근에 위치한 寶鏡寺에 住錫하였으며, 그가 지지하였던 최충헌의 막내아들 崔珦의 정치적 위상 상승을 위해 雲門과 八公山 일대의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러나 崔怡가 최충헌의 후계자가 돼 최준문을 제거하면서 승형은 이를 의식해 보경사를 떠나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승형의 사후 그의 僧團은 정치적 지원을 얻지 못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The Guksa Wonjin, Seunghyeong is usually introduced as a Buddhist monk who was in cooperation with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that seized control over the Goryeo Kingdom, because he was active during the period of the regime. When accurate research is performed about his activities and political complexion at that time,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uksa and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had been changed gradually in three phases.
In the first phase, the Guksa Wonjin, Seunghyeong resented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and sought religious actions against it. Seunghyeong watched his uncle Shin Gwang-han and Zen Buddhist monks, who had helped him succeed, being removed while King Myeongjong was dethroned, and he grew to hate Choe Chung-heon, who took the lead in this activities. Meanwhile, Seunghyeong preferred practicing asceticism outside the government to inside Gaegyeong, the capital, and showed interest in Lee Ja-hyeon's Layman Buddhism, to attract scholars alienated by the military regime to stand against Choe Chung-heon.
In the second phase, Seunghyeong partly embraced the engagement policy of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because he cooperated with the royal family that he favored. After Choe Chung-heon's opponents were remitted and the royal family and scholars that he liked asked him to be a chief Buddhist monk of Yujeomsa Temple in Geumgang Mountain, he accepted the offer and appeased the force of Jinpyo line's Beobsang Buddhism in the area around the temple. Thereafter, he participated in Buddhist ceremonies in Gaegyeong that he had disliked in the past.
In the third phase, Seunghyeong acknowledged the reality that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seized power, and he actively tried to improve their relationships. He changed his position on the Choe House's Military Regime mainly because King Heuijong had been dethroned after trying to kill Choe Chung-heon and the monks who had cooperated in the incident had been sacrificed. Considering his relationship with Choe Jun-mun, who was a close aide to Choe Chung-heon, Seunghyeong joined the Buddhist monastery in Bogyeongsa Temple near Choe Jun-mun's hometown. He also solved problems in Unmun and Palgong Mountain areas to fortify the political standings of Choe Hyang, the youngest son of Choe Chung-heon, whom Choe Jun-mun supported. After Choe Yi had succeeded Choe Chung-heon and had eliminated Choe Jun-mun, however, Seunghyeong had no choice but to leave Bogyeongsa Temple. His Buddhist monastic brotherhood drastically went into a decline by losing political support after his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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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태훈 ( Kim Taehoo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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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일변한 역학구도 하에서 인조 정권이 대일정책과 관련하여 어떠한 명분을 창출하고 전략적 돌파구를 모색하였는지를 검토한 연구이다.
본문에서는 먼저,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대일위기의식이 고조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동아시아 역학구도 상정과 대일위기의식에 대한 대응책 모색 과정에서 備倭論과 朝·淸和親論의 외교 논리를 창출하여 대응하는 모습을 재구성하였다.
비왜론은 대청 왜정 보고를 통해 전개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倭情 可慮·可疑'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조·청 간 전략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청·일 간 통교를 주선하라는 청의 지속적인 요구에, 조선 정부가 오히려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또 청·일 간 연계를 차단하면서 대일정책상 독자성을 유지해나갔다.
조·청화친론은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여 청에 稱臣하게 된 사실을 일본 측에 은폐하는 전략이었다. 비왜론과 달리 그 한계가 매우 분명해 보이는 조·청화친론은 여진족에 臣服한 사실을 公認하지 않음으로써 대일외교에서 조선의 국가적 위상을 유지하고 패전국으로서의 약세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전개되었다.


This thesis is a study examining what kind of justification the Injo regime created and strategic breakthroughs were sought in relation to the policy toward Japan under the dynamic structure of the Manchu War of 1636 as a turning point.
First of all,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rising awareness of crisis against Japan before an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Next, in the process of assuming the power relations between the East Asian countries and seeking strategies for the crisis consciousness with Japan, we looked at how to respond by creating diplomatic tactics such as diplomatic justification that prepare for the provocation of Japan(備倭論) and hiding the re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Qing(朝·淸和親論).
'Diplomatic justification that prepare for the provocation of Japan' was embodied in reporting Japan's movements to the Qing Dynasty. The Joseon government was able to form a strategic consensus between Joseon and Qing by delivering the message of threatening Japan's move. The Qing dynasty continued to demand from Joseon to arrange communication with Japan. But the Joseon government achieved certain results by taking a preemptive response. It also maintained the independence of its policy toward Japan while cutting off the link between Qing and Japan.
'Hiding the real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Qing' was a strategy to conceal from the Japanese side the fact that it had surrendered to the Qing Dynasty after being defeated in the Manchu War of 1636. This strategy seems to have very obvious limitations. It was developed for the purpose of maintaining Joseon's national status in diplomacy with Japan and not revealing its weakness as a defeated country by not revealing the fact that it had suffered from the Manchur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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