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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s of Korean Studies

  •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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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5-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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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8)~55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576
한국학논총
55권0호(2021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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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최충헌 정권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무신집권기 정치세력의 특징

저자 : 김효섭 ( Kim Hyo-sub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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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정권의 전개 과정을 검토한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고려 정치세력의 특징을 충분히 고려하지는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은 정치세력 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정치세력의 특징에 대한 이해는 사건을 해당 사회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본 논문에서는 정치세력의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최씨정권의 전개 과정, 특히 최충헌 일파의 정변부터 최우의 습권 과정까지를 검토하였다. 최충헌 일파는 최충수와 이지영 간의 갈등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이의민 세력만이 아니라 명종과 중방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유력 무인들도 제거하였다. 이후 최충헌 일파는 최충헌, 최충수, 박진재 등 개별 인물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분기하였고, 곧 이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최충헌은 최충수, 박진재를 차례로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최충헌은 인사권 장악을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활용하였다. 아울러 최충헌은 최우에게 권력을 계승시키기 위한 여러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 덕분에 최우는 최충헌의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우의 권력 승계는 최충헌 세력의 승계를 의미하지 않았으므로 최우는 집권 초기에 최충헌 세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세력을 강화해야 했다. 이상의 과정을 살피면서 무신집권기 정치세력의 여러 면모가 확인된다. 첫째, 정치세력은 정치목표, 이해관계를 매개로 결집하였다. 둘째, 특정 정치세력만의 정치적 지향이 분명하지 않았다. 셋째, 정치세력의 지속성은 이해관계 달성, 중심인물의 영향력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넷째, 정치세력은 단일한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Although several studies have reviewe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Chois' regime, their limitation was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litical groups of Goryeo were not sufficiently considered. However, since political events occur in the contex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political groups, understanding the characteristics of political forces is important to grasp the events in terms of the relevant society. In this regard, this paper reviews the development of the Chois' regime, especially from the coup of Choi Chung-heon's group, to the process of Choi woo's succession, taking into account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litical group of Goryeo. Choi's group launched a coup due to the conflict between Choi Choong-su and Lee Ji-young. In this process, Lee Eui-min's group as well as the influential warriors who exercised power in Jungbang were removed. Since then, Choi's group diverged as Choi Chung-heon, Choi Choong-su, and Park Jin-jae formed independent groups. Conflicts between them soon occurred. Choi Chung-heon succeeded in removing Choi Choong-su and Park Jin-jae. Consequently, he established a dictatorship and used the control of authority over human resources as a key element for maintaining it. In addition, Choi Chung-heon performed several deeds to succeed in his power. Thanks to this, Choi woo was able to inherit his power. However, the succession of power did not mean the succession of Choi Chung-heon's group. Therefore, Choi woo had to remove Choi Chung-heon's group and strengthen his own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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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의 신라 사선(四仙) 출자설(出自說)과 그 의미

저자 : 여성구 ( Yeo Sung-gu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6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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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의 신라 4선의 출자 인식은 화랑설, 신선설, 隱士說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4선의 세 출자설은 문인들의 黨色이나 시기에 따른 뚜렷한 특징을 보이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17~19C에 걸쳐 3설이 이어지고 있다.
4선의 출자설은 화랑설에서 신선설로 옮겨가게 되지만, 그 경계는 조심스럽게 유지되었다. 여전히 화랑설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에 신선설에 경도된 사람들도 있었다. 화랑설과 신선설은 상반된 견해이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보인다. 신선설의 배경으로 화랑설을 주목할 수 있다. 처음에 화랑설이 있었고, 점차 신선설이 대두하며, 은자설은 이 두 설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화랑설과 신선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 타협으로 등장한 인물이 蓬萊仙安期生이었다. 4선의 은자설은 이들이 화랑이라는 출자에 근거하면서, 아울러 신선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신선설이나 은자설은 모두 화랑설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The recognition of the origin of the Silla 4th Seon(四仙) of the Joseon literati is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Hwarang, hermit, anchorite so on. These views do not show any distinct characteristics according to the political tendencies or timing of literati. Three theories are continuing over 17 to 19C.
The 4th Seon origin theory was moved from the Hwarang to the hermit. So the boundary was kept careful. There were still people who insisted on the Hwarang, while there were people who were hardened by the hermit theory.
The Hwarang and the hermit theory are conflicting views but show organic relations with each other. The Hwarang theory can be noted as the background of the hermit theory. At first, there was a Hwarang theory, and gradually hermit theory became popular. And the anchorite theory played a bridge between these two theories.
The fierce debate between the Hwarang and the hermit theory is not confirmed, but the person who appeared as a compromise was An kisaeng in the Bongrae Mountain.
The anchorite theory was based on the origin of the Hwarang, and it was also the background of the hermit theory. In conclusion, both the hermit theory and the anchorite theory have its roots in the Hwarang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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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후기 구무(求貿)의 시행과 운영절차

저자 : 이승민 ( Lee Seung-mi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10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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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기존 조일무역 관련 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求貿의 시행과 운영절차를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양국 교역의 특징과 교섭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다. 구무는 일본 막부로부터 대조선외교와 무역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쓰시마가 필요한 물품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면, 조선조정에서 사안을 심의하고 허가해서 이루어지는 교역을 말한다. 이러한 구무는 교역시기나 물품의 종류·수량이 특별히 정해져있지 않았다. 또한 처리 및 결제방식이 다양하고 공·사무역과도 관련되어 있어서, 외교와 무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조일 양국 경제교류의 특별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쓰시마의 구무요청에 대한 조선의 접수 및 처리 단계는 크게 '요청(쓰시마)→접수 및 보고→논의→결정(이상 조선)'의 4단계로 진행되었다. 교역이 결정되면 조선에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해당 물품을 조달해서 倭館에 보내주고 물품가격을 치르게 한다. 구무는 외교와 무역관계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던 조선과 쓰시마 사이에서 이루어진 제3의 무역형태이자 동시에 특수한 형태의 무역으로서 쓰시마의 요청이라는 절대적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따라서 구무는 쓰시마가 자국에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동시에 쓰시마는 구무를 통해 끊임없이 조선과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쓰시마 측에 유리하게 정치·외교 협상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즉 구무는 기본적으로는 쓰시마의 열악한 경제사정과 경제적 욕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외교적·정치적 비중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조선 측으로서는 쓰시마를 매개로 형성된 간접통교체제 안에서 쓰시마를 효과적으로 회유·통제하고자 하는 수단의 하나로서 구무를 허락해주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Japan trad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negoti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by examining the implementation and operation procedures of the gumu trade, an understudied topic in the previous researches on the Joseon-Japan trade. Gumu indicates a form of trade in which Tsushima island of Japan, commissioned by the Japanese Bakufu to establish and maintain diplomatic relations and trades with Joseon, asked Joseon for specific goods when unexpected needs arose in the province. The gumu trade was conducted irregularly, and there was no mutually agreed norm as to the type and quantity of goods for trading. In addition, performed in various modes of operation, the gumu trade was connected to public and private trades. Thus it illustrates special aspects of economic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Japan in a time when diplomacy and trade were not separated.
Joseon's reception and processing of Tsushima's request for the gumu trade was executed in four major stages: a. request from Tsushima, b. reception and reporting to the court, c. discussion, d. decision. Once the Joseon court decided to carry out the gumu trade, the government procured the goods through various channels and sent them to the Waegwan. With the arrival of goods, Tsushima had to pay the price. The gumu trade was a peculiar, third form of trade between Joseon and Tsushima, which were very close to each other in diplomatic and trade relations. More importantly, as it occurred from the absolute needs of Tsushima island, the gumu trade was an effective way for Tsushima to obtain goods for its own province. Furthermore, Tsushima tried to constantly improve the relationship with Joseon through the gumu trade and to lead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negotiations in favor of Tsushima. In that sense, the diplomatic and political importance of the gumu trade was unmistakable too. Meanwhile, the Joseon government allowed the gumu trade, viewing it as an indirect diplomatic system that could conciliate and control Tsushima effe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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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청주(淸州) 읍지(邑誌)의 현황과 구성

저자 : 임형수 ( Lim Hyung-s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3-13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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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誌는 16세기 이후 지방의 관리나 사족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을 대상으로 삼아 편찬한 地理志이다. 이는 행정기구 단위로 작성되었고 정치와 문화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지역사 연구에 자주 활용되는 편이다. 조선시대 淸州의 경우 忠淸道를 대표하는 고을인 만큼 현재 10여 종의 읍지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중 일부가 해제 또는 번역을 통해서 소개되었을 뿐이고 아직 전반적인 비교 검토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
본고는 현존 청주 읍지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지역사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 기초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우선 成冊의 하한 시기는 대부분 관련 기록이 실려 있지 않아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일부 내용을 통해서 17세기 중반 1종, 18세기 후반 1종, 19세기 중반 3종, 19세기 후반 3종, 미상 5종으로 대략 추정하였다. 다음으로는 각 읍지의 편제 항목을 서로 비교하고 그에 따른 내용상의 특이점을 몇 가지 정리하였는데, 戶口와 田結의 수치에 의거한 지역 경제력의 양상이나 수록 인물의 黨色을 바탕으로 향촌 사족의 동향 등을 살펴보았다.


Town chronicles were geographies compiled by the local gentry or government officials in the region, and they detailed the area they lived in. Written on the scale of administrative agencies and containing a variety of information including information concerning politics and culture, town chronicles are frequently used in the research of local history. In the case of Joseon dynasty period Cheongju, 13 different town chronicles remain because Cheongju was a town that represented Chungcheong-do although some of them have been introduced only by way of bibliographical introduction or translation without general cross-checking carried out.
The present study attempted to establish a basic foundation that could be used for the research of local history by collecting and analyzing existing Cheongju town chronicles. First of all, it's difficult to know precisely when these chronicles were created because most of them lack records specifying the latest period as to when they could have been created. Nevertheless, some of their content allow approximate estimation suggesting 1 was created in the mid-17th century, 1 in the late 18th century, 3 in the mid-19th century, 3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5 unknown. Next, the study compared the compilation items from each town chronicle and accordingly arranged several significant characteristics in terms of their content. Specifically, as lacking as it was, the study estimated aspects of the regional economy based on household and tax-on-land figures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Hyangchon-sajok(country aristocrats) based on the party identities of the figures inclu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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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세기 강원도 향촌사회의 사회상을 고찰하기 위한 기초 연구의 일환으로, 이제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江原道各郡狀題』의 체재와 구성, 주요 내용을 고찰하였다.
하버드-옌칭연구소에 소장된 이 책은 1827년 5월부터 1828년 12월까지 강원도의 영속이 관찰사에게 올린 보고와 그에 대한 처분을 포함하여, 백성들이 관찰사에게 올린 청원과 그에 대한 처분을 요약·정리하여 성책한 것이다. 모두 17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 책마다 하나의 군현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강원도 전체의 상황은 물론이고 군현별 현안을 살펴보기에도 알맞은 구성을 이루고 있다. 또한 각 책은 다시 관찰사에게 올린 報狀의 내용과 백성들이 관찰사에게 올린 民狀의 내용이 구분되어 있어서 민장의 내용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후속 조치의 과정을 확인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첫째 백성 간의 사회경제적 갈등, 둘째 부세 문제, 셋째 각종청원 사항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백성들 간의 사회경제적 갈등은 다시 債貸로 인한 분쟁, 山訟, 전답 및 노비 관련 분쟁, 혼인 문제로 세분된다. 둘째 부세 문제는 軍役, 還穀, 雜役, 蔘貢에 관한 문제로 세분된다. 셋째 각종 청원 사항은 旌閭, 유배인의 방면, 救恤, 募緣의 허가를 요청한 문제로 세분된다.
이처럼 이 책에는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19세기 전반 강원도 향촌사회의 전반에 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앞으로는 이를 토대로 한 본격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인데, 특히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던 개인간의 사회경제적 갈등 양상과 이와 같은 사회문제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에 대한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 할 것이다.


This thesis studied the system, composition, and main contents of 『Gangwon-do Gakgunjangje』 which has been little known until now as part of a basic study for considering social aspects of local society in Gangwon-do in the 19th century.
This book possessed by the Harvard-Yenching Institute generally consists of summaries of the people's petitions to a provincial governor of Gangwon-do and their dispositions from May 1827 to December 1828. As the book consists of total 17 books and each book recorded contents of a county and prefecture, it is suitable for examining pending issues by county and prefecture as well as the overall situation of Gangwon-do. And as each book is again classified into contents of official documents(報狀) to the provincial governor and the people's complaints(民狀) to him, it is helpful for checking the process of the follow-up measures which cannot be checked in the contents of the people's complaints
The contents of the book can be categorized as first, social and economic conflicts among the people, second, taxation issues, and third, all kinds of petitions. First, the social and economic conflicts among the people are again subdivided into disputes due to Chaedae(債貸), disputes related to mountain lawsuits(山訟), fields and paddies, and slaves, and marriage issues. Second, the taxation issues are subdivided into issues concerning military service, grain loans, miscellaneous service, and tribute ginseng(軍役, 還穀, 雜役, 蔘貢). Third, all kinds of petitions are subdivided into issues to request permission of bannered gate commendation(旌閭), the release of exiles, reliefand aid(救恤), and Moyeon(募緣).
Like this, the book includes the specific and various contents that can study the local society of Gangwon-do at large in the 19th century. Therefore, regular studies based on these should be followed. Especially, analyses of the aspects of social and economic conflicts among individuals that most frequently happened and the background and causes of the social problems like this should first be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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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제하 낙동강개수사업의 추진과 지역 주민의 반응

저자 : 최병택 ( Choi Byung Taek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19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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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한강, 낙동강을 비롯한 주요 하천을 대상으로 하천개수사업이라는 것을 시행했다. 이글은 그 중에서도 낙동강을 대상으로 시행된 개수공사를 분석한 것으로서, 필자는 이를 통해 낙동강개수사업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조선인들의 반응 혹은 대응을 소개하고자 했다.
낙동강 하류 지역은 예부터 상습 침수 구역이었고, 하천 연안의 땅은 침수로 인해 농사가 어려운 '잡종지'로서 가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중에는 이런 땅을 헐값에 사들인 후 수리조합을 만들어 방수 및 배수시설을 갖추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땅을 '옥답'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수리조합의 토지개량사업은 연이은 홍수로 난관에 부딪혔다.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어려움을 겼던 수리조합을 지원기 위해 당국이 주도해 파괴된 제방을 보강하고 배수 및 방수 시설을 보완하고자 낙동강 개수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낙동강개수사업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낙동강개수사업은 낙동강 하류 지역에 농장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이 상습 수해를 받지 않도록 돕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낙동강개수사업으로 빈발하던 수해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았던 조선인 언론이나 지역 주민들은 이 사업의 공사 구역을 보다 확대해달라고 청원하는 등 기대를 걸었다. 한편 이 사업이 실행됨에 따라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게 된 사람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물길이 바뀌어 수해에 노출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지역 사람들은 조선총독부의 공사 비용 전가 정책으로 큰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나 지역 주민과 언론들은 이 사업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식민지 현실아래에서는 '가진 자'를 위해 실시되는 사업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보다 그 사업으로 조금이라도 수해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더 컸던 것이다.


In the 1920s,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mplemented a river renovation project targeting major rivers including the Han River and Nakdong River. This article analyzed the renovation work conducted on the Nakdong River. I tried to introduce the background and contents of the Nakdong River renovation project, and the response or response of the Koreans in this article.
The lower part of the Nakdong River has been a habitually flooded area since ancient times, and the land along the river coast was of no value-land where farming was difficult due to flooding. Among the Japanese who came to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re were many people who bought such land at a bargain price and formed irrigation unions to have water and drainage facilities.
Th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started the Nakdong River renovation project to reinforce the destroyed embankment and supplement the drainage and waterproofing facilities, led by the authorities to support the unions that had been in such difficulties.
The Korean media and local residents, who believed that the frequent flood damage caused by the Nakdong River Renovation Project would be reduced to some extent, raised expectations, including petitioning for further expansion of the project's construction area. Meanwhile, many people suffered unexpected damage as this project was implemented. Some people were exposed to flood damage due to the change of the waterway, while others in the region were burdened by the government-general's policy of transferring construction c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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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30년대 한국 관련 서양어 문헌 목록의 편찬 경위와 분류체계 분석

저자 : 배민재 ( Bae Min-jae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1-2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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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재한 서양인 집단의 한국 관련 저술 활동의 경향과 흐름을 토대로, 1931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학회지 Transactions 제20호에 게재된 한국 관련 서양어 문헌 목록의 편찬 배경과 목적, 그리고 그에 담긴 함의를 분석하였다. 재한 선교사 2세인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문헌 목록에는 약 2,800여 점 이상의 한국 관련 서양어 저술이 14개의 대분류 항목과 24개의 중분류 항목, 그리고 3개의 소분류 항목 아래에 분류ㆍ배치되어 있다. 이 문헌 목록은 1970년대부터 한국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지식사적인 측면에서 문헌 목록이 편찬된 경위와 의미가 조명되지는 못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 목록의 분류체계를 통해 드러나는 편찬 주체의 인식과 그것을 둘러싼 당대의 학적 담론, 그리고 지식에 대한 수집과 분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래로, 재한 서양인 집단은 한국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핵심적인 주체였다. 아마추어 연구자로서 재한 서양인에 의해 생산된 한국에 관한 각종 저술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거나, 혹은 처음 접해보는 서구인들에게 정보와 지식으로 소비되면서, 한국에 관한 선 이해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한국 관련 저술 활동이나, 문헌 목록의 편찬에 대한 분석은 근대 전환기 한국 인식의 중추적인 맥락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서양의 한국 인식에 내포된 중층성과 상호성을 조명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This study analyzes the background, purpose, and implications of the bibliography of western literature on Korea published in Transactions vol.20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in 1931, based on the trends of Korean-related writing activities. In the list of corresponding texts allegedly written by Horace Horton Underwood, a second-generation of a missionary to Korea, more than 2,800 works of western literature on Korea are categorized and placed under 14 sections, 24 divisions, and three subcategories. This list of texts has drawn the attention of Korean history researchers since the 1970s, but it did not shed light on how and what the list of texts was compiled intellectually.
This work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ecognition of the main agent who compiled the bibliography through the classification system, and the academic discourse, and also the social space in which the collection and classification of knowledge was produced. A bibliography is a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Westerners' perception of Korea in the early 20th century, given that knowledge is a means of providing a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world. Various writings on Korea produced by Westerners in Korea have been served as a prior conception, and was consumed as information and knowledge by the Western world, based on their close observation and experience. Analyzing the deeds of the Westerners studying Korea and collecting, classifying literature about it, will be a starting point to shed light on the superimposition and reciprocity of the Western perception o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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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제시기 을종 농업학교의 특성과 학생 구성 : 상주공립 농잠학교의 사례

저자 : 이용기 ( Lee Yong-ki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8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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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시기 농업학교에 관한 연구를 사회사적 맥락으로 확장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3년제 을종 농업학교였던 상주공립농잠학교의 특성과 학생들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았다. 상주농잠학교는 1921년 경상북도에 두 번째로 세워진 농업학교인데, 지역사회의 적극적 참여보다는 관 주도로 설립되었다. 잠업을 특화한 학교로서 전문성을 가졌지만, 을종 학교로서의 한계가 컸기 때문에 갑종 학교로 승격되려는 시도를 계속 전개하였다. 상주농잠학교는 5년제 갑종 학교에 비하면 입학 경쟁률이 낮았으며, 반면에 졸업률은 높은 편이었다. 이는 을종 농업학교가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서도 기존 질서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상주농잠학교는 고연령 구조가 크게 완화되지 못한 채 지속되었고, 1920년대 중반까지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입학생 중에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극단적일 정도로 농업 편중이 심했고, 출신지 또한 경북 출신에 한정되다시피 하였다. 상주농잠학교는 대체로 학교 소재지 인근 지역의 농가에 그 영향력이 제한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3년제 을종 농업학교가 5년제 갑종 농업학교에 비해 위상과 영향력이 낮았던 사실은 일제시기 조선사회에서 학력의 위계 구조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This study starts with the purpose of expanding research on agricultural school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to the context of social history. To this end, the characteristics of Sangju Public Agricultural & Sericultural School(SPASS), which was a three-year term second-grade(Euljong, 乙種) agricultural school, and the personal composition of students were examined. SPASS was established in Gyeongsangbuk-do in 1921, and was founded by the government rather than active participation of the local community. As a school specializing in sericulture, it had a professionalism, but because of its limitations as an Euljong school, it continued to try to be promoted to a first-grade(Gabjong, 甲種) school. SPASS had a lower entrance competition rate compared to the five-year term Gabjong school, while the graduation rate was higher. This means that Euljong agricultural school was relatively incompetent, but had an atmosphere of conformity to the existing order. SPASS continued without much easing of the old age structure, and even in the mid-1920s, those who did not receive formal education accounted for a significant proportion of the enrolled students. In addition, the socioeconomic background of the students was extremely concentrated in agriculture, and the place of origin was limited to those from Gyeongsangbuk-do. It can be seen that SPASS has limited influence on farmhouses in the area near the school location. The fact that the three-year Euljong Agricultural School had a lower status and influence than the five-year Gabjong Agricultural School showed that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education was working strongly in Koean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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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을사늑약 이후 감리서(監理署)의 폐지와 부윤(府尹)의 외국인 업무 관할

저자 : 민회수 ( Min Hoi S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3-31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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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義州와 龍巖浦에 마지막으로 증설된 開港場·開市場 監理署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한 외교권 상실을 계기로 理事官을 수반으로 하는 통감부 휘하의 理事聽이 설치되자 그에 외국인 관련 업무를 인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련규정이 명시되지 않아 인계 초반에 다소간의 혼란이 생겼다. 이사청의 감리 업무 인계는 지역에 따라 순탄하게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었으며, 1906년 초반부터 각종 증빙 문서 발급과 토지 경매 및 護照 발급 등의 업무가 순차적으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인계 과정은 강제적이며 무법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후 감리서는 1906년에 폐지되었고 감리서 소재 행정구역이 郡에서 府로 격상되었으며, 府尹이 해당 업무를 인계하였다. 부윤은 대부분 감리가 그대로 임명되었고 일본인과 관련하여 기존 감리가 수행하던 업무를 대부분 승계하였다. 그러나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한정되었으며, 여타 외국인들 관련 업무는 관할하지 못했다. 이렇게 외국인 중 일본인 관련 업무만 부윤이 계속해서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일본이 외교권 박탈에 대한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해서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본의 업무 부담 경감과 한국의 일본인에 대한 통제권 유지라는 상호 이해관계 또한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부윤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한하여 기존 감리가 수행하던 업무들을 거의 그대로 수행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범죄, 경제 등 제반 문제에 관하여 일본 측 파트너인 이사관과 교섭한 양상이 기존의 감리-領事 관계와 거의 동일하였다. 아울러 개항장에서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노력 또한 매우 미약하나마 몇몇 사례들에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이 박탈된 현실에서 매우 제한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그와 같은 엄혹한 현실에서 그러한 노력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의 확인 자체가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With the deprivation of diplomatic rights by the forced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in 1905(乙巳勒約), Gamriseo(監理署; The Superintendent Office) was abolished after the handover of its duties on foreigners to the Japanese prosecutors(理事官). But only the duties on Japanese at the treaty ports and open markets were conducted continuously by Bu-yoon(府尹; Head of the Prefecture) who succeeded Gamri(監理; the Superintendent). This might have been due to the consideration of the international opinion about the situation of the Korean deprivation of diplomatic rights by Japanese Government, along with the coincidence of interests between Korean and Japan, the maintenance of control over Japanese at the treaty ports and open markets for the former, the relief of business burden for the latter.
Restricted to Japanese, Bu-yoon conducted alomost the same business as Gamri did, and he negotiated with the Japanese prosecutor in almost the same way as Gamri did with the Japanese consul on crimes, economy, and so on. And the efforts to try to save lives and properties of Korean people at the treaty ports and open markets are seen at a few cases. These were clearly restricted and doomed to failure, but also meaningful as their existence itself under the severe protectorate situation of Korea under Japan.

KCI등재

10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승전국 식민지의 청원서와 그 성격

저자 : 장석흥 ( Chang Seok Heu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35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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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발트 3국, 이집트, 베트남, 한국 등 7개의 약소민족은 1차 대전 당시 승전국의 식민지이거나, 승전국의 이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약소민족들이었다. 이들 약소민족의 청원은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라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파리강화회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들 약소민족은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청원 활동을 펴나갔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민족자결을 위한 국제사회 정의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청원은 파리강화회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이들 약소민족은 파리강화회의에〈청원〉에만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한편으로 독립운동을 맹렬히 전개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독립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갔다.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인 아일랜드와 이집트,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트 3국, 일본을 상대로 한 한국,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려는 베트남 등 모두가 그랬다. 그렇지만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아시아 일본의 식민지들은 국제사회에서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으며 일본의 식민지배는 더욱 공고해져 갔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약소민족들은 국제사회의 정의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꿈을 향해 전진해 갔다.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 식민지들의 민족자결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것은 민족자결의 정의가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확산과 팽창이라는 새로운 세계 구도를 결정짓는 민족자결의 배반이었다. 이는 파리강화회의의 한계이자 과오였다. 파리강화회의 전후 처리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남겼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복잡하고 지루하게 얽혀진 동유럽 민족분쟁의 원인을 제공하는 역사의 잘못이었다.


The Ireland, the Baltic States, Egypt, Vietnam, and Korea were colonies of Entente Powers or small nationalities which had no direct interests in Entente Powers. Petitions from these small nationalities fundamentally deviated from Wilson's concept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or the principle of the Paris Peace Conference dealing with the colonies of the Central Powers. Even though the petitioners of the small nationalities were fully aware of that, they continued their actions. Their cause was truly national self-determination of the small nationalities.
The petitions were fundamentally excluded from the Paris Peace Conference. The small nationalities did not expect only petitions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They also mounted independence movement while posing their independence issu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ll the seven small nations were the same: Ireland and Egypt which waged the independence war against England, the Baltic States against Russia, Vietnam which wanted to gain political freedom from France, and Korea against Japan. However, the Entente Powers' position was endorsed by the Conference. In addition, the issue of Asian colonies of Japan received little international attention. The Japanese colonial rule was rather solidified with the support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se small nationalities kept carrying out independence movements without relying on the international justice after the conference.
The issu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of the Entente Powers' colonies was completely disregarded at the Conference. It was not the justic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It was against the concept of truly national self-determination and just brought the spread of imperialism to the world. That was the limit and the fault of the Conference. Dealing with postwar issues at the Conference not only aroused the cause of the Second World War but also has been historical fault that caused ethnic strife in Eastern Europe in the 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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