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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고대 update

Prehistory and Ancient History

  • : 한국고대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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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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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70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652
선사와 고대
70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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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해현 ( Haehyun Par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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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 渡來⼈의 정체성을 백제 遺⺠과 연결을 지어 밝히려 한 본 연구는, 먼저 渡來⼈의 정체성의 양태를 백제 渡來⼈의 地名, 姓氏 등에서 찾았다. '⼤僧正舍利甁記'의 '百濟왕자', 俗姓 '高志'씨의 분석, ⾏基 고향에 왕인 후예 성씨들이 많이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新撰姓氏錄』의 도래계 성씨 및 백강 전투에 참여한 인물들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渡來⼈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밝혔다. 일본 고대문화의 鼻祖인왕인 후예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渡來⼈은 그들의 정체성을 수백 년 동안 지켰다. 渡來⼈을 위한 숙박 시설, 마한‧백제와 관련이 있는 말(馬) 사육 및 도요지 유적 등을 분석하여 河內, 和泉 등 여러 곳에서 渡來⼈ 후예들은 동족집단을 이루었고, ⻄琳寺, 葛井寺, 野中寺 등 氏寺를 건립하였음을 살폈다. 이러한 요인들이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백제 遺⺠과 渡來⼈ 후예의 결합과정 및 정체성 이완 과정을 밝혔다. 皇子 시절부터 실권을 장악한 天武天皇은, 백강 전투 이후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유민들을 이주시키고 관직을 주었다. 이미 그곳의 토착 渡來⼈ 후예들은, 蘇我氏를 무너뜨린 天智天皇보다, 그들에게 우호적인 天武天皇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래인 후예와 유민들의 도움을 받은 天武天皇은, 天智天皇 아들 ⼤友皇子와의 왕위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天武天皇 집권 기간 도래인 후예와 유민들은 백제계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유리한 상황이 갖추어졌다. 백제 유민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는 渡來⼈ 후예와의 만남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天武天皇 때 실각하였으나 持統天皇 때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권력을 장악한 藤原不比等은, 渡來⼈ 후예와 유민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渡來⼈ 후예와 유민들의 강고한 정체성은 藤原不比等의 압력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왕인 후예 ⼤僧正 행기가 이들의 구심점에 있었다.
백제계로서의 정체성은, ⾏基가 입적한 이후 급속히 약화되었다. 왕인 후예들이 漢系로 개변을 시도하는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백제 유민에게는 '百濟王氏'를, 渡來⼈ 후예에게는 『新撰姓氏錄』 등재를 통해 체제 내로 회유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identity of the people of Kudara Toraiins and the process of its change.
First, the aspect of Toraiins was confirmed. The aspect of Kudara's Toraiins can be found in the place name and surname. 'A reliquary bottle document of the Great Bishop', the analysis of secular surname 'Goshi', and the fact that there lived a lot of descendants of Wani in Gyoki's hometown. The identity is also seen in the surname of Kudra recorded in Shinsen shōjiroku(新撰姓氏錄). In addition, it can be found in the descendants of Toraiins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Baekgang River.
Next, the background of Toraiins' identity formation was examined. The identity was confirmed in the following. In the reliquary bottle document of The Great a Bishop, Gyoki was called the prince of Kudara, Wani. It has been already thought that Gyoki's mother was Kudarajin, a Toraiin of Kudara origins. Gyoki made accommodation facilities for the arrival of people, and there are horse breeding and pottery relics related to Baekje. Clans of the same origin lived in groups in the areas of Kawachi and Ismi. A family temple was also established. Through this, identity was formed.
Lastly, it revealed the process of bonding and identity relaxation between Baekje migrants and the descendants of Toraiins. After the Battle of Baekgang River, many Kudara refugees immigrated to Japan. Emperor Tenmu emigrated the royal family and nobles among these migrants to the area of his influence. And he gave them office. It was to get their support. The descendants of Toraiins also supported Emperor Tenmu. The descendants of Toraiins and the refugees united with their identity as Baekje. Emperor Tenmu won the battle for succession to the throne with the son of Emperor Tenji with the support of the descendants and the refugees. They established their identity during the reign of Emperor Tenmu.
However, the descendants and refugees who came from the time of Emperor Jitou were oppressed by Hujiwarahubito(藤原不比等). Nevertheless, the identity of the descendants of Toraiins and the migrants were able to overcome the oppression of Hujiwarahubito. Gyoki played a role in connecting the descendants of Toraiins and the refugees.
The Japanese government registered the surname “Baekje Wang” to the migrants and “Shinsen shōjiroku” to the descendants of Toraiins to conciliate. The identity of Toraiins and the migrants of Baekje was weakened after the death of Gy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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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우재병 ( Woo Jae-pyo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5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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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엽~6세기 전엽경 백제의 죽막동제사유적에서는 왜양식 제의가 포함된 정황이 발견되었다. 죽막동제사유적에서의 제의 활동 강화는 이 시기 백제 서해안 항로에서의 안전 확보가 중요한 과제였음을 시사한다. 백제의 서울지역 수도가 함락되는 등 고구려의 공격이 더욱 강화된 상황에서 서해안항로를 통한 전쟁물자와 국제적인 교역품의 안전한 운송은 백제의 국가적 과제였다. 특히 백제의 경우, 고구려와의 전쟁 비용·물자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왜와의 해상교역은 매우 중요하였다.
백제에서 생산된 철 등 전략물자와 장식 환두대도, 금 귀걸이 등은 특히 왜에게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백제는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왜 사신·상인들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 죽막동제사에서는 중국 남조양식 제의와 가야양식 제의도 왜양식 제의와 더불어 거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확실하게 인정되는 외국양식 제의는 소형석제모조품을 헌공하는 왜양식 제의가 유일하다. 왜인들이 백제의 국가적인 제사 장소에서 왜양식 제의를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측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이 합동으로 죽막동제사를 거행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고구려를 포함한 주변국에게 백제와 왜 사이의 긴밀한 외교적 연대를 과시하기 위한 연출된 행위였다고 추정된다.
죽막동제사에 왜양식 제의가 추가된 또 하나의 배경은 백제와의 외교적 연대 강화를 목표로 하는 왜의 새로운 정치·경제적인 전략 수립이다.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으로 교역의 중심축 역할을 상실한 금관가야를 대체할 새로운 교역 중심축을 확보해야하는 것이 왜의 최우선과제였다. 5세기 전엽 이후, 왜가 백제로 향하는 해상항로에 위치하는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 가야서부지역 정치체들과의 교역·교류를 강화한 것도 이러한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다.
6세기 전엽 무령왕 시기가 되면, 왜인들의 죽막동제사 참여와 더불어 백제 서남부지역 일부 수장묘에 왜양식 전방후원분이 채용되는 현상이 함께 등장한다. 이것은 전방후원분이 아닌 원통형토기라는 왜 무덤양식을 채용하던 5세기 후엽 단계에 비하여 양국 간의 상호 신뢰가 증가되었음을 시사한다. 백제와 왜에서 새롭게 정권을 잡은 무령왕과 게이타이(繼體)왕 사이의 개별적인 정치적 신뢰감도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남하정책 저지라는 이들의 전략적 목표와 더불어 상호 신뢰감이 이 시기 백제의 친왜정책 강화를 유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During the late 5th century to the early 6th century, Wa-style religious services were held at the Baekje's Chungmakdong ritual site. The recognition of the participation of the Japanese in Baekje's national religious services symbolizes the close political solidarity between the two countries. During the war with Goguryeo, Baekje's most important task was to ensure the safety of the west coast route. In particular, Baekje needed to strengthen maritime trade with Wa in order to secure the necessary costs for carrying out the war with Goguryeo. The two countries staged joint religious services to show off their close diplomatic solidarity to Goguryeo. Built in the southwestern area of Baekje in the early 6th century, the keyhole tombs symbolizes the clos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Wa, which was strengthened during this period. These actions are believed to have been intentional to prevent Goguryeo's attack. The deep ties between King Muryeong and Keitai administration also seem to have been an important factor in clos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during thi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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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세종 ( Kim Se-jo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7-9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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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간에 조사성과를 토대로 남원 교룡산성의 변화상을 살펴보고, 호남 제일의 요해지(要害地)이자 방어시설인 교룡산성의 고고학적 가치를 제시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교룡산성이 위치한 남원 시가지(市街地) 일대는 685년(신문왕 5) 3월에 남원소경(南原小京)이 설치되고, 691년에 소경성(小京城)의 축성이 이루어졌다. 당시 남원소경은 왕경과 닮은 격자형의 토지구획을 적용한 시가지를 조성하고, 조선시대의 남원읍성(南原邑城) 자리에 소경성(治所城)을 축조하여 중심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교룡산성을 축조하였다. 평지에 축조된 소경성과 배후산성(背後山城)을 조합한 당시의 도시계획은 완산주(全州)와 무진주(武州)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완산주와 무진주에는 평지 시가지의 중심공간에 주성(州城=治所城), 배후에 석축산성을 축조하여 일반군현과 차별화 된 경관을 연출했다. 이러한 형태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하에 주·소경에만 특화하여 정비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완산주의 배후에 축조된 전주 동고산성은 교룡산성과의 여러 속성에서 동질성이 간취된다. 1,000m 이상의 대형급 산성으로 분류되며, 수원확보와 장기간의 농성에 유리한 포곡식 산성으로서 성내 지형의 활용방식과 부대시설의 배치양상이 닮아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교룡산성의 초축 성벽과 동일한 축성법이 적용된 점이다. 성벽은 내구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벽 기저부에 지대석(地臺石)을 배치하고,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가공된 성돌을 바르게 들여쌓았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축성법은 완산주와 무진주에 편제된 군현성(郡縣城)과 경주 관문성(722)을 비롯한 타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교룡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원형인 평지 치소성과 배후산성이 하나의 조(組)를 이루면서 입보용(入保用)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기와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는 고려 후기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산성입보 전략에 따라 시대적 상황에 맞게 운영되었다. 현존하는 교룡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18세기 초반에 수·개축되어 완성되었지만, 그 원형은 통일신라시대에 갖춰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교룡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초축되어 조선시대까지 시대적 상황에 맞게 활용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초축 성벽은 시대를 달리하여 수·개축되는 성벽의 근간이 되었으며, 이러한 성벽에는 각 시대에 맞는 축성기술과 역사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향후 남원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교룡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시기별 특징과 성격이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which investigates the alterations to Namwon Gyoryong Fortress―the greatest defensive structure in Honam and a prominent strategic location―based on the investigation's findings―presents the archaeological value of Gyoryong Fortress. It is well known that Namwon Sogyeong was founded around urban area, where Gyoryongsanseong Fortress is located, in March 685 (under King Sinmun 5), and that regional capital fortress was constructed in 691.
Namwon Sogyeong established an urban area at that time that used a land division in grid pattern similar to that of the capital and constructed regional capital Fortress at the location of Namwoneupseong in the Joseon Dynasty to use it as a main space. Gyoryongsanseong Fortress was constructed behind it. Wansanju and Mujinju also indicate the period city layout integrating regional capital Fortress and Background Mountain Fortress erected on flat land.
A State fortress (州城=治所城) was constructed in the flat city region of Wansanju and Mujinju at that time, and a Sukchuk fortress was constructed from the behind, resulting in a scenery that was distinct from other counties and prefectures. It is thought that under rigorous governmental control, this design was created especially for capital and minor areas. In instance, Donggosanseong Fortress in Jeonju, which was constructed by Wansanju, and Gyoryong Fortress have homogeneities in many ways. The manner of employing the terrain and the design of auxiliary facilities in the fortress are similar, and it is categorized as a massive fortress with a height of 1,000m or more that is useful for safeguarding water supplies and long-term agriculture.
Above all, it is remarkable that the initial fortress wall of Gyoryongsanseong Fortress used the same construction technique. Foundation stones were placed at the bottom of the outer wall to preserve the fortress wall's strength and stability, and square or rectangular fortress stones were appropriately piled. Other locations, such as Gunhyeonseong and Gyeongju Gwanmunseong (722), which are assembled in Wansanju and Mujinju, may be discovered using this common building technique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Gyoryongsanseong Fortress, the circular land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continued to serve as an access point throughout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while joining forces with Chisoseong Fortress in the flatland and Background mountain Fortress. It is believed that it was in use during the Goryeo Dynasty's last years, when the anti-mongol struggle and Japanese invasion was at its height. It was run in accordance with the conditions of the time and the country's fortress entrance strategy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current Gyoryong Fortress was finished in the early 18th century after being rebuilt and refurbish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lthough it was later discovered that its original structure was constructed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According to the preceding information, Gyoryongsanseong Fortress was first constructed in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was used until the Joseon Dynasty. Particularly, original fortress walls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served as the foundation for the fortress walls that were restored and refurbished in other ages, and these fortress walls represent the fortification methods and historical experiences appropriate for each era. Through examination and research on Gyoryongsanseong Fortress, which includes the identity of the Namwon area, it is anticipated that the traits and traits of each era will be recognized in soli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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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성제 ( Lee Seong-j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2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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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隋唐代 묘지자료를 이용하여 遼⻄ 豪族의 존재 양상과 懷遠鎭의 鎭守 문제를 살펴보았다. 520년대에서 6세기 말까지 中原 각지의 호족들은 北朝 제정권이 그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재지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였다. 특히 이들은 鄕兵집단을 보유하고 있어 그 거취가 정세 변화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는데, 요서지역에서는 韓詳·韓曁 부자나 趙世摸 같은 이들이 그러하였다. 고구려가 요서지역 호족을 확보했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보인다. 여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영역 확대나 지배과정에서 현지 세력의 협조,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포섭이라기 보다는 '北魏 末'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요서 호족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요서 호족의 정치·군사적 역량은 요서로 진출한 고구려가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한기가 遼澤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에서 수가 요서호족 한기를 내세워 고구려 ⻄邊을 살피고 있었다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용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상·한기 부자의 이력은 요서 호족이 520년대 이래 상당 기간 고구려의 요서 경영에 협력했지만, 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수의 첨병으로 활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요서로 진출한 수는 그 최전선에 군사기지로 鎭·戍를 세웠는데, 懷遠鎭과 瀘河鎭이 그 일부였다. 이들의 주 임무는 고구려 방면의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회원진과 노하진이 611년 무렵에는 고구려 침공군의 군수 보급기지로 운용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전선의 후방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들을 보급기지로 운용할 수 있을 만큼 수는 고구려의 서변을 잠식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한편 612·613년의 침공이 실패로 끝난 직후에 모습을 보인 회원진은 當代에 이름을 떨친 고위급 무장들이 이곳의 진수를 맡았다는 점에서 종래와 다른 성격의 기지였다. '東北道⼤使'의 직으로 보아 한동안 동북 방어의 핵심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침공의 실패가 불러올 후폭풍에 대비한 조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던 조사달이 이듬해 회원진을 진수했다는 <趙士達墓誌>의 기재내용은 고구려 침공 실패가 불러온 위기의 구체적인 양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묘지는 그의 회원진 진수를 ⻄晉末 홀로 河北을 지키면서 前趙와 後趙에 대항했던 劉琨의 활약에 견주었다. 회원진은 수대 이래 요서 동부에 마련된 중원왕조의 핵심기지였다는 점에서 당이 입은 타격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aspects of the existence of powerful clans (豪族) in the Liaoxi region (遼⻄) and the issue of deploying forces in Hoewonjin (懷遠鎭), using newly discovered grave records from the Sui and Tang Dynasties. From 520 to the late 6th century, powerful clans in different parts of the Central Plain (中原) maintained order in local societies while all authorities of the Northern Dynasty could not exercise their ruling power. In particular, they possessed local soldier (鄕兵) groups and thus their position was an important variable in the change of situation. In the Liaoxi region, Han Sang (韓詳) and Han Gi (韓曁), who were the father and son, and Jo Semo (趙世摸) were from such powerful clans. This seems to be the reason why Koguryeo won over powerful clans in the Liaoxi region. It was not exactly winning over local powers to elicit cooperation and support from them in the process of expanding a territory or ruling, which would likely be the case in any era. Koguryeo needed the support and cooperation of powerful clans in the Liaoxi region in the special situation of the Late Northern Wei (北魏).
The political and military capabilities of powerful clans in the Liaoxi region could play a significant role for Koguryeo to establish a foothold there and expand its influence. Based on this understanding, this study found that Sui was paying attention to Seobyeon (⻄邊), Koguryeo, using Han Gi, who was from a powerful clan in the Liaoxi region from the fact that Han Gi died in Yotaek (遼澤). This was not known before. The history of Han Sang and Han Gi, the father and son, shows that powerful clans in the Liaoxi region had cooperated with Koguryeo for its influence there for a long time since 520, but by the late 6th century, they worked as an advanced guard for Sui.
Sui entered the Liaoxi region and established their military bases called Jin (鎭) and Su (戍) (Su) at the forefront, and Hoewonjin (懷遠鎭) and Nohajin (瀘河鎭) were part of the military bases. Their main mission was to defend the border with Koguryeo. By 611, Hoewonjin and Nohajin were operated as military supply bases for the army invading Koguryeo, which indicates that they were located behind the front line. Sui operated them as military supply bases because it had deeply encroached on Koguryeo's west coast.
On the other hand, right after Sui's invasion of 612-613 failed, renowned and high-ranking military commanders deployed forces in Hoewonjin. During this period, Hoewonjin's nature as a military base was different from the previous one. It can be seen from the position 'dongbukdodaesa (東北道⼤使)' that Hoewonjin was a key military base for defending the North-eastern area for some time. It was a measure to prepare for the aftermath of the failure in invading Koguryeo.
From this perspective, the record on Josadalmyoji (趙士達墓誌) that Jo Sadal, who fought for Tang's invasion of Koguryeo in 645 during the reign of Emperor Taizong, deployed forces in Hoewonjin tells us a specific aspect of the crisis caused by the failure in invading Koguryeo. Records in Josadalmyoji compared Jo Sadal's deploying forces in Hoewonjin to Yu Gon's (劉琨) brilliant exploit when he alone defended Habuk (河北) against the Former Zhao (前趙) and the Later Zhao (後趙) during the late Western Jin Dynasty (⻄晉). This shows that the blow suffered by Tang was more serious than expected as Hoewonjin had been a key military base of the Zhongyuan Dynasty and had been prepared in the eastern Liaoxi region since the Sui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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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은주 ( Kwen Eun-ju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1-15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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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한중 역사 논쟁은 중국 학계가 역사적 '禁區'로 여겨지던 고구려사를 필두로 한국 고대 북방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논의를 공식화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중국 학계의 기본 서술은 '동북공정'을 전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동북 변경 지역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변강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동북사를 정립해 가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근대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인 靺鞨이 주체가 되어 세운 唐의 지방 정권'이며, 숙신-읍루-물길-말갈(발해)-여진-만주(청)으로 이어지는 일원적 계통론을 정립했다. 이시기 대표적인 연구자는 ⾦毓黻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유물사관과 북한과의 관계로 발해사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모습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이후 북한의 박시형과 주영헌을 대표로 발해를 한국사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강조한 것이 알려지며, 중국의 발해사 연구를 자극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의 족속, 내원, 주체민족 및 역사귀속 문제 등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남한의 발해사 연구가 또 중국을 자극하였다. 이후 '동북공정'을 거치며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크게 성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중국의 발해사 연구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魏國忠이다. 최근 나온 『渤海史』는 웨이궈중의 발해사 인식과 쟁점뿐 아니라 중국 학계가 발해사 연구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론은 한국사와 관련이 없는 중국사의 일부이며,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독립국이 아닌 오늘날 '特區'와 같은 당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3년간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기존 중국 학계의 인식을 견지하면서도, 시진핑 집권 제2기를 맞아 중국의 우수전통문화와 역사 정책 및 연구지원과 맞물려 새로운 전환을 겪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정책적 고려와 중앙과 지방 차원의 학술적 지원은 중국과 한국의 발해사 연구 격차를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발해사 연구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일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사 시각에서 발해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발해 유적이 있는 북한·러시아와의 학술교류 심화, 신진연구자 육성을 위한 안정적인 지원시스템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The Korea-China history debate, represented by China's "Northeast Project" was sparked by Chinese academia's formalization of discussions to incorporate ancient Korean Northern History into Chinese history, led by Goguryeo history, which was considered a historical "prohibited zone(禁區)". However, the basic description of Balhae Temple in Chinese academia did not change much before and after the 'Northeast Project'. The study of Balhae history in modern China was conduc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Northeast History as a means of overcoming the crisis of the frontier in the face of escalating crisis in the Northeast due to the invasion of imperialist powers. Modern China established Balhae as a "local regime of the Tang established by China's ancient minority, Malgal", and established a unified genealogy theory leading to Sukshin - Eupru - Mulgil - Malgal(Balhae) - Yeojin - Manchu(Cheong). The representative researcher at this time was Jin Yu-Fu(⾦毓黻).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49, the appearance of claiming Balhae Temple as Chinese history has subsided. However, after the end of the Cultural Revolution, it was known that North Korea's Park Si-Hyung and Joo Young-Heon claimed Balhae as Korean history as representatives and emphasized it as a country that succeeded Goguryeo, stimulating China's research on Balhae history. Accordingly, from the late 1970s to the 1980s, research on the history of Balhae in China mainly dealt with problems such as the ethnicity, origin, subject ethnic group, and historical attribution of Balhae. And after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in 1992, research on the history of Balhae in South Korea stimulated China again. Since then, research on Balhae history in China has grown significantly through the 'northeast process'.
For about 40 years since the 1980s, Wei Guo-Zhong(魏國忠) is the one who can represent the study of Balhae history in China. The recent "The history of Balhae(渤海史)" shows not only the perception and issues of Balhae History in Wei Guo-Zhong, but also what the Chinese academic community intends to do through Balhae History research. The conclusion is that it is part of Chinese history that is not related to Korean history, and based on “The unified multi-ethnic Nation theory“, it is not an independent country, but a local government of the party like the "special zone(特區)" today.
In addition, while maintaining the perception of Chinese academia in the past three years, Chinese academic research has been undergoing a new transition in conjunction with China's excellent traditional culture, historical policies, and research support in the second period of Xi Jin-Ping's rule. In particular, the Chinese government's policy considerations and academic support at the central and local levels are feared to deepen the gap in research on Balhae history between China and Korea. In this situation, it is necessary to study Balhae history from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history beyond 'a national history' in order to promote the research on Balhae history in Korea.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deepen academic exchanges with North Korea and Russia, where the remains of Balhae are located, and to establish a stable support system for emerging researc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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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진광 ( Kim Jin-kwa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8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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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후 현재까지 중국학계에서 발표된 고고학 연구성과를 검토하였다. 동시기에 발표된 연구성과는 박사학위논문 4편 포함 총 136편이다. 그 연구주제도 건축을 비롯하여 관광, 교류 분야 등으로 다양하다. 주목되는 것은 관광 및 정책 분야의 논문이 25편이 발표되어 전체의 약 22%에 이른다는 점과 정부의 지원이 대폭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발해 유적ㆍ유물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유적의 보호, 활용 및 확산으로 확대되었음과 신진연구자들의 연구 의욕을 고취하는데 매우 큰 지렛대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환경은 곧 연구주제 외연 확대도 견인하였다. 연구자들의 연구 의식 고취, 연구 내용 심화 등에 동기를 부여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각 주장의 기저에는 발해사의 각 분야는 '당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연원조차 당을 배제하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당', '당 문화'에 대한 종속적 인식이 깔려 있다.
연구성과는 그 수량이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늘었고, 그 주제의 폭도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나 인식은 분석 기간 이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기왕의 논리가 더욱 강화되었다. '당', '당 문화'에 대한 영향력이 강조되면 될수록 발해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종국에는 “당의 지방정권”, “통일적 다민족국가”, “나라 안의 나라” 등 중국학계의 역사 인식이 더욱 견고해져 “발해사=중국사”의 논리가 고착화되었다는 우려를 불러온다. 따라서 중국학계의 연구 동향이나 연구주제의 확산, 연구주장에 대한 치밀한 검토와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최근 중국국가박물관의 고구려사 발해사 연표 삭제 사건이 있었다. 중국 정부ㆍ학계의 역사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연구자 개개인의 왕성한 활동으로 발해사 각 연구주제에 대한 심화가 필요하다. 문헌자료에 대한 검토가 더욱 치밀해져야 하고, 다양한 고고학 성과와 각종 보고자료 및 고고 현장에 대한 더욱 치밀한 검토와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순수 학문적 주장과 인식에 대한 점검 및 검증은 물론, 발해 고고학 발굴성과 및 연구성과들이 어떻게 대중화되고, 그것이 어떤 지향점으로 상품화되는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정책들이 입안되고 실행되는지 연구자 및 학계 차원의 지속적인 추적 관찰, 분석 및 대응 방안 도출도 필요하다. 또한 적시에 적확한 연구를 위해 정부와 학술단체의 지속적인 관심도 절실하다. 장기적으로는 전문연구자의 양성, 발해사를 전공하는 학문 후속세대를 양육할 프로그램 개발 및 발해사 연구와 활성화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Since 2010, a total of 136 archaeological research results have been published in Chinese academia, including four doctoral papers. The research topics are also diverse in the fields of tourism and economic exchange, including architecture. What is noteworthy is that 25 papers in the field of tourism and policy have been published, accounting for about 22% of the total, and government support has been greatly expanded. This means that academic interest in the remains and relics of Balhae has expanded to the protection, utilization, and spread of the ruins, and played a very large role as a lever in encouraging new researchers to study.
This environment soon led to the expansion of the research topic. It is clear that it motivated researchers to raise research awareness and deepen research contents. Nevertheless, underlying each argument is the subordinate perception of the "Tang Dynasty, Tang Dynasty culture" that each field of Balhae history is not affected by the "Tang Dynasty culture", and its origin cannot be understood at all without excluding the Tang Dynasty.
The number of research results has increased dramatically than before, and the scope of the subject has also expanded significantly. However, their claims and perceptions were not much different from the situation before the analysis period. Rather, the logic of the past has been strengthened. As the influence on "Tang Dynasty" and "Tang Dynasty culture" was emphasized, the dependency of Balhae intensified. In the end, this perception raises concerns that the logic of "Balhae History = Chinese History" has become more solid as Chinese academia's perception of history, such as "the local regime of the Tang", "unified multi-ethnic state", and "the country within the country" has become entrenched.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thoroughly review and monitor research trends, spread of research topics, and research claims in Chinese academia.
Recently, the Chinese National Museum deleted the chronology of the history of Balhae in Goguryeo. This is the result of reflecting the historical perception of the Chinese government and academia. In order to cope with this historical distortion movement, it is necessary to deepen the research topic of Balhae's perspective through the vigorous activities of each researcher. The review of historical materials should be more thorough, and it should be accompanied by an understanding of various archaeological achievements and a more detailed review and verification of various reporting materials and archaeological sites.
In addition to checking and verifying pure academic claims and perceptions, it is urgent to continuously observe, analyze, and respond to the popularization of Balhae archaeological findings and research results, and what policies are devised and implemented in this series. In addition, continuous attention from the government and academic organizations is needed for timely and accurate research. In the long run, a program to nurture the next generation of academics majoring in Balhae history, or a plan to research and revitalize Balhae history should be esta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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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진아 ( Jung Jin-ah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5-20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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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8·9세기의 사쯔마(薩摩)·오스미(大隅)지역의 하야토(隼人), 발해사절, 백제왕씨의 복속의례를 대상으로 이적(夷狄)과 제번(諸蕃)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고대조정의 화외인(化外人)에 대한 인식체제가 복속의례형 예능에서는 어떠한 개별적인 속성으로 드러나며, 관찬사서 내에서 이들의 예능 상연과 관련된 용어들이 일본의 번국관념의 구조적인 특성과 어떠한 연결고리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하야토는 국(國)의 설치 → 준인사(隼人司)의 설치 → 반전제(班田制)의 시행 → 조공의례의 폐지 → 『연희식(延喜式)』에서의 역할규정으로 이어지듯이, 율령국가의 제도권으로 편입시킨 후 왕권의 수호자로 치환시켜가는 과정이었으며, 공민화 작업과 궤를 같이하면서 관찬사 서내의 하야토의 복속의례형 예능의 표기는 풍속가무에서 속기(俗技)로 변화되어 갔다. 발해사는 일본에 입경하게 되면 일본이 설정한 빈례(賓禮) 절차를 따르게 된다. 빈례의 핵심은 발해사에 의한 본국악(무)의 주상이었지만 육국사에서 본국악을 연주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일본의 소중화 논리를 극명하게 시각화할 수 있는 것이 의식에서의 번객의 본국악 연주였기 때문에, 일본 고대 조정은 헤이안(平安)시대의 의식서에도 번객의 본국악 연주를 상정한 예외규정을 설정하게 된다. 이는 관념상의 번국의식이 실제의 예외규정으로 이어진 사례이며, 번객의 본국악 연주가 있을 때는 기존의 의식이 중지되었다. 백제왕씨는 왕민화가 이루어진 씨족이었지만 헤이안시대에 이르기까지 관찬사서에서의 백제왕씨의 예능은 백제왕씨=백제왕권이라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백제국의 풍속가무'로 표출되었다. 일본 고대조정에서는 이적에 의한 왕권수호보다는 의례공간에서의 번객에 의한 본국악 연주가 천황제 지배의 완결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번객의 본국악 연주는 규정된 의식의 흐름을 변경시키거나 번객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염두에 둔 예외규정으로 이어질 정도로, 관념과 현실적인 소중화 세계의 재구성에 괴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왕씨의 악무상연을 천황과의 사적인 관계성보다 복속과 충성을 상징하는 번속의 악무로 보려는, 현실과 다른 관찬사서의 인식이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적과 번으로 상징되는 이민족은 일본의 천황과 양인공동체의 결속을 보강하기 위한 논리로 충분히 기능하였지만, 번의 설정 및 복속의 례형 예능을 통한 종주(宗主)의식이 한층 더 강력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일본 고대 천황제의 취약한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investigate how the recognitions of the Japanese ancient royal court on the foreigners who were not subject to the royal court were revealed as individual features and how the terms related to their art performances in the official history books compiled by the nation were related to the Japanese sense of Little Sinocentrism. It was studied based on the subjugating ritual music and dance rites performed by Hayato people in Satzma and Osmi, Balhae envoy, and the royal clans of Baekje Kingdom in the 8th and the 9th centuries.
Hayato people were in the transformation process from the antagonist against the ancient Japanese royal court to guardians of the royal authority by getting refined their rebellious nature. The terms that described Hayato's subjugating ritual-style art performance in the official history books of the nation have changed from Hayato-specific folk art performance to general art performance.
When Balhae envoys entered Japan, they followed the procedures of the welcoming diplomatic rites arranged by the ancient Japanese royal court. The core of the ritual consisted of Korean music and dance performed by Balhae envoys. However, according to the Six National Histories of Japan, it was very rare that Balhae's music and dance were actually played. Royal clans of the Baekje Kingdom were those who became the people of the Japanese emperor. However, until the Heian period, the art performances performed by them were described as "the folk songs and dances of Baekje Kingdom" under the premise that royal clans of Baekje Kingdom meant the royal authority of Baekje Kingdom.
The ancient Japanese royal court believed that the performance of traditional Korean music by Balhae and Silla's diplomatic envoy in the ritual space was a powerful device to show the completeness of the emperor's ruling, having a stronger effect than the royal power protected by Hayato. It was because there was a gap between the concept and the realistic world of Little Sinocentrism. The performance of Korean music by Korean envoys changed the flow of the fixed consciousness or led to a special rule with the virtual existence of foreign envoys from Balhae and Silla in mind. This can be seen as a different perception from the reality that the act of art performance in front of the emperor by royal clans of Baekje Kingdom was viewed as a music performance symbolizing subjugation and loyalty to the emperor rather than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The foreign tribes from each region who did not subject to the ancient Japanese royal court and the tribes of Balhae and Silla functioned sufficiently as logic to reinforce the solidarity of the Japanese emperor and the people of the emperor. However, it also implicates the weak character of the ancient Japanese imperial system in that their perception of the king and the subjects were revealed stronger through the setting of foreign tribes and the subjugating ritual-style art perfor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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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정빈 ( Lee Jeong-b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2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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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03년부터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되기까지 노무현 정부의 동북공정 대응을 살펴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2003년 7월 이후 알려졌는데, 정부의 「동북아시대구상」과 충돌할 수 있었다. 이에 정부는 민간의 중심의 대응을 원칙으로 하여 연구 지원에 주력하였다.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의 설립은 그와 같은 대응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중 역사 갈등은 지속되었고, 이는 한일 역사갈등과 더불어 「동북아시대 구상」의 주된 도전 요인 중 하나였다. 2006년 2월 국회에서는 총괄적인 대응기구로 동북아역사재단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그에 대한 역사학계·시민사회와 정부 측의 구상은 상당한 시차를 보였다. 역사학계·시민사회에서는 민간 주도의 학술단체로서 동북아시아 평화를 지향하였고, 정부 측은 정부 주도의 전략연구소로서 민족주의를 추구하였다. 결국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 분야의 연구기관이자 국책 전략연구소란 두 가지 성격을 함께 부여해 설립되었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활동은 정부의 역사 정책과 무관치 않았고,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에 구속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국수주의적 역사 인식에 동북아시아 평화를 지향한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립 목적이 도전 받았던 사정이 그를 잘 보여준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목적과 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독립성을 한층 철저히 보장할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aims at examining the Roh Moo-hyun government's response to China's Northeast Project from 2003 to 2006 when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was established. China's “Northeast Asia Project” has been known since July 2003, which could conflict with the government's “Initiative for Northeast Asian Era”. The government thereupon focused on the research support with the principle of responding centered on the private sector. The result of this was the establishment of Goguryeo Research Foundation in March 2004. The historical conflict between Korea and China continued, and this became one of the major challenges to the “Initiative for Northeast Asian Era” along with the historical conflict between Korea and Japan. In February 2006, the national assembly devised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s a general response organization. However, history academia, civil society, and the government differed considerably in the devising. While the history academia and civil society pursued peace in Northeast Asia as a privately led academic organization, the government pursued nationalism as a government led research institute for strategy. As a result,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was given two characteristics: a historical research institute and a national strategic research institute.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s activities, therefore, could not be irrelevant to the government's history policy, and there is a possibility of being bound by government led nationalism. The fact that the foundation's purpose for peace in Northeast Asia was challenged by the National Assembly and some parts of civil society's ultranationalistic perception of history shows this well. In order to develop in line with the establishment purpose of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it must strengthen its character as a research institute and thoroughly guarantee its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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