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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고대 update

Prehistory and Ancient History

  • : 한국고대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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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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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5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615
선사와 고대
65권0호(2021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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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반도 선사시대의 제정분리(祭政分離) 양상에 대한 일 고찰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김선우 ( Kim Sun-wo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24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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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서울ㆍ인천ㆍ경기지역)의 기존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 유적들과 매장 유적들의 위치 확인과 유적들의 형태, 규모 및 출토 유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제정일치(祭政一致)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로의 양상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가 되면, 전ㆍ중ㆍ후기에 걸쳐 주거 유적의 수와 규모가 증가하는 양상이 보여지는데, 전기에 해당하는 주거 유적들은 대체로 축조가 용이한 평탄한 구릉 정상부 능선에 입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기의 특징으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매장 유적인 지석묘 상석의 규모가 가장 컸다가 이후 점 차 감소하는 경향이 관찰되는데, 이 시기에 구릉 정상부에 환호 유적이 등장한다. 환호 유적 은 그 규모와 입지면에서 방어의 기능보다는 의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제정분리 (祭政分離)의 양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In this paper, focusing on the existing research results in the mid-western Korean peninsula (Seoul, Incheon, Gyeonggi Province), the settlements and burial sites corresponding to the Neolithic Age, Bronze Age, and Former Iron Age were reviewed in order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change from unification to a separation of ritual and political leaders.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infer that their type of livelihood was changing from an advantageous area for fishing to farming through the location of settlements in the Neolithic period. In the Bronze Age, the number and scale of settlements increased throughout the early, middle and late periods. Settlements related to the early period were usually located on the plain ridge of the hills where building construction was relatively easy. As a characteristic of the middle period, the size of the capstone of dolmen, a representative burial monument in the Korean Bronze Age, was observed to be the largest and then gradually decreased. At this time, the enclosure site appears at the top of the hill. It is assumed that the enclosure sites were related to rituals rather than functions of defense in terms of their size and location. This may be interpreted as an evidence of the separation of ritual and political leaders based on the records of Sodo in the Three Ha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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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제 강점기 이병도의 고조선사 연구

저자 : 송호정 ( Song Ho-j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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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이병도는 고조선을 한국 최초의 국가로 파악하고, 그 왕조가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을 거쳐 위만조선으로 이어진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시기로 파악하고, 그 시기의 역사를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정리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패수고(浿水考)」 논문에서는 그동안의 평가와 달리 고조선사의 전개와 활동 무대를 초기부터 요동(遼東) 지역을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이병도는 일제 강점기 이래 줄곧 요동반도~한반도 서북지방(평안 황해도)을 고조선 계열의 문화발상지로 보았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요동~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세력을 키우던 고조선이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세력이 진출하자 청천강 이남으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고, 그 이남 지역에서 왕(王)과 대부(大夫) 등 초기 고대 국가로서의 국가 조직을 갖추고 성장해 나갔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병도는 최근 고조선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내용을 이미 일제 시기부터 문헌 고증을 통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이병도의 연구 성과는 최근 고조선 중심지 평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고,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많은 역사학자들이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되고 폄하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한국 고대사의 웅대한 면을 그리려고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이병도는 역사서술의 합리성만을 추구했고, 식민지 시대에 요구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Japanese colonial period Lee Byeong-do identified Gojoseon(古朝鮮) as the first country in Korea and that he understood that Gojoseon was connected to Wiman Joseon(衛滿朝鮮) via Gija Joseon(箕子朝鮮) from Dangun Joseon(檀君朝鮮). And he identified Gojoseon as the period of Giza Joseon as having a certain state system and tried to summarize the history of the period empirically from a historical and geographical perspective. In particular, in the paper "Paesugo(浿水考)" the development and activities of Gojoseon's history were understood from the beginning by including the Liaoning area.
Lee Byung-do has always regarded Yodong Peninsula and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Pyeongan and Hwanghae Province) as the cultural birthplace of Gojoseon, since Japanese colonial period continued. And During the Bronze Age, the area of Gojoseon, which had been growing in power from the Liaodong to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was reduced to the south of the Cheongcheon River when Chinese forces entered the area around the 4th and 3rd centuries B.C.. Lee Byung-do has regarded Gojoseon grew up in the south of the Cheongcheon River with a national organization as an early ancient country, including the king(王) and the daifu(大夫).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ee Byung-do's research on Gojoseon is objectively and rationally summarizing the recent controversy over Gojoseon. And even the latest academic orthodoxy has had so much impact that Lee Byung-do's research has given him ideas.
Compared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hen history tried to correct our history distorted and disparaged by colonial history and paint the grand facade of ancient Korean history, Lee Byeongdo's research on Gojoseon pursued only the rationality of historical descriptions and there is a limit to the fact that he cannot be seen as a practical intellectual required during th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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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한 정권의 평양 인식 변화와 활용 -고조선ㆍ고구려사 연구 추이와 관련하여-

저자 : 이준성 ( Lee Jun-s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7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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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수도가 지니는 위상은 단순히 행정적 중심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계획하고 도시 공간을 조직하는 데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해방 전후 평양에 대한 인식은 '고조선ㆍ고구려의 옛 도읍'이라는 역사적 자긍심과 '중국의 식민지'라는 타율적 정체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정권은 평양의 재건 과정에서 고구려에 초점을 맞춰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을 '평양시 창건'의 시점으로 삼아, 1957년 '평양시 창건 1,530주년' 관련 행사를 대대적으로 기획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대동강 유역을 개척하면서 '동방의 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모습에 현재의 북한 정권을 투영하여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한편, 이후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평양이 지니는 역사적 정체성은 '인류문명 발상지', '우리 민족과 국가의 발원지'라는 점으로 모아졌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 북한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되고, 더욱이 민족의 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혈연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는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단군릉'의 발굴과 복원은 북한 정권이 의도를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이벤트였다. 이후 평양은 더욱 성지화되며 주체사상과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선전하는 데에 활용되었다.


A capital of nation means more than just an administrative center. North Korean government has reconstituted the identity of Pyongyang to match the government's purpose since the liberation.
There were two different types of perception of Pyongyang at the time of the liberation. One is the historical pride of “the former capital of Gojoseon and Goguryeo”, and the other is the heteronomous identity of the “Chinese colony”. North Korean government formed Pyongyang's identity focusing on Goguryeo during the rebuilding process of the city after the Korean War. A typical example is that the planning of the “1,530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founding of Pyongyang” on a grand scale in 1957, by taking 427 when King Jangsu moves the capital to Pyongyang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foundation of Pyongyang”. Their intention was to promote the government by projecting the current North Korean government onto Goguryeo that had grown into a “power of the East” while developing the Taedong River basin.
Starting in the early 1990s, however, Pyongyang's historical identity began to focus on “the cradle of human civilization” and “the cradle of nation and state”. It results from the strengthening of North Korea's nationalistic tendencies since the 1980s, as well as from the change that emphasizes not only the cultural aspect of the nation, but also the aspect of kinship. In particular, the excavation and restoration of Mausoleum of Tangun was the event that most closely matches the purpose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Since then, Pyongyang has become more sacred, and was used to promote the Juche idea and Joseon nation-first princi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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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내천 하류역의 고지형 연구

저자 : 이성호 ( Lee Sung-h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0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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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천 하류역은 한성백제기 핵심유적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성내천 하류역은 1970년대 초 상당한 지형변화로 원형을 잃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되지 못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성내천 하류역의 원지형을 찾고 세부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다.
서울 동남부 일대는 암반(풍화대) 위에 홍적층과 충적층 물질이 차례로 퇴적되어 형성된 지대이다. 성내천 하류역에서도 이와 동일한 퇴적 질서를 나타나며, '북동-남서' 방향의 충적단구가 기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성내천 하류역에는 독특한 원야(原野) 필지가 확인된다. 원야는 미고지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옛 항공사진과 시추주상도의 토층구조 자료를 사용하여 원지형적 양상을 분석해 보았다. 그 가운데 성내천으로 돌출된 한 필지에서 자갈섞인 두꺼운 점토층이 발견되었는데, 주변 풍납토성의 성토지대 점토층과 비교해 볼 때 물성적인 유사성을 보여 지형지세적 특성과 함께 성토 지대의 가능성이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그동안 잘 다뤄지지 못했던 성내천 하류역의 원지형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비록 연구결과는 실증적이고 명료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향후 풍납 및 몽촌토성의 관계성 문제를 비롯하여 백제 한성(漢城) 지역 이해에 대한 기초적인 틀로써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The downstream area of Seongnaecheon has a geographical significance as it is located between Pungnaptoseong and Mongchontoseong, the core ruins of the Hanseong Baekje period. However, the area lost its original form due to significant topographic changes in the early 1970s, and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until now.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discover the terrain of the downstream area of Seongnaecheon and analyze its detailed characteristics.
The southeastern part of Seoul is an area formed by sequentially depositing diluviual and alluvial layers on rock mass (weathering belt). The sedimentary order of the downstream area of Seongnaecheon is also shown in the same pattern, and the alluvial terrace in the direction from Northeast to Southwest with an altitude of 15 meters or higher forms the base topography. And the Seongnaecheon stream penetrates the middle of the terrace in an Z-shape. Meanwhile, some unique forest parcels were discovered around the abandoned channel of Seongnaecheon. A thick clay layer was found in one of the parcels, and it was concluded that it could be a filing ground layer compared to that of the near Pungnaptoseong.
This study attempted to find out the ancient terrain in the downstream area of Seongnaecheon, which had not been well dealt with so far, as an archaeological clue. Although clear results could not be reached, it is expected that it was able to contribute one step to understanding the geographic characteristics of the Baekje Hanseong region by presenting the original terrain and archaeological pos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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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원성왕 '즉위 설화'의 역사학적 고찰 -꿈과 해몽의 정치적 상징조작-

저자 : 최홍조 ( Choi Hong-j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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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원성왕 '즉위 설화'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사적 의미를 탐구한 것이다. 신라 下代의 실질적 開創者인 원성왕(재위 785~798) 김경신은 무혈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785년 1월 선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群臣 회의에서 김주원이 신왕으로 추대되었다. 北川(알천) 너머에 살던 김주원이 왕궁으로 향하던 때에 마침 냇물이 불어나 북천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衆議는 김경신에게 기울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알천 물이 불어난 것을 때마침 큰비가 내린(大雨 閼川水漲) 때문이라 서술하였다. 『삼국유사』는 왕위가 뒤바뀐 이유를 갑자기 불어난 냇물(忽川漲)로 설명하면서도 비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덕왕 재위 시절 김경신이 꾸었다고 하는 흥미로운 꿈 이야기가 실려 전한다. 꿈 속에서 그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갖고, 天官寺 우물에 들어갔다. 깨어나 점을 쳤더니 관직을 잃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징조라 하였다. 근심으로 두문불출하는 김경신에게 여삼이라는 귀족이 찾아와서 새로 해몽을 해주었다. 면류관을 쓰고, 12세손에게 왕위가 전해지며,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꿈이라는 것이다. 여삼은 또 김경신이 김주원을 이길 수 있는 방책으로 북천신 비밀 제사(密祀北川神)를 건의하였고, 경신은 이에 따랐다. 좋은 꿈의 응험으로 김경신은 결국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 所載 김경신의 '꿈' 설화는 『삼국사기』의 '큰비' 기사에 비해 언뜻 비합리적인 이야기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큰비(폭우)는 승자의 권력을 天命으로 수식하는 유교적 修史로 해석해야 한다. 오히려 '갑작스런 냇물의 벌창' 앞에 '꿈과 해몽' '북천신 비밀 제사'를 前文으로 실어 놓은 『삼국유사』 쪽이 그 역사적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 같다. 김경신은 왕위 계승 서열상 上位에 있던 무열왕계의 김주원을 제압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한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이다. 무혈 정변으로 종결된 이 쿠데타가 북천 냇물의 벌창과 김주원 '不得渡(건너지 못하였다)'로 상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경신의 즉위는 하늘(天)의 뜻에 의한 것으로도 北川의 神力에 의한 것으로도 꾸며질 수 있지만, 『삼국유사』의 설화는 북천신의 조력이 사실은 김경신 측의 인위적 노력이라는 것을 더 구체화하여 알려준다는 점에 그 사료적 의의가 있다. 방계 왕족 김경신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이 '나물왕 12세손'을 표방하였다. 여러 자료에서 원성왕 김경신의 治水에 대한 관심과 水神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북천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왕권을 후대에까지 영속화하려 했던 정치적 상징조작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This paper examines the story of the enthronement of King Wonseong(Kim Gyeong-shin) in 『Samguk Yusa』(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by historical method. King Wonseong (785~798) ascended to the throne through a kind of bloodless coup. In January 785, when King Seondeok died without a heir, Kim Joo-won was elected as the new king at the nobles' meeting. When Kim Joo-won, who lived beyond the Northern River(Bukcheon), headed to the royal palace, he couldn't cross the Bukcheon stream due to a large stream. Meanwhile, the official inclined to Kim Gyeong-shin and made him king.
『Samguk Sagi』(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describes the increase in the water of Alcheon(Bukcheon) as the result of heavy rain. In 『Samguk Yusa』 also described the reason why Kim Joo-won could not become king, it was a sudden flooding of the Bukcheon stream, but there is no mention of rain. Instead, there is an interesting dream story that Kim Gyeong-shin ha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deok.
Kim Gyeong-shin's dream is full of various signs and symbols. It vividly reflects the historical reality of defeating strong rival Kim Joo-won and ascending to the throne with his skills. In this paper, the creation of such a “dream story” and “the imperial story” was interpreted as a political act of symbol manipulation on the part of Kim Gyeong-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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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

저자 : 배현준 ( Bae Hyun-joo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7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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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신들을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일컫는다. 과거에는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들을 실제로 존재한 인물 또는 집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문헌기록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고, 서양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문명(국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며, 이에 따른 사회발전단계론도 구축한다. 중국의 문명 기준과 사회발전단계에 의하면 문헌 속의 하나라는 이미 발달된 문명 국가 단계로 고고학적으로는 이리두문화로 비정된다. 중화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보다 앞선 오제시대는 수장사회(고국) 단계에 해당하고, 홍산문화, 양저문화 등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중화문명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삼황시대는 자연스럽게 초기수장사회(고성) 또는 부족사회(고문화) 단계에 해당하며, 중화문명의 기원이 되는 시기가 된다.
한편 염제는 오제시대의 맨 앞에 있는 황제와 형제 관계이면서, 삼황시대의 맨 마지막인 신농과 동일시된다. 즉, 염제는 오제시대의 처음과 삼황시대의 마지막에 걸쳐 있는 것이다. 결국 염제의 실체화는 중화문명, 더 나아가서 중화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그 뿌리를 찾아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는 평등사회에서 문명의 전제가 되는 불평등사회로 전환되는 양상이 확인되기에 여기서 염제에 대응되는 고고학문화를 찾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앙소문화의 반파유형과 묘저구유형이 거론되지만, 문헌의 염제와 곧바로 대응시키기에는 아직 적지 않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과 정부차원에서는 염제와 관련된 사당과 무덤을 건설하고, 조상숭배의 제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The Chinese consider themselves the descendants of Emperor Yan(炎帝) and Emperor Huang(黃帝). Emperor Yan(炎帝) and Emperor Huang(黃帝) is person or group that represent the Three Emperors(三皇) and the Five Emperors(五帝) respectively. They used to be thought of as legendary beings, but recently they have been made to be real beings.
The Chinese emphasize trust in literature records, make standards of their own for civilizations and constructs social development theories different from the West.
On the other hand, Emperor Yan(炎帝) is identified as a brotherhood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Huang(黃帝) at the head of the five emperors(五帝), as well as Sinnong(神農) at the last of the three emperors(三皇). In other words, Emperor Yan(炎帝) covers the beginning of the five emperors(五帝) period and the end of the three emperors(三皇) period. In the end, the realization of Emperor Yan(炎帝) is the beginning of revealing how the Chinese civilization, and furthermore, the Chinese people, was formed, and at the same time, it was the beginning of the search for its roots.
Nevertheless, the private and government levels have built shrines and tombs related to Emperor Yan(炎帝) and used them as a place for ancestral worship. This gives Chinese people national pride, and also provides a good mechanism to unite Chinese society where various ethnic groups are intertw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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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우(遭遇)와 충돌(衝突)로 고구려(高句麗) 후기(後期)를 이해하다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저자 : 정동민 ( Jung Dong-m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190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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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기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제세력과 교섭하고 혹은 무력 충돌을 빚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렇다면 5~7세기 고구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외교와 전쟁 등 대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외교와 전쟁은 당시 국제 질서 그리고 각국의 외교 역량이나 집권 세력의 이해 관계가 반영되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대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질서뿐만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향까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최근에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김진한이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를 출간하였다. 저자는 고구려의 국정(내정)과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외정)를 연동시키며 역학 관계론적 시각에서 고구려 후기의 대외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ㆍ정리하였다. 본고에서는 저서의 구성과 내용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저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던 제세력의 내정과 외정까지 고려함으로써 어느 일방에 치우쳐 고찰하지 않았다. 또한 특정 세력이 아닌 제세력을 연구 대상으로 삼으며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체계ㆍ종합적으로 규명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 대외관계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In the rapidly changing international situation of East Asia in the period of from the 5th to the 7th centuries, Goguryeo became one of the axises of the international order in East Asia, with frequent diplomatic negotiations and armed conflict with various forces. Then, the most important thing that we should note to understand Goguryeo in the 5th and 7th centuries is foreign relations such as diplomacy and war. Diplomacy and war take place by reflecting the international order of the times and the diplomatic capacity of each country or the interests of the ruling powers. Therefore, in order to understand foreign relations at the time, it is necessary to accurately identify not only the international order at the time, but also the internal trends of each country.
Recently, considering these factors, Kim Jin-han published 『A Study on the History of Foreign Relations in the Late Goguryeo』. The author systematically organized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late Goguryeo period from the perspective of dynamic relations[Internal affair], inter-operating the state of Goguryeo with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East Asia[Diplomatic affairs]. This paper will introduce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the book and show the ideas of the writer.
The book deals with internal and external affairs of not only Goguryeo but also the other powers that had relations with Goguryeo. It studied all powers not just specific powers to describe the international relations systematically and generally in eastern Asia at that time. So it greatly contributed to the study of foreign relations of Gogu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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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천 계양산성의 조사현황과 성과

저자 : 김진웅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2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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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용인 할미산성 10년의 발굴과 그 성과

저자 : 이상국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34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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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영월(寧越) 정양산성(正陽山城)의 발굴조사 성과와 과제

저자 : 김진형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5-2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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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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