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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history and Ancient History

  • : 한국고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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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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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9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644
선사와 고대
69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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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환 ( Kim Sung-hwa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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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조의 고기에 대해서는 적어도 3백년 이상의 연구사가 축적되어 있다. 그간에 여러 검토와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성격부터 성립시기에 이르기까지 합의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조의 고기가 담고 있는 단군신화는 단군의 어국와 향국을 역년으로 접근한 권근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변증을 통해 해석되어왔다. 17~18세기에는 변증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성리학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그 신화는 황탄하고 佛說에 둘러싸인 것으로 비판되었다. 괴력난신이 일연을 통해 神異로 전환된 앞 시대의 시선과 전혀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비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단군신화를 조선 상고사의 서두에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어용학자들은 17~18세기 고기의 연구성과를 고조선 부정론에 역이용했다. 그들은 「고조선」조 고기의 단군신화를 일선동화를 위해 일본건국신화 안에서 재편하거나, 佛說에 근거해서 승려가 허구로 지어낸 가공의 仙譚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필원잡기』와 『연려실기술』에서 고기 또는 삼한고기를 전거로 실은 단군전승을 삼국시대의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
「고조선」조 고기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비교적 근래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여전히 그 실체를 삼한고기 또는 해동고기로 검토하는 시각도 있고, 단일서명으로의 『고기』로 검토하는 견해도 있다. “옛 기록”이라는 자의를 존중하는 견해도 있다. 그 성립시기에 대해서도 『구삼국사』와 관련해서 검토되기도 하고, 「북부여」조 고기에서 분주된 “大遼 醫州界”와 관련하여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 등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고려 건국 전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론했다.
고려시대에 유통되었던 고기류의 자료에는 단군 고기류로 묶을 수 있는 5~6종의 자료군이 있었다. 그중에서 「고조선」조의 고기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자료였다. 「고조선」조에서 고기는 『위서』와 보합의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향후 정치한 논리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본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For over 300 years, researchers have accumulated historical examinations of the Ancient Joseon period's Gogi(古記). During this time, various studies and criticisms have been put forth, but it has proven impossible to form a consensus regarding the work's characteristics or even the date of its composition due to the complexity of the surrounding issues.
The Tangun mythology, encompassing the Gogi of the Ancient Joseon, seems to have been confirmed by examples provided by Gweon Geun(1352~1409), who wrote about Tangun's dynastic period, approaching the topic from the years of Tangun's reign. Scholars have thus used his examples, dating as the are from a relatively early period, to interpret this mythos. During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these examples took on a more dynamic aspect. Scholars criticized scrutinizing the mythology from the viewpoint of Neo-Confucianism as both absurd and mired in Buddhist doctrine. This was an entirely different approach from that Iryeon(1206~1289), a Buddhist monk who attempted to reframe the wonders about ghosts from a previous age into a more acceptable depiction, divinity, choosing to focus on the story's sacred and heroic aspects. The scholars, though, did not content themselves even with this criticism; their concerns went further, centering around the complete reorganization of the Tangun mythos going back to the beginnings of ancient histo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government-sponsored scholars distorted the results of Ancient Joseon's Gogi conducted during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to suit their own ends. Typical examples included scholars such as Shiradori Kurakichi, Imanishi Ryu, and others. Through their writings, Gogi of the Ancient Joseon article was reduced to a mere hermit tale based on Buddhist teachings written by monks.
One scholarly viewpoint advocates the examination of the true nature of the Ancient Joseon article's Gogi using the Samhan-gogi and Haedong-gogi. Another calls for the study of the Gogi based on the title of the work itself, while yet another opinion involves evaluating the title's underlying Chinese character, which translates literally to "old record". Studies have been don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its date of composition and Samguk-sa. Related to Uiju county boundary in Liao Dynasty, part of the records of Northern Buyeo article, one can also see a separate examination conduct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eleven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twelfth century into the Gogi's connection to the formation of the Goryeo dynasty.
Among the historical documents circulated during the Goryeo dynasty, scholars were able to extract specific documents concerning Tangun and compile them into the data group. These were composed of the Ancient Joseon Gogi, Tangungi, Tangun-bongi, and an ancient record of an unknown title appearing in Wangryeok, along with others. Among these, the Ancient Joseon article's Gogi was confirmed to have been the standout document for a time. A mutual relationship exists between the Ancient Joseon article's Gogi and Wiseo, but a new explanatory approach is needed to address all of the weaknesses inherent in the numerous hypotheses and inferences regarding the nature of this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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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현수 ( Oh Hyun-su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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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은 한국사 왜곡을 통해 한반도 통치의 정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통칭 '식민사관'으로 통하는 역사작업 중 일제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 분야는 단군과 단군조선에 대한 왜곡이었다. 이 작업에 가장 앞장섰던 일본인 학자로는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를 들 수 있다.
오다 쇼고의 단군전승에 대한 언급 중에서 주목해서 검토할 만한 주장은 고려 후기 불교계 인물이 날조했다는 것, 충렬왕 이전에 단군전승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다. 우선, 오다 쇼고의 주장처럼 『삼국유사』에 기술된 단군전승에는 불교적 윤색이 가미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자가 일연이라는 승려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누구라도 역사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개인적 인식이나 감정, 사상적 배경이 반영될 수 있다. 다음으로 『삼국유사』 이전에 단군전승을 기록한 문헌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학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화학, 고고학, 문헌학 방면에서 이를 극복할 만한 많은 연구 업적들을 제시하였다.
한편 이마니시 류는 조선이 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세력에 압도되어 열수, 즉 대동강 남쪽까지 후퇴했고 연나라와 진나라는 대동강 북쪽까지 점유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 고조선의 역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고조선-연나라 항쟁 과정 이전에 고조선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문헌과 고고학 방면의 연구에서 입증되고 있다. 『관자』에 기술된 발조선과 아울러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춘추시대 혹은 전국시대 초반 고조선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리고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에 대해서는 『위략』에서 만번한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 만번한은 문현과 번한현의 합성어로 보고 있는데, 이는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조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연나라의 침입 이전 고조선은 요동 지역에서 정가와자유형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서북부 일부 지역으로 한정하려는 이마니시 류의 견해는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과 단군조선 혹은 고조선에 대한 역사 복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이 또한 연나라와 항쟁하던 전국시대 후반의 사실만을 인정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오늘날 고조선사학계는 식민사학의 잔재를 대부분 청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학자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분석과 비판적 검토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고조선사의 진면목이 더욱 부각되었으면 한다.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Japan sought to find the legitimacy of the Korean peninsula rule by distorting Dangun and Dangun Joseon. Japanese scholars who led the distortion of history of Dangun and Dangun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clude Oda Shogo and Imanishi.
Oda Shogo said that Dangun myths were fabricated by Buddhist figures in the late Goryeo period and there was no related record before that. The Dangun myths described in the Samguk Yusa are accompanied by Buddhist, but this happens naturally because the recorder, Ilyeon, was a monk. Anyone can reflect their personal perception, feelings, and ideological background when describing history books.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Dangun myths contains not only Buddhism but also Taoism, Confucianism and traditional religious elements. From the historical point of view of Dangun myths, studies have been conducted in the fields of mythology, archaeology and literature. There were studies on the bear totem mythology, ancient mother mythology, the mural paintings of Goguryeo tombs in the Jian area, and the faith of 'Jecheon and Jeho' in Dongye.
On the other hand, Imanishi Ryu said that Joseon was overwhelmed by the forces of the Yan Dynasty and retreated to the south of the Daedong River, and Yan and Jin occupied the north of the Daedong River. He is a complete disregard for the history of Gojoseon.
However, the fact that Gojoseon already existed before the Gojoseon-Yan war has been proven in literature and archaeological studies. The record of 'Baljoseon' described in Guanzi and the non-wave-like bronze sword culture in northeast China tell the historical situation of Gojoseon before the Chosunhou' rule period. And the boundary between Gojoseon and Yan is the manpanhan.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Imanishi Ryu's view to limit the area of Gojoseon to some parts of the northwest of the Korean peninsula is wrong.
Japanese schola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had no interest in restoring the history of Dangun, Dangun Joseon, or Gojoseon. Today, Korean historians can say that most of the remnants of colonial history have been liquidated, but the critical review of Japanese scholars' distortion of history should continue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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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원진 ( Cho Won-ch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5-9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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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한국사 연구는 한국고대사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마니시는 檀君과 箕子 등 고조선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그의 연구는 후대 일본학계의 고조선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보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마니시가 단군을 부정하며 '王儉'이 평양의 옛지명인 '王險'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거나 단군을 해모수라고 본 것은 큰 오류가 있다. 『三國遺事』의 사례처럼 본래 고조선의 도읍 명칭은 壇君王儉과 관련된 王儉城이 맞는 표기로 보인다. 또한 단군은 해모수와 동일인이 아니다. 이마니시는 단군 전승에서 불교적 요소가 적으며 구조를 보면 字句 상에 도교적 요소가 많다고 했으나 그가 언급한 도교적 요소는 단군 전승의 원형이 아니라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표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마니시가 기자 동래를 부정한 것은 한국학계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마니시는 기자 동래를 부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환의 『魏略』은 樂浪 韓氏의 僞系譜에 근거한 기록으로 보고 『魏略』의 사료적 가치도 불신하였다. 그러나 일부 윤색된 부분이 있더라도 『魏略』의 사료적 가치와 『魏略』에 나오는 고조선 왕들의 역사성까지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마니시는 기원전 3세기 이전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자가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조선과 이후의 위만조선은 성격이나 강역이 다르다고 보았다. 즉 전자는 한강(옛 대수) 유역을 중심으로 한 韓種族의 나라이고 후자는 대동강(열수)를 중심으로 한 중국민족(支那民族)의 나라라고 본 것이다. 또한 진번을 충청도와 전라북도로, 진국을 경상도로 각각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조선의 주민 구성과 진번ㆍ진국의 위치 비정은 오늘날 근거를 상실한 견해이다.
고조선의 존속기간과 영역을 축소하고 한사군의 위치를 최대한 한반도 남쪽으로 비정하려 했던 이마니시의 주장은 문헌ㆍ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The studies on the history of Korea conducted by Imanishi Ryu were generally o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He published several study results in fields related to Old Joseon, such as Dangun and Kija. His studies require more detailed analysis in that they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later generations of the Japanese academic world and their perception of Old Joseon.
There are deep flaws in that Imanishi denied Dangun while stating that “Wanggeom” originated from Pyeongyang's old name of “Wangheum” or that Dangun was the same person as Hae Mo-su. As in the case of “Samgukyusa,” Wanggeom-seong associated with Dangun Wanggeom is considered the correct notation for the original name for the capital of Old Joseon. Moreover, Dangun is also a different person from Hae Mo-su. Imanishi stated that there were only a few Buddhist elements and more Taoist elements in the expressions of the Dangun transmission. However, the Taoist elements he mentioned can be seen as written that way, not in the original form of the Dangun transmission but during the process of being set in characters.
Furthermore, Imanishi's denial of Kija's migration does not seem very different from the views of the Korean academia. However, Imanishi did not stop at denying Kija's migration but distrusted the historical value of Yilyag as he viewed Yu Huan's Yilyag as records based on the fabricated genealogy of the Nakrang Han family. However, it is difficult to completely deny the historical value of the Yilyag and the historicity of the kings of Old Joseon that appear in the Yilyag even if there are partly embellished sections.
Imanishi Ryu refused to acknowledge the true nature of Old Joseon before the third century BC but explained that Joseon before Wiman with the legend that Kija came to become king and the Wiman Joseon had different characters and territories. In other words, the former was considered a nation of the Korean race centered around the Han River(former Daesu), and the latter was considered a nation of the Chinese people centered around the Daedonggang(Yeolsu). Furthermore, Imanishi inferred that Jinbeon was Chungcheong-do and Jeollabuk-do, and Jinguk was Gyeongsang-do. However, this residential composition of the Old Joseon and location inference of Jinbeon and Jinguk are baseless views today.
Imanishi's claims that attempt to scale down the duration and territory of Old Joseon and modify the location of the Four Commanderies of Han to the far south of the Korean peninsula have a considerable amount of problems when viewed through the literary and archaeologic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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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구난희 ( Ku Nan-he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1-11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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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종전에 다루었던 발해, 요, 금의 5경제에 대한 후속연구이다. 이들 세 왕조가 복수의 경을 운영하면서 방위를 지칭하는 경명과 함께 부명을 병칭하였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이 글은 경부(경로)와 번부(번로)의 이원체제를 5경체제로 칭하고 그것의 형성과 운영이 영역 확대 과정과 조응하면서 각 왕조별 고유 특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요 시선을 둔다.
발해는 주요 거점에 경부를 두고 확장된 제족 지역에 번부를 두었다. 반면 요는 북면관ㆍ남면관이라는 관직 구도에 따라 남면관 지역을 경부로 편제한 것에 반해 북면관을 번부를 운영하였다. 다만 번부는, 북면관을 5경의 틀로 연결지을 수 없다는 비판을 고려하여, 종전 연구와 달리 8건제부(建制府)를 제안하는 동시에 대번부(大蕃府)를 중심으로 하는 안도 함께 살펴보았다.
금의 6경체제는 요의 5경체제를 연용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안착되었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여진 부락에 형성된 로는 기본적으로 상경과 동경에 포함되었다. 이는 요의 거란 부락이 북면'대번부'로 편성된 것과 상반된다. 역으로 한족 지역으로 확대된 지역은 독립된 '번로'로 편성되었는데 이 또한 확대된 한족 지역을 5경에 포함한 요의 방식과는 상반된 것이다. 금의 5경체제 구조는 요가 아닌 발해의 방식이다. 금의 이러한 6경체제 형성 과정을 역추적해보면 발해의 5경은 선왕대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마련되었고 이후 번부가 추가되어 5경 15부 62주로 안착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하지만 요의 번부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 있다. 혹자의 주장처럼 5경제가 찬자의 상상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면 이러한 가설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요사의 두찬을 앞세워 많은 기록을 송두리째 부정할만한 근거는 아직 미약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사를 근거로 한 번부의 실체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 글에서는 기록에 존재하는 편린에 근거하여 북면대번부에 비중을 두었지만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This study is a follow-up to the previously published paper on the five capitals of Parhae, Liao, and Jin. It approached this issue again on the viewpoint of 'Five-Capital System'.
It has already been pointed out that these three dynasties operated the five capitals and they added the name of Capital which indicated the direction, to the name of province side by side. In addition to, the main focus in this study was placed on the fact that its structure was connected with the territorial expansion process while forming a dual system of Gyeongbu(京府, Capital province) and Beonbu(蕃府, Local province).
Parhae had Gyeongbus at its main base and put Beonbus in various ethnic regions that were expanded. On the other hand, in the case of Liao, according to the government structure of Bukmyeon-gwan(北面官, Nouth Branch Bureaucrat) and Nammyeon-gwan(南面官, South Branch Bureaucrat), while Nammyeon-gwan regions operated Gyeongbu, Bukmyeon-gwan regions established Beonbus. Especially considering the criticism that Bukmyeon-gwan could not be fitted under the framework of the Five Capitals, this paper covered not only the Geonjebu(建制府, Organic province)-focused idea but also the Daebeonbu(大蕃府, Great Local province)-focused idea. Also, this paper pointed out the 8 Beonbus that could not been paid attention to in previous paper.
In Jin, the Yeojin(女眞, Jurchen) ethnic regions were basically composed in Sanggyeong(上京, the Upper capital) and Donggyeong(東京, the East Capital) as Gyeongros. This is contrary to the fact that the Georan(契丹, Khitan) ethnic regions of Liao were organized as Bukmyeon 'Daebeonbu's. And the regions expanded into the Han Chinese area were organized as independent Beonros. It is also contrary to the style of Liao, in which Han(漢) regions were belong to Capitals as Gyeongbu.
Jin's Capital system might be same as the style of Parhae. So, If we trace back from the structure of Jin, it can prove once again that Parhae has already installed five Capitals in previous era, and the Beonbus were added later and ultimately settled down five capitals, 15 provinces, and 62 districts.
Even so, the reality of Beonbus based on Liao History is still unclear. As some argue, this hypothesis cannot be established if the five-capital system had discribed by the imagination of Liao history's author. This paper paid attention of Beonbus only based on Bukmyeonkwan written in Liao History, but further research is needed. This will be the next research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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