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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고대 update

Prehistory and Ancient History

  • : 한국고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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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 : 1229-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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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7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633
선사와 고대
67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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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원(翰苑)』 부여전(夫餘傳)과 7~12세기 유서(類書)의 부여관계기사(夫餘關係記事) 검토

저자 : 이승호 ( Lee Seung-h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3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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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翰苑』 부여전을 비롯하여 『晉書』 부여전, 『通典』 부여국조, 『太平寰宇記』 부여국조, 『太平御覽』 부여조, 『册府元龜』 부여국조, 『通志』 부여조 등 唐代 이후 찬술된 문헌의 부여 관계 기사에 대해 검토하였다. 살펴본 결과 먼저 唐ㆍ宋代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 부여 관계 기사는 대부분 『三國志』와 『後漢書』 및 『진서』 부여전의 정보에 바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은 유실된 『魏略』의 기술을 직접 인용한 경우는 검토한 문헌 중에서 『한원』 부여전이 유일하였다. 『한원』 부여전을 제외하면 唐ㆍ宋代 문헌 중에 부여 관계 기사는 대체로 『삼국지』 및 『후한서』 부여전을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後代 類書의 부여 관계 기사에는 현전하는 『후한서』 및 『삼국지』 부여전에서 전하는 정보와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 있다. 바로 2~3세기 부여 왕계와 관련한 정보인데, 『후한서』 부여전에 보이는 부여왕 '夫台'에 대한 정보를 후대 類書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점이나, 2~3세기 부여 왕계에 대해 尉仇台-位居-麻餘로 기술하면서 『삼국지』 부여전의 인식과 차이를 보이는 점은 현전하는 『후한서』 및 『삼국지』 부여전의 관련 기사들을 다시 곱씹게 만든다. 특히 『삼국지』 부여전 기사에서 그동안 하나의 인명으로 간주해 온 “簡位居”에 대한 해석 문제와 부여 麻餘王 시대에 '大使 位居'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후대 類書에서는 그를 尉仇台의 孫으로서 麻餘 이전에 왕위에 있었던 인물로 보는 시각 등은 이 시기 부여 왕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examined records of Buyeo(夫餘) not only in Hanwon(翰苑) but also in historical books compiled after Tang(唐) Dynasty such as Jinshu(晉書), Tongdian(通典), Taipinghuanyuji(太平寰宇記), Taipingera(太平御覽), Cefu-Yuangui(册府元龜), and Tongzhi(通志). According to the findings, first, most of the Buyeo-related articles contained in several literatures from Tang(唐) and Sung(宋) Dynasty are grounded on information found in the Records of Buyeo(夫餘傳) in Sanguozhi(三國志), Hou-Hanshu(後漢書), and Jinshu.
Nonetheless, records of Buyeo in Leishu(類書) compiled by later generations have some part that is differentiated from the information transmitted by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and Sanguozhi. It is the very information about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from the 2nd to 3rd century. Concretely, we cannot find the information about one of the Buyeo's kings, 'Butae(夫台)', found in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from Leishu of the next generations. Moreover, Leishu of the later generations are differentiated from the Records of Buyeo in Sanguozhi as they describes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in the 2nd to 3rd century as Wigutae(尉仇台)-Wigeo(位居)-Mayeo(麻餘).
These points remind us of articles related to the Records of Buyeo in Hou-Hanshu and Sanguozhi that have been transmitted up to now. Particularly, about the matter of interpreting “Ganwigeo(簡位居)” that has been regarded as a person name so far in the articles of the Records of Buyeo in Sanguozhi and the person appearing as 'Daesa(大使) Wigeo(位居)' in the reign of Buyeo's King, Mayeo(麻餘王), Leishu of the next generations tend to see him as Wigutae(尉仇台)'s grandson and the one that was on the throne before King Mayeo(麻餘王). This kind of viewpoint seems to allow us to analyze the genealogy of Buyeo's kings from a new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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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ㆍ당대의 삼한 인식 변화와 『한원(翰苑)』의 편목 설정

저자 : 이준성 ( Lee Jun-su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55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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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苑』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東夷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다. 동이 지역과 관련하여서는 7세기 당시 존재하고 있던 국가들 뿐 아니라 부여, 삼한 등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은 정치체들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또한 동이지역의 부여ㆍ삼한ㆍ고려ㆍ신라ㆍ백제 등 5개 편목 사이에는 부여→고구려, 삼한→신라 및 백제의 계승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편찬 당시 동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국가에 대한 관심의 범위가 그 역사적 계승에까지 닿아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원』의 편찬 과정에서는 '역사적 삼한'과 '현실적 삼한' 인식이 혼재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찬자는 '삼한'에 대해 면밀하게 분석하고 대응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내용 파악이 용이한 사서를 중심으로 삼한 편목을 구성하였다. 그것은 漢의 계승을 통한 中華 재건을 표방하던 수ㆍ당대 대외인식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아직 동이 지역에 대한 종합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던 상황을 반영해준다.


Looking at the composition of Hanwon, it is found to show a higher interest in the region of Eastern Barbarians(東夷) than in other regions. Regarding the region of Eastern Barbarians, not only the countries that existed in the 7th century, but also the political bodies that already ceased to exist, such as Buyeo and Samhan, were described. In addition, it established a succession relationship from Buyeo → Goguryeo, Samhan → Silla and Baekje among the five of Buyeo, Samhan, Goguryeo, Silla, and Baekje in the region of Eastern Barbarians. At the time of compilation, the scope of interest in the countries that existed in the region of Eastern Barbarians reached its historical succession. In the end, the author of 『Hanwon』would have had no choice but to organize a compilation on Samhan focusing on history books that were relatively easy to grasp instead of closely analyzing and addressing 'Samhan' after thinking over the difference between 'Historical Samhan' and 'Real Samhan.' It reflects the external perception in the Sui and Tang Dynasties that advocated the reconstruction of China(中華) through the succession of Han(漢), and at the same time reflects the situation in which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region of Eastern Barbarians was not yet reac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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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풍속』과 『고려기』 -수ㆍ당의 고구려 탐방과 7세기 동아시아-

저자 : 이정빈 ( Lee Jeong-b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7-8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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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裵矩의 『高麗風俗』과 『翰苑』에 인용된 陳大德의 『高麗記』를 비교ㆍ검토해 수ㆍ당의 고구려 탐방과 그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 『고려풍속』과 『고려기』 모두 전문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찬자의 활동을 살필 수 있고, 逸文과 전후 시기의 사서를 비교ㆍ검토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통해 저술 배경과 내용을 가늠해 보고자 하였다. 『고려풍속』과 『고려기』에는 지리를 비롯한 군사정보가 담겨져 있었는데, 각각 隋 煬帝와 唐 太宗의 고구려 공격이란 황제의 의중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책은 漢代의 영역과 대외정책을 염두에 두고, 고구려의 지리와 역사를 바라보았다. 고구려 지역이 漢의 郡縣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고려기』는 『고려풍속』보다 한층 확대된 정보와 지식을 담고 있었다. 『고려풍속』이 간접적인 탐방 자료에 기초하였다면, 『고려기』는 직접적인 탐방 자료로서 견문의 폭이 넓었던 데서 비롯하였다. 수가 고구려 지역에서 전개될 실전을 경시하였다면, 당은 수의 실패를 경계하였기에 교통과 지리정보 수집에 더욱 진력하였던 것이다. 7세기 전쟁이 추동한 정보 및 지식의 발달이었다.


This article aims at comparing Goryeopungsok(高麗風俗) by Bae Gu(裴矩, Pei Ju) and Goryeogi(高麗記) by Jin Daedeok(陳大德, Chen Dade) cited in Hanwon(翰苑) and considering Sui and Tang's Exploration of Goguryeo 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The entire text of both Goryeopungsok and Goryeogi is lost to history. However, the activities of the authors can be examined, and the remaining part of text can be compared with and reviewed through historical books from the same period. This article tries to estimate the basic background of writing and contentthrough the comparison and review. The various records of customs, such as Goryeopungsok, Goryeogi, and Seoyeokdogi(西域圖記), contained military information including geography, and it was written in response to Emperor Yang of Sui(隋煬帝) and Emperor Taizong of Tang(唐太宗)'s will of the attack on Goguryeo respectively. The two books grasped the history and geography of Goguryeo, considering the foreign policy of the Han dynasty, especially during the reign of Emperor Wu(武帝). It provided a justification for the war by emphasizing the fact that Goguryeo region was one of counties and prefectures of Han dynasty. Goryeogi contained comprehensive information and knowledge than Goryeopungsok. This was the result of the expansion of information and knowledge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While Goryeopungsok is based on indirect exploration data, Goryeogi is a direct exploration data which comes from a wide range of experiences. Sui neglected the actual battle that would take place in the Goguryeo region, and Tang was conscious of Sui's failure, therefore more effort was placed on transportation and geographic information collection. In summary, it was the development of information and knowledge that was driven by the seven 7th century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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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원(翰苑)』 주(注) 소인(所引) 『괄지지(括地志)』의 백제(百濟) 일문(佚文) 연구(硏究) -7세기 동아시아의 문헌지식-

저자 : 童嶺 ( Tong Ling ) , 임동민(번역) ( Lim Dong-mi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2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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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사와 동아시아사의 연구는 새로운 방법론(이론)과 새로운 사료라는 두 갈래의 길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본래 일본 福岡縣 築紫郡 男爵 西高辻信雄에게 소장되었고, 현재는 같은 현 太宰府市 太宰府天滿宮에 소장된 舊鈔本 殘卷 『翰苑』은 正文과 注釋 모두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唐代 四六文의 발전 맥락에 따라 보면, 『翰苑』의 正文은 騈體文學의 여러 많은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며, 『翰苑』의 注釋文字(특히 고구려, 백제 등의 조목)는 당 왕조와 동아시아사 관계에 충분히 유용한 사료이다.
본문은 일본에 소장된 『翰苑』에 인용된 『括地志』 佚文 연구로서, 이 연구는 필자가 앞서 쓴 『高麗記』 佚文의 연구(일본 교토대학 인문연구소 『東方學報』 2017년 12월 발표)와 자매편이다. 산일된 텍스트의 관점에서 당 왕조와 고구려, 백제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은 '佚籍文獻'과 '唐代 동아시아사'라는 두 시각으로부터 착수하여, 먼저 宮內廳 書陵部와 『翰苑』에 인용된 두 종류의 『括地志』 佚文에 주목하였다. 영국의 Joseph Needham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地理總志는 814년 李吉甫의 『元和郡縣圖志』이고, 이때는 이미 唐代 말기에 접근하였다.”라고 지적하였지만, 이것은 서적의 산일된 정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본문은 모두 6개 절로 나뉘는데, 주로 아래의 3개 방면으로 고찰하였다. 첫째, 『翰苑』 注 인용 『括地志』에 수록된 백제 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11개 佚文의 문자 고증을 진행하여, 백제 역법과 도성 위치, 5방 5부 등 중요 사료를 정정하였는데, 이것은 특히 백제의 관제, 제사, 왕족, 지리, 병력, 산천 등과 상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둘째, 신라·당과 백제의 전쟁에 관련된 지리, 풍속 정보가 담긴 『翰苑』 注 인용 『括地志』 佚文을 분석하였다. 『括地志』 佚文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7세기 '삼국시대' 최후의 백제 전쟁과 상당히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唐代는 地志學이 충분히 발달한 시대였고, 계승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漢·魏·六朝 地志의 장점과 사료를 계승하였다. 唐代 地志 문헌의 '다면성'을 분석하고, 아울러 唐代 羈縻州 계통 등 다각도로 淸儒 輯本 『括地志』가 어째서 백제의 조목을 失載하였는지에 대한 하나의 학문적 추측을 시도하였다.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is based on new methodologies and historical sources. The remaining ancient manuscript of Hanyuan(翰苑 舊鈔本 殘卷), which is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Dazaifu Tenmangu(太宰府天滿宮) in Japan, is a valuable material that contains the original texts(正文) that show the characteristics of “pianwen(騈文)” in the Tang dynasty, and useful annotation(注釋) for the stud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ang dynasty and East Asian history.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Kuodizhi (括地志) quoted in Hanyuan (翰苑), and a companion edition of “A study on the scattered texts of Gaoliji (高麗記)”, written by the present writer. Focusing on the scattered text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ang dynasty, Koguryŏ, and Paekche is re-examined.
To be more specific, this article started from two perspectives: “the scattered texts(佚籍文獻)” and “East Asian History during the Tang dynasty”. This article is divided into six sections, and the following three aspects were mainly analyzed. First, by conducting a literal examination of the historical facts of Paekche recorded in the Kuodizhi quoted in the annotation of Hanyuan, important records such as the Paekche calendar, the location of the capital city, and “Opang(五方, five provinces) and 'Opu'(五部, five districts) were corrected. These records are particularly important in relation to the administration, ancestral rites, royalty, geography, troops, mountains and streams of Paekche. Second, this article analyzed the scattered texts of Kuodizhi quoted in the annotation of Hanyuan that contains information on the war between Shilla, Tang, and Paekche. It is considered that the scattered texts are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to the last Paekche War in the seventh century, Three Kingdoms period. Third, the Tang dynasty was an era in which topography(地志學) was significantly developed,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succession, the merits and historical records of the geography of Han(漢), Wei(魏), and Six Dynasties(六朝) were inherited. This article aims at analyzing the “multifaceted aspects” of literature on topography of Tang dynasty and attempting academic inference about the reason why Kuodizhi lost the Paekche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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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숙신국기(肅愼國記)』의 성서(成書)와 7세기 당(唐)의 숙신(肅愼) 소환

저자 : 권순홍 ( Kwon Soon-hong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146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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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 『숙신국기』의 성서시기를 西晉代로 추정했던 기왕의 견해를 비판하고, 唐代설에 무게를 싣는 것이다. 西晉代설의 두 가지 근거, 『한원』 숙신전의 '위략왈' 부분은 '숙신국기왈'의 오류라는 추정과 『한원』의 『업중기』 인용은 『숙신국기』의 기술범위를 서진대로 한정한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오히려 7세기에 비로소 『숙신국기』가 書名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진서』 숙신씨전은 『숙신국기』를 전재한 것이라는 기왕의 추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唐代에 여러 버전의 숙신기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逸文의 비교ㆍ검토를 통해, 『한원』에 인용된 『숙신국기』와 『태평어람』에 인용된 『숙신국기』, 『진서』가 참고했던 숙신 관련 기록 등이 각기 다른 버전의 '숙신기'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셋째, 숙신이 正史 외국열전과 類書 등의 편목으로 구성되고, 여러 버전의 '숙신기'가 존재했던 현상을 7세기 당의 숙신 소환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소환의 배경에는 중국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당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周代 이래 숙신의 공물로서 楛矢와 石砮는 중국 왕조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지표였고, 고숙신과 숙신은 엄밀히 구분될 필요 없이, 중국 중심 국제질서의 표상으로서 소환되었다.


This article has three purposes. First, this article aims at criticizing the previous view that assumed the publication time of Suksingukgi(肅愼國記) as the Western Jin(西晉) dynasty, and adding weight to the theory that assumed the publication time as Tang dynasty. This article refutes the two grounds of the West dynasty theory. One is the presumption that the “Wiryak Wal(魏略 曰)” part of the Suksinjeon in Hanwon(翰苑) is an miswriting of “Suksingukgi Wal(肅愼國記 曰)”, and the other is the argument that the citation of Eopjunggi(鄴中記) in Hanwon limits the technical scope of the Suksingukgi to Western Jin. This article rather emphasizes that it should be noted that it is only in the seventh century that Suksingukgi appeared as the title of the book.
The second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aise a question of the previous assumption that the Suksinssijeon(肅愼氏傳) in Jinseo(晉書) was a reprint of the Suksingukgi, and to set out the possibility that several versions of the record of Suksin existed during Tang dynasty. Through comparison and review of the remaining texts, this article set out the possibility that Suksingukgi quoted in Hanwon, Suksingukgi quoted in Taepyeongeoram(太平御覽), and Suksin-related records referenced by Jinseo are different versions of the record of Suksin.
The third purpose is to define the composition of Suksin as one category of the biographies of foreign countries in the authentic history books and Leishu(類書), and the situation in which several versions of the record of Suksin existed as the recall of Suksin by Tang Dynasty during the seventh century. This article explains that Tang's intention to reorganize the international order centered on China was hidden behind the recall. Since the Tang dynasty, the tribute of the Suksin, Hosi(楛 矢, bush clover arrow) and Sungno(石砮, stone arrowhead), have been indicators of the Chinese dynasties' prime, and Gosuksin(古肅愼) and Suksin, which do not need to be strictly separated, were recalled as symbols of the international order centered o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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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구려 천왕지신총 연구

저자 : 전호태 ( Jeon Ho-tae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7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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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순천의 천왕지신총은 무덤칸에 목조가옥의 뼈대에 해당하는 보와 소슬, 소로 등을 나타내면서 실물과 그림이 어우러지게 배치한 특이한 구조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널방 벽을 사방연속 연꽃귀갑문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무덤주인의 생활 장면을 그린 점에서도 고구려 남북의 다른 고분벽화들과 다르다. 천장고임에는 천왕과 지신, 상금서수와 선인을 그렸는데, 체계적으로 8칸의 '人'자 소슬 사이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무덤주인의 소망이 불교의 낙원인 듯 보이나, 실제 내용은 선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드러냈다.
순천은 평양에 가깝지만, 고구려의 옛 서울 국내성과 새 수도 평양을 잇는 교통로에 있다. 순천에서 발견된 요동성총이 무덤구조상 요양 위ㆍ진 벽화고분과 평양권 벽화고분인 남포의 태성리3호분, 안악의 안악3호분을 잇는 벽화고분이듯이 천왕지신총도 무덤 구조와 벽화 구성에서 북의 국내성과 남의 평양 사이에 있다. 국내성 지역의 문화와 평양의 문화가 순천에서 만나 섞였음을 천왕지신총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천왕지신총 널방 벽에 그려진 사방연속 연꽃귀갑문은 연꽃 장식이 유행했던 북의 국내성 지역에서 내려온 문화 요소이다. 천왕지신총은 이런 연꽃 장식 문화가 순천을 거쳐 평양에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안악1호분과 덕흥리벽화분에 보이는 상금서수와 선인 표현은 순천을 거쳐 북의 국내성 지역에 전해졌다. 천왕지신총 널방 천장고임에 천왕과 지신, 상금서수와 선인이 체계적으로 묘사된 것은 이런 문화 요소 전파의 중간 단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순천이 문화 전통이 다른 고구려 남북의 두 문화가 만나 문화 혼합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는 사실이 천왕지신총을 통해 확인된다.


Cheonwangjisinchong Tomb of Suncheon, Pyeongannam-do, is a unique site where the tomb mimics a wooden house with crossbeams, frames, and stands appear with the paintings blending into the structure. That the casket chamber is decorated with lotus grid motifs on top of which is depicted a slice of life scene of the deceased also sets it apart from other tomb murals north and south of Koguryo. On the corners of the ceilings are painted cheonwang (heavenly king 天王), jisin (earthly deity 地神), auspicious animals (祥禽瑞獸), and immortals (仙人). They are placed in the eight spaces between the 人 shaped frame. The motifs suggest that while the deceased seems to hope for a Buddhist paradise, its actual details resemble more of the land of the immortals.
In closer distance to Pyeongyang, Suncheon is on the road that connects Guknaeseong, Koguryo's old capital, and Pyeongyang. Yodongseongchong Tomb, another tomb found in Suncheon, structurally resemble mural tombs of Wei and Jin. It is an inheritor of the tradition that includes Taeseong-ri Tomb No. 3 of Pyeongyang area and Anak Tomb No. 3 of Anak. Likewise, Cheonwangjisinchong Tomb structurally and thematically stands in between the traditions of northern Guknaeseong and southern Pyeongyang. In other words, Cheonwangjisinchong Tomb suggests that Guknaeseong culture and Pyeongyang culture mingled and fused right in Suncheon.
The lotus grid motifs that adorn the casket room of Cheonwangjisinchong Tomb is part of a northern tradition from Guknaeseong area where such lotus motifs were popular. Cheonwangjisinchong Tomb shows that such painting tradition may have went through Suncheon down south to Pyeongyang. On the other hand, the auspicious animals and the immortal motifs seen in Anak Tomb No. 1 and Deokheung-ri Mural Tomb traveled through Suncheon up north to Guknaeseong. The systematically placed motifs of cheonwang, Jisin, auspicious animals, and immortal on the ceiling corners of Cheonwangjisinchong Tomb shows such cultural transmission in progress. Cheonwangjisinchong Tomb shows that Suncheon served as a bridge between the distinct cultures of north and south Kogu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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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제 살포의 편년과 부장양상 -신라ㆍ가야 출토품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저자 : 이상원 ( Lee Sang-wo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12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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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백제지역에서는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사용되어 수전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구로 알려져 있는 살포의 출토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백제지역에서 살포는 한강과 금강,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 등 수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해와 남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출토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을 수계로 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 있다.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살포는 신부의 형태에 따라 방형과 제형, 반원형으로 구분된다. 분류된 형식을 중심으로 신부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공부의 길이도 지나치게 길어지는 변화가 확인된다. 또한, 신부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신부의 길이가 너비에 비해 길게 제작되는 변화도 확인된다.
백제 수전 농업의 발전과정은 수전과 수리관개시설에 대한 문헌 기록을 통해 크게 4세기 이전과 4~5세기, 5세기 후반으로 구분된다. 이를 살포로 보면 백제지역에서 수전 농업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는 5세기 후반이후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의 백제는 웅진천도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를 극복하고, 안정화되기 시작한 때가 무령왕이 즉위한 이후이다. 심해진 정치적 불안과 농민경제의 파탄으로 많은 유식자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국가 재정의 압박을 초래하였다. 이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이후 축소된 경제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방편과 유식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강유역권의 개발을 선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유역권을 중심으로 유식자를 귀농시켜 수리시설의 보수와 확충을 담당하게 했으며,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방증해주는 자료가 금강을 수계로 집중 출토되는 살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영역 확대도 실시하였으며, 특히 대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영역 확장은 편입된 영토의 유식자들도 흡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식자들 중 백제의 백성은 본래의 거주지로 귀농되었지만, 영토 확장 과정 속에서 편입된 유식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사민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살포는 이러한 유식자들의 사민 정책 속에서 대가야의 매장의례를 보여주는 축소모형농공구와 함께 백제지역으로 유입되어 들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Recently, in the Baek-je, there have been a growing number of excavations of salpo, known as agricultural tools that are closely related to rice paddy agriculture, used to open or block water skewer. In the Baek-je, Salpo is found in areas centered on water systems such as the Han-River, Geum-River, Mangyeong-River, Yeongsan-River, and Seomjin-River, especially in areas centered on the West and South Seas. In particular, it is characterized by intensive identification in areas where Geum-River is used as a drainage system.
The Salpo in Geum-River area is divided into square, trapezoidal, and semicircular depending on the body part. As the size of body part becomes smaller around the classified format, the length of anaxhandle can be seen to be too long. In addition, the smaller the size of body part, the longer the length of body part is compared to the width.
The development process of Baek-je's rice paddy agriculture is largely divided into prior to the 4th century, the 4th and 5th centuries, and the late 5th centuries, according to the literature on the rice paddy and irrigation facilities. It is estimated that rice paddy agriculture was most active in the Midwest through Salpo, an iron agricultural tool closely related to rice paddy agriculture, since the late 5th century.
In the late 5th century, Baek-je, along with transfer of the capital to Ungjin, was a time of political and economic turmoil. It was after King Muryeong took the throne that he overcame these times and began to stabilize. Around this time, intensified political unrest and the collapse of the peasant economy caused many idlers, which soon led to pressure on the national finances. Since the loss of the Han-River area, it has been known that it has chosen to develop the Geum-River area to solve the problems of the idlers and to expand its reduced economic base. It is believed that the government wanted to idlers turn to farming around the Geum-River area to repair and expand irrigation facilities, and to increase agricultural production and lay the economic foundation for the royal government. Data that proves the development of the Geum-River area can be said to be a Salpo that is excavated from the Geum-River through the water system.
Meanwhile, the expansion of the area to the outside was also carried out, especially in the Dae-Gaya region. This expansion is believed to have absorbed the occupied territorial idlers. Those who were Baek-je's people would have been farmed back to their original settlements, but in some cases, the new Idlers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ial expansion process would have been Samin in sparsely populated areas. It is believed that the spread of Salpo into the Midwest was introduced in the Samin policies of idlers, the relationship with Dae-gaya can also be noted, given that it is being excavated with miniature agricultural tools that show the burial rites of Dae-g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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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황사와 구황동 원지 유적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

저자 : 최광식 ( Choe Kwang-shik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3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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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국가가 형성되면서 왕궁을 조성하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생활하는 왕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상고기에는 시조묘와 신궁, 그리고 소위 '전불칠처가람'이라고 불리는 신성지역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중고기에 불교가 수용되고 토착신앙의 신성스러운 지역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처음에는 서천가의 흥륜사가 중요시되다가, 진흥왕대에 황룡사를 신축하면서 왕경의 중심이 황룡사를 중심으로 조성되고 분황사, 미탄사 등이 동천(東川)가에 조영되어 동쪽으로 중심이 이동되고, 황룡사는 호국사찰로서, 분황사는 정토신앙의 중심 사찰로서 왕경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중대에는 북천(北川)가에 봉덕사와 봉성사 및 봉은사 등 성전사원이 조성되어 왕실의 원찰 기능을 하면서 호국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왕경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남천(南川)가에는 담엄사와 인용사 등이 조영되어, 월성을 중심으로 동천ㆍ서천ㆍ남천ㆍ북천의 사천(四川)가에 사찰이 조영되어 왕경을 위호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왕경의 택지선정과 건축부재의 조달 등을 감안하면 천변이 공간 확보에 유리하였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면도 있지만 유교식 건물이 아닌 불교 사찰이 조영되었다는 것은 불국토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통일전쟁 직후 월성의 동단에 동궁과 월지가 조성되었으며, 북쪽에는 용강동 원지유적인 북원궁(北園宮), 남쪽에는 포석정 주변의 남도원궁(南桃園宮), 동쪽에는 구황동 원지유적인 청연궁(靑淵宮), 서쪽에는 수궁(藪宮) 등 왕경과 그 외곽지역의 경계 지역에 원지를 조성하여 이궁을 조성하였다. 이는 제의와 휴식의 공간으로 신선이 되고자 하는 신선사상 및 도교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신라인들의 로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궁은 유교적 예제에 의해 건축하고, 왕경의 주위와 핵심지역은 불교 사찰이 들어서서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고, 왕경의 경계 지역에는 도교적인 이궁을 조영하여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아우르는 유ㆍ불ㆍ선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As the state began to be formed, the Silla constructed the palace and, around the palace, began establishing the capital area where people reside. In early Silla, the most important areas were Ancestor's shrine(始祖廟), God shrine(神宮), and the sacred district. In middle Silla, the Buddhism was introduced and the Buddhist temples were established in the sacred district. At first, the Heungryunsa(興輪寺) temple of the west riverside(西川邊) was the most influential. During the reign of King Jinheung(眞興王), as the Hwangryongsa(皇龍寺) temple was newly established, the center of the state capital was moved to this temple. Bunhwangsa(芬皇寺) and Mitansa(味呑寺) temples were constructed in the east riverside(東川邊) and the center of the capital moved eastward.
In middle Silla, the royal temples(成典寺院) such as Bongdeoksa(奉德寺) and Bongseongsa(奉聖寺) were established and served as national temples. It was the center of the state capital in middle Silla. In the south riverside(南川邊), Dameomsa(曇嚴寺) and Inyongsa(仁容寺) temples were established. Around the Wolseong(月城) area, the Buddhist temples were established along the riverside of four directions protecting the capital. Locating Buddhist temples on the banks of the river not only has advantages of applying construction materials and site designation of the capital, but also shows the Buddha-ksetra perception(佛國土認識).
Meanwhile, right after the unifying war, Dong-gung(東宮) and Wol-ji(月池) were established in the easternmost Wolseong. And the Royal Villa(離宮) and Royal Pond(宮園池) were established around the capital and the boundary areas: Bulwongung(北園宮) in the north, Namdowongung(南園宮) in the south, Cheongyeongung(靑淵宮) in the east, Sugung(藪宮) in the west. They were spaces for the rituals and rest and it shows the Taoist immortal pursuit of people of United Silla(統一新羅).
The capital palace was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Confucius manual while the center and peripheries of the capital were for Buddhist temples and served as the landmarks. And adding the Taoist Royal Villa in the boundary areas, it was the harmonious capital plan embracing the Confucian, Buddhist, and Taoist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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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세기 삼국 간 전쟁포로의 동향과 그 의미

저자 : 장창은 ( Jang Chang-eun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1-27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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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4~7세기 중반 상호 간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른 전쟁포로의 발생이 빈번하며, 『삼국사기』에는 그 숫자 정보가 남아 있다. 이 논문에서는 생포를 의미하는 '虜'ㆍ'獲'ㆍ'掠'ㆍ'俘'와 '虜掠'ㆍ'虜獲'ㆍ'虜得'ㆍ'掠取'ㆍ'俘虜'ㆍ'俘獲' 관련 기록을 순수 전쟁포로로 파악하였다. '殺虜~人'ㆍ'殺掠~人'은 '죽이거나 사로잡음'으로 해석해 편의상 50%만 포로 인원으로 산정하였다. 4~7세기 삼국 간 전쟁 포로 인원의 득실을 따져보면, 고구려는 15,611여 명 획득, 백제는 14,960여 명 획득, 신라는 31,571명 상실로 산정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비해 전쟁포로의 획득에 우세하였다.
4세기에 고구려는 백제에게 1,011명의 전쟁포로를 획득하였고, 200명을 상실해 811명의 전쟁포로를 더 얻었다. 5세기도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9,500명의 포로를 얻었다. 광개토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우위가 장수왕대(412~491)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우위를 이어가 6세기 초 1,300명의 전쟁포로를 빼앗아 갔다. 7세기대는 삼국 간에 본격적인 영역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11,000명의 포로를 획득하였고, 7,000여 명을 상실함으로써 4,000여 명의 이득을 보았다. 백제는 1,300여 명의 포로를 획득하였고, 13,730명을 빼앗겨 12,43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신라는 16,730여 명의 포로를 확보하였고, 9,300명의 포로를 상실해 7,430명의 이득을 보았다.
전쟁포로의 신분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으로 나뉘며, 전투원은 일반 군인과 지휘관급으로 구분된다. 지휘관급으로 보면, 백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비전투원 대부분은 백성들이었다. 고구려가 획득한 포로는 백성 18,650명, 군인 4,150명이다. 반면에 백성 3,000명, 군인 4,200명의 포로를 빼앗겼다. 곧 고구려는 백제 및 신라와의 전쟁에서 백성의 손실을 거의 입지 않았다. 이는 전쟁포로가 발생한 삼국 간 전투가 주로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전개된 데 따른 결과였다.
백제가 획득한 전쟁포로는 백성 20,800명, 군인 19,700명이었다. 백제는 백성 10,650명, 군인 14,871명의 손실을 입었다. 백제는 7세기 전반기까지 고구려에, 이후에는 신라에게 백성ㆍ군인을 가리지 않고 다수의 전쟁포로를 빼앗겼다. 특히 648년에 김유신군과 벌인 일련의 전투에서 군인포로 10,000명을 잃었다. 사비기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40,000명임을 감안할 때 큰 타격이었다. 신라가 획득한 전쟁포로는 백성 3,000명, 군인 13,728명으로 군인이 많다. 이는 신라가 얻은 전쟁포로가 대부분 수세적 국면에서 발생한 전쟁 때 승리의 결과물로 얻은 군인포로임을 의미한다. 신라가 상실한 포로는 백성 28,800명, 군인 19,501명으로 백성의 손실 비중이 더 높다.
전쟁포로들은 생포해 온 국가의 일반 백성들보다 신분적 처지가 열악해 奴婢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갔다. 이들은 농민으로서 살아가거나 축성 등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에 귀속된 공노비로서 존재하였을 것이다.


The Three Kingdoms launched a mutual battle in the 4~7th centuries. Consequently, the occurrence of prisoners of war is frequent. The number information remains in the Samguksagi. In this paper, records related to '虜'ㆍ'獲'ㆍ'掠'ㆍ'俘' and '虜掠'ㆍ'虜獲'ㆍ'虜得'ㆍ'掠取'ㆍ'俘虜'ㆍ'俘獲' which mean capture, were identified as pure prisoners of war. '殺虜~人' and '殺掠~人' were interpreted as 'killing or capturing' and only 50% of the prisoners were calculated. Considering the gains and losses of the prisoners of war between the Three Kingdoms in the 4~7th centuries, Goguryeo was calculated with 15,611 people, Baekje with 14,960 people, and Silla with 31,571 people lost. Goguryeo and Baekje dominated the acquisition of prisoners of war compared to Silla.
In the 4th century, Goguryeo acquired 1,011 prisoners of war from Baekje, and lost 200 prisoners of war, resulting in 811 more prisoners of war. In the 5th century, Goguryeo acquired 9,500 prisoners from Baekje. It can be seen that Goguryeo's dominance over Baekje from King Gwanggaeto lasted until King Jangsu. Goguryeo continued its dominance over Baekje and took 1,300 prisoners of war in the early 6th century. In the 7th century, a full-fledged battle for territory took place between the three kingdoms. Goguryeo acquired 11,000 prisoners and lost 7,000 people, resulting in 4,000 benefit. Baekje acquired 1,300 prisoners and lost 13,730 people, resulting in 12,430 losses. Silla acquired 16,730 prisoners and lost 9,300 prisoners, benefiting 7,430.
The status of prisoners of war is divided into combatants and non-combatants, and combatants are divided into general soldiers and commanders. At the commander level, Baekje suffered the most. Most of the non-combatants were people. The prisoners obtained by Goguryeo were 18,650 people and 4,150 soldiers. Goguryeo lost 3,000 people and 4,200 soldiers. Goguryeo suffered little loss from the people in the war against Baekje and Silla. This was the result of the battle between the three kingdoms, where the prisoners of war occurred, mainly unfolded as a preemptive attack by Goguryeo.
Baekje's prisoners of war were 20,800 people and 19,700 soldiers. Baekje suffered losses of 10,650 people and 14,871 soldiers. Baekje lost large-scale prisoners of war to Goguryeo until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and later Silla, regardless of people or soldiers. In particular, 10,000 soldiers were taken away in a series of battles against Kim Yu-shin in 648. Considering that there are 40,000 soldiers that Baekje can mobilize during the Sabi capital period, it was a big blow. Silla's prisoners of war were 3,000 people and 13,728 soldiers, with many soldiers. This means that most of the prisoners of war obtained by Silla were soldiers prisoners obtained as a result of victory during the war that took place in a defensive phase. The number of prisoners lost by Silla was 28,800 people and 19,501 soldiers, with a higher proportion of the people's losses.
The prisoners of war lived as slaves because their status was inferior to the general people of the country they had captured alive. They were mobilized for various labor such as living as farmers or building castles. In most cases, it would have existed as a public slave belonging to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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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울ㆍ경기지역 삼국시대 산성 정비와 진정성 유지 방안

저자 : 윤성호 ( Yun Sung-ho )

발행기관 : 한국고대학회 간행물 : 선사와 고대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30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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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서울ㆍ경기 지역의 석축 산성 중 우선 신라의 주치소인 하남 이성산성, 서울 아차산성, 이천 설봉산성과 연차적인 성벽 보수가 이루어진 여주 파사성, 안성 죽주산성, 오산 독산성, 포천 반월성에 대한 정비 현황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고고학적 자료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벽을 해체 보수한 산성에서 많은 문제점을 확인하였다. 복합성에서 성벽선을 잘못 파악하여 원형을 훼손된 사례나 여러 시기에 걸쳐 수개축이 이루어진 산성에 정비 기준 시점을 설정하지 않아서 새로운 성벽을 만들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 또한 추정 높이선까지 정비를 진행하여 신재 사용이 증가하여 성벽의 가시적인 이질감이 발생하고, 구조적인 불안정으로 성벽이 반복적으로 붕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산성의 정비 과정에서 발굴조사-실시설계-보수공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을 훼손한 경우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완전한 산성 복원을 지양하고 최소한의 정비를 진행해야 하며, 향후 새로운 자료와 기술이 확보되면 재수리가 가능한 가역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정리하였다. 산성은 보존과 활용을 위한 필수적인 지점만 최소한으로 정비해야 하며, 정비의 과정에서 각 단계별로 유기적으로 자료를 공유하고 상호 체크해야 한다는 점을 제안하였다.


This paper analyzed the maintenance status of Hanam Iseongsanseong Fortress, Seoul Achasanseong Fortress, Icheon Seolbongsanseong Fortress, Yeoju Pasaseong Fortress, Anseong Jukjusanseong Fortress, Osan Doksanseong Fortress, and Pocheon Banwolseong Fortress, where long-term repair work was carried out. As a result of the analysis, many problems were identified in the fortress where the walls were dismantled and repaired without securing archaeological data.
In some cases, the original shape was damaged due to incorrect identification of the fortress of the complex structure, and it is also confirmed that the standard time for construction was not set while repairing the fortress walls with traces of repair several times in the past.
In addition, when the estimated height line was repaired, the use of new stone increased, resulting in a visible sense of heterogeneity of the walls, and repeatedly collapsed due to structural instability. It was confirmed that excavation, design, and construction were not organically connected during the repair process of the fortress, so the fortress was not preserved, but rather the authenticity was damaged.
In order to solve these problems, complete fortress wall repair should be avoided and minimum maintenance should be carried out, and measures to secure reversibility that can be repaired again when new data and technologies are secured in the future are summarized. It was suggested that only essential points for conservation and utilization should be repaired to a minimum, and that data should be organically shared and checked at each stage in the process of mainte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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