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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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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범위 : 1권0호(1987)~82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827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0호(2021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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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한·백제권 고분과 합천 삼가고분군 다곽식고분의 비교 -전남지역 고총고분을 중심으로-

저자 : 최영주 ( Young-joo Cho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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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마한·백제지역 가운데 전남지역의 고총고분 중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신촌리 9호분을 중심으로 합천 삼가고분군과의 고분의 축조 순서와 기술에 대해서 비교 검토하였다.
전남지역의 고총고분과 삼가고분군의 다곽식고분은 선행하는 매장시설을 인식하면서 다장을 통한 수직확장과 주구의 의례행위 등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양 지역의 고분은 고분의 입지와 분형, 매장시설과 위치, 고총화 방식과 축조기술 등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중에서 고분의 고총화 과정에서 양 지역의 고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남지역 고총고분은 선행분구 조정과 수직확장을 통한 고총화를 했기 때문에 이에 맞는 구축기술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삼가고분군에서는 중 소형분이 경사면을 따라 위쪽으로 봉분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고총화를 했기 때문에 구축기술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합천 삼가고분군의 '삼가식 다곽식고분'은 전남지역의 고총고분과 다르고 가야지역 어느 고분군과도 다른 삼가고분군만의 특징이다. 고대 가야사회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삼가고분군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학계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This paper compared and reviewed the construction sequence and technology of the ancient tombs with the Hapcheon Samga ancient tombs, focusing on Naju Bokam-ri tomb No. 3 and Sinchon-ri tomb No. 9 among the high-mounded tombs in the Mahan-Baekje area.
The high-mound tombs in Jeollanam-do and multi-chambered ancient tombs in Samga ancient tombs have something in common that they were vertically expanded through many funerals and there were ritual behaviors in pits, recognizing existing burial facilities. However, the ancient tombs in the two regions differed in tomb's location and shape, burial facilities and locations, and the method of high mound and construction techniques. Among them, the ancient tombs in two regions differ in the process of high mound. The high-mound tombs in Jeollanam-do Province needed a corresponding construction technology because they became high mounds by adjusting existing burial mounds and expanding vertically. However, in Samga ancient tombs, the construction technology was not necessary because tombs were made by adding burial mounds upward along the slope of the small and medium-sized tombs.
Therefore, the Samga-style multi-chambered ancient tomb in Hapcheon Samga ancient tombs is different from high-mound tombs in Jeollanam-do and any other ancient tombs in Gaya region. Samga ancient tombs are very important to understand the aspects of ancient Gaya society, so policy support and academic interests and efforts are urgently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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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세기 백제의 대왜(對倭) 교섭에서 사신(使臣)의 파견과 역할

저자 : 장미애 ( Mi-ae Ja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5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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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기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수와 당이라는 統一帝國이 형성되었으며, 왜 역시 大化改新을 전후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격렬한 변화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백제에게도 대외 교섭의 중요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교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 중 하나는 使臣이었다고 생각한다. 위덕왕 대 전반기에는 관산성 패전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왜와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신라의 대왜 교섭이 본격화되고, 왜의 대외 정책 역시 다면외교로 전환되어 가자 백제 역시 왜와의 교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642년과 643년에는 政變으로 추방된 翹岐의 渡倭 백제 국내에서 이루어졌던 정치적 문제로 인해 왜와의 관계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백제는 이러한 대내외적 현안들을 처리하기 위해 왜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Ancient East Asia surrounding Baekje in the 6th and 7th centuries had complex relations with each other. Baekje was using envoy(使臣) to negotiate with neighboring countries to survive in this international environment. 
Since the late sixth century, Baekje's envoys to Wae have been reduced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However, Baekje continues to dispatch envoy to cope with the external problem of confrontation with Silla. Baekje also sent envoys to resolve domestic issues such as Gyogi(翹岐), who was politically deported and went to the Wae(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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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멸망기 백제 태자 기록의 상이성과 그 원인

저자 : 김수미 ( Su-mi Kim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7-8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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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국외 자료에서 7세기 백제의 마지막 태자는 융이라고 하였다. 우리 측 『삼국사기』에서는 융을 태자가 아닌 왕자로 기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태종무열왕 7년의 백제 멸망과정 기사는 중국 측 기록에는 없는 신라의 전승 자료를 원전으로 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의자왕의 태자가 융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라본기에서 융은 백제 왕자, 의자의 아들로 서술되어 의자왕의 수많은 아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의 융 관련 기록들은 충돌하고 있다. 이 기록의 충돌은 나당연합군에게 좌평, 상좌평, 왕의 서자를 파견했던 백제 왕자가 중대한 국정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둘째, 사비성에서의 융의 항복과 신라 태자 법민이 융에게 침을 뱉고 모욕한 사건, 셋째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진성을 나와 항복한 이후의 승전식에서 의자왕과 아들 융을 마루 아래에 앉혀놓고 술을 따르는 치욕을 준 사건 등 일련의 기록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신라 측 자료에서 융의 지위는 백제 왕자와 태자 사이를 오가고 있다.
무열왕 7년 7월 13일의 기사는 신라군을 이끈 주역으로 문무왕 법민의 전기류와 같은 기록에서 발췌한 것은 아닐까 한다. 신라 태자 법민이 주인공으로 사비성 함락에 참여하고, 백제 태자 융을 사로잡으며, 웅진성의 의자왕을 사로잡아 그의 복수를 완수한다. 이 기사는 법민과 대척점에 선 세력으로 백제 융을 대비하였다. 융은 왕자 중 한 명으로,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적국의 태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다시 승전식에서 치욕을 당하는 무능한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자 융에게 한 말은 그가 태자 효의 아들일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군이 철수하고 의자왕과 태자 효가 돌아왔을 때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가 왕자 융의 아들이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660년 당시 융을 왕자라고 기록하였지만, 태자의 아들 문사의 말에서 융이 태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의 문사 기사는 『구당서』 소정방전이 원전으로 파악되었다. 『구당서』 소정방전에서는 태자 융의 아들 문사가 한 '우리 부자'라 하며 안위를 걱정하였다. 즉 '우리 부자'라는 말을 통해 이 말은 문사와 융이 사비성에서 나눈 말임을 알 수 있다.
백제본기와 『구당서』 소정방전의 문장 차이는 백제본기 내용이 『구당서』뿐 아니라 태자 효의 저본으로 추정되는 신라 측 자료의 영향 역시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백제본기의 왕자 융은 신라 측 자료의 영향을 빼면 내용 상 태자 융이 된다. 백제본기의 의자왕 20년 문사 기록은 융과 문사의 부자 관계를 감추려는 묘사로 짐작된다. 백제본기에서는 융의 태자 지위를 지우고, 동시에 주체적인 문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그의 유약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라 측 기록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융을 태자가 아니라 단지 의자의 아들, 왕자, 혹은 왕자 융으로 기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왕자 융은 신라 측에 의한 수동적이고 무능한 백제 왕자 융 만들기로 볼 수 있다.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The 7th anniversary of King Taejong Muyeol's fall of Baekje during the Silla Period was based on the historical data of Silla, which was not recorded by the Chinese side. During the Silla Period, it was known that the crown prince of King Uija was Jung. Nevertheless, in the Silla period, Jung was described as a prince of Baekje and the son of a chair. He emphasized that he was one of the numerous sons of King Uija. Perhaps it was done intentionally in Silla records.
Likewise, during the Baekje period, King Yun was called a prince, but he was actually a prince. The main flag of Baekje was also influenced by Silla materials, and the crown prince was named Prince Jung. In the Baekje period, he removed the crown prince status of Jung and emphasized his vulnerability under the influence of independent literature. This is the result of the removal of the Baekje Crown Prince Jung and the manual and incompetent Baekje Prince Jung at some point in the Silla Dynasty after un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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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조선 초기 영암지역 역로망과 역원 - '영보월(永保 )'명 기와 출토 유적과 관련하여 -

저자 : 한정훈 ( Han Jeong-h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1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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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서해와 남해를 잇는 교통입지에 자리한 영암지역의 역로는 연근해 항로만큼 활용 가치가 높았다. 고려시대 영암 동북쪽에서 오림역(烏林驛)을 통과해 나주에 이르는 '오림역로'에 더해 조선 초기에는 신안역이 신설되면서 '신안역로'가 추가 개통되었다. 이렇게 15세기 전반기에 역원(驛院)의 확충이나 고갯길의 정비 등을 통해 역로망이 재편되었다. 세조 초기에는 영보역 중심의 '영보도(永保道)'라는 역도망도 짧게나마 운영되었다. 영암 영보역(永保驛)은 벽사도(碧沙道)·영보도·청암도(靑巖道)로 소속 역도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근 고을을 연결하는 중심 교통시설로 성장하였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영보역 터일 가능성이 제기된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유적에 관해서도 검토하였다. '영보역(永保驛)'명 기와편을 비롯한 여러 유물을 분석한 결과, 해당 유적은 영보역 보다 사찰과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 영암에서 나주로 향하던 '오림역로' 상의 고갯길 초입에 위치한 보현원(普賢院)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The post road of Yeongam county, located at the transportation location connecting the Yellow Sea with the Southern Sea in the Goryeo dynasty and the Joseon dynasty was highly useful enough to be considered as valuable as the coastal route. In addition to 'Orim Post Road', a path from the northeast of Yeongam through the Orim post(烏林驛) to Naju in the Goyeo dynasty, the Sinan post(新安驛) was newly built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o 'Sinan Post Road' was additionally opened. As such, the post roads were reorganized by extending yeonkwon(驛院) or maintaining uphill passes in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In the early period of King Sejo, 'Yeongbo Road(永保道)', a post road network around the Yeongbo post was also shortly operated. The Yeongbo post in Yeongam grew as a central transportation facility connecting neighboring counties, as post roads that it belonged to were changed from the Byeongsa road(碧沙道) through the Yeongbo road to the Cheongam road(靑巖道).
In this regard, this study also examined the Nosong-ri relics in Deokjin-myeon, Yeongam-gun, which might be the potential site of the Yeongbo post. From an analysis of many artifacts including tiles with the name of 'Yeongbo Post(永保驛)', it was understood that the relics might be likely to be a facility related to a temple, rather than to the Yeongbo post. In addition, it was also presumed as the Bohyeonwon(普賢院) located at the entrance of the uphill pass on 'Orim Post Road' connecting Yeongman to Naju in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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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전기 치도형(治盜刑)과 난장(亂杖)의 유래와 운영

저자 : 차인배 ( Cha In-b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5-14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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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도적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한 난장의 유래를 고찰하였다. 난장은 죄수의 自服을 받기 위해 그의 발바닥과 발가락을 때리는 형벌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난장은 조선초부터 1777년(영조 46년)까지 약 340여 년 동안 도적을 단속하는 형벌로 존속했다. 난장은 도적·강도 등 절도죄수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안된 이른바 治盜刑이었다. 따라서 일반 형사사건에 대한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訊杖과 난장은 서로 형태가 다르지만, 죄수의 자백을 받아낸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신장이 합법적으로 공인된 고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난장은 신장의 변형된 고문이었다.
난장의 체벌이 발바닥과 발가락에 집중된 것은 그 곳이 고통의 강도가 높았고 상대적으로 고문의 흔적이 심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신체 중 처벌 부위가 유사했던 刖足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조선초부터 난장은 치도를 목적으로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기도 했지만, 형식의 가혹성 때문에 각종 폐단을 야기했다. 난장이 치도형으로써 원래의 목적과 달리 오용되는 사례가 늘어났지만, 치도에 대한 효용성 때문에 공공연한 고신으로 용인되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This study considered the origin of Nanjang(亂杖), which was used to control during the Joseon Dynasty. Nanjang(亂杖) is not known about its origin as a punishment for hitting the soles of his feet and toes to receive confession from a prisoner. However, Nanjang(亂杖) remained a punishment for cracking down on bandits for 340 years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to 1777 (46th year of King Yeongjo). Dwarf was a so-called "Punish for bandit(治盜刑)" designed to obtain confessions from thieves such as bandits and robbers. Therefore, the use of general criminal cases was strictly restricted.
Although Sinjang and Nanjang have different forms, it is common that they receive confessions from prisoners. Considering that the kidney is a legally recognized torture, the dwarf was a modified torture of the kidney.
The concentration of physical punishment on the soles of the feet and toes was also attributed to the high intensity of pain and relatively low traces of torture, but it is also believ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Woljog's tradition of punishment, which had similar areas of punishment.
Nanjang(亂杖) was carried out for the purpose of catching bandits and had an effect. However, because the form was harsh, it caused many evils. There were many cases where Nanjang(亂杖) was misused contrary to the original purpose of catching the thief, but it was recognized as an official punishment because of its effectiveness in catching the thief, and it persisted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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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주국의 국경분쟁과 대소련(對蘇聯) 인식 - 식민지 조선의 신문 보도를 중심으로 -

저자 : 윤휘탁 ( Yoon Hwy-ta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188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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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만주에 기득권을 지닌 소련은 반발했다. 이로 인해 국경을 마주한 만주국과 소련 및 몽골 사이에는 국경분쟁이 빈발했으며, 만주국을 식민통치한 일본과 소련의 관계도 점점 악화되었다. 게다가 청조와 러시아의 조약 내용이 불명확하고 국경 표식도 없어졌기 때문에, 만주국, 소련, 몽골 사이의 국경분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만주국을 포함시켜 소련과 국경협상을 추구했지만, 소련은 만주국을 배제하고 몽골을 참여시켜 국경협상을 하려고 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몽골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여겨 몽골의 참여를 반대했다. 결국 만주국과 몽골은 외교 교섭권을 각각 일본과 소련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일본과 소련은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거나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경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일본(만주국)과 소련(몽골) 사이에는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소련은 영토분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패배한 일본은 먼저 소련에게 정전을 요구했고 불리한 조건 하에 정전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치룬 일본과 만주국은 소련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되었으며, 만주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우려하기 시작했다. 만주국 사회에서도 일본의 패전 소식과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이 상황에서 일본과 만주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방어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When Japan occupied Manchuria by force and established Manchukuo, a puppet state, the Soviet Union, which had vested interests in Manchuria, rebelled. As a result, there were frequent border disputes between Manchukuo, the Soviet Union, and Mongolia, which faced the border, and relations between Japan which colonized Manchukuo and the Soviet Union also worsened. Moreover, because the contents of the treaty between the Qing Dynasty and Russia were unclear and the border markings disappeared, the border dispute between Manchukuo, the Soviet Union and Mongolia was bound to continue. At that time, Japan sought border negotiations with the Soviet Union, including Manchukuo, but the Soviet Union tried to negotiate borders with Mongolia by excluding Manchukuo.
On the other hand, in Japan, Mongolia was regarded as a satellite state of the Soviet Union and opposed Mongolia's participation. Eventually, Manchukuo and Mongolia delegated the right to negotiate diplomatic relations to Japan and the Soviet Union, respectively. However, Japan and the Soviet Union did not recognize or distrust the other's views, so they could not resolve the border dispute in a peaceful way.
As a result, the Janggo Volunteer Incident and a Battle of Halhingol broke out between Japan (Manchukuo) and the Soviet Union (Mongolia). The Soviet Union, which had virtually won this war, occupied most of the territorial disputes. The defeated Japan first demanded a cease-fire from the Soviet Union and was forced to conclude an armistice agreement under adverse conditions.
After the war, Japan and Manchukuo began to fear the Soviet Union and began to worry about the future of Manchukuo. News of Japan's defeat and fear of the Soviet Union spread even in Manchukuo society. In this situation, Japan and Manchukuo began to strengthen their military defense against the Soviet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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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산항만을 중심으로 본 일제 말기와 미군정기의 하역노동과 하역노동자

저자 : 임송자 ( Yim Song J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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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노동정책과 노동문제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항만하역노동이나 하역노동자의 실상에도 초점을 맞춰 연구영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제 말기 항만하역노동과 조선인 노동자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해방 후 일제의 전시통제체제가 무너지면서 항만하역노동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역노동자 실태, 전평과 대한노총의 대결 양상 등을 살펴보았다.
하역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일반적 의미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무공급을 목적으로 결성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 노동조합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자는 일제의 극악한 탄압으로 조직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세력기반을 잃어갔으며, 전자는 국가총동원법 실시 이래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침략전쟁 확대에 따라 화물이 급증하고 하역노동자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제는 항만하역증강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징용, 근로보국대, 항만정신대 등을 통해 노무자를 동원하였다. 항만하역노동에 항만정신대를 동원한 것이 주목된다. 일제는 기소유예자, 형집행유예자, 가석방자, 만기석방자 등을 대상으로 항만정신대를 조직하여 주요 항만의 하역노동에 동원하였다.
일제 말기의 항만하역 노동체계는 해방 후 무너졌으며, 부산항에서는 십장제도의 변형된 형태인 항수제도가 되살아나게 되어 항만하역노동자는 또다시 중간착취를 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항만하역노동에서의 중간착취제를 제거하는 것은 부두노동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던 전평이 수행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 수행은 대한노총의 반전평활동, 그리고 미군정의 대한노총 지원활동 등으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대한노총은 남한 유일의 노동조합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바로 중간착취기구로 기능한 전근대적인 항수제도의 온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노총 부두노동조합은 전근대적인 항수제도를 유지하며 중간착취기구로 기능하였으며, 이러한 항만하역노동에서의 고질적인 악폐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It is necessary to expand research area with focusing on the reality of port labor or longshoremen to illuminate the whole picture of Japanese imperial rulers' labor policy and labor issue. Being aware of it, I put the emphasis on understanding the reality of port labor and Korean longshoremen during lat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Furthermore, I looked in the reality of longshoremen in Busan port and confrontation between the National Council of Joseon Labor Unions(NCJLU) and the Federation of Korean Trade Unions(FKTU) in order to understand how port labor changed as Japanese wartime control collapsed after Korean liberation.
Some trade unions of longshoremen were organized to offer labor rather than ordinary trade unions, but also trade unions which carried out their own work existed. The latter lost their power base without being able to unfold organizing movement because of Japanese imperial rulers' extremely brutal oppression, and the former began to collapse gradually under implementation of the Law of Total National Mobilization.
As the war of aggression was expanded, cargo surged and longshoremen became insufficient, Japanese imperial rulers unfolded reinforce movement for port labor at large scale and mobilized laborers by requisition, labor corps of patriotism, port dedication corps and the other. It is noted that the port dedication corps was mobilized for port labor. Japanese imperial rulers organized the port dedication corps out of individuals in the situation of indictment suspension, probation, parole and release after serving.
Port labor system of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collapsed after the Korean liberation. Port head system which was transformed from foreman system was revived in the Busan port, so longshoremen were subjected to intermediary exploitation again. Therefore, the National Council of Joseon Labor Unions, which was wholey supported by longshoremen, had to remove intermediary exploitation in the port labor. However, its task was frustrated inevitably because of anti-NCJLU activites by the FKTU and the support for the FKTU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With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FKTU emerged rapidly as the only trade union in South Korea. Also it meant that premodern port head system which worked as an intermediary exploitation body was preserved. Port labor union of the FKTU functioned as an intermediary exploitation body with keeping premodern port head system. This chronic evil in the port labor lasted for quite a long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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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기(1937~1953년) 한국의 새로운 여성 주체 중 사무직 여성의 대표적 사례인 조선식산은행 여자행원을 중심으로 이들의 사회적 진출과 존재 양상, 젠더 인식을 살펴보았다.
조선식산은행 여자직원은 고원으로 채용되기 시작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인 남자행원의 징병〔입영〕으로 인한 인력 부족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여자직원의 대폭 증원이 이루어졌다. 1943년 6월 1일 '여자행원' 직급이 새로 만들어졌고, 여자행원의 신규 채용도 늘어났다. 여자행원 직급은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다가 1991년에 폐지되었다. '여자'라는 생물학적 성차(sex)가 사회적 성적 차별(gender)의 기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여자행원은 중등학력 이상의 고학력 '엘리트' 여성으로 대부분 재조 일본인 여성이었다. 이들은 식산은행이라는 사회와 안락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전쟁·계급·민족·젠더의 모순구조를 잠시 접어두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해방 이후 식산은행은 과도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고 1949년까지는 본·지점의 필요에 따라 임의채용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자행원 채용이 증가했다. 일제말 전시체제기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된 분위기는 해방 후에도 연장되었고, 인플레이션과 산업의 단절로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취업요건을 갖춘 여성들은 취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독립국가 건설과정에서 '보통선거권' 문제, 임금 불평등 문제, 봉건적 가족제도 등을 둘러싼 논의에서 여성의 각성과 능력 향상을 전제로 남녀평등권의 실현을 주장하는 소극적 인식을 가졌고, 임금 불평등에서의 남녀 차별을 인정했지만 봉건적인 가족·사회질서에 대해서는 저항의식을 가졌다.
한국전쟁기 식산은행의 여자행원수는 다시 증가했다. 전쟁으로 남성의 퇴직이 많아지면서 그를 대신한 것은 여성이었다. 전쟁기 식산은행의 여자행원들은 전쟁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을 위해 매진하자는 결의를 보였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가정으로 복귀하여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식산은행 여자행원의 위상과 존재 양태는 한국 근대 여성의 성장과 한계를 보여주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전시하의 여성상 '모성과 열등노동력'의 역할을 수용하였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시기에는 유능한 보조인력으로서 '현모양처'라는 목표를 수용하면서 사회적 차별을 무마하고 합리화했다.


Emergence and Social Advancement of White-Collar Women and Gender Perception in Pre- and Post-Independence wartime period(1937~1945) This study examines the emergence, social advancement and patterns of female clerks at Joseon Shiksan Bank, who were the typical cases of white-collar women in the wartime period (1937-1953) that consists of the Japanese imperial invasions, independence, division and the Korean War.
Joseon Shiksan Bank began employing women as Gowon. After the Second Sino-Japanese War in 1937, the Bank employed more women to make up for the vacancies created by the Japanese man who had to leave for military conscription. In June 1st of 1943, the Bank created a position called "female clerk", a lower-level position differentiated from the regular clerk, and subsequently hired more women as female clerks. The "female clerk" position was abolished in 1991. The biological difference of women became the base of the gender discrimination within the society. Most of the female clerks at Shiksan Bank during the colonial era were "elite" Japanese women residing in Joseon, who have completed a minimum of middle school education.
Shiksan Bank hired a greater number of female clerks after the independence. Women entering the workforce became a trend in the late colonial war time era, and more women had to secure employment due to economic difficulties. The female clerks of the Shiksan Bank argued for gender equality under the condition that the women build their capacities and enlighten themselves in the context of the newly established nation. They conformed to the wage gap between the male and female employees but resisted feudalistic familial and societal orders.
The number of female clerks increased greatly due to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However, the female clerks were determined to return to domesticity once the war is over and fulfill their role as wise and diligent housemakers. The status of Shiksan Bank's female clerks and the varieties amongst them embody the advancement of modern Korean women and the limits they had faced.

KCI등재

9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사적통치기반 형성과 변화

저자 : 유상수 ( Ryu Sangs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30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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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승만의 사적통치기반의 형성과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첫째 장에서는 이승만이 사적통치기반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승만은 집권초기 불안정한 상태로 출발해야 했다. 초대 내각에서 한민당을 배제하면서 정치적으로 반대파를 형성하게 했으며, 군과 경찰 같은 공적기구에 대한 통제력도 약했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을 사적통치기반을 통해 돌파하려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청년단으로 청년단체를 통합하면서 총재로 추대되고 단장을 임명하면서 기존의 청년단체를 핵심 통치기반의 하나로 확보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한청년단의 출범부터 자신에게 충성을 할 수 있는 신성모를 단장으로 임명함으로써 통제력을 강화해 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사적통치기반이 확대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승만은 공적기구로 명시되어 있는 예비 병력인 호국군을 해체하고 청년방위대를 창설하면서 대한청년단을 청년방위대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법적으로 공식조직인 호국군 대신 청년방위대를 창설한 것은 국가재정의 확대를 통해 입법부를 강화시키지 않으면서 인적통치기반의 확충을 꾀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장은 사적통치기반을 어떻게 활용하려고 했는가를 다루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청년단이나 청년방위대 등 기존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고 그를 보완하기 위해서 청년방위대를 해체하고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사적통치기반의 숫자를 보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리와 횡령, 관리태만이 겹쳐져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면서 활용시도는 무산되었다. 이와 더불어 부산정치파동 등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억압하고,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국회 내에서 이승만의 의도가 관철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한편 경찰과 군 등의 공적기구에 대한 장악이 가능해지면서 사적통치기반의 역할은 감소하게 되었다.


This paper is about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Syngman Rhee's private governing base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The first chapter traces the process of Syngman Rhee forming the private governing base78. Rhee's regime began as a very unstable one. By excluding the Korean Democratic Party (HanMin-dang) from the first cabinet, it helped forming its own political opponents. It also had weak control over official organizations such as the military and the police.
Private governing base was Rhee's breakthrough. Combining youth movements as the Korean Youth (DaeHanCheongNyeon-dan), of which Rhee was himself elected as the first governor, Syngman Rhee secured the existing youth movement as one of his core ruling bases. Moreover, by appointing Shin Sung Mo, who had been loyal to Rhee, as the leader of the organization, Rhee could take control of it from its launching.
In the second chapter, the expansion process of Rhee's private governing base is examined. Rhee dissolved the reserve forces, National Protection Army (HoGuk-gun) and founded Youth Defense Corps (CheongNyeonBangWi-dae); and then attempted to convert the Korean Youth to Youth Defense Corps.
Founding the Youth Defense Corps, a private organization, while disbanding National Protection Army - an official organization under the National Government Organization Act - was a way to expand his own private human governing base without strengthening the legislature through the expansion of national finances.
The third chapter deals with how Rhee tried to utilize his human governing base.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existing organizations such as the Korean Youth and Youth Defense Corps were damaged and in order to compensate this damage, Youth Defense Corps was dismantled and Korean Territorial Army (GukMinBangWi-gun) was organized. This way, Rhee's private governing base can be maintained in its volume.
However, his attempt to utilize the Korean Territorial Army was in vain, because of the corruption and embezzlement which led to Korean Territorial Army incident - Territorial Army executives's misappropriation of the military budget as well as the negligence of administration resulted in a enormous number of troops deaths.
In addition, the role of Rhee's private human governing base was reduced as it became possible for Rhee to suppress the political opponents through the Busan Political Crisis, to implement his own intentions within the National Assembly by creating the Liberal Party and to take over the police force and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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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세기 전반 일본 불교계의 동향과 천평기(天平期) 견당사의 파견 - 감진(鑑眞) 청래(請來)의 배경과 관련하여 -

저자 : 강은영 ( Kang Eun-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1-3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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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성립한 불교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각각의 고유 신앙을 상대화할 수 있는 외래신앙으로서의 공통성을 지니고, 보편적인 세계종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각국의 불교를 숭상하는 군주는 군주 자신의 개인적 신앙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정책에 직접 반영하여 국내의 군주권 강화에 불교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왕법을 지탱하는 예교(禮敎)와 출세간(出世間)을 주창하는 불교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불교가 수용되어 가는 과정은 평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수계제의 도입은 불교가 일본사회에 수용되는 과정과 동시에 일본불교의 특수성을 보여줄 것이다. 
율령국가 성립 후, 일본에서는 중국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원의 건립 주체인 국가와 왕권이 불교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함으로써 불교를 통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승니의 생산 즉 득도의 권한을 장악하여 법에 의해 승니의 생활전반에 걸쳐 규제를 가함으로써 불교의 내면적인 부분까지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平城京의 천도로 力役을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이 늘어나고, 교키(行基) 집단과 같은 승려단체가 등장하면서 율령정부는 불교계에 대한 위기감에 휩싸인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정권기인 양로초년에는 강한 어조에 비해 후속조치가 미비하였다. 이는 후지와라노 후히토를 비롯한 율령국가의 의정관은 중국불교의 극단적인 숙정작업과 달리 가능한 불교교단의 자정능력을 기대하며, 비위행위를 한 승니에 대해서는 僧綱이 주체적으로 제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반면 양로6년에는 위법 승니에 대한 실질적인 처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원칙주의자인 나가야왕(長屋王)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키 집단에 대한 율령정부의 시각은 나가야왕의 죽음과 보살천황 쇼무(聖武)의 등장으로 바뀌게 된다. 쇼무천황은 기존 불교계를 규제하는 방식으로서 중국과 같은 폐불훼석의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대신, 간진(鑑眞)과 그 제자를 승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고, 受戒制의 전권을 간진 일인에게 부여하면서 불교계를 천황의 아래에 귀속시키고, 보살천황 아래에서 사상적 통합을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Buddhism established in India has something in common as a foreign belief that can relativize its own beliefs in each country in East Asia. And it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universal world religion. Monarchs who believed in Buddhism in East Asian countries used Buddhism not only for their personal beliefs but also for strengthening their domestic monarchic power, reflecting in their policies. But in the case of China, it is inevitable that there will be a conflict between Confucianism, which underpins monarchy, and Buddhism, which insists on de-secular. In the case of Japan, acceptance of the buddhist ordination ceremony(受戒) show the process and peculiarities that Buddhism is received in Japanese societ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Ritsuryo nation, Japan can control Buddhism by being directly involved in the management of Buddhism, rather than by the extreme methods of China. However, with the transfer of capital to Heijokyo, the number of people who want to avoid the role of power and become a priest increases, and a monk group such as Gyoki(行基) group appears, and the government begins t23o feel a sense of crisis about Buddhism. In the first year of Yoro, which was during the administration of Fujiwara no Fuhito, the measures were weaker than the strong tone of Buddhism. This meant that the government wanted the monks to take the initiative in controlling the priests who had sinned in anticipation of the Buddhist cult's self-cleaning ability. However, the 6th year of Yoro Code stipulates strict punishment for illegal monks. This is a strong reflection of the intentions of the fundamentalist Prince Nagaya(長屋王). However, the death of Prince Nagaya and the coronation of Emperor Shomu changed the government's view of Buddhism. Emperor Shomu put Ganjin(鑑眞)and his disciples as members of the priesthood and gave Ganjin the full power of the buddhist ordination ceremony to control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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