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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update

Chonnam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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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97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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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7)~87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876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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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임평섭 ( Lim Pyeong-seob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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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하대에 활동한 선승인 원랑선사 대통(816~883)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대통은 신라 변방의 지방민이자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당나라에서 최신 선사상을 수용하여 명망을 얻었다. 대통이 교류하였던 낭혜 무염과 경문왕은 당대의 명사였으며, 그가 수행한 위앙종은 9세기 중반 당나라의 선종계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대통에 관해서는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대통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핵심적인 사안을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대통의 생애는 크게 입당과 귀국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대통의 출신지와 함께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했던 지역에 대한 분석이다. 대통의 출신지인 통화부는 신라의 서북방 국경인 취성군이며,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한 단엄사는 지금의 철원 방면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로, 대통이 당나라에서 배웠던 위앙종의 사상적 특징과 관련한 내용이다. 위앙종의 수행 방법 가운데 대통은 특히 조사선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귀국 이후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은 월광사 주석과 함께 경문왕과의 관계이다. 계립령 북부 입구에 있는 월광사에 주석한 대통은 주변 지역의 교화에 힘을 쏟았다.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경문왕은 이러한 대통의 활동을 우대하였다. 대통에 관한 연구를 통해 9세기 신라 남종선의 조사선 수용 흐름과 함께 월광사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 또한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article mainly looks into the life and thoughts of Wollang-sonsa Dae-Tong who acted as a Zen monk in the late period of Silla. Even though Dae-Tong was born into a poor family as well as came from a frontier, He finally gained fame with a human network, even accepting the newest Zen thoughts from the Tang Dynasty. Nanghye muyom and King Kyongmun who made a relationship with Dae-Tong were famed people at the same time. Besides, Wiang-sect was the most popular Buddhist thought representing the Zen sect in the 9th century of the Tang Dynasty. However, it has been little research on him so far.
The article is supposed to consider three aspects to examine the life and thoughts of Dae-Tong. Firstly, It closely examines Dae-Tong's birthplace and some regions he was actively engaged after he became a Buddhist monk. Tonghwa-bu, for instance, was placed at the northwestern frontier of Silla which is estimated as Ch'wisong-gun now. In addition, the current direction of Daneom-sa temple in which he dwelled is assumed in Chulwon. Secondly, It focuses on an ideological feature of Wiang-sect that Dae-Tong learned in the Tang Dynasty. Among one of the unique practices of Wiang-sect, he accepted Patriarchal Seon especially and followed that kind of practice.
Lastly, It is remarkable his dwelling in Wolgwangsa Temple and his relationship with King Kyongmun. Dwelling in Wolgwangsa Temple placed at the northern mouth of Gyeripnyeong(鷄立嶺), he put his energy into educating the local people. King Kyongmun also gave preference to his endeavor to strengthen royal control of local regions. From the research, it is looking forward to developing both more research on how Patriarchal Seon of Southern School Seon flowed in the 9th century and the periodic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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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임영희 ( Lim Younghe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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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 집권기에 국왕의 위상이 위축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은 과연 명종의 27년간이라는 오랜 재위가 나약하고 무력한 왕으로서만 가능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명종대는 무인 집권의 성립기로 아직 무인집정자의 위치가 확고하지 않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여러 인물의 무인집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왕은 경대승이 죽자 공백기라는 절호의 기회에 가장 먼저 경대승의 사병조직인 도방을 해체하고 그 도방을 구성하는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왕은 무인 집정자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처럼 처신하다가도 기회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걸림돌을 제거해버리는 면밀하고 적극적인 생존방식을 보여주었다. 명종의 인사정책 또한, 중방의 반대에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반발이 가라앉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살며시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다시 등용시킴으로써 왕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명종은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을 직접 불러들였다. 이의민이 집정하더라도 경거망동하거나 국왕의 전주권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할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명종의 이의민 발탁은 국왕의 효율적인 정국운영과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한문준, 문극겸, 이지명 등은 지공거를 수차례 역임하면서 인재발굴에 집중하여 친왕적 관료육성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명종은 두경승과 이의민을 서로 경쟁케 하는 구도에 둠으로써 일방적인 권력의 독점을 막고 왕권안정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명종은 경대승 사후에서 이의민 집정시기에 어느 때보다 국왕의 권위가 회복의 탄력을 받으면서 안정된 통치력을 보였다. 반면에 명종이 대항마인 두경승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문신이 무신의 위상을 넘을 수 없었던 점은 한계로 남는다.


It is an undeniable fact that the status of the king was weakened during the military rule of Goryeo. This study began with a question how King Myeongjong's long reign of 27 years could have been kept as just such a weak and powerless king. The period of King Myeongjong's reign was the period of being established of the military rule, and the military leader's position was not yet firm. Accordingly, military powers were replaced by Lee Ui-bang, Jeong Jung-bu, Gyeong Dae-seung, and Lee Ui-min. Upon the death of Gyeong Dae-seung, the king first disbanded his private organization, Dobang and mercilessly executed the soldiers who comprised that. The king showed a thorough and active way of survival by acting as if he was complying with the demands of the military magistrate and removing obstacles when there is an opportunity as if he was waiting for that. King Myeongjong's personnel policy was also performed as his will by waiting for the opposition to subside and calm, and then secretly reappointing the talent he wanted, rather than directly confronting the opposition of the Joongbang.
Myeongjong directly called in Lee Ui-min who had murdered King Uijong. It was based on a practical judgment that he would not be reckless or interfere with the King's sovereignty even if Lee Ui-min took the office. In fact, King Myeongjong's appointment of Lee Ui-min helped his efficient political management and stability. Han Moon-jun, Moon Geuk-gyeom, and Lee Ji-myoung served as Jigonggeo several times, and they concentrated on discovering talents, contributing to cultivating pro-royal bureaucracies. In particular, King Myeongjong tried to prevent one-sided monopoly of power and contribute to the stability of the royal authority by appointing Du Kyung-seung and Lee Ui-min to a competitive position. From the death of Gyeong Dae-seung to the rule of Yi Ui-min, King Myeongjong showed stable governance as the royal authority being regained more than ever. On the other hand, it was limitation that King Myeongjong didn't use it properly Du Kyung-seung and Notable literary official couldn't get over the Political Status of Military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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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경태 ( Kim Kyong-t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2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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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관한 서술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오랜 평화에 안주해 있었던 데다가 당파 간의 갈등이 심하여,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런데 국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고, 정부 내에는 간신과 아첨하는 이들이 가득했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존재했다. 과연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은 실재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스스로 반성하는 문구를 남긴 경우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명과 조선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자, 명측 인사의 발언과 외교문서에서는 강한 비난 표현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문구들은 항상 정치적인 배경과 함께 해석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명에서 만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문헌에서는 맥락을 제거한 채, 비난의 표현만을 남겼다. 전쟁 후 조선의 문헌에는 자기반성을 위한 레토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상대되는 인물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문헌에서 국왕과 왕조를 직접 비난하는 서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두 나라의 문헌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대중 지향의 출판이 유행하면서, 강렬한 요소만을 뽑아 흥미 위주의 임진왜란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기노시타 사네히로와 하야시 다이스케는 시대적인 맥락과 공간적인 맥락을 없애고,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뽑아낸 후 재조합하여 “게으르고 방탕한” 조선상을 만들어냈다. 그에 더하여, 개항 이후 조선에서 수집한 조선 사료의 목록을 추가하여 자신의 조합을 더 화려하게 꾸몄다. 기노시타와 하야시의 저작은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저작은 후대 학계에 큰 영향을 주어 오랜 기간 부정적인 조선 이미지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Some description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portray Joseon before the invasion critically. A familiar narrative is that Joseon had been complacent during the long period of peace and was not prepared for war due to internal conflict. However, some extreme statements were made that the king was dissipated in alcohol and women and that the government was full of confidants and flattery. Is this historical image tru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Joseon left documents examining its actions. Amid disputes between Joseon and the Ming dynasty during the war, there were strong criticisms of Joseon by Ming figures and in diplomatic documents. Such passages should always be interpreted within their political context. However, Ming's post-war literature on the invasion only contains these expressions of criticism without context. After the war, the literature in Joseon strove for self-reflection, and the authors described their adversaries critically, highlighting a specific person. Nevertheless, descriptions directly criticizing the king and the dynasty were not permitted in Joseon literature.
The literature of both countries was transmitted to Japan. As the public-oriented publishing became popular in Japan, only intense elements were used to create an imag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focused on arousing public interest. In modern times, Sanehiro Kinoshita and Daisuke Hayashi ignored the spatial and temporal context by extracting only the negative aspects that they recombined to create the image of a “lazy and dissipated” Joseon. Additionally, they made this combination more colorful after Joseon opened its ports by collecting Joseon's historical materials to add to the cited works. The works of Kinoshita and Hayashi were the culmination of this trend. These works significantly influenced later scholars and played an essential role in the later negative image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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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재령 ( Lee Jaer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6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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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유학생 이윤재의 지적 경험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근대 학문·사상의 수용과 유통 양상을 다루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이윤재는 베이징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중국은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거쳐 서양의 학문·사상이 홍수를 이루었고, 대중운동이 일상화된 격변기였다. 유학 중 이윤재는 문자혁명, 몽고의 독립운동, 중화민국정치사, 학생운동, 노동운동, 문학혁명, 여론동향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중국 인식과 구국방안 모색에 기여하였다. 그는 문자혁명 위주의 신문화운동에 주목하였는데 胡適의 문학혁명을 적극 지지,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어문일치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중국학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중국 연극사에 주목하였다. 그는 중국의 애국운동을 지지하였는데 5·4운동을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민중운동으로 평가하면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옹호하고 인권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이윤재는 전공학문의 범위를 넘어 동시대 중국의 신문화와 대중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유통시켰다.
귀국 후 이윤재는 곧장 교육·학술·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근대역사학을 공부한 만큼 史論과 史話에 관한 글을 가장 많이 썼는데 역사상 위인들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리더십을 찾고자 했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를 알리는데 힘썼다. 그는 민족문화의 유구함과 우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외세 침략에 저항한 영웅들을 소개하여 역사를 통한 교훈을 강조하였다. 이윤재는 한글운동에도 앞장섰는데 중국 문학혁명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인 한글 사용과 표준화를 주장하였고, 한글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맹목적인 서양사상의 수용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는 식민지를 극복할 첫걸음으로 도덕적 윤리적 수양을 강조하여 自助와 互助를 앞세웠다. 그는 민족의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단군역사와 개천절을 중시했는데 '弘益人間'과 '在世理化'를 특히 부각시켰다. 이렇듯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던 이윤재는 베이징유학을 통해 과학적 학문 방법과 근대적 학술사상을 섭렵하고, 학과공부뿐만 아니라 시국 문제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교육·언론 활동을 통해 구국방안을 강구하였다. 이윤재의 교육·학술 활동은 베이징 유학을 통해 축적된 근대지식과 서양사상이 민족주의와 혼합, 변용된 것으로 실천적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deals with accepting and circulating aspects of modern sciences and thought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by force, based on the intellectual experiences of Li Yunjae, a Korean student studying in Peking University. From 1921 till 1924, Li Yunjae studied history in Peking University. Meanwhile, as China went through the New-Culture Movement and the May Fourth Movement, modern sciences and thoughts were flooded in China, and mass public movements dramatically arose daily. Li Yunjae as a foreign student in China published his articles regarding on Chinese Character Revolution, Mongolian Independence Movement, political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student movements, labor movements, literature revolution, trends of public opinion, and so on, so he helped Koreans' understanding China and their pursuing methods for saving their country. As he paid his attention to New Culture Movement emphasizing Chinese Character Revolution, and as he held up and introduced the Cultural Revolution of Hu Shi, he stimulated Korea's Verbal-written Language Unity Movement, and emphasized the history of Chinese dramas as a method of sinology. As he supported China's patriotic movements, he evaluated the May Fourth Movement as the most honorable popular movement in history, and defended the 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 and seriously considered human rights. As he supported China's patriotic movements, he evaluated the May Fourth Movement as the most honorable popular movement in history, and defended the 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 and seriously considered human rights. Like such ways, Yi Yunjae, regardless of his major field, was strongly influenced by contemporary Chinese New Culture Movement and popular movements, and circulated them in Korea through mass-media.
Right after coming back to Korea, Yi Yunjae participated into educational, academic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As he studied modern history, he wrote a lot of historic essays and historic stories, through which he excavated historic figures in order to find leadership for his colonized homeland. Also, he put his efforts in educating general public about his homeland's history. He emphasized the perpetuality and excellency of his nation's history, and the historical lesson of historical heroes resisting foreign invasions. Yi Yunjae also led the Hangeul Movement; as he was influenced by the Chinese Literary Revolution, he asserted systematic usage and standardization of Hangeul and participated in compiling a Hangeul dictionary. He was cautious about reckless acceptance of western thoughts, emphasized moral and ethical cultivations, such as self and mutual reliance for the first step to overcome the colonized reality. He highly regarded Dan-gun history and Gaecheonjeol not to forget the national origin, and especially highlighted 'hongyikyingan' and 'jaeseyihwa'. With his strong nationalist tendency, Yi Yunjae mastered scientific methodologies and modern academic thoughts through studying in Beijing, got interested not only in his class works but also in state of affairs, and devised the way to save his homeland through education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Yi Yunjae's education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were the combina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 modern knowledge and western thoughts attained by studying in Beijing and of nationalism. He was a model of the intellectual acti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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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수미 ( Kim Su-m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1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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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6ㆍ25 전쟁 과정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에 대하여 예비 역사교사를 대상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고, 이 토론수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비 역사교사의 역사인식을 살펴본 사례 연구이다. 이 연구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6ㆍ25 전쟁의 책임은 우선적으로 북한에 있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예비 역사교사는 유엔군의 전쟁 개입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고마운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나누어졌다. 또한 전쟁 전 이승만의 북진 통일 주장에 대해서는 무력을 이용한 통일은 반대한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토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 토론수업의 효용성에 대한 부분이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고 나와 다른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도 사유해 보는 토론을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을 살피면서 역사인식이 실제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효용성 있는 토론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본 연구는 분단국가의 특수성이 있는 상황에서 6ㆍ25 전쟁 당시'유엔군의 북진 정당성'문제에 의문을 던진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논제로 삼아 근거를 찾아 설득하는 토론수업 경험은 역사교사를 지망하는 예비교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This case study i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historical cognition of pre-service history teachers participating in classroom debates on the UN forces' moving north of the 38th parallel during the 6ㆍ25 War, which used to be regarded unquestionable. The analysis highlights the following findings and implications.
First, the participants share the historical cognition that North Korea is primarily responsible for the 6ㆍ25 War and that the liberal democratic system is superior to the communist one. Mostly, the participants attribute the existence of the Republic of Korea to the grateful involvement of the UN forces in the war, whereas they have mixed views on the legitimacy of the UN forces' moving north. Also, the participants articulate the historical cognition against any unification via armed forces in reference to the pre-war stance of Syngman Rhee advocating a preemptive strike on North Korea.
Second, as for the benefits of classroom debates on historical events, there is a shift in the historical cognition among the pre-service history teachers, who corroborate arguments with compelling evidence while contemplating and discussing diverse evidence-based arguments and interpretations from different perspectives.
Third, beneficial classroom debates should be underpinned by participants' profound appreciation of historical contents and contexts.
Despite the challenge of raising questions about the legitimacy of the UN forces' moving north during the 6ㆍ25 War given the awkward reality of our divided nation, it seems worthwhile for pre-service history teachers to engage in classroom debates with compelling evidence-based arguments about historical events that used to be deemed unquestion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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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채원 ( Yoo Chaewe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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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중후기로 갈수록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고 복건지역의 경우 福州와 厦門 등 연안도시의 성장도 가속화되면서 역병의 발생과 유행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 있어서도 청대에는 의료가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방치되면서 의료위생환경에 대한 조성은 각 지방정부의 행정력과 민간사회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조치는 역병의 발원지나 유행지를 선정하고 승선의 검역 등을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또한 복건지역의 민간사회에서는 자선적 성격의 보건활동이 매우 유동적이었고, 많은 민간 의사들이 역병 치료를 위한 구조 활동을 펼치거나 의서를 선전해서 역병에 도움이 될 만한 일상 상식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에 역병이 돌 때 시행했던 환경 및 위생 개선 조치들을 토대로 대응했으며, 이론적으로는 당대의 의학 지식에 의존했다.
청대 복건인의 역병에 대한 대처 방식은 종교 관념이 투영된 의례를 통해 치료하려는 방식과 경험적인 의약에 의존하는 전통방식을 고수해 가면서 당사자도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병의 지리적 확산과 피해의 증대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지리적 다양성과 분절성으로 인해 생성된 복건의 지역적 특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고, 역병이라는 큰 재난상황에서 긴장과 협력과정을 거치면서도 전통과 근대라는 과도기에 나타난 복건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The population was increasing significantly in the mid-to-late Qing Dynasty, and in the case of the reconstruction area, the growth of coastal cities such as Fuzhou and Xiamen was accelerated, and the outbreak and epidemic of infectious diseases became a serious social problem. In terms of medical treatment, medical care was completely neglected as a private area during the Qing Dynasty, and the creation of the medical hygiene environment was different depending on the administrative power of each local government and the capabilities of the private society.
The most important measure is that the origin or epidemic of the epidemic was selected and quarantine on board was institutionalized. In addition, philanthropic health activities were very fluid in the civilian community in the Fujian area, and many private doctors carried out rescue activities for the treatment of the epidemic or promoted daily common sense that could help the epidemic. It responded based on environmental and hygiene improvement measures previously implemented during the epidemic, and theoretically relied on contemporary medical knowledge.
In the Qing Dynasty, the Fujian people's response to the epidemic contributed to the geographical spread of the epidemic and the increase of damage in a way that was not recognized by the parties while adhering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treating it through rituals projected with religious ideas and relying on empirical medicine.
This result is because there was a strong tendency to emphasize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Fujian created by geographical diversity and segmentation, and it can be said that it shows Fujian's fluid and unstable socioeconomic environment in the transition period of tradition and modernity through tension and cooperation in the great disaster of epi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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