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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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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228-128x
  • : 2733-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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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6)~81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090
한국한문학연구
81권0호(2021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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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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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문인들의 음서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양상 연구

저자 : 이국진 ( Lee Gook-ji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5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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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 등용 제도는 과거제를 강화하고, 음서제는 그 혜택 범위를 축소하고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는 방식으로 정비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음서제는 일찍부터 부작용이 드러났으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문벌의식이 강화되자 음서제의 폐단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 任叔英ㆍ申欽ㆍ崔晛ㆍ洪汝河 등은 음서제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나태함, 안일함, 부도덕함을 지적했다. 아울러 공정한 인사 선발과 승진이 이뤄지지 않는 음서제 시행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이외에도 趙又新ㆍ黃暐ㆍ趙宗著ㆍ閔鎭厚 등은 蔭官들의 낮은 학식과 무능함, 관직을 탐하는 습성과 지방 수령으로서의 횡포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 시기 문인들이 모두 蔭官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으며, 조선시대 문인들이 모두 蔭官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음서제 폐단의 심각성을 지적한 내용 중 일부는 인조대 중용된 인물이 광해군대를 비판하는 글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탁과 뇌물을 주고 받는 정황이나 蔭官들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을 살펴볼 때, 조선 중기 이후 문벌의식이 강화되고 임진왜란 이후 붕당정치의 폐해와 급격한 정치 변동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음서제의 폐단이 심각해 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영정조 시기 이후에도 음서제의 폐단은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는 왕권 강화와 왕실 안정을 도모하고자 집권 세력의 자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蔭官의 관직 진출을 확대했다. 당시 李福休 등은 이 과정에서 蔭官의 부조리와 폐단이 만연한 현실을 비판했다. 이후 19세기 세도정치기로 접어들면서 음서제의 폐단은 개선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음서제의 폐단은 과거제의 문란이 갈수록 극에 달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주장한 음서제개선 방안은 기본적으로 과거제의 폐단을 개혁하는 방안과 연계해서 논의되었다. 李瀷이 주장한 과거제의 수정과 천거제의 병용, 柳壽垣이 주장한 음서제의 혜택 제한과 공정한 선발 방식 엄수, 尹愭와 崔漢綺가 주장한 천거제의 적극적인 활용과 음서제의 공정한 시행 등은 조선시대 관리 선발 제도의 핵심인 과거제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는 고민 위에서 구상한 것이었다. 이들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절차를 거친 천거의 방식으로 과거제를 개혁하려는 목적 속에서 음서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제기한 음서제 개선 방안의 핵심은 혜택 대상의 엄격한 제한 및 공정한 선발과 승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양반 사대부들은 신분과 경제력을 쉽게 재생산할 수 있는 제도 앞에서 윤리의식을 잊어버리고 특권의식을 드러내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음서제의 폐단에 깊은 고민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서제를 활용하여 양반 집권 세력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음서제는 사사로운 청탁과 결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관리 선발 제도였다. 더욱이 조선 중기부터 관료 선발인원이 적체되며 실제 관직이 부족해지자, 당파 간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일부 양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을 일삼기도 했다. 조선시대 음서제가 개선되지 못한 원인은 이러한 총체적인 국면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Joseon's government official appointment system was improved by strengthening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reducing the scope of benefit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nd strictly applying related regulations. However, the ancestors' virtue system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revealed side effects earlier on. Those who benefited from the ancestors' virtue system more frequently neglected their studies. In the 16th century, as the consciousness of lineage was strengthened, the evil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intensified, and injustice and corruption became widespread in the process of recruitment and promotion of government officials.
Therefore,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during 1592-1598, critical recognition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were expressed in earnest even in the collections of literary works of literary persons. Lim Sook-young, Shin heum, Choi Hyun, Hong Yeo-ha, Jo Woo-shin, Hwangwi, Jo Jong-jeo, and Min Jin-hu criticized the immorality, laziness, and incompetence of those who benefitted from the ancestors' virtue system. In addition, they pointed out the problem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that was hindering fair personnel selection and promotion. Accordingly, discussions about the problem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nd improvement measures were actively unfloded both inside and outside the royal court, but they were not effective. However, not all literary persons at that time viewed the ancestors' virtue system only negatively. Song Si-yeol, Han Won-jin, and Shin Jeong-ha advocated those who entered government services through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nd evaluated them positively. Therefore, the arguments of literary persons who viewed the ancestors' virtue system critically and those of literary persons who viewed the ancestors' virtue system positively should to be understood considering their political positions at that time.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plans to improve the ancestors' virtue system were actively sought. However, the seeking was basically discussed in connection with plans to reform the evils of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which became extremely seve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Accordingly, the revision of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and the use of the recommendation system in combination with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asserted by Lee Ik, limiting the benefit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nd fair selection asserted by Ryu Su-won, the active utilization of the recommendation system, and the fair implementation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sserted by Yun Gi and Choi Han-gi, etc. were conceived on the agony of reforming the evils of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which was the core of the government official selection system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short, although they were aware of the evils of the ancestors' virtue system, since they regarded ways to fairly select competent human resources as important as a way to reform the public examination system, they intended to properly utilize the ancestors' virtue system among the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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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반전」을 통해 본 18세기 조선의 사회신분 질서

저자 : 계승범 ( Kye Seung-bu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8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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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양반전」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신분 질서를 조명하였다. 먼저 18세기 조선사회의 신분 질서와 관련하여 「양반전」을 해석한 기존 학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양반전」은 18세기 조선의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붕괴하던 정황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로 널리 회자하였다. 일부 반론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 신분 질서의 와해라는 인식 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양반전」의 내용만으로는 그런 해석을 도출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양반이 주도하던 신분 질서가 꽤 강고했음을 보여준다. 「양반전」에는 가난한 정선 양반 외에도 다양한 양반 군상이 등장하는데, 사회 지배층으로서 그들이 현실에서 누리던 신분적 지위는 매우 확고하였다. 가난한 양반을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양반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학계에서 「양반전」을 전통적 사회신분제 철폐를 주장한 작품으로 파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는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국내 역사학계의 통설처럼 군림하던 일부 학설을 「양반전」 이해를 방해한 주요인으로 꼽았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허구성, 납속의 실상에 대한 오해, 신분제 '동요'론의 허점, 신분의 개념 문제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With emphasis on the social status system of Joseon Korea in the mid-18th century, this paper reexamines Yangban-jeon, a satirical short story written by Pak Jiwon in the 1740s, to understand the fact that Pak neither criticized the social status system nor described the reality in which the system was in decline due to the new phase of the socioeconomic development of the time. Many an existing study on the historical meaning of Yangban-jeon never hesitated to accept Yangban-jeon as a literature showing the collapse of the social status system in the eighteenth century despite some criticisms. The content of Yangban-jeon, however, vividly shows that the social status system of the time was working well without serious challenge. A number of diverse ruling yangban elites appears in the story of Yangban-jeon. Many of them still enjoyed their social status as yangban, although some suffered from economic hardship as seen in the case of poor yangban in the Jeongseon prefecture. It is not reasonable to generalize a certain yangban in poverty as if he represents the whole ruling yangban class. Misinterpretations of Yangban-jeon was a product of historical interpretations, prevalent in the 1960s through 1980s, such as the theory of bud of capitalism, misunderstanding of the grain contribution policy and the hereditary social status system, and the ambiguous concept of the social status, among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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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양반되기' 서사를 통해 본 조선시대 양반의 조건 -「구복막동」과 「양반전」을 중심으로-

저자 : 전경목 ( Chon Kyoung-m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9-12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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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필자는 조선후기에 널리 읽힌 한문서사 중 「구복막동」과 「양반전」을 분석해서 사내종 막동이 어떻게 신분상승 즉 양반되기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 전략과 기반을 살펴보고 정선군수가 작성한 양반매매문서를 통해 정선부자가 왜 양반되기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사내종이었던 막동은 4단계 10가지 전략을 펼쳐 양반이 되었다. 이에 비해 경제력만을 갖춘 정선부자는 오직 이득만을 추구하고 문화적 기반이나 사회적 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양반사회나 양반문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 양반되기를 거부 또는 포기했다. 사내종 막동은 양반되기에 성공했으나 오히려 그보다 상위에 있던 평민 출신의 정선부자가 양반되기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막동은 호노로서 양반문화를 학습할 기회를 가졌던 데에 비해 정선부자는 그러할 계제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자해독능력의 유무도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으로 여러 여건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신분상승에 대해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만 주목해서 돈을 주면 얼마든지 양반 신분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해 왔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시대 양반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이 「구복막동」과 「양반전」의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계급 혹은 계층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따라잡기'와 '구별짓기'는 있었다. 하위 계급과 계층에서는 언제나 상위 계급이나 계층을 따라잡으려 노력했으며 상위 계급과 계층에서는 하위 계급 혹은 하위 계층과 구별짓기를 시도해 왔다. 따라서 '따라잡기'와 '구별짓기'를 동시에 고찰해야만 당시 사회의 다양성이 드러날 것으로 판단된다.


Gubok Makdong [Male Slave Makdong] and Yangbanjeon [Story of Aristocrat] are among the narrative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and were popul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aper examines what strategies the male slave Makdong adopted to be a yangban, aristocrat, and why a rich man in Jeonseon County refused to become a yangban even if it was possible to buy the status. Makdong became a yangban through four steps by adopting ten strategies. In contrast, a rich man in Jeongseon County who owned only material wealth refused to become yangban because he only pursued material profits lacking cultural background and social conditions as yangban, and did not understand the yangban culture. While Makdong, as 'hono' slave, had opportunities to learn yangban culture, the rich man in Jeongseon did not have such opportunities. Whether one was literate was one of the crucial factors.
The yangban in Joseon Dynasty was equipped with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conditions as aristocrats. Researchers dealing with status upgrading in the late Joeseon Dynasty have argued that the yanban status could be bought easily, focusing only on the economic aspect. But, Gubok Makdong and Yangbanjeon reveal that such arguments are based on so much fragmental understanding of the era. In any society any time where there are class or status divisions between the upper and the lower ones, there have been efforts to 'keep up with' the upper class among members of the lower class, on the one hand, and, efforts to 'differentiate themselves from the lower class' among members of the upper class, on the other hand. Consequently, when we consider both the two different kinds of efforts, we can get the real variety of a specific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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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사(結社)로서의 윤리와 경제 공동체 -조선 후기의 향도(香徒)와 동약(洞約) 담론을 중심으로-

저자 : 김홍백 ( Kim Hong-bae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7-16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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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근대 이전 結社의 대표적 두 형태인 香徒와 鄕約을 통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영성/이념 공동체이자 상호부조적 마을/생활 공동체의 역사적ㆍ사상적 의미를 조망하고자 한 시도이다. 이를 위해 먼저 結社의 어원을 탐색하고 香徒와 鄕約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洞約 내지 鄕約을 통해 鄕村에서의 인적ㆍ관계적 윤리와 사회ㆍ경제적 부조가 어떠한 상호적 실천규약으로 구축되고 있는지 조선후기 실학자 安鼎福의 洞約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나아가 안정복과 동시대의 실학자 柳壽垣의 의론을 중심으로 기층의 민간결사인 '香徒禊'가 經世的 治國의 측면에서 어떻게 새로이 사고되고 있는지 조망하였다. 이를 통해 안정복과 유수원은 향촌 사족 중심의 상하합계적 동약이냐, 시장ㆍ성읍까지 포괄하는 한민 중심의 실용주의적 향도계이냐의 차이를 차치한다면, 공히 일상과 생활의 日用事物을 중시하는 실학적 태도를 기반으로 조선의 민간결사인 鄕約이나 香徒를 각기 이론적으로 재인식하고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현실 위에서 실천적ㆍ윤리적으로 사유했음을 검토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wo representative forms of an Association(結社) in the late Chosŏn dynasty, the Hyang-do(香徒, Buddhist Associations) and Dong-yak(洞約, Village Covenant). Through this, this paper attempts to look at the historical and id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traditional spiritual and ideological community in the East-Asia, as well as the mutual aid village and living community.
First, the etymology of the Association(結社) was searched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yang-do(香徒) and Hyang-yak(鄕約) was considered. Focusing on the Dong-yak(洞約, Village Covenant) of the late Chosŏn Silhakja(實學者, Practical Leaning school scholar) An Chong-pok (安鼎福), I looked into the practice of relational ethics and socio-economic mutual aid in the village. In addition, in this paper, focusing on the arguments of contemporary Silhakja(實學者) Yoo Soo-won(柳壽垣), I reviewed how the people's private association, 'Hyang-do(香徒)', is newly thinking in terms of state governance.
In conclusion, it can be seen that the two intellectuals both thought practically and ethically based on the Practical Leaning attitude of placing importance on daily life and daily affairs in the late Chosŏ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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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후기 민인의 하부정치

저자 : 김대중 ( Kim Dae-jo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9-218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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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민'에 대한 최근 한문학계의 학적 관심이 퇴조한 데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조선후기 피지배계급의 행위주체성을 탐구한다. 조선후기 피지배계급은 꼭 민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은밀한 저항을 지속해왔다. 이 점에 유의하여 본 논문은 '저항의 일상 형태'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본 논문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자신에게 善政을 베푼 위정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상찬 또한 피지배계급의 중요한 전략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저항과 호응 양면에서 피지배계급의 다양한 전략을 살펴본 뒤에 본 논문은 조선후기 피지배계급의 '자기조직화'와 '비조직적 조직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본 논문에서 분석하는 문헌은 許筠의 「豪民論」, 李瀷의 『星湖僿說』, 尹愭의 「家禁」, 丁若鏞의 『牧民心書』 「吏典」 <察物> 및 「兵典」 <應變>, 成大中의 『靑城雜記』, 朴世堂의 「懷仁縣監尹君墓表」, 李鈺의 「張福先傳」 등이다.


Based on the reflection on the recent decline in academic interest in the "people", this paper explores the agency of the governed class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governed class of the late Joseon Dynasty continued to resist secretly in various ways in everyday life, even if they did not necessarily cause a revolt. With this in mind, this paper analyzes the 'everyday forms of resistance' from various angles.
This paper takes the view that not only resistance to the ruling class, but also active support and praise for the politician who practiced good politics are also important strategies of the governed class. After examining the various strategies of the governed class in both resistance and praise, this paper analyzes in-depth the “self-organizing” and “unorganized organization” of the governed clas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minron'(豪民論), articles of Sunghosaseol(星湖僿說), 'gagum'(家禁), articles of Mokminsimseo (牧民心書), an article of Cheongseongjabki(靑城雜記), 'jang bogseonjeon'(張福先傳) are analyzed in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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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문학적 전범으로서의 『춘추좌전(春秋左傳)』 인식에 관한 일고(一考) - 17세기 초 고문(古文) 학습관과 서적 편찬-

저자 : 심규식 ( Sim Kyu-si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5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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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조선에서는 先秦兩漢의 문장을 모범으로 하는 擬古文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春秋左傳』에 대한 문학적 논의가 크게 증가했다. 崔鳴吉, 張維 등 당대 의고문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 뿐 아니라, 의고문에 비판적이었던 李植조차도 『좌전』을 문학 학습의 수단으로 보는 등, 『좌전』의 문학적 제고는 문학관과 당파를 초월한 시대정신이었다. 특히 『좌전』을 外書로 지칭한 최명길의 시각은 후대의 春秋大義에 입각한 『좌전』 이해와는 크게 달랐다. 17세기 초의 문학적 분위기는 서적 편찬에도 영향을 주었다. 官學의 입장에서 주석을 집대성하고자 한 조선 전기 좌전학, 춘추대의의 강화를 위해 朱熹의 『춘추』 주석을 집대성하고 『通鑑綱目』의 綱目體를 모방하고자 한 조선 후기 좌전학과 달리, 17세기 초에는 순수 古文 선집으로서의 『좌전』 관련 서적이 편찬되었다.


In the early 17th century Chosŏn, interest in pseudoclassical writingwhich modeled pre-Qin and Han period works-had increased. Zuozhuan was recognized as a literary model accordingly. This acknowledgment was a zeitgeist that spread beyond political factions and literary circles. Not only Ch'oe Myŏngkil and Chang Yu-who had a positive opinion on pseudoclassicism-but also Yi Sik-who opposed pseudoclassical movementconsidered Zuozhuan as a literature textbook. Especially, Ch'oe considered Zuozhuan as "an auxiliary text." This opinion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an orthodox understanding based on the ideology of "the great cause in Chunqiu" in late Chosŏn. The zeitgeist greatly affected publications in the Chosŏn era. Early 17th century anthologies-Yu Mongin's Taega Munhoe for example-included Zuozhuan as important classical literature. This brief change is noticeable between the early Chosŏn compilations of annotations for the official study and the late Chosŏn adaptations of Zhu Xi's Zizhi Tongjian Gangmu and reconstructions of his Zuozhuan scholarship in attempts to emphasize "the great c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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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의 생애(生涯)와 현실인식(現實認識)

저자 : 徐漢錫 ( Seo Han-su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61-29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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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17세기 초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전후하여 서북방 장수로 활약했던 충무공 정충신의 생애와 그의 경세관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서 그의 생애를 성장ㆍ수학기와 출사ㆍ활약기로 대별하고 광주 목사 권율 휘하에서 1592년 당시 병조판서였던 백사 이항복을 만나게 되는 과정과 그를 통해 학업을 닦는 상황을 먼저 고찰한다. 그리고 출사한 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결정적 계기인 안현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특히 정묘호란 뒤 명분과 대의로만 일관하는 조정 신료들의 무지한 결정에 맞서 현실적인 대응을 펼친 것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이괄의 난 초기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와 적들의 계책에 대한 전술적 판단 그리고 후금의 세폐 요구는 絶和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세분석이 일관되게 실리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특히 군무를 논함에 지역간 공조를 통한 축성과 수성전을 실행할 실효적인 군사 수급대책, 그리고 해진 설치 등등의 국방책이 현장 실무가로서의 식견과 안목을 바탕으로 실용성 위주로 구현되었음을 논증한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life and thought of governance of Chungmugong Jeong Chung shin, who served as a commander in the northwest before and after Lee Gwal's rebellion and Manchu Invasion of Joseon (Korea) in 1627 in the early 17th century. For this purpose, this study broadly divides his life into growth education and going to office participation under the leadership of Gwangjumoksa Kwon Yul, and above all, examines the process of meeting Baeksa Lee Hang bok, who was a National Defense vassal at the time in 1592, and the situation of pursuing his studies through him. And, after going to office, he played a key role in the battle of Ahnhyeon, a decisive moment to level Lee Gwal's rebellion, and this study examines in particular, after the Manchu Invasion of Joseon, his realistic responses opposite to the ignorant decision of the royal court and vassals, consistent with justification and cause. Through this, the reason why he did not participate in Lee Gwal's rebellion, the tactical judgment of the enemy's tactics, and the analysis of the situation that the demand for Jusen's annual tribute was not the object of 'braking off amity (絶和)' confirm the fact that he consistently maintained a practical attitude. In particular, in discussing military work, it is demonstrated that defense policies, such as effective military supply and demand measures to build fortresses through cooperation between regions and to carry out fortress defense battles, and the installation of beach encampment, were implemented with a focus on practicality based on the insights and perspectives of field practitio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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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 후기 북벌론(北伐論)의 여맥(餘脈)과 오자서(伍子胥) 담론

저자 : 정하정 ( Jung Ha-j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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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병자호란 이후 北伐論의 제기와 함께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던 伍子胥의 복수가 북벌론이 퇴조한 이후에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북벌론이 현실 논리를 상실한 시기인 17세기 말∼18세기 초에 북벌론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론과 그것을 반대하는 소론의 갈등이 있었고, 그에 따라 북벌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오자서 관련 담론 역시 노소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 있음을 방증하였다. 나아가 현종 대 漢黨과 山黨 간의 公義ㆍ私義 논쟁 또한 오자서 복수에 대한 상반된 노소의 견해차를 짐작하게 하는 일로 주목하였다. 그 이유는 이 논쟁이 오자서 복수와 같이 忠ㆍ孝가 상충하는 구도를 띠었고, 또 君臣之義를 중시한 한당의 徐必遠이 오자서 복수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쟁은 노소 분기 이전에 일어났지만, 산당은 주로 노론이 되고 한당은 대부분 소론이 되었던 만큼 노소분기와 접맥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실제로 17세기 말∼18세기 초 노소 분기 속에서 산생된 오자서 담론이 노소에 따라 상반되는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오자서 담론은 노론의 金春澤, 소론의 林象德ㆍ李匡德에게서 확인되는바, 이를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김춘택은 충ㆍ효가 상충하는 역사 사건에서 상대적으로 효의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을 보였는데, 이는 오자서의 복수를 바라볼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부자ㆍ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그 경중을 따지는 대신 '赤子之心'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인간 본연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의 가치를 중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임상덕과 이광덕은 충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 충이란 어떠한 상황에도 신하가 반드시 행해야 할 당위였다. 그리하여 楚平王과 오자서의 아비인 伍奢가 군신 관계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거나 春秋之義의 함의를 북벌론을 주창한 노론과 다르게 해석하여 오자서 복수를 부정하였다.
이처럼 세 인물의 오자서 담론은 저마다의 논리와 근거를 통해, 북벌론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노론과 북벌론을 반대하고 君臣之義의 중요성을 피력한 소론의 입장을 보여 준다. 즉 이들의 오자서 담론은 작품 내적 특징을 갖고 있는 동시에, 노소 갈등이라는 작품 외적 맥락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The study sought to answer the question of how Wu Zixu(伍子胥)'s Revenge, which was positively recognized with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was evaluated after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was decline. To this end, he first tried to prove that there was a conflict between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to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in the late 17th and early 18th centuries when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lost its logic of reality. Furthermore, Wu Zixu-related discourse, which was recognized as a symbol of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also proved that pros and cons could be divided according to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The debate over public and private matters during the Hyeonjong era also proved to be a reflection of the conflicting views of Noron and Soron on Wu Zixu's Revenge. The debate is meaningful in that it has conflicting structures between allegiance and filial duty, such as Wu Zixu's Revenge. Of course, the debate took place before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were differentiated, but it was seen as linked to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s differentiation.
On this basis, it was considered whether Wu Zixu's discourse, which was spawned during the differentiation between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in the late 17th and early 18th centuries, differed according to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Specifically, the writings of Kim Chun-taek(金春澤), Im Sang-deok(林象德), and Lee Kwang-deok(李匡德) were reviewed. As a result, the writings of the three individuals demonstrate the position of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which opposed Plan for Northern Subjugation and expressed the importance of allegiance, based on their own logic and rationale. The Wu Zixu discourse of the three has the meaning of the times in that it has internal characteristics of the work and also contains the context of the conflict between the Noron Party and the Soron Party.

KCI등재

10연세대학교 소장 『만오만필(晩悟漫筆)』의 작자에 대한 고찰

저자 : 林永杰 ( Rim Young-gul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5-36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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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소장된 『晩悟漫筆』의 작자를 밝히고 그의 가계와 일생을 개략적으로 고찰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만오만필』은 筆寫記에 따라 작자가 安廷燮(1591∼1656)으로 알려졌으나 필자는 『만오만필』에 그가 사망한 뒤의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고 작자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결국 『만오만필』에 기록된 작자 자신과 선조들에 대한 정보와 그의 스승이었던 安鼎福(1712∼1791)의 『順菴集』에 수록된 작품 수 편을 참조하여 『만오만필』의 작자를 鄭顯東(1730∼?)으로 밝혀낼 수 있었다.
정현동은 자는 龍卿, 호는 晩悟堂이다. 1730년에 태어났으며 『만오만필』에 1812년에 남긴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이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그의 친가인 東萊鄭氏는 몰락한 南人 집안으로서 본래 대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그의 부친이 武科를 포기함에 따라 田莊과 先塋이 있던 廣州의 慶安面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그의 외가인 德水李氏는 西人 명문가로 광주ㆍ龍仁 등 경기도 남부에 상당히 큰 집단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었다. 두 집안 사이에서 태어난 정현동은 벗들과 함께 당시 광주 경안면 德谷里에 정착해 있던 안정복을 스승으로 모시며 科擧를 준비하였다. 그는 평생 과거에는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안정복이 생전에 편찬을 마치지 못한 『列朝通紀』를 완성하는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This study identifies the author of Mano-Manpil(晩悟漫筆) owned by Yonsei University Library and reviews on the family and life of the author. The author of the Mano-Manpil was known to be Ahn Jeongsup(安廷燮, 1591∼1656) according to the notes on transcription. However, this study doubted on the fact that the Mano-Manpil included the events that happened after Ahn passed away. In response, this study started on figuring out the author. After referring to the information of the author and the ancestors recorded in Mano-Manpil and numbers of writings included in Sunamjp(順菴集) by Ahn Jeongbok(安鼎福, 1712∼1791), who was the teacher of the author, this study figured out that the author of Mano-Manpil was Jeong Hyeondong(鄭顯東, 1730∼?).
Jeong Hyeondong's courtesy name(字) was Yongkyeong(龍卿) and pen name(號) was Manodang(晩悟堂). He was born in 1730 and considering the record left in Mano-Manpil in 1812, Jeong lived at least until 1812. His paternal side family, Dongrae Jeong clan(東萊鄭氏), was a ruined Nam-in(南人) family. While the clan had been living in Seoul for generations, Jeong's father gave up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his family moved to Gyeongan-myeon(慶安面), Gwangju(廣州), where their farms and graveyard were located. Jeong's maternal side family, Deoksu Yi clan(德水李氏), was a noble Seo-in(西人) family that formed a considerably large group in the southern Gyeonggi-do(京畿道) regions such as Gwangju and Yongin(龍仁). Born between the two families, Jeong learned under Ahn Jeongbok who settled down in Deokgok-ri(德谷里), Gyeongan-myeon, Gwangju and Jeong prepar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with his companions. Although Jeong could not pass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throughout his life, he achieved an academic performance of completing Yeoljo-tongki(列朝通紀) that Ahn Jeongbok couldn't finish compiling during his lif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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