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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 Manuscripts

  • : 한국고문서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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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3218
  • : 2671-8081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59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499
고문서연구
59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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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선사주내로선전소식(修禪社主乃老宣傳消息)에 대한 고찰

저자 : 조남곤 ( Jo Nam-g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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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시대 고문서인 「修禪社主乃老宣傳消息」을 판독하고 그 내용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松廣寺奴婢文書로 불리어 온 이 고문서는 지금까지 문서의 종류와 성격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데 본고에서는 이것이 宣傳消息의 일종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이 문서의 판독이 남풍현(1974/2000)에서 완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잘못 판독한 초서자들을 實證的 方法으로 정밀하게 판독하였고 지금까지 미제로 남아 있던 8행의 마지막 글자에 대해서도 草書 形態와 文理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실증적인 판독을 하였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爲로 판독한 10행의 安邀 뒤의 글자도 자형과 문리, 작성자의 필법의 특성을 고려하여 새롭게 판독하였다.
이러한 판독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고문서에 쓰인 敎定別監, 出納과 같은 고려시대의 제도적 용어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어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이두 敎/敎是의 문법적 용법을 기술하였고, 조선시대에 기관이나 행정 단위 명사 뒤에서 주격조사로 쓰인 以가 音借字로 이미 13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contents of Suseonsaju naero seonjeonsosik (修禪社主乃老宣傳消息), an ancient document from the Goryeo Dynasty. The type and nature of this ancient document, which has been called Slave document of Songgwang Temple (松廣寺奴婢文書), has not been adequately identified until now. However, we attempted to prove that it is a kind of seonjeonsosik (宣傳消息), a type of ancient documents. Some of the Korean language academia claim that the decipherment of this document was completed in Nam Poong-hyeon (1974/2000), but there is room for reconsideration.
In this paper, we accurately and empirically deciphered the choseo (草書) of the document which had been misread in the literature. And the last letter of the 8th line, which had remained unsolved, also empirically deciphered by comprehensively considering the shape of choseo, and the context (文理). In addition, the character after an-yo (安邀) in the 10th line, which had been read as wi (爲) in the literature, was newly deciphered in consideration of the character shape, the context, the characteristics of the drafter's technique of calligraphy.
Based on these readings, we were able to identify and correctly understand the institutional terms of the Goryeo period, such as gyojeongbyeolgam (敎定別監) and chulnap (出納), used in this ancient document. And through the linguistic analysis, we described the grammatical usage of Idu isi (敎/敎 是). Also we proved that i (以), which was used as a subjective case marker after nouns of an institution or administrative unit during the Joseon Dynasty, was already used in the thirteenth century as a Idu character borrowed from the sound of Chinese character (音借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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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병증록(病症錄)의 문서학적 고찰

저자 : 김정수 ( Kim Jeong Su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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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시대의 병증록 문서 87건을 고문서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관·사찬 문헌을 통해 병증록의 실제 이용 사례를 분석한 것이다. 병증록은 환자 측에서 신상정보·과거 병력·복용 약력·병의 증상 등을 적어 약 처방이나 치료법을 묻거나 질병 상담을 목적으로 의료인에게 작성해 보낸 문서이다.
민간에서 병증록은 환자 측에서 왕래망을 통해 간찰과 동봉하여 보내거나, 혹은 단독으로 보내졌고, 의료인은 병증록이나 별도의 종이에 약방문을 적어 환자 측에 돌려보냈다. 환자 측에서는 이를 근거로 조제와 탕전 등을 거쳐 약을 복용했다. 왕실에서는 내의원 의관의 요청에 따라 궐내의 왕실 구성원이 병증록을 작성해 내려보내면, 이를 근거로 議藥 및 처방이 이루어졌으며, 궐외의 의관이 왕실 구성원이나 대신의 병을 진단하고 약을 요청하거나, 병증을 보고할 때는 병증록을 書啓單子로 대체하여 작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병증록은 문서 형태상 낱장형과 점련형으로 나뉜다. 구성요소는 환자의 성별·생년·나이 등의 신상정보를 필두로 하여, 병력·복용 이력·약 처방을 요청하는 종결어 등이 있다. 서체상 소지류 문서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 작성 과정에서 의료인의 약방문을 작성할 공간을 사전에 마련해 보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증록은 한문, 국·한문혼용, 한글로 작성되었는데, 특히 한글은 어린아이나 여성 등의 병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
본 연구는 병증록을 고문서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생활의약사 방면에서 병증록을 통해서 이루어진 조선시대 의약 문화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역사학과 의학사 방면에서 소외되었던 병증록의 사료적 가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 의의를 가진다.


This study analyzed 87 actual documents of Byeonjeungrok(病症錄) of the Joseon Dynasty from an ancient book perspective, and analyzed actual use of Byeonjeungrok through government and private documents. Byeonjeungrok is a document written and sent to medical personnel for the purpose of medical counseling or medical treatment by writing personal information, past medical history, medical history, and symptoms of the disease.
In the private sector, Byeonjeungrok was sent enclosed with or alone through the patient's network, and the patient brought it with him/her. The royal family found that when a royal member of the royal family prepared and sent Byeonjeungrok at the request of Royal medical staff and prescribed it based on this, and that Byeonjeungrok was replaced by the royal physician's seogye (醫官 書啓) when a royal member or deputy requested medicine or reported illness was reported.
In the form of documents, the document could be classified into two types: the sheet of ByeongJeungrok and the glued ByeongJeungrok. Components include terminating words that request medical history and prescription of medicine, based on personal information such as gender, birth year, age, etc. of the patient. It showed similar characteristics to the typeface document, and it was confirmed that the medical personnel's pharmacy visit was prepared in advance during the preparation process. ByeongJeungrok was written in Chinese, Korean, and Chinese characters, especially Hangeul, which was efficiently used to describe the disease of children and women.
This study is meaningful in that it reflected the historical and medical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by analyzing the ByeongJeungrok widely used during the Joseon Dynasty from an ancient book perspective and revealing the historical value of medical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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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주 교동 최씨가 소장 추수기(秋收記)·수세기(收稅記) 자료의 전존 현황과 특성

저자 : 최주희 ( Choi Joo Hee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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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 최씨가[최부자댁]에서 소장하고 있는 334건의 추수기·수세기 자료는 교동 최씨 가의 지주 경영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군이다. 이중 274건은 경주시와 울산 북부 지역 일대의 논에서 지대를 수취하기 위해 작성된 추수기 자료들이다.
최씨가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干支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을 때, 19세기 후반부터 일제시기 전반에 이르는 시계열 분포를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같은 해에 작성된 여러 형태의 추수기가 남아 있고, 추수기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셋째, 일제시기까지 대부분의 논에서 打租의 방식을 적용하여 추수기를 작성하였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지대수취 방식은 대부분 執租와 賭租인데 반해, 교동 최씨가의 추수기는 作人과 種子, 稅米까지도 공동 분담하는 형식을 띤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추수기 상에 作人과 斗落, 種子·卜價를 먼저 쓰고, 추수 후 이를 공제하여 반분한 내역을 나중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추수기를 작성하였다. 실제로 경주지역 작인들 사이에서 최씨가의 지대수취 방식을 '단갈림한다'고 표현하였다.
한편 교동 최씨가에서는 밭작물인 보리와 콩 수확을 관리하고 지대를 수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별도의 수 세기를 작성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수만 60점으로 확인된다. 추수기에 대한 다양한 사례 연구가 발표된 바 있지만, 밭작물의 지대수취 내역을 이처럼 오랜 기간 수세기 형식으로 작성한 경우는 드물다.
일부의 사례를 검토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씨가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평균 지대량은 당대 다른 지역의 지대량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작인에게서 거둔 보리와 콩의 평균 지대량은, 도조의 방식으로 수취하였기 때문에 절대 생산량을 짐작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적은 액수로 파악된다. 이는 최씨가에서 가경지를 제외한 나머지 밭을 작인들에게 대여해주고 최소한의 지대만 수취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처럼 최씨가의 지주 경영은 당대 다른 지역 사례와 차별되는 측면들이 있다. 본고에서는 전체적인 자료의 현황과 작성방식을 분석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향후에는 본고에서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구체적인 지대량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Over 330 historic materials on harvest season possessed by 'Rich Men' Gyeongju Choi clan in Gyeongju Gyodong are important documents that can be used to reveal Rich Men Choi's unique landowner management cases. Among which, 274 are the data written during harvest season for the purpose of receiving rent from the land distributed sporadically in Gyeongju and northern part of Ulsan.
The major characteristics identified in Rich Men Choi's historic house are as follows. First, when estimating the whole data, it showed chronological distribution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season of Japanese occupation. Second, different types of harvest materials written during the same year co-existed and a certain correlation between them is identified. Third, up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ost paddy fields of Gyeongju Choi clan applied 'Tajo(打租: receiving a rent with a half-dividing of the harvest)'method. Rent acquisitions identified in other regions in contemporaries were 'Jipzo(執租: adjusting rent rates before harvesting)' or 'Dojo(賭租: receiving a rent with a certain amounts of harvest)'. However Rich men Choi clan shared in half of seeds and rice straws with tenant farmers. So among tenant farmers in Gyeongju, Rich men Choi's rent acquisition method was called as 'Dangalim(indicating 5:5 allocation).'
On the other hand, Rich men Choi wrote separate materials to menage barley-farm product and bean harvest and there were now 62 of them have been remained. Various case studies on harvest records of paddies have been published, but few rent aquisition cases from harvest of bean and barley have been identified. Rich men Choi's average rent identified during harvest season does not show a big difference from the rent amount in other regions, although it reviewed a part of all cases. But the average rent of barley and bean collected from the tenant farmers is significantly low despite the difficulties in guessing the absolute production because they received rent in the way of Dojo. This is considered as a result of lending the rest fields except the arable lands of Rich men Choi to tenant farmers and receiving the minimum rent. Like this, Rich men Choi's landowner management has a difference from the cases of other regions. In this paper, the focus is on analyzing the current status of the entire data and how it was written. So further studies need to complement the insufficient parts that were not resolved in this paper and reveal the specific historic points of view about Rich Men Choi's landowner management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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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태보의 자기비첩소생(自己婢妾所生)의 신분 귀속에 대 한 인식 - 「단송안(斷訟案)」을 중심으로 -

저자 : 한상권 ( Han Sang-kw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12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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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輔(1654∼1689)는 강원도 伊川縣監 시절인 1684년(숙종 10) '자기비첩 소생 論介를 放良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이는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私賤'이라는 현행법과 상치되는 판결이었다. 논개는 보충대에 입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54년(명종 9) 반포된 「甲寅受敎」는 嫡族이 비첩소생을 사역하는 것은 骨肉相殘으로 인륜상의 문제가 있다고 보아 사촌까지는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同氣라 할지라도 5촌을 넘으면 사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태보는 「갑인수교」가 骨肉의 사역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人情에 배치되며 또한 『經國大典』의 '本意'와도 상충한다고 보아 논개를 종량 판결한 것이다. 박태보는 중앙 정계로 복귀한 뒤 筵中啓辭를 올려 법문 개정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그 결과 1687년(숙종13) 「丁卯受敎」가 반포되어,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公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규정은 『續大典』에도 수록된다.


In 1684,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Park Tae-bo (1654-1689) who was a prefect of Icheon(伊川) in Gangwon-do Province ruled that “Non-gae who is a slave's concubine should be emancipated.” This was contradictory to the law at that time, which states that “if a salve could be a part of Bochungdae(補充隊) he may be emancipated, otherwise he should stay as private slave.” According to “Gapinsugyo(甲寅受敎)” which was announced in 1554 (the 9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noble class prohibited his cousin from serving as a slave because it was against human right. However, even if both are cousin, it was allowed the noble class to use his relatives as salve who are his cousin's son or daughter. Park Tae-bo made a decision of releasing Non-gae given that “Gapinsugyo(甲寅受敎)” was not in accordance with human right as well as a spirit of “Gyeonggukjeon(經國大典)”. After his returning to the central political arena, Park Tae-bo appealed to the king to amend the law by reporting “Yeonjoonggyesa(筵中啓辭)”. As a result, “Jeongmyosugyo(丁卯受敎)” was declared in 1687(13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ich stated that “if a salve could be a part of Bochungdae he may be emancipated, otherwise he should stay as public slave.” This regulation is also included in “Sokdaejeon(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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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쟁에서 송관의 역할 - 최소한의 개입 -

저자 : 전경목 ( Chon Kyoung M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4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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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본고에서 1801년 정월에 부안현에서 김기정(金基正, 1773~1811)에게 발급해 준 '결입안'을 분석해서 그와 강재태(姜在泰, 1769∼?) 사이에 벌어진 우반동 가사 등에 대한 환퇴(還退) 분쟁에 대해 살펴보겠다. 부안현에 거주하던 강재태와 김기정은 각기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우반동에 있는 부안김씨 종가의 가사(家舍)와 전답 등의 환퇴를 놓고 다투고 있는 중이었는데 서로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각각 탄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른 양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결국 타협하지 못하고 관아에 탄원서를 제출할 경우, 절차에 따라 소송을 진행하여 판결한 후 그 과정과 결과를 입안으로 작성해 주었는데 이것을 결송입안이라 했다. 이와 달리 양 당사자가 소송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을 규명한 후 조정을 통해 처분하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탄원서에 기록해 주었는데 이를 입지라 했다. 후자의 경우에도 간혹 조정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해 주기 원하면 입안을 발급했는데 이때 작성한 입안을 결입안이라 했다. 결송입안과 결입안의 차이점은 전자에는 양 당사자가 소송을 시작하면서 작성하는 시송다짐과 소송을 마치고 판결을 요청하는 결송다짐이 첨부되어 있는데 후자에는 소송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소송 과정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소송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범법 사실들이 드러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송관들은 이를 요즈음의 별건 사건으로 간주해서 가급적이면 이에 대해 더 이상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현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채 범법 행위를 끝까지 색출하겠다는 생각에 충만한 수령들은 간혹 이 별건 사건들을 조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저지르는 폐해가 오히려 컸다. 그래서 조선후기 목민서에서는 소송의 확대를 크게 경계하고 오로지 본질적인 것만을 조사해서 해결토록 하는 최소한 개입을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담당 송관들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조선후기 지방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은 송관의 최소한의 개입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In this study, I will analyze the “Gyeolipan” issued to Kim Ki-jung in Buan-hyeon in January 1801 and examine the dispute over the return of Woobandong Village House, which took place between Kim Ki-jung (金基正, 1773∼1811) and Kang Jae-tae (姜在泰, 1769∼?). Kang Jae-tae and Kim Ki-jung, who lived in Buan-hyeon, each filed a petition with the Jeolla provincial governor. They were arguing over the return of the house and paddies of Buan Kim's clan in Woobandong Village, and each filed a petition to make their case.
In the Joseon Dynasty, when disputes broke out between the two parties with different interests and eventually failed to compromise and filed a petition with the government office to request lawsuit, the process and result were drafted, which was called Gyeolsonglipan. On the other hand, if both parties do not want lawsuit, they will find out the facts, then dispose of them through mediation, and record the results in a simple petition, which is called Ibji. In the latter case, if they wanted to record the process and results of mediation, they issued a draft, which was written at that time, called Gyelipan. The difference between Gyeolsonglippan and Gyeolipan is that the former contains fair defense operations written by both parties at the beginning of lawsuit and certificate of Adjudication requesting a ruling after lawsuit. But there is no such thing as lawsuit in the latter case.
During the lawsuit process, several criminal facts related to lawsuit, whether intentionally or unintentionally, were often revealed, and the Judges regarded it as a separate incident these days, preferably refusing to investigate further. The leaders, who were not aware of the local situation and were filled with the idea of finding out the crime to the end, sometimes investigated these separate cases, and there were many cases of great harm in the process. Therefo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Mokminseo(牧民書) was very wary of the expansion of lawsuit and emphasized marginal adjustment to investigate and resolve only essential things. As a result, many of the judges in charge seemed incompetent or corrupt, but the relatively stable operation of local communiti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s believed to have contributed greatly to the marginal adjustment of Ju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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