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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 Manuscripts

  • : 한국고문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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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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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598-3218
  • : 2671-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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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1)~60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505
고문서연구
60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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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공주(公州) 초려가(草廬家) 소장 장택기(葬擇記) 사례 연구

저자 : 김향숙 ( Kim Hyang-so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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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公州 草廬家에 소장된 葬擇記의 사례연구이다. 草廬家가 위치한 충남 공주시 중동골은 忠淸五賢이자 畿湖禮學의 대가인 草廬 李惟泰 선생이 45세에 寓居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이 일대는 慶州李氏의 世居地이다. 草廬家에는 초려 선생의 아버지인 25世 李曙로부터 36世 李圭憲까지 이어지는 400여년의 공주 경주이씨 가문의 역사자료를 모아 놓은 고문헌 총 168건이 전래되고 있다. 초려가 고문헌은 고서 47건과 고문서 121건으로 大別되는데, 고문서 121건 중 34건이 葬擇記에 해당된다. 이처럼 葬擇記의 높은 소장 비율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자료관의 여타 가문별 고문서 소장현황과 비교해 볼 때 초려가 고문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초려가 葬擇記의 서식적 특징과 내용적 특징을 통해 조선시대 기호예학 가문이 남긴 葬擇記의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This paper is a case study of JangTaekgi(葬擇記), which is in the collection of the Gongju Choryeo family(草廬家). Jungdonggol, Gongju-si, Chungcheongnam-do, where the family is located, is the place where Professor Choryeo(草廬) Yi Yu-tae(李惟泰), a scholar and master of the Confucian Academy, nurtured junior students at the age of 45.
A total of 168 ancient documents are handed down to the 草廬家, a collection of historical materials of the 400-year-old Gyeongju Yi family from the 25th generation 李曙, the father of Choryeo, to the 36th generation 李圭憲.
Choryeo family's list of ancient documents is 168 in total, with 47 old books and 121 ancient documents. As such, the high collection ratio of 葬擇記 is a characteristic of Choryeoga ancient documents compared to the current status of collections of ancient documents by other families in the Archives of the Central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introduce a case of 葬擇記 that was left by the Choryeo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and content characteristics of the Choryeo family's 葬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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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詔書는 조선시대 국왕의 敎書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을 수록한 가장 권위 있는 문서이다. 본고는 1908년(융희 2)에 순종이 진종·헌종·철종을 황제로 추존한 후 稱慶하고 陳賀하기 위해 반포한 조서와 제진단자를 통해 대한제국기 조서의 발급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황제는 조서의 발급을 결정하면 먼저 조서 제술관을 임명하였다. 대한제국기 관직 제도의 변화에 따라 조서를 제술하는 아문은 경연청, 경연원, 홍문관, 규장각으로 변화하였다. 조서 제술관은 조서의 내용을 제술한 후에 황제의 啓下를 받기 위해 제진단자로 작성하였다. 「啓字奏請規則」에 따라 궁내부대신이 제진단자를 황제에게 入啓하면 황제는 제진단자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 小啓字印과 籤紙로 수정하고 啓字印을 답인하여 계하하였다. 황제의 계하 후에 조서 서사관이 조서의 내용을 書寫하고 궁내부에서 皇帝之寶를 안보하면 최종적으로 조서가 발급되었다. 황제가 친림하거나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 권정례로 조서를 반포한 후 관보에 조서를 게재하여 전국으로 전달하였다. 1908년 眞宗·憲宗·哲宗 追尊稱慶陳賀 詔書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상황에서 발급된 황제의 조서지만, 대한제국기 조서를 발급하는 문서 행정과 제도를 확인할 수 있으며 황제지보가 안보된 유일한 문서라는 점에서 자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Joseo(詔書)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is the most authoritative document that includes the emperor's order as with the king's Gyoseo(message, 敎書) in the Joseon Dynasty. This thesis aims to examine the process of issuing Joseo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through Joseo and Jejindanja that were issued for celebrating and offering congratulations after Sunjong honored Jinjong, Heonjong, and Cheoljong as emperors in 1908(2nd year of Yunghui). Once the emperor decided to issue Joseo, he first appointed Joseo Jesulgwan. According to the revision of the government post system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the public offices for writing Joseo were changed to Gyeongyeoncheong, Gyeongyeonwon, Hongmungwan, and Gyujanggak. After writing the contents of Joseo, the Joseo Jesulgwan wrote Jejindanja to get a Gyeha(approval, 啓下) from the emperor. If the Gungnaebu Daeshin offered(Ipgye, 入啓) the Jejindanja to the emperor by following the rules of Gyejajucheong(啓字奏請規則), the emperor reviewed the contents of Jejindanja, modified it with Sogyejain(stamp, 小啓字印) and Cheomji(tag, 籤紙), and finally approved it by stamping the Gyejain(啓字印) on it. After getting the approval from the emperor, the Joseo Seosagwan transcribed the contents of Joseo, stamped the Great Seal of Korean Empire(皇帝之寶), and finally issued the Joseo. After issuing the Joseo in the ceremony with or without the emperor, it was published in the official gazette, and issued in the whole nation. Even though the emperor's Joseo was issued in the process of Japan's pillage of the national sovereignty of Korean Empire, this study was able to verify the document administration and system of issuing Joseo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and Joseo has the value of material as the only document that includes the Great Seal of Kore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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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선원록(璿源錄)』을 통해 본 성종 공주·옹주 후손의 혼인 양상과 그 성격

저자 : 양정현 ( Yang Jung-hy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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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으로부터 파생된 異姓 후손의 범주에 포함되는 공주·옹주 계열의 후손 집단은 宗姓 후손과 달리 법제적으로나 혈연적으로 왕실과의 연결 관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특징으로 인해, 조선 왕실의 제도적 내지는 현실 관행적 측면의 인원 범주 규모나 집단의 성격을 검토할 때 부차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선원록』에 기재된 성종 공주·옹주 후손의 혼인 양상을 분석한 결과, 세대의 흐름에 따라 잠정적으로 왕실 테두리 바깥으로의 퇴출이 예정된 인원으로 간주되었던 이성 후손의 경우, 오히려 혼인을 통해 왕실의 혈맥을 연장해나가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관료층을 흡수함으로써 집단의 사회적 위상을 가시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왕의 이성 후손이 『선원록』에 등재된 후손을 배우자로 맞이하면서 왕실 혈연의 중첩이 발생하는 경향은 자신보다 국왕에 가까운 대수와 혼인함으로써 『선원록』에 지속적으로 등재되어 왕실의 후손이라는 법제적, 사회적 지위를 영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에서 왕실의 인원 범주를 국왕으로부터 6대로 제한한 원칙으로 표상되는 혈연의 비영속성은 관념적 위상의 소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경제적 이권과 결부된 파장을 야기했다. 따라서 후손 집단의 관점에서는 세대가 이어짐에 따라 국왕으로부터의 혈연적 농도가 옅어질수록 집단 내부의 혼인을 통해 재차 왕실의 중심부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The descendants of the Gongju(公主) and Ongju(翁主) were treated secondary to the review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 royal family as the connection with the royal family was relatively loose, both legally and bloodily. Based on the above problem consciousness, the marriage pattern of the descendants of Gongju(公主) and Ongju(翁主) in the Seonwonrok(璿源錄) was analyzed.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social status of the group was visible by continuing to absorb the bureaucracy while inheriting the royal family through marriage. The tendency to welcome the descendants recorded in the Seonwonrok(璿源錄) as spouses was a phenomenon reflecting the willingness to maintain the social status of the royal descendants by marrying a close relative to the king and continuously recording them in the Seonwonrok(璿源錄). The discontinuity of royal bloodlines was not only the extinction of ideological status, but also the problem associated with the socioeconomic interests of reality. Therefo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escendant group, as the blood distance from the king became farther away, attempts were made to approach the center of the royal family through marriage within the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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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토지거래의 비교사적 의미 - 인간관계와 가격윤리의 측면에서 -

저자 : 이용훈 ( Lee Yong Ho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1-12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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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토지 매매는 유럽보다 이른 15세기에, 일정 정도의 토지 사유를 전제로 한 상황에서 허용되었다. 본 연구는 비교사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조선후기 토지거래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인간 관계와 가격윤리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았다.
영호남 농촌지대에서 토지거래는 경기지역에 비해 지역사회 내부의 대면관계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토지매매는 급전이 필요한 농민들의 자구책으로 허용되어 농민보호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처지가 어려운 사람이 방매하려는 토지를 헐가매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가격윤리가 존재하였다. 즉 조선후기 상황은 유럽에서의 토지상품화와 다른 맥락에 있었다. 조선후기 농촌 구성원들은 생계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유롭게 토지를 매도하여 활로를 찾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위기를 넘어서면 다른 토지를 매득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활발히 이뤄졌던 토지매매는 토지의 용이한 처분ㆍ매입을 통해 가계상황에 대응하는, 생계주기 순환의 윤활유로서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In the Joseon, land transactions were allowed earlier than in Europe under the premise of a certain degree of private land ownership. This article microscopically approached the meaning of this through keywords such as personal relationships and price ethics.
In rural areas of Yeongnam and Honam, land transactions were relatively common among people within the local community. In some cases, face-to-face transactions between relatives and acquaintances were not carried out purely depending on economic calculations. In this face-to-face relationship, it was socially and ethically required that land transaction prices be set generously. The reason was that land transactions were allowed as a self-rescue measure for peasants in need of emergency funds, and thus were in charge of some of the peasants protection functions.
This situation is the opposite of that face-to-face transactions often result in price discounts in modern society. The situation in Joseon may have arisen from the relatively low demand for land. In other words, it means that it is difficult to see land transactions in the late Joseon in relation to land commercialization that progressed in Europe. Land transactions, which were actively conducted in the late Joseon, could have a certain meaning as a lubricant for the family's life cycle, responding to household conditions through easy disposal and purchase of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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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면주전의 인센티브 체계 - 포상 및 처벌의 규정과 실제 -

저자 : 조영준 ( Cho Young-j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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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표적 상인 단체인 市廛의 구성원에 대한 인센티브 체계의 실제를 구명하고자, 가와이문고에 소장된 綿紬廛 자료를 집중적으로 활용하여 포상과 처벌의 양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면주전에서는 포상을 위해 「賞帖」을 발급하였으며, 이를 謄書한 자료가 『各項賞案』이다. 포상금의 지급은 銀子를 통하는 형식이었으나, 실제로 지급된 것은 아니고, 장부상으로만 관리되었다. 禮錢의 납부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장부에서 차감하는 방식의 計減이 이루어졌고, 그 내역은 『各項禮捧冊』에 기록되었다. 면주전의 포상은 후대로 갈수록 전반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갑오개혁에 따른 시전의 貢納 기능 소멸과 관계되며, 그후로 이루어진 은자 지급은 포상이라기보다는 통상적 업무 수행에 따른 보상의 성격에 한정된다. 면주전의 처벌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작성된 문서는 찾기 어렵지만, 「代定帖文」을 통해 처벌의 사유 및 조치 결과를 일부 시기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처벌 시행의 상세한 내역을 장기적으로 파악하려면 면주전 大房의 지출 장부를 보면 되고, 대표적 사례가 『補用所上下冊』이다. 면주전의 처벌은 다양한 유형으로 시행되었으나, 疊罰을 배제하고 解罰을 상례화하는 등 상당히 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削黜이나 損徒와 같은 처벌의 명칭과 관계없이 벌금형을 위주로 하였다. 여타의 시전이나 貢契 및 褓商·負商 등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일부 공통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면주전의 사례는 규정을 넘어서 실태까지 소상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In order to investigate the reality of the incentive system for members of sijŏn, a representative merchant guild in late Chosŏn Korea, myŏnjujŏn documents stored in the Kawai Collection were intensively used to examine both aspects of reward and punishment. Myŏnjujŏn issued sangch'op for the reward, and the documentary material for this was kakhangsang'an. The payment of the reward was in the form of silver ingot, but it was not actually paid, and was managed only on the account books. When there was a situation where the payment of yejŏn was required, the amount was deducted from the ledger, and the details were recorded in the kakhangyebongch'aek. The rewards of myŏnjujŏn show a general tendency to decrease as time went on. This seemed to be related to the abolition of tribute system in accordance with the Kabo Reform, and the subsequent payment of silver ingot was limited to the compensation for ordinary rotation of duty rather than rewards. Although it is difficult to find direct documents on the punishment of myŏnjujŏn, the reasons for the punishment and the action results can be discovered for some period through the taejŏng-ch'emun. In order to understand the details of the punishment enforcement in the long term, we can look at the expenditure ledger written by taebang of myŏnjujŏn, and a representative example is poyongsoch'ahach'aek. The punishment of myŏnjujŏn was implemented in various types, but it seems to have been fairly generous, such as excluding double punishment and making amnesty a common practice. In addition, regardless of the name of punishment, fines were mainly imposed. Compared to other merchant communities, there were some commonalities, but also various differences. In particular, the case of myŏnjujŏn is meaningful in that it goes beyond regulations and informs the actual situation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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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49년 청주 목관 문서

저자 : 김현영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6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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