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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bang Korean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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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2)~88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1,064
동방한문학
88권0호(2021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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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표현

저자 : 姜玟求 ( Kang¸ Min-koo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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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는 매우 작은 곤충이기에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할 때 차용되는 자연물이었다. 한편 개미는 지극히 작지만 제 몸의 크기를 뛰어넘는 힘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大小와 强弱을 단순히 결부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논거로도 활용되었다.
미물인 개미가 제 주제도 모르고 强大한 상대에 덤비며,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도 하찮고 추잡한 것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와 시각이 존재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미물이지만 큰 힘을 내는 존재라는 긍정적 시각과 평가도 있었다.
한문학에서 '槐安國'·'槐國'은 허구 세계를 의미하고 '槐安夢'·'槐夢'은 인생이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부귀 득실은 無常하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士人들은 科場에서 경쟁적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수험생들의 모습을 '개미의 전쟁'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한문학에서는 특히 '개미의 전쟁'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식이 강하였다. 개미의 전쟁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개미가 종족과 영역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으로부터 군신의 의리를 알고 나라를 지키고 임금을 보위하기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적 가치를 추출하는 것이다. 부정적 인식은 '분쟁'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개미가 미물이기에 그것들의 전쟁을 하찮은 짓으로 간주하였다. 개미의 처지에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하찮기 그지없고 의미도 없다. 그와 같은 의식을 확장한다면 사람의 전쟁도 매한가지이다. 인간의 전쟁도 인간계 너머에서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윤리와 가치를 개미에게 투사하여 역으로 증명해 내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한편 옛날 사람들에게 개미가 싸우는 광경은 하나의 소일거리였다. 무료한 한때를 개미 싸움을 보면서 보냈고 그것을 시의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개미의 싸움에 대한 가치나 의미에 대한 평론은 유로하지 않았다.


As ants are very tiny insects, it has been one of the most popularly-referred natural objects to set out a logical argument saying that it's important to exactly know one's humble place. However, it's been also often referred as a ground for an argument that tying largeness- and-smallness and strongness-and- weakness is just the prejudice since it was found that ants are able to lift objects that are much bigger than they are.
Nevertheless, there have been negative perspective and thoughts, on the one hand, that small and insignificant ants dare to challenge big and strong opponents, not knowing themselves, and what they seek to achieve is just trivial and vulgar. On the other hand, there have been also positive perspective and thoughts that they have great potentials in spite of their small body.
In Sino-Korean Literature, 'Goeanguk(槐安國, the Imaginary Kingdom of Ants)', also called Gueguk(槐國), was used to refer to a fictional world, and 'Goeanmong(槐安夢, a Fond Dream), also called 'Goemong(槐夢)', was used to imply that life is just like a dream and that obtainment and loss of wealth and honor are all meaningless. In old times, scholars also referred to examinees competitively writing answers at the exam venue as 'the battle of ants' in the metaphorical sense.
Especially in Sino-Korean Literature, the intention to give meaning to ant wars was strongly shown. The positive perspective on the ant wars was to extract ethical values - to know the fidelity between sovereign and subject, defend the country, and willingly die for the king - from the ants fiercely fighting against the enemy to protect those species and territory. On the contrary, the negative perspective was expressed as the repulsion against strife itself. It, also, considered ants' wars as mere trifles because they are just small and insignificant creatures. Although it's such a life-and-death matter for ants, it looks just trivial and meaningless to humans. When extending this viewpoint, human wars also could be regarded in the same way. If it's seen from beyond the world of human beings, it could be looked just trivial. But technically, it could be an attempt to reversely prove human ethics and values by projecting those to ants.
To people in old days, watching ants fighting each other was a kind of a good time killer. They spent time watching them, and people were sometimes inspired by those to write poems as well. And in that case, they didn't express reviews about the values or meaning of ants' bat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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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광해군대 병려체(騈儷體) 관각문학(館閣文學)의 아젠다와 형식에 대한 소고(小考)

저자 : 沈揆植 ( Sim¸ Kyu-sik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9-98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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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의 관각문학은 당대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학계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고는 문헌에 산견하는 광해군대 관각문학을 집적하고 창작 시기를 고증했다. 그 중에서 변려체를 사용한 옥책문, 교서, 표문에 주목하여 그 창작 배경이 되는 광해군대의 왕권 강화 시도, 공안정국의 흐름, 동아시아 외교 변화 양상을 밝혔다. 또한 정권의 아젠다를 구체화한 광해군대 관각문의 수사와 함께, 이정귀와 이이첨을 위시로 한 관각문인들의 역할과 광해군의 통치 행위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와 더불어 변려체 교서와 사은표 문체의 전변과 형성 과정을 밝힘으로써, 광해군대에 교서의 변려문 형식의 규범성이 크게 제고된 사실과 이이첨의 사은표가 고려대부터 형성된 사은표 형식의 전통을 따르되 전고 사용에 있어서 개성이 드러나는 점을 지적했다.


Although state literature of Kwanghaegun period demonstrates a significant historical movement of the epoch, not much has been studied in the field of Korean Sinitic literature and History. This study compiled the scattered literary works of the Kwanghaegun regime from various written sources and ascertained their creation period. And this paper selected important works and analyzed the background of creation: an attempt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development of hostility between factions, and change in diplomacy in East Asia, focusing on parallel prose style jade investiture documents, royal addresses, and imperial petitions in particular. This analysis revealed how the rhetoric of state literature embodied the agenda of the regime and what was the role of official writers-the two most prominent Yi Chŏngkwi and Yi Ich'ŏm-and the king's political actions. In addition, this study presented the development process of literary structure of royal address and diplomatic document of appreciation. The analysis suggested that the convention of parallel prose style royal address was highly standardized in Kwanghaegun period. And it also indicated that Yi Ich'ŏm's diplomatic document of appreciation follows the conventional style, which had formed from Koryŏ (Goryeo) era, though he used distinctive vocabulary and literary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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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혼군(昏君)을 향해 세운 절의 - 조선 후기 광해조(光海朝) 절신(節臣)의 사적(史的) 형상화 양상 -

저자 : 鄭用健 ( Chung¸ Yong-gu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4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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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사회에서 '광해조 절신'으로 기억된 인물들의 면면과 그 사적 형상화 양상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관을 표방하며 세워진 나라였던만큼 건국 초기부터 유가 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忠'을 강조하였고, 군신 간의 의리를 중시한 역대 인물을 지속적으로 기억·현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節臣'에 대한 관심은 '昏君'이라 일컬어진 光海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본 고에서는 그러한 '광해조 절신'의 존재 양상을 '柳夢寅과 北人系 인물', '金坽', '金興國'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은 北人, 南人(金坽), 西人(金興國) 등 각기 다른 당파 출신으로 仁祖反正 당시에도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의리를 지킨 방식 역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들을 절신으로 높이고자 한 주체와 그 시기 및 방법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변별적 국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각 인물에 따라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절신 현양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 역시 일정하게 존재하였다. 먼저, 이들에 대한 추숭 작업이 시기적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각 인물들은 대체로 17세기 이래 절신으로서의 점진적인 기억 과정을 거쳐 문인 사회에서 '광해군을 위한 충신'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노력이 최종적인 완성을 보았다. 다음으로, 이들의 절신 현양에는 정보의 추가·삭제·윤색 등 일정한 조탁의 과정이 동반되었다는 점이다. 김흥국은 18세기까지만 해도 광해군에 대한 절행의 내용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절신 서사를 부여받았거니와, 유몽인과 김령이 역사적으로 기억되어 온 과정을 추적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특정한 일화와 사건이 조금씩 덧붙여지거나 제외되면서 보다 완정한 절신으로서의 모습이 조형되어 온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유몽인과 북인계, 김령, 김흥국 등은 그들이 가진 서로 다른 배경과 행적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사적 형상화 과정을 거친 끝에 19세기에 이르러 '광해조 절신'이라는 담론장 안에 느슨하게나마 포섭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군주의 明暗 여부에도 불구하고 신하로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광해군의 遺臣으로 후대적 인정을 받았으며, 나아가 절의의 상징 '伯夷'를 비롯하여 '吉再·死六臣·金時習·燕山朝節臣' 등 동방 절신과도 그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유가 이념의 진작과 확립을 위해 조선만의 伯夷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조선 문사들의 의식 활동은, 이처럼 광해군 때의 신하들을 대상으로도 분명한 성취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고의 논의를 통해, 그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광해조 절신에 대한 이해의 증진은 물론, 鄭夢周·吉再·死六臣·金時習 등 일부 인물만을 대상으로 언급되었던 '조선조 절신 서사'의 발굴과 확충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examines the aspects of the characters who were remembered as 'Gwanghaegun(光海君)'s Loyalist' and their historic imagery in the literary societ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s Joseon was founded with Confucianism, it emphasized 'loyalty' and continuously honored the historical figures who showed loyalty. This interest in loyalist was also applied to Gwanghaegun called tyrant. This thesis especially paid attention to the three categories of Gwanghaegun's Loyalist: 'Yu Mong-in(柳夢寅) and buk-in(北人)', 'Kim Ryeong(金坽)' and 'Kim Heung-guk(金興國)'. They were in different situations at the time of the rebellion of Injo(仁祖反正) due to their different party colors. Not only that, they each had their own distinctive aspects in terms of the subjects who wanted to raise them, timing and methods.
In spite of the aspect of the commemoration made independently according to the figures, there were also certain commonalities that penetrated them. First, in terms of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commemoration work on them was complet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Second, the commemoration was accompanied by a certain process of arranging, such as adding, deleting, and embellishing information.
In this way, despite their different backgrounds and activities, the three men showed a pattern of being loosely included in the discourse of Gwanghaegun's Loyalist in the 19th century after going through a gradual commemoration process. Not only they received recognition from posterity as the loyalists of Gwanghaegun, but also stood shoulder to shoulder with the symbols of loyalist such as Jeong Mong-ju(鄭夢周), Gil Jae(吉再), Sayuksin(死六臣), Kim Si-seup(金時習) and Yeonsangun's loyalists(燕山朝節臣). For the promo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Confucian ideology, the activities of the Joseon scholars who worked tirelessly to find Joseon's Baek Yi(伯夷) were able to achieve clear results even for the subjects of Gwanghaegun. Through the discussion of this thesis, it is hoped that not only the understanding of Gwanghaegun's loyalist can be improved, but also the 'Epic of the Joseon's loyalist', which was mentioned only for a few people such as Jeong Mong-ju, Gil Jae, Sayuksin and Kim Si-seup can be discovered and expa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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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향촌사회 과시(科詩) 창작 일고(一考) - 『과부초(科賦抄)』 소재(所在) 「취옹정기(醉翁亭記)」 대상 작품을 중심으로 -

저자 : 金景 ( Kim¸ Ky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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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科賦抄』에 대한 소개와, 이를 통해 조선후기 향촌사회 科詩 창작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과부초』의 편찬자는 불분명하나, 수록된 작가 및 소장처 등을 고려했을 때 19세기 영남지역 科詩選集임을 파악하였다. 『과부초』의 특징은 수록된 대부분 작품의 試題가 『古文眞寶』 산문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본론에서는 歐陽修의 「醉翁亭記」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 결과 『과부초』는 문예적 취향보다 습작에 가깝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다만, 영남지역 문인의 과시를 선집하여 제작한 사실만으로도 공유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문예적 취향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울러 「醉翁亭記」와 같은 특정 작품을 통해 과시를 습작하였다는 것은 講經에 집중하였던 향촌사회에서 製述과 관련된 일단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This study aims to introduce 『GwaBuCho(科賦抄)』 and understand the reality of poetry writing for the civil examination of the local socie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compiler of 『GwaBuCho(科賦抄)』 is unclear, but considering included authors and a holding institution, it is identified that 『GwaBuCho(科賦抄)』 is a collection of poetry for the civil examination in Youngnam region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characteristic of 『GwaBuCho(科賦抄)』 is that questions for the examination of the works were mostly from proses of 『Gomunjinbo(古文眞寶)』. In order to confirm these characteristics, this study analyzes works based on OuyangXiu's 「ChwiOngJeongGi(醉翁亭記)」 by dividing into forms and contents. As a result, it confirms that 『GwaBuCho(科賦抄)』 is a collection for practicing writing rather than a book for a literary taste. However, the fact that this book selected poetry for the civil examination of intellectuals from the Yeongnam region shows a intention of sharing. Through this fact, the possibility of pursuing a literary taste also cannot be excluded. In addition, the fact that poetry was written based on a specific work such as 「ChwiOngJeongGi(醉翁亭記)」 in order to practice the civil examination shows the aspect related to JeSul(製述) of the local society, which usually focused on GangGyeong(講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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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말(韓末) 격문(檄文)의 문학적 기능에 대한 고찰(1) - 전기의병(前期義兵) 격문(檄文)을 중심으로 -

저자 : 朴貞珉 ( Park¸ Jeong-mi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1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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檄文은 전시에 외부의 적과 내부의 신민에게 보내는 軍用 문서의 일종으로, 기세를 눌러 적을 제압하거나 상대를 감동시켜 협력을 유도함을 목표로 한다. 격문은 전장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작성되는 실용문이기에 전쟁의 역사를 입증하거나 전쟁 참여자의 의식을 반영하는 史料로서 의의가 있으며, 독자의 마음을 격동시키기 위해 수사적 장치를 수반하는 문학문이기에 인간 정서와 언어의 작용을 살필 수 있는 문학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한말 격문에 관한 연구는 특정 인물·학파·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발적 연구가 주로 진행되었다. 이는 격문이 문학 자료로서보다는 사료로서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또한 다양한 문헌에 산재하여 접근성이 떨어지는 격문의 자료적 특성 역시 총체적 격문 연구의 활성화를 저해한 요소로 판단된다. 이에 필자는 한말 전기의병 항쟁기(1894년 7월∼1896년 9월) 격문을 논하여 격문 연구의 외연을 넓히되, 자료 목록을 작성하여 해당 시기 격문에 대한 총체적 연구의 바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한말은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 단결과 활동의 필요성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對人的 기록의 기능에 대한 요구가 절실한 시기였다. 한말 전기의병 격문은 대내적으로는 자주 동맹의 결성과 단합을,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과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범국민적 선언으로서 그와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시기 격문의 문학적 기능은 '倡義 召募'·'情報 共有'·'敵軍 聲討'·'內部 告發'·'對外 宣傳'의 5가지로 요약된다. 안팎으로 유포된 격문은 초반에는 전기의병의 무력항쟁을 선동하고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지만, 점차 문필 항쟁의 수단으로서 보다 큰 대외적 파급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격문은 外侵에 항거하는 전투에서 정신적 壞滅을 방지하기 위해, 내재적 결속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대외적 협력을 유인하기 위해, 적에게 빌붙는 타락 행위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민족 주체성의 수호를 위해 긴장·결속·경계를 촉발시키는 중대한 문학적 기능을 열렬히 그리고 끊임없이 수행하였다. 외세 침략의 위험을 알리기 위한 급박한 경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열성적 설득,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지식인의 역동적 대처, 외세 침탈에의 항거를 유인하는 적극적 영도력 등이 두루 담긴 한말 전기의병 격문.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의 무게를 담아낸 격문의 격렬함과 진지함이 지금도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War Manifesto is a kind of military document written for external enemies and internal nationals to overpower enemies by taking the fight out of them, and also promoting cooperation by inspiring people. Since war manifestos are very practical writings used on the field of battle for the military purpose, it has great significance as historical records that prove the history of war and reflect the consciousness of war participants. Besides, it is valuable as literary materials, too, that show human emotions and how language works, as it is literary writings accompanied by rhetorical expressions in order to touch the hearts of the readers.
Most of previous studies working on war manifestos written during the Late Joseon(朝鮮) Dynasty tend to be sporadic, usually focusing on specific people, schools, and regions. This is probably because war manifestos used to receive researchers' attentions as historical records, rather than as literary materials. Also, it is assumed that low accessibility of war manifestos with scattered occurrence in a diverse range of literature has hindered general researches from developing.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extend the scope of the study of war manifestos by discussing war manifestos particularly written during the period of the early righteous armies' resista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from July, 1894 to September, 1896. It also intends to establish the foundation for general researches and studies on war manifestos written in the relevant period, by making a list of materia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functions of interpersonal records were desperately needed more than ever, due to the necessity of national unity and movements against foreign intrusion. And the early Righteous Armies' war manifestos writte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ly met the needs of the times, as a pan-national declaration that promoted the organization and unity of the independent alliance internally,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invasion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externally. The literary functions of the war manifestos in that period are largely summarized in five: raising up a righteous army, information sharing, denunciation of the enemy, whistle-blowing, and international propaganda. The function, at the beginning, of the manifestos proclaimed inside and outside the country started from inciting and assisting the early Righteous Armies' armed struggle. But later, it began to go beyond the limits of armed struggle, and even greatly exerted an external influence, as one way of literary struggle.
The manifestos in that period fulfilled a significant literary function stirring up tension, unity, and wariness in people fiercely and unceasingly in order to avoid mental destruction from exhausting fights against foreign invasion, increase internal cohesion, induce international cooperation, wake up people from corruption, like leeching off of the enemy, and ultimately, protect the national independence and identity. Even today, the early Righteous Armies' manifestos in the Late Joseon Dynasty still deeply inspire readers with its intensity and gravitas that come from massiveness of the harsh times, showing an urgent warning to alert people of the danger of foreign invasion, passionate persuasion to protect the national identity, dynamic reaction of the intellectuals to keep up with the rapidly changing society, and active leadership to induce the national resistance against foreign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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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맹자(孟子)』 연구

저자 : 咸泳大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7-24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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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이유태(1607~1684)는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예학과 경학은 물론 경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배기에 완성한 『庭訓』, 『四書答問』 등의 저작은 해당 분야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율곡학을 계승한 당대의 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관직을 수행한 적도 있으나 그 관력이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1680년 이후로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송시열과 사이가 멀어져 영변으로 귀양가기도 했다.
초려는 사계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므로 사계가 스승으로 섬겼던 율곡의 경전해석을 계승한 것은 그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사서답문』은 이러한 학문적 맥락 속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 책이 집필될 당시 초려는 갑인년 예송에 휘말려 유배생활 중이었는데 그 당시 이미 칠십을 넘고 있었다.
손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사서답문-맹자』는 사계 김장생 이후로 조선의 맹자해석이 전환되어 가는 의미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초려는 대전본을 활용하여 소주까지 비판적으로 독실하게 읽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정치경제론 분야의 관심사와 문헌의 활용정도, 諺解에 대한 관심, 주석의 수준과 한계점 등을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초려에 이르러 대전본은 더 한층 충실하게 분석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만 유배지라는 저작의 환경으로 인해 문헌 활용의 범위는 한정적이었고, 손자에게 주는 답문의 형식이라는 저작의 성격은 본격적인 연구서로서의 성격을 다소 주저하게 만든다. 또 초려 자신의 한정적인 관심 분야도 맹자 전반에 대한 폭넗은 해석의 시야를 제한했다. 이로 인해 『사서답문-맹자』는 소주의 분석과 활용이라는 신선한 시도로서의 의미 외에 좀 더 본격적인 학술서로서의 평가는 조금 주저할 수밖에 없다. 이는 대전본 소주의 충실한 독서물로서의 이 저작의 상징적인 의미를 다소 아쉽게 만든다.


Choryeo Lee Yu-tae (1607~1684) was a Confucius scholar who represented the mid-term of Joseon with a profound colleague relationships with Wooam Song Si-yeol, Dongchundang Song Jun-gil and others. He had deep knowledge not only in study of courtesy and Confucian Classics but also in study of economy as well. His writings including 『Jeonghoon』, completed while he was in exile, 『Saseodapmun』 and others are widely known in the applicable fields and he is evaluated as a scholar of his time with his succession of the Yulgok studies.
While living in a turbulent era to experience the Jeongmyo-horan (Chinese Invasion in the Year of Jeongmyo) and Byeongja-horan (Chinese Invasion in the Year of Byeongja), he served government positions, but his work career was not splendid one. And, after 1680, his drifted away from Song Si-eyol due to the Yesong-nonjaeng (disputes among scholars and government officials on the procedure involving funeral service during the Joseon Dynasty) that he was in exile to Youngbyeon.
Choryeo had Sagye Kim Jangsaeng as his teacher. Therefore, it would be natural conclusion that he upheld the Scripture interpretation of Yulgok who Sagye served as his teacher, and 『Saseodapmun』 was written under such an academic context. At the time of writing this book, Choryeo was in exile after involved in Yesong in the year of Gapin and he was over 70 years of age at that time.
『Saseodapmun-Mencius』 was in the format of answering to questions of grandsons and this was a publication that displayed the meaningful trend to shift the Mencius interpretation of Joseon after Sagye Kim Jangsaeng. Choryeo facilitated the Daejeonbon to be assessed as reading critically and devotedly, and in this article, it is confirmed of facilitation level of bibliographs and interests in the political economic theories, interests on annotations, level and limitation of notes, and so forth.
In conclusion, it is clear that it is possible to assess that the Daejeonbon is even more duly analyzed upon the time of Chorye. However, due to the publication environment in the exile, the scope of bibliographic facilitation has to be restrictive, and the characteristic for publication in the form of questions and answers interacting with grandchild makes somewhat hesitant for its characteristic as a full-time research writing. Also, Choryeo himself restricted a broad approach even for his limited fields of interest as well. Because of this attribute, 『Saseodapmun-Mencius』 is somewhat hesitant for the assessment as a full-scale academic writing other than the implication for refreshing attempt in analysis and facilitation of small annotations. It leaves somewhat more desirable for the symbolic implication for the publication as a diligent reading of the small annotation of Daeje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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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의 생애와 교유관계 - 『호곡만필(壺谷漫筆)』을 중심으로 -

저자 : 申英美 ( Shin¸ Young-mi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3-293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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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壺谷漫筆』의 기록을 중심으로 壺谷 南龍翼(1628~1692)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고찰한 글이다. 남용익이 17세기 문학사에 상당한 공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것에 비해,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에 관한 기초적인 서술은 충분하지 못했다.
본고는 크게 두 갈래로 구성되었다. 우선 '17세기와 인간 남용익'이라는 장을 설정하여 첫째,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남용익의 행적을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둘째, '詩酒'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살폈으며, 셋째, 재구성된 남용익의 생애를 표로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환로와 교유관계'라는 장을 설정하고, 출사시기부터 유배까지의 시간을 기준으로 남용익의 일생에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과의 관계를 서술했다. 李景奭(1595~1671), 俞瑒(1614~1692), 鄭知和(1613~1688), 金壽恒(1629~1689), 李端相(1628~1669), 李喜朝(1655~1724)를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들에 비해서는 교유밀접도가 떨어지는 여러 인물들을 표로 작성하여 제시하였다. 해당 인물들은 대부분 17세기 서인-노론계로, 이후 200년간 조선후기를 주도한 가문 출신의 인물들이 다수 속해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life and relationship of Hogok(壺谷) Nam Yong-ik(南龍翼, 1628~1692) focusing on 『Hogok-manpil(壺谷漫筆)』. Compared to the consensus that Nam Yong-ik made considerable achievements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in the 17th century, the basic description of his life and relationship was not sufficient.
Therefore, in this paper, a chapter called "The 17th Century and Human Nam Yong-ik" was established. Through this, first, Nam Yong-ik's actions in line with the trend of the times were outlined, second, his human aspect was examined through the keyword "poetry and achol," and third, the reconstructed life of Nam Yong-ik was presented as a table.
Next, a chapter called "Relationship with the Exchange" was established,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characters that can be seen as meaningful in Nam Yong-ik's life was described. Representative figures were Lee Kyoung-seok(李景奭), Yoo Chang(俞瑒), Jeog Ji-hwa(鄭知和), Kim Soo-hang(金壽恒), Lee Dan-sang(李端相) and Lee Hee-jo(李喜朝). In comparison, several characters with less close friendship were written in tables and presented. There were many Seoin- Noron(西人-老論) figures, and there were people from the family who led the 200th year of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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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의 기(記) 일고(一考)

저자 : 朴基誠 ( Park¸ Gi-seo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5-32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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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지헌 유언호는 정조의 묘정에 배향될 정도로 정조의 핵심 신료였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영조의 탕평이 戚臣 위주로 운영되는 상황에 반감을 표출하였다. 이에 정계 입문에 난항을 예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세손 정조의 스승으로 발탁되거나 관료학자로 자주 임용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출사 이전에 지역의 문인들과 道統을 강론하고 修己를 권면 실천해나간 과정에서 형성된 학자의 면모와 학문의 수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학문 능력에 대한 명성이 정치적 난관을 이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유언호는 도암 이재와 유언집의 학문을 통해 주자학을 궁구하였고, 18세기 중반 격변하는 시대 흐름에 따라 약화되는 성리학의 道統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이에 道에 따라 修己하고, 義理에 따라 처세하는 등의 世敎 의론을 記文에 녹여 기록하였다.
출사 이전의 記文에서는 道統의 이해와 탐구를 위하여 주희, 길재, 이재 등의 사상을 엿보았고, 君子가 사물을 인식하고 세상에 대처했던 방법을 설명하면서 삶에 실천할 것을 적극 주장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사 이후의 記文에서는 왕세손 정조의 스승 역할에 충실한 유언호가 경전, 역사서, 주자의 공부법 등의 강의를 통해 有用之學과 心學工夫 등을 강조한 이력들과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그는 義理論을 철저히 실천하다 영조의 정계에서 두 차례의 유배를 다녀오게 되는데, 유배지에서의 고통을 이겨내는 '能安'과 사대부로서의 '恭' 의론을 펼쳐내며 不變의 義理를 표출하였다.
정조 즉위 이전의 유언호의 행력은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得意를 안겨주었다. 記文에 나타난 道統 계승은 유교의 재정립을 통해 조선 후기의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방면으로 작용하였고, 義理에 대한 삶의 실천 양상은 정조와의 평생 인연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언호의 정통주자학과 경전 등 기본학문에 대한 충실한 탐독과 정조와의 강의는 고문의 순정화 정책에 연결되었고, 義理에 대한 중시와 실천은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이라는 의리탕평 정책에 타당성을 제시하였다.


Jeuk Ji-heon Eu Eon-ho served as one of the key subjects of King Jeongjo for the rest of his life, so much so that he was enshrined in the Jeongjo's Myojeong. Following his successful passing of the state examination, he expressed his antipathy to the circumstance where King Yeoungjo's recruitment of officials was unfairly skewed toward hiring more king's relatives and concurrently subjects and suffered from a lot of complications while trying to adhere to the justice and loyalty. However, his personal experiences of interacting with local literary men, expounding the Confucian Orthodoxy, and promising and practicing self-cultivation solidified his image as an academic scholar and enhanced his academic capacity, and the fact that he was appointed selected as a teacher of King Jeongjo and frequently as a scholar-bureaucrat indicates that his academic capacity surpassed his political orientation.
Eu Eon-ho made efforts to inherit the orthodox of Zhu Xi that passed from Uam Song Si-yeol and Doam Yi-jae and recorded his opinions about the knowledge of the world in his writings in an attempt to correct the weakening Confucian Orthodoxy of Neo-Confucianism witnessed in the mid-18th century characterized by rapid changes.
Prior to taking up a public office, he looked into the ideas of Ju Hee, Gil Jae, and Lee Jae to explore and understand the Confucian Orthodoxy and left his written preach of practicing what noble men are supposed to do in terms of recognizing things and dealing with the world. The records following his taking of oath in office say that he stayed faithful in carrying out his duty as a teacher of King Jeongjo, the eldest grandson of the King, leaving the records of placing emphasis on the practical study (有用之學) and the practical ethics and awakening of good nature (心學工夫) through lectures on scriptures, history books, and the method of study by Zhu Xi.
Eu Eon-ho was also exiled twice during the King Yeongjo's reign on a charge of thoroughly practicing the theory of loyalty and implied a sense of unswerving loyalty while manifesting 能安 to overcome the pain in exile and the theory of '恭' as a nobleman.
The careers and activities of Eu Eon-ho prior to King Jeongjo's enthronement gave him prosperity immediately upon Jeongjo's accession to the throne. The practice pattens on the Confucian Orthodoxy and loyalty written in the records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him to build a lifelong relationship with King Jeongjo. Eu Eon-ho's adherence to the Confucian basics such as the orthodox of Zhu Xi and scriptures influenced King Jeongjo's Sunjeonggomun policy and his practice of loyalty presented the basis for the policy of recruiting talents according to their 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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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해배(解配) 이후 교유관계에 대한 고찰(1) -前期(1818~1827)에 限하여-

저자 : 金奉楠 ( Kim¸ Bong-nam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29-414 (8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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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1818년 9월부터 1827년 12월까지 약 9년 동안의 교유관계를 고찰하였다. 아울러 교유시에 나타난 시적 형상화의 주요 표현기법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다산의 나이로 보자면 57세에서 66세까지이며 노년기의 전반부에 해당하므로, 본 연구를 통해 다산 노년기의 교유양상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산 노년기의 삶과 사유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다산이 해배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유한 인물은 모두 73명인데, 그 중에서 친족을 제외하면 66명이고, 66명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인물은 39명이다. 본 논문에서는 39명 중에 비중이 높은 19명을 '親舊·尊丈·後輩'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시에 나타난 교유양상과 시적 형상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친구 그룹에는 尹永僖·金商雨·尹書有·申綽·李載毅·韓益相·鄭元善·李魯和·李淵心·李舜卿·尹養謙·閔伯善·尹善戒 등 13명이, 존장 그룹에는 申景玄·趙可敎·李楘 등 3명이, 후배 그룹에는 金商儒·尹鍾遠·權永佐 등 3명이 속해 있다. 이 19명의 지인들은 다산이 해배 이후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큰 기쁨과 위로를 안겨 주었다. 다산이 그들과 교유하며 지은 시에는 갖가지 교유양상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산 내면의 여러 가지 생각과 고뇌와 정회가 짙게 배여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생존했던 다산의 노년기의 진면모를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산은 교유시를 지을 때 用事·點化·直敍의 표현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시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였고, 그렇게 하여 자신의 心懷와 情感과 苦惱 등을 적절하게 시에 표현하였다. 다산은 用事를 통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함축적이면서 비유적으로 표출하였고, 點化의 방식을 통하여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原詩의 의미와 자신이 지은 시를 연관 지어 생각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숨김없이 直敍함으로써 친구에게 자신의 眞正한 마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September 1818 and December 1827, when Dasan(茶山) Jeong Yak-yong(丁若鏞) returned home from exile. In addition, the main expression techniques of poetic imagery that appeared in poems built during Yak-yong(丁若鏞)'s intercourse were considered. Jeong Yak-yong(丁若鏞)'s age ranges from 57 to 66 years old, which corresponds to the first half of his old age. Through this study, I learned not only about Jeong Yak-yong(丁若鏞)'s the aspect of fellowship in his old age, but also about his life and thoughts in his old age.
A total of 73 people have met and played since Jeong Yak-yong(丁若鏞) was exiled from exile until his death. Among them, there are 66 people excluding relatives, and 39 of the 66 people belong to the first half. In this paper, 19 of them, who have a high proportion, were divided into three groups: friends, respected adults, and juniors, and looked at the aspects of the relationship and poetic imagery that appeared in the poem. The group of friends includes Yoon Young-hee(尹永僖), Kim Sang-woo(金商雨), Yoon Seo-yu(尹書有), Sin jak(申綽), Lee Jae-ui(李載毅), Han Ik-sang(韓益相), Jeong Won-seon(鄭元善), Lee No-hwa(李魯和), Lee Yeon-shim(李淵心), Lee Soon-kyung(李舜卿), Yoon Yang-gyeom(尹養謙), Min Baek-seon(閔伯善), Yoon Gye-seon (尹善戒). In the senior group, there are three members Shin Kyung-hyeon (申景玄), Jo Ga-gyo (趙可敎), and Lee Mok (李楘). In the junior group, there are three members: Kim Sang-yu (金商儒), Yoon Jong-won (尹鍾遠), and Kwon Young-jwa (權永佐). The 19 friends brought great joy and comfort to Jeong Yak-yong(丁若鏞) in returning to his hometown and living a new life after he escaped exile. The poem, which Jeong Yak-yong(丁若鏞) wrote while meeting and playing with them, contained various images of fellowship, and the inner reasons and regular meetings of Jeong Yak-yong(丁若鏞) were deeply ingrained. As a result, I could feel the true face of Jeong Yak-yong(丁若鏞)'s old age, which survived 200 years ago.
In addition, Jeong Yak-yong effectively organized his poems by using the expressions of yongsa(用事)·jeomhwa(點化)·jigseoui(直敍). And it could be seen that he successfully expressed his feelings and anguish in poetry by using the three expression methods appropriately. Jeong Yak-yong was able to express what he wanted to convey in a figurative and connotative way through the yongsa(用事), And through the jeomhwa(點化), the reader of the poem was encouraged to think in relation to the meaning contained in the original poem. And he tried to convey his sincere heart to his friend by describing his true inner self without hid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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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우주영(禹周榮)의 생애와 『오남고(梧南稿)』에 투영된 삶의 지향

저자 : 金雲基 ( Kim¸ Woon-ki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5-44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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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周榮(1822~1890)은 구한말 在地士族의 한사람으로 본고는 그의 立志傳的인 삶과 그가 남긴 시집 『梧南稿』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우주영은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바는 소략하나 남아 있는 기록들로 볼 때 그의 가계와 생애는 매우 독특하다. 우주영의 선친 禹思元(1779~1857)은 致富에 힘쓴지 30여 년 만에 千石을 거두는 부자가 되고, 그는 죽기 2년 전인 76세에 진사시에 入格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아들 우주영 代에 재산 대부분이 慈善으로 인하여 소진되고 가계가 몰락하는 흥망의 과정을 겪었다. 굴곡이 극명했던 우주영의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로는 '선행의 표상'이라고 일컬어졌으나 가문의 몰락과 함께 사후 그의 삶은 알려지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비록 지방에 閑居해 온 사대부의 한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는 난세를 살아가면서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평생 독서와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淸貧樂道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그의 삶은 陶淵明, 林逋 등을 추종하였으며 그가 남긴 『오남고』의 작품에 투영되었다. 본고는 우주영이 쓴 詩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오남고』를 통하여 그의 삶의 지향성을 고찰하였다. 전반적인 그의 시 성향은 守拙하고 과장되지 않은 자연적인 특징을 지닌다. 많은 작품에서 隱者的 삶을 통하여 내면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보이며 道家思想이나 禪思想의 여운이 감지된다. 비록 이 시들은 문학사적으로 드러날 만큼 조명받을 작품은 아닐지라도 한 在地士族의 偉人的인 삶 이면에 그가 지향했던 내면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다. 지금까지 지역의 범주에서 살다간 문인과 작품들이 학계 관심에서 비교적 소외되어왔기 때문에 이에 관한 선행연구의 성과 또한 저조한 상태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주영과 『오남고』의 연구는 19세기의 사회상과 당시 지방 詩壇의 경향을 살펴보는 데에 의의가 있다.


WooJuyong (1822~1890) was a man from the Late Chosun Dynasty, and this paper is about his philanthropist's life and the collection of poems he left behind, 『Onamgo(梧南稿)』. WooJuyong's family history and life are very unique in view of the surviving records, although little is known in the academic world. WooJuyong's father, WooSawon (1779~1857), became a wealthy man collecting a Thousand Suk(千石) after 30 years of working hard to accumulate wealth. However, his son WooJuyong went through a cycle of ups and downs, destroying most of his fortune as a philanthropy and the downfall of his family. In the evaluation of WooJuyong's life, where the ups and downs were clear, he was called 'a symbol of good deeds', but after his death with the downfall of his family, his life was not known. Although seemingly one of the high-ranking fathers who lived in the countryside, he lived a life of saving the poor while living in a chaotic world. Although he was diligent in reading and studying all his life, he did not go to a a government post and lived a poor life buried in nature. His life followed TaoYenming and LinBu, and was reflected in the works of 『Onamgo(梧南稿)』 he left behind. This paper studies the life that WooJuyong wants to follow through 『Onamgo(梧南稿)』, which is supposed to be one of the poems written by WooJuyong. Overall, his poetry has a natural character that is modest and not exaggerated. Through an anchoritic life, the will to overcome inner pain is shown, and the afterglow of DaoJia thought or Zen thought is felt. Although these poems are not works that will receive enough light to be revealed in literary history, they are materials that can infer the inner world that he pursued behind the great life of a single ethnic group. The achievements of previous studies on this are also poor because the writers and works who have lived in the local category so far have been relatively marginalized from the interest of academia. From that point of view, the study of WooJuyong and 『Onamgo(梧南稿)』 is meaningful in examining the social conditions of the 19th century and the trends of local poetry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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