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update

Dongbang Korean Classics

  • : 동방한문학회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6-668x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2)~91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101
동방한문학
91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저자 : 鄭敬薰 ( Jung Kyung-ho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4 (2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艮齋 田愚(1841~1922)의 문집 중 金澤述이 전한 華島手定本과 金永燮에 의해 간행된 『臼山雜著』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전우는 거대한 명성에 맞게 많은 저술을 남겼다. 『艮齋私稿』, 『艮齋先生文集』, 『秋潭別集』, 『艮齋先生文集拾遺』 등 문집을 제외하고도 단행본은 현재 12종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단행본은 전우 생전, 혹은 사후에 간행되었다. 이들 단행본 중에는 문집과 중복되는 작품 보다는 문집에 소재하지 않은 작품들이 대다수이지만 총제적인 전우 저서는 아직 학계에서 본격적인 논의 시도나 소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한 『구산잡저』는 전우의 장년기의 작품을 모아 중국 상해에서 문인인 김영섭에 의해 간행된 책이다. 상하 2권, 1책으로 「檢本」, 「一事編」, 「田氏朔望訓辭」 등 세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작품이 전우의 작품인지는 『艮齋年譜』 등을 통해 알 수 있고, 「검본」은 전우의 발문이 있어 간행 경위를 알 수 있었다. 발행인 김영섭은 저자인 전우의 허락여부를 밝히지 않았고, 『구산잡저』의 작품들이 이후 간행된 전우 문집에 미수록된 상태였다. 세 작품들의 구성과 내용을 볼 때 「검본」은 하나의 단독 저술로 보아야 하고, 「일사편」, 「전씨삭망훈사」는 잡저의 형태로 문집에 포함해도 가능할 것이다. 김택술이 필사했다는 원고본 화도수정본은 崔秉心과 같이 필사한 것으로 스승의 유훈을 충실히 계승하여 광복 후 간행을 도모했지만 김택술 생전에는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인 金炯觀에 의해 1975년, 1984년 등 이후에도 몇 차례 정본화 되지 않은 원고본 형태로 영인되었다. 원고본 형태의 화도수정본을 향후 정본 『간재집』의 완성에 있어 별도의 판본으로 가능 여부는 앞으로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전우, 최병심 문인들은 화도수정본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어 정본 『간재집』을 위한 하나의 판본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This thesis studied the edited version of Kim Taek-sul's Hwadosujeongbon, and focused on 『Gusanjabjeo』 published by Kim Young-seop. These books have not yet received much attention in the academic world and have not been introduced. Jeon-u left many writings in line with his great fame. Jeon-u's collections of literature include 『Ganjaesago』, 『Ganjaeseonsaengmunjib』, 『Chudambyeoljib』, 『Ganjaeseonsaengmunjibseubyu』, and 『Anjapyeon』, 『Yeonwonjeongjong』, 『Ohyeonsueon』, 『Seonglilyuseon』, 『Geombon』, 『Gusanjabjeo』, 『Gusanseonsaengpung-a』, 『Gusanjigyeol』, 『Ganjaeseonsaenglyeseol』, 『Ganjaeseonsaengcheogdog』, 『Ganjaeseonsaengnyeonbo』, 『Sam-eunhabgo』, 『Agcheonsauwangbog』, As such, there are 12 types of writings. These monographs were published either before or after Jeon-u's life. Among these books, the majority of works are not in the collections rather than those that overlap with the collections. The book published this time, 『Gusanjapjes』, is a book published by Kim Young-seop, a writer in Shanghai, China, collecting the works of Jeon-u's adulthood.This book is composed of three works: < Gumbon >, < Ilsapyeon >, and 『Jeonsisasakmanghunsa』. Judging from the composition and content of the three works, < Gumbon > should be regarded < lsapyeon >, and < Jeonsisasakmanghunsa > should not be included in his collection of works.
Kim Taek-sul's manuscript was copied along with Choi Byung-shim, and he faithfully inherited his master's teachings and planned to publish it after liberation, but it was not published. It was published twice in 1975 and 1984 by his son Kim Hyung-gwan. Kim Taek-sul's manuscript is recognized for its existence and value, so it should be recognized as a single edition for 'The Book of Ganjae'.

KCI등재

저자 : 姜玟求 ( Kang Min-gu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3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현재 『간재집』은 3종이 영인 출판되어 있는데, 문집의 권수는 진주본이 총 59권, 화도본이 총 60권, 신도본이 총 52권이다. 글의 종류는 편지가 가장 많으니, 진주본과 화도본이 전체의 77%, 신도본은 전체의 76%이다. 전반적으로 글의 종류별 작품 수는 화도본과 신도본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화도본의 총 작품 수는 신도본의 5,368편보다 75편 많은 5,443편이다. 이는 화도본이 수록한 書ㆍ雜著의 작품 수가 신도본보다 많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화도본의 총 작품 수는 5,443편으로 진주본보다 178편 많아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성과 작품의 수는 화도본과 신도본이 近似하다.
진주본 『간재집』 간행을 둘러싼 문인 간의 갈등은 간재의 애매한 유언이 일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으니, 간재는 대부분 편지로 채워진 문집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또 논쟁 등이 다수 포함된 글이 公刊될 때 世人의 비난을 야기할 수 있고, 자신이 확정하지 않은 글을 제자와 자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무단히 넣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것에 더하여 '문집을 간행할 가치가 없으므로 단지 후손들이 보관만 하면 될 일이다.'라고 유명하는 전통도 문인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러나 간재 문인들의 분열과 갈등은 『간재집』 간행이 촉발하였을 뿐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오진영을 비판한 김택술 등은 진주본의 왜곡을 밝히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오진영이 간재의 의리를 배반하였다고 성토하는 데 주력 하였다. 이는 김택술 등이 오진영과 이념적 지향을 달리한 것에 기인한다.
『간재집』의 문헌학적 고찰은 善本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선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왜곡된 부분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이본 간의 비교를 통한 오류의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간재가 직접 확정하지 않았던 글을 굳이 문집에 편입시킬 필요가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Currently, three types of 『Ganjaejip』 have been published, with a total of 59 volumes of Jinju version, and 60 volumes of Hwado version, and 52 volumes of Sindo version. As for the type of writing, there are the most letters, so Jinju version and Hwado version are 77% of the total, and Sindo version is 76% of the total. Overall, the number of works by type of writing is not very different from that of the Hwado version and Sindo version. However, the total number of works in Hwado version is 5,443 works, 75 more than 5,368 in Sindo version. This is because the number of prose, poems and miscellaneous writings contained in Hwado version is larger than that of Sindo version. In addition, as a result, the total number of works of Hwado version is 5,443, which is 178 more than the Jinju version. However, the overall composition and number of works are similar to those of the Hwado version and Shindo version.
The conflict between disciples over the publication of Jinju version 『Ganjaejip』 had an aspect that the ambiguous will of Ganjae provided one cause. He wasn't sure if a collection of works, which was mostly filled with letters, was published and worthy of passing on to posterity. Also, when articles containing controversies were published in public, it could cause criticism from people, and he was concerned that his disciples and descendants could unauthorizedly include articles that he had not confirmed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In addition, a tradition of asking for the last word in his life as “It is not worth publishing a collection of writings, so it is only necessary for descendants to keep it.” also confused disciples. However, the division and conflict of the Ganjae disciples were triggered by the publication of 『Ganjaejip』 and that was not the only cause. Kim Taek-sul and others, who criticized Oh Jin-young, failed to reveal the distortion of Jinju version. They focused on accusing Oh Jin-young of betraying the loyalty of Ganjae.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Kim Taek-sul and others had different ideological orientations from Oh Jin-young.
The philological consideration of 『Ganjaejip』 is a work to make the Best Version. In order to make the Best Version, it is important to restore the distorted parts. After that, errors should be corrected through comparison between the Different Versions. However, it is necessary to consider whether it is necessary to incorporate texts that Ganjae had not directly confirmed into the collection of works.

KCI등재

저자 : 金甫省 ( Kim Bo-s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9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艮齋 田愚(1841~1922)는 조선 말기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동안 간재의 경학·철학 사상을 연구한 논문이 다수 배출되었고, 간재 문집이나 문학을 주목한 논문도 간간이 이어졌다. 간재는 전통적 성리학을 통해 나라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대표적인 유학자이므로 그의 경학·철학관을 탐구한 연구성과가 비교적 많이 축적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간재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담아낸 작품들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연구가 특히 미흡한 간재의 한시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간재의 문집은 크게 세 판본으로 나뉜다. 이인구가 논산 '용동'에서 간행한 용동본,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진주본, 그리고 최병심·김택술이 1922년 정리된 원고를 필사하여 완성한 화도수정본이다. 세 판본에 실린 간재의 한시는 편차, 시 제목, 시어 등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간재의 한시는 여러 판본에 산재하는 형태로 존재할 뿐 아니라, 별도로 묶인 형태로도 존재한다. 바로 『臼山先生風雅』(2권 1책)이다. 구산선생풍아는 유일하게 별본으로 존재하는 간재의 한시집으로서 다양한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구산선생풍아』에는 세 판본에 실리지 않은 한시가 적지 않은데, 대체로 불특정 다수의 제자에게 남긴 시, 도학적 자질과 문학적 소양을 모두 발휘한 문인의 작품에 차운한 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읊은 시, 외세의 영향에 격렬한 감정을 담은 시라는 특징을 보인다. 즉, 『구산선생풍아』는 간재의 유학자와 문장가, 스승과 가장, 문명의 전환기에 격동하는 개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시 작품을 두루 수록하고 있어, 주요 세 판본보다 간재의 다양한 이면을 망라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Gan-Jae Jeon-u (1841-1922) was a representative scholar of the late Joseon Dynasty. In the meantime, many academic papers have been published on Gan-Jae's Confucianism and Philosophical Thoughts. And a few papers on Gan-Jae'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and literature were published. Gan-Jae is a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who believed that the crisis of the country could be overcome through Neo-Confucianism. Therefore, it is only natural that there are relatively many studies on his Confucianism and philosophy. However,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the scholar Gan-Jae, it is necessary to study the literary works that contain his thoughts. This paper focuses on the poetry of Gan-Jae, which is particularly lacking in research. Gan-Jae'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is divided into three types. One is the Yongdong version published in Yongdong (Nonsan) by Lee In-gu, and the other is the Jinju version published in Jinju by Oh Jin-young. And there is Hwa-Do Su-Jeong version, which was completed by copying the texts compiled in 1922 by Choi Byeong-shim and Kim Taek-sul. The poetry of Gan-Jae, published in three different books, differs in the order in which the poems are arranged, the titles of the poems, and the words of the poems.
The poetry of Gan-Jae is not only divided into several books, but also exists as a separate book. That's 『GuSan-SeonSaeng-PungaA』(two volumes, one book). 『GuSan-SeonSaeng-PungaA』 is the only collection of poems by Gan-Jae that exists separately, and contains various poems. In GuSan-SeonSaeng-PungaA, there are four types of unpublished trials. In general, these poems are poems given to unspecified number of disciples, poems in response to poems by writers with both moral and literary aptitude, poems about really personal things, or poems of a turbulent individual in a transitional period of civilization. As it were, 『GuSan-SeonSaeng-PungaA』 contains all of the poems that show the aspects of famous Confucian scholar, good writer, great teacher, caring father and emotionally rich individual. Therefore, 『GuSan-SeonSaeng-PungaA』 can be said to be a reference showing various aspects of Gan-Jae rather than the three types of books.

KCI등재

저자 : 鄭燾源 ( Jeong Do-w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臼山旨訣』은 田愚가 金永燮에게 보낸 편지 등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1897년 상해에서 석판본으로 인쇄되었는데, 김영섭은 약 1,000질 가량을 국내로 들여와 유포하였다. 김영섭은 사림들이 이 책을 통해 스승 전우의 도학을 이해해줄 것으로 믿었고, 자신 또한 전우 문하의 정통을 이은 제자로 인정받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이 책은 사림들의 거센 비판만 야기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우의 처신은 儒宗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전우는 이 책을 수거, 소각하도록 지시했지만,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김영섭은 사후에 문인록에서 삭제되었다. 김영섭이 복권된 것은 전우가 사망한 뒤이다.
이 책은 김영섭에게 전해진 전우의 心法을 담고 있고, 김영섭은 이를 자신의 학문적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포장하고자 하였으나, 전우의 문집은 이러한 포장을 거둬 냈고, 이 책에 담긴 많은 편지 역시 제외하였다. 제외된 편지 대부분은 물의를 일으켰거나 김영섭의 심법 수수를 유추할 만한 내용이 담긴 것들이었다. 전우가 생전에 자신의 문집을 직접 산삭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이 결국 전우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들과 그에 관한 주석은 전우와 김영섭이 산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전우가 제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도학을 전수하고자 하였는지 또한 보여준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에 있을 것이다.


『GusanJigyeol』 is a collection of articles such as letters from Jeon-Woo to Kim-Youngsup. This book was printed in lithograph in Shanghai in 1897. Kim-Youngsup brought about 1,000 vaginal products into Korea and distributed them. Kim-Youngsup believed that Joseon Confucian scholars would read this book and understand the thoughts of his teacher Jeon-Woo. He also thought that he would be recognized as a disciple who succeeded in the orthodoxy of Jeon-Woo. However, Korean Confucian scholars read this book and criticized Jeon-Woo. “At the time, Joseon was in a very difficult situation nationally, and Jeon-Woo ignored it. This appearance of Jeon-Woo is the result of Jeon-Woo's lack of personality and wrong judgment. He has no qualifications as a leader of Joseon Confucianism.” Faced with these criticisms, Jeon-Woo and Jeon-Woo's disciples ordered the book to be collected and burned, but the criticism did not subside. Kim-Youngsup was posthumously removed from Jeon-Woo's list of pupils. Kim-Youngsup was reinstated after Jeon-Woo died. This book contains the teachings of Jeon-Woo passed down to Kim-Youngsup. Kim-Youngsup packaged it as revealing his academic legitimacy, but Jeon-Woo's anthology has removed this packaging. The Jeon-Woo anthology excludes many of the letters contained in this book. Most of the letters excluded were those that caused scandal or contained content that Kim-Youngsup would be proud of. In the end, it can be said that this book did not receive Jeon-Woo's approval. However, the contents of this book and its comments help us understand the times in which Jeon-Woo and Kim-Youngsup lived. And it helps us understand what Jeon-Woo taught his disciples. Perhaps the virtue of this book lies in its value as a historical material.

KCI등재

저자 : 李敏弘 ( Lee Min-ho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99 (5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들 중에 후세인의 주관적 척도에 의해, 망각되었거나 과소평가된 사람이 적지 않다. 별 실질이 없는 인물이 특정 派閥과 현달한 後孫에 의해 과대평가된 사람도 많고,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례도 있다. 필자는 그들 가운데 弓裔를 선택하여 그가 우리 반만년 역사상 중원 皇帝들처럼 최초의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을 시행한 영도자였던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 와서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중세는 중세의 척도와 가치관으로 접근해야 그 실상이 구명된다. 하물며 칭제건원의 이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외세에 휘말리지 않고 주체성을 살려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몸에 밴 사대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인식도 그 근저에는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권력쟁탈에서 밀려난 패자에 관한 평가는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잔인하고 혹독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夏나라의 桀王과 殷나라의 紂王, 秦나라의 始皇과 조선조의 光海君이 그 대표적 帝王이다. 승자였던 禹王과 武王은 文武兼全에다 도덕심도 갖춘 성인으로 찬양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들과 비슷한 사례가 많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로 필자는 궁예를 선정하여 본고를 작성했다. 승자였던 王建은 寬仁厚德의 대명사로 묘사되어 있다. 만일 왕건이 궁예의 칭제건원을 계승하여, 皇帝로 군림하면서 발해의 유민과 합세하여 부국강병책을 써서 遼나라에 대항했다면, 당시 無主空山이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만주지역의 절반은 수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진실로 고려조의 禑王과 昌王의 성이 王氏가 아니라 辛氏였는지, 진시황의 성이 嬴氏가 아니라 呂氏인지도 의문이다. 승자인 李成桂와 劉邦 등이 易姓革命을 합리화하기 위한 權謀術數로 볼 수는 없는지, 언제까지 이 같은 왜곡을 기정사실로 여겨야 할 것인지. 이제 역사의 진실은 밝혀질 때도 되었다. 궁예의 '稱帝'에 대한 기록은 국내 史書에는 일체 없고, 중국 측 簡冊에만 전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諸侯禮樂이 아닌 皇帝禮樂과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궁예의 經綸을 闡揚하여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鑑戒로 삼고자 한다.


Among the countless figures who had flickered in the history, there were many who have been forgotten or underestimated by posterity's subjective measure. There are many cases that a person with no substance was overestimated by a certain faction and illustrious descendant, and there are cases that a person who has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has been pushed out of interest. By choosing Gung-ye from among them, I would like to reveal the fact that he was the leader who implemented the first 'Chingje-Geonwon (稱帝建元, Calling the monarch the emperor and establishing an era name)' and 'Ohaeng-ibguk(五行立國, Building a country with the five elements)', like the emperors of China, in our a 5,000-years-old history.
There are many people who wonder why Chingje-Geonwon and Ohaengibguk are important at this belated time, but the medieval world must be approached with medieval values to reveal its reality. Moreover, the spirit of the Chingje-Geonwon has not been extinguished. And even today, in order to achieve independence by having subjectivity without being entangled in foreign powers, there is a perception that we must abandon the flunkeyism that has been entrenched in our body, at its root, there is the administration ideology of Chingje-Geonwon.
Since history is the record of winners, the evaluation of losers who were pushed out of the struggle for power was cruel and harsh, regardless of all ages and countries. In the case of East Asia, Geolwang(桀王) from the Xià(夏) Dynasty, Juwang(紂王) from the Yīn(殷) Dynasty, Shihuang(始皇) from the Qín(秦) Dynasty and Gwanghaegun(光海君) from the Joseon Dynasty were representative kings. The victors, Uwang(禹王) and Muwang(武王), were praised as saints with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and morality. There are many similar cases in Korea, but I selected Gung-ye as a person who must be pointed out and wrote this paper. The victor, Wang-geon, was described as a byword for generosity and eminent virtue. If Wang Geon succeeded Gung-ye's Chingje-Geonwon, reigned as emperor, joined with the settlers of Balhae, and used the measure to enrich and strengthen a country, to fight against the Liáo(遼) dynasty, it is thought that half of the Manchuria region, which was an ownerless mountain at that time, and which was ancient territory of Goguryeo and Balhae, could have been restored.
Indeed, it is also questionable whether the surname of the Goryeo Dynasty's Uwang(禑王) and Changwang(昌王) were Shin(辛) rather than Wang(王), and whether the surname of Qin Shihuang were Yeo(呂) rather than Yeong(嬴). How long should such distortion be considered as a fait accompli? Now is the time for the truth of history to be revealed. The record of Gung-ye's Chingje(稱帝) is not in any domestic history books, but only in Chinese history books, and what the reason is. By revealing the statecraft of Gung-ye, which governed the country based on the administration ideology of the emperor's Ye-Ack(禮樂, the Courtesy and the Music) and Chingje-Geonwon, rather than the feudal lords' Ye-Ack(禮樂), I would like to use it as an lesson for the present and future of our people.

KCI등재

저자 : 具瑟妸 ( Koo Seul-ah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1-239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성종대 왕실문화의 정립 과정이 왕권 강화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이 과정에서 창작된 관각산문을 통해 관각문학의 勸戒的 역할과 諷諫의 글쓰기 방식을 분석한 것이다. 성종은 특별한 왕위 계승 과정으로 인해 나름의 방식으로 왕실 내부 기강을 정립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자 하였다. 신료들은 왕실문화를 공론의 장으로 포섭하는 가운데 계층성을 강조하는 성종의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해 규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대립과 조율의 과정이 관각산문의 안팎에 반영되어 있다.
먼저, 성종 즉위 초기에 왕실은 后妃의 정치 참여를 嚴禁하고 모범적 선례를 따를 것을 강조하는 『后妃明鑑』 찬술 등의 활동을 통해 규범성에 대한 자발적 준수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신료들은 왕실의 의지에 대한 예찬과 성종에 대한 기대감을 관각산문에 담아냈다. 그러나 친정 직전, 성종은 私親을 추숭하는 방식으로 혈통의 위계를 드높이려 하면서 그 의례적 부당성을 논하는 신료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관각문인들은 私家의 모범으로서 왕실이 견지해야 할 규범성을 우회적으로 환기하는 방식을 통해 성종을 규계하였다.
둘째, 창경궁 낙성을 전후한 시기 왕실은 宦官을 둘러싼 내홍을 겪고 있었다. 성종은 친왕 세력 확보 및 군왕의 인사권 등 계층적 우위를 앞세워 신료들의 제동에 불만을 토로하고, 이 문제를 에둘러 해결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성종의 명을 받은 金宗直은 사건의 당사자인 환관을 대상으로 직설적 경계의 의도를 담은 관각산문을 찬술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계층적 질서의 최상위자이자 왕실 내부의 구성원들을 완벽하게 제어해야 하는 존재로서 군왕이 관련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절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관각문인들은 규범성과 계층성의 구심점인 군왕을 대상으로, 사적 영역에서 보여주어야 할 행동규범을 제시하였다. 「環翠亭記」의 작가들은 군왕의 현실적 입장을 일정 부분 존중하는 가운데 긴장이 완화되는 사적 영역에서도 마음을 다잡아야 함을 풍간의 방식으로 피력하였다. 아유나 찬미에 그치지 않고, 의사소통 방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종의 성격을 고려하되 自淨의 정치적 의도를 사수하기 위해 고심한 관각의 글쓰기 방식이 새롭게 주목된다.


Assuming that the process of establishing royal culture under King Seongjong's reign is related to the intention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this study analyzed the admonish role of Gwan-gak literature and the way of writing skills. King Seongjong tried to increase his authority by newly establishing discipline within the royal family due to the special process of succession to the throne. In response, the officials put the brakes on King Seongjong's method of managing state affairs, which emphasizes hierarchicality, by embracing royal culture as an area of public opinion. The process of confrontation and coordination is well contained in Gwan-gak literature.
First, in the early days of the regime, the royal members such as the queen strictly prohibited from participating in politics and showed their willingness to comply with norms by following exemplary examples. So, the officials expressed their expectations and admiration for the regime in their writings. However, King Seongjong tried to raise the hierarchy of his own lineage by promoting his biological father to king. The officials strongly protested on the basis of the ritual injustice. Accordingly, the writers of Gwan-gak literature disciplined King Seongjong by indirectly evoking the normative nature that the royal family should maintain as an example of a general family.
Second, when Changgyeong Palace(昌慶宮) was completed, King Seongjong was suffering from internal feuds caused by eunuchs. He complained about the opposition of the officials with the hierarchical advantage of the king, and instead chose to solve this problem indirectly. Accordingly, Kim Jong-jik(金宗直), who received the royal order, wrote a direct and strict warning against eunuchs. However, behind it, it can be seen that the king, the top of the hierarchical order, contained a message of vigilance that requires complete control of royal members.
Third, the officials presented the norms of behavior that he should show in the private domain, targeting wages, which is the center point of normativity and hierarchy. The writers of 「Hwanchwijeonggi(環翠亭記)」 respected the realistic position of the king to a certain extent. And at the same time, they insinuated the king to hold his heart firm even in a private space where tensions were eased. The writers of Gwan-gak Literature were well aware of the sensitive nature of King Seongjong, which was shown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royal culture. Thus, it showed the voice of self-purification that delicately achieved their political purpose of advising the king as a moral norm.

KCI등재

저자 : 申斗煥 ( Shin Doo-hwa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1-287 (4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살았던 敬菴 盧景任(1569~1620)의 「月幕山水記」와 그 장소성을 연구한 논문이다. 이 작품은 『敬菴先生文集』 卷2에 들어 있으며, 그가 1607년 6월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여 1611년까지 근무하던 시절에 월막의 산수를 유람하고 쓴 것이다. 「월막산수기」는 지금의 경북 영덕군의 팔각산과 옥계구곡을 유람하고 지은 기문이다. 이 기문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명소에다가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곳곳에 최초로 붙인 점들은 그 장소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의 재능이 드러났으며 여헌 장현광과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문학수업을 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산수를 유람하고 지은 기문들이 여러 편 들어 있다. 그가 어려서부터 공부한 성리학은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의 「월막산수기」를 분석한 결과 그 경관묘사가 뛰어나고 아름다워 간과 할 수 없는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점이 발견된다. 그의 문체는 아름답고 질박하며 온유돈후한 문예미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산수유기 전반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의 경관이 인식되어 있었으며 주자처럼 시가로 강호를 구가하며 성리학적 학문수양에 전념하려는 강호가도가 발견된다. 이 논문은 새롭게 발견된 「월막산수기」를 바탕으로 관광의 명소로 부각되고 있는 경북 영덕의 팔각산과 옥계구곡의 장소성을 조명한 것이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Gyeongam(敬菴) Noh Gyeong-im(盧景任, 156 9~1620)'s 「The record of Mt. Wolmak's scenery」 and its Sense of Place which lived aroun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is work is included in his literary collection, and this work was written after visiting Mt. Wolmak's scenery when Gyeongam(敬菴) was appointed as a Yeonghae territorial governor(寧海府使) in June 1607 and worked until 1611. 「The record of Mt. Wolmak's scenery」 is a story written after touring Palgak Mountain and Okgye Valley in Yeongdeok-gun, Gyeongsangbuk-do, Korea. With the new discovery of this record, the points that were given meaning to the place and named for the first time here and there highlighted its the Sense of Place. He showed his talent for literature from an early age, and he studied Neo-Confucianism under Yeoheon Jang Hyun-kwang and Seoae Yoo Seongryong, but took literature classes whenever he could. Gyeongam Noh Gyeongim was a bureaucrat and literary scholar who was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King Gwanghaegun of the Joseon Dynasty, and he was a Confucian scholar who contributed to reviving and stabilizing Neo-Confucianism after the wa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went through various government posts, and his literary collection contained several articles written on a field trip. The Neo-Confucianism he studied since he was young had a great influence on his work.
Noh Gyeong-im's literary collection has many works left after touring scenery(山水), and his analysis of 「The record of Mt. Wolmak's scenery」 found that the landscape has excellent and beautiful literary values that cannot be overlooked. His writing style is characterized by his beautiful, simple and generous literary style. Throughout his record of traveling scenery, the scenery of Ju-hee(朱熹)'s Muigugok(武夷九曲) was recognized, and a Gang-Ho-ga-do(江湖歌道) was found who tried to devote himself to Confucian scholarly learning by enjoying poetry like a Ju-hee(朱熹). Based on the newly discovered 「The record of Mt. Wolmak's scenery」, this paper illuminates the Sense of Place of the Palgak Mountain and Okgyegu Valley in Yeongdeok, Gyeongsangbuk-do, which are emerging as tourist attractions.

KCI등재

저자 : 崔斗憲 ( Choi Du-he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9-319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東谿 趙龜命 散文에 나타난 속임수와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정치적 함의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속임수가 나타난 3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侯公說項王辭」에는 유방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후공이 항우를 속이는 이야기와 유방이 '명의를 가장'하여 천하를 속이는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속임수에 대한 조귀명의 평가를 추론하기 위해 「楚論」과 「倭驢說」을 분석하였다.
「楚論」의 분석을 통해 조귀명이 '강포한 사람'을 상대하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식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 있는 정당화의 논리이자 허용의 범위를 두 가지로 추론하였다.
「倭驢說」의 분석을 통해서는 조귀명이 선험적이고 당위적으로 주어진 名에 實을 일치시키는 일반적인 명실상부의 원칙을 넘어, 실에 맞추어 명을 조정하고 심지어 명을 가장하는 것도 허용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 따라 속임수가 허용되는 범위 설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조귀명의 속임수 인식은 그 범위의 측면에서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분별되는 지점이 있으며, 이는 당대의 주요한 정치적 화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본 논문에서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한 대응과 당쟁의 해소 방안이라는 두 가지 지점에서 조귀명의 속임수 인식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았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perception of deception and the political implications in prose of Cho Gwi-myeong(趙龜命), and to this end, three works containing the perception of deception were examined. 「侯公說項 王辭」 contained the story of Hu Gong(侯公) cheating Hangwoo(項羽), who was dispatched to save Yu Bang(劉邦)'s father, and Yu Bang deceiving the world by pretending to be “in the name.” In order to infer the evaluation of Cho Gwi-myeong on these two tricks, 「楚論」 and 「倭驢說」 were analyzed.
Through the analysis of 「楚論」, it was confirmed that Cho Gwi-myeong positively recognized the deception in a specific situation dealing with a 'strong person', and the logic of justification and the scope of permission at the base of this perception were inferred in two ways.
Through the analysis of 「倭驢說」, Cho Gwi-myeong had a view that allowed him to adjust the name to the truth and even pretend to be the name, beyond the general principle of matching the truth to the given name, and this view established the scope of the deception.
In terms of its scope, Cho Gwi-myeong's perception of deception has a point that is distinguished from those of the people at the time, which makes it possible to infer that there will also be differences in perception of the main political topic of the time. In this paper, we looked at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Cho Gui-myeong's perception of deception at two points: responding to the threat of the Qing Dynasty and ways to resolve party disputes.

KCI등재

저자 : 朴東昱 ( Pak Dong-uk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50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一日行事大略』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는 필사본으로 3권 1책이다. 서문이 1839년(산운의 나이 69세)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책이 집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日行事大略』은 하루의 日課를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일과지침서이다.
『一日行事大略』은 총 38개 항목이다. 상권에서는 사친과 독서를 중심으로 7개 항목을, 중권에서는 몸과 정신, 태도, 인간 관계 등 20개 항목을, 하권에서는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11개 항목을 다루고 있다. 상권은 기존의 일과 지침서처럼 시간대별로 기록하고 있지만, 중권과 하권은 인간사의 다종 다기한 관계와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산운이 밝힌 것처럼 하루에 지켜야 할 일이지만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38개의 항목을 다른 식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저자의 편찬 의도에 따라 각 권의 편제별로 살펴보았다.
요즘 시테크와 자기계발서가 크게 주목받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끌어내기보다는 자신을 포장하고 과장하는 데 치중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 않다. 『一日行事大略』에는 이미 시효가 만료된 가치도 있지만 인간 사회의 보편적 문제를 담은 것들도 적지 않아, 연구자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一日行事大略』 is in the collections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and the Korea University Library. This material is a manuscript in three volumes. The preface was written in 1839 (Sanun was 69 years old), indicating that the book was written before that. 『一日行事大略』 is a guidebook for daily routines organized by time period.
There are a total of 38 items in 『一日行事大略』. In the upper volume, 7 items are dealt with mainly on family and reading, in the middle volume 20 items such as body and mind, attitude, and human relations are covered, and in the lower volume 11 items are dealt with mainly on ceremonial occasions. The upper volumes are recorded by time like the existing daily guidebooks, but the middle and lower volumes comprehensively deal with various relationships and problems in human affairs. As Sanwoon said, it is something that we have to keep in one day, but it is something we have to keep for the rest of our lives. Although the 38 items could be classified in different ways, I looked at each volume by organization according to the author's intention to compile.
Citech and self-help books are receiving a lot of attention and consumption these days. However, this is not without its problems because it focuses on packaging and exaggerating oneself rather than bringing about true inner change. Although the statute of limitations has already expired in 『一日行事大略』, there are many articles that contain universal problems of human society, providing reading not only for researchers but also for general readers.

KCI등재

저자 : 金仁奎 ( Kim In-gyu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1-387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燕槎日錄』은 이유원의 연행록으로 1875년 7월 30일 서울에서 출발해 10월 1일에 북경에 도착한 후, 11월 2일에 다시 북경에서 서울로 출발하고, 같은 해 12월 16일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저술이다. 이유원은 『연사일록』에서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하기도 하며, 풍광이나 지역의 특색들을 소개하면서 연행에서 얻은 감회들을 표현하였다. 기존 『林下筆記』나 『嘉梧藁略』을 보면 이유원은 작품을 지을 때 기본적으로 메모와 재배치, 혹은 자신이 봤던 문헌들을 정리하거나 참고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하지만 『연사일록』은 실제 자신이 연행을 통해 접했던 내용들을 비롯해 자신의 감회나 도처에서 느낀 생각들을 시로 표현하거나 그와 교유했던 중국 문인들과 주고받은 내용들을 기록했다. 이 점은 『임하필기』와 『가오고략』과는 완전히 다른 저술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 두 저서가 편집자와 비평가로서의 안목을 가지고 지은 것이라면, 『연사일록』은 순수한 자기의식 세계가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연사일록』은 이유원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 비평, 혹은 감상을 頭註로 기록하고 있다. 그 두주는 짧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연행록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사일록』은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의 회담을 기록하고 있는 데, 이들 대화는 대부분 조선에 관한 언급이었다. 내용은 비록 이유원의 연행에 해당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 회담 내용이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유원은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결국 본고는 『연사일록』을 통해 기존에 연구가 되지 않았던 이유원의 2차 연행을 통한 기록이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와 시인으로서의 이유원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그간 이유원을 정치가, 혹은 산문가를 넘어 종합 문학가로서의 위상을 발견하여 19세기 문인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또 하나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YeonsaIlrok(燕槎日錄)』 is the encyclopedia of Lee You-won, departing from Seoul on July 30, 1875, arriving in Beijing on October 1, and departing again from Beijing to Seoul on November 2, and on December 16 of the same year. It is a book that records the journey back to Seoul from work by date. Lee You-won also recorded the daily life of the day, and while introducing the scenery and local characteristics, expressed the feelings he had gained from the performance in 『YeonsaIlrok』. If you look at the existing 『Imhapilgi (林下筆記)』 or 『Gaogoryak(嘉梧藁略)』, it is often seen that Lee You-won basically took notes and rearranged the works, or organized or referred to the documents he had seen. However, in 『YeonsaIlrok』, he expresses his emotions and thoughts he felt everywhere in poetry, as well as what he actually encountered through the performance, or records the content he exchanged with Chinese writers who had fellowship with him. This point adopts a completely different writing method from 『Imhapilgi』 and 『Gaogoryak』. If 『Imhapilgi』 and 『Gaogoryak』 are from the perspectives of editors and critics, 『YeonsaIlrok』 is a work that reflects the world of pure self-consciousness. And in 『YeonsaIlrok』, someone sees Lee You-won's work and writes a critique or appreciation for it. Although the two weeks consist of short contents, it can be said that it is a characteristic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other performance records.
In addition, 『YeonsaIlrok』 records meetings with people who held important positions in China and Japan at the time, and most of these conversations were about Joseon. Although the content does not correspond to Lee You-won's arrest, it was obvious that the contents of this meeting would have a great impact on Joseon, so he left all the details on record.
In the end, through 『YeonsaIlrok』, this paper is of great significance in that it is possible to examine the effect of Lee You-won's second performance, which had not been studied before, on his life and as a poet. This point will be sufficient as another example of understanding the characteristics of 19th century writers by discovering Lee You-won's status as a general literary writer beyond a politician or prose writer.

12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