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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ekje Hakbo

  • : 백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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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2005-9469
  • : 2713-8380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9)~38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238
백제학보
38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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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고대 황해 교섭·교류 항로와 경기만

저자 : 임동민 ( Lim Dong-mi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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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의 경유지, 동서방향 횡단항로의 기항지, 한강 수계의 인후부로서 교통망의 '결절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가진 동시에, 많은 연안항해 위험요소를 지닌 곳이다. 이에 따라 고대 경기만의 역사는 황해 항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황해 항로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는 특정 사료를 통해 특정 항로의 개척시점 문제에 천착하였지만, 항로 활용의 주체와 목적에 따른 구분을 고려하면, 경기만과 긴밀히 연결된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시점과 활용 양상에 대해 보완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황해 항로 활용의 주체는 국가와 민간 영역으로 나뉘며, 활용의 목적은 정치·군사·외교적 측면의 교섭과 경제·문화·사상적 측면의 교류로 크게 구분된다. '교섭 항로'는 정치, 군사, 외교적 '교섭'을 위해 활용하는 항로를 의미하는데, '교류 항로'보다 공적인 성격을 지니며, 더욱 높은 안전성을 요구한다. '교류 항로'는 경제, 문화, 사상적 '교류'를 위해 활용하는 항로로서, '교섭 항로'보다 상대국과의 적대관계, 기항지 연안의 정세변화에 구애받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교섭 항로'는 '교류 항로'의 경험, 기술, 정보가 축적되어 안정성이 담보된 항로를 의미한다. '교섭 항로', '교류 항로'는 당시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항로라기보다, 연안항로, 횡단항로 등 다양한 항로를 활용했던 역사적 사실을 목적에 따라 구분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 구분을 통해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 시점을 살펴보면, 4세기 이전 경기만, 낙랑지역 관련 문헌자료, 고고자료에서 이미 횡단항로가 교류 및 교섭 항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백제는 앞선 시기의 횡단항로 경험을 흡수하여, 장거리 연안항로 대신에 횡단항로를 교섭 항로로 활용하여 동진과 교섭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면, 고대 경기만의 해양사적 전개과정은 4시기로 구분된다. 1기(~4세기 초반) 연안항로 중심 시대의 경기만은 연안항로 경유지로서, 신분고국과 '마한주'(백제왕)가 성장한 지역이었다. 횡단항로 중심 시대는 세 시기로 세분되는데, 2기(~5세기 초반)는 백제가 횡단항로를 활용한 시기로서, 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 동서방향 횡단항로, 내륙의 한강수계를 잇는 '결절점' 역할을 하였다. 3기(~6세기 중반)에 경기만 '결절점'의 범위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확대되어, 왜와 가라국도 경기만의 백제를 거쳐 중국과 교섭하였다. 하지만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교섭항로의 안정성이 떨어졌고, 왜나 가라국의 중국 교섭을 지켜보아야 하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4기(6세기 후반~)에 신라는 경기만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도 기존에 축적된 지정학적 이점과 해양학적 특성을 흡수하여 횡단항로를 통해 당과 동맹을 맺어 삼국통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Kyŏnggi Gulf has a geopolitical advantage of a “nodal point” of the transportation network as a stopover point for the lane sailing along the coast of Yellow sea(黃海沿岸航路, the coastal route), the lane sailing across the Yellow sea(黃海中部橫斷航路, the cross route), and the mouth of Han River, and it is a place with many coastal navigation hazards. The history of ancient Kyŏnggi Gulf was closely connected to the Yellow Sea routes.
The subjects of the use of the Yellow Sea route are divided into the state and private sectors, and the purpose of use is divided into negotiations in political, military, and diplomatic aspects and exchanges in economic, cultural, and ideological aspects. The “negotiation route” has a more public character than the “exchange route” and requires higher safety.
Looking at the timing of the pioneering of the cross route, it was already used as an exchange and negotiation route in the Kyŏnggi Gulf, Lelang(樂浪郡) before the 4th century. In the latter half of the 4th century, Paekche absorbed the experience of the cross route and negotiated with East Jin by using the cross route as a negotiation route instead of the long-distance coastal route.
Through the discussion of the sea routes, the maritime history of ancient Kyŏnggi Gulf is divided into four periods. The first period until the beginning of the 4th century was the era of coastal route. Kyŏnggi Gulf was a transit point for the coastal route. The second period until the early 5th century was when Paekche used the cross route. Kyŏnggi Gulf served as a 'nodal point' connecting the coastal route, the cross route, and the estuary of the Han River. In the third period until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the scope of the 'nodal point' of Kyŏnggi Gulf was extended to countries in East Asia. In the fourth period after the second half of the 6th century, Shilla occupied Kyŏnggi Gulf, absorbing geopolitical advantages despite the threat of Koguryŏ, and was able to form an alliance with the Tang dynasty through the cross route and advance towar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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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역 인식의 교착(交錯)지대로서의 전북 동부지역 이해를 위한 소론(小論)

저자 : 위가야 ( We Ka-ya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5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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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가야와 백제에서 바라본 각자와의 접경이라는 관점에서 문헌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는 5~6세기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에서 전북 동부지역이 가지는 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검토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가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하는 기문은 논쟁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 위치를 섬진강 유역에서 찾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기문이라는 지명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에 비정할 수 있으며, 이른바 '기문·대사 분쟁'의 성격이 섬진강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섬진강 교통로는 479년 대가야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할 때 이용한 경로이며, 그 교통로의 장악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제는 대가야가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할 수 있던 주된 요인을 섬진강 교통로의 장악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를 근절하기 위해 기문과 대사에 대한 공략에 나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 반파의 위치를 장수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문헌의 새로운 해석과 봉수 유적 등 고고자료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제기되었지만, 『일본서기』 기록의 문학적 윤색을 사실로 전제하고 고고자료를 해석한 결과 도출된 견해라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현재까지는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와 『삼국사기』의 우륵 12곡 관련 기사를 통해 같은 시기에 백제와 대가야가 기문을 비롯한 전북 동부지역을 자신의 영역 또는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북 동부지역은 대가야와 백제 모두의 의식에서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두 세력 모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양국의 영역 인식이 交錯하는 지역으로서 전북 동부지역을 이해할 때, 그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실상에 좀 더 가까운 접근이 가능할 것이며, 향후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nature of polities in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which can be identified through the literature record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border between Gaya and Baekje. It is also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status of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in the space and time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the fifth and sixth centuries. The considerations reviewed in this study are follows:
In the first place,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Gimun(己汶) was in the Seomjin River basin, which was said to be the place where the conflict between Baekje and Gaya took place according to Nihonshoki. The first reason is that Gimunha(基汶河) in Han Yuan is the current Seomjin River. The second reason is that the nature of the conflict could be seen as a conflict over the waterway traffic route in Seomjin River basin.
In addition, this understanding can be logical from the perspective that Banpa(伴跛) recorded in Nihonshoki was Daegaya in Koryung. Recently, an argument has been raised to see the location of Banpa in the Jangsu region. However, this argument should be required a careful approach in the aspect of the source criticism of Nihonshoki. Until now, thus, it is reasonable to see that Banpa was Daegaya in Koryung.
Through the “Baekjekuksajo” in Zhigongtu of Liang and the article of “Wooreuk 12- Gok” in Samguksagi, it can be confirmed that Baekje and Daegaya recognized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as their own territory or their sphere of influence at the same time. Therefore, although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was recognized as their own territory in both Daegaya and Baekje in terms of consciousness, it was a region under the influence of both polities. When understanding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as the region where the territorial consciousness of Baekje and that of Gaya are entangled, it would be able to access the reality of the polity that existed in the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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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령왕릉(武寧王陵) 장례과정(葬禮過程)에서 <설치식(設置式) 관(棺)>의 검토(檢討)

저자 : 강원표 ( Kang Won-py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9-8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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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상장의례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정확한 조사보고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장례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관의 안장방법과 위치, 관 내 부장품의 위치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이에 장례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물의 실제 위치 파악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73년 보고서와 이후 복원안의 문제점을 살펴 정확한 유물 출토위치와 관 안장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목관의 안장방법을 재검토하였다.
왕과 왕비의 관은 300kg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덤의 입구가 좁고, 연도와 묘실의 크기가 협소하므로 인력으로 무거운 관을 들어 왕릉 내에 안치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관은 시신이 안치된 관을 빈장지에서부터 운구하여 묘실에 안치하는 <운구식 관>이 아니라, 묘실 내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설치식 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운구를 위한 손잡이로 추정되었던 관고리가 실제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두침과 족좌에 운구 시 진동에 대비한 고정 흔적이 없는 점, 좁은 실내에서 조립이 용이하도록 안쪽에 홈을 파고 모서리를 깎아 가공한 관재, 머리 부분에 타격흔적이 없는 관정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관 내부는 3개 공간으로 나뉘고 시신은 가운데, 부장품은 위, 아래 공간에 안치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령왕릉의 상장례는 중국의 유교적 상장례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가 많았다. 하지만 무령왕릉 장례과정 중 목관의 안장방법을 검토한 결과 중국의 전통 상장례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묘실 내 미리 설치된 목관에 시신 안치, 관 내부 공간을 구획하여 가운데는 시신 안치공간으로, 머리 위와 아래는 부장공간으로 활용한 점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장례 방법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가 중국 상장의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묘제의 변화가 상장례의 변화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향후 백제 상장례에 대한 연구는 묘제의 변화와 장례 방식의 변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The excavation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and the discovery of the epitaph in 1971 have become the starting point of research on the mortuary practice of Baekje. However, in-depth studies on the funeral process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have not progressed as expected due to the inability to accurately report the investigation.
The situation of the excavation of artifacts in the burial chamber is reviewed to analyze the funeral process of the tomb. After identifying the problems of the 1973 report, subsequent restoration plans, the exact location of the excavation, and the location of the coffin inside the tomb are estimated again. Thereby, the installation method of the wooden coffin is reviewed.
The coffins of the king and queen were estimated to weigh over 300kg. The entrance of the tomb is narrow and the size of the path and the burial chamber is confined; it is almost impossible to lift a heavy coffin and place it in the royal tomb.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view the tomb of King Muryeong as an “installation-style coffin” rather than a “carry-in-style coffin,” and it is believed that the bodies of the king and queen were moved from the temporary burial place and placed in a coffin that had already been placed in the burial chamber.
The coffin rings, which were supposed to be handles for carrying the coffin, are too weak to support the weight of carrying the coffin. This inference is supported through the headrest and footrest that have no signs of fixing against vibration during transportation, coffin timbers that have been cut and chamfered inside for easy assembly in a narrow room, and coffin nails that have no striking marks on the head.
The coffin is divided into three sections; the body is placed in the middle, and the burial goods are placed in the upper and lower sections. All artifacts outside the wooden coffin are thought to have been used for rituals in the burial chamber.
Thus far, there have been several studies on the mortuary practice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from the perspective of China's Confucian mortuary practice. However, examining the burial and ritual processes of the Baekje King through excavated artifacts showed that there is a significant difference from the traditional Chinese mortuary practice. The burial of the body in a pre-installed wooden coffin in the burial chamber, and the interior space of the coffin divided into a burial section for the body and spaces for burial goods are considered the traditional funeral practices of Baekje. Even though there is a very high possibility that Baekje was heavily influenced by the mortuary practice in China at the time, it is necessary to examine how readily it was adopted. The change of the burial system does not necessarily coincide with the change of the mortuary practice. In the future, it is hoped that a study of the mortuary practice of Baekje would comprehensively examine the changes in the rituals along with the changes in the buri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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