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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총 update

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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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3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873
사총
103권0호(2021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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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고려시대 승려의 사원 전보(轉補)와 요령(遙領)

저자 : 김윤지 ( Kim Yun Ji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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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꽤 많은 승려들이 여러 사원의 住持로 轉補되었다. 이는 국가의 사원 관리 방식이자, 승려의 자질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王師나 왕실의 출가자 혹은 고위 승계가 수여된 승려들의 경우, 주지로 임명된 사원에 거처하지 않기도 했다. 그들은 王命으로 개경에 머무르면서 지역 사원을 遙領했다. 요령은 일반 官制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관할지에 직접 가 않은 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중국에서 삼국시기에 처음 구사되어 당·송대까지도 꾸준히 보이지만, 고려 관제에서는 기록이 드물고, 오히려 사원 관리 과정에서 잘 보인다. 해당 승려들은 개경에 거처하면서 지역 사원을 '本寺'라 칭하고 요령했다. 사원 요령은 遙住로도 표현되었다. 그것은 승려의 주지 전보 원칙하에서 고위 승려에게 제공된 모종의 혜택이었고, 때로는 해당 승려의 역량에 기대어 지역 사원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적 방편이 되기도 했다.


In the Goryeo dynasty, the transference of quite many monks into many temples occurred. This was the way in which the country managed temples, but also the process in which the qualities of monks were recognized. Wangshi(王師) or monks from the royal family or those who received high grades, however, sometimes did not reside in temples appointing them as chief monks. The yaoling(遙領) of local temples was conducted by them, as they stayed in Gaegyeong(開京), according to the kings' commands. The yaoling(遙領), a concept used in bureaucracy system, was to govern jurisdiction without directly visiting it. Although it was first implemented in the period of Thee Kingdoms and continuously appeared until the Tang and Song dynasty, it was rarely recorded in Goryeo government organizations, but rather it often appeared in relation to the management of temples. The yaoling(遙領) of local temples was conducted by such monks who called them 'temple principal[本寺]'. The temple yaoling(遙領) was also expressed as yaozhu(遙住). It was a certain kind of benefit for high-ranking monks, under the principle of transference of monks as chief monks. It was also sometimes an administrative measure for managing local temples, by relying on the monks' cap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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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공민왕·우왕 시기 중방의 정치적 활용

저자 : 안주영 ( Ahn¸ Ju Yo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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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은 무신정변 이후 권력 기구화되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신정권 붕괴 이후, 중방의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했고, 그에 따라 사료상에 나타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공민왕·우왕 시기에 중방은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이는 무신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고 문무반의 交通이 활발해진 것이 그 원인이었다. 공민왕·우왕 시기에는 대내외적 요소로 무신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고려 전기에는 불가능했던 문무반의 교통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요인으로 중방은 정치적으로 활용될 소지가 높아졌다. 그 결과 공민왕 시기에는 국왕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왕 시기에는 신하인 최영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해 본인의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로 이용되었다. 이처럼 중방이 정치적으로 활용된 것은 공민왕·우왕 시기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으로, 고려 말 변화상을 드러내는 한 소재이다.


After the military coup d'etat(武臣政變), the Jungbang(重房) became a power organization and exerted great influence in politics. After the collapse of the atheist regime, Jungbang's political influence declined, and the number of appearances on historical records decreased. However,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恭愍王) and King Wu(禑王), Jungbang was used politically. This was attributed to the increased political status of the military nobility and the increased traffic of Mun-muban.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and King Wu, the need for the military nobility increased due to internal and external factors, and in the early Goryeo period, the traffic of the Mun-muban, which was impossible, occurred frequently. Due to these factors, Jungbang is more likely to be used politically. As a result, it was used by the king to achieve his political purpose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and by Choi Young(崔瑩), a servant during the reign of King Wu, to strengthen his argument and achieve his purpose. The political use of Jungbang is due to political and social changes during the period of King Gong-Min and King Wu, and it is a material that reveals the change at the end of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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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전기 김정(金淨) 저(著)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의 수록내용 성격과 가치

저자 : 김일우 ( Kim¸ Il-w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5-10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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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풍토록」은 金淨의 시문을 모아 엮은 『冲庵先生集』 권4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발췌·영인한 것이다. 이는 김정이 1520년(중종 15) 제주에 유배온 뒤, 1년여 사는 동안 누이의 아들로부터 제주의 풍토와 물산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 답장으로 써 보냈던 글이다. 그 내용은 제주의 기후·가옥·신앙·제주어·풍속·민정·지형·토산·서식 동식물·형승·유배살이와 그 처지로 꾸며졌다. 이들은 김정이 제주에서 유배살이를 하면서 직접 체험하거나, 혹은 얻은 견문의 사실에 근거해 썼다고 보인다. 「제주풍토록」은 최초의 제주풍토지임과 아울러, 16세기 전반 제주의 실정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로써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한편, 김정은 성리학적 소양이 깊고, 사후에도 유림으로부터 추앙될 만큼 그 사상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반면, 제주는 조선시대 내내 성리학적 이념이 사회문화로서 규범화가 덜 진척된 곳이라 하겠다. 이로써 김정은 16세기 전반 제주의 실정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게 된 면도 없지 않다고 헤아려진다. 또한 그는 문화 다원주의적 입장이 아니고, 성리학적 세계관과 유배살이의 관점을 기저로 하는 자신의 주관성에 근거해 제주사회를 바라보면서 얻은 그 인식을 『제주풍토록』에 수록했다고 보인다.


Jeju Pungtorok is an excerpt and photoprint from the contents contained in the fourth volume of Collection of Scholar Chungam's Works, a collection of poems and writings written by Kim Jeong. This is Kim Jeong's reply to the questions from his sister's son about Jeju's climate and local produce more than a year after he was exiled to Jeju in 1520 (the 15th year of King Jungjong's reign). The contents include Jeju's climate, house, religion, Jeju Dialect, customs, the life and sentiment of the people, topography, indigenous produce, the flora and fauna, places of natural beauty, and life of exile. Apparently, they were written based on the experiences and facts Kim Jeong gained and learned while living there in exile. Jeju Pungtorok is the first Jeju topography, as well as a vivid picture of Jeju's situa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As a result, its value as the historical materials can be regarded very high.
On the other hand, Kim Jeong was a man of deep Neo-Confucianism and thorough in his thoughts enough to be revered by Neo-Confucian scholars even after his death. On the contrary, Jeju Island was a place where Neo-Confucian ideology was less developed as a socio-cultural standardization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As a result, Kim Jeong is believed to have a rather negative viewpoint on Jeju's situa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He is also believed to describe the Jeju society from his own subjective perspective on the basis of Neo-Confucian worldview, not of the cultural plur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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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소통의 정치윤리: 필리프 6세 치세(1328~1350)의 정치 담론

저자 : 홍용진 ( Hong¸ Yong-j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4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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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했던 필리프 6세 치세(1328-1350)에 나타난 정치적 담론들을 살펴보기 위해 당대에 간행된 네 편의 정치윤리서의 특징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당대의 맥락에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이 저작들은 필리프 드 비트리가 저술한 『세 송이 백합관』, 장 드 비녜가 번역한 『테오도로스 팔라이올로고스의 교훈』과 『장기로 보는 귀족과 평민의 도덕에 대한 책』, 장 드 마리니가 저술한 『국가와 통치』이다. 그리고 앞의 두 저작은 필리프 6세에게, 뒤의 두 저작은 당시 세자인 장(장2세)에게 헌정되었다. 이 네 편의 정치윤리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 즉 1) 교회의 영향력에 대해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되어 가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 증대, 2) 정치적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한 정치공동체의 내재적 구성, 3) 왕권 신성화와는 무관한 정치적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국왕 주도권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물론 정치공동체의 자율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필리프 4세 치세의 정치담론들이 보여주는 왕의 신체에 각인된 정치체의 신성화, 또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표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1330-40년대 정치적 위기들로 짓눌린 프랑스 왕궁에서는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에 불과한 국왕과 정치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실질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이 저작들은 적어도 1350년대 이전까지 프랑스 왕정이 절대주의적 경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1350년에 즉위한 장 2세는 왕국의 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왕권이 어떠한 주장이나 담론에 찬성이나 반대를 했다기보다 의사소통의 장이나 텍스트 생산의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This paper introduces the characteristics of four texts on political ethics, published in the reign of Philip VI (1328-1350) whose political legitimacy was weak, to examine political discourses at that time, and looks at their meanings in the pol itical context. These four texts are Le Chapel des trois fleurs de lis written by Philippe de Vitry, Les Enseignements de Theodore Paleologue and Le livre de la moralite des nobles hommes et des gens de peuple sus le gieu des esches translated by Jean de Vignay, and L'Estat et le gouvernement, written by Jean de Marigny. The previous two works were dedicated to Philip VI, and the latter two, to the crown prince, Jean(Jean II). These have three things in common: 1) Growing interest in the political community, which was becoming increasingly autonomous from the influence of the church ; 2) Immanent formation of polity based on political communication ; 3) Royal intiative in political communication, far from sanctification of kingship. Of course, this interest in the autonomy of the politiy does not go toward the sanctification of the political body incarnated in the king's body, or the expression “chosen people”, as demonstrated by political discourses under the reign of Philip IV the Fair. Rather, in the royal court weighed by the political crises of the 1330s-40s, they stress that actual communication between members of the political society and the king, also as its member, should take place. In other words, these works show that the French monarchy was far from absolutist tendencies until at least the 1350s. Eventually, King Jean II, who ascended the throne in 1350, began to lead the reform of the kingdom. What is important here is that the kingship, rather than for or against any argument or discourse, began to take the initiative in the field of communication or text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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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금본위제, 민족주의, 그리고 초기 신자유주의 국제통화체제론: F.A. 하이에크의 『통화 민족주의와 국제적 안정』

저자 : 김승우 ( Kim¸ Seung W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간행물 : 사총 10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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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F. A. 하이에크의 『통화 민족주의와 국제적 안정』 (1937)을 통해 1930년대 배타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초기 신자유주의의 국제통화체제론을 제시한다. 하이에크는 당시 '야만적 유물'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금본위제의 실패 원인이 그것이 요구했던 국내적 희생이 아니라, 그것이 국제적 수준에서 실천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20세기 부분지급준비제라는 현대 은행업이 국가단위의 금융제도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중앙은행이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금본위제가 요구하는 국제적 의무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초국가적인 국제통화체제의 규율은 사라졌고 중앙은행들의 통화 민족주의로 인해 1930년대의 국제통화혼란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민족국가들의 변덕을 방지할 수 있는 초국가적 기구를 통해서 국제통화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의 국제통화체제론은 전후 시기 배제되었지만, 유럽단일통화인 유로화 체제를 통해서 구현되었다. 『통화 민족주의와 국제적 안정』에 관한 역사적 읽기를 통해 본 논문은 초기 신자유주의자들이 금본위제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실추된 금본위제의 지위를 회복과 전후 국제통화체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This paper sheds lights on the early neoliberal idea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as a counter-argument against the insular capitalism of the 1930s by examining F. A. Hayek's Monetary Nationalism and International Stability (1937). Hayek understood that the failure of the 19th-century gold standard, which had been accused of being 'a barbarous relic', was attributable to its malfunctioning on an international scale rather than the domestic sacrifice involved in its operation. He pointed out that the introduction of the fractional reserve system in the 20th century in nation-states had enabled the pursuit of independent monetary policy by central banks. In the absence of international mandate and disciplines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the incremental trend of monetary nationalism resulted in the international monetary disorder of the 1930s. Instead of a flexible exchange rates system, Hayek proposed restoring the gold standard with a transnational authority to prevent vicissitudes of nation-states. Whereas the neoliberal idea was marginalized in the postwar period, the single currency of the Euro substantiated Hayek's vision. With a contextual reading of Monetary Nationalism and International Stability,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early neoliberals sought to recover the tarnished reputation of the gold standard and provided a vision of the postwar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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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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