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사총 update

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5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893
사총
105권0호(2022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신라(新羅) 중고기(中古期) 서사(書寫)·각석(刻石)·입비(立碑) 전문가(專門家)의 분화(分化)와 서법(書法)·김석학(金石學)의 발달(發達)

저자 : 盧鏞弼 ( Noh¸ Yongpil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0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新羅 中古期 「明活山城碑」 '書寫人'의 '書寫'는 '書石'하여 碑文에 담길 文書의 文章을 書寫한 行爲 자체를 말한다. 이 '書寫人'의 略語가 '書人'이며, 「蔚珍 居伐牟羅碑」의 '節書人' 및 「丹陽 赤城碑」·「昌寧眞興王巡狩碑」의 '書人' 등이 그 實例로 이들은 書寫 專門家였다. 그리고 '書石'은 「蔚州 川前里 石刻」의 '書石谷'에서, 그리고 이 '書石'과 동일한 용어일 '石書'는 「丹陽 赤城碑」의 '石書立人'에서 찾아진다. 이때 '書石'·'石書'는 곧 '刻石'·'石刻'의 의미이니, 蔚珍 居伐牟羅碑」의 '刻人'은 刻石 專門家였다. 그리고 「蔚珍 居伐牟羅碑」의 '立石碑人' 部分과 「丹陽 赤城碑」의 '石書立人' 部分에 登載된 人物들은 立碑 專門家였다.
「蔚珍 居伐牟羅碑」 '節書人'·'刻人'·'立石碑人'의 존재는 書寫·刻石·立碑의 실무를 추진함에 있어서 그 所任의 分掌이 가장 合理的이고 效率的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을 立證해준다. 이러한 立碑 工程의 所任分掌 體系가 「丹陽 赤城碑」에서는 '書人'·'石書立人'의 2段階로 變化하였다, 따라서 「蔚珍 居伐牟羅碑」의 書人-刻人-立石碑人 3段階業務 分掌 體系가 「丹陽 赤城碑」의 書人-石書立人 2段階 體系로 簡素化되면서 效率的인 立碑 工程 推進 方式으로 轉換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新羅 中古期의 金石文 資料에 異體字가 流行하게 된 것은 佛經의 寫經이 流通되면서부터로, 이 寫經에 의해 中國에서 盛行하던 '魏碑體'인 '寫經體'가 受容되어 實用化되었다. 그래서 당시 文字學·訓詁學의 振興은 隸書·楷書를 포함한 이러한 '魏碑體'의 多樣한 書體로 筆寫된 하나하나의 漢字를 정확히 解讀하는 작업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는 高句麗에서 그랬듯이 愛用한 書籍에 字書로 『玉篇』·『字統』·『字林』이 包含되어 있었기에 可能했다. 특히 梁의 顧野王이 編纂한 『玉篇』은 楷書를 全的으로 整理하여 담고 있으므로 더욱 重視되었을 것이며, 게다가 『字統』 또한 異體字를 정리한 字書이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Transcription by transcribers at Myeonghwal Fortress Monument means the act itself of transcription for the sentences to be inscribed in monuments. Transcribers at Uljin Geobeolmorabi, Danyang Jeokseongbi and Changnyeong Monument Marking Visit of King Jinheung were real examples of transcription experts. And 'written monuments'(書石) could be found at 'Written Monuments Valley' of Uljin Cheonjeon-ri Monument Inscription' and monument writing (石書)-the same term of written monuments-at Erectors of Monument of Danyang Jeokseongbi. Here, 'written monuments' (書石) and monument writing (石書) mean inscribed monuments and monument inscription respectively, and inscribers at Uljin Geobeolmorabi were inscription experts. And figures registered as monument erectors at Uljin Geobeolmorabi and as erectors of inscribed monuments at Danyang Jeokseongbi were experts in monument erection.
The existence of transcribers, inscribers, erectors at Uljin Geobeolmorabi demonstrated that job division in carrying out transcription, inscription, erection was done in the most reasonable and effective way. The process of monument erection as such changed to two phases of transcription and erection at Danyang Jeokseongbi. Thus, job division system of three phases of transcription - inscription-erection at Uljin Geobeolmorabi changed to two phases of transcription-erection at Danyang Jeokseongbi, making an effective erection process.
This prevalence of variant letters a t epigraphic materials during the Middle Period(中古期) of Silla began from the distribution of copied Buddhist scriptures. This made one of Wei stele style prevailing in China then accommodated and used in Silla. So, development of graphonomy and exegetics then initiated from the work of exact interpretation of each Chinese letters copied in various letter styles of this Wei stele. As was the case in Goguryeo, this was possible because books favorably read at the time included Yupian and dictionaries of Jatong and Jarim. In particular, Yupian published by Gu Yewang during the Liang Dynasty illustrated completely-summarized regular script, making it highly appreciated. Furthermore, Jatong was also a letter book that summarized variant letters, making it ever more influential.

KCI등재

2세조 후반기 순행과 불교

저자 : 이정주 ( Lee¸ Jungj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3 (2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세조는 조선시대 군주 가운데 드물게 잦은 지방 순행을 한 임금이었다. 조선 초기의 태조와 조선후기의 현종, 영조, 정조 등도 지방 순행을 다녔지만, 세조처럼 여러 지역을 두루 방문하지는 않았다. 세조는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 강원도를 찾았으며, 세조 초년과 말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순행할 예정이었지만 준비상태의 미흡, 이시애의 난과 건강 악화가 겹치면서 이들 지역에 대한 방문을 포기한 바도 있었다.
세조의 지방 순행은 군사 훈련을 통한 정권 안정, 민정 시찰을 통한 민심 수습, 온천욕을 통한 건강 관리 등 다목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순행을 통해 요순시대의 정치를 재현하고자 했다. 세조대에는 하늘에 대한 직접 제사인 환구제도 거행되었다. 순행과 환구제는 세조가 중국황제의 의례를 모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조는 순행, 환구제를 통해 유사 황제체제를 구축했고,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했던 것이다.
세조대의 순행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 양상의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집권 전반기의 순행이 군사 훈련과 민정 시찰 등 실질적 목적 달성을 위해 진행되었던 것에 반해, 후반기에는 건강 관리와 성지 순례 같은 개인적 동기 때문에 순행이 이루어졌다. 세조는 집권 후반기 순행을 통해 불교계 및 일반 백성과 광범위한 직접적 접촉을 갖고자 했다. 이는 성리학에 바탕하여 사대부 문신 위주의 정치를 표방했던 전후의 조선시대 국왕들과는 매우 구별되는 특이한 통치 행위였다. 세조는 국왕의 대민 접촉이 거의 없던 조선시대 문신세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피지배층과 군사력에 바탕한 통치를 구상했고, 이를 실현할 방편으로 순행을 활용했던 것이다.
세조의 순행 양상은 동왕 12년(1466) 강원도 방문을 계기로 급속히 변화했다. 이전의 순행이 軍事와 民事的 현안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던데 반해, 강원도 순행은 온천욕과 성지 순례 같은 세조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안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세조는 방문했던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오대산에서는 문수보살을 친견했다. 앞서 동왕 8년세조는 상원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강원도 순행으로 인해, 세조는 당시 민중에게 인기가 있던 문수, 관음보살과 금강산의 많은 보살을 거느린 담무갈보살을 모두 만난 임금이 된 것이다.
세조의 보살 친견 이야기는 이를 축하하는 篆文, 頌文 등의 기록물과 설화, 전설 등의 비기록적 구전이란 형태의 양면으로 후세에 남겨졌다. 세조는 지방 순행, 보살의 출현과 친견, 이에 대한 신하들의 축하 행위, 보살 친견 사실의 민간 유포와 신화화, 그리고 인접국에 대한 외교적인 통보를 통한 공식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의 신성성을 조작하고 퍼트렸다. 순행을 통한 불교 접촉은 세조의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고도의 선전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King Sejo(世祖) was one of the few monarchs in the Chosun Dynasty who frequently made royal tours of local areas. Taejo in the early Joeson Dynasty and Hyeonjong, Yeongjo and Jeongjo in the late Chosun Dynasty also made royal tours of local areas, but they did not visit as many different areas as Sejo did. As long as his conditions allowed, King Sejo visited local areas in Gyeonggi-do, Pyeongan-do, Chungcheong-do and Gangwon-do. During his early days and latter days, he was also planning to make royal tours of Gyeongsang-do and Jeolla-do, but due to the insufficient preparation or his poor health and Lee Si-oe's Rebellion overlapped with each other, he had to give up his visit to these local areas.
His royal tours of local areas were made for different purposes, such as political stability through military exercise, control of public sentiment through inspection of people's conditions and health care through spa bathing. Through such a royal tour, he tried to reenact the policy of the Yao and Shun Dynasties. During his reign, Hwanguje (圜丘祭), meaning a sacrificial rite for heaven, was performed as well. Interestingly, both the tour and rite implied that King Sejo tried to imitate the formality of Chinese emperors. In other words, through these events, he established a royal system similar to the Chinese imperial system and displayed majesty and authority as a king.
By the latter days of his reign, his royal tour showed clearly different aspects. In the early days, his royal tour was mainly to accomplish such practical purposes as military exercise and inspection of people's conditions, but in the latter days, it was mostly for personal motives, such as health care and visit to sacred places.
Especially in the latter days, King Sejo seemed to make broad and direct contact with Buddhists and ordinary people through his royal tour. Such an unusual action of his reign based on Neo-Confucianism was very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kings of the Chosun Dynasty who mostly adopted Sadaebu (scholar-gentry)-centered policy. Rather than depending on the power of gentry officials in the Chosun Dynasty almost without kings' contact with the public, he attempted to shape his idea of reign based on far-reaching subjugated classes and military power, and as a means to put his idea into practice, King Sejo made the best use of royal tours.

KCI등재

3러시아의 한인 이주민 단속 정책과 그 균열 -프리아무르 주 총독 운테르베르게르 시기(1905~1910)를 중심으로-

저자 : 송영화 ( Song¸ Younghw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5-10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프리아무르 주 총독 운테르베르게르 시기 러시아 극동에서 실행된 한인 이주민 단속 정책이 균열했음을 밝혔다. 황화론에 기초한 단속 정책은 거주허가증 단속과 귀화자격 재심사 두 형태로 나타났다. 거주허가증이 없으면 집을 임차할 수 없었고 취업에도 제한을 받았다. 한인들은 거주허가증 발급을 늦추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며 당국이 거주 단속 강화를 통해 의도한 황인종 유입 방지 효과를 지연시켰다. 한편 러시아 지방 당국은 한인의 귀화자격 재심사를 위해 한인 가족명부를 조사하던 중 한인의 상이한 역법, 결혼, 작명방식 등과 마주치며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의 민족문화가 러시아의 법률제도가 충돌하고 있던 것이다.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거주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러시아 광산업자들과 함께 러시아 내무대신과 국가 두마 의장 등 러시아 중앙을 설득하고자 했다. 언론 활동을 통해 한인 이주민에 대한 러시아 지방 당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한인의 입장을 항변하기도 했다. 친일혐의에 관해서는 민족범주로서 한인을 일본인과 명확히 구분하며 황인종의 개념에 균열을 내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응은 한일강제병합 후 한인들이 러시아 국적취득을 통해 일본 신민화를 방어할 수 있는 단초를 사전에 마련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This paper examines the crack of the crackdown policy on Korean immigrants implemented by Priamur governor general Unterberger in the Russian Far East. The policy, which was based on the Yellow Peril, appeared in two ways: crackdown on residence permit and re-examining qualification of the naturalized. Without a residence permit, the house could not be rented and employment was restricted. Koreans delayed the issuance of residence permits or sometimes ignored them. It stalled the intended effect of preventing the inflow of yellow races by strengthening the crackdown on residence, which the Russian local authorities enforced. Meanwhile, it turned out that the Korean ethnic culture was conflicting with the Russian legal system. Russian local authorities suffered from encountering Korean calendar system, marriages, and naming system while investigating to re-examine qualifications of the naturalized. The Koreans, along with Russian mine operators with the same interests, tried to persuade the Russian central government, including the Russian Minister of Internal Affairs and Chairman of the State Duma, to extend their stay. Koreans criticized the crackdown policy through media activities. Regarding pro-Japanese charges, Koreans clearly distinguished themselves from Japanese as a ethnic category and tried to crack the concept of the yellow race. The series of these responses illustrate that they laid the groundwork in advance for defending against being Japanese subjects through the acquisition of Russian nationality.

KCI등재

4당(唐) 선종(宣宗)의 정국 운영과 환관(宦官) 문제

저자 : 류준형 ( Ryu¸ Junhyo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48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대중 연간 선종은 정치적 명분의 확대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가장 먼저 재상 세력의 인적 쇄신을 추진하였다. 관인 임명의 권한을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형태로 활용하여 이덕유를 중심을 한 기존 세력을 권력의 중심에서 대거 배제했다. 환관에 대한 선종의 통제 노력은 권신에 대한 조치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관직 임명권을 활용해 호군중위와 추밀사의 인선에 황제의 의지가 반영된 변화를 주어 환관 세력 내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환관 문제의 처리는 선종에게 있어 국정 운영의 중요한 현안이었다.
대중 초기 선종과 환관 사이의 관계 양상은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특히 대중 5년을 전후하여 당항 문제의 처리 과정에서 확인되는 환관들의 활동과 그를 배경으로 한 정책 시행의 성공은 황제의 통치가 실현되는데 끼친 환관의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준다. 환관에 대한 선종의 통제력이 일정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그런데 선종의 집권 중후기, 대략 대중 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환관에 대한 선종의 태도가 강경해진다. 이는 선종 스스로가 환관 세력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고 인식한 결과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환관들에 대한 선종의 영향력은 문제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환관 세력에 대한 통제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환관 세력을 통제하려는 선종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환관 문제의 처리 방식에 대한 선종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선종은 무력을 통해 환관을 주살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 재위 기간 동안 일정하게 이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환관들이 각종 활동을 통해 황제의 국가 통치를 수반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력을 통한 환관 문제의 해결은 현실적인 조건과 유리된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당 왕조의 점진적 쇠락이라는 대세적 흐름을 비가역적 상황으로 지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The reign of Xuanzong was one of the last periods of revival in the second half of the Tang dynasty, which attempted political improvements during the decline of the dynasty.
In order to strengthen the ruling power and maintain stable state management, Emperor Xuanzong first promoted the member renewal of the prime minister. In addition, by utilizing the anti-Li De Yu forces such as Baek Min-jung, basic conditions were established for the emperor-centered power management.
Political stability and expansion of political power could be further consolidated by resolving the problem of the eunuchs, who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process of Xuanzong's enthronement. Xuanzong's control efforts over eunuchs proceeded in the same way as measures against the prime minister. It was intended to weaken the solidarity within the eunuch forces by changing the selection of Hujunzhongwei and Shumishi by using the emperor's authority to appoint officials.
In this process, the relationship between Emperor Xuanzong and eunuchs in the early days of the Dazhong period was generally stable. In particular, the activities of eunuchs confirmed in the process of dealing with the issue of Dangxiang around the 5th year of the Dazhong period and the success of policy implementation against the background show that Emperor Xuanzong's control over eunuchs was effective at a certain level. Around the time of about eight years of the Dazhong period, Emperor Xuanzong's attitude toward eunuchs becomes more strict. Emperor Xuanzong recognized that he had placed the eunuchs under his control.
However, during the period of Dazhong, Emperor Xuanzong's control over the eunuchs was not perfect. Control over the relatively high-status eunuchs was incomplete.
The unsuccessful failure of Emperor Xuanzong's efforts to control eunuchs has to do with Emperor Xuanzong's perception of the way that the eunuch problem is handled. At that time, in a situation where the eunuchs were playing a role that accompanies the emperor's national rule through various activities, the way to solve the problem of eunuchs through military means was a method that was separate from the actual conditions.

KCI등재

5신라국 집사성첩에 보이는 해민의 이동 실태와 도해 허가 문서

저자 : 정순일 ( Chong , Soonil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91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에서는 『속일본후기』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는 836년 신라국 집사성첩에 주목하여 9세기 당시 동아시아 해역을 왕환한 해민(海民)의 이동 양태에 대해 고찰하고, 사람들의 국제 이동 시에 이른바 '도해 허가문서' 지참이 요구된 배경에 대해 논하였다.
먼저 제1장 '執事省牒이 전하는 海民의 이동 양상'에서는 집사성첩의 여러 사본에 대해 소개하고, 그 교정 본문과 해석문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해당 문서 속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도서지인', '백수랑' 등 해민의 실태에 대해 살펴보고, '공첩'의 휴행이 요구되고 있었던 당시 도해 양상을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제2장 '海商의 이동과 渡海許可文書의 지참'에서는 9세기 당시 상인의 활발한 국제 이동 양상을 각종 사료를 통해 확인하고, 도해시에 문서를 지참한 사례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리고, 도해 허가 문서의 구체적인 형태와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9세기 고문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실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끝으로 제3장 '생업집단의 은밀한 도항과 문서의 위조'에서는 앞서 살펴본 국제상인(해상) 이외의 생업집단에 유의하면서 그들의 도해 실태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을 파악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도해 허가 문서 및 관인(도장) 위조가 횡행했을 가능성에 대해 논하였다. 이때는 헤이안시대 후기~중세 등 비교적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후대의 사례와 비교검토하며 9세기 당시의 모습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Under this thesis, a contemplation is given on the style of journey by maritime people who traveled around the East Asian sea territories around the 9th century by paying attention to the diplomatic document of Jipsa-seong (the Chancellery Office of Silla) of Silla in 836 AD with its full context listed on 『Shoku Nihon Kōki』, and a discussion is made on the background requested for the so-called the 'voyage permission document' guideline when people traveled beyond international domain.
First of all, in Chapter 1, it introduces a number of copy of the document of Jipsa-seong and presents the calibrated main context and annotation. Furthermore, the status pf the maritime people, such as, 'people of islands', 'Baeksurang (means sea men)' and others, that are issues within the applicable documents has been learned, and it has pointed out the voyage trend at the time where the carriage of 'official document' is required.
Next, in Chapter 2, the active trend of international movement of the merchants in the 9th century is confirmed through various data, and contemplation is made on the cases that attached documents in voyage. And, in order to find out the detailed types and contents of the voyage permission documents, it is intended to approach to the status at the time through analyzing the ancient documents of the 9th century that are handed down to the present time.
Lastly, in Chapter 3, the characteristics displayed in its voyage status has been found out with the attention given to the livelihood group other than the international merchants (maritime trader) as shown earlier. Based on the foregoing, the possibility of prevalent forgery on the voyage permission documents and government seal (official seal) is discussed. At this time, a comparative review is undertaken with the cases of later generations where the relative data for later times of Heian Era and Medieval Era, and others is prevalent in a way of approaching to the appearance of the time.

KCI등재

6수신 교과서 『부녀감(婦女鑑)』의 텍스트성 -일본 근대 전환기 여성 표상의 다양성-

저자 : 박이진 ( Park Yi-jin ) , 박시언 ( Park Si-e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3-228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메이지 초기 간행된 『부녀감(婦女鑑)』에 내포된 표상 세계의 가능성에 관해 논의해 보았다. 우선 『부녀감』의 위상을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초기에 간행된 열전형식의 여자 수신 교과서와 비교해 검토했다. 그리고 편찬고본의 변천을 살피고 그 과정에서 갖게 된 예화 구성의 특징을 고찰했다.
그 결과 『부녀감』은 애초의 기획과 다르게 덕목 구성을 파기하였고, 또 서양 인물의 인용이 많은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개정교육령 이후 유교주의 도덕교육의 부활이라는 시대상과 관련해 생각해 볼 때 상당히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부녀감』이 궁내성 발간 교과서였기 때문에 내용 구성에 있어서 자유로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녀감』의 '이질적인 텍스트성'은 예화에 내포된 자발적 독해 영역과 관련해 주목을 요한다. 당시 일본 내셔널리즘의 자장을 벗어나 해석 가능한 표상 체계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녀감』은 기존 연구에서 평가한 것처럼 유교주의 덕목에 매몰된 형태도 아니고 양처현모 사상에 전적으로 수렴되는 교과서도 아니다. 이는 『부녀감』 속 예화를 보다 정치하게 검토할 필요성뿐 아니라, 『부녀감』의 세계관을 다양한 표상 체계로 연결해 볼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여학교의 교재로 폭넓게 사용된 『부녀감』은 당시 교육 기회가 확대되던 여성들의 세계관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순한 덕목의 학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륙을 횡단하는 여성들의 이동 등, 일본을 넘어 세계로 향한 여성들의 시선을 인도하고 그들의 성취를 보여줌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This paper discusses the possibility of the representative world contained in Hujokagami. First, the phase of Hujokagami was examined in comparison with the women's morals textbook published from the Edo period to the early Meiji period. Then, I investigated the changes in the compilation of the draft and consider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example story composition brought about in the process.
As a result, this paper clarifies that unlike the original project, Hujokagami abandoned the composition of virtues and cited many Western figures. This is a very special case compared to the trend of the times, such as the revival and strengthening of moral education based on Confucianism after the revised Education Ordinance at that time. Hujokagami may have been more free in the composition of the contents because of the textbooks published by the Imperial Household Ministry. However, the “unique textuality” of Hujokagami opened up the spontaneous reading comprehension area contained in the example stories. It contains an interpretable representational world that transcends Japanese nationalism at that time.
Hujokagami is not buried in the Confucian virtue as evaluated in the previous studies, nor is it a textbook that is completely converged on Good Wife & Wise Motherhood. This emphasizes not only the need to examine the example stories of Hujokagami in more detail, but also the possibility of rereading this book by connecting it to various representational systems. In addition, along with the expansion of educational opportunities for women, Hujokagami which was widely used as a teaching material for women's schools, also influenced women's view of the world at that time. It was not just about learning virtues, but also a material that turned the eyes of Japanese women to the world through the movement of women across continents and anecdotes of their fulfillment, and also made them dream of an independent life.

KCI등재

7중국 대운하의 역사 기억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저자 : 조영헌 ( Cho¸ Young-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9-281 (5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장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은 사실상 19세기 후반기에 막을 내렸다. 이후 1세기 이상 방치되어 있던 대운하가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를 부각하는 동시에, 얼마나 그 문화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증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른바 진정성(integrity)과 완전성(authenticity), 보호 및 관리 체계(protection and management requirements)에 대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세기 이상 방치되었던 대운하가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고 중국 정부는 이를 통해 무엇을 기대했을까? 이는 직접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2006년 이후의 상황 변화와 관련이 깊겠지만, 이러한 프로젝트가 가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특별히 대운하가 물자 유통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19세기 이후부터 다시 이에 대한 또 다른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21세기 초기까지, 대운하에 대한 인식전환이 발생하게 된 과정과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조운(漕運) 기능이 사라진 이후 대운하의 기능과 보존에 대한 인식전환이 발생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리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간략하게 대운하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운 기능이 사라진 19세기 이후 대운하의 기능이 파편화되는 과정을 살펴본 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대운하에 새롭게 부여된 2가지 기능과 함께 21세기에 진입한 직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활용되는 배경까지 검토하였다.


The long-standing logistics system of China's Grand Canal actually ended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Great Canal, which had been neglected for more than a century, was listed as a World Heritage Site at the 38th UNESCO World Heritage Committee held in Doha, Qatar on June 22, 2014.
In order to be listed as a World Heritage Site, it must basically emphasize "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 while proving how well its cultural value is preserved and how it will be managed in the future. The requirements of integrity, authenticity, protection and management requirements must be met.
So why did the Grand Canal, which had been neglected for more than a century, be listed as a World Heritage Site in 2014 and what did the Chinese government expect from it? This will be directly related to the change in the situation since 2006, when the World Heritage listing project began in earnest, but it is also necessary to consider the historical background behind the project.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find out the meaning and various intentions behind the 2014 World Heritage listing, analyzing the process of changing awareness of the function and preservation of the Grand Canal in terms of "history memory" and long-term historical context. Chapter 2 summarizes the history of three changes in memory of the Grand Canal, and Chapter 3 examines the process of forming a fourth image of the Grand Canal as the function of 'caoyun' has been fragmented since the 19th century. In Chapter 4, I examined how the two functions newly assigned to the Grand Canal changed the fourth imag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49. In Chapter 5 and the conclusion, the possibility of the success of the new fifth historical memory, which was formed when it was registered as a World Heritage Site, is examined.

KCI등재

8'오타쿠 현상'과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오타쿠론과 내셔널리즘의 부상을 중심으로

저자 : 장진호 ( Jang¸ Jinh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28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오타쿠'는 미디어 문화 혹은 서브컬처를 매개로 규정된 주체로서, 이와 관련된 현상은 일본에서 유래하지만 현재 국내와 아시아 각국에서만이 아니라 글로벌한 범위에서 등장한 현상이 되어왔으며, 최근에는 보다 진지한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타쿠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특촬), 피규어, 그 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으로 정의된다. 일본에서 전후 오타쿠 현상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왔는데 대표적 논자들의 입장으로는 1) 오타쿠 변호론/진화론, 2) 비판적 오타쿠론, 3) 정치사/사상사적 오타쿠론, 4) 포스트모던 오타쿠 분석/ 데이터베이스 소비론, 5) 오타쿠 섹슈얼리티의 정신분석, 6) 오타쿠 공간의 분석 등을 들 수 있다. 전후 오타쿠계 문화 혹은 서브컬처는 전후 일본인들의 '이중 망각' 즉 전시 경험에 대한 망각과 망각 사실 자체에 대한 망각에 균열을 내고 은유적으로 상기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전후 '이상의 시대'(1945-70년), '허구의 시대'(1970-95년), 그리고 특히 '불가능의 시대'(1995-현재)를 거치며, 이와 같은 오타쿠 서브컬처의 기능은 현재 은유에서 이탈해 보다 직접적으로 보수적인 내셔널리즘이라는 현실로 도피하는 측면이 강화되고 있다.


Otaku are subjects whose definition has been made through media culture or subculture. Otaku-related phenomena originated from Japan, but the phenomena now have been regional and even global ones, becoming the subject of serious academic researches. Otaku are the name of people who are engaged in various hobby-related activites, and those hobbies include manga, anime, videogame, personal computer, sci-fi, SFX film, figure and so on. Until recently, there have been key researchers and theorists engaging in studies of otaku and otaku-related phenomena in Japan. Their view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otaku-defending/evolutionary view, 2) critical otaku research, 3) intellectual-history approach, 4) postmodern view/database-consumption theory, 5) psycho-analysis of otaku sexuality, 6) otaku -space analysis. Post-WWII otaku subculture has functioned as a metaphorical reminder of history for Japanese people who have lived with 'double forgetting', which means forgetting not only wartime experiences, but also the fact that they have forgotten those experiences. Having functioned as such during the periods of ideal(1945-70), fiction(1970-95), and impossibility (1995-present) in postwar Japanese history, otaku subculture now seems to be going toward the terrain of reality of conservative nationalism with a less metaphorical face than before.

KCI등재

9중세 시칠리아의 문명교류 유형 분석 -9~13세기를 중심으로-

저자 : 김정하 ( Kim Jung Ha ) , 강지훈 ( Kang Ji Hoon ) , 김수정 ( Kim Su J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9-397 (6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일반적으로, 문명교류의 흐름은 그 유형에 대한 정의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시칠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차별성이 있다면 첫째는 문명교류가 한 시기의 변화를 제외할 경우, 고대부터 현대까지 하나의 일관된 유형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예외적인 교류유형이 이를 전후한 시대의 그것과 상반의 관계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시칠리아의 역사는 다양한 유형의 문명교류를 위한 실험실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중첩'과 '편해(片害)'의 교류유형으로 점철된 시칠리아의 역사에서 '접변'의 유형으로 정의될 수 있는 9~13세기 중반의 예외적인 역사를 분석하였다. 이 기간은 시칠리아 역사의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였다. 더 나아가 시대를 초월한 '지중해문명의 다인종 글로벌 정체성'을 이해하는 노력과 맞닿아 있었다.
중세 시칠리아의 역사에서 9~13세기는 이를 전후한 두 시기에 공통적인 중첩의 의미와는 다른 형태의 문명교류로 정의될 수 있다. 무슬림 시칠리아의 역사는 이베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관통하는 '열린 경계'의 형성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 기간에 시칠리아는 지중해-중동-인도양을 연결하는 방대한 무슬림 문명권에 편입되었고,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영역에서 시칠리아의 문명 유동성은 큰 변화를 기록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슬림 시칠리아의 시대는 무슬림과 시칠리아 주민모두에게 상리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노르만 시칠리아 시대는 무슬림 시칠리아의 역사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노르만은 북유럽 출신으로 유럽기독교문명권과 중동-아프리카 문명권 사이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에 피지배세력의 행정, 제도, 문화 그리고 경제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이유로 노르만 통치 세력에게 왕국의 건설은 곧 기존의 여러 문명요인을 상호간 이해의 원리를 바탕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 가문에 의한 시칠리아 통치는, 프리드리히 2세의 보편제국 지향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지만,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보편제국 이념은 시칠리아 왕국의 다인종 글로벌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그의 보편제국은 시칠리아에 현존하는 다양한 문화요인 간의 균형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본 연구가 추구하는 가치의 핵심은 중세 시칠리아의 다인종 글로벌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시칠리아 글로벌성(Globality)의 요인은 이미 고대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발전의 정도와 단계만이 중세와 달랐을 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글로벌 공존 패러다임의 해결책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시칠리아 문명교류의 역사가 우리 시대의 필요성에 소환되는 이유이며 명분이다.


Generally, the flow of civilization exchange does not show consistency across time in the definition of its type. In this regard, Sicily was no exception. However, if there is a difference, the first is that, if the one period is excluded, it is defined as one consistent type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day. The second is that the exceptional type of exchange shows a change in relationship opposite to that of the times before and after it.
The Sicilian history has been a laboratory for cultural exchanges of various types. This paper analyzes the history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3th century, which can be defined as a type of 'Interaction', in the history of Sicily, which has already been dominated by the exchange types of 'Overlapping' and ' relationship in which only one side continues to lose' since ancient times. This period was a time to confirm the dynamism of Sicily's history, and furthermore, it was in line with the effort to understand the timeless 'multi-racial, multicultural global identity of the Mediterranean civilization'.
The period from the 9th to the 13th century in the Sicilian Medieval history, the two different periods before and after this, can be defined as a form of Civilization Exchange that is different from the common meaning of 'Overlapping'. The history of Muslim Sicily coincides with the formation of an 'Open Area' that runs through Andalusia, Sicily and Jerusalem. During this period Sicily was incorporated into a vast Muslim civilization linking the Mediterranean-Middle East-Indian Ocean and Sicily's cultural mobility recorded the greatest change in politics, economy and culture. In this sense the era of Muslim Sicily can be interpreted as the meaning of 'Mutual Beneficial Relationship' for both Muslims and Sicilian residents.
The Norman Sicily period was established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history of Muslim Sicily. Norman was from northern Europe and built an independent kingdom between European Christian civilization and Middle East-African civilization. During this period, the administrative, institutional, cultural, and economic levels of the ruled were relatively high. For this reason, for the Norman rulers, the construction of a kingdom meant maintaining and developing the existing elements of civilization based on their 'reciprocal comprehension'. The rule of Sicily by the German Emperor family is also well reflected in Frederick II's orientation to a 'Universal Empire'. Although he was the emperor of the Holy Roman Empire, his attachment to the Kingdom of Sicily was unusual. Frederick II's idea of a universal empire was closely related to the multiracial global identity of the Kingdom of Sicily. Religiously, racially and culturally, his universal empire was oriented toward a balance between the various cultural factors existing in Sicily.
The core of the values pursued in this study can be found in a multiracial global society. The identity factor of globality, even in the case of the Mediterranean, has already been formed since ancient times. Only the degree and stage of development were different from now. The solution to the global coexistence paradigm we are facing can be found in history. This is the reason and justification that the history of civilization exchange in Sicily is recalled to the necessity of our time.

KCI등재

10카롤루스 왕조 초기의 변경정책 -에스파냐 변경백령(Marca Hispanica)의 탄생

저자 : 차승현 ( Cha¸ Seung 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9-438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카롤루스 가문은 불안정한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정세를 활용하여 730년대부터 셉티마니아 정복에 나섰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셉티마니아 최북단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했으며 피피누스 3세는 고트 귀족들과 개인적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고트 주민들에게 서고트 법 준수를 허용하는 유화정책을 통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셉티마니아를 병합하는데 성공했지만 778년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이베리아 반도 원정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해당 지역의 정복사업을 위임받은 루도비쿠스 1세는 군사 작전과 외교술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으며 그 결과 801년에 바르셀로나를 획득하고 820년경에는 에스파냐 변경백령의 경계선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이었기에 이 지역의 정세는 늘 유동적이었고 치안 및 행정 책임자인 백들이 독자적인 행동을 펼칠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카롤루스 왕조는 '아프리시오'를 통해 잦은 전쟁과 이교도의 억압으로 인해 늘어난 유랑민들을 정착시켜 평시에는 농업 노동력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력으로 활용하는 한편, 지역 주민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해당 사회에 왕권을 인지시켰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정치·군사적 팽창은 에스파냐 변경백령에서 종교문제를 야기했다. 당시 서고트 교회에 널리 퍼져있던 양자론은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통합 전략을 심각하게 위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카롤루스 왕조는 양자론을 에스파냐 변경백령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하고 신속히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공의회를 통해 양자론을 비판했으며 궁정학자들은 다수의 책과 서한을 통해 양자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 결과 카롤루스 왕조는 에스파냐 변경백령에서 정치·군사적 차원의 지배권과 더불어 문화적 헤게모니 또한 확립할 수 있었다.


From the 730s, using the unstable political situations of Iberian Peninsula, the Carolingian dynasty launched into the conquest of Septimania. Charles Martel attacked the major cities in the northernmost, and Pippin III acquired the Nothern Septimania by having close ties with the gothic aristocrats and using appeasement policy. After the tragedy of Roncesvalles campaign in 778, Charlemagne entrusted all Septimanian affairs to his son, Louis I. As the king of Aquitaine, Louis I gradually expanded the territory of the Frankish kingdom with military operations and diplomacy. In consequence, Barcelona was captured in 801, and the boundary of the Spanish March was settled about 820.
But as the furthermost frontier, the circumstances of Spanish Mach were always fluctuant and the ambitious counts could get out of control. Besides, there were many refugees fleeing from the frequent warfares and the persecution. In the situation, the Carolingians created a settlement program, called 'aprisio', to make them take root in the wasteland. As a result, they could acquire the labour and military power, and show off their authority to the local communities.
On the other hand, the politico-military expansion of Frankish Empire brought about the religious conflict in the Spanish March. The Adoptionism, held by the Gothic church, was could undermine the integration strategy of Charlemagne. This being so, the Carolingians regarded this doctrine as noxious and tried to eradicate in their new territory. For this purpose, the clergy and court scholars criticized the Adoptionists using various methods, like councils, epistles and sermons. Consequently, the Carolingian dynasty could establish cultural hegemony.

12
권호별 보기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