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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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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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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4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881
사총
104권0호(2021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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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 태종대 미곡 확보 정책과 호급둔전제(戶給屯田制)의 시행

저자 : 소순규 ( So Soonkyu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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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이후 1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재위한 태종은 집권 기간 동안 강력한 미곡 확보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 말 시행되었던 여러 조치들을 다시금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한 호급둔전법도 그러한 제도 중 하나였다. 본래 둔전은 변경 지역에서 군인들을 사역하여 경작하고, 그 수확물을 군량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호급둔전은 이와 달리 일반 민호에게 종자곡만을 대여해 주고, 가을에 종자곡에 비례하여 수확물을 거두는 제도로서 사실상 증세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전제개혁의 시행만으로는 재정의 안정성을 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양되면서 군량확보의 필요가 높아지자 태종은 이러한 호급둔전제를 전격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호급둔전제의 시행 양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일반 민호를 대상으로 한 것은 연간 4만 5천석 정도의 미곡을 수취하였다. 반면 공노비를 대상으로 한 호급둔전은 연간 30만석 내외로 추산된다. 이들 공노비들의 경우 1호당 종자곡을 분급한 것이 아니라 노비 1구마다 종자곡을 대여하였고, 수확곡의 상환 비율도 일반 민호에 비하여 매우 높았다. 이로 인하여 호급둔전제 시행 몇 년 만에 상당한 미곡 재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호급둔전제는 150만석 가까운 미곡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였으나, 이에 따른 민호의 부담 역시 상당하였기에 안정적인 재고곡 확보 이후에는 제도의 유지가 불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태종 9년부터 14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한해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로 인한 미곡 확보는 향후 조선전기 재정운영의 기틀을 닦는데 무척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King Taejong who was on the throne in about ten years after the Joseon Dynasty was founded, enforced the strong policy to secure the rice during the seizure of power. In this process, many measures that were enforced in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were carried out again, and the Hogeupdunjeonje this thesis aims to pay attention to was one of those systems. Originally, the Dunjeon was to make the soldiers cultivate the land in the frontier area, and to utilize the harvest as military provisions. Contrary to this, the Hogeupdunjeon was a system of lending seed grains to general households and then collecting the harvest in proportion to the seed grains in autumn, which was not different from tax increase in reality. The enforcement of land reform was not good enough to guarantee the financial stability. With the increased necessity to secure the military provisions after the consciousness of foreign crisis was raised, King Taejong introduced this Hogeupdunjeonje.
The enforcement aspect of Hogeupdunjeonje could be largely divided into two parts. The Hogeupdunjeon targeting the general households collected about 45,000 seoks a year. On the other hand, the Hogeupdunjeon targeting the public slaves collected around 300,000 seoks a year. In case of those public slaves, the seed grains were distributed not to each household, but to each slave while the repayment ratio of harvested grain was very high compared to general households. For this reason, a considerable amount of rice in stock could be secured within several years after enforcing the Hogeupdunjeonje.
Even though the Hogeupdunjeonje was working as a chance to secure the rice close to 1.5 million seoks, it was such a big burden to general households, so it was unnecessary to maintain the system after securing the stable amount of rice in stock. Thus, it was enforced for a short period of time from the 9th year to 14th year of King Taejong's reign. However, the securement of rice by this system must be importantly contributing to strengthening the foundation of financial operation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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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대일 전략(對日 戰略)-1593년 일본군의 한성 퇴각을 중심으로-

저자 : 이정일 ( Jeong-il Le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5-8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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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재개되는 과정에서 1594년 4月 일본군은 한성을 벗어나 남해안으로 철수했지만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지역의 일부를 기지화 하며 장기 주둔의 가능성을 보였다. 명군은 강화협상을 통해 왕자 송환 문제를 해결하고 임진강에서 교착 상태를 푸는 방법을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조선군의 교전을 금지해 철수하는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되 적절한 수준의 견제로 일본군에 대하여 합의 이행을 보장받으려는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한편, 강화협상에서 배제된 조선으로서는 자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일본군이 한성으로 퇴각하기 이전이나 퇴각한 직후에 궤멸시키는 전략이 최선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명군의 증파 및 합동 작전을 통한 신속한 타격으로 적을 격멸할 것을 명군에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주전론을 고수함으로써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집중하는 명군과 갈등을 빚기 보다는 조명 군사 협력의 구도에서 사안ㆍ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주전론을 재구성하고 필요 시 단독 작전도 수행하면서 독자적인 對일 전략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주전론은 단순히 조선의 對일 전략일 뿐 아니라 명의 對조선 전략 그리고 명의 對일 전략과 역동적으로 대립하고 교차하는 또 하나의 전장(戰場)이었다고 할 것이다.


This article charts how Chosǒn pursued an anti-Japanese strategy after the retreat of the Japanese armies from Seoul in May 1593. As for the Ming armies, the most practical method of breaking the deadlock of the battle front along the Imjin River in the first quarter of 1593 was a successful negotiation through which to let the Japanese armies in Seoul withdraw from the central part of Chosǒn. For this purpose, the Ming armies prevented its partner Chosǒn armies from chasing the enemies on the run. At the same time, the Ming armies temporarily deployed the newly dispatched troops only in the southern part of Chosǒn against a possible re-invasion by the Japanese armies after a rupture of the negotiation. As opposed to this two-track strategy, the Chosǒn court argued vehemently and yet logically against the Ming- Japan negotiation while persistently asking the Ming armies for a rapid military reinforcement in order to attack the retreating Japanese armies. And, the Chosǒn armies started conducting independent operations, if locally and on a small scale, against the Japanese armies in the southern part of their territory. With focus on the Chosǒn's anti- Japanese strategy as above, this study will not only offer an insight into the coexistence of cooperation and conflict in the Chosǒn-Ming military alliance against their common enemy, but also deepen our understanding of the Imjin War, o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s an international war in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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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심하전역(深河戰役) 당시 광해군의 '밀지(密旨)'와 대후금(對後金) 배후교섭의 변질

저자 : 장정수 ( Jang¸ Jung-s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35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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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深河戰役(1619) 전후 조선의 對後金 교섭의 추이를 살펴보고 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조선은 명의 東路軍에 예속되어 出兵했고, 패전 이후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했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과 명ㆍ후금의 외교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주로 도원수 강홍립이 받았다는 광해군의 '密旨'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에 반해 비변사의 역할이나 군신 간의 공감 혹은 갈등에 대한 흐름이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못했다. 본 논문은 심하전역 당시 조선군이 명 동로군에 예속되어 그들의 후미에서 행군한 경위를 살피고, 그것이 패전할 경우에 대비한 대후금 배후교섭과 상호 연관된 조치였음을 밝히고자 했다. 아울러 강홍립의 투항과 그의 처벌에 대한 광해군의 미온적 자세가 비변사와의 갈등을 촉발시켰고, 동시에 배후교섭이 기미책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여 '비밀교섭'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변질되었음을 논증했다. 이를 통해 명과 후금에 대한 외교정책이 擇一이 아닌,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vicissitude of Chosŏn's negotiations with the Later Jin on the context of the Campaign of Simha in 1619. During the campaign, Chosŏn dispatched troops to aid Donglujun (東路軍 ; Eastern Column Army) of the Ming, but after their defeat, Supreme Commander Kang Hongnip of Chosŏn surrendered to the Later Jin. Thereafter, this had a profound influence not only on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osŏn and the Ming, but also between Chosŏn and the Later Jin. However, the studies were concentrated on Kwanghaegun's "Secret Instruction (密旨)", which Kang was said to receive, while the role of Pibyŏnsa (備邊司 ; the Border Defense Council) and the interaction between Kwanghaegun and his ministers were not examined thoroughly. This paper attempted to show that the reason behind Chosŏn army stationed and marched behind the Ming Donglujun was related to the failsafe for Chosŏn's Behind-the-Scenes negotiation with the Later Jin. In addition, this article argues that Kwanghaegun's lukewarm attitude toward Kang Hongnip's surrender and his punishment triggered his conflicts with the Border Defense Council, and at the same time, the negotiations with the later Jin lost their function as a 'Loose-Rein Policy', turning into "secret negotiations" as a result. This contemplates that Chosŏn's foreign policy towards the Ming and the Later Jin was not the dilemma between the Ming or the Later Jin, but the ambivalence on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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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난과 북소 관계의 균열

저자 : 김재웅 ( Kim¸ Jae-wo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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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 관계는 북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간과해서는 안 될 키워드이다. 해방 후 북한의 국가 건설은 소련의 적극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소련의 고문들이 북한의 정치에 깊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소련의 시스템이 북한에 이식되었다. 그 시스템들이 현재까지 북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소련은 북한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대사관과 소련계 한인 정치인들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련의 창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북소 관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제 노선을 비판하고 평화공존 정책을 부과한 소련의 태도가 형제국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북소 갈등은 1950년대 이후 북한 정치에 역동성을 불러온 요인이었다. 1956년 8월경 김일성 개인숭배에 반대한 여러 정치인들이 그 갈등 관계를 이용해,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조선로동당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조선로동당 지도부는 이제까지 자신들을 후원해온 소련과의 결별까지 염두에 두고, 사회주의 강국들 틈 속에서 “주체”라는 이름 아래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1950년대 이후 북한의 국내 정치와 대외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북소 갈등의 배경과 전개를 살펴보고자 한다.


The relationship between North Korea and Soviet Union is a keyword that should not be overlooked in understanding North Korea's history. After liberation, North Korea's state-building was carried out with the active support of the Soviet Union. Not only Soviet advisers were involved deeply in North Korea's politics, but the Soviet systems were transplanted into North Korea in all fields including politics, economy, society, culture and so on. Those systems have survived in North Korea to this day.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DPRK, Soviet Union exerted great influence on North Korean society. The Soviet embassy and Soviet Koreans were used as channels for Soviet Union to exert influence over North Korea. However, after Stalin's death, conflicts began to develop in relationship between North Korea and Soviet Union. The attitudes of the Soviet Union, which criticized North Korea's economic policies and imposed a policy of peaceful coexistence aroused antipathy from North Korea.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is a factor that has brought about dynamism in North Korean politics since the 1950s. Around August 1956, various politicians who opposed the cult of Kim Il-sung took advantage of the conflict to confront the leadership of the Korean Workers' Party with the support of the Soviet Union.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development of conflict between North Korea and Soviet Union that had profound impacts on North Korea's domestic politics and external relations since the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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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원대 말기~북원(北元)의 중신(重臣) 카라장(哈剌章) 소고(小考)

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1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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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원대 후기부터 북원 시기까지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카라장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원사』 등을 포함한 기록을 보면, 원대 후기에는 카라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명의 인물들이 보이는데 정치적 행적의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는 2명의 카라장을 조금 더 상세하게 검토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원대 후기의 중서우승상 톡토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궁정의 핵심부에서 생활하다가 톡토의 폄출로 인해 좌천되었고, 이후 톡토에게 죄가 없음을 혜종이 인정하면서 조정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 중서성의 평장정사로 임명되어 大同에서 分省의 업무를 담당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이후의 행적은 확인하기 어렵다. 또 다른 카라장은 지추밀원사에 임명된 케식장 카라장으로, 이 인물이 북원 시기에 명과의 대립에서 주체적으로 활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톡토의 아들이 아닌 또 다른 카라장이 존재했으며 이 인물이 북원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재검토해야 한다.
지추밀원사 카라장은 혜종을 호위하여 대도를 탈출하였고, 북원의 중추 신료가 되면서 그 지위가 상승하였다. 1370년대 초부터는 요동 및 몽골 일대를 근거지로 세력을 형성하여 명과의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홍무제 주원장도 카라장이 북원의 핵심 신료이자 장수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1378년까지의 북원 정국은 아유시리다라 카안을 중심으로 명과 팽팽한 대립을 이어가는 상황이었고, 카라장은 북원의 힘이 유지되는 데에 있어서 한 축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378년에 아유시리다라가 사망한 이후부터 북원 내부의 단합이 점점 와해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1380년대에 접어들면 명이 더욱 공격적으로 북원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결국 북원의 핵심 군벌 중 한 사람이었던 나가추가 1387년에 명에 투항하는 등 북원은 점점 수세에 처하게 되었고, 카라장도 명의 군대에게 쫓겨 카라코룸까지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1388년에 명의 장군 남옥에게 본거지를 습격당하면서 카라장의 세력은 거의 상실되었고, 카라장의 아들 및 조카 등이 명에 투항하게 된다. 1388년의 전투 이후 카라장의 행적은 확인할 수가 없다. 카라장은 1388년 북원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This paper has examined the career of Qarajang(哈剌章), who appears in historical records from the Late Yuan to the Northern Yuan period. In the historical records such as Yuan History, several figures named Qarajang in the late Yuan Dynasty appeared. Two Qarajangs, which are notable in terms of political activities, could be examined in more detail.
One was the son of Toγto(脫脫). He lived in the core of the court since he was a child but was exiled due to Toγto's denunciation. Later, Huizong(惠宗) admitted that Toγto was innocent and summoned to the imperial court. Another Qarajang is captain of Kesik Qarajang, who was appointed to zhishumiyuanshi(知樞密院事). It can be confirmed that this Qarajang was active in confrontation with Ming during the Northern Yuan period.
Qarajang escaped from Daidu(大都) by escorting Huizong, and his status rose as he became the powerful bureaucrat of the Northern Yuan. From the early 1370s, he formed power base in Liaodong(遼東) and Mongolia and emerged from the battle against Ming. Hongwu(洪武) Emperor also recognized that Qarajang was a key member of the Northern Yuan. Until 1378, political situation of Northern Yuan continued a tense confrontation with Ming dynasty, and Qarajang was one of the pillars of maintaining the power of the Northern Yuan.
However, since Ayushiridara's death in 1378, unity within the Northern Yuan appears to have been increasingly disrupted. By the 1380s, Ming began to push the Northern Yuan more aggressively. Eventually, Naγaču who was one of the key warlords of Northern Yuan surrendered to Ming in 1387, and Qarajang run away to Qaraqorum. In 1388 after being attacked by Ming army, Qarajang's power was almost lost. Qarajang's sons and nephew surrendered to the Ming Dynasty. Qarajang's whereabouts after the battle of 1388 are unknown. Qarajang disappeared from history with the collapse of the Northern Yuan in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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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광해군의 세자책봉요청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외교 교섭-『事大文軌』 속 외교문서를 중심으로-

저자 : 정상호 ( Jeong¸ Sangh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1-248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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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이것이 종법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왕세자를 책봉한 뒤에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인정받는 절차를 거쳤다. 조선은 10여년 동안 명나라에 주청사를 파견하였지만 명나라는 계속해서 거부했고 결국 선조가 죽은 뒤에야 광해군을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지금껏 광해군의 세자책봉 교섭에 관해서는 대개 실록의 기사를 기초로 하였다. 본문에서는 事大文軌에 수록된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10여년 동안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섭의 과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광해군의 세자책봉 문제는 일방의 주장이 관철되거나 또는 조선이 요청을 하면 명나라에서는 허락 또는 거절을 하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논쟁을 주고받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싼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교섭은 사신을 파견하고 시작하여 회신을 받는 것에서 종결되는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의 화두를 중심으로 담론이 누적되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Gwanghaegun, the fifteen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was the second son of Seonjo. He was established as the heir at the era of Wanli emperor of Ming Dynasty. However, because of the inconsistency with primogeniture, the Ming Dynasty did not authorize Gwanghaegun as the crown prince. For over ten years, Joseon sent envoys to the Ming Dynasty several times to acquire the Ming emperor's approval to inaugurate Gwanghaegun as the heir of Joseon Dynasty. However, all of them returned without success. However, it was only after King Seonjo's death (1608) that the Ming Dynasty officially appointed the successor Gwanghaegun as king of Joseon Dynasty. Currently, research on the issue of Joseon Dynasty's efforts for acquiring Ming's investiture of Gwanghaegun is insufficient. This article will elaborate on the process of Gwanghaegun's investiture by using the historical source, Sadaemungwe (事大文轨, The Exemplary Writings of Serving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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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레고리우스 개혁 이전 교권과 속권의 관계 : 나르본(Narbonne) 대주교와 부백의 사례

저자 : 차승현 ( Cha¸ Seung 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9-29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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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왕권이 점차 약화되다가 사실상 소멸해버린 10세기 남부 프랑스에서는 백이나 부백들이 혈족 또는 측근을 주교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고 이를 통해 교회의 토지와 여타 권리들을 장악했다. 또 이들에 의해 임명된 성직자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종 교회관직을 부여하고 교회 재산을 임의로 활용했다. 이처럼 고위 성직자들이 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속세와 교회의 경계선은 매우 흐릿했다.
10세기 초에 등장한 나르본 부백 가문은 가족 형태를 봉건사회에 적합한 부계 위주의 수직적 구조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으며, 권력의 원천인 토지와 여타 특권들을 빠르게 늘려가면서 주군이었던 툴루즈 백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나르본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던 이들은 주교 임명권을 획득하여 가문 구성원을 대주교 자리에 앉히고 교회를 직접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19년 세르다니아 백 가문 출신의 기프레드가 성직매매를 통해 대주교 자리를 획득하면서 나르본 교회는 부백 가문의 통제에서 벗어 났다. 기프레드가 카롤루스 군주들이 작성한 특허장을 근거삼아 독자적인 권력 확립에 나서는 동시에 다수의 공의회들을 통해 나르본 부백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자 대주교직을 가산으로 간주하던 부백 가문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수십 년에 걸쳐 대주교와 부백의 충돌이 발생했다. 1059년 아를 공의회에서 기프레드의 비리와 만행을 고발하여 대주교직을 되찾으려던 부백 베랑제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베랑제 사후에는 바르셀로나 백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툴루즈 백이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나르본을 통제하기 위해 대주교의 손을 들어주고 부백 가문이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면서 기프레드는 확고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In the 10th century, the royal authority of the Carolingians had weakened and ceased to exist in Southern France. As a result, the counts and viscounts could appoint relatives or close friends as bishops or abbots, thereby seizing the land and other rights of the church. Also, these clerics granted various church offices to their family members and used church property arbitrarily. Thus the highranking clergy maintained their secular mentality, and the line between the world and the church was very blurry.
The viscounts of Narbonne, which emerged in the early 10th century, succeeded in transforming the family form into a vertical structure suitable for feudal society. By the means of the land and other privileges, they obtained the power and became independent from the count of Toulouse. Also, using the right to appoint the archbishop of Narbonne, they controlled the Church directly.
But Guifred, son of the count of Cerdanya and simoniac, obtained the position of archbishop in 1019 and the Narbonne Church was released from the control of the viscount family. To establish his own power and be free from interference of the viscount, Guifred used the edicts drawn up by the Carolingians and held the councils, whereas the viscounts of Narbonne considered the archbishopric as their family fortune. In consequence, a clash between the archbishop and the viscount ensued for several decades.
In 1059, the viscount Berenger attempted to dethrone Guifred by accusing of corruption and brutality at the council of Arles, but his efforts went in vain. After his death, the count of Toulouse, who was concerned about the expansion of Barcelona, interfered in the affairs and sided with the archbishop to control Narbonne. Furthermore, as the viscount family was weakened by infighting, Guifred succeeded in establishing a firm grip on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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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70-1980년대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입양 경험과 초국적 정체성-< 한국뿌리(Racines Coréennes) >의 입양 증언을 중심으로-

저자 : 문지영 ( Moon¸ Ji-yo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1-332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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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에서 국제입양은 부정할 수 없는 유산이다. 그동안 국내의 일반이주 및 디아스포라 연구는 한인이주 양상을 포괄적으로 다뤄왔던 반면, 한인여성 이주와 젠더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거나 가시화하는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이주나 결혼이주 같은 일반이주에서 볼 수 있듯 국제입양에서도 여성의 수와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현대사와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에 잊히고 배제되어온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70~1980년대에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입양 경험과 정체성 형성과 초국적 정체성 수용, 그리고 그들의 '엄마 되기' 과정을 통해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한인입양인협회 < 한국뿌리(Racines Coreennes) >의 정기발행지인 「Hamkae(함께)」에 실린 입양여성의 자필 증언과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코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관련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henomenon of international adoption in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s an undeniable legacy. While the studies of general migration and diaspora in Korea have dealt with the pattern of Korean migration in a comprehensive way, the studies of historically identifying or visualizing the relation between Korean female migration and gender have not been properly conducted. As seen in general migration such as labor migration and marriage migration, international adoption also shows a 'feminization of migration' phenomenon that the number and presence of women remarkably increases. In this regard, there is needed a multi-faceted research to historicize the experiences and memor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who have been forgotten and excluded from Korean contemporary history and transnational migration histo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historicize the lives and memor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through the adoption experiences and transnational identity formation of Korean women who were adopted to France in the 1970s and 1980s, and their process of 'becoming a mother'. To this end, we will analyze the contents of interviews and handwritten testimon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published in Hamkae, a regular publication of the French Korean Adoptee Association < Racines Coreennes >. Through this study, by listening to the real voices of Korean female adoptees in France, it will be possible to examine transnational migration history from various angles and contribute to broadening the horizons of related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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