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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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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9-4446
  • : 2671-58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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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5)~106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901
사총
106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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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내현 ( Kwon Nae-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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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한 조선은 사행의 호송과 운송 지원을 평안도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대상 지역은 평안도 내부뿐만 아니라 여진의 위협이 상존하였던 요동 일대를 포함하였다. 호송과 운송 관련 제도는 정비 과정에 있었고 관련 인력의 확보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반면 사행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빈도도 높았다. 평안도는 변경 방어선을 제외한 지역의 군사들로 호송과 운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15세기 후반 여진과의 대규모 충돌 이후 호송 부담은 감소하였다. 반면 16세기 무렵부터 대명 무역이 확대되면서 운송 부담은 많이 늘어났다. 군사적 부담이 완화되고 조선 내부의 경제적 욕구가 확대되면서 무역품 운송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초점이 이동한 것이다.


Joseon dynasty, which strengthened diplomatic relations with Ming, made Pyeongan province in charge of escort and transportation support for the envoys. The target area included not only interior of Pyeongan province, but also the area of Liaodong, where threat of Jurchens existed. The escort and transport-related systems were in the process of maintenance, and it took a lot of time to secure related personnel. On the other hand, size of the envoys was getting bigger, and number of times was frequent. Pyeongan province made soldiers in the area other than the border defense line responsible for escort and transportation. After a large-scale collision with Jurchens in the late 15th century, the burden of escort decreased. On the other hand, as trade with Ming expanded from the 16th century, the burden of transportation increased significantly. As the military burden of Pyeongan province was eased and economic desires within Joseon expanded, the focus shifted to an increasing burden on the transportation of trade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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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형식 ( Lee Hyoung-si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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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자신의 조선통치 업적을 후세에 전하려는 조선총독부관계자들과 연구 자료를 제공받으려는 20대의 학생들이 모여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결성했다. 조선근대사료연구회는 20대의 청년에서 70대의 노인까지, 비전향 공산당원부터 보수적인 조선총독부관료까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남한(재일유학생)과 북한(총련계),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하는 사상ㆍ신조ㆍ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기묘한' 연구회였다. 조선근대사 수업이 없었던 당시 사료연구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야마베 겐타로를 비롯한 연구자들을 선생으로 삼고 우방협회가 제공하는 풍부한 기록 사료와 살아있는 자료인 조선통치관계자들과의 육성 인터뷰를 자양분으로 조선근대사를 개척하면서 연구자로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조총련 계열 참가자가 연구회에서 이탈하고 연구자로 성장한 미야타, 가지무라 등 학생멤버들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등 사회적 발신을 높여가면서 조선통치ㆍ민족운동,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우방협회와 학생들 사이에 인식차가 확대되어 갔다. 게다가 양자를 중재하던 호즈미 신로쿠로 이사장이 건강이 악화되어 연구회를 빠지게 되자 동상이몽의 오월동주의 균열은 커져만 갔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자 평소 조선근대사료연구회 운영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우방협회 이사들은 학생들을 배제하고 1965년 5월부터 조선통치관계자들만이 참여하는 조선문제연구회를 조직했다. 사료 연구회가 조선통치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한 것이라면 조선통치 관계자가 주도한 조선문제연구회 기록은 조선통치 비판에 대한 자기변명이자 미화였던 것이다. 우방협회는 사료연구회와 조선문제연구회에 참여한 조선통치관계자들의 녹음기록 가운데 일부를 1966년부터 우방시리즈로 출판하였다. 이렇게 출판된 우방시리즈는 조선통치 비판에 대한 자기 변명이자 미화로 점철되었다.


The Joseon Modern Historical Records Research Society was a joint research society consisting of those in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that intended to hand down their achievements of ruling Joseon to generations to come, the students in their twenties who wanted to get research data, and researchers. From the old persons in their seventies to the young people in their twenties, from not-converted communists to conservative official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with those who are ruling and ruled, South Koreans(students studying in Japan) and North Koreans (Chongryeon societies), and Japanese and Koreans together, it was literally a 'curious' research association of people with different ideologies, creeds and nationalities. Since there were no classes on the modern history of Joseon, the students participating in the historical records research association made researchers including Yamabe Kentaro their teachers, cultivated the modern history of Joseon, and grew as researchers with the plentiful historical records offered by the Ally Association and the interviews with those in relation to ruling Joseon, a vivid material, as nutritive elements. Yet, while the participants in the affiliation of Chongryeon societies left the research group, the student members who had grown as researchers, such as Miyata and Kajimura, joined the movement against Joseon-Japan talks expressing more to the society, and the differences in the understanding of the rule over Joseon, national movements and the conference between Joseon and Japan became bigger between the Ally Association and the students. Moreover, as the health of the chairman of the board, Hozumi Shinrokuro, who had intervened the two, became worse and as he came to withdraw from the research association, the crack of Ohwoldongjubitter(enemies in the same boat) of Dongsangyeemong (having different thoughts) became bigger. When the basic treaty between Joseon and Japan was signed in 1965, the directors of the Ally Association, who were usually unfavorable to the management of the Joseon Modern Historical Records Research Society, organized the Joseon Problems Research Society in May, 1965, in which only those in relation to ruling Joseon participated, excluding the students. While the historical records research society was somehow aware of the criticism of the ruling over Joseon, the records of the Joseon Problems Research Society led by those related to ruling over Joseon were self-justification and beaut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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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장훈 ( Sohn Jang-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2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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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은 도시 사회에서 정치적 청산작업을 수행했다.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上海市 기층 里弄에서는 반혁명분자 숙청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진압반혁명[鎭反]이 전개되었다. 이 진반의 핵심은 반혁명분자를 규탄하는 공소대회였으며, 공소대회의 목적은 반혁명분자들에게 주민들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해시 기층에서 진반을 책임지고 있는 숙반위원회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주민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고발에 나서도록 설득했다. 공소대회는 그 내용은 물론 식순과 의식까지 세밀하게 기획되었으며 상해시 정부는 그 과정에서 진반을 책임진 리농의 간부들에게 세부적인 지도방침을 하달해주었다. 1954년 리농에서 또 다른 정치적 숙청 작업인 整頓이 진행되었는데 당-정부는 이 때 표적인 重點分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진반 운동을 경험하며 자신들을 공격할 당국의 전략을 숙지한 중점분자들은 당-정부가 주로 의존하는 정권의 동조자[積極分子]들을 회유하고 위협했다. 이에 맞서 당-정부는 적극분자들을 보호하는 대신 관용의 전략을 동원해 중점분자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당-정부가 리농에 파견한 공작대는 자백해온 중점분자들의 죄를 사면해주었고 이 용서의 현장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전략은 정돈이 앞선 진압 반혁명 운동과 다르게 사소한 부정 행위 및 정치적 오류마저 단속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1954년 정돈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Chinese Communist Party (hereafter CCP) began rectification project right after establishment of People's Republic of China (hereafter PRC). During Korean War, suppressing counter-revolutionaries[zhenfan] was carried out in Shanghai neighborhoods. The main project in the campaign was accusation meeting. The goal of accusation meeting in neighborhood was to remove mass's fear about counter-revolutionaries. Cadres in neighborhood visited every households to persuade them to accuse counter-revolutionaries. And accusation meeting was thoroughly designed to arouse rage against suspect.
In 1954, another rectification[zhengdun] was undertaken in Shanghai neighborhood. During Zhengdun, main targets[zhongdianfenzi] resisted against party-state. They, who learned that CCP had induced residents to come forward as informants or accuser in zhenfan, warned their neighbors not to cooperate with party-state. Work team sent by people's government tried to confront with the resistance through strategy of paternalism. For the targets with lesser charge, the punishment was exempted and the exemption was announced in public. This 'generosity', one of the main political strategy of CCP, could be used in 1954 rectification in general because it accused far broader and minor political crime than counter-revolutionary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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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채준형 ( Chae Jun Hy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5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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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사회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공학자들은 사회 속에서의 공학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고 그 결과 과학적 방법에 의한 사회의 재조직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1920년대까지 공학자들이 생각했던 사회 속의 공학의 역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이었다. 1차 대전 이후 중국의 공학자들은 공학은 과학기술의 한 분과로서 예술, 정치 등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국가의 성쇠는 사회 각 부문이 조화롭게 기능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1930년대의 위기는 공학과 과학 기술을 통해 사회를 급속도로 개조하고자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에 기초한 급속한 사회 개조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은 중국의 영향력 있는 과학 엘리트들의 호응을 얻었다. 1930년대에 기원한 이러한 주장은 1960~70년대 더욱 구체화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 개조와 경제 발전을 위한 정당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Engineers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hina's economic and social modernization since the 1930s actively sought the role of engineering in society, and as a result, argued for the reorganization of society through scientific methods. However, this was a fundamentally different perception from the role of engineering in society that engineers thought until the 1920s. After World War I, Chinese engineers believed that engineering as a branch of science and technology performed different social functions like art and politics. The rise and fall of a nation depended on the harmonious functioning of each sector of society. The crisis of the 1930s gave rise to claims to rapidly transform society through engineering and technology. The claim that rapid social transformation based on science can be achieved through a new form of dictatorship had been well-received by China's influential scientific elites. This argument, which originated in the 1930s, became more concrete in the 1960s and 1970s, and provided a justification for the social transforma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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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주영 ( Oh Ju Young ) , 박이진 ( Yi-jin Par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7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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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을 부정하며 정부 사이트 및 지자체 사이트 등에서도 독도를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일제 시대의 여러 문제들과 더불어 독도 문제를 혐한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독도 문제에 대한 민간 활동의 일본 정부의 예산 등의 실태 및 대응 방침을 살펴보고 검토. 둘째, 독도 문제에 대한 민간 차원의 활동 현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부와 민간인의 인식 변화 및 활동의 연계성을 분석하고 향후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영토 관련 정책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변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독도처럼 자국민의 왕래가 계속되고 있고, 정부의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는 영토에 관한 정책은 일본 내 민심 또는 일부 우익세력의 활동으로만 지지되고 있어 그 지속력 및 전파력이 정부의 입김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나 K-CULTURE 가 전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문화권 내에서는 정부의 정책과 민심은 그야 말로 같은 곳을 바라보기가 더욱 힘들어 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 내 젊은 층은 대다수가 독도를 자국의 땅으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한국과의 분쟁보다는 적극적인 교류활동을 통한 우호적 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분위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속되는 일본의 도발 속에 정부의 영토문제 관련 활동에 대한 개선 요청 및 학생 및 젊은 민간차원의 활동은 늘어나고 있고, 학생 및 일반인들의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관련국들의 정책 추이 및 그 근간에 대한 분석을 민간의 활동의 꾸준한 조사를 통해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As for the Dokdo issue, the government and local government sites have also denied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and claimed the islets as their own land, while right-wing forces in Japan are using the Dokdo issue as a tool for denunciation.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first examine and review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Japanese government's budget and countermeasures against the Dokdo issue. Second, it is to summarize the current status of private-level activities on the Dokdo issue. Through this, we intend to analyze the link between changes in perception and activities between the government and civilians and examine future trends.
Japan's territorial policy is changing differently and similarly. It was confirmed once again that the sustainability and propagation power of the government cannot be irrelevant to the influence of the government, as the policies on the territory, which continue to flow like Dokdo in Korea, and the government's influence, are supported only by public sentiment or right-wing forces in Japan.
In particular, in the current culture, where K-CULTURE is strong around the world, the government's policies and public sentiment are becoming more difficult to see the same place. In fact, most young people in Japan do not even recognize Dokdo as their own land, and it is easy to find an atmosphere that hopes to become a friendly country through active exchange activities rather than disputes with Korea.
Japan's continued provocations, the government's requests for improvement in territorial activities and activities at the student and young private levels are increasing, and students and the public are increasingly interested. We must continue to analyze the policy trends and fundamentals of the countries concerned through a steady investigation of private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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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상덕 ( Lee Sangd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9-20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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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스마(miasma, 오염)는 19세기 중엽 콜레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었다. 장기설이라고 번역되는 이 미아스마 이론은 나쁜 공기, 즉 미아스마 때문에 유행병이 돈다고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미아스마 때문에 나쁜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는 전염병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 작가들은 나쁜 운명의 원인이 되는 미아스마와 그 영향, 그리고 이를 극복하거나 후대에 이어지지 않도록 단절하는 방법 등을 고민했다. 이들에게 있어 미아스마는 피를 흘린 경우, 즉 살해가 행해진 경우에 생겼다. 이는 피로써 복수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연속된 미아스마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미아스마는 단절되어야 했다. 이는 정화의식을 통해서 신에 의해 가능했다. 또한, 인간적으로는 추방의 방법이 있었다. 이와 같은 미아스마의 이해는 개인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용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미신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오염을 정화시켜 병을 치유하려고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치유의 합리적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간질과 같은 병도 신이 내린 병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발병의 상황과 병의 진행과정, 환자의 체질 등을 살펴보면 그 원인을 알고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미아스마 이해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미아스마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완전히 극복되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Miasma (pollution) was a concept used to explain the cause of cholera in the mid-19th century. This miasma theory explained that epidemics are caused by bad, or polluted air. The ancient Greeks also believed that Miasma was the cause of bad luck. It was a comprehensive concept, including infectious diseases. Tragedy writers such as Aeschylus, Sophocles, and Euripides pondered on the concept of miasma, the cause of bad fate, its influence, and how to overcome or bring an end to it so that it would not be passed on to future generations. For them, miasma occurred when blood was shed, that is, when a murder was done. This was something that had to be avenged with blood, but a continuous chain of miasma was to last forever. So miasma had to be cut off. This was made possible by gods through purification rituals, or by humans through expulsion. Such understanding of miasma seems to have been applied to healing individual ailments. People tried to cure their ailments by purifying their contamination by superstitious methods. Hippocrates tried to suggest a rational method of healing. He argued that even a disease such as epilepsy, which seemed impossible to cure, should not be regarded as a god-given disease The cause could be understood and treated by examining the condition of the onset, the course of the disease, and the constitution of the patient. This challenged the traditional Greek understanding of miasma, and it was the starting point of a new understanding of the Hippocratic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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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선자 ( Yun Sun-j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4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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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중에 거행된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개선식은 근대 개 선식의 발전과 그로 인한 근대 권력 개념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르네상스시기 고대의 부활과 더불어 개선식도 부활하였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선전하기 위해 이 개선식을 정치적으로 차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개선식은 로마의 '제국적, 군사적' 개선식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전쟁 시기 외국 군주, 특히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개선식에 의해 이것이 가능해졌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루이 12세는 제노바와 밀라노에서 여러 번 개선식을 거행했고, 후기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들의 개선식에서 루이 12세와 카를 5세는 로마의 카이사르, 혹은 유피테르나 마르스 신에 비유되었고, 로마 개선식을 모방한 개선마차와 개선아치 등이 등장했다. 당시 유행한 신플라톤주의와 비트루비우스, 웅장함의 이데아 등이 강조되었다. 무엇보다 개선식에 로마의 임페리움 개념이 도입되었고, 이것은 근대 초 강력한 왕권을 정당화했다.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이탈리아 개선식에서 표현된 임페리움은 이후 장 보댕의 주권 개념이 탄생하는데 기여하였다. 결국 이 개선식들은 주권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e triumphs of Louis XII and Charles V in the Italian Wa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triumph and the birth of the modern concept of power. Along with the renaissance of antiquity during the Renaissance, ancient triumphs were revived. The monarchs of Italian city-states used this triumph politically to promote their power and glory. However, their triumph did not fully embody the Roman 'imperial and military' triumph. This was made possible by the triumphs of foreign monarchs, especially Louis XII and Charles V during the Italian Wars. At the beginning of the Italian War, as France won the war, Louis XII held several triumphs in Genoa and Milan. In the latter days, Charles V of the Holy Roman Empire held a triumphs. In their triumphs, Louis XII and Charles V were compared to the Roman Caesar, or Jupiter or Mars, and triumphal chariots and triumphal arches imitating the Roman triumph appeared. Neoplatonism, Vitruvius Aesthetics, and the idea of magnificence, which were popular at the time, were emphasized. Above all, the concept of 'imperium' in Rome was introduced in their triumphs, which justified the powerful kingship in the early modern period. The imperium expressed in the triumphs of Louis XII and Charles V contributed to the birth of Jean Bodin's concept of 'sovereignty'. Finally these triumphs can be seen as 'artistic expressions of 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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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성곤 ( Hong Seongg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9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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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월 초 루스벨트는 웰스에게 독일의 봄 공세가 시작되면 전쟁의 결과는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하면서 평화의 가능성을 타진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독일과 소련이 체결한 독ㆍ소 불가침 조약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평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나치 독일과 협상을 통한 평화를 모색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웰스는 1944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에서 독일 방문의 목적을 숨기고 있다. 특히 미국의 평화 중재의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동유럽에 영토적 양보를 하고자 한 프랑스와 영국의 의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웰스는 유럽 순방 보고서에서 무솔리니와 달라디에, 심지어 체임벌린 총리도 안보가 보장되고 평화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히틀러와 거래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한다. 사실 웰스가 유럽 방문을 마치고 루스벨트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평화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3월 12일 소련ㆍ핀란드 겨울전쟁이 종결됨으로써 자신의 평화구상이 '현실성'을 상실했다고 인식하고, 평화의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즉 핀란드 겨울전쟁이 종식됨에 따라 소련을 공격할 빌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루스벨트가 4대 강국들 사이의 타협을 촉구하는 평화적 해결책인 '허망한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웰스가 순방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안보와 군축을 제공함으로써 유럽의 강대국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체임벌린이 말한 '기적'일 것이다. 체임벌린이 인식한 기적은 치아노가 제안한 해결책, 즉 제2의 뮌헨협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은 웰스의 평화 타진 과정에서 전쟁과 혁명의 논리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웰스는 전쟁과 혁명의 논리로 평화협상의 필요성을 히틀러에게 역설했다. 괴링 또한 이 문제를 강조했고, 치아노도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가 이익을 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탈리아가 소련의 침략에 대항하는 방파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즘 타도의 기치하에 '서구 안보' 동맹을 결성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반소련 십자군의 기치하에 전쟁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리는 것이 루스벨트의 평화 특사의 '숨겨진' 목적이었다.


In early January 1940, Roosevelt emphasised the necessity of peace negotiations to Welles in order to avoid the coming spring offensive from Germany. But Roosevelt argued that Welles must not visit the Soviet Union because of the Nazi-Soviet non-aggression treaty. According to the directives of peace feeler of Roosevelt, Welles visited Italy, Germany, France, Britain. But confessing that the possibility of peace negotiations did not exist without the direct intervention of the United States, Welles recognised that the mission of peace to Europe was forlorn.
But in Time for Decision published in 1944, Welles omitted the fact of peace compromise with Nazi Germany through negotiations. Particularly, the problem of American peace mediation is treated very vaguely. And French and British willingness to grant territorial concessions in the East is not mentioned. But in the report to the President, Welles argued that if security is guaranteed and the conditions of peace is agreed, Mussolini, Daladier and Chamberlain intended to negotiate Hitler. In fact, according to the report to Roosevelt, one has the impression that peace negotiations was possible.
But after the end of the Soviet-Finnish Winter War on 12 March 1940, Roosevelt judged that the possibility of peace in Europe before the coming spring offensive disappeared. Because a military victory of the Soviet Union in the Winter War eliminated the opportunity to achieve the four power's compromise of peace by the way of the Welles mission.
But Welles believed there is a slight chance for the negotiation of a lasting peace if the attack for peace is made upon the issue of security. If this chance could had been made, the Second Munich Agreement would have been accomplished. In fact, in order to make the Second Munich Agreement, Welles emphasised the necessity of peace negotiations to Hitler with the theory of war and revolution. Thus, the secret aim of Roosevelt' peace mission to Europe was to turn war's direction to the Soviet Union under the banner of anti-Soviet crus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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