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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0)~50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274
학림
50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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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훈표 ( Yoon Hoon-py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7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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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고려 말기의 형정 운영 체계에서 발생했던 혼란상을 사회변동과 연관해서 검토했으며 이를 수습하기 위해 추진했던 개편 작업의 내용과 성격, 형정관의 전환, 역사적 의미 등을 살펴보았다.
형정 운영 체계의 동요는 무신집권기에 들어와서 전체를 조율하고 통제하는 최상위 장치가 마비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비정상적인 정권 교체가 거듭되면서 전임자들이 이뤄냈던 성과들이 부정되고 그 과정에서 원칙이 흔들리며 공정성이 훼손되고 일관성도 무너졌다. 그런 풍조는 원간섭기에 더욱 확산하였다. 마침내 담당 기구나 조직 체계가 변질되고 그에 따른 혼란이 초래되면서 일관된 처결이 곤란해졌다. 법 적용의 사사로움에 따른 불공정성이 증대되고 그로 인한 폐해가 확대되면서 신뢰마저 잃었다. 거기에 원률의 적용 문제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악화하였다. 말기에 이를수록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근본적인 혁신 없이는 사회의 안정과 통치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힘들게 되었다.
공민왕 즉위 이후 반원 정치와 함께 개편 작업을 추진했으나 사회 경제의 모순이 격화되고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형벌의 명확한 조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도리어 사사로운 법 적용만 부추기면서 폐해만 가중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형정 운영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체제 개혁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 갑자기 실행된 우왕의 즉위 직후부터 개편 작업에 착수하였다. 사전 준비가 철저하지 않았지만 급하게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써 단행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국정의 난맥상이 심화되면서 실패했다.
재개된 것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였다. 급진 개혁파가 주도하면서 전과 다른 차원의 작업이 추진되었다. 먼저 토대 분야에 대한 선제 조치가 시도되었다. 그 바탕에서 주무 부서인 전법사를 축으로 하는 일관성을 갖춘 운영 체계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준 형서로 『대명률』을 채택하였다. 또 다른 중요 법사였던 사헌부의 경우, 당시 제정된 개혁 신법을 법전 형태로 만들어서 간행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자 등을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했다.
말기의 개편 작업은 이전 체제의 변경과 함께 새로운 요소의 수용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간직하였다. 그로 인해 외양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운영 체계의 성격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제도의 개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변동과 연관시키며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형정관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 결과 조선에 들어와 『대명률』이 즉각 적용될 수 있었다.
더불어 표면화되지 않았으나 자세히 보면 기미 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손대기 어려운 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즉 미발의 상태이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크게 발할 소지가 다분하므로 형을 써서 미리 방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형이 정치를 보좌하는 법의 범위를 넘어서서 기능하는 면모를 취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부분은 조선에 들어와서 내부 분열과 갈등이 격화되면서 종종 재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말기 형정관의 전환에 따른 형정 개편 작업의 방향은 조선에서의 모색에 직접적인 원형을 제시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장차 전개되는 길을 암시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This paper examines the confusions that occurred in the penal administration operating system in the late Goryeo period in relation to social change. In addition, it considers the contents and results of the reform of the penal administration system that was pursued to resolve these confusions.
In the first place, chaos was in full swing in the penal administration operating system during the period of The Military Regime, when the top-level device that coordinated and controlled the whole was paralyzed. With repeated abnormal regime changes, principles were shaken, and both fairness and consistency were destroyed. This trend spread further during the Yuan Intervention Period.
After King Gongmin ascended to the throne, he pursued reorganization, but as socio-economic contradictions intensified and internal divisions grew, chaos ensued. As a result, his reform work failed. It encouraged the application of private laws, which only aggravated the harm. King Wu, who ascended abruptly to the throne after King Gongmin, hastily undertook reorganization. However, as the unstable state of affairs intensified in the second half of his reign, his reform efforts failed.
After the change of government following the army march back from Wihwa Island(威化島回軍), reorganization work resumed. Under the leadership of radical reformers, a different level of reform was promoted. The goal was to establish a consistent operating system. First, China's latest criminal code, the Great Ming Code(『大明律』), was adopted as the basic criminal code. Subsequently, repairing work on the equipment was also promoted. This opportunity set the task of reorganizing the role and jurisdiction of the penal administration on the right track.
The reorganization work in the late Goryeo period continued to accommodate new elements along with the changes of the previous system. As a result, although there were similarities in appearance, there were in fact different aspects in the nature of the operating system. This was because it was not limited to the reform of the system, but was carried out in connection with changes. In particular, the change was remarkable in that it was an evolution in the cognition of the penal administration.
In conclusion, the direction of the penal administration reorganization work following the conversion of the penal administration in the late Goryeo period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penal administration reorganization work of the next dynasty, the Joseon Dynasty. In other words, it set the direction for the path that would be followed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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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진훈 ( Park Jin-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9-9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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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초기에 설치된 감옥의 종류와 체계 및 기능과 역할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수인(囚人)이 감옥에 수감된 이유에 주안점을 두고 감옥의 기능과 역할을 분석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중앙의 형조 전옥과 의금부 감옥, 지방 군현의 감옥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건국 초부터 모든 지방 행정구역에 감옥이 설치되지는 못하였다. 전국의 군현 모두에 감옥을 설치하라는 세종 14년의 조치 이후 전국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는 여러 감방이 있었다. 의금부 감옥은 32칸, 형조의 전옥은 9칸의 감방이 있었다. 지방 행정구역의 감옥은 그 군현의 위상과 인구수에 비례하여 그 크기나 감방 수가 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옥은 치소의 동남쪽 모퉁이에 설치되었다. 감옥은 중죄수와 경죄수를 분리하고, 남녀를 구분하여 수감하였다. 하지만 세종 때까지도 일부 지방 군현에서는 남녀를 구분하여 수감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성리학 명분론에 따라, 이러한 사항은 급속히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남자와 여자 감방의 비율은 2:1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당시 범죄자의 남녀 성비 비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감옥은 매우 불결하고 습하고 협소했으며, 수인을 밀집하여 수감하였다. 따라서 많은 수인이 병에 걸려 죽었으며, 전염병 발병에도 취약하였다. 추위와 더위에도 취약한 구조였다. 이에 세종은 감옥을 확장하고, 시원한 양옥과 따뜻한 온옥을 짓도록 하는 등 감옥의 설비와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관리들은 감옥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백성들도 감옥의 증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감옥 설비 및 환경의 개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수인의 위생을 개선하고, 더위와 추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조선초기의 감옥은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수를 수감하는 곳이었다. 범죄사실이 소명되지 않은 경우 소명될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범죄가 드러났다고 하여도 좀 더 명확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죄가 확정되었다고 하여도 행정처리가 끝날 때까지 수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기한은 정해진 바가 없었으므로, 심한 경우 수년씩 수인을 수감하기도 했다.
범죄에 연루되거나 연관된 사람도 감옥에 수감되었다. 증거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연관된 사람을 투옥하였다. 범죄자가 도망친 경우 그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서나 자수를 강제하기 위해 또는 도망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 형제, 자녀, 장인이나 장모 등의 친인척을 수감하였다. 또한 감옥은 사형수가 사형 집행 전까지 수감되는 곳이었다.
관료 등이 잘못을 저질렀으나 오형(五刑)의 형벌을 가할 정도가 아닌 경우, 이를 징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감옥에 수감하였다. 길게는 20일 정도, 짧게는 3~5일 정도 수감하였는데, 수감 기간은 잘못의 정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지위나 신분 등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보다 더 약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노비를 감옥에 수감하였다. 수감된 노비는 경우에 따라 태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나 그의 노비를 감옥에 수감한 것은, 신분제 원리를 반영한 법 집행 일환의 한 모습이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types, systems, functions, and roles of prison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particular, it analyzes the function and role of prison, focusing on the reasons why peoples were imprisoned in the prison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its early days, the Joseon Dynasty installed the Hyongjo(刑曹) Jeonok(典獄) and the Uigeumbu(義禁府) prison in Seoul, as well as the Gun-hyeon(郡·縣) prisons in local areas. However, in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prisons were not established in all local administrative districts. It seems to have been installed nationwide only after the 14th year of King Sejong when he ordered to install prisons in all counties and cities across the country.
The prison had several cells. The Uigeumbu prison had 32 cells, and the Hyongjo Jeonok had 9 cells. The size and the number of prison cells in the local administrative districts seem to have been decided in proportion to the status and the population of the county or city. The prison had been set up in the southeast corner of administration building. The prison segregated the felony and the light prisoners as well as men and women prisoners. However, until the time of King Sejong, men and women could not be imprisoned separately in some provinces and districts, However, according to the Neo-Confucian rationale, this seems to have improved rapidly. The ratio of male to female prison cells was 2:1, which seems to have been decided in accordance with the male to female ratio of criminals at the time.
The prisons were very filthy, wet, narrow and crowded. As a result, many prisoners fell ill and died. They were vulnerable to infectious diseases as well as to cold and heat. Accordingly, King Sejong tried to improve the facilities and environment of the prisons, expanding the cell size and equipping the heating and cooling systems. However, the officials did not feel much importance to the prison. The ordinary people were also negative about the expansion of the prison. Therefore, the improvements in prison facilities and environments were fairly limited. The measures to improve the sanitation of the prisoners and to protect them from the heat and cold were taken just individually and temporaril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prisons were used to hold unconvicted prisoners on trial. If their crime was not proven, they were to be imprisoned until they were vindicated. Even after being convicted, some prisoners had to stay in the cell in order to clarify the crime facts more;even if the crime was clarified, the prisoner was imprisoned until the administrative processing was completed. The imprisonment period was not settled and, in severe cases, prisoners were imprisoned for several years.
Those who were involved in or participated in the crime were also imprisoned. Those involved were imprisoned to obtain evidence or testimony. If a criminal had fled, his/her relatives such as parents, brothers, children, father-in-law or mother-in-law were imprisoned in order to find out the offender's location, to force him/her to surrender, or to punish them instead of the criminal. Prisons were also the place where the death row inmates were held in custody until execution.
If an official committed a wrongdoing which was not serious enough to cause a penalty of five sentences, he/she was temporarily imprisoned for discipline. The imprisonment period was from 3~5 days to 20 days, depending on the degree of wrongdoing and the status or status of the person who committed the wrongdoing. In cases where a lesser offense was committed, the offender's Nobi(奴婢) used to be imprisoned instead. The imprisoned slaves were sometimes flogged out. Imprisonment of offender's Nobi was an aspect of law enforcement that reflected the principle of the class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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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윤정 ( Kim Yun-j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9-13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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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은 종묘·사직 의례와 같이 국가 근간이 되는 의례 활동의 필수품이자 관료의 권위와 직결된 물품이다. 따라서 관복제의 정비는 집권체제의 확립 및 그 체제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지향점을 보여준다. 태조~세조대에 걸쳐 면복이 정비되면서 그것을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왕과 세자로 국한되었다. 왕실은 차기 왕위 계승권자와 왕위에 재위한 자만이 면복을 착용하도록 하여, 면복은 왕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즉 면복의 착용만으로 王者와 신료의 구분짓기가 가능하였다. 한편 조회와 일반 공무 수행 등에 착용되는 '공복'은 점차 약식 행사에만 착용하는 관복이 되었고, 일반 조회, 진현, 사행 등에는 일반 단령포에 사모를 착용하는 '常服'이 분화되었다. 하지만 상복의 단령포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기에 관복의 무질서함은 지속적으로 문제되었고, 태종~세종대에 걸쳐 복색 제한 조치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관리들의 품질의 구분은 흉배를 달게 함으로써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문무관의 구분, 3개의 복색으로 3단계 위차만을 구분하던 것이 아닌 각 품을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즉, 문무관 및 품계와 같은 관료체제 내 '구분짓기'가 공무복의 정비과정에서 확인된다.


Official garbs are essential for ceremonial activities that are the foundation of the state, such as Jongmyo and Sajik ceremonies, and are directly related to the authority of bureaucrats. As such, the maintenance of the official uniform system was directly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system of those in power, while also demonstrating the direction the ruling system was trying to pursue. From the Taejo to Sejo dynasties, the tradition of myeonbok, or the official attire of the royal family, was upheld, and only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were allowed to wear them. However, the royal court only allowed the next heir to the throne and those who reigned on the throne to wear myeonbok, and thus such attire soon became a visible symbol of the throne. In other words, it was possible to distinguish a king from his vassals just by seeing who was wearing myeonbok.
Meanwhile, the official attire worn for assemblies and general public duties gradually became the official uniform worn only for informal events. For example, official attire, which was characterized by a basic set of robes and a headpiece, were differentiated for basic assemblies, presenting oneself to the royal court, and private affairs. However, since there were no restrictions on the set of robes for such clothes, the lack of uniformity across these official garments was continuously identified as a problem. To this end, restrictions on the color of such attire were repeatedly implemented from the period of the Taejong to Sejong dynasties. Furthermore, embroidered patches were added to the breast and back of official uniforms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 ranks of the officials. This introduced a method that had not existed in the past, which more visibly identified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rather than distinguishing only their three different positional ranks with three different colors. In other words, the upholding of this new system of official uniforms resulted in a classification system within the bureaucratic system, such as distinguishing civil officers and their ranks (upper and 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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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상민 ( Lee Sang-m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7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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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성종대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 새로운 정책은 관원의 치안책임을 강화하고, 유교적 규범을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첫째, 성종대에 조선 조정은 지방관의 치안 책임을 강화하여 각 지역의 범죄를 예방하고자 하였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는 지방관이 읽어야 할 법령 지침서, 예컨대 『목민심감』, 『의옥집』 등을 출판하였다. 게다가 정부는 지방관의 공평성이라는 덕목을 현창하였다. 둘째, 이 시기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적 규범을 본격적으로 법제화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의 원칙에 맞게 감형의 횟수와 빈도가 늘어났다. 또한 교화의 수단으로서 엄형을 강조한 관료들의 주장이 수용되었다. 나아가 재혼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문무관리로 진출할 자격이 없다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추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건국 초의 유교적 이상이 현실화된 결과였다.


This paper investigates a new ruling policy during Sŏngjon's reign:organizing legal order and encouraging common people to be vigilant.
First, the government attempted to strengthen the responsibility of provincial officials regarding public safety in order to prevent crimes in local areas. In doing this, the government published legal guidebooks for the officials such as Mongmin Simgam(牧民心鑑) and Yiyuji(疑獄集). In addition, the government promoted fairness as a provincial official's core virtue.
Second, the government enforced the legalization of the Confucian norm in full swing. For example, the number of commutations was increased based on the legalized Confucian norm. Also, an assertion of severe punishment for Moral Persuasion was accepted. Additionally, the revised edition of the Kyŏngguk taejŏn of 1486 stipulated that the sons and grandsons of remarried women would not be eligible for civil or military office. These policy contents were the outcome of what Chosŏn's founding fathers' Confucian ideal was rea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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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민정 ( Ko Min-j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9-20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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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후기 지방통치체제의 구조와 실상을 고찰하기 위하여 겸목제의 시행 논의와 과정을 파악한 뒤 강원도관찰사의 원주목사 겸직을 통해 구체적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첫째, 15세기 중반에는 겸목제 시행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찬성하는 측에서는 순행으로 생기는 폐단을 최소화하고 안정적 통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반대하는 측에서는 겸직으로 인한 업무 과중, 전최의 중립성 훼손, 순행의 최소화로 인한 부작용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관찰사의 순찰사로서의 역할보다 통치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된 17세 이후에는 지역별 사정에 따라 겸목제의 시행을 점차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둘째, 관찰사제가 성립된 후 겸목제는 1448년(세종 30)부터 1454년(단종 2)까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전후, 1760년(영조 36) 이후에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강원도의 경우는 삼남지방과 달리 독자적으로 겸목제를 시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위의 세 시기에만 관찰사의 목사 겸직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구임·솔권제가 함께 시행되었기 때문에 관찰사의 평균 재임 기간이 전보다 길어지고 관찰사의 가족을 위한 생활공간이 감영 내에 조성되는 변화가 동반되었다.
셋째, 겸목제의 시행으로 강원도관찰사가 원주목사를 겸직하게 되었으나 원주목에 대한 실질적 통치는 원주판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겸목제 시행 후 『원주읍지』 「선생안」에는 목사가 아닌 판관의 인적 정보가 기재되었다. 그러나 판관은 관품의 위계 차이로 인해 목사의 행정과 사법적 권한만 대신하였고 군사 및 의례적 권한은 횡성현감에게 이임되는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렀다.


This study conducted a concrete examination on the process to implement Gyeommokje (adjunct governor inspector system to serve for the position of magistrate), in order to consider the structure and actual aspect of the local governance system in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Age.
First, there were constant disputes of pros and cons over the implementation of Gyeommokje, for a long period of time, during the mid-period of the 15th century. Those who advocated the implementation of the system tried to minimize the bad elements caused by going on a patrol and establish a stable governance system. In contrast, those who opposed the system took the issue with heavy work amount caused by additional position, the infringement of impartiality of Jeonchoe (affairs that governor inspector oversees the deeds of magistrate to report about them to king) and side effects caused by the minimizing role of patrol. But after the 17th century when governor inspector undertook the greater role as ruler rather than the role as patrol, the method for gradually expanding the implementation of Gyeommokje, according to each local circumstance was discussed.
Second, in the case of Gangwondo, Gyeommokje had been entirely implemented only within the periods, from 1448 (30th year since King Sejong reigned) to 1454 (2nd year since King Danjong reigned), in the pre- and post-1519 (14th year since King Jungjeong reigned) when Gimyosahwa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Jo Gwang-jo suffered massacre) took place, and in 1760 (36th year since King Yeongjo reigned). As Guimje and Solgwonje (the system to remain in office and have governor inspector's families stay in the post) were implemented simultaneously, governor inspector carried out his work, for a longer period of time, than average period. There occurred a change that life space for governor inspector and his family was arranged in provincial office.
Lastly, the introduction of Gyeommokje made Gangwondo governor inspector serve for the position as Wonju Governor. Yet, the actual governance over Wonju governor officer was implemented by Wonju Pangwan. Accordingly, personal information about Wonju Pangwan was recorded in 『Local Officials on Wonju regions.
There was a difference in government rank, between Wonju Governor and Wonju Pangwan, which made military and formal authorities given to Wonju Governor delegated to Hoenseong Magistrate. Wonju Pangwan took the place of only the administrative and judical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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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은아 ( Kim Eun-ah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1-23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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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에게 한인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970~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한인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한인 인구수의 증가와 더불어 한인 천주교와 한인 불교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서 한인 교회가 주류였던 한인 사회에서 한인 천주교와 한인 불교가 등장하면서 한인 사회가 더 다채로워질 수 있었다. 1970~1980년대 형성된 한인 사회는 당대 사회적 배경 속에서 한인 정체성 교육 기관인 한국학교를 설립한다. 한국학교 교육의 목표는 '한인 정체성 형성'과 '미국 주류사회 진출'이다. 당시 재미 한인들이 확립하고자 한 한인 정체성은 무엇인가? 1970년대 이후 재미 한인들은 미국에 이주하고, 정착하면서 '한인'이자 '미국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자녀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전 시대 한인들과는 다르게 민족 정체성만을 강조하는 교육만을 실시하지 않고,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세계 시민의 정체성과 보편성을 가진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한인 정체성 확립을 목표로 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 재미한국학교협의회와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라 불리는 지역 단위의 조직을 건설하고, 이 두 조직을 중심으로 한국학교의 양적 증가와 질적 성장을 이루어갔다. 결과적으로 한국학교 교육을 통해 추구한 것은 한국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미국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한인 양성이었다.


This study explores the changes in Korean society from 1970s to 1980s and Korean schoosl education. Korean Americans who moved to the United States in the 1970s and 1980s changed the existing Korean society. In the 1960s, a large number of Koreans moved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the enactment of the Korean Immigration Act of 1962 and the American Immigration Act of 1965, and they changed the existing Korean society. And based on this increase in Koreans, Korean Catholicism and Korean Buddhism appear, along with the Korean church, which was the mainstream in the existing Korean religion, different from before.
At that time, Korean Americans established a Korean schools, an educational institution for Korean identity. In Korean schools, education was conducted through Korean language, Korean history, Korean culture education, and activities.
In the 1980s, as the numbers of these schools increased, the society decides to gather them up and founded central agencies called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Korean Schools and the Korean School Association of America. With these agencies, the Korean society could provide more systemic education and better systems since the 1980s. The goals of Korean schools education are 'forming Korean identity' and 'entering mainstream American society'. This can be examined through the educational ideology, and educational content of Korean schools at the time. Since the 1970s, Korean Americans have been aware of their children who have to live as 'Korean' and 'American' while moving to and settling in the United States. Therefore, unlike Koreans in the previous era, they did not only provide education that emphasized ethnic identity, but also wanted to provide education to help them enter the mainstream society of the United States. Furthermore, it aimed to establish the Korean identity as a national identity with the identity and universality of global citizens. As a result, the pursuit through Korean school education was to cultivate practical and functional Koreans with a dual identity that speaks Korean and English fluently, understands the cultures of both countries, and operates in the mainstream Americ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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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민구 ( Nam Min-gu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5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1-290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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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조선과 명군 사이에는 명군과 일본군과의 종전 교섭, 일본측이 조선에 주둔한 명군에게 파견한 '왜사'의 처분 여하, 향후 명군의 조선 주둔 여하를 둘러싼 갈등이 놓여 있었다. 명군은 일본군과의 교섭과 그 후속으로서 파견된 왜사의 존재를 명조정으로부터 숨겨야 했다. 조선조정은 왜사의 도래를 명조정에 알려 일본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피해야 했다. 남병수비 강양동은 조선측과의 협상을 통해, 왜사의 존재를 명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요양으로 압송하는데 성공하였다.
강양동은 명대 절강 호주부 귀안현 출신으로, 호탕하고 무협을 좋아하며 언변이 뛰어났다. 젊어서 고향을 떠나 서북지역에서 통사 활동에 종사하였다. 이곳에서 무관 만세덕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만세덕이 천진순무에 임명된 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경리에 임명된 만세덕은 강양동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함께 갔다.
조선에 들어간 직후 만세덕은 조선측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강양동에게 자신의 임무를 위임하였다. 강양동은 선조와 조선 관료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조선 민중 구휼 작업에 앞장서는 등 조선측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왜사가 온 것에 대하여 조선조정이 명조정에 보고하려 하자, 강양동은 조선조정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강양동의 기민하고 신중한 외교 교섭을 통하여, 명군은 왜사의 존재를 명조정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요양으로 압송할 수 있었다.


After 1598, Many issues were entangled in the negotiations between Joseon and Ming military headquarters. Ming headquarters wanted to hide from the Ming court the news that Japanese envoy had arrived at Busan, which might have lead the impeachment of Wan Shide, the Chief Commander of the Ming force. Jiang Liangdong, who was a Southern military lieutanent, secretely commited to escorting the Envoy to Liaoyang.
Jiang was born in Guian county, Huzhou prefecture, Zhejiang province. He was keen to serve as an army to fight against barbarians adjacent to Ming frontier. And he was involved in negotiating with Mongol merchants, where he first met with Wan Shide. After Wan was ordered to dispatch to Joseon, Jiang accompanied him as an Wan's adviser. On arriving at Joseon, Jiang undertook the negotiation between Ming and Joseon on behalf of 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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