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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회지(1950~) → 학림(1954~) → 사학회지(1963~) → 학림(1983~)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0)~47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241
학림
47권0호(2021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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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른의 한국 선사학 연구에서의 지향점

저자 : 박희현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15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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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파른 손보기의 고고학 연대기

저자 : 조태섭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25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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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파른 손보기와 한국의 구석기 연구

저자 : 공수진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6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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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손보기 교수님과 한국의 신석기연구

저자 : 신숙정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46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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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 청동기시대 연구와 파른 손보기

저자 : 하문식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7-6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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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세대학교 박물관과 파른 손보기

저자 : 윤현진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1-82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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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천 삼거리에서 발견된 르발루아 몸돌의 연구 예보

저자 : 한창균 ( Han Chang Gyun ) , 서인선 ( Seo In Sun ) , 김경진 ( Kim Kyung J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5-12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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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굴된 연천 삼거리 유적의 하부 구석기 문화층(44.6~40.4 ka cal BP, AMS)에서는 중기 구석기 늦은 시기로 편년되는 르발루아 몸돌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몸돌의 몸집 구조와 형태-기술적 속성에 의하여 이 유물은 반복적 중심 방향 떼기의 르발루아 몸돌(Levallois recurrent centripetal core)로 분류된다. 1960년대 초반, 굴포리와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이래 한국에서는 수백 군데가 넘는 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석제품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 가운데 르발루아 몸돌의 존재가 확인된 곳은 삼거리 구석기 유적의 경우가 처음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얻은 고고학적성과는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한국 구석기시대의 시기 구분 체계를 정립하는 데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리적 배경에서 구석기시대 중기에서 후기로의 전이 과정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A Levallois core was unearthed at the lower Paleolithic level of the Samgeo-ri site in Yeoncheon which was recently excavated. The cultural layer dated at 44.6-40.4 ka cal BP belongs to the late Middle Paleolithic period. This core was classified as Levallois recurrent centripetal core according to the Levallois concept criteria and the morpho-technological characteristics of core. After the Paleolithic sites were discovered in Gulpo-ri and Seokjang-ni in the early 1960s, the Levallois core, which was the first of its kind to be identified in South Korea, will contribute to the systematic division of the Paleolithic period and allow for the transition from the middle to the late Paleolithic period to be viewed from a new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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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여주 연양리 구석기 유적의 재고찰

저자 : 이정철 ( Lee¸ Jung Chul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3-16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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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연양리 유적은 남한강유역 중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최초조사 이후 한 차례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추가적인 조사 자료를 포괄한 연구는 없었다. 이에 두 차례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새로운 연구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유적은 남한강변의 나지막한 구릉 위에 위치하는데, 유적 하부에 형성된 단구퇴적층은 MIS 6에 형성된 중위면 단구에 해당된다. 유적 내 각 지점에서 이루어진 입도분석, 대자율분석, 지질연대측정을 검토한 결과, 유물층인 적갈색 점토층의 상부는 MIS 5a에 대비된다. 한편 유물층인 적갈색 점토층 상부에서 새로운 퇴적물의 유입이 있었고, 그 유입의 양상은 지점별로 차이가 있다. 특히 2012-13년 발굴 지점에서는 타 지점보다 우세한 에너지로 운반된 퇴적물의 영향이 확인된다. 유물은 2004-05년 발굴 Ⅰ지점과 Ⅱ지점의 해발 67m 이상의 구릉 정상부에 집중되고 있으나, 구릉 정상부를 기준으로 2004-05년 발굴 I지점 북서편과 Ⅱ지점 북동편, 2012-13년 발굴 지점은 구릉 정상부의 침식과 퇴적 후 유수와 중력에 따라 유물이 사면을 따라 이동한 양상이 관찰되었다. 그리고 일부 지점에서는 자연적인 유적 변형으로 형성된 웅덩이, 구 등이 존재한다. 석기 제작에 활용된 돌감은 석영이 다수를 차지하고, 그 외 규암, 편마암 등이 주로 활용되었다. 석기의 구성은 조사 시점별로 유사성과 부분적인 차이가 확인된다. 이는 유적 형성 과정과 이후의 변형이 석기 구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하였다. 박리작업의 양상은 강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갈돌을 소재로 하여 주로 하나의 타격면에서 한방향 타격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여 격지를 박리한 것으로 판단되며, 타격흔이 뚜렷하게 남아있어 다양한 크기의 돌망치를 이용한 직접타격법이 주로 이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주요 다듬은 석기는 찍개, 긁개가 있다. 이들 주요 다듬은 석기는 원석이나 소재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최적의 가공을 통해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다량의 찍개(외면찍개)는 남한강 하류역 석기공작의 특징을 대변한다.


The Yeonyang-ri Paleolithic Site is located on low hills along the Namhan River that are a fluvial terrace. The terrace sedimentary layer formed on the bed of the site corresponds to the middle terrace, which was formed in the MIS 6. Grain size analysis, magnetic susceptibility analysis, and geological dating was conducted at each zone in the site. The results showed that the reddish-brown clay layer was MIS 5, the boundary between the reddish-brown and dark-brown clay layers was MIS 4, the dark-brown clay layer was MIS 3-MIS 2, and the light-brown clay layer was related to MIS 2.
The upper part of the reddish-brown clay layer, which included the artifacts layer, was connected with MIS 5a. New sediment flowed onto the top of the reddish-brown clay layer, which included the artifacts layer, but varied by zone. Artifacts in the 2012-13 excavation zone may have been moved by relatively strong sediment movements. Although most of the artifacts are concentrated around the hilltop in the adjacent excavation site in 2004-05 and the excavation site in 2012-13, the artifacts have moved down the slopes and become dispersed over time due to erosion and sedimentation at the top of the hill. In addition, the remains of puddles and gully are visible in some of the excavation zones, which are indicative of natural post-depositional processes.
The most common raw material for the knapped stone is quartz including quartzite and gneiss. In terms of the combination of stone artifacts implements, similarities and partial differences are identified depending on the excavation zones. It can be seen that the composition of artifacts was influenced by that the degree of site formation and post-depositional processes. Knapping first selects pebbles that are readily available by the river and intensively performs one-way strikes on one of the striking platforms, apparently removing the surface of the stones. Since the striking point remains clearly, it seems that the direct hitting method using stone hammers of various sizes was mainly used. The main stone tools are Chopper and Side-scraper. These major stone tools are believed to have been produced through optimal processing while maintaining the shape of the material as much as possible. In particular, a large amount of Choppers represent the characteristics of stone industry in the lower reaches of the Namhan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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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윈 제국의 다르칸 제도가 고려에 유입된 양상 -고려 후기 김여우(金汝盂) 공신교서(功臣敎書)의 분석을 중심으로-

저자 : 권용철 ( Kwon¸ Yong Cheol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7-19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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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려 후기의 신료인 김여우가 받은 공신교서의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 중에서 충렬왕이 '上國之制', 즉 元朝의 다르칸 제도를 수용하여 공신에게 면죄의 특권을 내린 것의 연원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김여우의 공신교서는 고려 후기의 얼마 남지 않은 문서 자료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계와 한문학계에서 별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두 연구 성과에서 제시한 김여우 공신교서의 판독을 비교하면서 분석했고, 그 결과 조금 더 정확한 원문판독을 제안할 수 있었다.
김여우가 충렬왕으로부터 공신녹권 및 공신교서를 받게 된 것은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원에 들어갔을 때, 김여우가 충렬왕을 호종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고려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충렬왕이 김여우에게 특별한 포상을 내린 배경으로 작용했다. 여러 측면에서 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충렬왕은 공신 포상을 내릴 때에 원조의 제도를 활용하여 김여우에게 면죄의 특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시행했음이 공신교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죄를 9번 범할 때까지는 벌을 주지 않고, 10번 죄를 범할 때부터 처벌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九宥' 제도는 몽골-원 제국 시기의 공신들에게 특별히 부여했던 다르칸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다르칸은 칭기스 칸이 자신을 호종하면서 목숨을 살렸던 공신들에게 내린 호칭이었고, 충렬왕도 김여우에게 공신교서를 하사하면서 다르칸이 가지고 있던 제도적 성격을 그대로 도입했다. 충렬왕이 원으로부터 도입한 다르칸제도는 고려 후기 공신 포상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고,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공신의 면죄 특권 조항이 지속되었다. 이는 몽골-원 제국의 독특한 제도가 고려와 조선에 영향을 준 하나의 사례라고도 평가할 수 있고, 이러한 사례가 생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충렬왕 시기에 형성된 고려-원 관계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reviews the contents of the meritorious contributor document given to Yeo-woo Kim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xamines the history of King Chungnyeol (reign: 1274-1308) granting immunity to the meritorious subject by accepting the Yuan Empire's Darqan system. This piece is one of the few documents remaining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is of significant historical value, and was studied separately. This article compares the results of the two studies to develop a more accurate reading of the document.
Kim received the meritorious contributor document from King Chungnyeol while Kim was his attendant when he visited the Yuan Empire to marry the daughter of Qubilai (reign: 1260-1294) to ultimately strengthen his sovereign power. The document states that King Chungryeol, who was influenced by the Yuan Empire in many ways, implemented measures to grant immunity to Yeo-woo Kim by utilizing the Darqan system. He decided not to punish him until he had committed the same crime nine times and to then punish him beginning with his commission of the tenth crime.
This procedure was linked to the title of Darqan, an honor which was bestowed on meritorious subjects during the Mongol-Yuan period who saved Genghis Khan's life. King Chungryeol introduced the concept of Darqan when he presented the document to Kim. The Darqan system, adopted by King Chungryeol from the Yuan Empire, continued to be influential in indulging meritorious subjects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ven into the Joseon dynasty. This system's influence shows how the unique Mongol-Yuan system influenced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However, this influence was only possible because of the relationship formed between the Goryeo dynasty and the Yuan Empire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r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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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원군 세력의 복귀운동과 '반대원군연합체제'의 한계

저자 : 정경민 ( Jung¸ Kyung M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34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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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정부관료들을 새로 임용하면서 친정체제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통치권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의 복귀를 바라는 활동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고종은 이를 제어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그 와중에 발생한 '박우현 사건'과 '신철균 사건'은 고종과 대원군 양측 모두에게 분기점이 되였다. 고종은 '박우현 사건'을 계기로 상소운동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의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고종의 친정체제는 고종의 의도대로만 운영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관료들과의 협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유원, 이최응, 박규수 등의 정부관료들은 대원군의 하야라는 점에서는 이해관계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세력의 처리방안에 관해서는 판단이 달랐으며, 고종과의 대립도 피하지 않았다. '공동의 적'인 대원군을 지지한 최화식 등 4명의 유생 처형을 둘러싼 대립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고종이 친대원군 성격을 지닌 상소의 처벌강화를 천명하자마자 일어난 사건이었다. 공동의 목표인 '반대원군'에 있어서도 정부관료들과 고종의 처리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이는 고종의 '반대원군연합'에 기반한 친정체제가 내부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대원군 측에서도 효의 논리에 기반한 상소를 통한 '여론전'에서 고종의 '친위세력'을 물리적으로 직접 공격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이어서 변란을 통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신철균 사건'은 대원군 세력이 언제든지 무력수단을 이용하여 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종은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등의 서양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혁정책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대원군 세력이 개항에 대한 비판여론을 이용하여 신사척사운동과 임오군란에 참여함으로써 친정체제를 위협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종이 의도했던 대원군 계열의 견제 혹은 숙청의 배경이 마련되는 계기는 임오군란이 발생한 이후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주어지게 되었다.


Kojong expelled Daewongun from office, he recruited new talent in an attempt to create a government that was friendly to the throne. However, Kojong was not able to immediately secure his rule. Kojong then had to address elements in society that sought to return Daewongun to power. It was against this backdrop that two incidents involving Pak Wuhyŏn and Sin Ch'ŏlgyun occurred that had important implications for both Kojong and Daewongun.
Kojong could not severely punish those who challenged his power because his government did not blindly follow his wishes. Therefore, he had to negotiate with his government. Although people loyal to him, including Yuwon Yi, Ch'oe'ung Yi, and Kyusu Pak, agreed that Daewongun had to step down, they disagreed with him on how to treat the pro-Daewongun faction and confronted him about it.
Kojong and his supporters disagreed about how to punish, including Ch'oe Hwasik, who supported Daewongun. When Kojong suggested harshly punishing those convicted of siding with Daewongun, some of Kojong's closest advisors voiced their opposition. These were the same people who had supported him in ousting Daewongun. This conflict demonstrated a certain level of insecurity in Kojong's leadership because it depended on a coalition of people who wereopposed to Daewongun's rule.
Meanwhile, Daewongun's supporters went from expressing their discontent verbally, stressing the importance of filial piety and engaging in propagandistic activities, to resorting to physical violence against the pro-Kojong royalists. As exemplified by Ch'ŏlgyun Sin's rebellion, Daewongun supporters even engaged in outright revolts to threaten the royalists and demonstrate their ability to threaten the throne.
During this time, Kojong was attempting to implement reforms and entered into treaties with Japan, the US, the UK, and other Western powers. In all of these efforts, he encountered strong opposition from Daewongun supporters who did not want to open the country to outsiders. As a result, Kojong faced bad publicity and a direct challenge to his rule as exemplified by the ch'ŏksa purification movement and the Imo Rebellion.
Ironically, it was only after Daewongun was restored to power following the Imo Rebellion that the necessary foundations were laid to deter and eliminate support for Daewo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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