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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논총 update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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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738-6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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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7)~82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754
석당논총
82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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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漢林선생의 문화유산에 대한 계승 노력과 인식

저자 : 崔永好 ( Choy Young-h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2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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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아대학교의 제2~4대 총장을 지낸 한림선생의 전통문화와 문화·기록유산에 대한 계승 노력과 인식 틀을 새롭게 살펴보았다.
한림선생은 교육·체육 영역의 발전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와 문화·기록유산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실천 노력도 지속하였다. 한림선생은 석당선생의 활동과 인식 틀을 계승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기록유산을 체계적으로 연구·보존할 수 있는 전문연구기관으로 석당전통문화연구원을 개원하고 안정적인 연구기반도 마련하였으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다양한 사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석당전통문화연구원의 연구 역량과 인지도를 국내·외로 확장시킬 수 있는 인적 연계망과 위상도 구축하였으며, 박물관의 새로운 공간 마련과 함께 발굴조사사업 및 보고서의 간행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및 한국민속문화연구소의 학술지 창간과 더불어 문화·기록유산과 관련된 전문학과도 개설하였다. 거제 장목진 객사의 복원사업 등 지역사회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사업도 협조하였다. 이처럼 한림선생은 기록·문화유산 및 민속문화재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계승·발전 노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으며, 2002년 10월 문화의 날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림선생은 다양한 문화·기록유산에 관심과 안목을 가지고 직접 수집하는 동시에, 수집 자료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도 하였다. 수집·기증 문화유산 가운데는 국가민속문화재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등 국가나 지역사회에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자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한림선생이 지원하거나 발굴현장을 방문·격려한 고분군 가운데는 국가나 세계 인류로부터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유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림선생은 기록유산의 중요성도 인식하였다. 석당선생이 수집한 고려~조선시대 선현들의 간찰·시·문서류 등을 번역·출간하였으며, 석당전통문화연구원에 고서 문헌자료실도 별도로 설치·운영하는 등 기록유산의 역사·문화적인 가치도 주목하였다. 더구나 석당함진재에 소장된 고서 가운데는 지역사회와 국가적으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원천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림선생은 1960~1970년대부터 이미 우리 문화·기록유산의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우리 전통문화의 재정립을 우리 민족의 당면과제이며 시대적인 사명으로, 위대한 우리 민족문화의 창조를 전통문화의 재음미와 정리에서 출발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유산에 대해 자료 수집·정리와 함께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는 등 전통문화를 새롭게 계승·창조하려는 인식도 가지고 있었다. 한림선생은 석당선생의 전통문화에 대한 계승의식을 지속하며 새롭게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림선생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재정립하고 재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석당선생의 문화적인 업적을 이어받는 실천 노력과 의식은 2001년까지도 지속하였다.
한림선생의 우리 민족 전통문화에 대한 업적·노력은 후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인식되고 반추되었다. 한림선생이 민족문화에 자긍심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고 인식되었다. 더구나 한림선생의 묘비명에는 한림선생이 실천하였던 전통문화의 창달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로의 유출방지, 문화유산의 수집 및 대학박물관으로의 기증 등을 함축적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This paper attempts to newly analyze into the Succession - efforts and perception of Dr. Jeong Su-Bong's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he has served as the 2nd to 4th president of Dong-A(東亞) University from the June 1975 to the February 1989, has called himself-name to the HanLim. he was the son of Seokdang(石堂) who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Dong-A University.
The HanLim has generally been defined as a physical education expert & educational administrator, however, he has also continued to make practical efforts to newly develop the traditional culture &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of the Korean nation that had been built from prehistoric times to modem times, his collections are currently included in the treasures of Korea & the Busan Metropolitan City's cultural properties, he has established the Department of Professional Studies that can systematically learn about this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has also established the Seokdang-Academic-Research-Institute of Korean- Culture(石堂傳統文化硏究院). in particular, he has provided the Seokdang- Museum of Dong-A University into a representative museum among the university museums of Korea, and has established the Seokdang-Hamjinjae (石堂函珍齋) of Dong-A University that have preserved the recorded heritage, this practical effort of the HanLim have creatively inherited the achievements of a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that the Seokdang has been practiced since the 1960s. for these efforts, he has been awarded the Order of Cultural Merit Eun-gvran(銀冠文化勳章) on the Culture Day of the Octobe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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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림(漢林) 정수봉(鄭樹鳳) 선생의 선현들의 말씀에 대한 인식

저자 : 조해훈 ( Jo Hae-hu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5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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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가계에서 출생한 한림 정수봉 전 동아대학교 총장은 가풍으로 어릴 적부터 서당에 다녔으며, 고전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였다고 평가받았다.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이 설립한 동아대 법률학과에 진학하여 1952년 졸업하였다. 이후 내무부에 들어가 혼란스런 정국에서 나라의 행정체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헌신하다가 동아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교무처장과 부총장 등의 보직을 거쳐 동아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하여 3·4대 총장과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런 한림 선생은 동아대학교의 입학식과 졸업식 등을 비롯해 외부 행사에서도 많은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들에서 적절하게 사서오경이나 퇴계 이황의 문집 등에 있는 말씀들을 인용하여 가르침을 주었다. 단순히 사자성어를 한두 번 인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에서든 사석에서든 선현들의 말씀이 들어있는 문장들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동아대를 발전 성장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 바쳤지만 내면적으로 평생 추구한 것은 수양을 통한 이른바 수기치인이었으며, 효를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
한림 선생은 평소에 과묵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스스로 판단해 학교발전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이 되면 무서울 정도로 추진력을 발휘하였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을 견학하면서 그 대학의 역사와 문화, 행정시스템 등을 파악하였던 그는 동아대를 성장시키기 위해 온갖 반대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승학캠퍼스와 동아대병원을 밀어붙여 지었다. 그 결과 동아대는 한수이남 최고 사립대학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대학을 키우는 데는 체육활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하고 유망주들을 동아대로 데려와 각종 지원을 하며 훈련을 시킨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 선수를 비롯해 하형주·조재기·문대성 등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배출하였다. 게다가 그는 동아대를 설립한 부친인 석당 정재환 선생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재정립 시키는데도 세상을 버리기 전까지 애를 썼다.
한림 선생이 선현들의 말씀들을 인용해 학생과 교수, 시민들에게 이야기 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인식'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어릴 적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소학』 등을 공부하여 군자와 소인의 차이, 공부의 목적과 방법, 수양과 처세 등 살면서 귀감이 될 내용들을 배웠다. 그래서 선현들의 말씀을 참조하여 살게 되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한림 선생은 동아대학교 총장으로서,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의 장으로서 연설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적절하게 선현들의 말씀을 대입시켜 설명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가 특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 말씀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대학 시절의 수학 내용은 실제로 사회에 진출하여 학생들의 직업이나 대인관계 등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므로, 선현들의 말씀 등을 대입시켜 설명을 함으로써 학생들이 보다 공감하도록 하였다. 그 역시 선현들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말씀들이 일러주는 대로 평생을 살았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Former Dong-A University President Hanlim(漢林) Jeong Soo-bong(鄭樹鳳), who was born in the most prestigious family in Namhae(南海), Gyeongsangnam-do(慶尙南道), has been to Seodang(書堂) since childhood due to his family tradition, and was evaluated as having considerable knowledge of classics. After graduating from Gyeongnam Middle and High School, he went to the Department of Law at Dong-A University established by his father and graduated in 1952. After that, he entered the Ministry of Home Affairs(內務部) and devoted himself to establishing the country's administrative system in a chaotic political situation, and was appointed as a professor at Dong-A University. After serving as the second president of Dong-A University, he served as the third and fourth president and the chairman of the foundation.
Such a teacher Hanlim gave many speeches at external events, including the entrance ceremony and graduation ceremony of Dong-A University. In those speeches, he properly quoted the words in the writings of Sasa Ogyeong(四書五經) and Toegye(退溪) Yi Hwang(李滉) and taught them. It was not just a four-character idiom quote once or twice, but also a whole sentence containing the words of the ancestors, whether officially or privately.
He devoted himself to the development and growth of Dong-A University for a long time, but what he pursued internally throughout his life was the so-called handicraft through training, and filial piety was considered very valuable.
Teacher Hanlim was rumored to be quiet, but he showed frightening momentum when he judged himself and thought it would help the development of the school. Having grasped the university's history, culture, and administrative system while touring the world's leading universities, he pushed ahead with Seunghak Campus and Dong-A University Hospital despite all kinds of opposition and difficulties to grow Dong-A University. As a result, Dong-A University gained a reputation as the best private university on the south side of Han River.
In addition, as a result of detecting the importance of sports activities early and bringing promising athletes to Dong-A University to provide various support and training, they produced Olympic medalists such as Yang Jung-mo, Korea's first Olympic gold medalist, Ha Hyung-joo, Cho Jae-ki, and Moon Dae-sung. In addition, he tried to inherit and re-establish Korea's traditional culture after his father, Seokdang Jeong Jae-hwan, who founded Dong-A University, until he abandoned the world.
Citing the words of the ancestors, Hanlim briefly summarizes the “recognition” underlying the story to students, professors, and citizens as follows. First, while studying Seodang from an early age, he studied 『Cheonjamun』(千字文), 『Myeongsimbogam』(明心寶鑑), 『Sohak』(小學), etc. to learn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the county and the small, the purpose and method of study, training and attitude. Second, as the president of Dong-A University and as the head of various social organizations, Hanlim was able to highlight the issue to be said by properly substituting and explaining the words of the ancestors. Third, he cited the words a lot, especially for students. Since the contents of mathematics in college actually entered society and were applied to students' jobs and interpersonal relationships, students were able to sympathize more by substituting and explaining the words of the ancestors. He, too, is considered to have lived his whole life as the words tell him without departing from the words of the ances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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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술·체육의 경영철학과 한림(漢林) 정수봉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저자 : 김승조 ( Kim Seung-ho ) , 하형주 ( Ha Hyoung-jo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9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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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漢林) 정수봉은 동아대학교의 설립자인 석당의 동좌문도(同坐問道) 즉 교육철학을 예술과 체육에서 실현한 경영자이다. 한림에게 있어 예술과 체육은 문화산업이나 경제가치가 아니라 대학문화창조를 구현하는데 있어 중심이자 근원이다. 예술과 체육의 사회적 책무와 시대정신도 고려한 경영철학이다.
예술과 체육이 문화산업으로 치닫는 오늘날 화합과 조화를 상징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동이불화(同而不和) 세계와 맞대응하는 군자와 같은 인식세계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예술과 체육의 경영이 자본축적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본연의 존재가치라는 측면에서 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존재가 몸값으로 그리고 감각의 순수성이 판매가격으로 책정되는 시대상황에서 화이부동은 이렇듯 우리에게 사자성어가 아니라 예술·체육경영의 본 모습을 들여다보는 인식론적 지지대이다.
이 연구는 메디치가(家)의 예술경영과 쿠베르탱의 체육경영 그리고 한림의 예술·체육경영을 화이부동의 맥락에서 탐구한다. 따라서 메디치가와 르네상스, 쿠베르탱과 올림픽, 한림과 대학문화창조의 관계 자체에 주목한다. 현재 우리가 르네상스의 조화미, 올림픽의 스포츠맨쉽 그리고 대학문화창조의 가능태를 개념화한다고 하더라도, 몸과 정신의 조화와 화합이 그들의 감성에 참되고 올바른 것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으로 의식의 창에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감성에 그르다고 느껴진 것으로 올라왔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오늘날 대두된 몸값이나 판매가치가 그대로 의식의 창에 나타났을 것이다. 르네상스예술과 올림픽 게임 그리고 대학문화창조는 인간의 의식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을 관통한다. 메디치가와 쿠베르탱 그리고 한림이 예술과 체육을 대상화하고 경영철학에서 오랜 기간 자신의 자아의식을 실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주관과 객관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그것들의 상관관계인 메디치가와 르네상스, 쿠베르탱과 올림픽 그리고 한림과 대학문화창조의 관계성 즉 사태 자체에 주목한다.
메디치가와 쿠베르탱이 화이부동의 범주를 구체화한 반면에, 한림은 조화와 화합이라는 화이부동을 대학문화창조에 기투(Entwurf)한다. 그는 예술과 체육에 피투(Geworfenheit)된 과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올바르게 의식하고 동좌문도를 실현한 경영자다. 화이부동이 예술·체육의 경영철학에서 조화와 화합으로 범주화되면서 메디치가와 르네상스예술, 쿠베르탱과 올림픽 그리고 한림과 대학문화창조의 관계는 현상학적 접근방법으로 구체화된다.
메디치가와 쿠베르탱 그리고 한림이 초월적 의지로 구현한 예술과 체육의 결합이 자아실현이자 건강한 이성적 사유가 펼쳐진 경영철학으로 평가되어야 하듯이, 화이부동이란 불현듯 나타나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기중심적 경향을 배제한 의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Hanlim was an executive who fulfilled Dong-jwa-mun-do(同坐問道: a teacher and a student gathers in one place to answer questions in order to seek righteousness),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he founder of Dong-A University, Seok-dang, in art and physical education. Instead of cultural industry or economic value, he targeted art and physical education as important things in creating university culture. It was a management philosophy that also considered social responsibilities and spirit of the times of art and physical education.
This contemporary era, when these two features move toward to become cultural industry, symbolization of unity and harmony such as Hwa-yi-bu- dong(和而不同); the world of perception such as confronting the Dong-yi-bul-wha(同而不和: the scoundrel may speak the same yet cannot work harmoniously) world rises to surface. It allows us to look back that the management of art and physical education is not a tool for capital accumulation or competition, but rather in terms of the natural and original value of its existence. In an era where human existence is set as ransom and the purity of senses is set as sales price, Hwa-yi-bu-dong is not a four-character idiom for us, but an epistemological support for art and sports management.
This study explores the art management of the House of Medicis, the sports management of Coubertin and the art and sports management of Hanlim under the Hwa-yi-bu-dong phenomenon. Therefore, we will focus on the relationship itself -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cis and Renaissance, Coubertin and the Olympics, and Hanlim and creation of university culture. Even if we conceptualize the harmony of the Renaissance, the sportsmanship of the Olympics, and the possibility of creating a university culture, it was that unity and harmony of body and mind appeared truthful and right in their emotion, leading those concepts to appear positively in our window of consciousness. If however, features regarded erroneous in their emotions appeared, the ransom or sales value that emerged today would have appeared in the window of consciousness. Renaissance art, the Olympic Games, and creation of university culture did not instantaneously appear and disappear in human consciousness, but penetrated continuous time. The House of Medici, Coubertin, and Hanlim all objectified art and physical education and had been realizing one's self consciousness for a long time in management philosophy. Therefore, this study focuses on their correlation without separating subjective and objective;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ci and Renaissance, Coubertin and the Olympics, and Hanlim and creation of university culture.
While the House of Medici and Coubertin specified the range of Hwa-yi-bu-dong, that concept of Hanlim's is in the state of 'Entwurf/projet' in art and physical education. He was an executive rightfully perceiving unity and harmony, which are in the state of 'Geworfenheit/thrownness' in cultural industrialism, and realized Dong-jwa-mun-do. As Hwa-yi-bu-dong in the management philosophy of arts and sports is categorized into unity and harmony, the three relationships mentioned are being embodied through phenomenological approach.
Just as the combination of art and physical education embodied by Medici, Coubertin, and Hanlim with transcendental will is evaluated as self-actualization and management of philosophy with healthy rational reasoning, Hwa-yi-bu-dong should be interpreted while excluding a self-centered tendency, which is to see only what you want to 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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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결성의 에톨로지로 본 '새끼 서 발'

저자 : 강성숙 ( Kang Sung-sook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2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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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서 발' 설화는 함경도부터 경상도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100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이 향유해 온 이야기다. 이는 주인공이 가진 보잘것없는 성취물(새끼 서 발/조이삭 하나)을 가지고 길을 떠나 결국 '처녀/비지'를 얻어 돌아오는, 성장에 관한 서사다. 주인공은 애초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타인과 만나 그들의 요청에 따라 단순히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내어주는데, 이때 주인공은 타인에게 자신이 지닌 것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자신과 연결된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유형에 따라 주인공의 의도적 교환 과정이 단계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주인공은 생명과 삶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 지지를 확인하며 그 역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퇴행적 상태에서 생동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된다.
사건이 연쇄, 누적되는 형식담의 외피는 이야기를 전승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온전히 전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하나의 화소가 다른 화소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이 누적 연쇄담 형식은 주인공이 만나는 대상 하나 하나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망이 주인공의 변화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다. 이는 이야기 내부에서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을 추동하는 기제이기도 하면서 서사의 바깥, 즉 향유 계층이 지향하는 가치를 반복해 체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공유자산이라고 볼 때, 향유자들은 '새끼 서 발'이라는 공유재를 통해 자신과 연결된 타인의 존재, 타인이 가진 것, 타인의 성취, 그리고 살아 있음의 절대적인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과정을 체화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새끼 서 발' 설화는, 가진 것 없고 뚜렷한 목적도 의지도 없던 주인공이 집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계속해 만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생명 회복의 당위성과 함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목표가 경험을 통한 성취와 성장인 것이다. 방 안에 스스로 갇혀 먹고 배설하는 일밖에 하지 않던, 온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 볼 수 없었던 주인공이 집(방)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들과 만남 끝에 결국 고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향유자들은 '새끼 서 발' 설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며 지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The stories of “six yard[seo-bal] straw rope” has been enjoyed by various people for more than 100 years in a wide range of areas from Hamgyeong to Gyeongsang Province. This is a narrative about growth, leaving the road with the humble accomplishments(six yard[seo-bal] straw rope/a single rice stem) of the protagonist and eventually returning with a 'bridesmaid/ bean-curd dregs'. The main character did not have any intention in the first place, but he met with others and simply gave out his own things at their request. At this time, the main character recognized the value of his own and recognized the existence of others connected with him. The main character's intentional exchange process is gradually shown according to the type, and the main character confirms the recognition and support of people about life, and he also gets the driving force to move from a degenerative state that is no different from death to a lively life.
The outer cover of the series of events and the accumulated formal stories is also a device to fully convey the values ​​that the tradition and enjoyers aim for. This cumulative chain story format, in which one pixel is closely connected to another pixel, reveals that each object to which the main character meets is connected, and that this network is deeply involved in the change of the main character. This is also a mechanism that drives the change and growth of the protagonist in the story, and it is also a device that repeats the value of the outside of the narrative, that is, the enjoyment class. When the story is considered as a shared asset, it seems that the enjoyers embody the way of fully recognizing the existence of others connected to them, what others have, the achievement of others, and the absolute value of being alive through the common property called 'six yard[seo-bal] straw rope'.
The story of the six yard[seo-bal] straw rope can be read as a growth narrative in which the main character, who has nothing and has no clear purpose or will, goes out of the house and continues to meet someone to become an adult who can become independent. The important goal of the story, along with the necessity of life recovery, is achievement and growth through experience. The main character, who was confined to the room and was not seen as a fully alive state, who was confined to eating and excreting himself, seems to have actively shaped and supported the process of building and growing his own world after meeting with many people through the story of 'six yard[seo-bal] straw 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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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오징어 게임』 어펙트, 마주침의 윤리와 연결성의 에톨로지

저자 : 권명아 ( Kwon Myoung-a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5-17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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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의 '의미'는 원작 드라마의 내적 특성이나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텍스트 생산과 수용에 관여하는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마주침과 마주침에서 촉발되는 의미, 감각, 반응, 정서에 의해 '점점 더 자라난다.'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과 수용자, 텍스트라는 물질적 행위자와 인간 행위자의 마주침을 통해 의미, 감각이 마치 생명체처럼 자라나고 생성하는 방식을 우리는 정동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둘러싼 의미-감각의 아상블라주가 생성되고 지금도 생성 중이다. 이러한 아상블라주는 이질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인 해석과 정치적 방향성들이 마주치는 투쟁과 경합의 배열체가 되기도 한다. 이 연구는 『오징어 게임』 해석을 텍스트의 단순함과 해석 아상블라주 생성에 개입하는 생체 매개 된 몸들의 복잡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동 정치의 문제로 접근한다. 또 이는 『오징어 게임』 텍스트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고유한 정동 정치에 대한 분석과 연결된다. 넷플릭스는 사용자의 연상반응에 기초하여 작품을 추천해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어서 시스템 자체가 사용자의 정동을 조율(modulation)하는 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정동 조율에 의해 시청자를 활성화하는 건 시스템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콘텐츠, 특히 최근 상위권에 오른 텍스트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이 연구는 『오징어 게임』에 대한 해석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의 초국가적 흥행은 전 지구적인 문화 산업 시장에서 '미투 시대'가 콘텐츠로 전유되고 지배적 흐름이 되었던 과정과 이에 대한 전유와 반작용이 콘텐츠 생산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오징어게임』은 초국가적인(transnational) 반페미니즘 백래시 흐름의 형성과 문화자본, 초국가적 플랫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미투'로 상징되는 전 지구적인 페미니즘 흐름은 문학과 문화 텍스트 생산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가스라이팅에 대한 비판과 서사를 여성 주체화 서사로 전유한 문화적 흐름은 전지구적인 유행이 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런 서사를 도메스틱 느와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넷플릭스는 도메스틱 느와르를 각 지역의 맥락에 따라 생산하고 배급하는 주요 플랫폼이 되기도 했다. 또한 도메스틱 느와르는 넷플릭스의 서비스와 관극 방식에 매우 잘 부합하는 서사 양식이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은 전 지구적으로 유행했던 도메스틱 느와르를 폐쇄된 통제 환경에 갇힌 중년 남성 가부장의 게임 서사로 전유했다. 이런 서사적 전유 과정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반작용 역시 서사 단위로 구성된다. 또 이는 넷플릭스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의 흥행 순위가 『퀸스 갬빗』, 『레이치드』 등의 도메스틱 느와르 장르에서 『종이의 집』, 『뤼팽』, 『오징어게임』으로 이동한 큐레이션과 초국가적 문화 흐름 변동의 산물이다. 이런 변동은 도메스틱 느와르에서 '괴도' 장르로의 장르 변동이자, 가부장 권력에 저항하는 여성 주체화 서사에서 '억울하게 부정당한 가부장(아비)의 명예를 되찾는 아들의 가족 로망스'로의 변동이기도 하다.


The meaning of “Squid Game” is not only triggered by the internal characteristics or marketing strategies of the original drama, but also by the encounters and emotions of various actors involved in text production, reactions, and emotions. Through this process of affective encounter, the sub-sense of meaning surrounding the text has been created and is still being created. This assemblage is also an arrangement of struggles and contention encountered by heterogeneous or sometimes hostile interpretations and political directions. This study approaches the interpretation of the “Squid Game” as a problem of affective politics that arises between the simplicity of text and the complex system of biomediated bodies intervening in the generation of interpretation. In addition, this is linked not only to the interpretation of the text of “Squid Game” but also to the analysis of the unique affective politics of a platform called Netflix. Netflix is based on a system that recommends works based on the user's associated response, and the operating system itself modulates the user's emotions. Jeongdong coordination is not only a system but also a major feature of Netflix content, especially text that has recently risen to the top. This study does not aim only at interpreting the Squid Game. “Squid Game” is an example of the process in which the “Me Too Era” was transferred to content and became the dominant flow in the global cultural industry market, and how the exclusions and reactions to it are formed in content production. In other words, it is an example of a transnational anti-feminist backlash trend. The global feminist trend, symbolized by “Me Too,” has brought about a major change in the production of literature and cultural texts. In particular, the cultural trend of criticizing gas lighting and exclusing gas lighting narratives as female-subjected narratives has become a global trend.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these narratives were also called domainic noir. Netflix has also become a major platform for producing and distributing domainic noir according to the context of each region. Domestic Noir was also a narrative style that fits Netflix's service and viewing style very well. “Squid Game” exclusively introduced the globally popular DOMESTIC NOIR as a game narrative of a middle-aged male Gajang, trapped in a closed control environment. In this narrative appropriation process, the negative reaction to feminism is also composed of narrative units. As a basic work to examine transnational anti-feminist backlash and changes in Korean content, this paper first examines the viewing pattern of transnational television viewing and the politics of affect surrounding the Squid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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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실내 우주'의 SF 에톨로지 : 사물-동물-식물의 애니메이팅 인터페이스에 관한 일고찰

저자 : 권두현 ( Kwon Doo-hyu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1-20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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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에게, 이주노동자에게, 그리고 도시빈민에게 비닐하우스는 상이한 '비닐하우징'의 정동을 이끌어낸다. 이와 같은 정동은 비닐하우스와 그 내부의 존재자들이 분리불가능하게 뒤얽힌 물질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 물질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적이고, 관계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며 불균등하다. 한편, 베란다와 발코니마저 확장해서 실내화시키는 유리 온실에는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 식물이 함께 한다. 유리 온실은 비닐 온실과는 다른 물질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동을 배양시키고, 더 나아가 스마트폰 및 컴퓨터 등의 사물을 통해 아상블라주로서의 정동적 전이를 수행한다. SNS와 웹툰 등 디지털화된 경로를 통해 유리 온실의 식물과 동물은 탈물질화된 조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물질적 관계 맺기를 유도한다. 이러한 행위유도성(affordance)이 물질성을 대면케 한다고 했을 때, 아상블라주의 정동은 이를 돌봄의 책임으로 정향시킨다.
김초엽의 SF 『지구 끝의 온실』은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상이한 온실 정동을 교차시키며 그 텍스트를 직조해낸다. 또한 텍스트는 온실의 정동을 매개로 제임스 러브록과 애나 칭의 담론을 엮어내며 물질적 관계의 정동정치적 가능성을 창발하는 장치가 된다. 잠재적인 변화의 기호들을 탐색하는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로서의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은 중층의 연결망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실뜨기(String Figures)다. SF는 과거와 미래를 새로운 배열로 함께 가져와 구제의 가능성을 엮고 짜는 것이다.
정동적 관점은 생태위기 또는 기후위기의 해법을 개체의 연명에서 공동체에서의 존재와 되기의 인식, 즉 '오염'의 재인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존-공생-공산의 조건이 사적 소유의 폐쇄된 실내일 수만은 없음을 깨닫는 일은 긴요하다. 실내는 잠재적 공유지로서 다중적인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는 위상학적 우주 공간으로 열려 있다.


For animals and plants, migrant workers, and urban poor, vinyl greenhouses elicit different “vinyl housing” affects. These affects are due to the inseparably entangled materialities of vinyl greenhouses and their internal beings, which are not fixed entities, but are fluid and uneven according to relational situations. On the other hand, humans, animals, and even plants are present in the glass greenhouse, which expands and indoorizes the veranda and balcony. Glass greenhouses cultivate new affects in a material relationship different from vinyl greenhouses, and further perform affective transition to assemblages through objects such as smartphones and computers. Through digitized channels such as SNS and webtoons, plants and animals of glass greenhouses reveal dematerialized plasticity while inducing material relationships. When it is said that this affordance leads to face-to-face materiality, the affect of assemblage orientates it to the responsibility of care.
Kim Cho-yeop's SF Greenhouse at the End of the Earth weaves the text while intersecting these different greenhouse affects of Korean society. In addition, text is a device that combines the discourse of James Lovelock and Anna Lowenhaupt Tsing through the affect of the greenhouse and evokes the possibility of affective politics in material relations. “Science Fiction” as a “Speculative Fabulation” that speculates the signs of potential change creates a network of intermediate layers, and that is the “String Figures”. SF is to bring the past and the future together in a new arrangement and weave the possibility of salvage.
The affective perspective can shift the solu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or climate crisis from the life-sustaining of an individual to the understanding of existence and becoming in the community, that is, new understanding of “contamination”. In this regard, it is important and urgent to realize that the conditions of coexistence-codwelling-coproduction cannot be a closed indoor of private property. The indoor is a potential commons and is open as a topological space with multiple spatialities and tempor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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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고고자료로 본 양산지역 정치체의 추이

저자 : 박광춘 ( Park Kwang-choon ) , 김다빈 ( Kim Da-bi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1-24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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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지역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부부총 발굴조사 이후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양산지역 정치체의 성격은 크게 신라지방세력설과 독립정치체설로 양분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신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양산지역을 신라의 권역으로 인식하면 지리적으로 금관가야와 낙동강을 사이에 둔 최전방 전선에 해당된다. 최근에 이루어진 양산지역 고분 분포 조사에서 약 1000기를 넘는 고분이 확인된 바 있는데 과연 양산지역이 신라의 최전방이라면 수많은 고분이 축조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본 연구가 시작되었다.
본고에서는 양산지역 고분의 개별 묘제 분석을 통해 고분의 특징, 정치체의 성격과 변동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분석결과 양산지역 고분은 3~5세기 전반경에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수혈계횡구식석실묘가 조영되는 5세기 중후반에 이르면서 변화가 감지된다. 부부총과 그 인근 고총고분의 묘제는 가야 특유의 수혈계횡구식석실을 사용하지만 부장유물의 내용적 측면에서는 신라의 고총 출토품과 높은 유사성을 보인다. 재지적 성격을 가진 묘제를 매장주체부로 하며 입지 선정 등을 통해 가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음과 동시에 부장유물에서는 신라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음도 확인된다. 이는 양산이 창녕과 같은 신라와 접경을 이루는 변경지역에 위치한 결과로 판단된다. 장신구와 같은 유물을 통해 신라와 밀접한 관계성을 가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현상을 반드시 신라의 일부이자, 신라 중앙에서 파견된 귀족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전반적인 고분문화를 통해 볼 때 양산 정치체는 가야 정치체이자 이후 독립된 소국으로서의 위상을 이어가다가 금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전엽 이후부터 방형 석실묘가 축조되는 단계에 이르러 점차 신라의 지방으로 완전한 편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전반적인 고분문화를 통해 볼 때 창녕과 같이 신라 접경지역의 가야 정치체로 판단된다.


In the Yangsan area, excavations have been actively conducted since the couple's gun excavation survey conducted in Japanese colonial era. The characteristics of politics in Yangsan are largely divided into the theory of local power in Silla and the theory of independent politics, but so far, the view of Silla is dominant. Recognizing the Yangsan area as Silla's area, it is geographically the front line between Geumgwan Gaya and Nakdonggang River. A recent survey on the distribution of tombs in Yangsan confirmed more than 1,000 tombs, and this study began with the question of whether numerous tombs could be built if the Yangsan area was at the forefront of Silla.
In this paper, an archaeological approach to the characteristics of ancient tombs, the nature and changes of political bodies was attempted through the analysis of individual seedlings of ancient tombs in Yangsan. As a result of the analysis, it was confirmed that ancient tombs in Yangsan were strongly influenced by Geumgwan Gaya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3rd to 5th centuries, and changes are detected as they reach the mid-to-late 5th century when the blood transfusion plan stone chamber was built. The tomb of the couple's tomb and the nearby ancient tomb use Gaya's unique stone chamber for blood transfusion planning, but in terms of the contents of the burial relics, it shows high similarity to Silla's ancient tombs excavated. It is confirmed that the tomb with a residential character is the burial subject, and that it has Gaya elements through location selection, and at the same time, it is also confirmed that it has a Silla-style color in the burial relics. This is believed to be the result of Yangsan being located in the border area bordering Silla such as Changnyeong. It cannot be denied that it was closely related to Silla through relics such as ornaments, but this phenomenon cannot necessarily be concluded as a part of Silla and a nobleman dispatched from the center of Silla. From the overall ancient tomb culture, Yangsan politics continued its status as a Gaya politics and an independent small country, and gradually became a part of Silla when square stone chamber tombs were built from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when Geumgwan Gaya collapsed. From the overall ancient tomb culture, it is judged to be a Gaya political body in the Silla border area like Chang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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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梅軒集』의 版本과 文化財的 價値에 관한 硏究

저자 : 朴文烈 ( Park Moon-year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9-27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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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軒 權遇는 麗末鮮初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 중의 한 분으로 『梅軒集』을 남겼을 뿐 아니라 친형인 陽村 權近과 더불어 성리학에도 능통한 天下·百世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매헌의 저술인 『梅軒集』은 문종 2(1452)년에 전라도 錦山에서 5권으로 初刊되고 경종 2(1722)년에 전라도 務安에서 6권으로 重刊된 바 있으나, 이들 판본 간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양상들이 연구된 바는 없었다.
현재 초간본 『梅軒先生文集』은 몇 장이 缺落된 상태로 간송미술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판본은 국내외를 통하여 그 전래가 흔치 않은 唯一本이다.
따라서 『梅軒集』의 초간본과 중간본은 각각 그 위상에 걸맞은 문화재의 지정을 통하여 연구되고 유지·관리될 필요가 절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analyzes on the editorial characteristics and the cultural values of the Maeheonjip. The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Kwon U whose pen-name is Maeheon, one of the most eminent officials and scholars from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to early Joseon Dynasty, is revered as the author of Maeheonjip (Collected Works of Kwon U) and an exceptional philosopher of Neo-Confucianism, along with his elder brother, Gwon Geun whose pen-name is Yangchon.
Maeheonjip was first published in five volumes in Geumsan, in the second year of King Munjong's reign (1452)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second year of King Gyeongjong's reign (1722), it was republished as six volumes in Muan. There has been, however, no previous research on the subject of peculiarities and characteristics of these individual woodblock editions.
Currently, the first edition of Maeheonseonsaengmunjip is housed in the 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 with several pages being damaged. Nevertheless this woodblock edition is one of the rare surviving examples among the works of Maeheonjip both home and abroad.
It is, therefore, necessary to designate both the first and the second editions of Maeheonjip as appropriate cultural heritage, fostering an incentive for further research and conservation eff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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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 세조~성종대 관요의 설치와 정비

저자 : 김귀한 ( Kim Kwi-ha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7-30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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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조~성종대 관요(官窯)가 설치·정비되는 과정을 당시의 정치사적 측면에서 해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조선과 왕, 그리고 백자를 유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틀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15세기 조선의 시대적 과제는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통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백자는 세종대부터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세조는 기명(器皿)을 사용하는 데에도 명분(名分)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1460년대 세조는 그의 전제 왕권에 균열이 발생하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에도 '군군신신(君君臣臣)'이라는 덕목을 투영하였다. 이후 1467년경 백자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두었다. 관요는 세조가 1460년대 그의 전제 왕권을 재정립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은 1469년 11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왕권은 1476년 1월 친정(親政)을 시작할 때까지 미약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친정 이후 원상제(院相制)를 폐지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관요 체제 또한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1480년대에 운영된 우산리 14호 요지에서 출토된 '천(天)·지(地)·현(玄)·황(黃)' 등 천자문 자호(字號)가 새겨진 백자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1490년대 백자의 번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가마 구조에 대한 고민과 사옹원의 시지(柴地) 분급도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선 초 어기로서 백자 위상 강화 → 백자 생산·소비 통제 → 관요 설치·정비를 관통하는 키워드(key word)는 바로 '왕권의 강화'로 판단된다.


This article seeks to elucidate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gwanyo between King Sejo and King Seongjong based on its political history. Accordingly, it presents a framework for organically understanding Joseon, its kings, and white porcelain.
The historical task of Joseon in the 15th century was to lay the foundation for governing the nation centered on the king. White porcelain evolved since King Sejong's reign in conjunction with the royal authority. King Sejo even emphasized the need for a rationale in using tableware. When his despotic rule began to be challenged in the 1460s, King Sejo emphasized the virtue of “the place of the king and his subject” even in the daily use of tableware. Furthermore, he established gwanyo around 1467 to control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white porcelain. It is presumed that King Sejo established gwanyo as a means to re-establish his despotic rule in the 1460s.
King Seongjong ascended the throne in November 1469 at a young age. His authority as a king was relatively weak until he began ruling directly in January 1476. Thereafter, King Seongjong launched efforts to strengthen his authority by abolishing wonsangje. In line with this, the gwanyo system also began to stabilize. White porcelain engraved with the Chinese character-numbers such as cheon, ji, hyeon, and hwang excavated from the 14th kiln site of Usan-ri, which was operated in the 1480s, supports this hypothesis. The issue of the kiln structure for increasing the success rate of white porcelain production in the 1490s and the apportioning of the firewood site at Saongwon can be interpreted within the same context.
Essentially, the keyword common to strengthening the status of white porcelain as the royal pottery in early Joseon, regulating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white porcelain, and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gwanyo appeared to be “strengthening the king's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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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 남명학파의 결집 양상 - 鄭蘊·朴絪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소희 ( Park So-hee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5-3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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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경상우도 남명학파는 학문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정파상 북인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대 대북이 일으킨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유교 성리학 사회에서 집권명분을 잃었고 나아가 정인홍의 회퇴변척까지 더해지며 인조반정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정인홍은 역당의 주범으로 반정 직후 처형당했고 향촌 내 정인홍을 따랐던 문인들은 심각한 배척을 받았다.
학파·정파의 불가분 관계로 인해 잔존한 남명학파는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특히 합천권은 광해군 대 「갑인봉사소」를 올리며 대북에 반대했던 정온과 그의 의견에 동조했던 박인을 중심으로 재결집해 갔다. 정온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중심에 있었고, 그 문인들은 대체로 중북계와 연관된 이들이 많았다. 박인 역시 반정 이후 조차마의 부탁으로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과 「남명 연보」를 편찬하는 등 남명학파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수구계(修舊契)를 결성하여 합천 남부권 사족들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용연재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며 문인을 양성했다. 박인의 문인들도 남명 후손을 비롯하여 대체로 중북계열에서 많이 확인된다. 이는 반정 이후 정온·박인을 통해 중북계가 결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1640년(인조 18) 박인이, 이듬해 정온까지 사망하면서 합천권 일대 남명학파의 구심력은 약화되어 갔고, 이들의 후손을 비롯한 우도 유림들은 학문·당색적으로 변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In the late Chosun era, the Namyeong School hold the perspective of the Bukin(北人) as a political party based on the academic relations. However, 'deposing mother and killing younger brother'(廢母殺弟) by the Daebuk(大北) during King Gwanghaegun's reign lost the justification of the party's power and then, Hoetoe Byeoncheok(晦退辨斥) by Jeong In-hong caused the extreme result of the King Injo's restoration(仁祖反正). Jeong In-hong was executed as a principal traitor just after the restoration, and the literary men who followed him were seriously ostracized.
The remaining members of the Namyeong School had to seek their own survival, because of the inseparable relations between the academic and political parties. Especially in Habcheon region, Jeong On who appealed to the king with Gabinbongsaso(甲寅封事疏) in the King Gwanghaegun's reign, and Park In who had agreed with him became the center figures of the party's re-gathering. Jeong On was the center of the Namyeong School after the restoration, and his literary men were usually related to Jungbuk group. Park In became a core figure of the Namyeong School as he published 『Sanhaesauyeunwonrok(山海師友淵源錄)』 according to Cho Cha-ma's request after the restoration. He made the Sugu group(修舊契) for enhancing the gathering among the literati class in southern Habcheon region, and engaged teaching in Yongyeonjae for raising literary men. His literary men usually belonged to the Jungbuk group including the descendants of Namyeong. It means the Jungbuk group made their gathering through Jeong On and Park In in the Namyeong School since the restoration. However, as Park In died in 1640(the 18th year of King Injo) and Jeong On also deceased in the following year, the Jungbuk group became weakened, and the Confucian scholars in Uhdo including their descendants had to seek changes in the academic and political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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