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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논총 update

  •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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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 : 1738-6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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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7)~84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768
석당논총
84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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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병희 ( Lee Byung-hee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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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는 고려시기 생태환경을 파악하기 위해 살펴야 할 중요한 동물의 하나이다. 매는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다른 야생동물과 긴장 관계에 있으며, 가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조류였다. 고려시기 여러 종류의 매가 있었으며 전국 도처에서 서식하였다. 매는 다른 조류들이 두려워하는 맹금류(猛禽類)였다.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를 완상했다. 사람들은 매의 굶주림 상태를 조절해 매를 통제할 수 있었다. 매는 배가 부르면 종종 사람을 따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매를 잡는 방법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매를 포획하면 일련의 조련 과정을 거쳤다. 원 간섭기에 고려는 원의 황제들에게 진헌하기 위해 많은 매를 필요로 했는데, 이때 매의 포획과 조련을 담당할 기구로 응방(鷹坊)을 설치했다. 많은 수의 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민인의 닭과 개를 탈취했다. 엄청난 닭과 개를 매의 먹이로 제공한 결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의 공급 부족을 초래했다. 매는 사냥에 널리 활용되었는데, 매 사냥은 통상 가을과 겨울에 행해졌다. 매 사냥에 앞서 어느 정도 매를 굶주린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사냥꾼은 말을 타고 팔에 매를 얹고서 사냥에 나섰는데, 이때 여러 명의 몰이꾼이 동행했다. 매 사냥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은 꿩, 토끼, 여우였다. 고려에서 거의 모든 계층이 매 사냥에 종사했는데, 원 간섭기에는 국왕이 매 사냥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매는 국제 관계에서 국신물(國信物)로 널리 활용되었다. 고려초에 매를 거란에 보낸 일이 있으며, 원 간섭기에는 다수의 매가 원에 진헌(進獻)되었는데, 충렬왕에서 충숙왕 사이에 진헌된 매는 1천 마리를 상회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매가 국외로 반출된 결과 고려에서는 매의 개체수가 감소한 것 같다. 조선초 매가 하삼도에서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매 개체수의 감소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The falcon is one of the important animals to examine for the understanding of Goryeo's ecological environment. In Goryeo, there were really many kinds of falcons, which inhabited around the state. The falcon was a bird of prey that other birds were terrified of. For its beauty, the falcon was raised and appreciated by many people. Even in ancient societies, people used a falcon to hunt according to records. Human beings were able to control falcons by regulating their hunger state. In many cases, falcons would flee instead of following humans when they were full. Tools were used to capture falcons, but it was a general practice to capture falcons with a net.
During the interference period by Yuan, Goryeo needed many falcons to present to Yuan emperors and accordingly established a national agency called Eungbang to supervise the capture and management of falcons. Many people of the country was registered at Eungbang and capture falcons. Once a falcon was captured, it went through a series of training procedures. Large falcon farms would extort common people for their chickens and dogs to feed their falcons in many cases. During the interference period by Yuan, so many chickens and dogs were fed to falcons that people suffered a very unstable supply of protein.
A falcon was utilized most widely during hunting. Falconry usually happened in autumn and winter. Falcons were starved to some degree before they were put in hunting. A hunter would ride on horseback with a falcon on his arm and go out in the field to hunt. Generally, several beaters were mobilized for this occasion. They would usually seek after the pheasant, rabbit, and fox in falconry. In Goryeo, almost all the social classes engaged in falconry. During the interference period by Yuan, falconry led by a king was prevalent.
The falcon was widely utilized as a present of trust between countries in international relations. In early Goryeo, they presented falcons to the Kitans. During the interference period by Yuan, they sent a good number of falcons to Yuan. The number of falcons presented to Yuan during the period from King Chungryeol to King Chungsuk exceeded 1,000 easily. As a lot of falcons were leaked overseas, Goryeo must have suffered a sharp drop in the falcon population. In early Joseon, falcons were hardly captured in Hasam Provinces(Chungcheong, Gyeongsang, and Jeolla), which is estimated to have connections with the reduction of the falcon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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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정훈 ( Han Jeong-hun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7-7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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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납자기의 운송 문제에 관한 선행 연구를 검토하면서 새로운 이해 방향을 제시하고자 작성하였다. 아울러 2곳의 상품 자기소가 위치하였던 상주지역 자기의 운송 문제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선행 연구에서는 왜구의 약탈이 본격화하는 1370년대부터 조선이 건국하는 1392년 이전까지 공납자기가 육로로 운송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사료의 재해석을 통해 고려 말엽에도 공납자기가 자기소의 교통 입지와 운송 여건에 따라 육로뿐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운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도자사 연구에서는 공납자기를 생산한 자기소의 교통 입지가 양호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보다는 토양·수림 등의 입지 조건이 양호한 지역에 조성되었던 자기소에서 생산한 자기를 공납하기 위해 운송제도와 주변의 교통시설을 활용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자기 생산지인 상주지역에서도 백두대간의 산지로 인한 불편한 교통 입지 속에서 인근 역로를 이용하여 자기를 실어 날랐다. 그런데 상주 공납자기의 운송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낙서역과 용산역이 세조 5년(1459)에 인근의 낙양역과 낙평역에 각각 통합되어 사라졌다. 이것은 1467년 광주 관요의 설치 이전에 이미 상주 자기소의 생산 활동이 줄어들어 그 위상이 약화함에 따라 인근 역·역로의 재편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를 참고하면, 교통운수사 연구에서 자기를 비롯한 공납품의 운송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thesis was prepared to suggest a new method of comprehension obtained while reviewing previous studies on the issues related to transportation of ceramic wares as tributes. In addition, the problems related to the transportation of ceramic wares as tributes in the Sangju area, where two high-quality porcelain workshops were located, were examined.
Based on previous studies, it was understood that ceramic wares as tributes began being transported by land in the 1370s, when the plundering of Japanese pirates started in earnest, until 1392, when the Joseon Dynasty was established. However, through reinterpretation of related historical materials, at the end of the Goryeo period, as in the first half of the fifteenth centur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ceramic wares as tributes were transported not only by land but also by sea depending on the location and transportation-related conditions of areas where kilns were located.
In current studies related to ceramics, there is a tendency to understand that the transportation location of the porcelain workshops that produced the ceramic wares as tri1butes was favorable. However, in contrast to such a perspective,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at offering of the high-quality porcelain produced at the kilns built in areas with a favorable locations, such as places where kaolin and forests were present, as tribute utilized the transportation system and surrounding transportation facilities.
Even in Sangju, a main area where porcelain was produced in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porcelain was transported utilizing a station nearby at an inconvenient location in the mountainous region of the Baekdudaegan. However, Nakseo Station and Yongsan Station, which performed a constant role in the transportation of the ceramic wares as tribute of Sangju, were merged into Nakyang Station and Nakpyeong Station located nearby in the fifth year of King Sejo (1459), respectively, and thus disappeared. This can be understood as having an effect related to the reorganization of nearby stations and roads as the level of production activity related to the porcelain of Sangju was reduced and its status weakened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the royal kiln in Gwangju in 1467. Upon referring to these examples,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problems related to the transportation of tributary goods including ceramics in terms of conducting studies related to the history of transporting good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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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은경 ( Park Eun-kyung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95 (1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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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시대를 맞이하여 글로벌 환경이 바뀌고 있다. 한편 국가 브랜드를 제고하는 성장 동력으로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괘불탱은 국가·사회적 경쟁력을 제고하고 신(新)문화 창출을 기여할 수 있는 글로벌 헤리티지이다. 이 글에서는 괘불탱의 확장성에 대해 몇가지 문제 제기를 시작으로, 연구 시각의 다변화, 성스러운 유산의 현대적 활용으로서의 신문화 창출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문제 제기는 괘불탱의 문화생명력과도 직결되는 괘불탱의 쓰임새, 안정적인 보존과 점검체계화이다. 그리고 괘불탱 원형의 DB화 및 원형 자료 활용, 아카이브 구축 문제이다. 괘불탱의 문화생명력을 지향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 기획·구축에 관해서이다.
다음은 연구 시각의 다변화이다. 괘불탱의 크기와 '丈六掛佛'용어 문제, 연화수지형 장엄신 괘불 도상의 불신관과 중층성문제, 괘불탱을 둘러싼 1차적인 자료(괘불지주, 괴불대, 괘불싸개, 목봉, 도르래 등)에 대한 중요성 인지와 총체적인 연구, 괘불의 무형자산(화승, 괘불재)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글로벌 장(場)으로서의 신문화 창출을 위해 성스러운 유산의 현대적 활용에 관한 것이다. 첫째, 불교계의 영험력을 지닌 'K-스토리' 발굴이다. 이는 작가에게 새로운 창작유산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둘째, 치유와 공감의 헤리티지로서, 괘불탱이 지닌 가치의 확대와 새로운 가치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자연재해, 질병과 기근 등 황폐화된 국토와 민심 수습을 위한 다양한 불교의례 행사에 괘불이 사용되었다.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등장한 유산이자, 치유를 위한 공동의 무형유산이다. 고통과 갈등, 반목과 대립에서 화해와 공감의 대표격 헤리티지로 가치를 확대해야 한다. 세째, 新문화관광콘텐츠 개발에 활용하고, 지역사회로 환원하여 지역민들의 문화적 삶의 지수를 높이도록 해야 한다. 콘텐츠 개발을 지원하는 원소스멀티유즈(OSMU)의 원천소스 발굴에 노력해야 한다. 대형 괘불을 법당에서 야외 중정으로 옮기는 괘불이운은 중요한 종교의례이다. 특히, 가마에 괘불을 모시고 이운하는 광경은 고전의 행상(行像) 전통을 계승한 흥미로운 축제의 방법이다. 법고창신을 되새겨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하여 현대 축제에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초연결시대의 신문화 창출은 문화의 힘으로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치유와 화해를 통해 공감과 공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괘불탱의 문화생명력이 미래에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The global environment is changing in the face of hyper -connected age. On the other hand, the importance of culture is highlighted as a growth engine for improving national brands. Gwaebul Painting(掛佛幀) is a global heritage that can enhance national and social competitiveness and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a new culture. In this article, we discussed the diversification of research views and the creation of a new culture as a modern utilization of sacred heritage, starting with the raising of several questions about the scalability of Gwaebul Painting.
First of all, the question raised is the use of the Buddha directly related to the cultural vitality of Gwaebul Painting, the stable preservation and inspection systemization. Also, it is a matter of DB conversion of the original form of Gwaebul Painting, utilization of the original form data, and the construction of the archive construction. It is about the planning and construction of a platform that creates new values for the cultural vitality of Gwaebul Painting.
The following is a diversification of research views. It raised the question of the size of the Gwaebul Painting and the problem of the term “one to six feet long”, the question of the Buddha's body and multilayered nature, the recognition of the importance and overall research on the primary data (support bar of Gwaebul painting, wooden sticks, pulleys, etc.).
And it is a matter of modern use of sacred heritage to create a new culture. The first is the discovery of “K-Story,” the spiritual power of the Buddhist world. This is an opportunity for writers to create a new creative heritage. Second, as a heritage of healing and empathy, we must seek to expand the value of Gwaebul Painting and shift to new values. Buddha was used for various Buddhist ceremonies to settle the people's hearts and minds, including war, natural disasters, disease and famine. It is a heritage that appeared to heal conflicts and a common intangible heritage for healing. The value should be expanded from pain, conflict, antagonism and confrontation to a representative heritage of reconciliation and empathy.
Third, it should be used to develop new cultural tourism contents. This should be returned to the local community and the cultural life index of local residents should be increased. Efforts should be made to discover the source of the OSMU (One-Source Multi-Use) that supports content development. It is an important religious ceremony to move a large Gwaebul Painting from a temple to an outdoor courtyard. In particular, the scene where Gwaebul Painting is enshrined and moved on a vehicle(行像) is an interesting way of celebrating the tradition of moving classical Buddhist statues. We need to learn from the old, develop new methods(法古創新), and use them for modern festivals.
The goal of creating a new culture in the hyper-connected era is to distribute it to others through the power of culture.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promote empathy and symbiosis through healing and reconciliation. Therefore, this is why the cultural vitality of Gwaebul Painting is more urgent for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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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모영 ( Heo Mo-yeong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3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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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세기 후반 이후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거제와 통영 일원의 연안과 도서의 많은 마을에는 인구와 토지, 생업,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각종 문서를 생산, 보관, 전승하는 기록문화 전통이 창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이들 마을에서 발굴한 고문서 중 특별히 거제 다대마을의 마을 공동자산인 미역밭, 즉 곽전의 관련 고문서 성책인 곽전방매책을 대상으로 다대 동중의 곽전 운용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 목적이다.
다대의 마을 운영 기구인 동중에서는 공동자산인 미역밭(곽전)의 경계를 정하고 매년 채취권을 배분한 뒤 그것을 엄격하게 기록으로 정리하여 보관 전승하였다. 이것은 현재 경남 남해안 어촌지역 중 다대마을에 유일하게 전승되는 기록문서로, 특별히 이러한 기록문화는 별신굿 등을 통하여 신성한 책무로까지 간주되었다. 곽전방매기록은 1864년부터 1907년까지 지속적으로 작성-보전되었다. 그 후에는 간헐적으로 작성되는데, 이것은 1907년 전후 수산자원이 근대적 소유권 제도로 법제화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요컨대 이 연구는 19세기 후반 이후 격동기 속에서 방대한 기록문화를 창출하였음에도 이제까지 간과한 거제 통영 일원의 연안과 도서 지역 어촌의 역동성과 그 기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Recently,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1970s, it was revealed that many villages along the coast of Geoje and Tongyeong created a tradition of record culture that produced, stored, and passed on various documents on various topics, including population, land, occupation, and cultu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operation of Gwakjeon within the Dadae Village through an examination of the Gwakjeonbangmaechaek, a document related to the most important common asset of the Dadae village, the seaweed field.
Gwakjeonbangmae records were continuously written and preserved from 1864 to 1907. After that, it was written intermittently, which coincided with the legalization of fishery resources as a modern ownership system in 1907. In short, this study will help to shed light on the dynamics and mechanisms of coastal and island fishing villages in Tongyeong, Geoje, which have been overlooked until now despite the creation of a vast documentary culture in the turbulent period since the lat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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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15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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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 조선의 위문대 안에서 여성 예인의 존재방식을 고찰하고자 했다. 이동하는 위문대 안에는 기생을 포함하는 조선인 여성이 혼종적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 각지를 순회하면서 무용과 음악으로 위문연예를 선보였으며, 황군위문금과 국방헌금까지 비/자발적으로 헌납하였다. 이들은 애국기생 혹은 애국여급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남성성의 훼손된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위문대는 여성 예인이 새롭게 출현하는 중층적인 공간이 되기도 했다. 임소향, 마금희, 김안라, 장시연, 김숙자 같은 경우 여성 신체와 목소리를 통해 '명무명창'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n this article, I tried to examine the way of existence of female entertainers in the comfort group of colonial Joseon in the 1930s and 1940s. Within the moving comfort group, Korean women, including gisaeng, belonged hybridly. They toured all over the Joseon Dynasty, performing consolation entertainment with dance and music, and non/voluntarily donated money for condolences to the imperial military and national defense donations. They imaginatively compensated for the damaged identity of colonial masculinity under the name of patriotic gisaeng or patriotic waitress. However, the comfort group has also become a multi-layered space for female artists to emerge. Im So-hyang, Ma Geum-hee, Kim An-ra, Jang Si-yeon, and Kim Sook-ja were able to be reborn as 'masterpiece dancer/singer' through the female body and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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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승호 ( Kim Seung-ho ) , 하형주 ( Ha Hyoung-jo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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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시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와 독일의 나치주의는 미술과 체육을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정권의 문화정책을 구현한 것이자 식민지시대 조선의 현실을 국제적으로 선언한 체육행사다. 반면에 <퇴폐미술전>과 <조선미술전람회>는 식민주의와 인종우월주의를 구현한 프로파간다전시다. 이 두 전시가 하나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명목아래 추진된 관전이자 여전히 미해결된 과거사의 문제로 남아있고,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의 기수로 평가받던 전전의 아방가르드예술가들과 그들이 혁신적이자 실험적으로 고안한 결과물들을 퇴폐로 낙인찍은 미술전시이다.
이 연구는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의 프로젝트로서 베를린 올림픽(1936)과 미술전시(<조선미술전람회>|<퇴폐미술전>)을 다시 들여다본다. 1930년대 나치정권의 선전도구였던 <퇴폐미술전시>와 내선일체를 위한 선전도구였던 <조선미술전람회>는 모더니즘 미술에 인종주의와 식민주의를 부각시켰고, 종족우월주의를 위한 도구로 체계적이자 조직적으로 기획된 “1936 나치 올림픽”은 인류의 제전이자 평화를 추구한 모더니즘올림픽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서 황영조가 우승하면서 과거의 기억과 더불어 식민지시대가 회자된다. 미술전시의 경우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가 최근에 들어와 탐구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불편한 기억 속에 은닉되었던 <퇴폐미술전>에 대한 비판이 68세대로부터 수면위로 부상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미술전시(“선전”/“퇴폐미술전”)은 20세기 모더니즘의 프로젝트를 사회(집단)학과 심리(개인)학적 투사(projection)를 요구한다. 모더니즘의 프로젝트로서 올림픽과 미술전시는 부정의 변증법을 들여다보는 기제(機制)이자 미술전시(선전과 퇴폐미술전)과 기억, 올림픽(1936년 베를린)과 기억은 사회학적 성찰의 과제다.
프랑크푸르트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모더니즘(Modernism)은 인류의 보편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한 프로젝트라고 규정한다. 모더니즘에서 산출된 인류의 평화와 자율성이 정치사회적으로 활용된 것에 대해 하버마스는 '모던과 모던의 기획자체가 좌절된 것이 아니라 모던의 기획을 동반했던 오류들과 모던을 지양하려 했던 극단적인 기획의 잘못에서 배워야 한다.'(Kleine Politische Schriften, 1957)라고 경고한다. 모더니즘이라는 보편주의의 토대위에 예술과 체육이 자체의 고유한 의미에 따라 발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면서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의 프로젝트가 미완이라고 선언한다.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미술이 <퇴폐미술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종족주의와 식민주의를 위해 조작되고 극단적으로 기획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식민주의를 공식화하고 종족우월주의의 도구로 활용되면서 모더니즘의 프로젝트는 올림픽과 기억 그리고 미술전시와 기억으로 해석된다.


During the period of modernism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Japanese colonialism and German Nazism used art and sports as political tools. “1936 Berlin Olympics” is an athletic event that embodies the cultural policy of the Nazi regime and internationally declares the reality of colonial Joseon. On the other hand, < Degenerate Art Exhibition > and < Joseon Art Exhibition > are propaganda exhibitions that embody colonialism and racial supremacy. These two exhibitions, one of which is a spectatorship promoted under the name of modernization of Joseon and which still remains as an unresolved issue of the past, and the other, of the avant-garde artists of the prewar era, who were evaluated as standard bearers of modernism, and the results they devised innovatively and experimentally, are presented. It is an art exhibition branded as decadent.
This thesis examines the Berlin Olympics (1936) and art exhibitions (< Joseon Art Exhibition >|< Degenerate Art Exhibition >) as a project of “Modernism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 Degenerate Art Exhibition >, a propaganda tool for the Nazi regime in the 1930s, and the < Joseon Exhibition >, a propaganda tool for the unification of Korea and Japan, highlighted racism and colonialism in modernist art and systematically and systematically promoted it as a tool for racial supremacy. The planned “1936 Berlin Olympics” will be recorded as a stain on the history of the Modernism Olympics, which pursued peace as well as a festival for mankind.
The story surrounding Sohn Ki-jung, who won the gold medal in the marathon at the 1936 Berlin Olympics, and Hwang Yeong-jo, who won the marathon at the 1992 Barcelona Olympics, talk about the colonial era along with memories of the past. In the case of art exhibitions, while the Joseon Art Exhibition organized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recently entered and became the object of inquiry, criticism of < Degenerate Art Exhibition >, which had been hidden in uncomfortable memories, surfaced from the 68th generation. The 1936 Berlin Olympics and art exhibitions demand social (group) and psychological (individual) projections of the 20th century modernist project. As a project of modernism, the Olympics and art exhibitions are a mechanism to look into the dialectic of negation, and art exhibitions (Joseon Art Exhibition and Degenerate Art Exhibition) and memory, and the Olympics (Berlin, 1936) and memory are tasks for sociological reflection.
Frankfurt philosopher Jürgen Habermas defines Modernism as a project developed based on universalism of mankind. Regarding the political and social use of the peace and autonomy of mankind produced by modernism, Habermas said, 'It is not that the modern times and their planning itself were frustrated, but the errors that accompanied the modern planning and the mistakes of the extreme planning that tried to abolish the modern times. You have to learn from (Kleine Politische Schriften, 1957). According to him, despite the fact that art and physical education had to be developed according to their own unique meaning on the basis of universalism called modernism, the project of modernism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was re-examined as a memory while declaring that it was incomplete as it was buried in political ideology.
Modern art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was manipulated and extremely planned for tribalism and colonialism in < Degenerate Art Exhibition > and < Joseon Art Exhibition >. As the 1936 Berlin Olympics formalized colonialism and was used as a tool for racial supremacy, the project of modernism is interpreted as the Olympics, memories, and art exhibitions and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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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인로 ( Yoon In-ro )

발행기관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간행물 : 석당논총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1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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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거듭 문제되는 것이 인사(人事), 곧 힘의 위임(파견된 힘)이라고 했을 때, 홉스의 『시민론』에서 명시적으로 논구되고 있는 최고 통령권자의 '권리(Jus)와 집행(exercitium)' 간의 분리론 및 접합론은 시의성을 잃지 않으며 다시금 돌아가 논의될 필요가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본 논문은 그런 필요에 응하여, 1장에서는 그같은 이접상태를 통해 통치의 무제약적인 확장과 주권면책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권리'는 '전체의 제1동인(primus omnium motor)'으로서의 신적인 권리로, 집행은 '제2원인들의 질서화(ordinem causarum secundarum)'라는 통치집행으로 분석될 것이다(『리바이어던』의 유명한 표지 혹은 정치도상 속에서 리바이어던이 왼손에 쥐고 있는 제사장의 지팡이는 신적인/제1동인적인 '권리'를,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은 제2원인들을 질서화하는 '집행'을 표시한다). 이를 압축하는 유비 개념으로 2장에서 적출해 본 것이 '모세의 자리(=최고 통령권자의 권좌)'이다. 그 개념이 신의 권리로 파송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어떻게 절대적 복종을 정초하는지가 분석될 것이다. 이 2장은 3장에서 예수가 로마 황제의 권리/집행을 두고 했던 유명한 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주라”와 그 말의 연원이 되고 있는 당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화폐 표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강된다. 그렇게 권리와 집행의 이접상태는 '아버지·왕·주인(父·王·主)'의 힘이 발현되는 것으로서 다시 정의될 것이다. 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바르 코흐바가 로마에 항거하기 위해 주조하고 유통시켰던 화폐가 '신의 텅 빈 왕좌'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메시아적 심판과 구원의 경제로 분석한다. 이에 뒤이어진 홉스의 「요한복음」 인용, 특히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은 채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위임하였다”는 문장이 분석의 마무리에 놓일 것이다.


When it is said that personnel affairs, that is, the delegation of power, are repeatedly problematic in politics, the separation between the 'rights and the execution' of the supreme ruler, which is explicitly discussed in Hobbes' On the Citizen, and injunction seems to be a viewpoint that does not lose its timeliness and needs to be discussed again. Chapter 1 of This article analyzes the process in which the unrestricted expansion of government and the Sovereign immunity complement each other through such a disjunctive state. In the process, 'right' will be analyzed as a divine right as 'prime mover(primus omnium motor)', and execution will be analyzed as 'ordering of secondary causation(ordinem causarum secundarum)'. As a concept to indicate this, the 'seat of Moses' was extracted in Chapter 2. It analyze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bsolute obedience through the concept that Christ, sent by God's right, is the seat of Moses. Chapter 3 analyzes the famous words of Jesus regarding the rights/execution of the Roman emperor, “Give back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and the emblem of money of Emperor Tiberius. In the process, the disjunctive state of rights and enforcement will be redefined as the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Father, King, and Master'. Chapter 4 analyzes the currency that Israel's Bar Kochba minted and circulated to protest Rome. It analyzes the meaning of emblem of money the 'empty throne of God' as the economy of messianic judgment and salvation. Next, the quotation from Hobbes' Gospel of John, especially the sentence, “the Father judges no one, but has entrusted all judgment to the Son,” will come to the conclusion of the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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