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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NG GOOK SA HAK

  •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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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반년간
  • : 1225-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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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69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16
간행물 제목
69권0호(2020년) 수록논문
권호별 수록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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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대 중기 미가와 인구, 그리고 화폐 -건륭연간 미가변동 해외연구 검토-

저자 : 홍성화 ( Hong Sung-hwa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4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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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청대 건륭년간의 물가 상승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 여러 학설들을 정리하였다. 초기 彭信威와 全漢昇는 주로 재정 지출과 인구 증가를 각각 원인으로 상정하였다. 그 뒤에는 내재적인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 특히 세계경제와 의 연동 속에서 은유입을 주요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점차 통용력을 얻게 되었다. 다만 건륭년간을 두 시기로 나누어서 1736~1775년은 인구증가가 화폐증가 보다 빠르고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른 시기여서 경제적으로 불황기였으며, B期인 1776~1795년은 화폐증가가 농업성장보다 빠르고 농업성장이 인구증가보다 빠른 시기로 호황기라고 보았다. 반면 岸本美緖는 이에 대해서 건륭초기 역시 호황기였다는 논지에 기반하여 이에 반박하였다.
黑田明伸을 비롯하여 폰 글란, 彭凱翔 등의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상당히 많은 경우, 다시 해외로부터의 은유입을 강조하기 보다는 중국 사회의 내부 질서 문제로 다시 복귀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청대 물가 변동의 원인을 단순히 인구증가나 화폐 증가라는 식으로는 물가변동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해했다고 말하기 불충분해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복잡성을 낳은 청대 중국사회가 어떠한 시장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규명해야 할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summarizes several theories about the causes of inflation during the Qinglong Emperor's reign in the Qing Dynasty. In the early days, Peng xinwei(彭信威) and Han-Sheng Chuan(全漢昇) supposed financial expenditure and population growth were mainly attributed to the causes, respectively. After that, the view of assuming that the inflow of silver as the main cause of the external factors rather than the internal factors, especially in the connection with the global economy gained popularity. However, as the Qinglong year was divided into two periods, the first phase of 1736-1775 was the economic recession because the population growth was faster than currency increase and the currency increase was faster than agricultural growth. The other B period of 1776-1795 was considered as a booming period vice versa. On the other hand, Kishimoto Mio(岸本美緖) refuted the claim based on the argument the early period of the Qinglong year was also a booming period.
Most researches since the 1990s, including Kuroda Akinobu(黑田明伸), Richard von Glahn, and Peng kaixiang(彭凱翔), showed the trend of turning to the internal order issue in Chinese society rather than emphasizing the inflow of silver from overseas. At the current time, it is fact that it is not enough to say that the cause of the inflation in the Qing Dynasty indicated simply to population growth and currency increase in lack of understanding of the diversity and complexity of economic fluctuation. However, it is required to acknowledge that there are still many factors to be identified as to what kind of market mechanism in the Qing Dynasty, which produced such complex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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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琉球ㆍ日本関係における冠服と詔勅

저자 : 渡辺美季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55-9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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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 동유라시아 세계에서는 中國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성립하여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中華'의 皇帝와 '夷狄'의 首長 사이에 맺어진 上下/君臣 관계를 기축으로 구상된 것으로 中華皇帝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夷狄首長에게 여러 물품을 頒賜하였다. 여기에서 중심이 된 물품은 皇帝의 명의로 발급된 詔令文書나曆· 王印· 冠服(冠과 服)으로 이외에도 본인의 글씨나 工藝品 등이 頒賜되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무엇보다도 양자의 君臣關係를 상징하는 '증표'였는데, 다른 한편으로 당사자 간의 이용에 머무르지 않고 이차 · 삼차적인 수용 · 이용 · 소비가 전개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본고에서는 17세기초 이후에 중국(明淸)에 朝貢하면서도 일본(德川政權)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던 琉球를 중심으로 琉球와 일본 관계에서 '皇帝의 頒賜品'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었고 어떻게 이용 · 소비되었는지를 冠服과 詔勅(詔書와 勅諭)를 예로 하여 일본의 사례(히데요시 冊封 시의 頒賜品) 와 비교하면서 검토 · 고찰하였다. 이로부터 琉球가 中華世界에서 갖는 자신의 지위를 일본에게 강조하여 일본에서의 자국 평가나 존재감을 높이는 도구로서 '皇帝의 頒賜品'을 활용하고 있던 것을 지적하였다.


前近代の東ユーラシア世界においては中国を中心とした国際秩序が成立·機能していた。それは「中華」の皇帝と、「夷狄」の首長との上下/君臣関係を基軸に構想されており、この関係の中で中華皇帝は夷狄首長に様々なモノを頒賜した。その中心となったのは、皇帝の名において発給される詔令文書や暦·王印·冠服(冠と服)であり、その他にも自身の書や工芸品などが頒賜された。それらは何よりもまず両者の君臣関係の「証し」であったが、一方で当事者間に留まらない二次·三次的な受容·利用·消費の展開も確認できる。
その一事例として、本稿では、17世紀初頭以降、中国(明清)に朝貢しつつ日本(徳川政権)の支配下にもあった琉球を中心に、琉球と日本の関係において「皇帝の頒賜品」がいかなる意味や価値を持ち、どのように利用·消費されたのかを、冠服と詔勅(詔書·勅諭)を例として、日本の事例(秀吉冊封時の頒賜品)とも比較しながら検討·考察する。これにより琉球が、中華世界における自らの地位を日本に対してアピールし、日本における自国の評価や存在感を高めるツールとして、「皇帝の頒賜品」を政治的に活用していたことを指摘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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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淸) 칙사(勅使)· 통관(通官)에의 조선 호피 · 표피 사여와 무역

저자 : 서인범 ( Seo In-beom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9-14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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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후금 조정에 公禮單을 바치는 외에도 胡差(혹은 金差)에게 별도의 私禮單을 지급하였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에게도 별도의 예단을 지급한 적이 있었다. 후금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예단을 강제하였던 것이다.
청조 성립 이후 勅使 편성은 정사 · 부사 각 1명, 通官 수 명, 提督 등으로 구성 되었다. 칙사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날까지 수차례의 宴會가 베풀어졌고 그 때마다 조선은 그들에게 예단을 지급하였다
특히 호피보다는 표피가 예단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청조가 성립한 이듬해 정사 · 부사에게 각각 호피 6장, 표피 29장이 지급되었으나, 태종 홍타이지가 죽고 順治帝가 등극하자 호피 1장, 표피 14장이 경감되었다. 황제의 등극을 자축하는 동시에 조선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선정을 베푼다는 의식에서 이러한 조치가 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에도 칙사 2명에게 표피 각 1장씩, 칙사 이하 都給禮單으로 정사 · 부사 각각 10장씩이 지급되었으나, 건륭제가 등극하자 각각 5장씩으로 줄어 들었다.
강희제의 조선이 바치는 歲幣 품목 중 紅豹皮의 全免, 건륭제의 칙사에게 공예 단으로 지급하는 표피의 半減 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 한편에서 통관들은 都求請· 別求請 명목으로 다량의 표피를 확보하였다.
통관들을 위시해 칙사 · 提督, 瀋陽의 황실과 八旗들도 표피 무역에 뛰어들었다. 진상과 예단용 표피가 감소하자 그 부분을 보충할 목적으로 강제성을 띤 무역이 행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때문에 이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던 조선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칙사나 통관이 요구하는 물품이 끝이 없어 이들이 거쳐 간 州· 郡은 피폐할 정도였다.


Joseon used to give private offerings which were not considered as official tribute to The Later Jin(後金)'s royal messengers. That was such a common custom since Ming(明)'s royal messengers visited Joseon, so The Later Jin's messengers forced Joseon to do the same because they already had known about the custom. After Qing dynasty established, royal messengers, who deliver the emperor's royal orrespondences, were consisted of one senior and junior messenger each, and several numbers of interpreters. When the messengers stayed in Joseon, they enjoyed banquets and the government gave offerings to them.
In that period, leopard furs were preferred than tiger furs. During the early period of Qing dynasty's establishment, six tiger furs and 29 leopard furs were given to each of senior and junior messengers. When Hong Taiji emperor(崇德帝) passed away and Shunzi emperor(順治帝) got the throne, the number of fur offerings had been decreased as to five tiger furs and 15 leopard furs. The reasons of decline of fur numbers seemed like because of a celebration for the throne and to show the emperor's kindness for people of Joseon Years after, however, each of the two royal messengers still got one leopard fur, and the other groups of messengers got tens of leopard furs.
Numerous people of Qing dynasty such as interpreters, generals and even royal families of Shenyang(瀋陽) wanted to trade leopard furs because people of Beijing(北京) thought the furs are very precious and luxurious ones. Tiger and leopard furs were good for gifts, and those were symbolic items like sitting mats and luxurious hats that could show aristocratic authorities to other people. But Joseon was in a horrific situation because the messengers' heavy demand for furs made people of Joseon in deep suffer, and even some Joseon villages fell into disre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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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2년 발해(渤海)와 당(唐)의 전쟁(戰爭) 과정 재검토

저자 : 임상선 ( Lim Sang-su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9-18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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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渤海의 唐 登州 공격으로 시작된 발해와 당의 전쟁은 여기에 新羅도 참여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발해와 당의 갈등의 요인인 黑水靺鞨 문제와 大門藝의 唐으로 망명의 시기 판별은 흑수말갈의 入唐 시기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册府元龜』의 기록에 의하면, 발해와 당의 전쟁 이전에 흑수말갈이 마지막으로 입당한 시기가 開元 18년(730) 5 월이므로, 발해 武王의 흑수 토벌과 대문예의 당 망명은 그 이후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대문예의 처리를 둘러싸고 발해와 당 간에 國書가 교환된 시기는 이때로부터 개원 20년(732) 登州 공격 이전 大姓取珎 등의 발해 사신이 마지막으로 입당한개원 19(731)년 10월까지이다.
발해 무왕이 「敕渤海王大武藝書」 1首를 접수하고 당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맞선 대응의 결과가 당이 발해를 침입할 때의 전진 기지인 登州 지역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최근 발견된 韦俊의 墓誌에 의하면, 발해의 등주 공격이 은밀히 진행되었고, 발해가 공격한 곳은 자사 위준이 근무하던 登州였다. 발해가 唐을 공격하게 된 원인으로는 흑수말갈을 둘러싼 대립, 대문예에 대한 양국의 상반된 인식, 발해국의 王位와 연관, 그리고 8세기 전반 발해를 비롯한 당, 거란, 돌궐 등의 국제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가 登州 공격 이후 당에 사신을 다시 파견한 것이 개원 23년(735) 3월이다. 이때 日本國 사신과 함께 武王이 그 동생인 蕃을 보내 당에 入朝하였다. 발해의 '背德'과 '誤計'가 언급된 「敕渤海王大武藝書」 2首와 4首는 개원 23년(735) 3월 전후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해와 당은 개원 23년(735) 무왕이 그 동생인 蕃을 보내 入朝하고, 당도 이를 수용하면서 교류를 재개하게 되었다.


For the war between Balhae and Tang Dynasty in 732, Silla is also involved and this has expanded to international war in South East Asia. This research reviewed data on the war and how it happened, processed, then made up.
One of the reasons for the conflict between Balhae and Tang Dynasty is because of the issue in regards to Heuksu Magal race. In year 722, the head of the race came to Tang Dynasty to pay a tribute and Tang Dynasty granted the person with position called Jasa(刺史). In 725, one of the administrators in Tang Dynasty called Seotae suggested to install Heuksu army in the area and from year 726, the major region was considered as Heuksu administration and the minor area as regional administration. In 728, regional administrators were granted with the family name Lee and made them belong to Tang Dynasty, which has become a big threat to Balhae.
As this is the case, King Wu of Balhae tried to suppress Heuksu Magal and his brother Damenyi exiled to Tang Dynasty after May 730. King Wu strongly asked for punishment of his brother but the King of Tang Dynasty refused this and even tried to punish Balhae. In regards to this, King Wu first attacked Dengzhou which will be the main war place if Tang attacked Balhae first. This is how the war started.
There were four reason for Balhae to start the war. First, there was conflict between Heuksu Malgal and Damenyi between the two countries. Second, King Wu was unhappy about Tang Dynasty protecting him. Thirdly, it was the war over the kingdom between King Wu and his brother. The last reason was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the early 8th century.
The war between Balhae and Tang lasted 3 years and the two countries exchanged ambassadors in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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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보와 실록

저자 : 김경수 ( Kim Kyung Soo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85-21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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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에는 군주의 동정과 인사 내용 및 국정 시행사,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승정원에서 발행된 일종의 관보로, 오늘날의 신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조보는 국정 시행사가 지방 소읍까지 전달되어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통을 위한 언론 기능을 수행했다. 비밀주의 원칙에 따라 볼 수 없었던 사초에 비해, 공개성이 담보된 조보는 당대 역사와 정국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자료였다. 무엇보다 『실록』 편찬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사초와 동일하게 인식되었음을 증명한다. 조보와 실록의 연관성과 사학사적 의미 부여가 가능한 이유이다.


The Jobo contained various contents including the present situation of monarchy ministerial Appointment and national events and complaints from all over the country. The Jobo was a kind of official gazette issued by seongjeongwon and has functioned similar to today's newspaper.
The Jobo was not only used to strengthen the government system but also to perform media functions for communication.Compared with the sacho which was not seen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 of secrecy jobo was the basis for understanding the history and political operations of the time because the information was made public.
First of all, the fact that jobo was used as an important material when compiling the sillok proves that he was perceived just like sacho.
The connection between jobo and sillok is the reason why historical meaning i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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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청일전쟁기(1894~1896) 주한일본영사의 영사보고와 '첩보' 활용

저자 : 최보영 ( Choi Bo Young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21-264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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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청일전쟁기 주한일본영사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활용한 실태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항기 일본영사는 한국 내 정보를 취득 · 수합 · 정리하여 영사보고서 또는 첩보의 형태로 주한공사와 본국 외무성에 공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일 본영사의 정보수집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유통과정과 그 활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한국 병탄은 군사력과 외교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전역에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군을 이식 · 이주시켜 상업상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국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이를 침탈의 토대로 활용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기 혼란한 상황에서는 첩보를 활용하여 거류지의 자국민을 안정화하거나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유리하도록 지원 · 협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본영사의 첩보활동이 한국민의 대일 인식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유익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real condition that Japanese consuls illegally obtained and utilized information targeting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Sino-Japanese War. Japanese Consuls in Korea played a key role in obtaining, collecting, and arranging information in Korea and supplying them to diplomatic ministers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in their own country in a form of reports and intelligence during the open port period. Nevertheless, we have not taken notice of information collectors of Japanese consuls and have not been interested in the distribution process and utilization of the information until now. As a result, the recognition that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was unilaterally done by military power and diplomatic power was dominant. By the way, Japan made different types of people including merchants move and migrate to the whole area of the Korean Peninsula, seek commercial interests, and collect detailed information on Korea so that they could be utilized as the foundation of dispossession. Especially in the chaotic situation of the Sino-Japanese War, the fact that Japan stabilized its fellow countrymen in international settlements by utilizing intelligence or supported and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military to be advantageous for its war was confirmed. Awareness of Korea through these information was the high level that Korean people could not resist on a national scale when Japan annexed Korea in 1910. That is, espionage of Japanese consuls in Korea can be found to be very beneficial to understand Korean people's recognition of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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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상해(上海)-국내(國內)간 교통· 통신망

저자 : 김은지 ( Kim Eun-jee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65-30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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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국내에 대해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였다. 국내를 대상으로 한 활동은 어느 한 부서에 국한되지 않고 내무부, 교통부, 군무부, 재무부, 지방선전부를 통해 전개되는 것으로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각 부서에서 국내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상해와 국내를 오갈 수 있는 안전한 교통망과 통신망이 구비되어야 했다. 이를 담당한 부서는 교통부로 국내에 임시교통사 무국과 관할 교통사무지국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중국과 국내의 경계에 있는 안동현 내 안동교통사무국이 설치될 수 있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의 설치는 안동현 내 이륭양행과 쇼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상해와 국내 각지를 오가는 중간 거점으로서 그 몫을 해냈다. 많은 임시정부원들이 이곳을 통해 국내로 들어가거나 상해로 되돌아왔다. 임시정부원이 이용한 잠입 경로에는 커다란 특징이 있다. 주로 출신지역을 기준으로 목적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안동교통사무국 관할 지국으로는 의주교통지국, 선천교통지국, 평양교통지국, 사리원교통지국이 있었다. 이는 경의선 철길을 따라 설치된 것으로 임시정부의 철도를 따라 통신망을 구축하고자 한 결과이다. 또한 해당 지역 내 비밀결사를 이용 하여 안전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교통지국을 설치했다는 특징도 있다. 다량의 임시정부 문서들을 국내로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안동교통사무국으로 송달해야 하였다. 안동교통사무국에 도착한 문서들은 관할 지국으로 전달되어 국내 각지에 배달되었다. 이러한 선전물은 임시정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다양한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선전물이 되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임시정부를 신뢰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sought various activities in Korea in the early days of its establishment. Activities targeting the nation were carried out in all directions, not limited to one department, but through the Interior Ministry, Transportation Ministry, Military Affairs Department, Treasury Department and Local Propaganda Department. In order to carry out domestic activities in each department, safe transportation and communication routes were needed to travel between Shanghai and Korea. The department in charge of this was responsible for establishing a temporary transportation office and a competent transportation office in Korea by the Ministry of Transportation.
As a result, the Andong Transportation Office in Andong Prefecture, located on the border between China and Korea, could be established. The establishment of the Andong Transportation Office was possible due to the strong support of Yi Leungyang and Shora in Andong Prefecture. The Andong Office of Transportation has done its part as a middle ground between Shanghai and other parts of the country. Many temporary government officials entered the country or returned to Shanghai through the site. The infiltration routes used by temporary government officials have great characteristics. The destination was determined mainly based on the area of origin.
Among the jurisdictions of the Andong Transportation Secretariat were the Uiju Transportation Bureau, the Cheoncheon Transportation Bureau, the Pyongyang Transportation Bureau, and the Sariwon Transportation Bureau. This was established along the Gyeongui Line railroad, which was the resul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s attempt to establish a communication line along the railway. It is also characterized by the establishment of a transportation bureau by utilizing a secure human network using confidential associations within the area. In order to send large amounts of temporary government documents to the Andong Transportation Office, they had to be delivered to the Andong Transportation Office. Upon arrival at the Andong Transportation Office, the documents were delivered to the competent authorities and delivered to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These propaganda materials have become important propaganda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to raise military funds or engage in various independence movements. As a result, there is a perception in Korea to trust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support the provisional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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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주국 시기 '한인 개척민' 이주 설계자 윤상필의 생애와 활동 : 제국주의 일본과의 협치와 굴종

저자 : 김주용 ( Kim Joo Yong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03-33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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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필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였다. 탁월한 능력과 체력을 겸 비한 그는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그 가 군인이자 행정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의 일이다. 중국 패잔병의 공격을 받은 한인들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는 1935년 군복을 벗고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민들은 그의 손끝으로 만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영민하고 비범한 인재였던 윤상필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의 오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외면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Yoon Sang-pil was the last cadet of the Korean Empire Military Academy. With his outstanding ability and physical strength, he moved to Japan in 1909 and graduated as the 27th class of the Japanese Military Academy in 1915. It was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on September 18, 1931 that he distinguished himself as a soldier and administrative official. It was to investigate and protect Koreans who were attacked by Chinese soldiers.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 he took off his military uniform in 1935 and led a stable life as a high-ranking official of Manchuria. He was able to walk on the path of active pro-Japanese activities. And the peasants on the Korean Peninsula were forced to move to Manchuria at his fingertips. After liberation, he was arrested by Soviet troops and went to a Siberian camp where he ended his life. Yoon Sang-pil, a brilliant and extraordinary talent, is not easy to escape from the disgrace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who pursued individual spirituality.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he is shunned is that he has undermined the identity of the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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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25전쟁과 한국 보건의학계 및 보건학의 형성

저자 : 이동원 ( Lee Dong-wo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9-37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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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 · 25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보건의학계와 보건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역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보건의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주로 1960년대 이후를 주목했는데, 이는 일정하게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6 · 25전쟁의 영향력과 1950년대의 변화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6 · 25전쟁 이후 보건 의학계와 보건학의 형성 과정을 미군정과 유엔군 및 한국정부의 공중보건(Public Health) 활동과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인 의사들의 활동 속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한범석, 윤유선, 백행인, 주인호, 김인달, 양재모, 권이혁, 구연철, 김명호, 방숙, 박재빈 등 한국인 의사들이 한국 보건의료체계 형성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의 학부나 경성, 세브란스, 대구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여 일본식의 '이론 중심 교 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6 · 25전쟁을 계기로 현장에서 임상 경험을 쌓았고, 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임상 중심 교육'이라 할 수 있는 미국식 보건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이들은 195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서울의대의 미네소타 프로젝트 보다 더 앞서서 미국식 보건학을 적극적으로 수용, 도입하면서 보건의학계의 1세대로서 주요 의과대학의 예방의학교실 및 보건대학원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미국식 공중보건학(public health)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계기는 보건진료소 및 보건소의 확산과 이를 뒷받침한 공중보건원의 창설이었 다. 1953년 9월 공중보건원(School of Public Health, Korea)의 창설은 전국 단위에서 크게 증가한 보건진료소와 보건소를 뒷받침할 보건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중보건원을 통해 미국식, 혹은 WHO식 '공중보건' 개념이 전파 되었고, 이렇게 전파된 '공중보건' 개념은 보건진료소 및 보건소에서의 보건의료 임상 활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현되었다. 따라서 공중보건원은 한국의 보건의학계가 기존의 일본식 '공중위생' 개념을 바탕으로 미국식 '공중보건' 개념을 수용하여 한국식 보건학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nature of the Korean health and medical system by looking at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Korean health and medical community and health sciences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Existing studies have mainly noted the post-1960s when the foundation of health and medical care was laid, which reflects the reality to some extent, but there is a problem that the influence of the Korean War and the change of the 1950s were relatively neglected. Therefore, this article looked at the formation process of Korean health and medicine in the connection with the public health activitie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U.N. forces and Korean doctors who studied abroad.
I tried to understand in detail what role Korean doctors played in the formation of the Korean health care syste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y studied at Kyungsung Imperial University's School of Medicine, Kyungsung, Severance, and Daegu Medical College, and received Japanese-style 'theory-oriented education'. In addition, they gained clinical experience in the field after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and systematically studied American-style health science, which can be called 'clinical-oriented education,' mainly through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They actively embraced and in troduced American-style health science ahead of the Minnesota project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leading the preventive medicine departments and graduate schools of health at major medical schools as the first generation of health medicine.
Along with this, the reason for the firm establishment of American-style public health in Korea was the spread of public health dispensaries and centers, and the creation of the School of Public Health, Korea that supported it. The establishment of the School of Public Health, Korea in September 1953 was aimed at fostering health and medical personnel to support the nationwide increase in public health dispensaries and centers. The concept of American or WHO-style 'public health' has been disseminated through the School of Public Health, Korea, and the concept of 'public health' spread in this way was realized in reality through health care clinical activities in public health dispensaries and centers. Therefore, the School of Public Health, Korea greatly contributed to the Korean health and medical community adopting the American concept of 'public health' based on the existing Japanese concept of 'public hygiene' and establishing itself as a Korean-style health science.

KCI등재

10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시기 회서(淮西) 번진(藩鎭)의 성격 -오소성(吳少誠)의 태도를 중심으로-

저자 : 정병준 ( Cheong Byung-jun )

발행기관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간행물 : 동국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75-41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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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왕의 난 이후 정원 시기(785~805)에 淮西節度使 吳少誠이 보인 태도를 통해 당시 번진체제의 기본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오소성은 할거 번진 이면서도 다른 할거 번진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즉 기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 기보다는 주변으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매우 공격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다른 할거 번진들도 기존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오소성은 그 행동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덕종도 오소성에 대해서는 다른 대응을 하였다.
정원 15년(799) 8월 오소성이 陳許 번진을 공격하자 마침내 10월 덕종이 17개번진에게 오소성 토벌을 명하였다. 그 안에는 할거 번진인 成德· 幽州· 魏博· 淄靑도 있었는데, 이는 번진들에 대한 당시 덕종의 한계를 보여준다. 오소성에 의한 혼란을 틈 타 네 번진도 언제든 세력 확장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듬해(800) 5월 당군이 오소성에게 대패하자 산남동도절도사 우적이 남쪽의 漢水 남쪽 지역을 점거할 뜻을 품었는데, 이는 당조와 번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 누 구든 반역적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전선이 조금 교착되자 같은 해(800) 10월 오소성이 갑자기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토가 자칫 다른 번 진에게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덕종의 오소성 토벌 실패는 아직 조정이 할거 번진을 제압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당시 할거 번진의 세력은 조정보다 우위에 있던 것이 아닐까.


This article examines the basic structure and character of Provincial Command System in the light of the Huaixi Military Commissioner Wu Shaocheng's stance after the Jianzhong Incident. Wu Shaocheng was one of the Autonomous Provinces, but had the different side from them. Namely, he made efforts to change the conditions rather than to maintain the existing situations. Of Course, other Autonomous Provinces did not intactly accept the present circumstances, but differed in manner of ways.
In the fifteen year of Zhenyuan Period, Dezong ordered seventeen Provincial Commands to suppress Wu Shaocheng. This was the only large-scale military mobilization of Dezong after the Jianzhong Incident. Autonomous Provinces such as Chengde, Youzhou, Weibo, and Ziqing were included in this military action, but it showed Dezong's limitation because they had the possibility of conspiracy to expand their power by taking advantage of the turmoil of Wu Shaocheng. In May of the following year, when the Tang army was thoroughly defeated by Wu Shaocheng, Shannandongdao Military Commissioner Yudi wanted to occupy the south of Hanshui. This is important to show that when the balance of power between the Tang Dynasty and the Provincial Command was broken, anyone could attempt treason. In October of the same year, Wu Shaocheng suddenly withdrew his troops because his land could be come under threat by other Provincial Commands, and in the same month the war come to an end as he intended.
The failure of Dezong's suppression of Wu Shaocheng indicated that the Tang Dynasty had not dominated the Autonomous Provinces yet and the latter had advantage over the 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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