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update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수록정보
134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5
간행물 제목
135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저자 : 이영아 ( Lee Young-ah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3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식민지기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우생학적 시선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생존경쟁 속에서 '적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진화, 우리 국민의 개량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 우등한 자녀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계몽 담론이 유행했다. 이때 우등한 국민 생산을 위해 여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근대적 교육을 통해 단련되고 규율된, 성숙하고 건강한 몸이었다. 1920~3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산아제한론'이 유행하면서 조선에도 여성들의 임신조절, 피임, 낙태 등에 대한 담론이 대두된 것에서 우생학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산아제한론을 통해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권이 넓어질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우생협회의 발족과 잡지 『우생』의 발간으로 우생학에 대한 본격적인 전파와 홍보가 이루어지면서 우생학은 실제 학문, 과학으로서 접근되기 시작했는데, 의학적 사실에 입각한 우생학 지식이 소개되면서 여성의 몸에 과도하게 부여되어왔던 우생학적 책임의 짐이 덜어지게 되었다. 우생 담론은 우등한 국민 생산이라는 명분하에 여성들에게 교육에의 기회와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임신과 출산, 유전에 관한 가부장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는 논리였다는 점에서 '해방'적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이 재생산을 전제로 한 '해방'이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성격 역시 지니고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discourse on eugenics imported into Joseon in the 1900s and 1940s viewed women's bodies. First, the Enlightenment intellectuals from the 1900s to the 1910s argued that our society needed to evolve, and our people need to be improved to become 'fit' for the struggle for survival in the age of imperialism. To do this, women had to produce superior children. Women had to build a disciplined, mature, and healthy body through modern education. In the 1920s, due to the prevalence of 'birth control theory', women demanded permission to control pregnancy, contraception, and abortion. However, birth control was used as a method of negative eugenics that suppressed the birth of unqualified persons. From the mid-1930s,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Eugenics Association and the publication of the magazine, Woosaeng (the name of which means 'eugenic' in Korean), the spread and publicity of eugenics began in earnest, and eugenics began to be treated as a real science and medicine. With the introduction of eugenics knowledge based on medical facts, many myths and misconceptions about women's pregnancy, childbirth, and heredity have been clarified. As such, through eugenics discourse, women were given citizenship, the right to sexual self-determination, and were freed from some gender-biased prejudices regarding pregnancy, childbirth, and heredity. However, it was also a discourse that oppressed women in that it was 'liberation' on the premise of reproduction.

KCI등재

저자 : 민병웅 ( Min Byeong Wo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80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는 한국인 여성과 미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이 증가했다. 기지촌 성노동자의 자녀라는 사실과 이질적인 외모로 인해 혼혈아들은 주변인들로부터 멸시를 경험했다. 한국 정부는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통합에 혼혈아들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해외입양을 통해 이들에게 들어가는 사회복지비용을 줄이고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양 과정은 적합한 입양아를 선별하는 일을 동반했다. 혼혈아들의 인종 정보, 신체적 특징, 건강상태 등은 혼혈아들의 입양을 결정하는 판단 근거였다. 이 글은 1950~60년대 초중반 한미 해외입양 절차 과정에서 혼혈아의 몸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한국과 미국의 해외입양 관계자들과 과학계, 의학계 사이의 협력에 주목한다. 기존 연구들은 해외입양이 한국 전쟁 이후 혼혈아들을 한국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한국 사회에 살 가치가 있는 집단을 결정하는 우생학적 성격이 있음을 구조적, 사회 이념적, 제도적 측면에서 강조해왔다. 본 연구는 기존 해외입양 연구들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혼혈아의 몸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해외입양과 학계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해외입양 관계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에 비해 더 입양에 적합한 몸으로 판단되었다고 주장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duction and use of scientific and medical knowledge about Korean 'mixed-blood' children for transnational adoption in the 1950~1960s. It analyzes how adoption agencies in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sought advice from racial scientists in order to judge the adoptability of 'mixed-blood' children in South Korea. Adoption agencies had facilities for orphans and 'mixed-blood' children such as orphanages and hospitals. These agencies provided a resource for producing knowledge of 'mixedblood' bodies and information for scientists. On the one hand, racial scientists utilized the transnational adoption procedure to build a database on the bodies of 'mixed-blood' children. Across the Pacific, American scientists mobilized their knowledge of 'mixed-blood' bodies both to advice adoption agencies and as a strategic tool to promote their political agenda. After World War Ⅱ, American racial scientists underlined anti-racism ideology, renouncing a hypothesis of a hierarchy among different races. By promoting transracial adoption, American scientists hoped to show their new political stance. In conclusion, this paper reveals the blurring of boundaries of disability and mixed-blood categories by analyzing how Korean officials and American scientists produced knowledge about 'mixedblood' children for transnational adoption. In Korea, 'mixed-blood' children were categorized as the 'socially handicapped', which was sub-category of disability. At the same time, American scientists who collaborated with transracial adoption agencies insisted 'mixedblood' children would be more suitable for adoption than disabled children. In other words, both Korean and American actors thought the 'mixed-blood' children were more valuable than the disabled in transnational adoption. In that, they shared the same principle in producing and using their scientific and medical knowledge for 'mixed-blood' children: adoptability.

KCI등재

저자 : 최은경 ( Choi Eun K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유전자 산전진단기술의 1970년대~1990년대 도입 및 정착 과정을 다룬다. 유전자 산전진단기술 도입을 위한 의학자, 특히 소아과 및 산부인과 의사들의 시도와 담론, 인구보건학자들의 담론을 중심으로 다루되, 그 사회적 반향도 아울러 고찰한다. 1960년대 세포유전학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국내에서도 산전 성 감별의 한 방법으로 양수천자가 시도되었으나 안전성 측면으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1970년대 중반 주갑순, 양영호 등 해외에서 산전 검사를 수련한 이들을 중심으로 산전진단기술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산전진단기술은 성 감별 목적으로 널리 활용되었으며 초음파 기기가 다량 보급되면서 산전진단술은 더욱 각광받았다. 의학자들은 성 감별 목적으로 산전진단기술이 활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한편, 다운증후군을 예로 한 지적장애 또한 산전진단술을 통해 미리 출산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과거에는 지적장애의 유전성이 관건이었다면, 산전 진단술 도입 이후에는 다운증후군을 출산할 수 있는 고위험 정상인 여성의 태아를 미리 검사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인구보건학자들은 산전진단기술을 통한 산전 성 감별은 성비 불균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지만 기형아를 낳을 수 있는 일부 고위험 여성들의 산전 검사는 환영하였다. 1990년대 민주화된 사회를 배경으로 제기된 핵 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도 기형아에 대한 대중적 공포가 자리잡는 데에 기여하였다. 1970년대~1990년대 산전진단기술이 크게 각광받고 보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성 감별 수요, 일반인의 기형아 출산 위험 각인을 위한 의학자들의 노력, 기형아에 대한 공포 등이 작용하였다.


This study explores the introduction of genetic prenatal diagnostic technology from the 1970s to the 1990s. It focuses on the ideas and practices of doctors, especially pediatricians and gynecologists, and the opinions of population health experts regarding the technology. It also considers the technology's social repercussions. With the emergence of cytogenetics in the 1960s, several South Korean doctors attempted amniocentesis for sex determination before childbirth, despite safety problems. From the mid-1970s a few gynecologists who trained in prenatal tests abroad, including Ju Gap-soon and Yang Young-ho, led the adoption of prenatal diagnostic technology in South Korea. Early on the technology was adopted for sex determination, a use that became more popular with the growing availability of ultrasound devices. While promoting the technology for sex determination purposes, doctors also argued that Intellectual Disability, such as Down's syndrome, could be prevented through prenatal diagnosis. It was important to avoid inheritance of intellectual disabilities from some disabled women in the past; however, after the introduction of prenatal diagnosis, all women at risk of bearing congenital disabilities could get tested. Population health experts worried that sex determination could cause an imbalance in sex ratios; however, they also welcomed prenatal tests to prevent birth defects.
Meanwhile, with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in the 1990's, concerns about nuclear power stations and environmental pollution began to be widely shared. This attracted attentions about congenital disabilities. From the 1970s to the 1990s, prenatal diagnosis technology was adopted widely in South Korea due to the demand for sex determination and the efforts of doctors and scientists to inform lay people about the risk of birth defects. Moreover, public fear of congenital disabilities also encouraged their adaptation.

KCI등재

저자 : 이옥부 ( Lee Okb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47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조선 후기 제주도의 초알일 별급의 관행에 주목하여 제주도 상속문화의 특징과 그 의미를 밝히고,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 배경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초알일 별급은 혼인으로 며느리가 되는 여성에게 재산을 직접 상속하는 관행으로, 제주도를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상속의 유형이다. '왜 제주도에 이 같은 상속의 관행이 나타나는가'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데서 출발한다.
조선후기 제주도에는 자녀들이 결혼할 때 재산 일부를 별급하는 관행이 있었다. 성혼 별급과 초알일 별급이 그것이다. 모두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상속 대상이 다르다. 성혼 별급은 아들과 딸, 사위가 받는 것이고, 초알일 별급은 며느리가 받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자녀가 결혼할 때 재산을 상속하여 축하를 표시하는 일은 육지에서도 흔하다. 하지만 이 같은 상속이 균분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균분에 며느리가 포함되는 것은 제주도 상속문화에만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초알일 별급은 상속 대상을 며느리로 한정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재산권의 보호와 상속 관행의 유지에 더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로 갈수록 성혼 별급의 비율은 감소한 반면 초알일 별급의 비율이 높아진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와 함께 초알일 별급이 19세기까지 행해진 사실은 제주도의 상속문화에 원칙을 달리하는 두 개의 상속 관행이 공존한 사실은 보여준다. 초알일 별급의 배경이 되는 균분의 원칙과 유교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18세기 중반부터 일반상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차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딸의 재산권은 약화되는데 같은 여성으로 며느리의 재산권은 보장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주도 상속문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초알일 별급은 며느리에게 재산을 상속하던 조선 전기의 상속 관행을 계승한 측면과 몽골 상속문화의 유산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제주인과 몽골인 사이의 광범한 결혼과 대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이 조선전기에 대거 등장한 사실 등을 배경으로 이 연구는 제주도 상속문화, 특히 초알일 별급에도 몽골문화의 유산 일부가 작동했다고 보고 그 구체적인 역사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This paper aims to clarify and explain historically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Jeju's inheritance culture by analyzing the practice of Choalil Byulgeub (初謁日 別給) on the Isla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Choalil Byeolbyeol is the practice by which property is directly passed down to daughters-in-law. This type of inheritance is rarely seen in regions other than Jeju Island. The study begins by trying to establish why this inheritance practice appeared.
As is well known, it is common on the mainland to celebrate when a child marries by gifting them assets. This type of inheritance is called Byulgeub. However, such Byulgeub can be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equalized inheritance, and the principle by which daughters-in-law in are included in the distribution of inheritance only appears in the inheritance culture of Jeju Island. Choalil Byulgeub limited the inheritance to daughters-in-law, which seems to have been advantageous for protecting property rights and maintaining inheritance practices.
At the same time, the fact that Choalil Byulgeub was carried out until the 19th century shows that two inheritance practices following different principles coexisted in the inheritance culture of Jeju Island. These were the principle of equality and the principle of difference. Furthermore, this shows that the whilst women's property rights as daughters were weakened, the property rights of women as daughters-in-law were strengthened. This can be considered another characteristic of Jeju Island's inheritance culture.

KCI등재

저자 : 기유정 ( Ki You J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81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1923년 진주 형평사 창립과 함께 1930년대 초까지 주로 남한 지역 내 농촌 사회에서 지속되었던 일반 주민들과 형평사원들 간의 충돌들 중 개별 사례를 제외한 집단 충돌과 이에 따른 소요 사례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본 연구는 반형평사 소요에 대한 기존 연구의 접근이 형평사 운동을 중심으로 그것의 의미를 반형평사 논리 해석의 중심축으로 활용함으로써 반형평사 소요 자체가 독자적인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의미화되지 못했던 연구 현황의 저변에 식민지 대중과 이들의 집단 행위에 대한 근대주의적 인식틀과 그 정치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고 비판 근대주의적 관점 위에서 반형평사 소요의 동학을 새롭게 개념화해보고자 시도했다.


This article studies the conflict between the Hyeongpyeongsa movement and local residents that occurred between 1923 and 1930. In this study, I start from a critical view of existing research on the anti-Hyeongpyeongsa riots and protests. I suggest that the approach of previous studies is a result of their dependence on a modernist understanding of colonial period collective behavior. So, in this article I study an anti-Hyeongpyeongsa riot according to an antimodernism approach to mass politics which treats collective behavior as an existential struggle toward self-preservation. To this end, there are four topics to the article's re-examination of the anti-Hyeongpyeongsa riot: its structure and form of existence, its expression, how it exerted power, and the relationship it had with its opposition.

KCI등재

저자 : 최정기 ( Choi Junggi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9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루어졌다. 5·18 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둘째, 일부 시민들의 무장과 시민군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즉자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정치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것인가?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당시의 정세 및 현장에서의 분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980년 당시 한국 사회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과 폭력 친화적인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또 10·26 이후 만들어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군의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흐름이 만들어졌고, 군의 집단 발포에 총을 든 저항도 가능해진 것이다.
둘째, 무장 시민들의 무장 투쟁 및 시민군이라는 호칭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태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하며, 그렇게 볼 경우 시민군은 자연발생적인 저항에서 무장조직의 결성으로, 항쟁의 주변에서 항쟁지도부로, 즉자적인 분노에서 목적을 가진 저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목적지를 상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시민군의 변화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find answers to the following two questions. First, How was it possible for citizens to organize an armed resistance during the May 18 People's Uprising? Second, was the civilian army and resistance of some citizens with guns simple immediate action or has political and sociological meaning?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reason why it was possible for citizens to resist with arms during the May 18 People's Uprising was a combination of the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the situation at that time, and anger at the scene. In 1980, Korean society had a strong desire for Western democracy and a violence-friendly culture. In addition, after the expectations for democratization that emerged after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hee on October 26 were thwarted, the citizens' sense of relative deprivation was great. In this situation, a flow of resistance to the inhumane violence of the military was created, and armed resistance to the military's use of deadly force became possible.
Seco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armed struggle and the term civilian army should be identified as dynamic, and in that case, the civilian army was changing from a spontaneous resistance to the formation of armed organizations, from the periphery of the uprising to the leadership of the uprising, from self-imposed anger to purposeful resistance. The destination of this change cannot be assumed. However, as can be seen from that direction, the changes in the civilian army at that time were part of the process of creating a new form of democracy.

KCI등재

저자 : 허설화 ( Xu Xuehu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64 (4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제도나 구조적 상황의 부산물로 바라보는 기존의 연구시각에서 벗어나, 신세대 농민공의 '개인'으로서의 삶을 규명할 수 있는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중국사회의 '관계지향적 개인화'와 맞물려 낳은 결과로 바라본다. 중국 농민공의 개인화 실천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탈전통화 시기'와 2000년대 초·중반부터 현재까지의 '도시민화 시기'의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950-70년대의 농민공은 집단경제조직과 가족공동체에 의해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이 결여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90년대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을 계기로 농민공은 탈집단화하여 삶의 형태의 '개인화'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 농민공은 비록 '개인' 형태로 도시에 진출했지만 관계적 네트워크 차원에서는 여전히 전통 농촌공동체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 네트워크는 2000년대 초·중반 '도시민화 시기'에 진입하면서 그 기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도시에서 농민공의 신분 지위와 취업 여건이 호전됨에 따라, 농민공은 전통 가치와 관계적 네트워크에서 점차 분리되어 나와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발현하여 '자신의 삶(a life of one's own)'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도시민화 시기' 농민공은 짧은 기간 내에 압축적인 방식으로 도시의 근대화를 체감하고 제도적, 사회적 안전장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다양한 생애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여 위험인식이 높다. 따라서 이 시기 농민공은 주체성 인식이 강화됨과 동시에 불안감도 증폭되고 개인은 유기적 연대의 (재)구축을 통해 안정감을 확보하려는 공동체 지향성을 발현한다. 신세대 농민공들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주체성과 공동체성 사이에는 필수적인 긴장이 항상 유지되고, 양자의 상호 작용은 신세대 농민공의 삶 전반을 관통한다. 즉, 신세대 농민공의 경계인의 삶은 일견 비자발적, 비합리적인 무질서한 움직임으로 보이지만 이들 행위 배후에는 개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현실적인 삶의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다.


This study seeks to offer an alternative approach to understanding the lives of Chinese migrant workers. It deviates from existing research by employing a microscopic perspective and treating the new-generation migrant workers as individuals rather than as the by-product of institutional or structural situations.
In this study, the marginal lives of the new gener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are approached as a result of interlocking with the 'relationship-oriented individualization' of Chinese society. The individualiz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can be divided into two stages: the 'detraditionalization period' from the 1950s to the early 2000s and the 'urbanization period' from the early and mid-2000s to the present. Specifically, rural migrant workers from the 1950s to the 1970s initially lacked 'individual' subjectivity due to collective economic organization and family community. However, from the 1980s to the 1990s, rural migrant workers separated from collectivization and reached the 'individualization' of their life forms. It is noteworthy that although rural migrant workers entered the city as 'individuals', they were still closely connected with the traditional community network. This relationship network began to weaken as rural migrant workers entered the 'urbanization period' in the early and mid-2000s. During this time, rural migrant workers have been able to show their subjectivity as 'individuals' and pursue their own lives. On the other hand, under an imperfect system and social stability mechanism, they have also been exposed to various risks. In other words, the rural migrant workers' awareness of subjectivity has strengthened, while their anxiety has risen. Therefore, individuals adopt the community orientation to secure stability through (re)construction of organic solidarity. There is always an essential tension between subjectivity and community-ness in the consciousness of the new generation of rural migrant workers, and interaction with each other runs throughout their lives.

KCI등재

저자 : 김광기 ( Kim Kwang-k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295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의 목적은 음악에 대한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음악 현상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던 두 사상가들, 슈츠(Alfred Schutz)와 후설(Edmund Husserl)의 사상을 추적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두 학자의 분석에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는 “내적 시간”을 준거로 해 그들이 어떻게 음악 현상의 본질에 접근했는지를 살피려 한다. 이를 통해 음악현상학과 음악사회학의 발전에 있어 후설의 공과 한계를 분명히 하고, 명실상부하게 음악현상학과 음악사회학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슈츠의 사상을 면밀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슈츠의 “유사 동시성”개념을 통해 음악현상에서 그가 포착한 사회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것은 음악의 다단계적원칙, 비동일성, 즉흥성의 특징과 함께 논의될 것이다. 슈츠에 따르면 악보의 음표와 각종 음악 기호들이 결코 음악을 대변할 수는 없다.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이들은 악보가 갖고 있는 본래적인 애매모호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특정 음악이 공연되는 동안 그 장소와 그 시간에만 해당하는 그런 음악을 함께 만들어간다. 악보의 허술함을 메워주는 것은 바로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슈츠의 음악사회학이 그리고 그것에 모태가 된 노에시스-노에마 구조를 강조한 후설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race and compare the ideas of Alfred Schutz and Edmund Husserl, two thinkers who explored the phenomenon of music and sought to discover its essence. Although Husserl did not deal with music per se, his analysis of timeconsciousness and the explanation of notes (or sounds) and melodies discussed therein strongly influenced on Schutz and the later phenomenology of music. Schutz elaborated and developed the phenomenology of music based on Husserl's analysis of time consciousness, adding a heavy emphasis on sociality. In the process, he outlined the essentials of sociology of music and laid the groundwork for its development. This paper scrutinizes how both Schutz and Husserl approached the essence of the musical phenomenon in terms of “inner time” and made this the key framework for their analyses. This will allow us to closely examine Schutz's ideas and grasp the limitations of Husserl's work for the development of phenomenology and sociology of music. The notes and various musical symbols in a score can never represent the music itself. Based on the inherent ambiguity and openness of musical scores, those who perform and listen to music together create music that is appropriate specifically to the place and time that a particular piece of music is being performed and appreciated, i.e., in situ. It is the members who are participating in the performance who fill in for the limitations or ambiguity of the score. This is the perspective foundational to both Shutz's sociology of music and the Husserlian noetic-noematic (noesis-noema) structure that inspired it.

KCI등재

저자 : 전경수 ( Chun Kyung-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10 (1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송석하는 민속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논문은 "경주 읍지"에 관한 내용으로서 1926년 11월 8일 동아일보에 게재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원고에서 그러한 사실보다 앞서는 송석하의 논고를 소개하려고 한다. 1922년 부산상업학교의 동창회지에 소개된 송석하의 글은 "조선화폐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현재가지 이 분야의 저서나 논고들은 송석하의 "조선화폐사"와 관련된 글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송석하의 글이 지방의 고등학교 동창회지에 실렸다는 소재불리성과 관련된 것 같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송석하는 동경상과대학으로 진학하였다. 울산지역의 대지주이자 사업가였던 그의 부친의 희망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부친의 희망은 장남이었던 송석하가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송석하는 동경상과대학을 중퇴하였고, 학업을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사호가 없었다. 이것이 해방후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할 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송석하 비원의 국립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직은 성립할 수 없었다.
조선화폐사에 관한 송석하의 글은 이 분야 연구의 선구적인 업적으로서 인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까지는 전혀 송석하의 글이 언급되고 있지 못하다. 송석하는 그의 짧은 글 속에서 조선의 우편사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국화폐연구사와 한국우표연구사에서 송석하의 이 소문이 선구적인 업적으로 언급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This paper aims to identify the first article published by Sohng Suk-ha, a well-known Korean folklorist. It had been thought Sohng's first article was 'Kyungju Town Chronicle' published on Nov. 3, 1926 in the Dong-A Newspaper. However, this paper author uncovers an article by Sohng on the history of Korean currency published in the Alumni Journal of Pusan Commercial School in 1922 whilst Sohng was a student at Tokyo Commercial College. It appears Sohng had been reading old Korean books and collecting information about old Korean currency. This may be evidence that Sohng, rather than wanted to become a banker and/or businessman after graduation, had academic ambitions. Sohng was the first son of a major landowner and businessman, entered high school to learn about commerce and business in Pusan and studied these subjects further at Tokyo Commercial College, probably strongly supported by his father, who hoped his son would follow in his footsteps as a businessperson. There seems to have been to be a serious conflict later between father and son, and Sohng eventually became a folklorist rather than following his father's wishes.
At present there are no books or articles on the history of Korean currency that mention or reference Sohng's 1922 article. It has so far been neglected in that field. The author hopes Sohng's article will be recognized as the first trial in the field of historical Korean currency. In his short article he also discussed the history of the postage stamp in Korea and should be considered a pioneer in this field as well.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수록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8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지금껏 연구된 바 없는 갑오개혁기부터 보호국기까지의 정부통계에 대한 것이다. 갑오개혁 이래 '통계'는 정부의 일상적 문서행정의 일부로 규정되었으나, 고종 재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전통적 관료제의 보고체계도 여전히 작동했지만, 그런 정보들은 거의 공간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순종 즉위 이후, 일본 세력에 의해서다. 메가타 쥬타로 재정고문부의 인력과 노하우를 물려받은 탁지부가 한발 앞서 통계체계를 구축하고, 인쇄된 숫자의 작은 '쇄도'를 만들었다. 1908년부터 탁지부는 징세기구의, 농상공부는 지방행정기관의 인력을 동원해서, 경쟁적으로 조사를 하고 통계를 집계했다. 탁지부는 재정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 걸친 통계서를 다수 간행했고, 농상공부는 일본인 이민 유치를 위해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제작했다. 물론 초창기의 통계, 특히 농업통계는 매우 부정확·불완전했다. 조사원의 훈련도 없었고 현장에서 표본추출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 같지도 않다. 조사와 통계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조사·통계의 확장이 식민지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점이 큰 한계가 되었을 것이다.

KCI등재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0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 필자는 한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과정과 이유로 인해 10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강고히 지속되었는가를 세균설이라는 의료지식과 이에 근거한 보건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 세균설과 이에 근거한 엄격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과 그 결과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 과정을 선행연구와 의학 보고서 및 논문, 신문자료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드러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과 낙인과 차별은 광복 이후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개발과 사용으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정부와 의료전문가들은 이들을 계속 '환자'로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회에 숨어 있는 신환자들을 색출하여 통제하기 위해 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완치된 이들의 삶을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내부와 사회 내의 균 제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이러한 보건당국의 무균화 기획과 이로 인한 질병 낙인의 지속은 코로나19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현재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KCI등재

저자 : 김동춘 ( Kim Dong-ch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18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분단 이후 사상범, 수감 좌익수에 대한 전향공작은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감옥에서 징벌적 전향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특히 유신 체제에서 전향공작은 더욱 폭력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폭력과 고문까지 가하면서 좌익수들에게 전향을 압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접촉할 수 없는 특별 사동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각은 감옥 밖에서는 물론 감옥 안에서도 주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이들의 비전향 상태에 대해 느낀 '위험'은 실제 정치적 위험보다는 수백 명의 비전향수가 풀려날 경우, 대북 관계에서 남한 체제의 정당성과 대북 이념적 우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신앙 개종을 요구하는 전향 공작은 멀리는 천황제 하의 일본의 전향 정책, 특히 일제 말 전시파시즘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전향공작이 갱생, 사회복귀를 지향하는 사회통합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의 전향공작은 징벌적 성격으로 일관했고, 폭력과 강압에 주로 의존하였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반공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좌익수 대상 전향공작은 '통일'과 '민족해방'의 '진실성'에 확신을 가진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저항에 직면했다.

KCI등재

저자 : 김필동 ( Kim Pil-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53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한국의 대학에서 사회학과는 1946년 서울대학교의 개교와 함께 처음 설치되었으나, 다른 대학으로의 확산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설치되었던 학과의 폐과도 이어져서 1974년까지 사회학과가 있는 대학은 전국에 5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5년 충남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이듬해부터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사회학과의 설치가 이어졌고, 1979년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1980년대 초 사회학과의 수는 전국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75년 충남대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것은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에 대해 학문적 호감을 갖고 있던 박희범 총장이 낙후되어 있던 충남대 개혁의 방법론의 하나로 사회과학의 기초 학문인 경제학과와 사회학과의 설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 총장은 우수한 교수진의 충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1976년부터 다른 주요 국립대학에 사회학과가 설치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런 파급 효과는 일부 사립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사회학은 1975년에서 1983년 사이에 제도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한편 1975년은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정책적 대응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점에서 나타난, 지방대학 육성이라는 대학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사회학이란 학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요가 제고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동의 조건 하에서, 향후 일어날 연쇄 반응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선례의 축적은 1980년대 초 대학팽창의 시기에 주요 사회계 학과 중에서 사회학과의 증설이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KCI등재

저자 : 윤종희 ( Yoon Jong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5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글로벌 금융위기 후,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을 촉발한다.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우려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대부분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것에서 비롯된다. 기존 연구들은 포퓰리즘으로 지칭되는 사례들에서 공통의 특성을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개념을 정의한다. 그런데 이 같은 방식은 너무도 많은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외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기하학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 발생원인에 반영하여 개념을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의 적대적 대립물로 구성된 현실의 '인민'이 주권자임을 주장하면서 대표제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정치이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기 때문에 대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볼 수 있다.

1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