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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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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148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9
간행물 제목
149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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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승우 ( Hong Sue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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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구 팔거산성 출토 신라 목간에 대한 기초 연구로서, 출토지 대구 팔거산성의 위상과 기능을 살펴본 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목간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 목간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신라 행정 체계에 대한 연구의 단서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대구 팔거산성은 신라가 건립한 지방 거점 산성으로 왕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중심 수비 체제 마련을 위한 군사적 목적과 함께 지방지배 방식의 전환 및 영역 내의 원활한 통치라는 복합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이 출토된 팔거산성 목간은 대부분 부찰목간으로, 이러한 위상과 기능을 가진 팔거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이다. 전체 16점의 목간형 목기 중 10점에서만 글자가 확인되는데,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한국 고대 목간 연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통설적 판독과 이해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팔거산성 목간의 주요 내용으로는 우선 '王私'라는 새로운 용례를 확정할 수 있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나아가 다양한 '私'의 용법도 확인할 수 있어서, 팔거산성 목간은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 및 수취제도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간 주요 논쟁점 중 하나였던 소위 '城下木簡'에서 '下'의 의미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더하여 성하목간의 물품 양 기재 방식에서 특이했던 '十五石', '十五斗石', '十一斗石' 등이 어떤 의미로 목간에 기재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 거점 성에서의 곡물의 납입과 반출 과정 및 다른 거점 성으로의 유통이라는 신라 행정 체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paper is a basic study on the wooden tablets of Silla excavated from Palgeo-mountain Fortress in Daegu. This work is also intended to provide clues to the study of the Silla administrative system in which these wooden tablets were made and used.
Daegu Palgeo-mountain Fortress is a regional base fortress built by Silla. It had a military purpose to establish a defensive system centered on the transportation route leading to the Capital. It also had a function for developing a method of local governance and smooth governance within the domain.
Most of the newly excavated wooden tablets on Palgeo-mountain Fortress site are tags attached to the luggage, which were made and used in connection with the operation of Palgeo-mountain Fortress. The total number of wooden tablets is 16, but only 10 of them contain Chinese characters. Although the number is not large, it is a decisive historical source that can overturn the conventional reading and understanding of the wooden tablets of Seongsan-mountain Fortress, which occupies the largest portion in the study of ancient Korean wooden tablets.
The main conclusion that can be presented first is that the new historical term 'Wang-Sa' and 'Sa' can be established. Furthermore, it is expected that they will provide clues to a new understanding of the social structure and status system of Silla. And also expected provide clues to the specifics of the tax system.
The next achievement is that it is possible to more accurately grasp the contents of the so-called 'Seongha wooden tablets'. The meaning of '下(ha)', which had a different opinion, became clear. In addition, It was also possible to find out what the meaning of the unusual quantities of '15' and '11' in the records of the amount of grain in the luggage. These newly revealed facts are expected to bring significant progress in the study of the administrative system operated by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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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재훈 ( Jung Jae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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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에 활동한 학자이자 관료인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림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기묘사화 이후 성리학을 보존하여 이를 확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의 정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김안국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20년 가까이 은거생활을 한다. 이를 전후로 한 시기에 김안국은 주로 성리학의 사회적 실천에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며 『정속언해』, 『이륜행실도』, 『여씨향약』 등 각종 교화서의 간행에 주력하였다. 특히 『이륜행실도』는 김안국이 직접 편찬을 건의한 도서로서, 가족과 친족을 넘어 수평적인 윤리가 향촌에 필요한 윤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여씨향약언해본』의 보급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기묘사림과 그에 동조한 인물들과의 연계 속에서 김안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노비에게까지 나이에 따른 기준을 적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김안국은 성균관 사성으로 있으면서 정지운이나 김인후, 유희춘 등 많은 인물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성취는 철학 방면보다는 실천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 치중되었다. 사대부들이 역사적 주체로서 향촌에서 향약을 실천하고 향촌의 질서를 주도하는 데에 그의 역할은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Kim An-guk (1478-1543), a scholar and bureaucrat who was active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was a disciple of Kim Gong-pil and, along with Jo Gwang-jo, was classified as a Gimyo Sarim. He is evaluated as a person who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preservation and expansion of Neo-Confucianism after Gimyo-sahwa.
After Jo Gwang-jo's political reforms failed due to the kimyo-sahwa, Kim An-guk also resigned from his post and lived in seclusion for nearly 20 years. In the period before and after this, Kim An-guk mainly worked on the social practice of Neo-Confucianism. While serving as an officer in Gyeongsang-do and in Jeolla-do, he focused on publishing various educational books such as 『Jeongsok Eonhae』, 『Iryeonhaengsildo』, and 『Yeossi Hyangyak』. In particular, 『Iryeonhaengsildo』, a book that Kim Ahn-guk personally recommended to compile, provided an opportunity to recognize that horizontal ethics beyond family and relatives were recognized as ethics necessary for rural communities. He also focused on the dissemination of 『Yeossi hyangyak eonhae』, which was led by Kim An-guk in connection with the Gimyo Sarim and the people who sympathized with it. Applying age-based standards to slaves was unprecedented at the time.
While Kim Ahn-guk was a member of Sungkyunkwan, he influenced many people such as Jung Ji-woon, Kim In-hoo, and Yoo Hee-chun. However, his ideological achievements were focused on laying the groundwork for practice rather than on the philosophical aspect. It can be said that his role was pioneering in the practice of hyangyak in the villages as historical subjects and leading the order of the vill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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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정운 ( Jeongun Kim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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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김순의(金純義, 1645~1714)의 『과헌일기』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을 정리하여 18세기 사대부의 제사 설행 방식을 실증적으로 확인한 연구이다. 김순의의 사례에서 보면 제사는 대상자의 자손들이 역할을 분담하였다. 김순의는 종자(宗子)로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강조하면서, 제사는 친족들과 분담하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에게 종자와 종가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제사는 대상자의 후손이 모두 참여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김순의의 친족들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을 단위로 제사를 담당하였다. 이는 당시 사대부에게 가산을 운영하는 단위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분할적인 가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개별 제사 마다 일정한 재정을 확보해서 이것을 토대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는 선대의 제사가 종자 개인의 일이 아니라 후손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고조(高祖)의 자손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그 종자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가산을 운영하고 의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던 『주자가례』의 친족 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김순의의 제사 설행 방식은 조선 사대부의 가족과 친족 운영이 중국의 제도와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This study aims to empirically investigate the process of performing ancestral rites of the literati in the 18th century by extracting and analyzing the records of Kim Sun-ui (1645-1714)'s "Gwaheon Diary." In the case of Kim Sun-ui, the descendants of the subjects shared their roles in the ancestral rites. Kim clearly recognized and emphasized his role as the primogeniture[宗子], and the ritual was shared with his relatives to perform the role. This shows that the consciousness of the primogeniture and the head family was strengthened to the literati at the time, and at the same time, the ritual shows that all the descendants of the subjects participated and shared their roles.
Kim's relatives were in charge of ancestral rites as a unit of the family-centered on the couple. This tells the literati at the time that the unit that runs the family fortune was a family consisting of a couple and children. Based on this divided family property, a certain amount of money was secured for each ancestral rite and a rite was held based on this. This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perception that the ancestral rites are not individual affairs of the primogeniture, but all the descendants. This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e kinship order of the "Family Rites" of Zhuxi which allowed the descendants of the great-great-grandparents to operate the family property and perform rituals integrally around the primogeniture. Therefore, Kim's performance of the ancestral rites is an example of the characteristics that the family and relatives of the Joseon Dynasty's literati are different from the Chines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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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윤정 ( Kang Yun-j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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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에서는 1920년 7월 30일 '안동부인회'가 결성되었다. 결성 주체는 김법상·김병규·김선경·김일애 등 불교계와 기독교계 여성들이다. 안동부인회는 안동지역 청년회와 연대하여 여성교육과 안동유치원설립 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의 활동은 여성교육계몽에 그치는 한계를 보였지만, 새로운 여성운동을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안동부인회가 설립한 안동유치원의 교사로 부임한 주금경·이기현 등에 의해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925년 11월 조직된 안동여성회는 계급의식 각성을 목적으로 자체의 교양과 훈련에 노력하는 새로운 성격의 단체였다. 창립 이후 안동여성회는 부인야학 및 부인견학 활동, 도산서원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도산서원철폐운동은 남성들의 여성인식 전환에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안동여성회는 1926년 5월 명칭을 '안동여자청년회'로 바꾸었다. 이를 주도한 주체는 중앙의 화요파, 안동의 화성회와 연결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 이후 '안동청맹 가입, 혹은 근우회 지회로의 개편'이라는 선택지 앞에 놓였다. 그러나 안동여자청년회는 무산아동을 대상으로 한 여자야학부 운영, 메이데이 행사 준비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1929년까지 독자적인 여성청년조직을 유지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며, 근우회 안동지회가 조직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1929년 들어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이에 안동청년동맹 산하에 여자부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였다. 김성애·전금옥·박금숙·김정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1931년 들어 조공재건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안동콤그룹 세포조직인 여자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여성운동으로서의 방향성을 찾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


In the Andong area,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was formed on July 30, 1920. The formation subjects are Buddhist and Christian women such as Kim Beop-rye, Kim Byeong-gyu, Kim Seon-kyung, and Kim Il-ae.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led the movement for women's educa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Andong kindergarten in solidarity with the Andong Youth Association. Their activities showed limitations only in the women's education enlightenment movement, but served as priming water for opening a new women's movement. This is because the socialist women's liberation movement was developed by Joo Geum-kyung and Lee Ki-hyun, who were appointed as teachers of Andong Kindergarten established by Andong Women's Association.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organized in November 1925, was a new organization that strives for its own culture and training for the purpose of awakening class consciousness. Since its foundation, Andong Women's Association has carried out women's night school, women's field trip activities, and the campaign to abolish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In particular, the movement to abolish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is significant in that i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hanging men's perception of women.
Andong Women's Association changed its name to Andong Women's Youth Association in May 1926. The subjects who led this were socialist activists connected to the Hwayo faction in the center and Hwaseonghoe in Andong.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Jeongwoohoe in November 1926, they were placed in front of the option of "joining Andong Cheongmeng, or reorganizing the Geunwoohoe branch.“ However, the Andong Women's Youth Association maintained its own women's youth organization until 1929 by operating the women's department and preparing for May Day events for Musan children. This is a rare case in the country, and it is also the reason why the Andong branch of the Geunwoohoe was not organized. However, as the power weakened in 1929, new alternatives were eventually needed. Accordingly, women who organized and operated the women's club under the Andong Youth League appeared. They are Kim Seong-ae, Jeon Geum-ok, Park Geum-sook, and Kim Jeong-hae. In 1931, they organized the women's division, a cellular organization of Andong Com Group, which was organized as part of the tribute reconstruction movement. Their activities revealed the limitations of not being able to find a direction as a women's movement, but on the other hand, they are significant in that they played a part in the continuous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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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인성 ( Jung Inse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6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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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실시한 관제사업의 하나였다. 성주지역에 대한 최초의 고적조사는 1902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그 이후 1914년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이마니시 류(今西龍),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에 의해 차례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일본 관학자들에 의한 조사성과는 철저하게 일본학계에서 공유되었으며 일본인 사회가 소비했다. 조선인들은 철저하게 소비주체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분야의 탈식민지화란 그 내용을 한국인의 시선에서 재검토하여 맥락재구성의 과정을 거쳐서 완수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의식하여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들의 고고학적 활동을 재검토하는 작업의 일환의 하나로, 성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고적조사의 경과와 조사 내용을 추적하고 복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During the Japanese rules, the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project was carried out as one of the means for colonial rule in the process of Japan's forcible annexation of Korea. The first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f the Seongju area was conducted by Sekino Tadashi(關野貞) in 1902, and from 1914 to 1920 by Torii Ryuzo(鳥居龍藏), Imanishi Ryu(今西龍), Hamada Kosaku(濱田耕作), Umehara Sueji(梅原末治), and Yatsui Seiitsu(谷井濟一). was investigated several more times. However, their investigations are rougher and insufficiently documented compared to today's investigations, and in particular, they focused only on securing excavated relics.
This study is one of the work to review the archaeological activities of Japanese researche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ased on this awareness of the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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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민우 ( Lee Min-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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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동시에 핵심적인 사료이다. 역사 연구에서 실록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당연히 실록의 내용, 즉 개별 기사를 아주 가까이에서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여 연구의 근거 자료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실록이라는 방대한 자료를 개인이 모두 읽고 소화하여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록 전체를 읽기 위해서는 개별 기사로부터 거리를 두고 실록 전체를 수량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멀리서 읽기'라는 접근이 필요하다. 실록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고 자료로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실록에 대한 '질적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 글은 실록 자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아 실록 전체의 수량적인 정보를 분석하는 '양적 접근'을 시도한다. 기사수와 글자수의 변동을 검토하는 한편, 실록 원문에서 책, 지명, 인물이 등장하는 빈도수를 계산하여 시대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살펴본다. 실록에 대한 수량적인 분석은 실록이라는 자료의 성격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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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은나 ( Kwon¸ Eun-n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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叛逆이란 왕조의 존립과 권위를 위협하거나 이를 모의하는 행위로 『大明律』 十惡條 가운데 謀反·謀大逆·謀叛에 해당한다. 반역은 왕조 국가의 국왕에 대한 도전이며, 정치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중대한 행위였기 때문에 가장 무거운 형벌로 처벌되었다. 조선에서 왕대별로 반역 사건이 쉽사리 발견된다. 특히, 光海君은 즉위한 직후에 친형제인 臨海君의 반역사건을 수습하는 것으로 재위를 시작하였고, 재위 기간 중에 반역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재위의 마지막은 인조반정으로 마치게 되었다.
광해군대에 광해군을 대상으로 한 반역으로 처벌받은 사건은 총 10건이다. 왕위교체를 시도한 사건 7건,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위협한 혐의로 처벌받은 사건 1건, 광해군에 대한 불경스러운 언행으로 처벌받은 사건 2건이다. 광해군의 재위 동안 지속적으로 반역 사건이 발생하였고, 반역사건을 처결하는 것은 광해군 정권의 당면 과제였다. 광해군대 반역 사건의 수습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광해군은 연이은 반역의 성립을 용인하였고, 이를 통해 왕위계승이 가능한 종친과 반역을 도모한 세력을 처벌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러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까지 제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반역 사건은 장기화되었고, 이에 따라 파생되는 부작용이 다방면으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권의 안정이 자신을 지위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반역 사건의 수습을 통한 정국 운영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정국 운영은 광해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국 운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해군이 추구하였던 정국 운영은 일종의 공포정치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반역 사건을 통해 제거하였기 때문에 광해군의 추구하였던 정국 운영은 반역 사건을 처결하는 과정과 궤를 함께 한 것으로 이해된다. 반역 사건이 지속되고 장기화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자신의 親母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할 수 있었고, 자신도 재위 기간 중에 두 차례 존호를 받으며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장치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른 사회적·정치적 부작용이 파생되었다. 하지만 광해군 정권은 이러한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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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주엽 ( Shin Joo-yeop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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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존에 역사서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던 조선시대의 箕子 인식을 기자를 제향하는 사당과 서원, 祠宇 등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고자 하였다. 17~18세기에 기자 유적의 정비가 진행되는 과정이 기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고자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특히 평양의 기자 유적은 조선의 국왕과 지식인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사신도 한 번쯤 방문하고자 한 장소였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기자의 사당은 조선 태종대에 箕子殿으로 명칭이 정해지고 세종대에 祀典에 등재되면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15세기의 기자 인식을 보여주는 유적은 기자전에 세워진 箕子廟碑이다. 卞季良이 작성한 碑銘에는 箕子受封說, 中華와 東夷 등 기자를 중국과 연결하여 인식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기자의 사당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의 記文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기자전과 箕子墓를 정비하는 과정은 기자와 중국의 연관성, 명나라 사신의 기자 유적 방문 등이 고려되었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 광해군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기자전의 명칭은 崇仁殿으로 바뀌었다. 기존 연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再造之恩 및 명나라와의 同類 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기자 유적이 정비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유생과 李廷龜 등이 기자 제사의 禮를 높이고 후손인 鮮于氏가 대대로 제사를 잇도록 요구한 글에서는 기자와 중국을 연결 짓는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정구가 작성한 箕子廟碑를 보면 15세기의 箕子受封說과 기자의 敎化에 대한 해석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기자를 箕聖으로 표현하며 하늘이 단군을 잇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詩를 지었다.
17세기에 변화한 기자 인식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자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고, 18세기에 기자를 제향하는 장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평양의 仁賢書院에 봉안되었던 기자 그림이 정묘호란으로 인하여 사라지자, 평안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그림의 진본을 주장하며 기자의 院宇를 건립하고 사액을 요구하였다. 18세기 영조 · 정조대에는 한양의 文廟와 전국 8도에 기자의 사당을 별도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유생의 공론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모두 기자가 조선에 끼친 功德이 孔子보다 작지 않음에도 기자의 사당이 공자를 제향하는 공간보다 적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17~18세기 기자 유적의 정비는 17세기를 기점으로 기자를 '중국의 기자'에서 '조선의 기자'로 만들어가고, 변화한 기자 인식을 확립하여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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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경희 ( Son Kyoung-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9-14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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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공려수리조합은 일제 말 전시체제기 산미증식을 위해 설립되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이 설립된 금호면은 금호강이 관통하는 경북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였다. 그 결과 일제초기부터 조선흥업(주) 농장과 동척이민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많은 곳이었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자국의 경기활성화에 따른 식량 요구에 폐지했던 수리조합을 다시 공려수리조합 형태로 부활시켰다. 공려수리조합은 1937~1939년까지 전국에 57곳이 설립되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경북에서 설립된 공려수리조합 7곳 가운데 하나로 1938년 10월 27일 설립되었다. 일제가 영천군 금호면에 공려수리조합을 설립하려 한 이유는 첫째, 경북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로 전시체제기 식량생산기지로서 주목했기 때문이다. 둘째, 기존 수리시설인 단계지를 이용할 수 있어 큰 자금의 투입 없이 설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셋째, 일제의 식민농업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조선흥업(주)과 동척, 이주일본인 등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금호면 면의원, 조선흥업(주), 동척, 이주일본인인 사토 야스지(佐藤保治), 창녕 조씨 출신의 대지주 조규용 등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이주일본인 사토는 헌병 오장, 경찰 경부, 식산은행 주사 출신으로 1930년대 금호면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농업경영을 하던 인물이었다. 조규용은 단계공려수리조합 설립 후 조합장이 된 인물로 조합 구역 내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대지주였던 조선흥업(주), 동척, 사토, 조규용 등은 단계공려수리조합 설립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말 전시체제기 단계공려수리조합이 설립되었으나 1939년, 1942년, 1943년 등 연속적으로 발생한 한해, 강제동원으로 인한 인구 유출, 각종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부재지주의 증가, 식량증산에 필요한 비료 사용급감 등으로 인한 토지 황폐화에 따른 산미증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3회에 걸쳐 조합 구역을 변경·확장하면서 전시체제기 식량증산이라는 식민농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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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8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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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서술된 몽골제국 부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여전히 수정이나 개정이 필요한 내용과 최신 연구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부분 등이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후 교과서의 재검토나 수정 과정에서는 표기법에 대한 신중한 검토,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엄밀하게 고려한 서술,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바탕으로 한 서술 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특히 지도에서는 사소한 오류들까지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중국 혹은 한족 중심적인 역사 인식에서 점차 벗어나 몽골제국의 고유한 특성을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큰 발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에 안주하지 않고, 몽골제국 역사 연구 분야에서 활발하게 축적되고 있는 연구 성과들을 주목하면서 교과서의 용어나 내용 서술을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칸과 카안 용어의 구분, 색목인의 범주와 역할에 대한 정의, 국호 '원'과 '대원'에 대한 정확한 서술 등은 앞으로 『동아시아사』 교과서 서술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본고에서는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4종만을 대상으로 몽골제국 관련 서술을 검토했는데, 본문에서 지적한 사항들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나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몽골제국 서술 부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사』 교과서의 고려시대사 서술에서 등장하는 몽골제국과 관련된 내용들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차후 교과서의 오류나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를 기대하고, 특히 몽골제국 등 북방민족과 관련된 역사적 서술에서는 최근 국내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거나 비판하면서 '발전적인 개정'이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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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성구 ( Hong Sung-k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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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명이 조선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연구이다. 조선은 명에 대해 事大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명조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명도 조선을 충실한 조공국으로 인정하면서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배신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명의 태도는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한 시기부터 이미 드러났고, 정묘·병자의 두 차례 호란을 겪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명이 조선을 의심한 이유와 그것이 국제관계에 끼친 영향과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조선과 명이 주자학적 화이론의 가치를 공유하고 임진왜란을 함께 극복했기 때문에 호란의 국면에서도 책봉-조공 관계를 계속 유지·관철한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국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의심도 그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두 차례의 호란이 발발했을 때 북경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한 두 사행, 1637년의 김상헌과 1637년 김육 일행의 외교 활동을 통해서 호란에 대한 당시 명 조정 내부의 논의와 대응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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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한밝 ( Kim Hanbar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5-2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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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淸代의 十惡이 사법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살핀 연구이다. 十惡은 唐律 이후 형법전 내부에서 확인되는 유가적 도덕관을 대표하는 항목으로, 군주나 부모 등에 대한 범죄와 일부 반인륜적 범죄를 묶어 카테고리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본론에서는 먼저 十惡 가운데 惡逆, 不睦의 두 항목과 연계되어 있는 「謀殺祖父母父母」律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조부모, 부모 등을 살해하려 계획하였는데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경우, 律에서 처벌하는 범죄행위는 아니지만 十惡에는 포함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律들이 정치하게 수정되는 동안 十惡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결과적으로 重罪로서의 十惡과 도덕규범으로서의 十惡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냈다고 판단된다.
한편 十惡은 등장 이래 줄곧 사면의 예외로 분류되어, 乾隆帝의 즉위 사면에서도 十惡을 범한 죄인은 석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당시 사면의 은조를 받은 各省의 督撫들은 조건에 부합하는 죄인들의 석방을 요청했는데, '刑科題本'에서 확인되는 세 가지 사례를 보면, 十惡에 해당하는지의 여부가 사면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실질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嘉慶연간 이후의 사면사례에서는 十惡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사면의 예외로 두기보다는, 그 가운데 일부 항목으로 한정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그 상징성과 별개로, 十惡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범죄에 대한 실질적인 경계는 조금씩 감소해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淸代와 같이 민간에서 법률지식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던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十惡은 성문화된 형법전을 통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훈계로 기능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사면 과정에서의 실질적인 행정절차와는 별개로 '사면하지 않을 죄'를 내세운 것 역시 그러한 목적에 바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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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철호 ( Nam Cheol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8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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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언론인 트루 스캇먼지, 스코티시 패트리엇지, 그리고 차티스트 서큘러지를 검토 대상으로 하여 언론의 간행과 목표, 성쇠, 그리고 경쟁과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았다. 세 언론은 각자 고유 색깔을 지니면서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운동을 이끌어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차티스트 운동은 주로 기독교 차티스트 운동, 금주 차티스트 운동, 그리고 교육 차티스트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상기언론이 이러한 운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언론은 대체로 反휘그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가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물리적 힘'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비록 세 언론이 경쟁하면서 차티스트 운동이 분기되고 신문이 폐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공동 목표는 명확하였다. 보통 선거권 획득, 교육을 통한 노동자들의 물리적 상황 개선, 노동자들의 금주운동, 그리고 교회(기독교) 개혁을 통한 노동자와 사회 전반의 개혁이었다. 차티스트 언론의 경쟁과 운동 속에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도출되었고 차티스트 운동을 1860년대와 그 이후로 지속할 수 있는 자양분을 키웠다. 나아가 그것은 영국 특유의 평화적이면서도 점진적인 노동운동의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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