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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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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147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2
간행물 제목
148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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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민우 ( Lee Min-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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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동시에 핵심적인 사료이다. 역사 연구에서 실록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당연히 실록의 내용, 즉 개별 기사를 아주 가까이에서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여 연구의 근거 자료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실록이라는 방대한 자료를 개인이 모두 읽고 소화하여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록 전체를 읽기 위해서는 개별 기사로부터 거리를 두고 실록 전체를 수량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멀리서 읽기'라는 접근이 필요하다. 실록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고 자료로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실록에 대한 '질적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 글은 실록 자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아 실록 전체의 수량적인 정보를 분석하는 '양적 접근'을 시도한다. 기사수와 글자수의 변동을 검토하는 한편, 실록 원문에서 책, 지명, 인물이 등장하는 빈도수를 계산하여 시대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살펴본다. 실록에 대한 수량적인 분석은 실록이라는 자료의 성격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s the most basic and essential material for studying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The general way to use the Annals in historical research is, of course, to read and analyze the contents of the Annals very closely and meticulously. However, it is virtually impossible for an individual to read and digest the vast data of the Annals and analyze the contents. Therefore, in order to read the Annals as a whole, an approach called 'distant reading' is necessary, which means to take a distance from individual articles and analyze the entire Annals in quantitative perspective. A general way to read the contents of the Annals is a 'qualitative approach'. On the other hand, this article attempts a 'quantitative approach' that analyzes the quantitative information of the entire the Annals. After calculating the number of articles and letters, the frequency of occurrence of books, place names, and persons in the Annals, the pattern of changes according to the times is examined. Quantitative analysis of the Annals can contribute to raising new questions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Annals and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 Dynasty.
(Andong National University / leeminu79@a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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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은나 ( Kwon¸ Eun-na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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叛逆이란 왕조의 존립과 권위를 위협하거나 이를 모의하는 행위로 『大明律』 十惡條 가운데 謀反·謀大逆·謀叛에 해당한다. 반역은 왕조 국가의 국왕에 대한 도전이며, 정치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중대한 행위였기 때문에 가장 무거운 형벌로 처벌되었다. 조선에서 왕대별로 반역 사건이 쉽사리 발견된다. 특히, 光海君은 즉위한 직후에 친형제인 臨海君의 반역사건을 수습하는 것으로 재위를 시작하였고, 재위 기간 중에 반역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재위의 마지막은 인조반정으로 마치게 되었다.
광해군대에 광해군을 대상으로 한 반역으로 처벌받은 사건은 총 10건이다. 왕위교체를 시도한 사건 7건,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위협한 혐의로 처벌받은 사건 1건, 광해군에 대한 불경스러운 언행으로 처벌받은 사건 2건이다. 광해군의 재위 동안 지속적으로 반역 사건이 발생하였고, 반역사건을 처결하는 것은 광해군 정권의 당면 과제였다. 광해군대 반역 사건의 수습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광해군은 연이은 반역의 성립을 용인하였고, 이를 통해 왕위계승이 가능한 종친과 반역을 도모한 세력을 처벌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러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까지 제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반역 사건은 장기화되었고, 이에 따라 파생되는 부작용이 다방면으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권의 안정이 자신을 지위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반역 사건의 수습을 통한 정국 운영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정국 운영은 광해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국 운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해군이 추구하였던 정국 운영은 일종의 공포정치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반역 사건을 통해 제거하였기 때문에 광해군의 추구하였던 정국 운영은 반역 사건을 처결하는 과정과 궤를 함께 한 것으로 이해된다. 반역 사건이 지속되고 장기화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자신의 親母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할 수 있었고, 자신도 재위 기간 중에 두 차례 존호를 받으며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장치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른 사회적·정치적 부작용이 파생되었다. 하지만 광해군 정권은 이러한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Rebellion is an act of threatening or conspiring against the existence and authority of a dynasty, corresponding to 謀反, 謀大逆, or 謀叛 of the Sipakjo in Daemyeongryul. rebellion is a challenge against a king in a dynastic state and a high crime, being subjected to the most serious punishment. It is easy to come across rebellion events during the reign of a king throughout Joseon. Gwanghaegun, in particular, began his reign by handling the rebellion case of Imhaegun, one of his brothers, right after he ascended the throne, witnessed rebellion cases occurring one after another throughout his reign, and faced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at the end of his reign.
A total of ten cases received punishments for rebellion against Gwanghaegun. Of them, seven attempted to replace the king; one received punishments for a charge of threatening his status as a crown prince; and two received punishments for blasphemous words and acts against him. The seven cases attempted to replace the king and received punishments, accounting for the biggest portion in the ten rebellion cases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rebellion events consistently took place throughout his reign, and settling these events was one of the tasks faced by his regime. He, however, allowed a series of rebellion events to establish themselves so that he could punish the royal family members that could inherit the throne and those who conspired to rebellion against him and further remove all the force with such possibilities. It was natural that rebellion cases prolonged and caused side effects across many aspects. Gwanghaegun, however, believed that the stability of his regime depended on the removal of the force that threatened his status, adhering to his style of government management through the handling of rebellion events.
His style of government management can be understood as one to increase his authority. Since he sought after a kind of reign of terror in his government management and removed his political adversaries through rebellion cases, the style of government management he pursued was in line with the process of handing rebellion cases. As rebellion cases continued and prolonged, he was eventually able to worship his mother as a queen, receive two 尊號 during his reign, and utilize several devices to enhance his authority. Social and political side effects, however, derived from them.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eus2e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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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주엽 ( Shin Joo-yeop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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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존에 역사서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던 조선시대의 箕子 인식을 기자를 제향하는 사당과 서원, 祠宇 등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고자 하였다. 17~18세기에 기자 유적의 정비가 진행되는 과정이 기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고자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특히 평양의 기자 유적은 조선의 국왕과 지식인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사신도 한 번쯤 방문하고자 한 장소였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기자의 사당은 조선 태종대에 箕子殿으로 명칭이 정해지고 세종대에 祀典에 등재되면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15세기의 기자 인식을 보여주는 유적은 기자전에 세워진 箕子廟碑이다. 卞季良이 작성한 碑銘에는 箕子受封說, 中華와 東夷 등 기자를 중국과 연결하여 인식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기자의 사당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의 記文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기자전과 箕子墓를 정비하는 과정은 기자와 중국의 연관성, 명나라 사신의 기자 유적 방문 등이 고려되었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 광해군대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기자전의 명칭은 崇仁殿으로 바뀌었다. 기존 연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再造之恩 및 명나라와의 同類 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기자 유적이 정비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유생과 李廷龜 등이 기자 제사의 禮를 높이고 후손인 鮮于氏가 대대로 제사를 잇도록 요구한 글에서는 기자와 중국을 연결 짓는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정구가 작성한 箕子廟碑를 보면 15세기의 箕子受封說과 기자의 敎化에 대한 해석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기자를 箕聖으로 표현하며 하늘이 단군을 잇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詩를 지었다.
17세기에 변화한 기자 인식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자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고, 18세기에 기자를 제향하는 장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평양의 仁賢書院에 봉안되었던 기자 그림이 정묘호란으로 인하여 사라지자, 평안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그림의 진본을 주장하며 기자의 院宇를 건립하고 사액을 요구하였다. 18세기 영조 · 정조대에는 한양의 文廟와 전국 8도에 기자의 사당을 별도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유생의 공론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모두 기자가 조선에 끼친 功德이 孔子보다 작지 않음에도 기자의 사당이 공자를 제향하는 공간보다 적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17~18세기 기자 유적의 정비는 17세기를 기점으로 기자를 '중국의 기자'에서 '조선의 기자'로 만들어가고, 변화한 기자 인식을 확립하여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This article attempted to examine the perception of Gija(箕子), which had previously been analyzed mainly in historical books, through the process of maintaining the remains of Gija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name of the country, Joseon(朝鮮), comes from Gija Joseon. Therefore, Joseon revered Gija as the progenitor of the country. Gijajeon(箕子殿), a space to revered Giza, began to be maintained in the early 15th century. The perception of GiJajeon changed when the envoy of the Ming(明) Dynasty of China visited there. The connection between the place and China was considered a lot when the envoy of the Ming Dynasty visited GiJajeon. A visit to the Confucian shrine, where Confucius(孔子)'s memorial service was held, was recommended first to the Chinese envoy, and GiJajeon was next. In the 15~16th centuries, Gija's status fell short of Confucius.
In the early 17th century, GiJa's shrine was renamed from Gizajeon to Soonginjeon(崇仁殿). 'Soongin(崇仁)' means to worship In(仁), which Confucius claimed. However, the name of Gija's shrine was given to Gija, not Confucius, as a symbol of In(仁). It also shows that the status of the GiJa has changed to a position equivalent to Confucius. This change can also be found in the term 'Gisung(箕聖)', which describes a Gija as an saint. The Joseon intellectuals who visited the ruins of Gija in the 17~18th centuries did not leave a record of what they thought of linking this place with China. Through this, it can be proved that the process of maintaining the remains of Gija is not the result of loyalty and respect for China.
This process and perception is also confirmed in the process of building a seowon(書院) and a shrine to store the Gija's paintings. During the Joseon Dynasty, six spaces were built to store Gija's paintings. The painting, which was kept at Inhyeonseowon(仁賢書院) in Pyongyang, disappeared through the Chinese Invasion of Joseon in 1627(丁卯胡亂). As the original disappeared, many regions began to build a shrine for Gija, claiming that their paintings were genuine. The people who built these spaces raised a problem with the fact that Gija's shrine was less than Confucius's. They needed to build a shrine for Gija, which was superior to Confucius, and hoped that the state would recognize this shrine. In the 18th century, the public opinion of intellectuals to establish a shrine for Gija nationwide was conveyed to the state. Unlike the 15~16th centuries, the maintenance of the remains of Gija in the 17~18th centuries and the recognition reflected in them were carried out in the process of making Gija in China into a Gija in Joseon.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shin16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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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경희 ( Son Kyoung-hee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9-14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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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공려수리조합은 일제 말 전시체제기 산미증식을 위해 설립되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이 설립된 금호면은 금호강이 관통하는 경북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였다. 그 결과 일제초기부터 조선흥업(주) 농장과 동척이민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많은 곳이었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자국의 경기활성화에 따른 식량 요구에 폐지했던 수리조합을 다시 공려수리조합 형태로 부활시켰다. 공려수리조합은 1937~1939년까지 전국에 57곳이 설립되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경북에서 설립된 공려수리조합 7곳 가운데 하나로 1938년 10월 27일 설립되었다. 일제가 영천군 금호면에 공려수리조합을 설립하려 한 이유는 첫째, 경북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로 전시체제기 식량생산기지로서 주목했기 때문이다. 둘째, 기존 수리시설인 단계지를 이용할 수 있어 큰 자금의 투입 없이 설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셋째, 일제의 식민농업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조선흥업(주)과 동척, 이주일본인 등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금호면 면의원, 조선흥업(주), 동척, 이주일본인인 사토 야스지(佐藤保治), 창녕 조씨 출신의 대지주 조규용 등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이주일본인 사토는 헌병 오장, 경찰 경부, 식산은행 주사 출신으로 1930년대 금호면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농업경영을 하던 인물이었다. 조규용은 단계공려수리조합 설립 후 조합장이 된 인물로 조합 구역 내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대지주였던 조선흥업(주), 동척, 사토, 조규용 등은 단계공려수리조합 설립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말 전시체제기 단계공려수리조합이 설립되었으나 1939년, 1942년, 1943년 등 연속적으로 발생한 한해, 강제동원으로 인한 인구 유출, 각종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부재지주의 증가, 식량증산에 필요한 비료 사용급감 등으로 인한 토지 황폐화에 따른 산미증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계공려수리조합은 3회에 걸쳐 조합 구역을 변경·확장하면서 전시체제기 식량증산이라는 식민농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The Dangye gonglyeo Irrigation Association was established on October 27, 1938 and merged with the Yeongcheon Farmland Improvement Association on March 31, 1948. The founding entity of the Dangye gonglyeo Irrigation Association was a member of Geumho-myeon, who were middle figure people who actively cooperated with Japanese colonial policy. In particular, the step-by-step public repair association area was the clan village of Changnyeong Cho clan, and they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 local community as a myeon clinic and a large landowner. Among the founding members, Yasuji Sato, a Japanese migrant, was a former military police chief and police officer, settled in Geumho-myeon in the 1930s, bought a lot of land, and had a very strong influence on the local community.
The operation of the Dangye gonglyeo Irrigation Association continues to operate the union as a council member until Cho Kyu-yong, a Korean landowner who owns the most land in Geumho-myeon (Changed his last name in 1942), Sato, a Japanese landowner, and Dongcheok are liberated. At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Dangye gonglyeo Irrigation Association becomes a space that has no choice but to faithfully function as a colonial rural village, which is an increase in food during the war regime. In particular, in order to avoid the devastated farmland and various burdens of the local community caused by great drought in 1939, 1942, and 1943, the function of increasing food production was required on behalf of absentee landlords who moved to the city.
The Dangye gonglyeo Irrigation Association tried to prevent the devastation of the local community by expanding the union area twice. The Step Publicity Repair Association faithfully performed the function of colonial farming villages called food production during the wartime regime.
(Kumoh National Institute of Technology Researcher of Seonju Culture Research Institute / khs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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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8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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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서술된 몽골제국 부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여전히 수정이나 개정이 필요한 내용과 최신 연구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는 부분 등이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후 교과서의 재검토나 수정 과정에서는 표기법에 대한 신중한 검토,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엄밀하게 고려한 서술,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바탕으로 한 서술 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특히 지도에서는 사소한 오류들까지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중국 혹은 한족 중심적인 역사 인식에서 점차 벗어나 몽골제국의 고유한 특성을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큰 발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에 안주하지 않고, 몽골제국 역사 연구 분야에서 활발하게 축적되고 있는 연구 성과들을 주목하면서 교과서의 용어나 내용 서술을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칸과 카안 용어의 구분, 색목인의 범주와 역할에 대한 정의, 국호 '원'과 '대원'에 대한 정확한 서술 등은 앞으로 『동아시아사』 교과서 서술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본고에서는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4종만을 대상으로 몽골제국 관련 서술을 검토했는데, 본문에서 지적한 사항들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나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몽골제국 서술 부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사』 교과서의 고려시대사 서술에서 등장하는 몽골제국과 관련된 내용들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차후 교과서의 오류나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를 기대하고, 특히 몽골제국 등 북방민족과 관련된 역사적 서술에서는 최근 국내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거나 비판하면서 '발전적인 개정'이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This article has critically reviewed the Mongol Empire described in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extbooks of East Asian History still need to be revised and there are parts that need to actively accept the latest research results. In the process of revising textbooks in the future, it will be necessary to carefully review the notation, describe the exact definition of the term. especially on the map. Especially on the map in textbooks, I think it will be necessary to recheck even minor errors.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it is a great development to gradually move away from the existing Chinese or Han-centered historical perception and try to reflect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the Mongol Empire as much as possible in textbooks of East Asian history. However, without settling for such development, it is necessary to refine the terms and descriptions of textbooks by paying attention to the research results actively accumulated in the Mongol Empire's history research field. For example, the distinction between Khan(Qa'an) and Qan, the definition of the category and role of Semuren(色目人), and the accurate description of the national names 'Yuan'(元) and 'Dayuan'(大元) are parts to be carefully considered in the description of textbooks in the future. I hope that active discussions on errors that need to be reviewed will take place, and in particular, historical descriptions related to northern peoples such as the Mongol Empire will reflect or criticize the recent research results.
(Institute of Northern Cultures at Dankook University / kycgand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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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성구 ( Hong Sung-k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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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명이 조선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연구이다. 조선은 명에 대해 事大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명조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명도 조선을 충실한 조공국으로 인정하면서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배신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명의 태도는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한 시기부터 이미 드러났고, 정묘·병자의 두 차례 호란을 겪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명이 조선을 의심한 이유와 그것이 국제관계에 끼친 영향과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조선과 명이 주자학적 화이론의 가치를 공유하고 임진왜란을 함께 극복했기 때문에 호란의 국면에서도 책봉-조공 관계를 계속 유지·관철한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국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의심도 그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두 차례의 호란이 발발했을 때 북경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한 두 사행, 1637년의 김상헌과 1637년 김육 일행의 외교 활동을 통해서 호란에 대한 당시 명 조정 내부의 논의와 대응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This paper is a study to examine the positions of the Ming Dynasty on Joseon during the two wars: Jeongmyo Horan and Byeongja Horan. Joseon was well aware of the contradictions and problems of the Ming society while maintaining the loyalty of the Ming Dynasty. Ming Dynasty also recognized Joseon as a faithful tribute country, but did not take a look of doubt about it, fearing that Joseon would betray in the rapidly changing international situation. In fact, this attitude of the Ming Dynasty has already been revealed since around the time of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it was the same in the process of going through two wars: the Jeongmyo Horan and the Byeongja Horan. However, so far, it seems that little attention has been paid to why Ming Dynasty suspected Joseon and its impact and meaning on international relations. Perhaps it is because Joseon and Ming shared the logic of neo-Confucianism about the distinction between China and barbarian and they overcame the Imjin War together, so they took it for granted that they continued to maintain and carry out the Investiture-Tribute relationship in the face of two wars. However, as today, at that time, the state had no choice but to react sensitively to the rapidly changing international situation. Ming's suspicion of Joseon is also a natural reaction.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discussions and responses within the Ming Dynasty of the time through the activities of two envoys who conducted diplomacy in Beijing when the two wars broke out, Kim Sang-heon in 1637 and Kim Yuk in 1637, and think about what it suggests to us toda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hinahsk@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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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한밝 ( Kim Hanbar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5-24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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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淸代의 十惡이 사법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살핀 연구이다. 十惡은 唐律 이후 형법전 내부에서 확인되는 유가적 도덕관을 대표하는 항목으로, 군주나 부모 등에 대한 범죄와 일부 반인륜적 범죄를 묶어 카테고리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본론에서는 먼저 十惡 가운데 惡逆, 不睦의 두 항목과 연계되어 있는 「謀殺祖父母父母」律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조부모, 부모 등을 살해하려 계획하였는데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경우, 律에서 처벌하는 범죄행위는 아니지만 十惡에는 포함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律들이 정치하게 수정되는 동안 十惡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결과적으로 重罪로서의 十惡과 도덕규범으로서의 十惡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냈다고 판단된다.
한편 十惡은 등장 이래 줄곧 사면의 예외로 분류되어, 乾隆帝의 즉위 사면에서도 十惡을 범한 죄인은 석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당시 사면의 은조를 받은 各省의 督撫들은 조건에 부합하는 죄인들의 석방을 요청했는데, '刑科題本'에서 확인되는 세 가지 사례를 보면, 十惡에 해당하는지의 여부가 사면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실질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嘉慶연간 이후의 사면사례에서는 十惡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사면의 예외로 두기보다는, 그 가운데 일부 항목으로 한정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그 상징성과 별개로, 十惡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범죄에 대한 실질적인 경계는 조금씩 감소해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淸代와 같이 민간에서 법률지식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던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十惡은 성문화된 형법전을 통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훈계로 기능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사면 과정에서의 실질적인 행정절차와는 별개로 '사면하지 않을 죄'를 내세운 것 역시 그러한 목적에 바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analyzed the role of “the Ten Abominations” in the judicial system in Qing era.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aditional Chinese legal system since Tang era is the existence of a Confucian morality within the penal code. The Ten Abominations article represents this. It can be said that the Ten Abominations are a categorization of crimes against the emperor and parents, and the actual punishment for the acts belonging to them can be grasped through the corresponding articles. However, the sentencing of the articles varies from “eighty strokes” to “death by a thousand cuts”, and leaves questions about the substantive role of the Ten Abominations.
First, I focused on the article of the Great Qing Code, and examined the “plotting the killing of paternal grandparents and parents” article, which is linked to the two parts of the Ten Abominations. If somebody planned to kill his grandparents but didn't do it, it was included in the Ten Abominations, though it was not a criminal act punished by the article. This was due to the fact that only the Ten Abominations remained, while the other articles used in the substantive judiciary were elaborated, resulting divergence between felony and moral norms.
On the other hand, the Ten Abominations have been classified as an exception to mercy since their appearance. In fact, the pardon given at the time of Qianlong emperor's coronation clearly stated that the criminal who committed the Ten Abominations would not be released. Therefore, the governor of each province who received an order of the mercy requested the pardon of the criminal who meets the conditions. Considering three cases that appear in Xingke Tiben, whether it corresponds to Ten Abominations or not was applied as a criterion for determining the forgiveness. However, from the mercy after the Jiaqing era, unlike the earlier cases, only some of the Ten Abominations were subject to forgiveness, rather than being an exception to the mercy just because they belonged to the Ten Abominations. In this way, apart from its symbolism, the actual vigilance against crimes belonging to the category of Ten Abominations gradually decreased.
After all, considering the situation of the Qing era when legal knowledge was widely circulated in the local areas, it can be judged that the Ten Abominations were the minimum moral instructions that could function through the codified criminal code. And unlike the actual mercy administration, it is probably because of such a purpose that the “guilty unforgiving” was put in the foreground.
(Postdoctoral Fellow in Institute of Modern History, Academia Sinica / rebornb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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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철호 ( Nam Cheolh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8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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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언론인 트루 스캇먼지, 스코티시 패트리엇지, 그리고 차티스트 서큘러지를 검토 대상으로 하여 언론의 간행과 목표, 성쇠, 그리고 경쟁과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았다. 세 언론은 각자 고유 색깔을 지니면서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운동을 이끌어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차티스트 운동은 주로 기독교 차티스트 운동, 금주 차티스트 운동, 그리고 교육 차티스트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상기언론이 이러한 운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코틀랜드 차티스트 언론은 대체로 反휘그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가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물리적 힘'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비록 세 언론이 경쟁하면서 차티스트 운동이 분기되고 신문이 폐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공동 목표는 명확하였다. 보통 선거권 획득, 교육을 통한 노동자들의 물리적 상황 개선, 노동자들의 금주운동, 그리고 교회(기독교) 개혁을 통한 노동자와 사회 전반의 개혁이었다. 차티스트 언론의 경쟁과 운동 속에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도출되었고 차티스트 운동을 1860년대와 그 이후로 지속할 수 있는 자양분을 키웠다. 나아가 그것은 영국 특유의 평화적이면서도 점진적인 노동운동의 선례를 남겼다.


So far, I have been reviewed the Scottish Chartist movement and press. The conclusion is as follows.
Firstly, the thesis was reviewed by Scottish Chartist journals, the True Scottman, the Scottish Patriot, and the Chartist Circular. The three media, each with their own colors, led the Scottish Chartist movements. The Scottish Chartist Movement was mainly developed by Christian Chartism, Teetotal Chartism, and Education Chartism, and the three media played a major role in promoting the movement from these three perspectives.
Secondly, the Scottish Chartist press was largely anti-Whig, and opposed the use of 'physical force', albeit with occasional ambivalence. Although the three presses competed, the Chartist movement was divided and newspapers were shut down, but their common goal was clear. It was the reform of workers and society as a whole through the acquisition of universal suffrage, improvement of workers through education, the workers' abstinence movement, and reform of the church (Christianity). In the midst of these competitions and movements, various social reform programs were derived from and the Chartist movement was nurtured to continue in the 1860s and beyond.
(Lecturer of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nch6461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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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건우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1-29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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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인복 ( Yi In-b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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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일기는 개인이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여 경사를 강의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경연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경연일기를 기록한 개인이나 이를 정리하여 문집에 수록하거나 간행하는 집단의 의도가 담겨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다만 선조대와 같이 관찬사료가 부족한 시기의 경연일기만이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李珥의 『경연일기』나 柳希春의 「경연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연 기록은 경연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종, 중종대를 거치면서 사림이 등장하고 경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연이 자주 시행되고 경연에서의 논의내용도 풍부해지면서 경연 기록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사관의 경연 입시 정례화로 사초에 경연 내용이 풍부해지고, 관찬 사료의 경연기사의 내용이 자세해졌다. 개인의 일기에도 경연 내용이 기록되고, 경연 때에 자신의 발언을 별도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종대 조광조, 한충을 비롯한 기묘사림들은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하여 남겼으며, 선조대의 이황 역시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으로 남겼다.
선조대에는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연에서의 발언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변화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지식인들의 일기 쓰기와 연관이 있다. 개인의 일기에서 경연에서의 경험이 기록되는 것은 국왕과 면대하여 경사를 진강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특별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본인이나 후손, 제자들에 의해 경연 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정리된다. 주희의 『주자경연강의』나 진덕수의 『진서산경연강의』, 관찬 경연일기를 작성하였던 경험들은 조선시대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의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사이에서 이황의 「경연강의」, 이이의 『경연일기』는 경연일기가 등장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 김우옹의 「경연강의」 이후로 작성 주체와 형식이 다양한 경연일기들이 저술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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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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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麟坪大君(1622~1658)의 12차례 대청사행을 살펴보고, 그의 대중국 인식을 『燕途紀行』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인평대군은 인질과 사신으로 자주 청을 왕래하였으며, 왕족 출신인 그의 대중국 인식은 관료들의 인식과 차이를 보인다.
『연도기행』은 인평대군이 12차례의 사행 가운데 11번째인 1656년(효종 7)의 사행을 기록한 것이다. 『연도기행』에는 이전 10차례 사행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1656년(효종 7) 당시의 사행일기보다 회고록의 성격이 강하다.
인평대군은 여행자로서 개인의 사행 체험, 연행 노정의 고초와 심정을 기록하였고, 사신으로서 연로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조선의 산성 현황과 청의 요동 병력 배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인평대군은 전란이 재차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산성 보존과 민심의 수습을 중요시하고, 청의 요동 병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인평대군은 청에 거주하는 역관과 조선인을 통해 청 내정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청의 정치 운영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명 정권의 보존과 부흥을 기대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평대군이 왕족으로서 중국의 흥망에 대한 인식이다. 인평대군은 명의 멸망이 山海關을 열어준 吳三桂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쇠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라의 존망에 人和 즉 인심 향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명의 멸망 원인에 대한 그의 고민은 왕족인 통치자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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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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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세기에 대구에서 살았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지점에 집중하였다. 첫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 대구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18세기의 대구는 번화한 도회지였다. 1601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행정과 사법의 중심이었다.
둘째는 가족과 관계이다. 가족의 범위는 좁게는 부부와 자녀이며, 확대하면 부부의 부모와 형제가 포함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최흥원이 가족에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최흥원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부부가 함께 분담하였다. 또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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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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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국사, 특히 전근대 한국사를 네이션으로서 현재 한국, 한국인의 '형성 과정'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사 체계가 대체로 큰 틀에서 그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정통론이나 특히 근대의 민족 개념에서는 일정한 선택의 원리가 작용하여,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배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현행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의 고대사 체계를 검토해 보았다. 선사 및 고대 부분은 대체로 4시기로 구성되는데, 선사/ 고조선과 '여러 나라'/ 삼국 및 가야/ 남북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의 멸망에서 삼국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여전히 정립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엇보다 처음부터 한민족 혹은 한국사의 경계를 정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하게 되면서 그 범위를 현재의 한국인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그 외의 계통, 이를테면 중국계의 군현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한국사의 과정에서 배제하였다. 특히 역사 교육에서 한국사 체계는 한국인 형성 과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열린 체계로서 제시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의 형성에 대해서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 이것을 한국사 과목 안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문명사 및 동아시아사와의 연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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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준선 ( Seong J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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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세기 新羅 眞智王의 즉위와 폐위를 주제로 삼았다. 진지왕이 조카이자 태자의 아들인 白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眞興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배경으로, 진흥왕이 적극 활용한 轉輪聖王이라는 불교적 신성관념으로 등장한 '聖骨'을 주목하였다. 진흥왕은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6세기 후반 달라진 삼국 간의 정세 속에 자신의 유고를 대비하여 백정보다 연장자인 진지왕을 金輪으로 명명하여 정치일선에 등장시켰다.
짧은 재위로 『三國遺事』와 『三國史記』 모두 관련 기록이 소략할뿐더러 서로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그 배경으로 전자에는 진지왕 개인의 부도덕함과 자질 문제, 후자에는 신라가 처한 대외적 상황의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혼재되자 신라 지배계층에서 혼란과 위기감, 불만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진지왕의 리더십에 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의 가장 큰 명분으로는 정법을 수호하고 엄격한 자기관리와 도덕성이 요구되는 전륜성왕으로서 그 자격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이에 국인들이 폐위를 요구하자 진지왕이 이를 수용하였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 뒤를 銅輪의 아들 백정이 眞平王으로 즉위하였다. 진평왕은 전륜성왕 신성관념이 더는 효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보다 한층 더 강화된 신성관념으로 '석가족'을 내세웠고, 그 범위를 동륜계로 한정하면서 중고기 성골은 한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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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황대일 ( Hwang Dae-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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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앞 시기인 고려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벽석렬과 주혈의 규칙성이 확인되지 않으며, 면적이 15㎡ 전후로 벽로 중심의 시설이 설치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 내에서 확인되는 수혈주거지는 문헌기록과 면적, 구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때 최하층민의 주거형태에 해당한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의 분포는 소규모, 중소규모, 대규모 취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규모 취락은 주요 교통로 또는 역원 주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지리적으로 모두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며, 취락 주변에 소규모 취락과 중소규모 취락이 함께 분포하는 양상이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대규모 취락에서 수혈주거지 시기별 변화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15세기 중반부터 수혈주거지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에는 취락마다 수혈주거지의 수량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17세기 이후부터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취락 내에서 거의 수혈주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시기별 변화의 요인은 4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주거형태의 변화로 17세기 이후 수혈주거지에서 지상건물지로의 변화이다. 둘째, 입지의 변화로 농업기술과 사회ㆍ경제활동의 발달로 인해 취락의 중심이 구릉에서 평지로 이동하였다. 셋째, 인구변화로, 16~17세기에 발생한 양란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원인이 작용하여 취락 내 수혈주거지의 개체 수 또한 급격히 감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역촌의 설치와 정비, 해체가 역촌의 형성과 소멸로 연결되어 취락 내 수혈주거지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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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명수 ( Kim Myung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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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20년 7월부터 10년 동안 대구에 존재했던 경상공립은행을 대상으로 설립주체, 설립과정, 경영변동, 조선총독부의 은행합동정책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의 측면을 강조했던 선행 연구와 달리 일본인들에 의한 공립은행의 경영 사례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상황 하에서 오직 일본인 주주들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주주자본주의였음을 해명하고자 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7월에 설립된 공립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었지만 주주의 대부분이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순수한' 일본인 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설립된 은행들이 그 구성비율에 차이가 있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주주로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했음을 고려한다면 공립은행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은행이었다.
둘째, 공립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미야이(宮井正一)의 축재 경로는 대금업, 도기제조업, 창고금융업, 정미업, 미곡거래업이었다. 당시 대구의 주요 일본인들이 종사했던 분야였다. 미야이의 축재 경로는 당시 대구의 일본인 자산가들이 걸었던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립은행은 1920년 7월에 설립되어 1930년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 경일은행과의 합병안을 승인할 때까지 정확히 만 10년 동안 존재했었다. 은행의 '공공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철두철미 실리 본위'로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공립은행의 퍼포먼스는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넷째, 대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어음할인이나 어음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담보물도 지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으며, 평가한 금액에 대해서도 대체로 60%만을 대출해 주었다. 하지만 1929년 개정 은행령에 의해 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금업자식의 '미야이식' 은행 경영이 어려워졌다. 미야이가 은행업을 폐업을 고려한 것도 경일은행과의 합병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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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학로/HakroRhee 1 ( Rhee Hak-r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8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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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발생과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1920년대에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 대부분 당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은 주로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북부 지역이나 仁川 등 京畿道와 서울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노동 그리고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무연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먼저 그의 국적을 판단하였다. 사망자가 중국식 복장을 하거나 소지품에서 국적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을 경우 중국인으로 판단하였다. 이들 사망자는 1920년대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1927년 華僑排斥事件 이후에는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조선총독부와 중국측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게 된다.
그것은 사망자 처리 비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의 국적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 이름과 직업 등을 조사하고 연고자를 찾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중국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였다. 대개 인부들의 인건비와 간단한 부대비용으로 큰 금액은 아니었다. 금액의 크기보다 책임의 소재 때문에 그 비용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간에 여러 차례 교섭이 오고가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중국은 華商들에게 그 비용을 담담하게 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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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은숙 ( Bae Eun 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5-31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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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공화정 후기에서 4세기까지 총 124번의 공성전을 분석하여 포위전의 쇠퇴 가능성을 추론한 것이다. 공화정 후기 총 65번의 공성전을 분석하면 포위전만 한 전투는 21번(32.3%)이었다. 포위망 구축 후 공격한 14번(21.5%) 전투와 곧바로 공격에 들어간 25번(38.5%) 전투를 합하면 공격적인 전투는 39번(60%)이었다. 1-4세기 총 59번의 공성전 중에서 포위전만 한 것은 7번(11.9%)이었고,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든 공격적인 전투를 한 것은 45번(76.3%)이었다. 공격전을 펼친 것이 공화정 후기에는 60%, 제정기에는 76.3%를 차지한다는 것은 로마 공성전의 전술적 특징이 지속해서 공격전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포위전이 공화정 후기 32.3%에서 제정기 11.9%로 줄어들어 포위전의 쇠퇴를 주장할 수 있지만, 전장을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적인 서부와 유대,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가 적인 동부로 나누어보면 달라진다. 공화정 후기 서부 지역에서 행했던 총 33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16번(48.9%)에서 제정기 총 11번의 전투 중 5번(45.5%)으로 비율적으로 차이가 없다. 서부 지역에서는 포위전이 쇠퇴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동부 지역에서 행했던 공성전에서 공화정 후기 총 32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5번(15.6%)에서 제정기 총 48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2번(4.2%)으로 현격히 감소했다. 이를 볼 때 동부 지역은 공화정 후기보다 제정기에 포위전이 쇠퇴하고, 공격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성전을 할 줄 모르는 갈리아족과 게르만족, 로마군을 모방하여 공성 기술을 갖춘 유대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화정 후기와 제정기의 공성전이 동일한 공격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에 따른 지역적 편차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포위전 쇠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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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중락 ( Kim Joongla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9-35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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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어떻게 1590-1년 노스버릭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의 미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신성화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1590년 제임스 6세는 성년의 나이었지만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싸움과 종교적 갈등속에 어려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발생한 노스버릭 마녀사건은 제임스에게 왕권강화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제임스는 마녀혐의자들에 대해 직접 심문에 참여하였고, 재판에 관여하면서 정적제거를 위한 진술을 확보하였다. 마녀혐의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국왕을 해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결혼을 방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법적인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임스 6세가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진술로 제임스는 정적인 보스웰 백작을 제거할 수 있었다.
1591년 재판 말기에 제임스는 Newes from Scotland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했는데 이 보고서는 왕권의 신성화를 꾀한 고도의 정치선전물이었다. 보고서는 악마가 스코틀랜드 왕은 “이 세상에서 그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표현은 왕이 이 세상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Newes from Scotland에서 왕은 “신의 자녀” 또는 “신의 종”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은 신이 보호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왕은 신의 기름부은 자이고 신의 전능한 힘으로 보호아래 있음으로 악마와 마녀들의 음모를 이길 수 있었다. 제임스 6세는 1598년 Trew Law of Free Monarchies에서 자신의 왕권신수설을 피력했는데 이는 Newes from Scotland에서 시작된 왕권신성화의 논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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