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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GU SAHAK(THE DAEGU HISTORICAL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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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146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0
간행물 제목
147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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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인복 ( Yi In-b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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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일기는 개인이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여 경사를 강의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경연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경연일기를 기록한 개인이나 이를 정리하여 문집에 수록하거나 간행하는 집단의 의도가 담겨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다만 선조대와 같이 관찬사료가 부족한 시기의 경연일기만이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李珥의 『경연일기』나 柳希春의 「경연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연 기록은 경연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종, 중종대를 거치면서 사림이 등장하고 경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연이 자주 시행되고 경연에서의 논의내용도 풍부해지면서 경연 기록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사관의 경연 입시 정례화로 사초에 경연 내용이 풍부해지고, 관찬 사료의 경연기사의 내용이 자세해졌다. 개인의 일기에도 경연 내용이 기록되고, 경연 때에 자신의 발언을 별도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종대 조광조, 한충을 비롯한 기묘사림들은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하여 남겼으며, 선조대의 이황 역시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으로 남겼다.
선조대에는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연에서의 발언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변화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지식인들의 일기 쓰기와 연관이 있다. 개인의 일기에서 경연에서의 경험이 기록되는 것은 국왕과 면대하여 경사를 진강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특별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본인이나 후손, 제자들에 의해 경연 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정리된다. 주희의 『주자경연강의』나 진덕수의 『진서산경연강의』, 관찬 경연일기를 작성하였던 경험들은 조선시대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의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사이에서 이황의 「경연강의」, 이이의 『경연일기』는 경연일기가 등장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 김우옹의 「경연강의」 이후로 작성 주체와 형식이 다양한 경연일기들이 저술되기 시작한다.


Gyeongyeon(經筵, Royal Lectures) is a system in which the king and his servants give lectures on scriptures of Confucianism and history books, and at the same time discuss the politics of the country. For individuals, Gyeongyeon(經筵) were also a special experience, so they were recorded in various forms. In the case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the intentions of the individual or group who wrote them are reflected.
As Gyeongyeon(經筵) are activated in Sungjong(成宗) and Jungjong(中宗) period, various Gyeongyeon(經筵)-related records appear. Individual experiences in Gyeongyeon(經筵) were also recorded in individual diaries. In addition, the remarks made in the lecture were collected and left as a separate record, which is Gyeongyeon(經筵)-Jingye(陳啓). These records were mainly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Jo Gwang-jo(趙光祖).
As this trend continues to the Sunjo(宣祖) period, the Gyeongyeon(經筵)-diary begins to appear. Among the diaries, representative titles are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and 'Gyeongyeon(經筵)-diary'. These records were also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Yi Hwang(李滉) and Yi Yi(李珥). In this regard, it is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that can be noted. In the 16th century, intellectuals of Joseon paid attention to this book and published it.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nfluenced the appearance of the Gyeongyeon(經筵)-diary.
Kim Woo-Ong(金宇顒)`s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s a relatively early Gyeongyeon(經筵)-diary. It is an important book when looking at the process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appearing. This diary was written and organized by him, and was organized by his disciples in the process of publishing it later. In the form of the diary, the date, method, place, textbook, scope, and participants were first recorded. After that, lectures on textbooks and discussions on national politics were recorded. This is the same as the general Gyeongyeon(經筵)-diary format that appears later. In the content, it is useful data for examining his ideas and policies. This book has been read a lot by intellectuals since then and has influenced many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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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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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麟坪大君(1622~1658)의 12차례 대청사행을 살펴보고, 그의 대중국 인식을 『燕途紀行』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인평대군은 인질과 사신으로 자주 청을 왕래하였으며, 왕족 출신인 그의 대중국 인식은 관료들의 인식과 차이를 보인다.
『연도기행』은 인평대군이 12차례의 사행 가운데 11번째인 1656년(효종 7)의 사행을 기록한 것이다. 『연도기행』에는 이전 10차례 사행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1656년(효종 7) 당시의 사행일기보다 회고록의 성격이 강하다.
인평대군은 여행자로서 개인의 사행 체험, 연행 노정의 고초와 심정을 기록하였고, 사신으로서 연로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조선의 산성 현황과 청의 요동 병력 배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인평대군은 전란이 재차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산성 보존과 민심의 수습을 중요시하고, 청의 요동 병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인평대군은 청에 거주하는 역관과 조선인을 통해 청 내정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청의 정치 운영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명 정권의 보존과 부흥을 기대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평대군이 왕족으로서 중국의 흥망에 대한 인식이다. 인평대군은 명의 멸망이 山海關을 열어준 吳三桂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쇠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라의 존망에 人和 즉 인심 향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명의 멸망 원인에 대한 그의 고민은 왕족인 통치자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This paper examines the twelve Sahaeng(使行) of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nd analyzes his perceptions of China, focusing on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As a hostage and ambassador to the Qing dynast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often traveled to and from China, and his knowledge of China differed from that of the bureaucrats.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is the record of the 11th trip of the 12 trips made b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in 1656.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contains information from the previous 10 trips. It is more of a memoir than a record of the Sahaeng(使行) in 1656.
Prince Inpyeong(麟坪大君) recorded his personal experience of Sahaeng(使行) and the sufferings and emotions along the way as a traveler, and collected various information as an ambassador. He was very concerned about the current state of mountain castles in Joseon and the deployment of Qing Dynasty troops in Liaodong. Due to the fear of another war,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ttached importance to preserving the mountainous castle of Joseon and pacifying the people, and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strength of the Qing Dynasty in Liaodong.
Prince Inpyeong(麟坪大君)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internal affairs of the Qing dynasty through interpreters and Koreans living in the Qing dynasty. He pointed out the problems of the political operations of the Qing Dynasty and looked forward to the preservation and revival of the Southern Ming regime. What is of interest is Prince Inpyeong(麟坪大君)'s perception of the rise and fall of China as a royal famil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believes that the Ming dynasty fell not because of Wu Sangui(吳三桂), who opened the Opening the Shanhaiguan Gate, but because of the declining fortunes, and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people's hearts and minds to the survival of the nation. His anguish about the cause of the Ming Dynasty's demise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of being a ruler of a royal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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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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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세기에 대구에서 살았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지점에 집중하였다. 첫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 대구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18세기의 대구는 번화한 도회지였다. 1601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행정과 사법의 중심이었다.
둘째는 가족과 관계이다. 가족의 범위는 좁게는 부부와 자녀이며, 확대하면 부부의 부모와 형제가 포함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최흥원이 가족에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최흥원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부부가 함께 분담하였다. 또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This study contemplates the meanings of family in the daily life of Choi Heung-won (1705~1786) who lived in Daegu in the 18th century. In the study, discussions focus on two points. The first point is space as it was an important element in a person's way of thinking and action. The study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Daegu in the 18th century when Choi lived there. The provincial office of Gyeongsang Province was set up in Daegu in 1601. The governor would have controlled the entire province, including its administration and judicial power. Thus, Daegu became the central city of the province in administration and jurisdiction. Gyeongsang Province was the most populous administrative unit at the provincial level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and Daegu was at its center.
The second discussion point is family, which is a foundational group of life. The scope of family, in a narrow sense, encompasses a couple and their children, and in a broader sense, even their parents and siblings. Accordingly, one must know the description of family. The present study sheds light on the family relationships of Sadaebu in the 18th century with the case of Choi's family, whose perceptions of family and roles were reviewed based on their words and actions to each other.
Choi's family consisted of a couple and their children. They lived together, and the couple shared responsibility for their children's upbringing and education. As a father, Choi was particularly devoted to the upbringing and education of his children. He taught his son everything from daily habits to interpersonal behavior styles. It was the same with his daughter. He would postpone an urgent matter to prevent her from getting hurt emotionally and even feel sorry after spending days at the house of his married daughter.
The study also examines the couple's relationships with their parents and siblings. Their parents and siblings lived in separate places and worked together to serve their parents. Choi was the eldest son and lived with his mother after his father passed away early. Choi's wife also passed away early. Under these circumstances, he lived with his mother. His siblings lived in their respective homes after getting married. He and his siblings divided their roles to serve their pa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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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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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국사, 특히 전근대 한국사를 네이션으로서 현재 한국, 한국인의 '형성 과정'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사 체계가 대체로 큰 틀에서 그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정통론이나 특히 근대의 민족 개념에서는 일정한 선택의 원리가 작용하여,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배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현행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의 고대사 체계를 검토해 보았다. 선사 및 고대 부분은 대체로 4시기로 구성되는데, 선사/ 고조선과 '여러 나라'/ 삼국 및 가야/ 남북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의 멸망에서 삼국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여전히 정립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엇보다 처음부터 한민족 혹은 한국사의 경계를 정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하게 되면서 그 범위를 현재의 한국인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그 외의 계통, 이를테면 중국계의 군현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한국사의 과정에서 배제하였다. 특히 역사 교육에서 한국사 체계는 한국인 형성 과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열린 체계로서 제시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의 형성에 대해서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 이것을 한국사 과목 안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문명사 및 동아시아사와의 연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paper, Korean history, especially pre-modern Korean history, is defined as the process of formation of Korea and Koreans as the present nation, and the structure of Korean history formed in the process was evaluated as largely explaining such process in a broad framework. However, it was pointed out that there is a problem of emphasizing or excluding certain parts as a result of certain selection principles working in the orthodox the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specially in the concept of minjok.
From this perspective, the ancient history structure of high school Korean history, and middle school history in the current curriculum were reviewed. The prehistoric and ancient parts are largely composed of four periods: the prehistoric period, Gojoseon and 'many countries', the three kingdoms and Gaya, and the northern and southern kingdoms. Among them, the part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three kingdoms from the fall of Gojoseon has not been established, and one of the reasons is thought to be because it excludes Chinese counties including Nakrang.
In this paper, I tried to say that there is a problem in the tendency to set boundaries in the beginning of Korean people or Korean history. By setting the boundary in this way, it was made an error of equating the scope to the current Korean, and other lines, such as Chinese counties, were unfairly excluded from the process of Korean history. In history education, the Korean history structure should be presented as an open one that shows the 'flow' of the Korean formation process, and furthermore, it should be able to show the formation of Korean culture from a broader perspective. However, not all of this can be achieved in the course of Korean history, and it can be realized in connection with the history of civilization and the history of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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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준선 ( Seong J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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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세기 新羅 眞智王의 즉위와 폐위를 주제로 삼았다. 진지왕이 조카이자 태자의 아들인 白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眞興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배경으로, 진흥왕이 적극 활용한 轉輪聖王이라는 불교적 신성관념으로 등장한 '聖骨'을 주목하였다. 진흥왕은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6세기 후반 달라진 삼국 간의 정세 속에 자신의 유고를 대비하여 백정보다 연장자인 진지왕을 金輪으로 명명하여 정치일선에 등장시켰다.
짧은 재위로 『三國遺事』와 『三國史記』 모두 관련 기록이 소략할뿐더러 서로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그 배경으로 전자에는 진지왕 개인의 부도덕함과 자질 문제, 후자에는 신라가 처한 대외적 상황의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혼재되자 신라 지배계층에서 혼란과 위기감, 불만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진지왕의 리더십에 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의 가장 큰 명분으로는 정법을 수호하고 엄격한 자기관리와 도덕성이 요구되는 전륜성왕으로서 그 자격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이에 국인들이 폐위를 요구하자 진지왕이 이를 수용하였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 뒤를 銅輪의 아들 백정이 眞平王으로 즉위하였다. 진평왕은 전륜성왕 신성관념이 더는 효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보다 한층 더 강화된 신성관념으로 '석가족'을 내세웠고, 그 범위를 동륜계로 한정하면서 중고기 성골은 한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King Jinji(眞智王) succeeded King Jinheung(眞興王) to the throne as the new Chakravartin(轉輪聖王), but was dethroned after 4 years of reign. As this is an unprecedented event, various causes are raised.
A clue could be found in the two records, Samguk-Yusa(三國遺事) and Samguk-Sagi(三國史記). Several factors such as unrestricted behavior, personal qualities, and Baekje's pressure on Silla acted in a complex way. Under this circumstance, the ruling class of Silla began to have doubts about the sanctity of the Chakravartin, and King Jinji was finally dethroned. The newly crowned King Jinpyeong(眞平王) asserted a stronger notion of the divinity than the Chakravartin. King Jinpyeong declared his family to be the Sakyamuni(釋迦牟尼)'s family. As a result, the sacredness of Silla's seonggol(聖骨) was strengthened, while the closedness became even d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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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황대일 ( Hwang Dae-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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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앞 시기인 고려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벽석렬과 주혈의 규칙성이 확인되지 않으며, 면적이 15㎡ 전후로 벽로 중심의 시설이 설치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 내에서 확인되는 수혈주거지는 문헌기록과 면적, 구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때 최하층민의 주거형태에 해당한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의 분포는 소규모, 중소규모, 대규모 취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규모 취락은 주요 교통로 또는 역원 주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지리적으로 모두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며, 취락 주변에 소규모 취락과 중소규모 취락이 함께 분포하는 양상이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대규모 취락에서 수혈주거지 시기별 변화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15세기 중반부터 수혈주거지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에는 취락마다 수혈주거지의 수량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17세기 이후부터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취락 내에서 거의 수혈주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시기별 변화의 요인은 4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주거형태의 변화로 17세기 이후 수혈주거지에서 지상건물지로의 변화이다. 둘째, 입지의 변화로 농업기술과 사회ㆍ경제활동의 발달로 인해 취락의 중심이 구릉에서 평지로 이동하였다. 셋째, 인구변화로, 16~17세기에 발생한 양란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원인이 작용하여 취락 내 수혈주거지의 개체 수 또한 급격히 감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역촌의 설치와 정비, 해체가 역촌의 형성과 소멸로 연결되어 취락 내 수혈주거지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The dwelling sites in the Joseon Dynasty is not confirmed the regularity of stone rows and column holes in the walls that appeared in the Goryeo Dynasty. Its area was around 15㎡, and it had a relatively simple structure with facilities installed around a fireplace on the wall. Based on documentary records, size, and structure, the dwellings within the villages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Ulsan area correspond to the housing type of the lowest class.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e residential change process in large-scale settlement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area was that the number of dwellings in each village increased rapidly in the 16th century, as the number of dwellings began to gradually increase from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From the 17th century, it was decreased sharply, and by the 18th century, not only villages but also dwellings were almost absent.
The factors of residential change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can be summariz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it is the change of the building site in the residential area after the 17th century. Second, the center of the village was characterized by moving from the hills to the plains caused by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al technology and social, economic activities. Third, the population was decreased rapidly due to the two great wars that occurr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and as a result, the number of dwellings within the village was also decreased sharply. Lastly, it is thought that set-up and withdrawal of the station with inns led to the formation and extinction of the station area, affecting the change of residence in the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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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명수 ( Kim Myung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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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20년 7월부터 10년 동안 대구에 존재했던 경상공립은행을 대상으로 설립주체, 설립과정, 경영변동, 조선총독부의 은행합동정책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의 측면을 강조했던 선행 연구와 달리 일본인들에 의한 공립은행의 경영 사례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상황 하에서 오직 일본인 주주들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주주자본주의였음을 해명하고자 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7월에 설립된 공립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었지만 주주의 대부분이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순수한' 일본인 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설립된 은행들이 그 구성비율에 차이가 있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주주로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했음을 고려한다면 공립은행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은행이었다.
둘째, 공립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미야이(宮井正一)의 축재 경로는 대금업, 도기제조업, 창고금융업, 정미업, 미곡거래업이었다. 당시 대구의 주요 일본인들이 종사했던 분야였다. 미야이의 축재 경로는 당시 대구의 일본인 자산가들이 걸었던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립은행은 1920년 7월에 설립되어 1930년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 경일은행과의 합병안을 승인할 때까지 정확히 만 10년 동안 존재했었다. 은행의 '공공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철두철미 실리 본위'로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공립은행의 퍼포먼스는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넷째, 대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어음할인이나 어음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담보물도 지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으며, 평가한 금액에 대해서도 대체로 60%만을 대출해 주었다. 하지만 1929년 개정 은행령에 의해 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금업자식의 '미야이식' 은행 경영이 어려워졌다. 미야이가 은행업을 폐업을 고려한 것도 경일은행과의 합병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This paper have two goals. The first goal is to examine the founders, the establishment process, the management fluctuation,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f Gyungsang Public Bank(GPB). The second is to make it clear that the case of GPB is nothing but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because GPB was faithful only to the interest of shareholders. This is different from research results which existing studies have stressed on financing for colonial development. The resul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ly, Founded in July 1920, GPB was a purely Japanese bank in the sense that most of its shareholders were from Kagawa Prefeture Japan.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many banks have Korean and Japanese shareholders commonly, the case of GPB was a rare one because GPB consisted of only Japanese shareholders.
Secondly, Masakazu Miyai, who led the establishment of GPB, amassed a fortune from money-lending business, pottery manufacturing, warehousing, financial business, rice-cleaning business. Also, he was famous as a rice dealer in Daegu. Miyai's path of wealth accumulation was true of the Japanese wealthy people in Daegu at that time.
Thirdly, GPB existed exactly for 1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n July 1920 until the approval of its merger with Gyungil Bank in September 1930. Instead of thinking about the public nature of the bank, Miyai focused on only making money thoroughly. GPB appreciated secured property offered by borrowers very conservatively and lent at most about 60% of appraised value. Loans were also made centering around bill discount and loans on bills, which guaranteed high commissions.
Miyai tried to quit banking and go back to Japan when monitoring on banks became strict since revision of bank act in 1929. He could not manage GPB like a money lender under the new reinforced regulations on banking. It was the reason why Miyai responded positively the offer of acquisition to Gyungil Bank by Chosun Bank, which was the central bank of colonial Korea. In conclusion, GPB's case was the typical case of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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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학로/HakroRhee 1 ( Rhee Hak-r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8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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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발생과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1920년대에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 대부분 당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은 주로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북부 지역이나 仁川 등 京畿道와 서울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노동 그리고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무연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먼저 그의 국적을 판단하였다. 사망자가 중국식 복장을 하거나 소지품에서 국적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을 경우 중국인으로 판단하였다. 이들 사망자는 1920년대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1927년 華僑排斥事件 이후에는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조선총독부와 중국측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게 된다.
그것은 사망자 처리 비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의 국적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 이름과 직업 등을 조사하고 연고자를 찾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중국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였다. 대개 인부들의 인건비와 간단한 부대비용으로 큰 금액은 아니었다. 금액의 크기보다 책임의 소재 때문에 그 비용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간에 여러 차례 교섭이 오고가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중국은 華商들에게 그 비용을 담담하게 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This essay is the analysis on the Chinese deceased without family in 1920s' Joseon and the study about the process of their treatment. The death of Chinese people without family in 1920s mostly occurred in the region that Chinese people liked to live. They used to reside mainly in the northern region or the central region of Korea like Gyeonggi-do Province and Seoul, where it was convenient for them to travel to China. Their jobs were various. Some were engaged in commerce, others in farming. And there were also wage-labourers.
When a death case occurred, the first thing to be done was to identify the nationality of the dead. Usually it was decided on the ground of the Chinese clothes of the dead or the possessions of the dead. The death case of the Chinese in Joseon frequently occurred in 1920s. Especially after overseas Chinese Rejection Incident in 1927, Joseon Government General and the Chinese authority in Joseon responded against each other very sensitively concerning the handling of the Chinese dead without family. The conflict between two sides was partly due to the expense for the treatment of the dead.
In general when a person was discovered dead, the Japanese officers checked the nationality, address, name and jobs, and then tried to find family or relatives. Then Joseon Government General claimed Chinese authority for the expense. The expense composed of labor cost and other small expenditure was not a large amount. The negotiation between two sides about which side would pay the expense used to go on mainly in the aspect of who would take charge of the case. In many cases this kind of accident was settled down, with overseas Chinese merchant forced to pay the exp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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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은숙 ( Bae Eun 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5-31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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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공화정 후기에서 4세기까지 총 124번의 공성전을 분석하여 포위전의 쇠퇴 가능성을 추론한 것이다. 공화정 후기 총 65번의 공성전을 분석하면 포위전만 한 전투는 21번(32.3%)이었다. 포위망 구축 후 공격한 14번(21.5%) 전투와 곧바로 공격에 들어간 25번(38.5%) 전투를 합하면 공격적인 전투는 39번(60%)이었다. 1-4세기 총 59번의 공성전 중에서 포위전만 한 것은 7번(11.9%)이었고,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든 공격적인 전투를 한 것은 45번(76.3%)이었다. 공격전을 펼친 것이 공화정 후기에는 60%, 제정기에는 76.3%를 차지한다는 것은 로마 공성전의 전술적 특징이 지속해서 공격전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포위전이 공화정 후기 32.3%에서 제정기 11.9%로 줄어들어 포위전의 쇠퇴를 주장할 수 있지만, 전장을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적인 서부와 유대,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가 적인 동부로 나누어보면 달라진다. 공화정 후기 서부 지역에서 행했던 총 33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16번(48.9%)에서 제정기 총 11번의 전투 중 5번(45.5%)으로 비율적으로 차이가 없다. 서부 지역에서는 포위전이 쇠퇴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동부 지역에서 행했던 공성전에서 공화정 후기 총 32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5번(15.6%)에서 제정기 총 48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2번(4.2%)으로 현격히 감소했다. 이를 볼 때 동부 지역은 공화정 후기보다 제정기에 포위전이 쇠퇴하고, 공격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성전을 할 줄 모르는 갈리아족과 게르만족, 로마군을 모방하여 공성 기술을 갖춘 유대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화정 후기와 제정기의 공성전이 동일한 공격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에 따른 지역적 편차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포위전 쇠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This study analyzes a total of 124 siege wars to infer the possibility of the decline of the siege warfare. When analyzing a total of 65 siege battles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21 battles(32.3%) were just siege battles. When the 14 battles(21.5%) that attacked after establishing the siege network and the 25 battles(38.5%) that immediately started attacking were combined, the number of offensive battles was 39 battles(60%). Of the 59 siege battles between the 1st and 4th centuries, 7 battles(11.9%) were only siege battles, and 45 battles(76.3%) were the battles that either attacked after establishing a siege network or immediately entered into an attack. The fact that offensive battles took up 60%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76.3% of the imperial period indicates that the tactical characteristics of the siege of Rome continued to be directed toward offensive warfare.
Although the decline of the siege war can be argued as the siege war has been reduced from 32.3%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to 11.9% in the imperial period, it is different when the battlefield is divided into the western part, where Gauls and Germanic enemies are enemies, and the east part, where Parthia and Sassanid Persia are enemies. Of the total 33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we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there were 16 (48.9%) siege battles and 5 (45.5%) out of 11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o there is no difference in proportion. In the western region, the siege cannot be said to have declined. On the other hand, Of the 32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ea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Dynasty, siege battles were 5 battles(15.6%). Of the total 48 siege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iege battles took place 2 battles(4.2%). In view of this, siege warfare declined during the imperial period rather than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eastern region tended to prefer offensive warfare. Therefore, although the siege battles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imperial period can be regarded as the same offensive battles, it is difficult to argue that the siege wars are in decline as there are regional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en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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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중락 ( Kim Joongla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9-35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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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어떻게 1590-1년 노스버릭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의 미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신성화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1590년 제임스 6세는 성년의 나이었지만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싸움과 종교적 갈등속에 어려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발생한 노스버릭 마녀사건은 제임스에게 왕권강화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제임스는 마녀혐의자들에 대해 직접 심문에 참여하였고, 재판에 관여하면서 정적제거를 위한 진술을 확보하였다. 마녀혐의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국왕을 해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결혼을 방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법적인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임스 6세가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진술로 제임스는 정적인 보스웰 백작을 제거할 수 있었다.
1591년 재판 말기에 제임스는 Newes from Scotland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했는데 이 보고서는 왕권의 신성화를 꾀한 고도의 정치선전물이었다. 보고서는 악마가 스코틀랜드 왕은 “이 세상에서 그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표현은 왕이 이 세상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Newes from Scotland에서 왕은 “신의 자녀” 또는 “신의 종”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은 신이 보호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왕은 신의 기름부은 자이고 신의 전능한 힘으로 보호아래 있음으로 악마와 마녀들의 음모를 이길 수 있었다. 제임스 6세는 1598년 Trew Law of Free Monarchies에서 자신의 왕권신수설을 피력했는데 이는 Newes from Scotland에서 시작된 왕권신성화의 논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King James VI of Scotland strengthened his feeble monarchy and even sanctified his royal power through the North Berwick witch-hunt of 1590-1. In 1590, although King James VI had long reached the age of majority, his rule was far from stable amidst power struggles and religious conflicts among powerful nobles. James saw the North Berwick witch incident in 1590-1 as a right opportunity to strengthen his royal power. James directly took part in the interrogation and trials of the witch suspects and secured statements from those accused of witchcraft which helped him eliminate his political enemy. The witch suspects confessed that they had made a pact with the devil and tried to harm the king as well as hindered his marriage. In the absence of legal experts, the confessions that James VI obtained through torture were very likely to have been distorted. These statements allowed James to get rid of Earl of Boswell, his political opponent.
At the end of the trials in late 1591, James arranged to publish a report entitled Newes from Scotland, which was a highly political propaganda. The pamphlet claims that the devil defined the Scottish king as "the greatest enemy he hath in the world." Paradoxically, this expression could mean that the king is the closest person to God in the world as God is the opposite of the devil. In fact, in Newes from Scotland, the king was once described as a "child of God" or "servant of God". The king was also portrayed as being under divine protection. The king was the anointed by the God, and with God's almighty power, he was able to defeat the plots of the devil and witches. It may be said, the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ship was elaborated in 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 in 1598, but it started from Newes from Scotland in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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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종훈 ( Kang Jong-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0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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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패수(浿水)'의 위치를 놓고 그동안 청천강으로 보는 설과 압록강으로 보는 설이 양립해 왔다. 사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니 두 설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결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는 '대령강'이 패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고, 근래 알려진 대령강장성이 패수가 대령강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파악되었다. 이를 근거로 낙랑군에 속한 현들 가운데 패수 부근에 있던 현들의 위치를 새로 비정하였는데, 특히 '수성현(遂成縣)'은 대령강과 청천강 사이에 위치한 박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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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용현 ( Lee Yong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9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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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 관련 자료는 1차 자료가 적은 한국 고대 행정문서 문자자료 가운데에서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그 가운데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이 고구려 자료다. 충주고구려비,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고구려 敎의 분석, 그리고 신라 중고 초기의 비석에 보이는 敎와의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출해낼 수 있다. 고구려 敎 발령의 주체는 국왕 1인이었는데, 이는 敎의 발령 주체가 諸侯王이었던 고대 중국, 그리고 국왕을 포함한 집단이었던 중고초 신라와 비교할 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敎를 발령할 때, 관련사항에서는 先代, 先王의 敎를 중시하였다. 當代에 敎 발령 시, 先王, 祖王의 敎를 참작하여 認容繼受하거나 變容改修하였는데, 그 근거는 항상 이전의 敎였다. 敎 발령에 있어서, < 敎 - 節敎 >로 하여 敎 2건을 1組로 묶어 발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지니는 건으로, 그 안에서 항목이 분류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敎 안에 부속세칙 혹 시행강제규정으로서 令이 수반되는 경향이 있다. < 敎하여 令 즉 -하게 하다/하노라 >라는 패턴이었다. 敎를 위반할 경우 처벌 규정은 制令의 형식으로 말미에 부가하기도 했다. 일련의 敎는 말미가 종결사 之로 마무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신라 비석 초기 敎文에서도 보인다. 고구려의 敎 양식은 新羅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의 敎라 할 수 있는 6세기 1사분기 신라의 敎에는 先王 혹 前時의 敎를 引用하여 존중하였다. 또 <敎 - 節敎 >의 서식도 보이며, 敎 말미 처벌규정 隨伴의 현상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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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재석 ( Lee Jae-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2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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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진평왕 5년(583)에 처음 설치된 신라의 선부서(船府署)가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직후인 문무왕 18년(678) 선부(船府)로 승격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문무왕 3년(663)에 卿 2인의 신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삼국사기』 職官志에는 船府의 성립 이전에는 兵部의 大監ㆍ弟監이 선박(舟楫)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고 하므로 선부서(船府署)는 곧 병부의 屬司였으며 따라서 선부로의 승격은 병부로부터의 자립화 과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선부서의 大監ㆍ弟監 설치가 兵部의 大監ㆍ弟監 설치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므로, 직관지에보이는 舟楫之事 담당의 兵部 大監ㆍ弟監과 선부서의 그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선부서의 운용 실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본고에서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으로서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이 처음부터 兵部의 예하 조직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589년ㆍ623년에 각각 설치되는 병부의 제감과 대감은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고 파악해야 함을 피력하였다. 또한 663년 선부서 卿 2인의 신설은 선부의 자립으로 가는 중간 다리였으며 이러한 선부서의 기능 강화는 특히 663년 8월에 벌어진 백촌강 水戰과 직ㆍ간접적으로 연동되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선부서 경의 신설이 통일전쟁에 임하는 신라의 선제적 태세에 비추어볼 때 백촌강의 水戰 이전에 선제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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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안주홍 ( An Juh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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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86년의 신라의 대당 외교 활동을 분석한 글이다. 『삼국사기』에는 686년에 신라가 예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듬해 태조와 직계 4친으로 구성된 祖廟에서 致祭한 기록과 연결하여, 신라가 『예기』를 수용하여 제후 5묘를 정립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진덕왕대에 신정 『예기』와 『예기정의』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686년의 예기는 『예기』가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대로 당례이다. 그런데 신라는 진덕왕대에 『진서』를 통해 오례의 개념을 알았고, 『정관례』도 수용하였다. 태종무열왕대는 양국의 관계가 긴밀하였으므로 『현경례』도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은 677년, 678년에 당례를 개편하였다. 686년에 신라가 요청한 당례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신문왕은 새로운 당례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가의례를 정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왕에 수용된 당례에 따라 683년에 국왕의 혼례를 거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은 군신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방법의 하나로 경전을 사여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대당 관계의 개선을 위해 당례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대당 관계를 개선하고자 외교 활동을 벌였다. 681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무왕의 사망과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684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에 일본의 견당학생의 귀국을 도왔다. 685년에 망덕사를 창건하여 이 소식을 686년에 파견한 하정사를 통해 알렸을 것이다. 686년의 기록은 신라의 요청이 성사된 시점이다. 당 측천은 686년에 다시 임조하였고,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요청을 이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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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현지 ( Kim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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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신하의 생전 행적을 기려 諡號를 내려주었으며,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사후의 이름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전기에는 『經國大典』의 규정에 맞는 신하에게 시호를 내린 데 비하여 선조대에는 儒賢에게, 인조대에는 전쟁 절사자에게 증시가 승인되면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사례가 늘어났다.
국가에서 시호를 내릴 때 그 절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사망한 증시 대상자의 집안에서 行狀을 제출한다. 행장이란 어떤 인물의 사후에 짓는 것으로 인적사항과 생전의 행적을 세세하게 남기는 글이다. 예조와 봉상시에서 차례로 이 행장을 검토하고, 다시 홍문관에서 사망자의 행적을 살펴 시호 三望을 결정한다. 결정된 삼망이 의정부의 署經을 통과하면 다시 행장과 함께 보고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 일련의 증시 절차에서 시호를 논의하는 가장 기초자료가 되는 문서가 행장이다. 조선전기 행장은 사망한 관원의 친척들이 작성하였다. 그래서 행장의 내용과 실제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인조대에는 가문 외의 인물이 시장을 따로 짓는 관례가 생겨났다. 이는 행장의 객관성 문제를 논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본래 규정인 정2품 이상의 인물에게 내릴 시호를 논의할 때에는 비교적 행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증직 후 시호를 받은 인물들은 관품이 증시 자격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다른 이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시호를 하사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롭게 시장을 짓게 되었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사실과 같은 내용을 찬술해야 한다는 인식은 후대로 갈수록 강해지며, 이러한 인식과 관련하여 숙종대 李選(1632~1692)이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그는 수많은 저술에서 객관적인 행장 작성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이선이 당시 증시를 주도한 인물들과 교류하였고 숙종 역시 그의 의견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인식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증시 제도는 개인적 · 가문적 명예 보장과 더불어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국가의 의도를 투영시키려면 기초 자료가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장이란 형태의 행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물의 행적을 평가하는 가장 기초자료인 행장 찬술에 점차 국가의 관여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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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태구 ( Huh Tae-k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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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선조대부터 인조대까지 최고위급 군사·외교 전문가로 활약한 張晩(1566∼1629)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았다. 이 논문의 중요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만의 대후금 인식과 평가는 後金의 세력이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대외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장만을 비롯한 인조대 조정의 君臣들은 후금의 최우선 공격 목표를 조선이나 毛營이 아닌 中原으로 판단하여, 정묘호란 직전까지도 후금의 전면적인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인조대 초반의 조선의 가장 중요한 안보 이슈 가운데 하나는 毛文龍과 요동 난민에 대한 대응이었다. 장만은 후금에 대한 모문룡의 과시적이고 도발적인 무력시위가 조선과 후금 사이의 우발적 교전을 야기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어 태세 강화를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둘째, 장만은 深河 패전으로 초토화된 關西 지역의 전후 수습을 전담하며 광해군의 관망적이고 양단적인 외교노선에 힘을 보탠 유능한 실무형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과 관련된 다양한 외교현안을 다룰 때에는 여전히 對明義理라는 명분을 강하게 인식하며 대처하였다. 인조대 모문룡 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그의 입장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對明事大가 대명의리라는 명분에 함몰되어 조선의 국익을 방기하는 성격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후금에 대한 강경한 척화론을 주장하였던 李爾瞻, 柳希奮 등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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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용석 ( Choi Yong-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8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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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일지역은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관제 조정으로 통합되어 영일군이 되었다. 3·1운동이후 영일지역의 청년들도 각 면지역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설립하였다. 포항면의 영일청년회, 청하면의 청하청년회, 송라면의 송라청년회, 흥해면의 흥해청년회 등을 설립하였고, 이러한 청년단체들은 이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전국의 청년단체들이 혁신을 통해 조직체를 변경한다. 전국적 청년단체의 혁신은 영일지역의 청년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혁신과 더불어 지역 청년단체 연합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영일지역에서는 10 여 개의 청년단체들이 모여 영일청년연맹을 설립한다.
이후 영일청년연맹은 1927년,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사회주의 양 진영의 통일전선체 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방향전환 한 청년회들은 더욱 더 조직화 되어 一郡 一靑年會라는 목적아래 각 府·郡에 있는 청년회 및 청년연맹을 자진 해체하고, 대신 각 府·郡 청년동맹을, 그리고 각 面에는 동맹지회를 결성하여 나갔다. 영일청년연맹 역시 이러한 통일전선체 구성을 통해 영일청년동맹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또한 정학선·이재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사상단체 '四月會'를 해체하고, 신간회 영일(포항)지회 설립하였다.
영일지역의 청년들은 영일청년동맹 활동과 신간회 영일(포항)지회와 의 연대활동을 통해 민족의 이익 옹호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29년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일어난 조선공산당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위 사건은 신간회 각 지회와 청년단체에 있어서 큰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신간회 각 지회 간부들이 대거 연행이 되고, 이들이 속한 단체들은 강제 해산되거나,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일지역에서도 조선공산당사건은 지역의 청년운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포항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새로운 민중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던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된 이후, 청년단체 뿐만아니라 노동조합, 형평사, 어업조합 등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거나 와해되면서 지역적 민족운동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일지역 청년운동은 많은 청년들을 지역의 민족운동의 선도자적 위치로 이끌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계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적·사상적 분화를 뛰어 넘어, 영일청년연맹·신간회영일(포항)지회·영일청년동맹 등 단일한 민족운동 세력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은 영일지역에서도 청년들이 1920~30년대 청년회 활동과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하고 전민족적 활동을 이어왔다는데 그 의의와 영향은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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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진현경 ( Jin Hyeongy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1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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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元朝의 운남지역 통치변화 과정에서 재지세력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다루고, 더 나아가 호광 지역과 비교를 통해 元代 土人 활용 방식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재지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복한 지역의 기존 세력을 흡수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몽골의 전략적 관습이 있었다. 몽골인들은 제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정치 환경에 조응하여 새로운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복지가 가진 고유한 요소에 더해 몽골적 요소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은 남송전쟁에 대비하여 뭉케 시기에 운남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운남은 몽골의 정치중심지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에 어려움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몽골 통치자는 해당 지역 재지세력의 협조에 크게 의지하여 통치력을 보강하였다. 운남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재지정치체 大理國의 정세와 몽골의 군사목적은 호응하였고, 몽골 통치자는 재지세력에게 운남 통치를 맡기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후 舍利畏의 난, 雲南王 후게치 독살사건을 거치며 元朝는 이 지역에 지방 최고통치기구인 行省을 세우게 되어 운남 재지세력 활용방식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路-府-州-縣의 중층적 지역 구획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을 정규 관원으로 선발하고 관직 세습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활용 방식은 이후 明代의 土官 개념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새로 편입되어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재지세력을 재편하기 어려웠던 지역에서는 투항한 재지수령과 휘하 세력을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이와 같은 간접 통치방식은 호광행성에서 이루어진 蠻夷官 제도와 유사하다. 元代의 두 가지 土人 활용법은 후대의 재지세력 관할 방식에 영향을 주어, 明 중기에 이르러서는 土司制度라는 하나의 제도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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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동연 ( Jung Dong 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7-3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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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굉(容閎, 1828~1912)이 청말 근대외교에 미친 영향을 탐색한 글이다. 그동안 용굉에 대해서는 청 정부가 미국에 보낸 국비 유학생, 이른바 '유미유동(留美幼童)'을 인솔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용굉의 활동은 청 정부가 서양 국제법에 토대를 둔 근대외교를 수용하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가 지닌 외교사적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용굉은 어린 시절 광둥 지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곧 이어 미국인 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예일대학에서 서양 지식과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귀국한 용굉은 중국이 근대외교에 뒤처져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한때 태평천국에 가담할 생각을 품었던 것도 이들이 청을 대신하여 중국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굉은 서양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 정부의 실권자 증국번(曾國藩)의 막료로 발탁되었다. 용굉은 서양 기계를 도입하는 임무를 완수하여 증국번의 신뢰를 얻은 다음, 어린 학생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사업을 승인받았다. 1872년부터 파견된 120명의 유미유동은 용굉의 인솔 하에 서양식 교육을 받았지만, 1881년 청 정부의 지시로 중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 시기 용굉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근대외교를 직접 실행하였다. 그는 외국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숙할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쿨리 학대 문제를 조사하여 보고함으로써 청 정부가 페루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설립한 주미공사관의 초대 참찬(參贊)이 된 후에는 공사(公使) 진란빈(陳蘭彬)을 보좌하며 미국 내의 반중 정서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유미유동이 중도 귀국한 후에는 한동안 미국에서 칩거하였지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군함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차관 도입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용굉이 양성한 유미유동은 청말 근대외교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청 정부가 해외에 설립한 공사관(公使館)과 영사관(領事館)에서 근무하였고, 이를 토대로 의화단사건 이후 설립된 외무부(外務部)의 고위 관료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한공관(駐韓公館) 경력을 토대로 외무부로 옮겨 활동한 당소의(唐紹儀)와 양여호(梁如浩)는 중화민국에서 외교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용굉은 유미유동을 통해 근대외교의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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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철호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1-35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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