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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al of Choson Dynasty History

  • : 조선시대사학회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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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6-5705
  • : 2765-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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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77권0호(2016) |수록논문 수 : 6
간행물 제목
100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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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차] 조선시대사학보 제100호

저자 : 편집부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4 (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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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사학보 100집 간행을 자축하면서

저자 : 최승희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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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창기의 조선시대사학회

저자 : 조광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7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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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보 100집 발간을 축하하며 되돌아본 발자취

저자 : 정만조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26 (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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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시대사학회의 창립과 전통

저자 : 이영춘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33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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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麗末鮮初 外方 閑良官의 위상과 軍役 편제

저자 : 이태경 ( Lee Tae-kyoung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7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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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科田法上 軍田 분급 대상인 '6道 閑良官吏'를 중심에 두고, 토지 분급과 군역 수행상에서 나타나는 여말선초 외방 閑良官의 위상과 역할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 무신집권기 이래 '選軍給田'이 문란해져 정상적으로 군사를 모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구가 연이어 침략해 오자 고려 정부는 외방의 한량관과 閑良子弟를 자주 징발하였다. 한량관은 품계를 지닌 고급 유휴인력으로서 국가 입장에서 充軍하기 쉬운 집단이었고, 한량자제 역시 유휴인력이면서 말[馬]을 준비해 올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집단이었다. 한량관과 한량자제는 평상시 말타기·활쏘기 실력에 따라 武班이 될 수 있는 인력으로 상정된 만큼, 전시에도 騎兵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과전법상 외방 군전은 고려말에 붕괴된 '선군급전' 원칙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던 한편 지배층으로서 외방 한량관의 위상을 보장하여 그들을 포섭·회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외방 한량관 중에는 鄕吏·士人[良家子弟] 출신으로 국가의 募軍에 응하거나 武將의 伴倘·麾下士가 되어 군공을 세우고 添設職을 얻은 자들이 많았다. 조선 건국 세력은 외방 한량관 가운데 前銜官에 대해서는 科田을 분급함으로써 '上京'을 유도하였지만, 實職 경험이 전혀 없는 添設官의 경우 상경하여 給田을 신청해도 과전을 주지 않았다. 첨설관을 포함하여 외방 잔류를 선택한 한량관은 대체로 각 도 侍衛軍에 소속되었고, 일반 민들과 달리 軍田을 지급받으며 지배층으로서 구별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良人皆兵'의 지향 속에 軍額이 늘어나고 軍役이 보편화·균일화되면서 외방 한량관의 위상은 떨어져갔다. 외방 한량관과 일반 민의 군역 수행을 구별해 주던 군전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중앙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이 점차 안정됨에 따라 외방 한량관의 소속 병종인 시위군의 중요성도 떨어져갔다. 番上이 자주 중단되었고, 시위군의 구성원이 각 도 營鎭軍이나 騎船軍에 합쳐지는 조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군역 수행을 통해 신분적 우위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한량관이 군역을 기피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국가가 일반 양인들을 군사 조직 내로 더 많이 흡수하여 '良人皆兵'을 실현해 갈수록, 구별짓기를 추구하는 한량관의 避役은 심해져 갔다.


This study examines the status of local Hanryang-gwan(閑良官, officials without actual duties to perform)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based on the land allotment and military service under the Gwajeon Act(科田法). In the late Goryeo period, the government could not successfully recruit soldiers due to the lack of Gunin-Jeon(軍人田, land for soldiers). As the Waegu(倭寇, Japanese pirates) continued to invade the southern provinces, the government frequently requisitioned local Hanryang-gwan. On the other hand, many locals were becoming Hanryang-gwan by obtaining honorary posts in return for their military service.
The Gunjeon(軍田, land for soldiers) clause of the Gwajeon Act was an attempt to restore the land allotment for soldiers. The founding forces of Joseon induced local Hanryang-gwan to come to the capital and become royal guards. Under the Gwajeon Act, Hanryang-gwan living in the capital received 10~150 gyeols(結) of Gwajeon according to their official ranks, and Hanryang- gwan remaining in local provinces only received 5 or 10 gyeols(結) of Gunjeon depending on their estate. Nevertheless, local Hanryang-gwan were distinguished from common soldiers in that they received land from the state.
In the early Joseon period, Hanryang-gwan in each province belonged to a unit called Siwigun(侍衛軍) or Siwipae(侍衛牌). The Siwigun of each province went to the capital in a set order to perform their duties as royal guards. However, as the political and military situation in the capital stabilized, the importance of Siwigun decreased. The status of the local Hanryang-gwan also declined. The Joseon government no longer gave land to local Hanryang-gwan, meaning that they were indistinguishable from the common people performing military service. These measures led the Hanryang-gwan to avoid military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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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16세기 조선의 지정 사찰 운영과 賦稅

저자 : 김선기 ( Kim Seon-gi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11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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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지정 사찰은 태종대 7종 242사를 거쳐 세종대 양종 36사로 정립되었다. 이를 통해 '지정 사찰-양종(흥천사·흥덕사)-예조'로 이어지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지정 사찰은 조종·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 선정되었다. 36사의 지정 이후 세조와 성종을 거치면서 지정 사찰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1484년 성종은 새롭게 지정된 사찰을 내수사에서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지정 사찰-내수사'의 또 다른 관리 체계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15세기 후반 지정 사찰의 운영은 양종과 내수사로 이원화되었다. 1504년 양종의 소실은 지정 사찰의 관리 체계가 내수사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대에는 봉은사와 봉선사가 중심 사찰의 역할을 수행하며 '지정 사찰-봉은사·봉선사-내수사'로 이어지는 관리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후 1550년 양종의 복립으로 '지정 사찰-양종(봉은사·봉선사)-내수사'의 관리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1566년 양종 제도가 혁파되었지만 지정 사찰과 내수사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지정 사찰은 진상을 부담하는 한편 복호의 혜택이 주어졌다. 진상의 상납 단계는 지정 사찰의 관리 체계와 연동되었다. 1484년 이후 진상은 '지정 사찰-양종(흥천사·흥덕사)-예조'와 '지정 사찰-원각사-내수사'의 이원화된 상납 체계를 따랐다. 1550년 양종이 다시 제도화되어 '지정 사찰-양종(봉은사·봉선사)-내수사'의 관리 체계가 성립되자 진상 단계도 이를 따랐다. 한편 지정 사찰의 복호는 조선 초부터 관례로 이루어지다가 1457년 제도화되었다. 이후 지정 사찰의 복호는 지속되었다. 일반 사찰은 당연하게도 어떠한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사찰이 위치한 지방군현의 공납과 잡역 체계에 속하였다. 공납과 잡역의 물종은 지방군현에 의해 다양하게 지정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종이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사찰의 양상은 조선후기 원당으로의 완문 발급과 사찰 紙役의 등장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Joseon Dynasty operated Designated temples. King Taejong established 242 Designated temples. Continually, King Sejong established Yangjong(兩宗) and 36 Designated temples. Through this, a system leading to 'Designated temples-Yangjong-Yejo(禮曹)' was established. The Designated temples were closely related to the royal family. After King Sejong, the size of the Designated temples expanded. In 1484, King Seongjong made the newly Designated temples be supervised by Naesusa(內需司). Another management system of 'Designated temples-Naesusa' was established. Therefore, the operation of Designated temples in the 15th century was divided into Yangjong and Naesusa. In 1504, the management system of the Designated temples were shifted to Naesusa due to the fire of Yangjong. In 1550, Yangjong was re-established. Through this, the management system of 'Designated temples-Yangjong-Naesusa' was institutionalized. In 1566, Yangjong disappeared.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esignated temples and Naesusa continued.
The Designated temples paid local tribute and were exempted from miscellaneous corvee. The local tribute was linked to the management system of the designated temples. After 1484, a dualized system worked like 'Designated temples-Heungcheon temple(興天寺)·Heungdeok temple(興德寺)-Yejo' and 'Designated temples-Wongak temple(元覺寺)-Naesusa'. After 1550, the payment system of 'Designated temples-Yangjong-Naesusa' was followed. Meanwhile, the exemption from miscellaneous corvee of designated temples took place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and was institutionalized in 1457. Since then, the exemption from miscellaneous corvee at designated temples has continued. Of course, general temples were not given any benefits. Therefore, it belonged to the system of tributary payment and miscellaneous corvee in the area where the temple was located. Paper is a representative item. The tributary system of general temples is a major background in understanding the emergence of temple paper produc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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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金正國의 性理書 편찬과 그 특징 -『性理大全書節要』를 중심으로-

저자 : 강문식 ( Kang Moon-shik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56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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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6세기 전반 조선 학계에서 『性理大全』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16세기 전반의 학자 金正國의 저술 『性理大全書節要』의 내용을 분석하고 그 성격과 특징을 고찰하였다.
『성리대전서절요』(이하 『절요』)는 김정국이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던 기간에 편찬한 책으로, 김정국이 『성리대전』에서 선별한 주요 내용이 136개 항목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권1~권2 <蘇子> 부분으로, 성리학의 기본 개념, 道統의 계승, 학문의 본질과 방법 등 학문과 실천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둘째는 권2 <舜>~권4 <[宋]總論> 부분으로, 唐虞三代부터 宋까지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수록되어 있다. 셋째는 권4 <君道>~<夷狄> 부분으로, 군주의 德과 학문, 군주가 신하를 대하는 방도, 賢能한 인재의 분별과 임용, 국정 운영의 원칙과 지침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절요』의 내용 분석을 종합해 볼 때, 이 책의 성격과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국정 운영의 지침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김정국을 비롯한 중종 대 己卯士林들은 경연에서 『성리대전』을 진강할 때 治道, 즉 국정 운영의 지침이 되는 내용을 위주로 강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절요』의 내용을 보면, 국왕과 관료들이 현실 정치에서 모범과 경계로 삼아야 할 역사적 사례, 국정 운영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과 지침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종의 '국정 운영 지침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치도 위주의 경연 강의'라는 기묘사림의 주장에 잘 부합한다.
둘째, 『절요』에서 군주와 재상의 학문적 성취를 정치의 요체로 중시한 점이 주목된다. 김정국은 군주의 학문을 올바른 정치의 근본 요소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군주의 학문 성취에 있어 군주 자신의 자질과 능력보다 道學을 익힌 신하의 보필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김정국은 신하, 특히 재상의 학문적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재상이 군주 보필의 한계를 보였던 사례에 대해 그 원인이 재상의 학문 부족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셋째, 기묘사화의 경험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절요』에 실린 점도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東漢 시기 竇武 등이 환관 척결을 경솔히 추진하다 실패한 것과 黨錮의 선비들이 과감했지만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한 張栻의 평가를 수록한 것은 조광조 등의 급진성이 기묘사화를 초래했음을 지적하고 반성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黨錮의 禍' 이후 선비의 기상이 약화됐음을 지적한 주희의 비평을 인용한 것에는 기묘사화로 인해 선비의 기상이 꺾이거나 개혁 추진이 포기돼서는 안 된다는 김정국의 입장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confirm how the Joseon academia understood and utilized Seongni daejeon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To this end, I analyzed the contents of the Seongni daejeonseo jeoryo written by Kim Jeong-guk and examined its characteristics. Seongni daejeonseo jeoryo was a book compiled during Kim Jeong-guk's secluded life after the Gimyo Sahwa. Kim Jeong-guk edited this book by selecting the contents from Seongni daejeon that he thought were important.
Seongni daejeonseo jeoryo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in terms of its content. The first part is chapter 1 to chapter 2 < Soja(蘇子) >, which contains the basic concept of Neo-Confucianism, the genealogy of academic succession, and the essence and method of learning. The second part is from chapter 2 < Sun(舜) > to chapter 4 < General discussion of Song(宋總論) >, which contains the evaluation of major characters from the Three Dynasties to the Song Dynasty. The third part is from < Gundo(君道) > to < Ejeok(夷狄) > of chapter 4 and contains the king's virtues and studies, the way the king treats his servants, the discrimination and appointment of talented people, and principles and guidelines for state administration.
When considering the content analysis of Seongni daejeonseo jeoryo, the characteristics of this book can be summarized into three categories.
The first is that it is a book that contains guidelines for state administration. Kim Jeong-guk and Gimyo Sarim of Jungjong's reign insisted that lectures of Seongni daejeon be focused on the contents that are the guidelines for the management of state affairs in the royal lecture. And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Seongni daejeonseo jeoryo, historical cases that kings and bureaucrats should use as examples in real politics, and principles and guidelines to be observed in state administration occupy a large proportion. This point is consistent with Gimyo sarim's argument about royal lecture and this book has the nature of a kind of state administration guide.
Second, it is noteworthy that the learning of king and prime minister was emphasized as a key element of politics in Seongni daejeonseo jeoryo. Kim Jeong-guk presented the king's learning as a fundamental element of correct politics. In addition, he emphasized that it is much more important and essential to receive subsidies from the prime minister who have learned Confucianism than the king's own natural qualities and abilities in the king's academic achievement. Accordingly, Kim Jeong-guk considered the academic ability of the prime minister as important. And it was also pointed out that if the prime minister showed limitations in supplementing the monarch, the cause was the lack of learning of the prime minister.
Third, it is also an important feature that the contents that are thought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experience of Gimyo Sahwa are included in Seongni daejeonseo jeoryo. In Seongni daejeonseo jeoryo there are evaluations criticized Dumu's failure in pushing for the abolition of eunuches and the scholars of Trouble of Danggo were bold but reckless during Eastern Han Dynasty. The inclusion of these evaluations in Seongni daejeonseo jeoryo can be said that Kim Jeong-guk pointed out and reflected on the radicality of Cho Kwang-jo and others as the cause of Gimyo Sahwa. In addition, the selecting of evaluations, which pointed out that the scholar's spirit has weakened since the Trouble of Danggo, is believed to reflect Kim Jung-guk's idea that the scholar's spirit should not be dampened and reform should not be abandoned due to strange narra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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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예교의 확산과 풍속 서술의 변화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 읍지 풍속 기술을 중심으로-

저자 : 김지영 ( Kim Ji-young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9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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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초부터 민간의 풍속을 통해 왕정의 성과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여기고, 지방민의 예교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실천하는 한편 지역의 풍속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전주, 남원 등 지역의 오랜 중심 도시들도 '부유함', '화려함' 등의 물질문명을 성취하고 구가하는 곳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경박하다', '이익에 재빠르다', '사치스럽다'는 식으로 풍속이 기술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제나라, 노나라, 至治를 이룬 나라 등으로 문화의 등급을 설정하는 방식을 수용하였다. '이익에 재빠르다'는 기왕의 고을 풍속을 부끄럽게 여긴 전주의 사례를 통해 조선이 이루려던 문명의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광산, 남평, 영암 등 20개 고을들도 새로운 문명의 기준에 부합하는 풍속을 기록했다. 전주와 남원, 용안 등에서는 양로와 휼고, 향음례와 향사례 등 지역민의 예교를 위한 예제의 실천에 대해 기록했다.
18세기 후반까지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은 각각 자기 고을의 풍속을 갖게 되었다. 외부자의 평가에 의한 풍속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유현들과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풍속이 바뀌었음을 강변하고, 그 증거들과 함께 바뀐 풍속을 기록했다. 남원인들은 '땅은 넓고 사람들은 사납다'는 기왕의 풍속에 반발하며 이미 추로의 고을이 되었다는 증거를 나열했다. 순창처럼 풍속 기술이 없던 고을이나 간략한 풍속 기술만을 가졌던 광주나 영암 등도 향촌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인들의 실천들과 함께 지역이 성취한 문명의 표지로 풍속을 새로 기록하거나 증보했다. 조선 초 국가의 표방에서 출발한 예교의 문명은 17~18세기 동안 지방관과 지역민들의 상호 노력 속에서 더 많은 지역으로 확산·실천되며 고을 읍지의 <풍속>을 바꾸었다. 전라도 각 군현들은 이전과 다르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준으로 경쟁하듯 지역의 풍속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정체성으로 삼았다.


This study focused on “local custom and culture[風俗]” chapter of Province Gazetteers[地理志], which newly emerged in Joseon's pursuit of edification[禮敎]. Joseon declared the politics of changing customs from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but attempts to observe the actual customs and examine the possibilities or effects of edification began in earnest from the stage of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新增東國輿地勝覽], where “local custom and culture” appeared as an individual chapter. Although only 30% of entire villages in Joseon were described, Yeoji Seungnam evaluated each village in Jeolla-do by using expressions such as “simple and honest”, “extravagant and luxurious”. People in Jeonju were rich and sophisticated, but they were ashamed of the evaluation of quick to profit. Through this, we can see what the goals of the civilization Joseon pursued.
After Yeoji Seungnam, villages in Jeolla-do provinces of Joseon shared the view that customs change when politics change, and began to actively redescribe the customs of the village. They also felt shame and disputed when there weren't any descriptions or were negative descriptions about the local custom. In Jeolla-do, almost every village captured the achievements of edification in their descriptions of customs in late 18thcentury. With the efforts of local bureaucrats and local residents, the culture of Neo-Confucian edification has spread to more regions. Towns and counties in Jeolla-do province newly observed and recorded local custom and culture and made it a loc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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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선후기 서얼의 마을 개발과 결속 -경주 여주이씨 옥산동 동계를 중심으로-

저자 : 정수환 ( Jung Su-hwan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10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5-22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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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후기 서얼들이 마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적손들의 마을과 경쟁에 대응하는 양상을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경상도 경주의 옥산동이며, 분석 자료는 동계 등 계 자료 중심이다.
옥산동은 이언적의 서얼 이전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들은 조선후기 지역사회 참여와 활동에 제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손인 양좌동 여주이씨와 경쟁 및 갈등을 가속화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6~18세기 동안 옥산동 여주이씨가 양좌동에 대응하기 위해 전개한 마을 결속 노력을 계기적 흐름에 따라 추적했다.
16세기 옥산동 여주이씨는 이언적으로부터 물려받은 옥산별업을 고수하여 서얼의 사회적 한계 극복에 집중했다. 17세기 정혜동상하계와 옥산동계를 조직함으로써 옥산동 여주이씨는 마을의 공간적 영향력을 확산했다. 그리고 점증한 양좌동 여주이씨로부터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18세기 옥산동 여주이씨 후손의 적손을 중심으로 洞契 중수를 거듭하며 상하계의 상사부조를 작동하여 마을의 안정화를 달성했다. 18세기 중엽 이후 동계를 유지하면서 門契 등과 연대하여 환난상구를 통해 일족과 마을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했다. 옥산동 여주이씨는 양좌동 적파와의 嫡庶 갈등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얼일족을 결속하기 위해 서얼의 적손을 중심으로 계를 조직하는 등 마을을 개발했다.
조선후기 대표적 서얼 마을의 300년에 걸친 내부 결속 양상을 규명한 이 연구는 지역사회의 차별에 마을 단위로 대응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고, 서얼 차별에 대항해 동계 등을 조직하여 대응한 내용을 서술했다.


This study analyses the process by which the Yeoju Lee clan developed and established ownership of their village, Oksan, over a period of 300 years. It takes Oksan as a case study for village development and cooperation in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from the 16th to the 18th century. Oksan's rivalry with the neighbouring village, Yanjwa, also offers an example of competition between villages in the area of Gyeongju, Gyeongsang Province during this period.
Oksan village is inhabited by the descendants of the concubine Lee Eon-jeok.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re were restrictions on community participation and social activities, as well as competition and conflict between the descendants of Lee Eon-jeok and the inhabitants of Yangjwa Village. Against this background, the Yeoju Lee clan in Oksan made gradual efforts towards building village solidarity to enhance community participation and respond to conflict.
The inhabitants of Oksan had inherited land, servants and houses from Lee Eon-jeok and had decided to establish the village in the 16th century, intending it to be separate from and a rival in wealth to the village of Yangjwa. In the 17th century, the Jeonghye Union kye and the Oksan village kye were established to expand the village. In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in order to cope with a growing external crisis, the Yeoju Lee clan and some of its connections revived the village kye and helped to achieve the stabilisation of the village by providing assistance to its members both upper and lower class for funerals. After the mid-18th century, as a fruit of the strengthened solidarity and cooperation within the Oksan village, the Yeoju Lee clan established the Jangsan Confucian Academy, which cemented the central place of this clan in the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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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초기 능침사(陵寢寺)의 역사적 유래와 특징

저자 : 탁효정 ( Hyo-jeong Tak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7-4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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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초기에 설치된 능침사의 역사적 유래와 특징을 다룬 논문이다. 능침사는 중국 후한~위진남북조시대부터 건립되었고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설치되기 시작했다. 고려에서는 眞殿寺院이 왕릉의 추복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 시기에 걸쳐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이 지정되었으며, 그 명칭은 齋宮, 齋室, 陵寢寺, 陵寺, 造泡寺 등으로 조금씩 변하였지만 왕릉을 수호하고 제사를 돕는다는 본래 기능은 계속 이어졌다. 본고에서는 조선초에 해당되는 태조~태종대의 능침사의 설치목적, 능침사의 설치주체, 왕릉과 능침사 간의 거리, 이 시기 능침사의 공통점 등을 살펴보았다. 조선초에 설치된 능침사는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국왕의 주도 하에 설치되었고, 둘째 왕릉 바로 곁에 위치하였으며, 셋째 재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넷째 별도의 眞殿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진전사원이나 조선중기의 능침사와는 다른 조선초기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불교식 의례가 주를 이루던 고려의 왕릉 예제를 조선의 유교식 예제로 변형하면서 일시적으로 등장하게 된 과도기적 특징으로 파악된다. 조선초 왕실에서 능침사를 설치한 이유는 네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조선 왕릉이 고려의 玄陵과 正陵을 모델로 삼아 조성되면서 현·정릉 안에 있던 능침사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둘째 왕릉에서 치러지는 제사와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셋째 왕릉과 주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넷째 선왕 선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종교적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네 가지 필요에 따라 조성되기 시작한 능침사는 조선중기까지 계속 설치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造泡寺라는 이름으로 변형·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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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초 관원 범죄 수속(收贖) 제도의 성립

저자 : 박경 ( Kyoung Park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45-7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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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조선 초 관원 범죄 수속법 제정의 배경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조선 시대범죄 처리는 『대명률』형률 체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여성, 장애인, 노인, 어린아이 등에 대한 수속은 『대명률』 규정을 따랐다. 그러나 관원 범죄 수속은 세종대에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처리했다. 관원 범죄 수속법 제정 전에도 왕이 관원의 범죄를 최종 판결할 때 수속 여부를 함께 명했다. 그런데 이 사례들을 검토해보면 『대명률』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조선에서는 행해졌던 수속 방식이 나타난다. 최종 형량이 도형[杖徒刑] 이상일 때 도형이나 유형은 집행하면서도 장형을 수속하도록 명한 사례들이 그것이다. 다수의 태형, 장형을 수속하도록 한 것은 물론이고, 장형과 도형, 장형과 유형의 집행을 분리해서 장형만을 수속하도록 하는 방법이 행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에서는 『대명률』형률 등급 체계를 수용했지만 장형과 도형, 유형을 별도로 인식하는 사고체계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형벌이 위로 大夫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개념 하에 관원들에게 태형이나 장형을 집행하는 것을 꺼리는 인식이 행형에 반영되고 있었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23년(세종 5)에 관원 범죄 수속법이 제정되었고, 1425년(세종 7)에 개정되었다. 『대명률』규정에서 관원 범죄 수속의 범위는 公罪 태형에 한정되어 있었고, 군관의 경우에만 私罪 태형까지 수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범죄는 황제의 은전에 의해 감형 혹은 수속하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에 이 관원 범죄 수속법은 법 제정시에는 태형과 장형 모두를 수속할 수 있도록 했고, 2년 뒤 법 개정시에는 공죄 장100, 私罪 장90까지 수속하도록 규정되었다. 『대명률』에 비해 수속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이는 사대부에게 태형이나 장형을 가하는 것을 꺼리는 인식이 제도화된 것이다. 『대명률』의 관원 범죄 수속 규정에서 행정의 효율성을 지향하고, 관원에 대한 우대는 황제의 은혜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과 대비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이 법은 士族 출신 관원들이 자신들의 집단적인 권익을 보호하고자 제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법 제정 이후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원으로서 이 법에 규정된 혜택을 받도록 하는 방향으로 법의 성격을 일부 전환했다. 한편, 관원 범죄 수속법이 제정된 이후 관원이 사소한 불찰로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수속하지 않고 태형이나 장형을 집행하도록 하는 한시적, 상시적법들이 제정됨으로써 관직 사회의 기강을 다잡고 지방 관원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관원 범죄 수속법은 사대부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법 제정 이후 관료 사회를 존중하고 관직 기강을 확립하는 제도로 일정부분 전환되었다. 이러한 관원범죄 수속법의 제정과 시행은 ``사대부 존중``을 법제화하는 움직임과 관료 사회의 존중과 조직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함께 발현되던 조선 초 제도 정비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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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초기 공주(公主),翁主의 봉작(封爵)과 예우(禮遇)

저자 : 차호연 ( Ho-yeon Cha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77-12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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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조선 초기 公主·翁主의 봉작과 예우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國王의 딸은 모친의 지위에 따라 嫡庶가 구분되어 王妃의 소생은 公主로, 後宮의 소생은 翁主로 책봉되었다. 고려시대 국왕의 딸은 嫡庶의 구분이 없이 모두 公主로 봉작되었으며, 일부 公主들은 자 기 소유의 宮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宮主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자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왕의 嫡女와 庶女를 구분하여 公主와 翁主로 부르게 되었다. 公主·翁主는 下嫁하는 시기에 맞추어 봉작되었다. 실록의 기사를 분석해 본 결과 公主·翁主의 가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에 작호를 받고 某公主·某翁主로 책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公主·翁主가 하가할 때 책봉되는 것은 혼인 이후에도 公主·翁主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駙馬와 관계없이 국왕의 딸로서 갖는 고유한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公主·翁主가 된 왕의 딸은 외명부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외명부는 양반 신료의 부인들로 구성되었는데, 公主·翁主 또한 駙馬의 부인으로서 양반여성으로 인식되었기에 하가한 이후 외명부 품계를 받았다. 그러나 公主·翁主는 국왕의 직계가족이었으므로 그 품계를 산정할 수 없어 품계가 없는 ``無品``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므로 公主·翁主의 품계는 駙馬의 품계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公主·翁主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유일하게 남편을 간택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국왕과 신료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 16세 이하의 남성 중 몇 명의 후보를 정한 뒤 이 중 한 사람이 駙馬로 선정되었다. 太宗 15년(1415) 넷째딸 정선공주의 남편으로 남휘를 선정한 것을 계기로 공신의 자제가 아닌 국왕의 신임을 받는 신료의 자제들이 駙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世祖의 등극 이후 駙馬를 간택하는 조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太宗의 집권 초기와 마찬가지로, 世祖의 등극에 협력한 일부 공신의 자제들로 駙馬를 선정하게 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駙馬의 간택 성향이 달랐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조선시대 公主·翁主는 왕비·후궁 및 양반여성 등과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남편의 위치에 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公主·翁主는 하가하기 이전에 봉작받은 고유의 지위를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 오히려 駙馬의 경우 公主·翁主의 남편으로 간택된 경우 姻戚이 되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제약을 겪어야 했다. 公主·翁主는 혼인하여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公主·翁主는 하가한 이후 국왕이 지급하는 토지와 노비 및 물품을 받았다. 公主·翁主는 자신의 명의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된 문서로는 「淑愼翁主家垈賜給 成文」과 「鄭眉壽 別給文記」를 들 수 있다. 즉, 公主·翁主는 外命婦 무품으로 인정되는 동시에 다양한 경제적 혜택이 보장되어 부유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公主·翁主는 駙馬에게 부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각종 제도와 사례 분석을 통해 公主·翁主가 남편의 위치에 따라 변동을 겪지 않고, 자신의 태생적 지위에 따라 높은 위상을 유지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여성 중에 오직 公主·翁主만이 갖는 특수성으로, 公主·翁主 연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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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기 전반 불교계의 실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손성필 ( Seongphil Sohn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25-17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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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은 조선초기의 국가체제가 동요한 시기이자 사족층이 성장하고 성리학이 보급되는 한편 지방의 장시가 발달해 간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사회의 유교화가 진행된 시기로 이해되어 왔으므로, 이 시기의 불교계는 억압받고 침체했다고 알려졌을 뿐 거의 주목 받지 못해 왔다. 그런데 『실록』을 통해 볼 때, 1530년경 조정에서는 승려의 증가를 우려하는 현실 인식이 나타났으며, 이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특히 전라도는 승려의 증가가 가장 두드러진 지역이자 피역승과 무뢰배로 형상화된 승려의 비행이 가장 우려되던 지역이었으며, 이에 따라 경차관 파견, 사찰 철훼 등의 조정의 대처도 집중된 지역이었다. 한편 16세기 전반은 전국적으로 사찰의 불서 간행이 크게 증가한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조정에서 승려 증가를 우려하기 시작한 1530년경에 불서의 간행도 4배 가량 크게 증가하였다. 전라도는 불서 간행도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는데, 15·16세기에 불서 간행이 지속적인 증가 추세였으며, 군현 수에 비해 가장 많은 양의 불서가 간행된 지역이었다. 또한 16세기 전반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사찰만 전국에 1,650여 개소, 전라도에 280개소가 있었으며, 이 사찰들은 각군현별 대표 사찰이었을 뿐 그 이상의 사찰이 유지·중창되고 있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16세기 전반 불교계는 승려가 증가하였고, 많은 수의 사찰이 건재하였으며, 불서 간행이 증대되었다. 상당한 규모의 인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불서를 간행함으로써 기존의 주류적 불교 전통을 선별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전반 불교계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는 앞으로 정치, 사회, 경제, 사상, 문화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필요해 보이는데, 이러한 현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것은 조선시대 불교정책과 불교계에 대한 오해와 편견, 사료의 제한적 활용과 피상적 분석 등의 여러 요인이 중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시대의 불교정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불교정책이 실질적으로 불교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16세기 전반의 중종대에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백성과 이단이 저절로 교화되기를 기다리는 敎化論的 불교정책을 지향하였으며, 이는 사실상 불교계에 대한 방임이나 방치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찰들은 국가의 공식적 지원 중단에도 불구하고 여타 경제적 기반을 통해 건재할 수 있었는데, 이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1,650여 개소의 사찰로 확인할 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는 그 이상의 사찰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국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미수록된 사찰을 규제하고자 하였을 뿐이나 그 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조선 사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승려[僧]가 있었고 이들은 자료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되었다. 『실록』의 국정 논의 기사에서 신료들은 흔히 승려를 避役僧이나 무뢰배로 형상화하였으나, 그들의 관점에 따라 당시의 승려를 모두 피역승이나 무뢰배로 일반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6세기 전반 조정에서 승려가 증가한다고 인식한 시기에 불서 간행 또한 증가한 사실은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16세기 전반의 조선 사회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승려와 사찰, 불교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16세기 전반 불교계의 현실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6세기 전반 이전과 이후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현실에 대한 상호 검토를 통해서 이 시기 불교계의 실태에 대한 보다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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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세기 한 향반(鄕班) 출신 공신(功臣)의 정치,사회적 존재 양상 -영조대 분무공신(奮武功臣) 박동형(朴東亨)(1695~1739)을 중심으로-

저자 : 김학수 ( Hak-su Kim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175-232 (5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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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士林政治는 ``勳舊``라는 기득권을 축출하고 公論政治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역사적 진보였지만, 사림의 분열로 일컬어지는 黨爭은 조선의 정치사를 격동 속으로 몰아넣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특히 서인[노론·소론]들은 仁祖反正(1623), 甲戌換局(1694), 戊申亂(1728)으로 이어지는 정변 및 변란을 통해 권력의 기반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남인들은 사실상 정권에서 배제되는 곡절을 겪었다. 정치적 격동과 파장은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을 수반했고, 크고 작은 정치적 이해관계는 시류를 좆는 群像을 만들어갔다.이 글의 주인공인 朴東亨은 경상도 상주의 한미한 양반 출신으로서 무신란의 진압에 공을 세워 복록을 누린 인물이었다. 45년에 지나지 않았던 그의 역사적 삶의 자취는 경종~영조연간을 살았던 비주류 양반들의 의식과 행동 양식의 일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연구는 박동형이라는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보다는 이러한 인물군을 양산시킬 수밖에 없었던 18세기 조선의 정치사회적 풍토를 미시적으로 진단하는데 주안점이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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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유교 이념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저자 : 배항섭 ( Hang-seob Bae )

발행기관 : 조선시대사학회 간행물 : 조선시대사학보 77권 0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pp. 231-26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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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학이나 동학교단이 민중에게 이해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유교적 지배이념과 체제라는 면과 관련하여 살펴본 글이다.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던 지도부는 일반 농민과 달리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자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교단 내 변혁지향적 세력들은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보이듯이 감사는 물론 국왕에게까지 직접 상소하는 진전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은 여기에 참여했던 민중이나, 이 사실을 전해들은 민중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민중은 왕토사상이나 왕민사상 등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또 농민군들은 유교이념에 근거한 통치, 곧 지배이념인 민본에 입각한 인정을 지배층의 책무, 나아가 ``백성``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은택``이라는 쪽으로 바꾸어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요구와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 무장포고문 >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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