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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56권0호(2021) |수록논문 수 : 7
간행물 제목
56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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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1소가야지역의 횡혈식석실 수용과 특징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중심으로-

저자 : 홍보식 ( Bo Shik 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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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활발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고성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구조별로 분석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선행의 수혈식석곽을 매장주체시설로 한 고분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내산리고분군에 횡혈식석실이 수용된 시기는 6세기 2/4분기였음이 다른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내산리고분군의 독특한 고분 조성방식인 선분구 조성 후 매장주체시설 구축은 사용 석재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토목공법이었으나 횡혈식석실의 수용을 계기로 고분 구축방식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지면을 정지한 면에 석실과 봉분을 동시에 조성하고, 벽체에 사용할 벽석의 두께를 수혈식석곽의 벽체에 사용한 벽석보다 두텁게 하여 뚜껑돌과 상부의 봉분 하중을 극복하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장방형의 현실 평면, 중앙 연도, 평천장, 주검의 목관 매납 등 남부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과 공통하지만, 현문시설이 설치된 점은 특징적이다. 이 현문시설은 왜계 석실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현지의 고분 축조공법+백제로부터의 횡혈식석실의 매장법+왜계 석실의 현문시설 요소 등이 복합되어 구축되었다.


The current study analyzed the structures of horizontal chambers of Naesan-ri Old Tombs in Goseong that have actively been studied recently and compared them to the old tombs with previously studied vertical coffins to identify their characteristics. Horizontal chambers were introduced to Naesan-ri Old Tombs in the second quarter of the 6th Century as a result of comparing them with the horizontal chambers of other Gaya regions. After creating the primary mounds, which are the unique characteristic of Naesan-ri Old Tombs, burial facilities were created as a civil works method to overcome the weakness of stone materials, but the construction methods of old tombs changed after the acceptance of horizontal chambers. The stone chamber and mound are created together on contacted surface and the thickness of walls was made thicker than the walls of horizontal chamber to bear the weight of cover stone and upper part. The horizontal chambers of Naesan-ri Old Tombs have many things in common with the horizontal chambers of southern Gaya regions, such as the rectangular form, central chronology, flat ceiling, and burial of corpses in wooden coffins, but the doors were characteristic. The doors were inspired by Japanese stone chambers. The horizontal chambers of Naesan-ri Old Tombs combined the local old tomb construction method, the horizontal burial method of Baekje, and the doors of Japanese stone cha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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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가야 출토 마구의 성격과 의미

저자 : 류창환 ( Ryu Chang-hwa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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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소가야의 중심지로 이해되고 있는 경남 고성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를 집성하여 편년하고 그 성격과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문헌 기록상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소가야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서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마구는 사용 중에 파손된 것을 보수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를 통해 마구의 실용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 율대리와 내산리 고분 출토 재갈에서 확인되는 보수흔은 그러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갑주와 대도, 철모, 철촉 등과 같은 무기·무구와 함께 출토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는 소가야 출토 마구의 실용성과 무장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실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장기병 또는 중장기병과 같았을 것이다.
한편 소가야의 고분에는 그 위계에 따라 재갈과 안장, 등자로 구성된 기본마구, 철제의 장식용 마구, 금동장 장식마구 등으로 구분되어 부장된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는 당대의 마구가 실용품을 넘어 피장자의 권위와 위세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도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는 계통을 달리하는 외래계 마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대가야계·백제계·신라계·왜계 마구 등이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외래계 마구는 소가야가 당대의 대가야와 신라,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여러 세력과 교류 또는 교섭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In this book, we gathered harnesses excavated from ancient tombs in Goseong, Gyeongsangnam-do, which are understood to be the center of Sogaya, to examine their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and to reveal one aspect of Sogaya, which is not well known in the literature.
First of all, we focused on whether there were parts consisting of asymmetrical left and right parts among the sogaya excavated harnesses. This is because harnesses consisting of parts of left and right asymmetries are understood to have repaired broken during use, which allows us to address the practicality of harnesses. Such cases are believed to have been found in the excavation of ancient tombs in Yuldae-ri and Naesan-ri, Goseong.
Next, it was noted that the sogaya excavation harnesses were excavated along with weapons and weapons such as Gapju, Daedo, iron helmet, and ironhead. This indicates the practicality and armament of the sogaya- excavated harness, which would have been similar to that of the light cavalry or mid- to long-term soldiers of Goguryeo tomb murals.
Meanwhile, it is also found that Sogaya's tombs were divided into basic harnesses consisting of gravel, saddle, stirrups, iron ornamental harnesses, and gilt-bronze ornamental harnesses, indicating that the harnesses of the time were used beyond practical goods.
Finally, it was noted that many of the sogaya excavation harnesses included foreign horse harnesses with different systems. Daegaya, Baekje, Silla, and Waegye Magu. These foreign harnesses are clear evidence that Sogaya exchanged or negotiated with Daegaya, Silla, Baekje, and other Japanese powers across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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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성 내산리 소가야묘 팔찌에 대한 검토

저자 : 이한상 ( Lee Hansa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1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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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소가야의 중심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고성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 관하여 살펴본 것이다. 소가야는 5세기 이후 고고학적 실체가 뚜렷하지만 소가야양식 토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을 소가야적인 고고자료로 볼 수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금속장신구에 소가야적 특색이 발현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내산리 소가야묘군의 경우 7기의 유구에서 11점의 팔찌가 출토되었다. 34호분 주실에서 4점, 60호분에서 2점, 여타 무덤에서는 1점씩 출토되었다. 금팔찌는 없고 은팔찌가 2점, 동팔찌가 9점이다. 대부분 망자의 좌우 팔목에 착장시켜 매장한 양상이다. 팔찌의 부장에는 다양한 방식이 혼재되어 있어 소가야만의 특색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는 문양의 유무나 형태에 따라 3류로 나눌 수 있다. 문양이 없는 것이 2점, 각목문을 갖춘 것이 7점, 돌기형 장식을 갖춘 것이 2점이다. 각목문 팔찌는 신라의 그것과 형태에서 차이가 있어 백제-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 다만 제작지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며 일부는 현지산일 가능성도 있다. 팔찌의 상한 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 돌기가 장식된 팔찌는 신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으며 신라로부터의 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전반의 늦은 단계나 6세기 중엽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서는 다양성이 보인다. 이는 다양한 외래토기가 함께 묻히는 발굴 양상과도 맥이 닿는다. 이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주변국과 다양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수행하며 생활하던 소가야인들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whether bracelets excavated from the Naesan-ri Tombs have characteristics of Sogaya(小加耶). Sogaya is known to have a unique culture among Gaya countrie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examine whether there is a Sogaya-style in the bracelets as in the pottery.
Naesan-ri Tombs are located on the beach of Goseong, Gyeongsangnam-do, and have been excavated several times. In the meantime, 11 bracelets have been excavated from seven tombs. In particular, four were excavated from Tomb No.34. So far, no gold bracelets have been discovered, but 2 silver bracelets and 9 bronze bracelets have been discovered. Most of them are worn on the left and right wrist of the person buried in the tomb. In Naesan-ri Tombs, there are various ways to bury bracelets in tombs, and the characteristics of Sogaya are not identified.
Bracelets excavated from the Naesan-ri Tombs can be divided into three types based on patterns. There are two without patterns, seven with line patterns, and two with protrusions. As the bracelets with a line pattern excavated from these tombs have a difference in shape from that of Silla, it can be compared to Baekje or Daegaya(大加耶) bracelet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pecify the production site, and some of them seem to have been made in Sogaya.
The bracelets excavated from these tombs were made after the late 5th century. Among them, the bracelet which is decorated with protrusions seems to have been made in the 6th century.
The variety of bracelets excavated from Naesan-ri Tombs reflects the openness of Sogaya culture. Sogaya dominated the hub of maritime transportation and interacted with various countries. The bracelet excavated from Naesan-ri tombs symbolizes the politics and culture of Sog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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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국 초기 해상(海上) 영웅(英雄)과 국가의 성격 - 영웅시대의 설정 -

저자 : 김재홍 ( Kim Jae-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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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초기 바다를 배경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수로왕과 탈해왕,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 박제상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고대 영웅시대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을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신라 석씨 이사금시기의 영웅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국가를 위해 전공을 세우고 우로와 같이 목숨까지 받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영웅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에서 영웅시대의 국가 형태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방식은 중앙은 6부로 나누어져 있고 지방에는 소국이 자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라 국왕은 개별 6부와 지방 소국의 자치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시에 군사권과 외교권은 국왕의 아래에 통합시키고 있다. 신라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여가는 방식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고 6세기 중고기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국가체를 구성한 것이 가야이다. 가야는 독립적인 자연지형인 분지나 해안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립하여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강하였다. 전시의 군사권이나 외교권도 개별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였다. 포상팔국의 예도 이와 유사하였는데, 8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각자 국왕이나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신라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야는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지만, 이것이 신라 사회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Among the figures who played against the backdrop of the sea in the early Three Kingdoms were King Suro, King Talhae, Seokuroi Eum, General Ilbeul and Pak Je-sang. Among them, Seokuro and Yi Eum and General Ilbeul were typical heroes of the ancient hero era. All of them were heroes of the Silla Seok' isageum Age, who set up their majors for the nation and supported their lives like Uro. This era can be defined as the "hero age". However, in ancient Korean history, the national form of the hero era had two directions.
Silla's method was divided into six parts in the center, and small countries were exercising their autonomy in the provinces. Silla's king recognizes the autonomy of six individual parts and small provincial states, but integrates military and diplomatic powers under the king during the war. He chose to concentrate his power on the center of Silla. Gaya formed the national body in a different way. Gaya established a state based on the basin or coast, which is an independent natural terrain, and thus individual small countries were highly unique. The military and diplomatic rights of the war were also exercised independently by individual small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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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물질자료로 본 변한의 대외교류

저자 : 이창희 ( Changhee Lee ) , 구숙현 ( Sookhyun K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3-1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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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을 집성하여 변한의 대외 교류상을 살펴보고자 한 논문이다. 외래계 유물을 중국계와 왜계, 토기와 금속기로 나누어 집성하였는데, 낙랑군 설치 직후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시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은 낙랑군(BC108) 설치 이후 중국계 유물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漢式 위세품에 대한 변한인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한인은 수입과 모방을 통해 그 갈망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목관묘에서 목곽묘 사회로 전환되면서 한식유물에 대한 가치와 수요가 변화·감소하게 되었고, 위세품도 재지화되고 독자적으로 변용된 것이 나타났다.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 최대의 한중일 교역 거점이었던 늑도는 기원후가 되면서 교역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김해지역이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양동리·대성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倭系유물의 기종과 분포의 변화는 정치체 간 교역의 성격이 짙어졌음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드러나는 변한의 모습은 정치권력형 왕조 사회로의 지향을 보여준다.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물질자료의 변화는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묘제 및 부장품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변한 소국들의 사회 구조 및 수장의 성격, 정체성의 변화와도 연결되는데, 외래계 유물에서 나타나는 한중일 교역 네트워크의 변화와도 연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This paper is intended to collect foreign relics excavated from Byeonhan area and examine Byeonhan's foreign exchange. Foreign relics were divided into Chinese(Han(漢)) and Japanese(Wa(倭)). It was targeted from the 1st century B.C. to the 3rd century A.D. In the process of transitioning from Byeonhan(弁韓) to Gaya(加耶), I wanted to find out what Byeonhan's changes in foreign exchange meant.
In Byeonhan, relics from Han(漢) Dynasty stood out after the establishment of Nangnang(樂浪; B.C.108), which stemmed from the desire of Byeonhan people for prestige goods. Byeonhan people realized the yearning through income and imitation.
However, the transition of society from wooden coffin tombs to wooden chamber tombs changed the value of relics from Han Dynasty, and the prestige goods have also been localized and independent changes have occurred. In other words, the culture of Han dynasty collapsed and the prestige goods have changed amid the inherent development of Byeonhan.
In the 1st century B.C., Neuk-do site, the largest trading hub in the sou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lost its function of trade in the becaming A.D. At the same time, Gimhae area stood out, representing Yangdong-ri site, and Daeseong-dong site. In particular, changes in the kind and distribution of relics from Wa indicate that trade between polity has intensified.
The appearance of Byeonhan in the tomb shows that they were aiming for a political power-type dynastic society. Changes in foreign relics mean changes in foreign exchange in Byeonhan, which are unrelated to changes in social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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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령 쾌빈리 곽소사묘(郭召史墓)의 기초적 검토

저자 : 이영재 ( Lee Yeong-jae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2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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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쾌빈리 산23-4번지 일원에 위치했던 郭召史墓는 조사과정에서 우연히 확인되었다. 郭召史墓는 회곽묘 조사사례 가운데 하나로 마무리될 뻔했으나 '회곽' 속성과 銘旌(免賤海南郭召史之柩)은 새로운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郭召史墓의 '회곽' 속성을 분석하여 규모는 양반 계층 회곽묘에 비견될 정도였고 회벽은 통벽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郭召史의 신분이 최상층은 아닐지라도 양반 계층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유추해 보았다. 다만 명정은 郭召史의 신분에 대해 또다른 내용을 알려주는데 '免賤'은 郭召史가 상전에 의해 사노비에서 해방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층의 여성을 지칭했던 '召史'는 늦어도 18세기에는 사대부의 첩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郭召史가 상전의 첩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즉 郭召史는 양반 계층의 첩이 되면서 천층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나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은 어려웠고 결국 첩이 지녔던 신분적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


Kwak-Joi's tomb, located at mountain 23-4, Goryeong, Koenbinri, was accidentally confirmed during the investigation. Kwak-Joi's tomb almost ended in one of the cases of LSMB tomb investigation. However, the attributes and definitions of the 'LSMB' attribute and Myeong-jung(The Deceased name flag) clues to infer new facts.
The size of the 'LSMB' attribute was similar to that of the Yangban class. And it was found that the lime wall was built by building the whole wall. Through this, it was inferred that Kwak-Joi's status may be included in the Yangban class even if it is not the top. However, Myeong-jeong tells another story about Kwak- Joi's status. 'Myeon-cheon(freeman out of lowborn class)' is a person who was dismissed from the Novi by the owner. The term 'Joi', which referred to the lower class women, was extended to the term concubine of the Yangban class at the latest in the 18th century. This suggests that Kwak-Joi became the concubine of the owner. In other words, Kwak-Joi could be freed from the people as he became a concubine of the Yangban class. But it was difficult to enter the Yangban class. In the end, the identity limit of the concubine was not over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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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곡 어변갑의 장원 대책 연구

저자 : 안소연 ( Ahn Soyeo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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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태종 8년 식년시 책문과 어변갑의 장원 대책을 시대 배경과 연결해 분석하였다.
태종 8년은 아직 조선 개국 공신 세력이 건재하였고, 무인정사·2차 왕자의 난의 공신 세력이 영향력을 많이 미치고 있었기에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이를 기반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해나가면서도 아직 고려 말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책문 또한 이러한 과도기적인 주제를 다루었을 것이다. 어변갑은 태종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면은 없는 인물이지만, 태종의 측근들이 시험관이었던 시험에 장원급제 한만큼 그 대책 또한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태종 8년 식년시 전시 책문은 『동국장원집』 권 上에, 어변갑의 장원 대책은 『전책정수』 권 上에 전문이 전한다. 책문에서 다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⑴ 요순삼대와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의 통치 방식과 주자성리학적 이상사회 및 군주상 구축 ⑵ 과전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 ⑶ 여진족 및 왜구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모색으로 나눌 수 있다.
어변갑은 대책에서 우선 중국 고대 태평성대의 시기로 알려진 요순삼대가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정치를 행하는 것에 있어서 도와 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은 이보다 못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여말 『대학연의』가 도입되고 태종대에 들어서 경연·서연 교재로 읽히면서 고려 시기 『정관정요』를 중심으로 한 패도 정치를 지양하고 주자성리학적인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전법에 대해서는 기내와 기외를 비교하면 기내가 훨씬 중요하고, 공전이 사전보다 먼저라고 하면서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기외의 군자전을 기내로 옮기고, 기외에 과전을 분급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사전을 없애는 형태로 개혁을 진행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진과 왜구에 대한 외교적 관계에 대한 어변갑의 대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미'라는 표현이다. '기미'는 조선의 사대 질서에 따르도록 해야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데, 여진과 왜구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여진의 지리적 위치상 조선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내조할 때 지나치게 대우하지 말아야 하며 한편으로는 사적인 무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구에 대해서는 부신을 징표로 주고 교역을 하게 하는 한편 군사적 대처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변갑이 개혁 정책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과 자료는 매우 적지만,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했다는 것에서 당시 태종이 요구한 인재상이었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This manuscript is study of exam question in 8th reigns in king Tae-Jong and Eoh-ByeonGab's answer of examination. He win the first place in this state exam.
Exam question in 8th reigns in king Tae-Jong hand down in 《DongGookJangWonJip》 the first volume. And Eoh-ByeonGab's answer of examination hand down in 《JeonCheakJeongSu》 the first volume.
In 8th reigns in king Tae-Jong, meritorious retainer at the Founding of a Joseon Dynasty and at the force of King Tae-Jong's rebellion were undiminished yet. So an old custom of last Goryeo dynasty remained, although the reform was implemented by Neo-Confucianism. Therefore, exam of questions in king Tae-Jong's reign would have dealt with social problems in transition.
There are three main topics covered in this exam questions in 8th reigns in king Tae-Jong. First, consider governance of Emperor Yao·Shun and three generations, Emperor Wen of Han and Emperor Taizong of Tang. In addition, What do Joseon king and government learn from them to build a Neo-Confucianismic ideal society and monarchy. Second, Gwajeonbeob was putting economic burden on the people who resided capital region and the noncapital region. So, is the argument for dividing the Gwajeon of the capital region into noncapital region to resolve this perversity valid? Third, contemplate Influence on Joseon to Jurchen people of northern area and seek ways to resolve the diplomatic conflicts that arise, and What other means than a military solution to the invasion Wokou's invasion
Eoh-ByeonGab answer the first question, he estimate ⒜ Emperor Yao·Shun and three generations better than ⒝ Emperor Wen of Han and Emperor Taizong of Tang, because ⒜ were never out of order and courtesy in conducting politics. This is transitional phenomenon on early Joseon dynasty, the military government politics, which centered on the 《Jeonggwanjeongyo》, was rejected and the political ideology of the Neo-Confucianism, which centered on the 《DaehakYeoneui》 , was established.
About GwaJeonbeob, he assert have to divided Goonjajeon of the noncapital region into capital area and Gwajeon of the capital region into nocapital region. In other word, he ultimately suggested that the reform be carried out in the form of eliminating Sajeon.
Last, the point of Eoh-byeongab's answer of examination about relationship of Jurchen people and Wokou is 'Gimi(羈縻)'. 'Gimi' is the traditinoal diplomatic relations in ancient eastern asia. So, Joseon thought Jurchen people and Wokou to view as a target for 'Gimi' and tried to incorporate them into Joseon's order, which was distinct from the order system of Ming.
Therefore, he asserted when Jurchen people send an envoy to Joseon, the Joseon government should not treat them too friendly. On the one hand, he insisted on prohibit private trade work, too. Meanwhile, about Wakou, he suggested give them certificate and do trade with them through this and the military side should also pay constant attention.
Eoh-ByeonGab was not very active in politics, so he has few achievements to note. But his answer of examination in 8th reigns in king Tae-Jong, which his win first place, was confirmed that this book was not only related to contemporary discussions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ng, but also to future policies.
In othter word, Eoh-ByeonGab himself is no record that he directly participated in or influenced these reform policies. However, through his answer of examination, it can be said that he was a talented man enough to be mentioned by the king Tae-Jong o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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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가야지역의 횡혈식석실 수용과 특징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중심으로-

저자 : 홍보식 ( Bo Shik H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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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활발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고성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구조별로 분석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선행의 수혈식석곽을 매장주체시설로 한 고분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내산리고분군에 횡혈식석실이 수용된 시기는 6세기 2/4분기였음이 다른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내산리고분군의 독특한 고분 조성방식인 선분구 조성 후 매장주체시설 구축은 사용 석재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토목공법이었으나 횡혈식석실의 수용을 계기로 고분 구축방식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지면을 정지한 면에 석실과 봉분을 동시에 조성하고, 벽체에 사용할 벽석의 두께를 수혈식석곽의 벽체에 사용한 벽석보다 두텁게 하여 뚜껑돌과 상부의 봉분 하중을 극복하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장방형의 현실 평면, 중앙 연도, 평천장, 주검의 목관 매납 등 남부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과 공통하지만, 현문시설이 설치된 점은 특징적이다. 이 현문시설은 왜계 석실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현지의 고분 축조공법+백제로부터의 횡혈식석실의 매장법+왜계 석실의 현문시설 요소 등이 복합되어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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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가야 출토 마구의 성격과 의미

저자 : 류창환 ( Ryu Chang-hwa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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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소가야의 중심지로 이해되고 있는 경남 고성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를 집성하여 편년하고 그 성격과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문헌 기록상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소가야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서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마구는 사용 중에 파손된 것을 보수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를 통해 마구의 실용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 율대리와 내산리 고분 출토 재갈에서 확인되는 보수흔은 그러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갑주와 대도, 철모, 철촉 등과 같은 무기·무구와 함께 출토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는 소가야 출토 마구의 실용성과 무장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실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장기병 또는 중장기병과 같았을 것이다.
한편 소가야의 고분에는 그 위계에 따라 재갈과 안장, 등자로 구성된 기본마구, 철제의 장식용 마구, 금동장 장식마구 등으로 구분되어 부장된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는 당대의 마구가 실용품을 넘어 피장자의 권위와 위세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도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는 계통을 달리하는 외래계 마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대가야계·백제계·신라계·왜계 마구 등이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외래계 마구는 소가야가 당대의 대가야와 신라,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여러 세력과 교류 또는 교섭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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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성 내산리 소가야묘 팔찌에 대한 검토

저자 : 이한상 ( Lee Hansa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1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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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소가야의 중심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고성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 관하여 살펴본 것이다. 소가야는 5세기 이후 고고학적 실체가 뚜렷하지만 소가야양식 토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을 소가야적인 고고자료로 볼 수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금속장신구에 소가야적 특색이 발현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내산리 소가야묘군의 경우 7기의 유구에서 11점의 팔찌가 출토되었다. 34호분 주실에서 4점, 60호분에서 2점, 여타 무덤에서는 1점씩 출토되었다. 금팔찌는 없고 은팔찌가 2점, 동팔찌가 9점이다. 대부분 망자의 좌우 팔목에 착장시켜 매장한 양상이다. 팔찌의 부장에는 다양한 방식이 혼재되어 있어 소가야만의 특색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는 문양의 유무나 형태에 따라 3류로 나눌 수 있다. 문양이 없는 것이 2점, 각목문을 갖춘 것이 7점, 돌기형 장식을 갖춘 것이 2점이다. 각목문 팔찌는 신라의 그것과 형태에서 차이가 있어 백제-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 다만 제작지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며 일부는 현지산일 가능성도 있다. 팔찌의 상한 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 돌기가 장식된 팔찌는 신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으며 신라로부터의 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전반의 늦은 단계나 6세기 중엽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서는 다양성이 보인다. 이는 다양한 외래토기가 함께 묻히는 발굴 양상과도 맥이 닿는다. 이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주변국과 다양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수행하며 생활하던 소가야인들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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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국 초기 해상(海上) 영웅(英雄)과 국가의 성격 - 영웅시대의 설정 -

저자 : 김재홍 ( Kim Jae-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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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초기 바다를 배경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수로왕과 탈해왕,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 박제상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고대 영웅시대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을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신라 석씨 이사금시기의 영웅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국가를 위해 전공을 세우고 우로와 같이 목숨까지 받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영웅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에서 영웅시대의 국가 형태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방식은 중앙은 6부로 나누어져 있고 지방에는 소국이 자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라 국왕은 개별 6부와 지방 소국의 자치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시에 군사권과 외교권은 국왕의 아래에 통합시키고 있다. 신라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여가는 방식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고 6세기 중고기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국가체를 구성한 것이 가야이다. 가야는 독립적인 자연지형인 분지나 해안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립하여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강하였다. 전시의 군사권이나 외교권도 개별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였다. 포상팔국의 예도 이와 유사하였는데, 8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각자 국왕이나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신라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야는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지만, 이것이 신라 사회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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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물질자료로 본 변한의 대외교류

저자 : 이창희 ( Changhee Lee ) , 구숙현 ( Sookhyun K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3-1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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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을 집성하여 변한의 대외 교류상을 살펴보고자 한 논문이다. 외래계 유물을 중국계와 왜계, 토기와 금속기로 나누어 집성하였는데, 낙랑군 설치 직후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시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은 낙랑군(BC108) 설치 이후 중국계 유물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漢式 위세품에 대한 변한인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한인은 수입과 모방을 통해 그 갈망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목관묘에서 목곽묘 사회로 전환되면서 한식유물에 대한 가치와 수요가 변화·감소하게 되었고, 위세품도 재지화되고 독자적으로 변용된 것이 나타났다.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 최대의 한중일 교역 거점이었던 늑도는 기원후가 되면서 교역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김해지역이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양동리·대성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倭系유물의 기종과 분포의 변화는 정치체 간 교역의 성격이 짙어졌음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드러나는 변한의 모습은 정치권력형 왕조 사회로의 지향을 보여준다.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물질자료의 변화는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묘제 및 부장품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변한 소국들의 사회 구조 및 수장의 성격, 정체성의 변화와도 연결되는데, 외래계 유물에서 나타나는 한중일 교역 네트워크의 변화와도 연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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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령 쾌빈리 곽소사묘(郭召史墓)의 기초적 검토

저자 : 이영재 ( Lee Yeong-jae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2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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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쾌빈리 산23-4번지 일원에 위치했던 郭召史墓는 조사과정에서 우연히 확인되었다. 郭召史墓는 회곽묘 조사사례 가운데 하나로 마무리될 뻔했으나 '회곽' 속성과 銘旌(免賤海南郭召史之柩)은 새로운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郭召史墓의 '회곽' 속성을 분석하여 규모는 양반 계층 회곽묘에 비견될 정도였고 회벽은 통벽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郭召史의 신분이 최상층은 아닐지라도 양반 계층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유추해 보았다. 다만 명정은 郭召史의 신분에 대해 또다른 내용을 알려주는데 '免賤'은 郭召史가 상전에 의해 사노비에서 해방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층의 여성을 지칭했던 '召史'는 늦어도 18세기에는 사대부의 첩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郭召史가 상전의 첩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즉 郭召史는 양반 계층의 첩이 되면서 천층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나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은 어려웠고 결국 첩이 지녔던 신분적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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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곡 어변갑의 장원 대책 연구

저자 : 안소연 ( Ahn Soyeo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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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태종 8년 식년시 책문과 어변갑의 장원 대책을 시대 배경과 연결해 분석하였다.
태종 8년은 아직 조선 개국 공신 세력이 건재하였고, 무인정사·2차 왕자의 난의 공신 세력이 영향력을 많이 미치고 있었기에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이를 기반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해나가면서도 아직 고려 말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책문 또한 이러한 과도기적인 주제를 다루었을 것이다. 어변갑은 태종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면은 없는 인물이지만, 태종의 측근들이 시험관이었던 시험에 장원급제 한만큼 그 대책 또한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태종 8년 식년시 전시 책문은 『동국장원집』 권 上에, 어변갑의 장원 대책은 『전책정수』 권 上에 전문이 전한다. 책문에서 다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⑴ 요순삼대와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의 통치 방식과 주자성리학적 이상사회 및 군주상 구축 ⑵ 과전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 ⑶ 여진족 및 왜구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모색으로 나눌 수 있다.
어변갑은 대책에서 우선 중국 고대 태평성대의 시기로 알려진 요순삼대가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정치를 행하는 것에 있어서 도와 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은 이보다 못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여말 『대학연의』가 도입되고 태종대에 들어서 경연·서연 교재로 읽히면서 고려 시기 『정관정요』를 중심으로 한 패도 정치를 지양하고 주자성리학적인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전법에 대해서는 기내와 기외를 비교하면 기내가 훨씬 중요하고, 공전이 사전보다 먼저라고 하면서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기외의 군자전을 기내로 옮기고, 기외에 과전을 분급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사전을 없애는 형태로 개혁을 진행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진과 왜구에 대한 외교적 관계에 대한 어변갑의 대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미'라는 표현이다. '기미'는 조선의 사대 질서에 따르도록 해야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데, 여진과 왜구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여진의 지리적 위치상 조선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내조할 때 지나치게 대우하지 말아야 하며 한편으로는 사적인 무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구에 대해서는 부신을 징표로 주고 교역을 하게 하는 한편 군사적 대처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변갑이 개혁 정책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과 자료는 매우 적지만,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했다는 것에서 당시 태종이 요구한 인재상이었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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