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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JI COLLECTION OF WORKS

  • : 온지학회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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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598-1444
  • : 2384-2253
  • :

수록정보
72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9
간행물 제목
73권0호(2022년 10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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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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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문수가 1643년 冬至兼年貢行에서 작성한 16제 18수의 한시로 구성된 「西征錄」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조문수가 심양을 다녀오면서 작성한 일련의 한시는 문집으로 편찬되면서 詩體에 따라 흩어져 있었다. 이를 노정에 따라 다시 배치함으로써 「西征錄」의 본래 모습을 재구했고, 이를 통해 청의 입관 전 심양을 다녀온 조문수의 당시 상황 인식과 감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문수는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서 농성전에 참여했다. 그의 아들 조한영은 척화파로 몰려 심양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청나라를 적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조문수였기에 심양에 다녀오는 속내가 복잡했다.
조문수는 칠언절구 위주로 국내노정의 감흥을 적고, 통군정이라는 조선과 청의 경계에서 칠언율시로 긴장감을 고조시킨 뒤에, 다시 칠언절구로 최종 목적지인 심양까지의 노정을 정리했다. 심양에서 칠언고시로 이번 사행의 의미와 가치를 길게 노래한 뒤에, 다시 칠언절구로 귀로를 정리했다. 친구인 朴遾와의 만남을 노래한 오언절구로 수미쌍관의 구조를 의도하기도 했다. 압록강 이전의 국내노정에서는 자연물과 유적을 적절히 사용하여 명나라의 부재와 대명사행의 흥성스러운 기억을 소환하였다. 심양에서는 실질적으로 명과 청이 교체되는 국제 정세를 길게 읊었다. 귀로에 올라서는 심양에 억류되었거나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지인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한편, 국내 영역에 들어온 이후에는 여느 때 사행이 보여주었던 기녀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명청교체가 주는 의식 영역에서의 충격과 이와 별개로 지방에 나선 관료들의 관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In 1643, Jo Mun-su became the second-in-command of the diplomatic mission and went to Shenyang. He fought the enemy on the front line of Namhansanseong Fortress during the Byeongja Horan, and his son Han-young Jo was taken as a hard-liner and captured and detained in Shenyang. In this way, Jo Moon-su, who had no choice but to be hostile to the Qing Dynasty, named his diplomatic process “Seo Jeong-rok” and left it in 20 poems. They were grouped together as a collection of poems and scattered here and there according to the type of poetry. I rearranged these scattered works in chronological order, and in the process, I was able to check the detailed composition of Jo Moon-soo's works.
After starting with five words, Jo Moon-soo wrote down the inspiration of the domestic route in Seven line stanzas. At the border between Joseon and Qing Dynasty, after heightening tension with Seven-Syllabic Code Verse, and then arranging the route to the final destination Shenyang again with the Seven line stanzas, after sang the meaning and value of this meandering from Shenyang for a long time to the Seven line stanzas poems, We are arranging the return route with , and ending it with five words like the beginning.
In terms of content, the domestic route before the Yalu River used natural objects and relics appropriately to recall the splendid memories of the absence of the Ming dynasty and the dynasty. In Shenyang,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which Ming and Qing were actually replaced was recounted for a long time. On his way home, he expressed his longing for acquaintances who were detained in Shenyang or who were in a similar situa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 practice of bureaucrats who went out to the provinces was still continuing, apart from the impact on the consciousness area of the Ming-Qing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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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희경 ( Heekyung Sh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6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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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현지 답사와 고문헌, 지도 등을 통해 <만복사저포기>의 개령동과 보련사의 실제 위치를 비정하고 <만복사저포기>의 세 공간-만복사·개령동·보련사의 설정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고찰하였다.
<만복사저포기>에 등장하는 '開寧洞'과 '開寧寺'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조사 결과 개령사는 현재 남원시 수지면 견두산 아래 용주암이며 개령동은 용주암 서편 가랑수골부터 양촌 마을에 이르는 계곡 일대를 말한다. 보련사는 현재 남원 지역에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료에서도 찾아 볼 수 없지만 보련산으로 불렸던 현재 남원의 고리봉에 있던 절로 현재 폐사되어 남원시 고리봉의 만학동 계곡에 절터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되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뒤로 하고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작품의 개령동인 현재 용주암은 마을 입구에서 약 1km 떨어져 있으며 마을 입구를 제외한 모든 방향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보련사터는 만복사터처럼 평지를 앞에 두고 있지만 만복사가 평지에 위치한데 비해 산에 위치한다. 이러한 입지 차이는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으로서 각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만복사가 대중적이고 개방된 입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두 주인공의 만남을 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개령사터인 용주암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계곡 사이에 위치하여 산으로 둘러쌓인 고립된 형태를 보인다. 고립되고 황폐한 입지는 작품 안에서 죽은 자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보련사는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는 점에서 만복사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개령동처럼 외부와 단절된 공간은 아니다. 만복사가 산자의 공간이며 개령동이 죽은 자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 입지에 있어 중간적 성격을 보이는 보련사는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곳으로 나타난다. 보련사는 죽은 이들이 중심이 되는 개령동이나 산자가 중심이 되는 만복사에 비해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그 입지의 중간적 성격으로 나타난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만복사라는 한 공간에서 보여주지 않고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인 만복사, 여자가 임시로 매장된 개령동 그리고 대상을 치르는 보련사가 따로 설정된 것은 두 사람의 인연과 삼세의 시간관을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는 만복사를 기준으로 동쪽에는 과거가 서쪽에는 미래가 설정됨으로써 과거·현재· 미래의 세 시간이 삼각형을 이루는 세 개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만복사저포기>의 세 공간은 죽은자와 산자의 만남과 해원을 불교의 연기설을 기반으로 삼세의 시간을 공간으로 보여주며 각각의 공간은 그 성격에 부합하는 입지와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설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In this study, the actual locations of Gaeryung-dong and Boryunsa in < Manbogsajeopogi > determine through field visits, old documents, and maps.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meaning of the three spatial settings in < Manbogsajeopogi > Gaeryeongsa is currently Yongjuam under Gyeondusan in Suji-myeon, Namwon-si. Gaeryeong-dong refers to the valley area from Garangsu-gol on the west side of Yongjuam to Yangchon Village. Boryunsa, located on Goribong in Namwon, is now extinct, and the name Jeolteo remains in the valley of Manhak-dong.
A broad plain surrounds Manboksa with Mt. Kirin behind it. It is about 1km away from the entrance to the village of Gaeryeong-dong, and mountains surround all directions except the entrance to the village. The Boryunsa site is located on a hill with flat land in front. This location difference reflects the events' characteristics in each space as the background of < Manbogsajeopogi >. The fact that Manboksa has a popular and open location is meaningful because it is a space for the two main characters to meet. The isolated and devastated site of the Gaeryeongsa site functions as a space for the dead in work. While Manboksa is a space for the living and Gaeryeong-dong is a space for the dead, Boryunsa, which has an intermediate location, appears as a place where the dead and the living coexist.
In < Manbogsajeopogi >, Manboksa and Gaeryeong-dong, Boryunsa were set separately to show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eople and the view of the three generations in a concrete way. As such, in < Manboksa Jeopogi >, Gaeryeong-dong, meaning the past, was set to the east of Manboksa, and Boryunsa, meaning the future, was set to the west. As a space of 'connection' between health and women, it represents the three generations of time, past, present, and future, based on the Buddhist theory of reunification and meeting between the dead and the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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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용선 ( Kim Yong-s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7-10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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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한 존재의 탄생은 '축복'으로 여겨질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 '저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만연한 '기아(棄兒)'의 사연은 옛 서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우리의 오랜 서사 중에 <최고운전>과 <홍길동전>이 있다. 두 작품은 고소설의 서책으로 익숙하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필사본에 집중되어 있으나 본고는 울긋불긋한 표지에서 붙여진 '딱지본' 판본에 주목한다. 연구자가 소장한 딱지본 <최고운젼>은 신태삼이 다듬고 발행한 1961년의 것으로 가로 13.1cm, 세로 19.1cm의 물리적 크기를 지닌 20세기의 기록물이다. <홍길동젼>의 경우 아단문고가 복간한 1956년 경의 판본을 대상으로 삼았다. 세창서관본 <최고운젼>은 간행 기간은 물론 활자본의 저자라 할 출판인의 의식등의 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경성서관본 <홍길동젼> 역시 마찬가지이다. <홍길동젼>과 <최고운젼>은 두 작품 모두 ①'부모의 임신-출산', ②'소년의 비범한 출생', ③'가정으로부터의 추방 혹은 탈주', ④'비범한 영웅성', ⑤'부자갈등', ⑥'국가와의 대치' 등의 여섯 패턴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를 토대로 두 작품 속 '가정(家庭)'이라는 공간성의 표상을 알아보고 '득남(得男)'이 작품 내부에서 어떤 심리작용을 일으키며 이것이 '부자갈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살폈다. 아들을 버린 매정한 아비의 심리 이면에는 '득남의 공포'가, 회귀한 기아가 주변 세계와 벌이는 갈등 이면에는 '확장된 부자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나아가 두 서사 모두 공포와 갈등의 문턱에 공식적 성적 결합인 '혼인'이 있기에 심리 기저의 작동원리로 조르쥬 바타유의 에로티즘(érotisme) 개념을 빌려 두 작품을 읽어 보았다.


The birth of a being at any time and any place will be considered a 'blessing', but in some cases it is also considered a 'curse'. The story of 'orphan (棄兒)', which is prevalent even today, is not difficult to confirm in ancient narratives. Among our long-standing narratives, there are < Choegounjeon > and < Honggildongjeon >. Both works are familiar as books of old novels. Research on these is mostly focused on manuscripts, but this paper focuses on the 'Takjibon' version attached to the reddish cover. The book, < Choegounjeon > which the researcher owns, is a document of the 20th century with a physical size of 13.1 cm in width and 19.1 cm in height, which was edited and published by Shin Tae-sam in 1961. In the case of < Honggildongjeon >, the edition of circa 1956, which was republished by Adanmungo, was used. The Sechang Seogwanbon Edition < Cheonggeun > has a special meaning in terms of the publication period as well as the consciousness of the publisher who is the author of the typeface. This is also the case with the Gyeongseong Seogwan version of < Honggildongjeon >. < Honggildongjeon > and < Choegounjeon > have a common denominator in the six patterns such as ①'Parents' Pregnancy- Birth', ②'Extraordinary Birth of a Boy', ③'Expulsion or Escape from the Family', ④'Extraordinary Heroism', ⑤'Conflicts between the Father and Son' and ⑥'Confrontation with the State'. Based on this, I investigated the representation of spatiality of 'family' in the two works, and examined what kind of psychological action 'childbirth(得男)' causes inside the works and how this leads to 'the conflict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Behind the mentality of a cold blooded father who abandoned his son, there is an 'extended father-son conflict' behind the conflict between the hunger and the world around the son, which is a reflection of the 'fear of a childbirth'. Furthermore, since both narratives have 'marriage', a formal sexual union at the threshold of fear and conflict, I borrowed Georges Bataille's concept of érotisme as a psychological working principle and read both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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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수현 ( Choi Sue-hy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4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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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국문장편소설 <창란호연록> 속 장우의 차실(次室) 양난주의 형상화 양상을 살펴보고 그러한 형상화 방식의 의미와 기능을 규명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대부 출신 여성임에도 창기로 팔렸다가 속량을 통해 신분을 회복하는 양난주를 주목하고자 한다. 양난주는 신분 회복을 위해 손님으로 온 이와 적극적으로 결연하는 창기로도 그려지기도 하며, 속량시켜준 남성과 그 정실의 부부 관계를 위해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남성을 치료해주는 길 위의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혼인을 통해 가문 안으로 편입된 후에도 죽을 위기에 처한 정실을 구하기 위해 집밖 공간으로 나가는 것을 감행하는 차실(次室)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창란호연록> 속 양난주의 형상은 이 작품이 정조(貞操)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실리를 추구하는 사고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또한 이 같은 양난주의 형상은 일부다처 상황 속에서 남성이 마음을 나누어 제가(齊家)를 바로 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투기하지 않는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양난주 형상은 현실적 방법을 조력의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실감 조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상층 여성인물과 하층 여성인물의 조력 방식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에서 여성 인물의 역할 확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The objectives of this study were to examine the figuration pattern of Nan-ju Yang, the second wife of Jang-woo in the Korean novel “Changranhoyeonrok” and to understand the meaning and function of such a figuration method. This article focused on Nan-ju Yang who was sold as a prostitute even though she was born in a noble family and then recovered her status through redemption. Yang Nan-ju was described as a prostitute who actively formed a relationship with a customer to recover her social status. Moreover, she was portrayed as a prostitute who took care of a man who was in danger of dying while she was hiding for the marital relationship between the man who redeemed her social status and his first wife. She was also depicted as the second wife who left the house to rescue the first wife even after she was a part of the family through marriage. The figure of Nan-juYangin “Changranhoyeonrok” emphasized life than fidelity(貞操), which revealed that this novel valued practical interest. It also showed that this work was associated with the Yeohang class among various readers. The figure of Nan-ju Yang was meaningful in terms of revealing the difficulty of men in managing the wife and concubine peacefully and the hardship of women who had not to be jealous in a patriarchal society at the same time. The figure of Nan-ju Yang used a realistic method to assist others, which contributed to making it more realistic. Moreover, it was meaningful in terms of expanding the role of female characters because she simultaneously carried out the assistance methods of the upper and lower cla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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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광민 ( Park Kwang-m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8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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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 연구는 중국 正史의 많은 기록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도 적지 않은 史實을 확인하고 行間을 읽을 수 있는데도 한반도 內한사군 존재설이라는 고착된 인식은 백년이 넘도록 우리고대사 연구의 족쇄가 되어 왔다.
朴趾源은 1780년 『熱河日記』 6월 28일 條에서, “오호라! 후세 사람들은 地境을 상세히 살피지도 않으면서 망녕되게도 漢四郡地를 모두 압록강 안쪽으로 국한하여 事實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며,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고는 마침내 그 안에서 다시 패수를 찾는다. 어떤 이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하니 이는 조선의 옛 疆域을 싸워보지도 않고 쪼그라들게 한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金富軾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寶藏王7년 條에 柳公權(중국 788∼865)의 소설을 인용하여, “駐蹕의 戰役에 고구려가 말갈군과 바야흐로 40리에 잇닿으니 唐太宗은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척후가 보고하기를, 六軍이 고구려 공격을 받아 거의 모두 떨치지 못할 때 英國公 휘하의 黑旗軍마저 포위당했다는 소식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다고 하니 두려워함이 저와 같았다.”라고 하였는데,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면 어찌 감히 “황제가 크게 두려워했다”는 표현을 썼겠는가. 백제본기 온조왕 建國記끝에는, “처음에 帶方故地에서 나라를 세웠다. 요동태수 公孫度가 그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했다. (후에)東夷强國이 되었다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여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김부식도 자료가 부족해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며 史實을 밝히고자 노력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중국 正史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서 문장속에 담긴 行間을 읽어,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 및 패수와 鴨水의 위치 등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究明해 보고자 한다. 광개토태왕훈적비 기록에 근거해 본문 중의 고구려 '평양'은 '平穰'으로 표기한다.


A number of facts on the ancient Korean history are found in various texts of official Chinese history and in the articles of Samguk Sagi (『三國史記』) and Samguk Yusa (『三國遺事』). However, over more than a hundred year, the theory of Hansagun (漢四郡, Four Commanderies of Han) within the Korean peninsula has been widely accepted, even though it has major flaws.
In his book Yeolha Ilgi (『熱河日記』), on June 28th in 1780, Park Jiwon (朴趾源, 1737-1805) lamented, saying “Oh! The descendants limit the land boundary of Hansagun as under Amnok River (Yalu River), divide each part without checking its territory thoroughly, and designate Paesu River inside of it again. Some says Amnok River is Paesu, and others say it is Cheongcheon River or Daedong River. All diminish the domain of ancient Joseon(Gojoseon), without a battle.”
Kim Busik has been regarded as a figure who was obsequious to China and who diminished Korean history in his book Samguk-sagi (「三國史記」,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However, in the section/entry of the 7th year of King Bojang (寶藏王) in Goguryo Bongi (「高句麗本紀」), he quoted the novel of Liu Gongquan (柳公權, 788-865) and said, “At the Battle of Mount Jupil (駐蹕), Emperor Taizong looked nervous facing the Goguryeo force within 10 miles away. In addition, while six of his troops were attacked and pushed back, scouting soldiers reported that the troops under Duke of Ying (李世勣, Li Shiji) were surrounded by the Goguryeo. Then, the emperor was frightened and finally decided to retreat. It filled him with dread like that. This fact was neither mentioned in Xintangshu (『新唐書』) nor Sima Guang's Zizhitongjian (司馬溫公, 『通鑑』) and it was surely intended to avoid disgrace of their motherland.” If Kim Busik was truly an obsequious person, why did he use the expression “the emperor was frightened”? According to the end of the article on early King Onjo in「Baekje Bongi (百濟本紀)」, he quoted, “At first, a kingdom was established at Daebang Areas (帶方故地). Gongsun Du (公孫度), the administrator of Liaodong, gave his daughter as King Onjo's wife. (Later) it became a powerful kingdom of Eastern Yi (東夷强國). It is not certain which one is right.” He made it clear when he didn't know. Kim tried to clarify the facts even by quoting Liu Gongquan's novel due to the lack of historical records. This article tries to reveal the facts on the Korean ancient history, such as the domains of ancient Joseon and Goguryeo, and the locations of Paesu (浿水) and Arisu (鴨水), by examining the various records in official Chinese history books and reading between the lines of each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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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경록 ( Kim Kyeong L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1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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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쟁과 외교는 국가의 중요 행위로 안보와 국익이란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러한 국가행위는 시대를 경험한 조선인에게 강인하게 각인되었으며, 역사적 사실과 기억의 전승이란 측면에서 근거와 파생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친명정책을 천명함으로써 안정적인 국가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고, 대외적인 위협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런 조명관계는 명에서 제시한 사행과 사신접대라는 외교제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행과 사신접대는 실무 외교관이었던 역관이 활동했다.
홍순언 이야기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등장한 이후 다양한 전승과정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허구적인 문학의 표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전승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점은 조선이 경험한 전쟁과 평화였다. 명군의 참전은 북경에서 이루어졌으며, 만력제의 최종결정이 중요했지만, 병부상서의 직책을 수행한 석성이 북경에서 활약하였다는 점이 감안되었다.
역사의 사실과 문학의 전승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역사의 사실로 홍순언 이야기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그럼에도 임진전쟁을 경험한 조선인들이 기억하고 전승하려 하였던 시대의 정서와 감정은 전쟁을 극복하고 새로운 평화를 지향했다. 전쟁과 평화를 경험하고 기억하여 새로 전승하려 하였던 조선인의 시대정서는 자연스럽게 문학에서 홍순언 이야기와 같은 전승으로 이어졌다.


During the Joseon, war and diplomacy were implemented as important acts of the state to achieve the national goals of security and national interest. These acts of state were strongly imprinted on Joseon peoples who experienced the war and led to the transmission of memories and facts of history. Joseon laid a stable foundation for national governance and prepared for war with pro-Myeong policies in the M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This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the Ming was operated by the diplomatic system of envoys and envoys reception proposed by the Ming. The role of an interpreter, who was a working diplomat, was important in the diplomatic system of envoys and envoys reception.
The story of Hong Soon-eon has been handed down in various ways since its appearance in Yoo Mong-in(柳夢寅)'s < Eouyadam(於于野談) > and through the transmission process, the story has expanded beyond historical facts to represent fictional literature. What had a great influence on this transmission was the war and peace experienced by Joseon. The final decision of the Emperor Wanli(萬曆帝) in Beijing was important for Ming's participation, but the Shi Xing(石星) as minister of the Board of War was considered.
The facts of history and the transmission of literature are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As a fact of history, the story of Hong Soon-eon is almost fictional. Nevertheless, the emotions and emotions of the period that Joseon peoples who experienced the war tried to remember and inherit were aimed at overcoming the war and new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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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연진 ( Lee Yeonj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5-24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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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영조대 현직무신에게 무경학습을 장려한 전경무신(專經武臣)의 친림전강(親臨殿講) 제도 규정과 그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법전규정과 영조대 실제 운영사항이 기재된 『전강등록(殿講謄錄)』을 중심으로 세부운영상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하고 영조대 전경무신 제도가 어떠한 배경에서 활성화되었는지 그 의미를 논의해보고자 하였다.
전경무신은 매년 분기별 4차례, 무경칠서(武經七書)에 대한 이해능력을 평가받아야 했다. 국왕은 친림전강의 방식을 통해 주기적으로 전경무신들과 대면하여 무경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묻고 자질이 있는 무신들을 계속해서 양성해갔다. 우등자에게는 누적성적에 따라 포상하였다. 연속 세 차례 우등자에게는 가자(加資)나 승륙(陞六)과 같은 인사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포상하였다. 연속적으로 우등한 경우가 아닌 경우, 숙마(熟馬) 등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누적성적에 따라 차등 시상하여 학습을 장려하였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시행하거나 정도에 따라 파직하였다.
당파 간의 싸움에서 왕위에 어렵게 즉위한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료재교육 및 관리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영조는 직접 대면하여 관료들의 견식(見識)을 알아볼 수 있는 친림전강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친림전강은 관료를 계속 교육하고 몸소 군사(君師)로서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었고, 영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는 영조대 각종 전강의 재정비 및 절목(節目)의 반포로 이어졌다.
무신재교육을 위해 영조는 전경무신 제도를 활성화하였다. 재능있는 젊은 무신을 선발하여 주기적인 평가를 통해 무경지식을 계속 배양해가는 시스템을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인재양성 시스템은 국왕의 학문적 탁월성과 조선사회의 학문적 성숙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explore a governmental policy called “Jeongyung-Mooshin (專經武臣,)” which is carried out by King Yeong-jo(英祖). The main text is based on 『Jeon'gang-dengrok(殿講謄錄)』 during King Yeong-jo(英祖) Regime. This research tri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s and discuss the meaning of the policy in what background it was activated.
Jeongyung-Mooshin(專經武臣) had to take oral tests regarding the Seven Military Classics(武經七書) every four seasons each year. If they achieve high scores, they could be rewarded with a horse or promotion. On the other hand, those who failed to the test, they could be punished even to losing their post.
In order to stabilize the unstable political situation such as a partisan fight, King Yeong-jo strengthened the royal authority and actively sought education measures for military officials. The king utilized Jeon'gang(殿講) carried out by king in which he could examine their knowledge and insight by face-to-face examination. Jeon'gang which took place every four time each year was the right method for the king to recognize their talent and make them study periodically. Such a in-service education for military officials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king's academic excellence and academic maturity of Joseo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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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성식 ( Jeong Seong Si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1-26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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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초기에 삶을 영위한 변계량의 역사의식을 고찰하는 데 있다. 조선 초기는 혁명을 통한 창업기와 새로운 왕조의 건국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수성기를 함께 맞이하는 때이다. 변계량은 고려 말 조선 초기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맞이하여 특색있는 역량을 보이며 한 시대를 이끌었던 대표적 유학사상가들의 문하에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학문을 습득함으로써 유학의 학통을 계승하며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변계량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대는 수성기로서 시대 여건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소중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안정된 시스템 운영과 통치 질서의 확고한 모습을 정착시키는 것이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가 개창되는 창업기에는 전반적으로 재상중심론이 우세했던 때였다. 이 시기 재상중심론을 주도하였던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그는 창업기라는 현실 상황에서 국가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비하는 데 있어서 바로 현인정치에 입각한 민본정치의 사회적 구현을 기대하였다. 정도전은 임금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아무런 제한없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운용하는 전제정치 대신 현명하고 재능있는 인물이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정무를 관장하여야 한다는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변계량은 이와 달리 수성기라는 새로운 변화 현실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주인 태종이 즉위함에 따라 군주중심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임금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야 하며, 권력의 집중을 통해서만이 왕조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변계량은 왕실의 입장에서 가능한 모든 위험요인을 제거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변계량은 인재의 선발을 정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재가 얼마나 많고 적은지에 따라 세도의 척도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재등용을 보다 치밀하게 진행하려면 불법으로 진입하는 길을 엄격히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f Byun Gye-ryang, who led life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 early Chosun Dynasty was the time to celebrate the founding period through the revolution and the Suseong period of inheriting and developing the founding ideology of the new dynasty.
In the wake of the historical upheaval of the early Chosun Dynasty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Byun Gye-ryang made efforts to study by acquiring studies through active activities under the leadership of representative Confucian thinkers who led the era.
In the era when Byun Gye-ryang was active in earnest, it was considered precious to promote stability due to the conditions of the times as the Suseong period.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it was required to establish a stable system operation of the country and a solid state of the governance order in name and reality. During the founding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the theory of minister-centeredness prevailed in general.
It was Jeong Do-jeon who led the theory of finance-centeredness during this period. He expected the social implementation of civilian politics based on sage politics in establishing a new political system of the country in the real situation of the founding period. Jeong Do-jeon tried to firmly maintain the belief that the most powerful and capable person should be in charge of political affairs for the benefit of all the people instead of the tyranny of hereditary monarchs.
However, Byun Gye-ryang strongly insisted on the theory of monarch-centeredness as Taejong, a powerful monarch, ascended the throne based on the new reality of the Suseong period. Therefore, all power must be concentrated on the king, and only through the concentration of power can the dynasty be preserved. Byun had to find ways to supplement the intention of governance because he had to remove all possible risk factors from the royal family's position.
Byun Gye-ryang thought that the selection of talent should be precise. This is because the scale of power depends on whether there are many or few talents. It was argued that in order to accurately select talent, it was necessary to block the path to illegal entry and omit to consider the number of years in government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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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지준호 ( Chi Chun-h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9-29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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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보편적인 성품이며 자질을 의미하는 덕(德)은 공자(孔子) 사상을 비롯한 유학(儒學)의 도덕적 실천성을 규명하는 핵심 범주이자 개념이다.
『논어』를 비롯한 “사서(四書)”에서는 덕(德)에 관한 매우 다양한 용례들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덕(德)과 관련하여 『논어』에서는 다양한 수사적 표현이 등장하고, 『맹자』 등 후대의 사상사적인 발전과정에서 덕(德)은 보다 세분화되고 구체화되고 있다.
또한, 덕(德)은 도(道)와 구별되는 범주이기 때문에 양자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엄격히 차별화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구별을 이끌어내는 기준이나 경계가 일부 모호하기도 하다. 따라서 용례 분석을 기초로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하여야만 덕(德)에 관한 종합적인 개념과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사서”에서 제기되는 대덕(大德)은 덕(德)이 지향하는 가치이자 대인(大人)이 체득한 핵심적인 최고의 도덕적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대덕(大德)은 천리(天理)를 이해하고 천(天)과 합일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천덕(天德)의 의미를 포괄하고도 있다.
“사서”는 유학의 중심적인 사유 전거로서 도덕철학으로서의 유학의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사서”의 용례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대덕(大德)”이 표방하는 대(大)와 소(小)의 의미는 전체와 개별이라는 형식적인 구분으로부터,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 또는 지향점과 지양점을 차별화하여 학자가 그 근본에 뜻을 두는 것이 학문의 관건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Virtue, which means a universal character and quality of human beings, is a key category and concept that investigates the moral practicality of Confucianism, including Confucius' ideas.
A wide variety of examples of virtue are presented in 'Sishu', including 'Analects'. In particular, in relation to virtue, various rhetorical expressions appear in 'Analects', and they are more subdivided and embodied in later ideological developments such as 'Mencius'.
In addition, since virtue is a distinct category from Tao, the two should be strictly differentiated in terms of relative, but rather, the criteria or boundaries that lead to such distinction are somewhat ambiguous, so the overall structure must be understood based on case analysis to derive a comprehensive concept and meaning.
The great virtue, which is raised in 'Sishu', describes the value that virtue aims for and the core and highest moral level that the great person has learned. In addition, the great virtue also encompasses the meaning of haven's virtue by suggesting that it can understand the reason of haven and it can be united with haven
'Sishu' is the central reason for Confucianism and shows the academic status of Confucianism as a moral philosophy. The meaning of 'great' and 'small', which are advocated by 'the great virtue', derived from the analysis of the use cases of 'Sishu', also emphasizes that the key to learning is for scholars to put their will at the root by differentiating moral and immoral or a point of direction and a point of avoidance from the formal distinction between the whole and individ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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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종우 ( Yi Jongwoo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1-31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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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미발과 정(靜)의 관계에 대하여 양자가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미발을 정중동(靜中動)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본래 미발은 『중용』, 정은 『예기』의 「악기」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그러한 미발과 정에 대하여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이라고 주희가 해석하여 서로 연결시켰다. 이러한 미발과 정의 관계는 중의 상태에 있을 때를 의미하지만, 그는 미발뿐만 아니라 정시에도 부중(不中)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발의 중은 41세, 부중은 50세 이후에 말했는데 그것은 중이 있다면 부중도 있다고 훗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중의 미발과 정의 상태에서 공부가 필요한데 그것이 존양이라고 말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부중의 미발과 정의 상태에서도 공부가 필요한데 그것이 함양이라고 말했다. 중의 미발시 공부로서 존양의 구체적인 공부가 계신공구라고 주희는 여겼다. 하지만 그는 미발시에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한 미발은 최상의 경지로서 중의 미발을 의미하고 순선이 보존되어[존양(存養)]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요순과 같은 성인 뿐만 아니라 중인도 본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일지라도 이발과 동의 상태가 되면서 부중절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이 다시 미발과 정의 상태에서 부중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존양공부가 필요하다고 주희는 여겼다.


Zhu Xi said that the Not-Yet Aroused (wei-fa, 未發)state, (the state of the Heart&Mind before expressing) and quiet of Mind (the Heart&Mind) are the same, by contrast, also different, meaning motion inside quiet. The Not-Yet Aroused State of the Heart&Mind was firstly written in the Doctrine of Mean and quiet in the “the Article of Music” in the Book of Rites, and Zhu Xi related them. Their relationship means zhong 中(to become centered), by contrast, he thought that they have buzhong 不中(not to become centered). Zhong was written at age 41 and buzhong said since at age 50. This means that if the stat has zhong, will also has buzhong, according to his thought. Therefore, he thought that caution and apprehension is necessary at the state, and careful sincerity at the motion is also necessary at the quiet. As Way is never separated with me, caution and apprehension and careful sincerity cannot so. Also, quiet and motion are not divide and so they are related. But he supposed that self-cultivation at the Not-Yet Aroused State of the Heart&Mind is not necessary. This is at zhong and pure good, so he said so. Both at the Not-Yet Aroused State and quiet of the Heart&Mind are not necessary. However, he said preservation of original mind at the state because zhong at the state can be change to buz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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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안영 ( Jang An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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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87년 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 4편을 살펴본 것이다. 이 표류 기록은 1687년 9월 3일 출항한 이후부터 1688년 12월 17일 송환된 일까지 모두 1년 3개월에 걸친 내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동일 사건에 대한 표류 기록이 4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영록(知瀛錄)』,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주영편(晝永編)』에 기록된 이야기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건은 크게 「김태황 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과 「고상영 표류기(高尙英漂流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영록』, 『해외견문록』은 '제주진무(濟州鎭撫) 김태황'의 이야기로, 『탐라문견록』, 『주영편』은 '제주 주민 고상영'의 구술로 구성되었다.
4편의 기록은 모두 표류민들이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저자에 따라 서술의 차이점이 있었다. 각 자료를 살펴보면 『지영록』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송환 과정과 사후 조치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있었고, 『해외문견록』은 해외무역에 대한 관심 가운데 선박의 기록이 두드러졌고, 『탐라문견록』은 안남의 삶과 민심을 엿볼 수 있었고, 『주영편』에서는 안남의 지리(地理) 내용과 저자의 평가와 함께 기록되었다는 부분에서 각각의 특징이 드러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서술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특징이 드러났던 점은 기록하는 사람의 저술의식이 담겨있어서였고, 또 표류민의 구술로 된 체험 특성상 말하는 이에 따라 시선이 달리 표현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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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미란 ( Kim Mi-ra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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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중반 관료이자 문인인 石梧 尹致英(1803∼1858)을 19세기 북한산 유람의 주요 양상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고, 『石梧集』(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된 그의 산수유기 19편 가운데 북한산 유기 9편을 취합하여 분석하고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환로에서 발생한 정치적 부침으로 인해 유배기를 중심으로 사환기의 유람과 해배기의 유람으로 양분되며, 동행자의 유무에 따라 두 시기의 주요 활동과 정서적 분위기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사환기의 유람이 형제와 조카를 비롯해 벗이나 손님들과 함께 즐겁고 화락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이에 대한 묘사에 치중했다면, 해배기 이후의 유람은 유배의 과정에서 얻은 숙병으로 인해 주로 홀로 유람하였으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주관적인 입장에서 느낌이나 감회 등을 술회하는 데 집중하였다. 구성 방식과 표현상의 특징에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구성 방식과 표현방식의 주요 양상인 구성의 단편화와 간략화 등에서 그 맥을 같이 하며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인용과 열거를 통한 비유적 표현 등도 19세기 유기 문학에서 현격히 증가한 비유적인 표현 등과 함께 궤를 같이하면서 유기의 객관성 및 사실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寫實美를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인근에 한정된 勝景과 名所의 탐방, 그리고 暢神을 통한 治癒의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석오의 북한산 유기 전편이 모두 거주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승경이나 주변의 명소를 일회적으로 탐방하기 위해 진행된 단일화된 유람이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같은 시기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을 보여 준 박윤묵이나 한장석 등과 같이 한두 차례의 유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는 석오가전 생애에 걸쳐 도성과 성북의 외곽에 거처하며 일상적으로 근거리에 한정된 승경과 명소를 빈번하게 유람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석오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주요 양상의 하나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람이 일상 속의 근거리 유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매우 크고, 또 구체적인 실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한 사람이 기록한 북한산 유기로는 가장 많은 편수인 6편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산 유기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 또한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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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소영 ( Park S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8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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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46년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편찬 배경과 항목을 제시하고, 그중 <절의>, <효자>, <열녀> 항목에 수록된 인물 사례와 행적을 연구한 논의다. 『중정남한지』는 오늘날 경기도 광주(廣州)지역의 사찬지리지로, 13권에 달하는 현전하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광주지(廣州志)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간 지리지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과 지리학, 넓게는 역사인류학 분야에 중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통지리지 양식, 즉 관찬지리지에 한정 지어 본다면 이는 타당한 결과겠으나, 조선 후기 사찬지리지가 확대되고 지리지 내 항목과 내용이 다양해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리지라는 양식은 보다 넓은 학문 분야에서 재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 한 실례로서 『중정남한지』를 주목할 수 있다. 남한지(南漢志)라 이름한 데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현장을 바탕으로 서술되었기에 그 수록 양상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중 특히 절의, 효자, 열녀 등 인물(人物) 항목에 주목한 까닭은, 여타 지리지에 비해 인물과 사례가 많고 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몇몇 인물들이 광주 지역과 관련한 전란(戰亂)의 아픔과 기억을 간직한 인물들이 선정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절의(節義)는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자연적 지형 공간이라는 데서 나아가 의미를 지닌 심상적 공간으로서 전환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병자호란(1636)과 관련한 김상헌, 정온, 삼학사(三學士) 등의 행적을 수록하여 광주에서 생장(生長)한 인물은 아니지만 충절을 지킨 인물임을 밝혔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의 경우, 각각 20명, 18명으로 많은 숫자의 인물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그 인물 유형 또한 전형적인 사례들이 많지만, 광주 지역의 효자와 열녀 인물군과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내용과 제재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고 보고,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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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영문 ( Joung Young-moon ) , 하경숙 ( Ha Kyoung-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1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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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류는 질병과 싸웠고, 그 시간을 지나 현재로 왔다. 역병은 강한 전파 속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여러 불안과 공포의 요소로 작용한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역병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 역병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 죽음에 대한 목격과 공포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상세히 형상화되어 있었고, 시대적 상황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단순한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역병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경험하고, 생계(生計)를 잃고 방황하는 삶의 모습, 차별과 배제의 현상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역병이 확산하면서 사회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전염이 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여준다.
고대 국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보여주는 '처용설화'에서는 '감염', '간병과 기도', '치유'의 순간만 기록으로 남았다. 조선에서는 '이성(理性)'과 '기록(記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순간들을 기록하였다. 과거에 맹위(猛威)를 떨치다 사라진 전염병은 시대를 달리하여 변이되어 돌아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코로나19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염병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특질, 치유에 대한 염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역병을 극복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병'은 그 어떤 이야기에 비해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의 서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단순히 고난을 참아내며 고통과 괴로움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극복 방안을 생각하고, 참혹함 속에서도 선의는 존재한다. 사람들은 절망과 참혹함을 말하기보다 희망(希望)과 선의(善意)를 말하고, 이러한 인식은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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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지현 ( Kim Chi-hyo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5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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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은 조선, 일본, 명의 운명을 좌우한 16세기 말 발발했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전쟁 중 정유재란 당시 북경 사신이 남긴 사행록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신들이 명 조정에서 행했던 외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임진전쟁 당시 북경 사행을 다녀온 사신 중에서 류몽정, 정곤수, 정철, 최립, 민인백, 류사원, 권협, 허균, 이수광, 이상의, 이항복, 이정구, 황여일 등이 사행록을 남겼으며, 사행록은 대략 20여 편이 전한다. 이 사행록 중 정유재란을 중심으로 북경에서 사신들의 외교활동을 사행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예부의 관원이 아닌 다른 관원들을 직접 대면하고 청원 등을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시이면서 명조정 내에서의 주전파와 화의파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에게 유리하게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교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으로 복귀 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정사의 이름으로 정문을 만들어 예부 관원뿐만 아니라 명 조정의 조현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던 과도관 등을 길에서 만나 직접 당시의 정황이 담긴 정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 북경으로 갔던 사행은 임진전쟁 이전의 외교활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명 조정의 동향을 주시하고 명 조정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조선의 상황을 적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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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현미 ( Kim Hyunm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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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병을 했던 명(明)측 인사가 남긴 기록을 통하여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있는 '임진전쟁'의 실제 양상과 각국 입장에 따른 임진전쟁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하여 파병 명군에 의해서 지어진, 그리고 임진전쟁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조건을 만족하는 기록인 가유약이 집필한 「釜山平倭碑銘」(1599.10 작성)을 살펴보았다.
평왜비명은 현재 『선조실록』 32년 (1599) 10월 1일 조에 '가유약이 초고를 지었다'며 접반사(接伴使) 한술(韓述)이 보고한 형태로 전문이 소개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또한 완성된 비(碑)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釜山平倭碑銘」 두 가지 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이본의 차이를 비교하고 글자의 출입, 배치의 차이 등을 살펴봄으로써 파병된 명군(明軍)인사가 이 임진전쟁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 측의 실제 '비명 제작'이라는 편집을 거쳐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양자를 비교한 결과, 구성상의 차이와 내용(특히 다른 글자들이 쓰이거나 포함된 면에서)의 차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상 일종의 액자 구조로 되어있는 실록본(實錄本)은 이 글이 지어진 외부 맥락을 소개함으로써, 비명(碑銘)의 실제 저자인 '가유약'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곧 이 비문(碑文)이 명군(明軍)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유약' 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라는 부분도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쓴 글 때문에 국가 사이에 어떠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글을 쓰게 된 책임을 맡은 개인에게 돌릴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기 위한 가능성도 생긴다.
글자 출입에 의한 차이에서 유의할만한 것은 파병 명단을 밝히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초고인 실록본에는 '水'자가 빠져있지만, 결과본인 비명본에는 '水'자가 추가되어 있고 이것이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서 적군을 물리친 부분과 이어져, 파병된 명군이 지상에서는 물론 해상 전투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후, '비문(碑文)'이라는 조건 하에서 부산평왜비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화하여 보기 위해 타 비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임진전쟁에 파병된 명군이 주체가 되어 지은 비명인 장양상(張良相)의 남해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와의 비교를 통해 파병 명군들의 임진전쟁 관련 전적비(戰績碑)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임진전쟁에서 싸웠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가 황제의 명을 따라 임진전쟁에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좋게 만들었는가'로 요약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다음, 조선인에 의하여 지어진 임진전쟁 관련 비문(碑文)과의 비교를 해보았다. 평왜비가 위치하던 부산 지역에 있는 조선인작 임진전쟁 관련 금석문으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1670)인데, 이 글과의 비교에서 조선인들이 임진전쟁 관련 비문을 제작하는 내용의 취택 기준과 비문 내용의 수집 과정 특성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임진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그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리고 조선인이 비를 건립하는 경우, 비석에 수록 혹은 누락 될 내용의 기준은 '실재(實在)'성 이다. 실재성의 점검을 위해 비를 세우는 자들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가승(家乘)과 같은 검증 기록을 참조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에서, 파병 명군인사에 의해 지어진 평왜비명은 임진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서 총괄 평가의 마음으로 내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유약이 그려내는 임진전쟁은 명나라 황제의 '상황 판단과 정의 수호를 위한 마음'에 따른 명군(明軍)의 충성된 실천을 표현하되, 실제 사건의 충실한 묘사가 아니라 고사(古事)를 이용한 비유나 전쟁 후의 평온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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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영희 ( Jang Young H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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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세운 왕조이다. 조선조의 성군의 대표적 모델은 세종이다. 세종은 덕치와 제도를 결합하여 治道를 펴고 制度를 잘 운영하였다. 본고는 세종이 덕치를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운영하여 시대를 지도해 나갔는가를 규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에서도 덕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의 운영에서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 내용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의 관련 기록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본 논문의 주제에 따라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과전법에서의 시대적 병폐, 세종의 시대적 병폐의 문제 제기와 시대의 목표 제시, 공법에 의거한 정액제에 대한 여론 듣기를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이어서 조선조 정치체제와 의정부서사제 회복, 현신과 함께한 의사소통의 리더십으로 공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리더십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여민동락을 위해 공법을 완성한 의미를 조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개혁과 혁신의 리더십이다. 아버지 태종의 국정운영 방식인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회복한다.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요 의정부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의정부서 사제의 회복은 유학 사상에 충실한 것이며 그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가동하였다. 국가적 사안인 공법에 관하여 의정부와 육조의 논의를 거쳐 의정부에서 합의안을 올렸으며 세종은 이를 따랐다. 공적 시스템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치적 결단을 하였다. 그리고 주목한 바는 공법의 제정과 실행에 사안마다 신료들은 찬성과 반대를 자유로이 개진할 수 있는 열린 의사소통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소통의 리더십은 세종이 지도하는 방향대로 한발 한발 진전하는 개혁이었다. 공법의 제정과 시행은 마치 周나라의 文王과 같은 切磋琢磨의 개혁의 리더십이었다. 기존 체재에서 제후로서 한발 한발 개선해 나간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료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얻는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법 시행에 있어 부작용으로 임계치에 이른다. 그것은 척박한 토지를 소유한 백성의 비탄의 소리였다. 이에 세종은 신공법의 혁신안을 제안한다. 공법의 대전환의 계기로 세종의 혁신적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유학 사상은 조건과 때가 맞으면 백성을 위하여 혁명이 가능하며, 시대를 이끌 인물의 주도하에 정치와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제도가 오래되면 부패하고 비능률과 부조리로 인하여 현실과 맞지 않을 때는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폐단을 수정, 보완하는 개혁을 하든지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태조의 조선 건국을 守成하는 것을 넘어 세종은 改革과 革新을 이루어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의 교체 없이도 혁명적 혁신을 이룩하였다. 『周易』 「革」卦에 의하면 혁명이란 민심에 의한 것이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전의 대립적인 것이 소멸되어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다. 공법의 완성인 소위 田分6等과 年分9等의 法이 그것이다. 최종 법안은 어질고 뛰어난 세종이 비탄에 젖은 民心에 귀 기울이고 賢臣과 함께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설한 혁신적 리더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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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조영 ( Kim J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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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茶山 丁若鏞의 『中庸』에 관한 저술 중 『中庸自箴』과 『中庸講義補』를 중심으로 茶山이 「自撰墓誌銘」에서 『中庸』에 대해 언급한 7가지 논점을 통해 다산의 中庸觀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經學은 일반적으로 朱子學的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후기 丁若鏞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수용의 태도로 자신의 경학관을 제시하였다.
茶山이 「자찬묘지명」에서 『中庸』에 관해 제시한 7가지 논점을 살펴보면, 中의 의미를 주자와 같이 '不偏不倚無過不及'의 의미로 見地하고 있으나 주자의 中과 구별되고, 庸의 의미는 '능히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有常'의 의미로 파악하고 有常은 '恒常' '能久'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이 말하는 中庸은 '연속적인 실천성'을 강조한 특징이 보인다. '不睹不聞'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주체와 대상'에 대해 초점을 두어 主宰者로서의 上帝를 제시하고 '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며, '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隱微'는 暗處細事가 아니고 上天의 일이라고 하였으며, '喜怒哀樂之未發'은 喜怒哀樂의 未發이지 心知思慮의 未發이 아니라고 하여 喜怒哀樂과 心知思慮를 구분함으로써 情의 범위를 재해석하고 있다. '罟擭陷阱'은 잘못을 저질러 有司에게 형벌을 받는 것만이 罟擭陷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索隱'은 隱僻한 이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改而止'는 自修의 공부로 파악하여 내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道心人心, 唯一唯精'은 『荀子』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이기에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순자』가 인용한 本意를 따른다면 '道心人心'과, '唯一唯精'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같이 『중용』에 나타난 다산의 經學觀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으로 제시하였고, 현실적인 경세론의 입장으로 경학에 접근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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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지훈 ( Yun Ji 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3-28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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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오늘날 동일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두 마을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차이가 나는 배경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다시말해 본 연구는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접한 두 지역을 사례로 현대 언어문화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이 있는 설천면과 인접과 무풍면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와 신라의 변방 가장자리의 접경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신촌마을과 이남마을 사이에 소재하고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둘째, 조선 태종 14년(1414년), 신라계 무풍현과 백제계 주계현이 통합되어 무주현이 된 이래로 옛 신라의 일부 영토는 현재까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무풍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역적,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이남마을은 주민들은 가까운 설천장보다는 무풍장을 이용하고, 고개 넘어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주로 무풍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고대국가 백제의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촌마을 주민들은 나제통문 넘어를 신라땅, 혹은 경상도라고 인식하여 이남마을이나 무풍지역 사람들과는 통혼은 물론 교류도 거의 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고대국가에 정체성를 두고 오랜 세월 교류도 거의 없었기에 각자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보전되어 온 것이다.
넷째, 이남마을과 무풍면 사람들은 비록 오랫동안 전북권에 속해 있음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경상도식 언어문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신촌마을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전라도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하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와 분수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연구를 통해 현대 언어문화는 신라나 백제와 같은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부분 검증될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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