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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ANGSARON (The Western Histor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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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15
간행물 제목
154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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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한석 ( Ko Hanseo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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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서기 64년-80년에 발생했던 로마시의 화재와 이에 대한 황제들의 대응을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재난 담론이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정치적 격변기였던 이 시기에는 여러 원인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의 범위 역시 다양했다. 이에 대해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피해민 구제뿐만 아니라 소방 관련 법령 신설, 도시 재건사업 등 다양한 차원의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사료에서 이 시기 황제들의 대응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의 책임 소재 및 재난 대응에 대한 평가는 황제에 따라 극명히 다르게 나타났다. 유사한 형태의 재난과 대처 방식을 두고서도 황제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가 나타나는 까닭은 기록을 남긴 사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즉, 사가들은 기존 지배층과의 합의를 무너뜨린 황제들에게 재난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지운 반면, 보수적인 입장의 황제들에게는 보호자로서의 측면을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제정 초 로마의 재난 담론은 주로 지배 계급인 역사가들의 도덕주의적 입장에서 형성되었고, 새로운 황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변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담론 자체가 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민중에게 재난의 책임 소재나 대처에 대한 평가, 황제의 명성보다 중요했던 것은 재난에 대한 황제의 대처가 그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지였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political context of the disaster discourse by examining fires in Rome and the emperors' responses to them between AD 64 and 80. During this period, fires occurred with several causes in Rome, and the range of damage also varied. Roman emperors responded to these disasters actively at various levels, such as the legislation of fire regulations and urban reconstruction projects, as well as relieving victims by providing grains and spectacles.
According to the historical records, there were no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emperors' responses during this period. Nevertheless, the responsibilities for the fires and the appraisals of disaster responses arguably differed depending on the emperors' political attitudes.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conflicting evaluations of the emperors' responses were based on the political and social statuses of the Roman historians. In other words, historians directly charged emperors who broke the agreements with the ruling class for disasters, while emphasizing conservative emperors' role as guardians.
Therefore, the Roman disaster discourse was formed mainly from the moralist position of the ruling elite and was used to guarantee the political legitimacy of the new dynasty. However, such political discourse did not directly concern the life of urban people.
(Seoul National University / nuclear3310@snu.ac.kr)

저자 : 성백용 ( Sung Bai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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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 서유럽 기독교세계를 강타한 '타르타르의 공포'는 오래도록 유럽인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글은 세인트얼반스의 수도사 매튜 패리스의 연대기에 나타난 몽골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민한 베네딕투스회 수도사의 기록에서 타르타르인들의 이미지를 빚어낸 재료는 고대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신화와 전설이었다. 이들은 곡과 마곡, 이스마일 지파, 사라진 열 지파 등과 동일시되었으며, 엽기적인 식인귀로 묘사된다. 이 괴기스러운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는 묵시록적 또는 종말론적 의식 구조가 그 시대 지식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튜 패리스의 기록은 몽골인들이 그러한 상징세계의 견고한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The so-called 'furor Tartarorum', which struck the Christian world in Western Europe in the mid-13th century, has long represented a psychological trauma to Europeans.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images and discourses of the Mongols in the chronicle of Matthew Paris, a Benedictine monk from Saint Albans. The myths and legends inherited from ancient and Christian traditions shaped the images of the Tartars in the writings of this brilliant monk. They were identified with Gog and Magog, Ishmaelites,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and described as monstrous cannibals. These grotesque images confirm that the apocalyptic or eschatological structure of consciousness dominated among intellectuals of the time. Matthew Paris' record clearly shows that the Mongols were doomed to be kept in formidable prisons of such a symbolic world.
(Hannam University / sungby506@hanmail.net)

저자 : 고반석 ( Koh Bansu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9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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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세 시기 여러 정치체들의 접경지대였던 플랑드르 출신 방직공들의 잉글랜드 이주 연구를 통해 14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다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잉글랜드 이주민 연구에서 중세 후기는 이주민의 수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이유와 사료의 부족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기존의 플랑드르인 이주 연구는 이주의 동인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공업자들의 이주는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보편적 현상이었고, 이들을 이동하게 만든 동력에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환경적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북서부유럽 정치의 접경지이자 북유럽 교역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에서 산업의 변화에 따라 지배층에 저항할 정도로 성장했던 방직공들은 에드워드 3세의 보호장 발급과 같은 이주 수용국의 적극적인 이주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년전쟁 초기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플랑드르 백작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플랑드르 방직공들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당시 학살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착민과 어우러지며 잉글랜드 사회의 한 부분을 형성해 나갔다.


To date, scholarship on migration to England in the late Middle Ages has not received adequate attention. In particular, the migration of Flemish weavers has been treated as an incidental event in socioeconomic research, where the prevailing view is that the impact of their migration on the English economy was insignificant. In the 14th century, the Flemings were a prominent part of the immigrant community in England. In the 1330s, Edward III issued a letter of protection to bring Flemish weavers to England to help develop the textile industry. In the 14th century, backed by the Crown's patronage, Flemish weavers established textile businesses in England. The migration of Flemish weavers to England must be considered from various perspectives. Concerning Flemish migration to England in the 14th century, there was a “pull factor”, i.e., the Crown's immigration policy to make up for the population decline caused by the plague and attract artisans. This worked in tandem with the “push factor”, i.e., the political conflict within Flanders as a result of the Hundred Years' War between France and England. Flemish weavers banished by the Count of Flanders―who had maintained a pro-French line in the early days of the war―were mainly located in Colchester in eastern England and London. The English Crown supported Flemish weavers for economic reasons; this preferential treatment later led to conflict with native weavers, which ultimately resulted in the massacre of 1381. However, at the same time, the coevolution of migrants and natives was observed. For a variety of reasons, Flemish weavers influenced the economy and society where they settled.
(Chung-Ang University / kocmanse@naver.com)

저자 : 이성재 ( Lee Sungja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9-13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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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괴물과 기형에 대한 16-17세기 유럽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중세 시기에 괴물과 기형인은 경이로운 대상 혹은 신의 경고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 종교적 갈등 그리고 기형의 원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기형적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구경거리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장식되고 통제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희화화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무대에 세우는 '기괴한 쇼'는 정상인과 기형인 간의 우열 관계를 강조하는 행사였다. 당시 학자들이 기형인들을 해부하고 분류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학문의 체계 속에 이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내로 편입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배제이기도 했다. 기형인은 이렇게 기형화되었다.


This paper examined how Europeans' perceptions of monsters and deformities chang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through historical cases. In the Middle Ages, monsters and deformities were considered to be wondrous objects and divine warnings. However, this perception began to disappear through advances in printing, religious conflict, and research by scholars to find out the causes of deformities. At the same time, people with deformed bodies were degraded as objects of spectacle and curiosity. They began to be adorned and controlled by so-called 'normal' people and could only become meaningful objects when they were caricatured. A representative case is the story of the Colloredo brothers. The 'Freak Show' that put them on stage was an event that emphasized the superiority of so-called 'normal' people over deformed people. At that time, scholars also tried to dissect and classify deformed people for the same reason. Placing them in the academic classification system meant that there was no need to be afraid of them anymore. It can be said that they were included into society while simultaneously being excluded in another way. The deformed people were deformed in this way.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 capsoclee@naver.com)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8-17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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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Ⅰ, 재위 1558-1603)을 계승한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25)는 1609년 당시 국무상이었던 세실(Robert Cecil, 1st Earl of Salisbury, 1563-1612)의 추천에 따라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카운티의 식민을 제안했다. 당시 토지는 부와 권력의 기반이었던 만큼 얼스터 귀족들의 땅을 신교도 이주민들에게 할당하는 것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신교도 공동체가 얼스터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제안에 대한 런던 상인들의 반응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논문은 제임스 1세가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식민을 제안했던 배경과 런던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부와 런던 상인들 사이에 어떤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협의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Even after most of the revolts in Ireland that occurred during the Tudor dynasty had been suppressed, Ulster remained under the control of the powerful Irish nobility, and it was considered to be 'the hotbed of the last great rebellion' for the English people. However, after losing their Nine Years' War (1594-1603), the ruling nobility who could not withstand their downgraded status, numbering about 90, fled to Europe, and their territory was taken over by James I (1603-25), who succeeded Elizabeth Ⅰ (1558-1603). James I made a large number of English and Scottish Protestants migrate to that land, which was called the Ulster Plantation, and it may be the historical background for the emergence of Protestants in Northern Ireland today.
Since land was the basis of wealth and power in those days, allocating the land of the Ulster nobility to Protestant immigrants was a good way to weaken Irish resistance to English colonial reign and grow the Protestant community. However, the financial situation of England during the reign of James I made it difficult to achieve the colonization of Ulster as a whole. To secure the necessary funds and manpower, King James I proposed the colonization of Londonderry County, one of the six counties of Ulster, to London merchants, who had accumulated a strong economy at the time.
However, the reaction of London merchants was not at all favorable. This is because the natives, who were deprived of their land, were hostile to the English, and some of them became 'wood-kernes', thus plundering and assaulting the new settlers. It was also partly because the London merchants were in a difficult financial situation because they mobilized to set up a settlement on the North American coast across the Atlantic Ocean.
This essay examines the background of the proposal of Londonderry colonization to London merchants to facilitate the smooth progress of colonization, how negotiations were conducted between the government and London merchants, and what the outcomes of the negotiations were.
To properly understand the political turmoil of Northern Ireland, which has become a part of Britain today, it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history regarding the Ulster Plantation; further, as the colonization process carried out in Londonderry became the basis of the British overseas colonization policy, it is a good opportunity to look at Irish political conflict and British colonial policy from various angle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2-20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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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과 19세기 전반기 대표적인 정치·사회개혁운동세력이자 급진주의 세력이었던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상호 인식과 실질적 관계 및 상호 영향 관계를 추적해 봄으로써 링컨의 반(反)노예제 정치 행보와 내전의 발발, 노예해방선언의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른바 “링컨주의”의 실체를 검증해보면서 동시에 이러한 과정들과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노예제폐지론의 흔적과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역할을 추적하여 다시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링컨은 결코 노예제폐지론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노예제폐지론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위대한 해방자”로서 그의 철학이나 역사적 위상은 아주 모순적이다. 실제로 링컨의 반(反)노예제론은 가장 발전적인 형태를 갖추었을 때조차도 보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보상을 전제로 한 점진적 노예해방 및 아프리카 식민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대에 노예제폐지론자들은 링컨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방과 견제를 멈추지 않았다. 요컨대 링컨과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거리는 아주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링컨이 최초의 반(反)노예제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고 내전에 직면했을 때 내전을 노예해방투쟁이자 사회혁명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압박과 투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고 링컨에게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서 노예제폐지론을, 하나의 시대적 요구로서 노예해방선언을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리하여 링컨이 노예제폐지론의 사상적 세례를 받게 된 이후에야 노예해방선언은 가능했다.


This paper seeks to shed new light on the antislavery idea of Abraham Lincoln as 'Lincolnism,' his anti-abolitionism, and the importance of abolitionism in the rise of revolutionized Civil War by exploring the relationships and mutual influences between Abraham Lincoln and the abolitionists in the antislavery politics and the history of abolition. While current historiography primarily credit Lincoln as a “Great Emancipator” with the creation of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and the realization of antislavery politics, it is ironic and confusing that, as Eric Foner has said, Lincoln was not an abolitionist and never claimed to be. Indeed, even when Lincoln would finally contemplate emancipation, it was not the abolitionists terms: His ideal emancipation legislation would have three main features of gradualism, compensation, and colonization, all of which the abolitionists abhorred. In addition, Lincoln's conservative nationalism led him to differ so markedly from abolitionists in regard to Texas, the war against Mexico, the Fugitive Slave Law, the personal liberty laws, and emancipation in the District of Columbia. Therefore, abolitionists consistently mistrusted and so energetically vilified Lincoln. When Lincoln as the first antislavery President should lead the politics of the Civil War, however, the abolitionists could not keep alienating Lincoln, thus making a struggle to realize the abolitionist ideology and philosophy in Lincoln's politics of the Civil War. Lincoln did not have any power or justification to reject abolitionism as a zeitgeis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hon422@cnu.ac.kr)

저자 : 권윤경 ( Kwon Yun 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6-242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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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역사는 주로 대서양 노예제와 연결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노예해방은 사탕수수 단일경작 체제의 긴 역사 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일 뿐, 좀 더 장기지속적 관점에서 노예해방 후 식민주의 경제의 운영 방식과 설탕 경제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글로벌한 설탕 경제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프랑스령 앙티유를 이루는 두 섬, 즉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역사적 특수성에 주목한다. 두 섬은 아이티처럼 스스로 노예해방을 이룩하지 않았고, 이웃한 자메이카처럼 탈식민화 시대에 독립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령 앙티유는 노예해방 이후 프랑스 동화주의의 실험실로서 독특한 역사를 가진다. 이 글은 프랑스령 앙티유의 설탕 경제를 중심축으로 삼아 노예해방 후 새로운 노동 체제의 형성, 제당 경제 근


The standard narrative of the history of sugar often focuses on the horrors of Atlantic slavery. However, it is necessary to integrate the evolution of the sugar economy following emancipation into the longer history of the sugarcane monoculture system developed in the colonies, as the abolition of slavery was just one of the turning points in that history. This article positions the two islands of the French Lesser Antilles, Martinique and Guadeloupe, in the history of the global sugar economy, and investigates the particular path of these two “sugar islands” after the abolition of slavery in 1848. The two islands did not liberate themselves from slavery as Haiti did, nor did they become independent states like other neighboring sugar colonies. They have a unique history as a laboratory of French assimilationism. This paper examines how the white sugar elite, non-European workers and cultivators, and the colonial state in the two islands interacted in the tumultuous transformations of the sugar economy from 1848 to the present. It examines how the sugarcane monoculture system, which was assumed as the raison d'etre of colonial economy, conflicted with the ideals of emancipation and assimilation, and how a racialized labor system was established after the abolition of racial slavery. Ultimately, it aims to historically illuminate the problem of underdevelopment in the French Antilles and contextualize it within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racial capitalism.”
(Seoul National University / yunkwon@snu.ac.kr)

저자 : 송준서 ( Song Joonse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3-2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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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9세기 중후반부터 동아시아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면서 중국·일본·한 국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어 나갔다. 그들은 문화상대주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의 특성을 편견 없이 수용하기도 했지만 오리엔탈리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을 비정상적 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주로 인종주의·제국주의 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 외에도 동아시아 국가의 국내 정치·사회 상황 및 러시 아인들이 동아시아 현지에서 경험한 생활습관 및 환경의 괴리로부터 유발된 문화 충격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다만 19세기 중후반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대해서는 러시아나 유럽과 동급 문명으로 인식했고 동시에 극동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기도 했다. 이외에도 19세기말 극동지역으로 대거 유입된 중 국인과 한인에 대해서는 러시아화 정책과 지역 보건위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 는 황화론 인식도 대두했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다양한 동아시아 인식은 일 관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지정학적, 지경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각 인식틀 내에서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After Russia's active engagement in East Asian affairs began starting in the mid- and late-19th century, Russian intellectuals came to create images of China, Japan, and Korea as Russia more frequently contacted those East Asian countries. These Russian images of East Asia were formed based on multiple perceptions such as cultural relativism, the “Yellow-Peril” ideology, and Orientalism founded on racism and imperialism. In addition, both the chaotic socio-political situations in East Asian countries, especially China and Korea, and the cultural shock that Russian travelers experienced during their direct contact with Koreans and Chinese people certainly enhanced Russia's perception of Orientalism regarding those people and countries.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se various perceptions were not consistent, but rather contradicted themselves within the framework of each perception itself according to both the changing geopolitical situations in East Asia and the economic interests of the Russian Far East. Moreover, Russia did not maintain a consistent perception of East Asians but a selective one, as Russian intellectuals regarded Japan as a country on a par with Russia and European countries due to its recent military and industrial achievements, while considering China and Korea―which clung to Confucianism―to be “abnormal” and backward countries that lacked practicality, innovation, and dynamics. Russian perceptions of East Asia at the turn of the century were varied, contradictory, and selective rather than monolithic and universal.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 songjoo1@hufs.ac.kr)

저자 : 한해정 ( Han Hai-j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0-310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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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베를린' 만들기 과정과 대-베를린에서 후생복지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소개하고 있다. 베를린과 주변지역들을 통합하려는 오랜 노력은 1차 대전을 겪은 후 1920년 대-베를린 출범으로 실현되었다. 대-베를린은 의미 있는 실험장이었다. 지역 간 존재했던 격차를 줄이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하는 후생복지의 실험장이었으며, 지방자치를 보여줄 실험장이었다. 여기서 시장과 시행정위원회를 선출하는 시의회의 구성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보통선거제와 유권자의 높은 투표율 결과, 시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대-베를린은 후생복지를 확대시키는 시정사회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었다.


This article deals with the creation of 'Greater-Berlin' and the expansion of public welfare. The efforts to integrate Berlin with its suburbs bore fruit in 1920, after the First World War. The unified city, 'Greater-Berlin' thus became a meaningful testing-ground. Greater-Berlin was a municipal government that represented an experiment involving public welfare. The municipality had to provide public services and reduce social disparities between districts. The change in the Berlin city-council is worth noting here. Due to general suffrage and a heavy poll, Social Democrats had dominant positions in the city-council, which elected mayors and municipal-magistrates. The situations were then able to improve public services. In this way, Greater-Berlin served as a testing-ground for municipal-socialism.
(Korea University / hanhjung@chol.com)

저자 : 황혜진 ( Hwang Hye Je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1-3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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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친 영국 노인의학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재구성하고, 이 의료 분과가 갖는 주요한 특성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이 분야는 1935년 “노인의학의 어머니” 마저리 워렌이 구빈법 의료 시설 소속 환자들을 적극적인 의료 서비스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출발한다. 이후 목표 의식을 공유하는 일단의 의학 전문가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분야의 잠재적 효용에 주목했던 정책 결정가 집단이 힘을 보탰다. 1948년 국민보건서비스의 출범과 함께 노인과는 영국 의료 시스템의 일부로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았다. 본고는 20세기 후반 영국 노인의학의 구체적 모습을 결정한 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각각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먼저, 워렌을 위시한 이 분야의 '개척자들'에 주목한다. 이 1세대 노인의학자들은 이 의료 전공의 이론적 기틀과 실천적 규범을 마련했다. 두 번째는 구빈법의 유산이다. 전간기에 이미 효력을 상실한 이 법률은 노인의학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 및 원칙과 함께 물리적 기반을 이 의료분과에 물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보건성과 국민보건서비스는 영국의 노인의학이, 타국의 경우와 달리, 신속하게 제도화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생 의료 시스템으로의 편입은 때때로 그 운영의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었다. 노인의학의 초기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영국식 의료의 구체적 모습을 조망하는 한편 의료 및 의학의 역사적 성격과 사회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This article aims to trace the early history of British geriatric medicine, between the 1930s and the 1960s, and to identify the social and historical origins of the main attributes of the medical branch. In Britain, the specialty began with the tireless efforts of Marjory Warren, who took over the responsibility for chronic senile patients that had previously been accommodated in a poor law hospital in 1935 and tried to provide all of them with proper diagnosis and treatment. A group of medical professionals aware of the necessity of medical practice benefiting the old joined Warren to create a new medical specialty. Politicians and political decision makers, mostly based in the Ministry of Health, found potential solutions to the bed-blocking problem occurring in public hospitals from geriatric medicine. With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Health Service in 1948, geriatrics was officially incorporated into the new welfare system.
To have a clear view of British geriatric medicine,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hree major factors that shaped the new medical specialty in the mid-twentieth century: The first is the 'pioneers' of this field. Its founding members, including Warren, provided a blueprint of geriatric medicine, most of which was realized in the system of the NHS, and set up main principles and detailed practices for the specialty. The second is the legacy of the poor law. Although it was abolished around the birth of geriatrics, the law bequeathed norms about care of the weak as well as its facilities to this medical branch. Lastly, the Ministry of Health and the NHS offered a crucial chance to institutionalize geriatrics in its nascent state, which confirmed its existence as a distinct medical specialty in a nationwide system. Understanding the early history of geriatric medicine allows u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British healthcare system and to identify social and historical aspects of medicine.
(Yeungnam University / hjeanhw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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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기봉 ( Kim Gi-b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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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의 시대구분을 낳은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났던 포스트코로나 시대 “역사학의 미래”와 “미래 역사학”에 대해 고찰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지구에서 인류의 삶은 거시 기생과 미시 기생의 두 과정으로 전개된다. 코로나19는 인간의 거시 세계에 미시 세계의 코로나바이러스가 개입해서 일어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종래의 역사학은 그런 질병이 발생한 과정에 관한 역사연구를 인간중심주의에 근거해서 전염병의 역사로 서술했다. 하지만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바이러스와 같은 비생명체도 행위자로 보는 “물질적 전환”의 패러다임이 역사학에 요청된다.
인류세에 일어날 인류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류의 시간을 행성 차원의 깊은 시간과 얽혀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문명사와 자연사를 통합하는 새로운 역사학 모델이 나와야 한다. 지금 인류에게는 역사학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이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역사학 모델을 대체하는 “미래 역사학”을 모색해야만 하는 이유다.

저자 : 유성환 ( Yoo Sung-hw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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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시기, 특히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와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전역이 국제화되던 “제1차 세계화 시기”(기원전 1500-1200년)에 유행했던 감염병의 종류 및 전파·확산의 양상을 접근 가능한 문헌학적·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규명하는 데 있다.
단편적인 문헌학적 언급이나 고고학적 정황증거를 통해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의 감염병과 관련한 확정적 정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우주의 총체적 질서에 반하는 역사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장애나 질병 등을 조형예술을 통해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염병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분야는 미라에 대한 의학적 검시라 할 수 있다. 첨단 연구방법을 통한 왕족 및 일반인의 미라 검시를 통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주혈흡충ㆍ촌충ㆍ선모충 등 다양한 기생충과 결핵ㆍ소아마비ㆍ천연두ㆍ말라리아ㆍ흑사병 등과 같은 감염병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1500-1200년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걸쳐 국제화가 진행되었다. 국제화에 따라 감염병이 이집트ㆍ시리아-팔레스타인ㆍ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감염병의 국제적 확산, 즉 범유행은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간 발신ㆍ수신되었던 외교서신을 통해 그 실체와 규모를 확인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집트의 왕궁 터에서 발견된 소위 「아마르나 외교서신」에 따르면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발병한 감염병이 이집트와 히타이트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히타이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마르나 외교서신」에 언급된 감염병에 대해서는 말라리아ㆍ흑사병ㆍ야토병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잠복기 및 증상 등을 고려할 때 이들 후보군에 속한 질병으로는 문헌학적 증거에 묘사된 질병의 확산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감염병의 존재는 확정할 수 있으나 그 정체는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저자 : 이성재 ( Lee Sung-ja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10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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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유럽에 처음 나타난 매독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증상의 완화와 잠복기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병이 사라지고 있다는 낙관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종종 매독이 천재적 영감을 준다는 오해에 빠지기도 했다. 17세기에 들어 종교적 믿음이 사회 전체적으로 커지자 매독 환자는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수은을 통한 치료 노력이 가져온 신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더 큰 문제는 치료의 실효성에 있었다. 또한 예방 의학적 접근 역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17세기 말의 전쟁과 기근은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18세기는 인구가 국부의 원천이라는 생각 속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매독 문제에 개입한 시기였다. 특히 선천성 매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것은 1780년 파리에 성병 전문 병원인 보지라르의 창설을 가져왔다. 매독이라는 질병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 병원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매독 치료를 위해 모유의 형태로 수은을 사용한 방법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 여성을 실험과 치료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도덕적 비난은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병원이 보여준 매독에 대한 체계적인 의학 실험은 하나의 성과였다고 할 것이다.

저자 : 이현주 ( Lee Hyon Ju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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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A. 펜(Elizabeth A. Fenn)은 2001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폭스 아메리카나: 1775-82 두창 대유행』에서 18세기 미국독립전쟁 동안 유행한 두창이 실질적으로 전 북미를 휩쓴 팬데믹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펜의 책은 국지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두창 발발 케이스 간의 연관성을 추적해 거시적 관점에서 북미 두창 유행의 규모를 밝히고, 독립전쟁 기간 동안 두창 유행의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의학적 함의를 연구한 저작으로 18세기 미국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본 연구는 펜의 사학사적 공헌에 더해, 그러나 펜의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접근으로 그 방법을 달리해 18세기 북미 두창 유행의 시대를 재조명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전쟁기 영국군에서 의료인으로 활동한 미국인 충성파 의사 존 제프리의 기록을 중심으로 영국군 주둔지에서 두창 통제에 대해 살펴본다. 본 연구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제프리의 충성파로서의 여정과 그가 남긴 군사 및 의료 기록을 통해 봉쇄된 보스턴과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영국군 주둔지에서 두창 유행의 양상과 인두접종 실시 방법을 재구성한다. 특히 본 논문은 영국군 내 전투요원뿐만 아니라 기존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피난민, 종군민간인, 그리고 전쟁포로에 대한 영국군의 두창통제 정책과 인두접종의 사례를 발굴하는 것을 통해 전쟁기 군에 의한 두창 통제와 인두접종에 대한 논의가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특히 아동)을 포함하는 포괄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저자 : 권은혜 ( Kwon Eun-hy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7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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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재건기부터 현재까지 노예제 보상을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들과 조직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1990년대 이후에야 노예제 보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다. 사실 1865년부터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내전 중 연방정부가 약속했던 “40에이커”의 보상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며 스스로 운동을 조직했다. 이 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 보상운동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별해 각 시기의 특징과 대표적 인물을 소개한다. 재건기에서 대공황 시기를 대표하는 노예제 보상 운동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사이 칼리 하우스 주도의 전 노예 연금운동이다. 전 노예 연금운동은 노예노동과 내전 중 노예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임금을 연금으로 보상하는 입법을 지지했다. 민권운동 시기에는 오드리 무어, “흑인 선언”의 저자 제임스 포먼, 그리고 새로운 흑인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 단체 블랙팬서당과 신아프리카공화국같은 단체들이 1948년 유엔의 제노사이드 반대 선언 및 1952년 독일의 홀로코스트 보상의 사례에 착안해 노예제를 흑인 제노사이드로 정의하며 미국 정부를 향해 노예의 후손에게 지연된 노예제 보상을 이행하고 흑인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20세기의 대부분 노예제 보상운동은 가난한 흑인 대중을 대상으로 한 흑인 민족주의 집단의 급진적 요구로 인식되었다.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보상이 실현된 1980년대 말 이후부터 중간계급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주류 민권운동단체, 학계가 노예제 보상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미국은 노예제 보상의 필요성과 방법을 두고 논쟁 중이다. 노예제 보상 운동은 미국 사회의 진정한 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이자 희생자의 정의를 위한 사회운동이다.

저자 : 김철기 ( Kim Chulki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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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혁명의 원리를 저지하지 않으면 그 나라가 공포스러운 정치적 상태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견한 근거를 검토한다. 기독교와 기사도로 대표되는 유럽문명은 '숭고'와 '아름다움'이 결합되어 공포에 의존하면서 그 공포를 중화하는 관습 체계였다. 프랑스혁명의 원리가 이러한 사회 관습을 파괴하면, 공포를 중화할 기능도 사라지게 되고, 결국 국가의 공포스러운 작동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버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혁명 동조자들을 아름답지 못한 동물로 꼽았었던 돼지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사회 관습 중 오래된 것들만 옹호하고 비교적 새롭게 형성되는 관습의 존재와 역할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 18세기 영국은 버크가 말하는 '오래된' 유럽 사회보다 상업과 무역의 팽창으로 역동적인 사회에 가까웠고, 중간계층을 중심으로 '공손함'과 '세련됨' 같은 상업사회와 관련된 관습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크가 판단한 사회적 기반은 편협했고, 따라서 그가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공포를 예견했다고 보기 어렵다.

저자 : 이상덕 ( Lee Sang-du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2-23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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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위에는 미케네 시대로부터 성채가 있었으며, 상고기에는 헤카톰페돈과 고(古) 아테나 신전의 두 건물이 있었다. 이 두 건물 사이에는 하나의 제단만이 존재했다. 페르시아 전쟁 후, 파르테논의 전신 헤카톰페돈이 세워졌지만, 곧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만다. 약 30년이 지나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보고를 옮겨오면서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테네 전역에 아테네 제국을 선전하는 건축 활동을 개시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바로 파르테논이었다. 파르테논은 폐허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빠른 시간 안에 지어졌다. 혹은, 급히 지어야 해서 폐허의 재료를 활용했다. 에렉테이온은 고(古) 아테나 신전의 폐허를 빗겨 세워졌다. 아테나 폴리아스의 오래된 나무 신상은 고(古) 아테나 신전에서 에렉테이온으로 옮겨졌다. 상고기와 고전기의 이 건물들 사이에는 완벽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운 관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를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최대한 파악함으로써 파르테논의 기능이 숭배보다는 봉헌물의 보관에 있었음을 드러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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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윤경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8-276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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