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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Chong(The Historical Jouranl)

  •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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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3회
  • : 1229-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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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106권0호(2022) |수록논문 수 : 8
간행물 제목
107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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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승훈 ( Han Seungho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0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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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개항기 대외관계사의 연구사 정리와 전망을 모색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학계에서는 “개항기”를 한국이 서구식 근대사회로의 전환 가능성과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응한 시대로 규정해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항기 대외관계 연구는 주로 '침략'을 담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외세를 절대적인 강자로 상정하였으며, 한국은 서구식 근대를 배워가는 미숙한 존재로 그려냈다. 하지만 2000년을 전후로 개항기 대외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외교정책의 최고 결정권자로서 고종의 외교를 부각하는 연구, 개항기 대외관계사의 “통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연구, 역사적 실체로서 한국과 외세의 관련성 및 행위주체로서 한국의 존재를 규명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This article started with the purpose of seeking out the research history and prospects of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recent port opening period. Academia has defined the “period of port opening” as an era in which Korea can transform in to a Western-style modern society and aggression and response from foreign powers. Among them, the study of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port opening period was mainly in charge of 'aggression'. In the process, foreign powers were assumed as an absolute strong force, and Korea was portrayed as an immature entity learning Western-style modernity. However, around 2000, a new trend appeared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port opening period. Specifically, a study that highlights Gojong's diplomacy as the supreme decision maker of foreign policy, a study that attempts a critical analysis of the "orthodox" in the history of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port opening period, and a study that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foreign powers as a historical entity and Korea's existence as an actor research was carried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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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헌주 ( Kim Hun-j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1-8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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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연구는 식민지기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반외세-반봉건론과 혁명전쟁론 등의 역사상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역사상이 해방 이후에는 식민사학 극복과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의 증명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변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동학의 역할과 주도세력에 대한 논쟁, 동학농민군이 근대적 지향을 가졌는가에 대해서 벌어졌던 여러 논의 등이 그것이다.
의병운동에 관한 연구는 '자주와 민족', 그리고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런 관점에서 의병은 근대적 변화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났고,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전민족적 항쟁으로 발전했으며, 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연결되었다는 역사상을 완성했다. 그러나 의병운동의 정치·사회적 성격과 의병운동 주체들의 다양한 지향을 분석한 연구들이 등장하면서 의병운동의 역사상도 확장되었다.
이러한 연구사적 고찰 위에서 본 연구에서는 '저항'의 범위를 확장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주체들'의 움직임에 주목한 사회운동사 연구를 제언하였다. 요컨대 변혁적 민중상에서 더 나아가 '저항'의 다양한 양상과 정치성을 드러내고, 당대 지역사회에서 탈경계적으로 활동하던 주체들의 모습도 그려내어 당대 사회운동사를 두텁게 읽어내자는 것이다.


The nationalists and socialists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was established historical meaning of Donghak Peasant's War as an anti-foreign forces and anti-feudal theory and a revolutionary warfare theory. This historical meaning changed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in conjunction with the task of overcoming the colonial historical theory and that of proving the intrinsic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Specifically, there were debates over the role of Donghak and its leading forces, and various discussions about whether the Donghak peasant army had a modern orientation, etc.
The study on the movement of the righteous army was conducted from the perspective of 'independence and nation' and 'popular nationalism'. From this point of view, they completed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righteous army movement that it arose against modern changes and Japanese aggression, that it developed into a national struggle across regions and classes after the Treaty of Eulsa, and that it was ultimately linked to the independence movements. However, as studies analyzing the political and social characteristics of the righteous army movement and the various orientations of the subjects of the movement emerged,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movement expanded.
Based on these historical considerations, this study proposed a study on the history of social movements that expands the scope of 'resistance' and focuses on the movements of 'subjects crossing social boundaries'. In other words, this study suggested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social movements of those times more thoroughly by revealing not only the transformational public but also the various aspects and political characteristics of the 'resistance' and by portraying the subjects who were acting across the social borders in the local community o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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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진아 ( Yang Jinah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3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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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향후 연구를 위한 기반과 전망을 제공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의 한국 근대 정치사 연구의 동향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제시했다. 1960년대부터 진행된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에서 근대 정치사 분야의 주안은 자주적 근대의 탐색에 있었다. 자주적 근대의 탐색을 기준으로 연구의 궤적을 살펴보면 1960~197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자주적 근대를 탐색하고 발견하는 연구가 이루어졌고, 1980~1990년대는 민중적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기존의 자주적 근대 탐색 작업이 변용되고 한편으로는 확장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2000년대부터는 내재적 발전론이 비판을 받은 것에서 영향을 받아 자주적 근대 탐색을 비판하는 연구와 계속 자주적 근대를 탐색하는 연구가 공존하는 연구 경향을 보였다. 1960~1990년대의 연구를 통해 식민사관이 극복될 수 있었고,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연구를 통해 이전 시기 연구의 근대지상주의가 비판되고 근대를 상대화, 나아가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국민국가론에 입각한 연구, 정치문화에 주목한 연구, 개념을 중심으로 정치성을 파악하려는 연구는 보다 보완이 필요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시각과 이론을 반영한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summarizes the trends of Korean modern political history research from the 1960s to the present, and presents its evaluations and tasks to provide a basis and prospect for future research. In the study of Korean history based on the theory of immanent development, which has been conducted since the 1960s, the main focus of the field of modern political history was the search for the independent modernity. Looking at the trajectory of research based on the search for independent modernity, research was conducted to explore and discover the independent modernity in the 1960s and 1970s as nationalism was emphasized politically and socially, and then in the 1980s and 1990s with the rise of popular nationalism, research that transforms on the one hand and expands the existing independent modernity search work on the other hand has been conducted. Influenced by the fact that the theory of immanent development was criticized since the 2000s, studies that criticize the search for independent modernity and those that continue to search for independent modernity showed a coexistence of research tendencies. The colonial view could be overcome through research in the 1960s and 1990s, and through research from the 2000s, the modernity supremacy of research in the previous stage was criticized, making it possible to relativize modernity and further come to criticize it. However, at the recent days studies based on the nation-state theory, studies that focus on political culture, and studies that try to grasp politics with a focus on concepts need to be further supplemented, and in addition, it is necessary to conduct research that reflects various perspectives and the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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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성산 ( Cho Sung-s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84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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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19세기 吳熙常, 洪直弼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洛論系 지식인들의 神 관념의 내용과 그것이 가졌던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19세기 낙론 학계에서의 신 관념에 대해서 많은 부분 그 연구가 부족하였다. 낙론계의 신 관념은 18세기 호락논쟁에서 논의되었던 담연지기를 황간의 형기신리 논의를 통하여 19세기에 새롭게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 신 관념에 대한 입장은 당시 낙론계의 경쟁학파였던 宋秉璿의 淵齋學派, 李恒老의 華西學派, 李震相의 寒洲學派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신 관념은 낙론계의 학문적 정체성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 이 신 관념은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가졌다. 첫째는 모든 존재와 사물에 신이 내재한다는 균등의 특성이었고, 둘째는 신은 본질적으로 氣인 이유로 변화한다는 특성이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그들의 심성론과 경세론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변통을 중시한 東道西器論과 內修論에 입각한 교화적 斥邪論은 이러한 神 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the contents of the concept of Sin (神; extremely pure force) of the Nak school intellectuals, which is centered on the students of O Hui-sang and Hong Jik-pil in the 19th century, and its social context. Existing studies have not focused much on this concept from the 19th-century Nak school. Sin of the Nak school was to inherit the idea of damyeon ji gi (湛然之氣; extremely pure force) in the Horak debate in the 18th century through Huang Gan's hyeong gi sin ri (形氣神理; form, force, extremely pure force, principle) discussion in the 19th century. This position on the concept received much criticism from the Song Byeong-seon, Yi Hang-ro, and Yi Jin-sang schools, which were the Nak school's rivals at the time. In this respect, the concept of Sin has a close relation ship with the academic identity problem of the Nak school. It has two important characteristics: equality, in that Sin is inherent in all beings and things, and change, in that Sin changes all beings and things because it essentially has the characteristics of gi (氣; force). These aspects have become important ideological foundations for the heart and mind theory and the statecraft theory upheld by the Nak school intellectuals. The theory of Dongdo seogi (東道西器; Eastern ethics and Western technology)-which emphasized reformation-and the argument to reject the West based on internal moralism were based on this concept of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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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민경 ( Lee Min-kyo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5-23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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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전반 영국인들의 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에 대한 선행연구사 뿐만 아니라 이민의 현황과 실제 관행, 담론 및 사회적 사고를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영국인들의 식민지 이민 연구에 확장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민 증가 현상의 직접 대상인 이민자들에 대해 본고는 모국의 불필요한 잉여인력이라는 일반 인식과는 달리, 결과적으로 영제국 번영에 이바지할 자질을 갖춘 부류로 고려되었음을 확인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이민 유인요건에 있어 특히 '건전한 이민자' 선발을 위한 재정지원의 수혜조건과 이민자 선택조건에 까다로운 자격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확인한다. 이로부터 이를 우회하려는 여러 부정적 시도 또한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본고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민자들의 출신 종족, 지역 또는 계층에 대한 일반적 해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아울러 식민지 이민에 대한 사회적 사고를 검토함으로써 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이민의 증가가 단순히 '영제국의 확장' 또는 '모국과 식민지의 경제사회적 문제 해결'이라는 사고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인식했던 개념적 사고에도 기초함을 밝히고 있다.


This study presents an expanded view on 'British emigration to colonial Australia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by examining not only the historiography but also the conditions, currents, actual practices, discourses and social thinking on colonial immigration. Regarding immigrants, it confirms that they were considered capable of contributing to the prosperity of the British Empire. Regarding incentives for immigration, it finds that strict eligibility criteria were applied for providing assistance and selecting “sound emigrants” ; consequently, attempts to bypass these were also observed. Concerning the social thinking behind colonial immigration, it affirms that the increase in immigration to the colony Australia was not only based on the idea of the 'expansion of the British Empire' or solving socio-economic problems, but also on the conceptual thinking that recognized the col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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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내현 ( Kwon Nae-hy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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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한 조선은 사행의 호송과 운송 지원을 평안도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대상 지역은 평안도 내부뿐만 아니라 여진의 위협이 상존하였던 요동 일대를 포함하였다. 호송과 운송 관련 제도는 정비 과정에 있었고 관련 인력의 확보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반면 사행의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빈도도 높았다. 평안도는 변경 방어선을 제외한 지역의 군사들로 호송과 운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15세기 후반 여진과의 대규모 충돌 이후 호송 부담은 감소하였다. 반면 16세기 무렵부터 대명 무역이 확대되면서 운송 부담은 많이 늘어났다. 군사적 부담이 완화되고 조선 내부의 경제적 욕구가 확대되면서 무역품 운송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초점이 이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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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형식 ( Lee Hyoung-si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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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자신의 조선통치 업적을 후세에 전하려는 조선총독부관계자들과 연구 자료를 제공받으려는 20대의 학생들이 모여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결성했다. 조선근대사료연구회는 20대의 청년에서 70대의 노인까지, 비전향 공산당원부터 보수적인 조선총독부관료까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남한(재일유학생)과 북한(총련계),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하는 사상ㆍ신조ㆍ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기묘한' 연구회였다. 조선근대사 수업이 없었던 당시 사료연구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야마베 겐타로를 비롯한 연구자들을 선생으로 삼고 우방협회가 제공하는 풍부한 기록 사료와 살아있는 자료인 조선통치관계자들과의 육성 인터뷰를 자양분으로 조선근대사를 개척하면서 연구자로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조총련 계열 참가자가 연구회에서 이탈하고 연구자로 성장한 미야타, 가지무라 등 학생멤버들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등 사회적 발신을 높여가면서 조선통치ㆍ민족운동,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우방협회와 학생들 사이에 인식차가 확대되어 갔다. 게다가 양자를 중재하던 호즈미 신로쿠로 이사장이 건강이 악화되어 연구회를 빠지게 되자 동상이몽의 오월동주의 균열은 커져만 갔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자 평소 조선근대사료연구회 운영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우방협회 이사들은 학생들을 배제하고 1965년 5월부터 조선통치관계자들만이 참여하는 조선문제연구회를 조직했다. 사료 연구회가 조선통치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한 것이라면 조선통치 관계자가 주도한 조선문제연구회 기록은 조선통치 비판에 대한 자기변명이자 미화였던 것이다. 우방협회는 사료연구회와 조선문제연구회에 참여한 조선통치관계자들의 녹음기록 가운데 일부를 1966년부터 우방시리즈로 출판하였다. 이렇게 출판된 우방시리즈는 조선통치 비판에 대한 자기 변명이자 미화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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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장훈 ( Sohn Jang-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2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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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은 도시 사회에서 정치적 청산작업을 수행했다.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上海市 기층 里弄에서는 반혁명분자 숙청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진압반혁명[鎭反]이 전개되었다. 이 진반의 핵심은 반혁명분자를 규탄하는 공소대회였으며, 공소대회의 목적은 반혁명분자들에게 주민들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해시 기층에서 진반을 책임지고 있는 숙반위원회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주민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고발에 나서도록 설득했다. 공소대회는 그 내용은 물론 식순과 의식까지 세밀하게 기획되었으며 상해시 정부는 그 과정에서 진반을 책임진 리농의 간부들에게 세부적인 지도방침을 하달해주었다. 1954년 리농에서 또 다른 정치적 숙청 작업인 整頓이 진행되었는데 당-정부는 이 때 표적인 重點分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진반 운동을 경험하며 자신들을 공격할 당국의 전략을 숙지한 중점분자들은 당-정부가 주로 의존하는 정권의 동조자[積極分子]들을 회유하고 위협했다. 이에 맞서 당-정부는 적극분자들을 보호하는 대신 관용의 전략을 동원해 중점분자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당-정부가 리농에 파견한 공작대는 자백해온 중점분자들의 죄를 사면해주었고 이 용서의 현장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전략은 정돈이 앞선 진압 반혁명 운동과 다르게 사소한 부정 행위 및 정치적 오류마저 단속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1954년 정돈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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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채준형 ( Chae Jun Hyu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5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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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사회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공학자들은 사회 속에서의 공학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고 그 결과 과학적 방법에 의한 사회의 재조직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1920년대까지 공학자들이 생각했던 사회 속의 공학의 역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이었다. 1차 대전 이후 중국의 공학자들은 공학은 과학기술의 한 분과로서 예술, 정치 등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국가의 성쇠는 사회 각 부문이 조화롭게 기능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1930년대의 위기는 공학과 과학 기술을 통해 사회를 급속도로 개조하고자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에 기초한 급속한 사회 개조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은 중국의 영향력 있는 과학 엘리트들의 호응을 얻었다. 1930년대에 기원한 이러한 주장은 1960~70년대 더욱 구체화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 개조와 경제 발전을 위한 정당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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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주영 ( Oh Ju Young ) , 박이진 ( Yi-jin Par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7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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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을 부정하며 정부 사이트 및 지자체 사이트 등에서도 독도를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일제 시대의 여러 문제들과 더불어 독도 문제를 혐한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독도 문제에 대한 민간 활동의 일본 정부의 예산 등의 실태 및 대응 방침을 살펴보고 검토. 둘째, 독도 문제에 대한 민간 차원의 활동 현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부와 민간인의 인식 변화 및 활동의 연계성을 분석하고 향후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영토 관련 정책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변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독도처럼 자국민의 왕래가 계속되고 있고, 정부의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는 영토에 관한 정책은 일본 내 민심 또는 일부 우익세력의 활동으로만 지지되고 있어 그 지속력 및 전파력이 정부의 입김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나 K-CULTURE 가 전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문화권 내에서는 정부의 정책과 민심은 그야 말로 같은 곳을 바라보기가 더욱 힘들어 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 내 젊은 층은 대다수가 독도를 자국의 땅으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한국과의 분쟁보다는 적극적인 교류활동을 통한 우호적 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분위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속되는 일본의 도발 속에 정부의 영토문제 관련 활동에 대한 개선 요청 및 학생 및 젊은 민간차원의 활동은 늘어나고 있고, 학생 및 일반인들의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관련국들의 정책 추이 및 그 근간에 대한 분석을 민간의 활동의 꾸준한 조사를 통해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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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상덕 ( Lee Sangdu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9-20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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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스마(miasma, 오염)는 19세기 중엽 콜레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었다. 장기설이라고 번역되는 이 미아스마 이론은 나쁜 공기, 즉 미아스마 때문에 유행병이 돈다고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미아스마 때문에 나쁜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는 전염병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비극 작가들은 나쁜 운명의 원인이 되는 미아스마와 그 영향, 그리고 이를 극복하거나 후대에 이어지지 않도록 단절하는 방법 등을 고민했다. 이들에게 있어 미아스마는 피를 흘린 경우, 즉 살해가 행해진 경우에 생겼다. 이는 피로써 복수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연속된 미아스마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미아스마는 단절되어야 했다. 이는 정화의식을 통해서 신에 의해 가능했다. 또한, 인간적으로는 추방의 방법이 있었다. 이와 같은 미아스마의 이해는 개인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용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미신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오염을 정화시켜 병을 치유하려고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치유의 합리적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간질과 같은 병도 신이 내린 병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발병의 상황과 병의 진행과정, 환자의 체질 등을 살펴보면 그 원인을 알고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미아스마 이해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미아스마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완전히 극복되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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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선자 ( Yun Sun-j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4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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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중에 거행된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개선식은 근대 개 선식의 발전과 그로 인한 근대 권력 개념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르네상스시기 고대의 부활과 더불어 개선식도 부활하였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선전하기 위해 이 개선식을 정치적으로 차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개선식은 로마의 '제국적, 군사적' 개선식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전쟁 시기 외국 군주, 특히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개선식에 의해 이것이 가능해졌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루이 12세는 제노바와 밀라노에서 여러 번 개선식을 거행했고, 후기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들의 개선식에서 루이 12세와 카를 5세는 로마의 카이사르, 혹은 유피테르나 마르스 신에 비유되었고, 로마 개선식을 모방한 개선마차와 개선아치 등이 등장했다. 당시 유행한 신플라톤주의와 비트루비우스, 웅장함의 이데아 등이 강조되었다. 무엇보다 개선식에 로마의 임페리움 개념이 도입되었고, 이것은 근대 초 강력한 왕권을 정당화했다. 루이 12세와 카를 5세의 이탈리아 개선식에서 표현된 임페리움은 이후 장 보댕의 주권 개념이 탄생하는데 기여하였다. 결국 이 개선식들은 주권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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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홍성곤 ( Hong Seonggo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간행물 : 사총 10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93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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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월 초 루스벨트는 웰스에게 독일의 봄 공세가 시작되면 전쟁의 결과는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하면서 평화의 가능성을 타진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독일과 소련이 체결한 독ㆍ소 불가침 조약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평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나치 독일과 협상을 통한 평화를 모색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웰스는 1944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에서 독일 방문의 목적을 숨기고 있다. 특히 미국의 평화 중재의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동유럽에 영토적 양보를 하고자 한 프랑스와 영국의 의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웰스는 유럽 순방 보고서에서 무솔리니와 달라디에, 심지어 체임벌린 총리도 안보가 보장되고 평화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히틀러와 거래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한다. 사실 웰스가 유럽 방문을 마치고 루스벨트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평화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3월 12일 소련ㆍ핀란드 겨울전쟁이 종결됨으로써 자신의 평화구상이 '현실성'을 상실했다고 인식하고, 평화의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즉 핀란드 겨울전쟁이 종식됨에 따라 소련을 공격할 빌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루스벨트가 4대 강국들 사이의 타협을 촉구하는 평화적 해결책인 '허망한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웰스가 순방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안보와 군축을 제공함으로써 유럽의 강대국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체임벌린이 말한 '기적'일 것이다. 체임벌린이 인식한 기적은 치아노가 제안한 해결책, 즉 제2의 뮌헨협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은 웰스의 평화 타진 과정에서 전쟁과 혁명의 논리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웰스는 전쟁과 혁명의 논리로 평화협상의 필요성을 히틀러에게 역설했다. 괴링 또한 이 문제를 강조했고, 치아노도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가 이익을 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탈리아가 소련의 침략에 대항하는 방파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즘 타도의 기치하에 '서구 안보' 동맹을 결성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반소련 십자군의 기치하에 전쟁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리는 것이 루스벨트의 평화 특사의 '숨겨진'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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