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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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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의 지역별 전통적 생산성과 환경조정생산성의 비교

저자 : 박혜란 ( Hae Ran Park ) , 강상목 ( Sang Mok Kang )

발행기관 : 한국환경연구원 간행물 : 환경정책연구 8권 3호 발행 연도 : 2009 페이지 : 115-138(2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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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중국의 28개 성과 자치주를 대상으로 성장회계분석에 기초하여 전통적 생산성 성장과 환경조정생산성 성장을 비교함으로써 각 지역의 생산성에 미치는 환경요소의 효과와 경제성장의 주된 요소를 실증적으로 계측하고자 함이다. 추가적으로 환경조정 생산성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서 중국 지역별 SOx의 잠재가격을 측정할 것이다. 1997년~2005년 동안 중국은 장기적으로 10.06%인 고도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지역별로 동부의 성장이 가장 빠르고 중부의 성장률이 가장 낮다. 전통적 총요소생산성은 평균적으로 3.56%로 나타났고 지역별로 동부가 가장 높았다. 환경조정된 생산성 증가율은 평균적으로 3.57%로서 전통적 생산성 증가율과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이는 세지역에서 오염저감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중국 정부에서는 환경규제를 부단히 강화시키거나 제정된 환경규제를 엄격히 집행할 필요가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main components of economic growth and the effects of environmental factorson productivity by comparing traditional productivity growth and environmentally-adjusted productivity growth in 28 Chinese regions based on growth accounting analysis. To do this, we measured the shadow prices of SOx for the 28 Chinese regions. This study found that the annualized growth rate of output in the 28 Chinese regions was almost 10.07% for 1999-2005, though the growth rate was higher in the eastern region than in the middle and western regions. The average traditional productivity was 3.58%, again with the eastern region showing the highest level. The average environmentally-adjusted productivity of the three regions was about 3.56%, which is similar to the level of traditional productivity. This implies that activities regarding pollution reductions in the 28 Chinese regions have not been practiced, even though environmental regulations have been strengthened. Therefore, the regional and central governments should strengthen environmental regulations and strictly enforce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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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국의 한일수교 기본인식 연구 -정치 현실과 현상 인식의 부조화 맥락

저자 : 양갑용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중국지식네트워크 간행물 : 중국지식네트워크 8권 8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85-118(3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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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5년에 있었던 `한일 기본협정` 체결을 전후로 한 한일수교 과정에 대한 중국의 공식, 비공식적인 인식과 시각을 살펴보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중국이 어떤 시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왜 그러한 시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 맥락을 살펴보려는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관방(정부 성명서, 고위 관료의 인터뷰 자료 등) 자료와 연구자의 2차 자료를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한일수교 시기를 중심으로 중국의 인식과 반응을 재구성하여 그 맥락과 인식의 흐름을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한일 기본조약`을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따른 국제 환경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다. 당시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으로 인한 불안감을 폭넓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한일 회담이 가져오는 경제적인 파급효과 등 긍정적이고 미시적인 변화에 천착하기 보다는 진영 논리에 입각한 체제 안보라는 최우선 가치로 한일수교 과정을 바라보았다.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 발전에서 노출한 많은 산적한 `내부`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은 당위론 차원에서는 한일수교의 `불합리성`과 `침략성`을 인지했지만 제대로 대응 전략을 펼치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 따라서 한일수교가 동북아에 격랑을 몰고 오는 핫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두 트랙 접근을 통해서 북한을 달래고 일본과 손을 잡는 이중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맹`도 `국가 이익`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일수교를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本文分析了1965年韓日基本條約簽署前后中國對這一事件的認識欲探究當時中國如何理解韓日關系正常化的過程。本文充分運用了官方資料和硏究人員的二手資料。再次探討了韓中關系正常化時期中國的反應硏究了中國對此問題認識的來龍去脈。中國認爲從國際政治觀点來看韓日基本條約是伴隨美國亞洲戰略而産生的國際環境的産物。中國對韓日會談所帶來的經濟波及效果等持有肯定的看法而不關注微觀變化。中國將以保障安全體制作爲最優先選擇的价値中心引發了韓日關系正常化。當時中國“內部”問題堆積如山。所以從合理性角度來認識韓日關系正常化的“不合理性”和“侵略性” 但沒有指定應對戰略。因爲這與此時改善中日關系來發展經濟的必要性有關。 因此對于韓日關系正常化中國不得不采取了一方面穩住北韓一方面與日本“牽手”的雙軌戰略。最終從中國對韓日關系正常化的認識可以再次得出“同盟”也无法超越“國家利益”這一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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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국 학계의 사회보장 담론 형성에 관한 연구 ─서구 이론의 영향을 중심으로

저자 : 유은하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중국지식네트워크 간행물 : 중국지식네트워크 7권 7호 발행 연도 : 2016 페이지 : 78-108(31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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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서구 학계에서 유입된 복지를 기본 인권으로 규정하는 인식론과 시각이 중국 학계의 사회보장 연구와 담론 형성 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그 주요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는데, 한편으로는 복지에 대해 중국에 없던 새로운 사유방식과 개념이 소개되고 관련 논의의 증가가 이루어짐으로 써 중국 사회보장 연구의 폭이 확장되고 지적 팽창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이론과 시각으로 중국의 사회보장 문제를 논 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과 반발 작용을 일으켜 인권이라는 보편성보다는 중국의 역사 문화적 맥락과 정치 경제적 현실을 보다 중요시하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특수성이 반영된 이른바 중국 특색의 사회보장론이 더 활성화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중 국 학계에서 지식의 개방 이후 특히 서구의 지식과 이론에 대해 수용과 방어의 태도가 공존하면서 결국 ``중국 특색론``이 강화되는 현상은 비단 사회보장 연구 영역에서 뿐 아니라 중국의 많은 다른 학문 영역에서도 유사 하게 발견되고 있다


本硏究重点考察了改革開放以后從西方學術界流入到中國學術界的把 社會保障認定爲基本人權的認識論和視角, 對在中國學術界硏究社會保 障與形成談論産生了什마樣的影響。其主要影響突出在兩個方面第 一, 因從來在中國沒有發現過的新鮮的思維方式與槪念而有關硏究增加, 因此中國社會保障硏究的范圍也擴大和導致知識的膨脹。第二, 有些中 國學者以西方的理論及視角解釋中國社會保障問題, 還提出意見將來中 國社會保障制度該走以人權爲基礎的路, 這却惹起不少中國學者的警척。 他們就比像人權的普遍性還强調和重視中國固有的歷史文化及政治經濟 現實, 結果强調中國特殊性的有中國特色的社會保障論更得勢。隨着中 國改革開放, 中國學術界也知識開放以后, 對從西方流入的一些新知識, 接受與防御這相反的態度共存, 畢竟歸結于有中國特色的理論, 這現象幷 不是只在社會保障硏究方面能發現, 其他大多數中國學術領域不難發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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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국사 연구에서 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 응용

저자 : 이위쥔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31-47(17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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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관습법은 각 민족이 오랜 생산활동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해당 민족의 관습법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럽 민족관습법의 역사와 특징을 분석하여, 피통치민족의 관습법이 장구하게 보류될 수 있거나 철저하게 소멸되는 것은 생산방식과 민족 조직방식이 훼손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엥겔스가 말한대로 '법'의 기초는 '의지'가 아니라 사회물질생활이며, 곧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이다. 민족관습법 방면의 엥겔스의 이론적 성과는 중국 역사연구에도 중요한 교훈적 의의를 지닌다. 1. 엥겔스가 논한 유럽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엥겔스는 자신의 저작『고대법』과『독일이데올로기』에서 법”의 기초는 어느 사회집단(일련의 개인은 더더욱 아니다)의 “의지”이며, 그것은 사회물질생활, “상호제약적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민족관습법을 생산하는 물질생활 기초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민족관습법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민족관습법의 완강한 생명력에 대하여, 엥겔스는『게르만인의 고대역사』에서 상세하게 분석했다. 먼저 그는 고대 게르만인들의 민족관습법이 로마법과 만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완강하게 천년 이상 보류된 사실을 서술했다. 충돌의 근원은,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의 재산분배제도가 저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인들의 관습법의 법률 절차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게르만의 실제 통치자 바루스는 로마총독의 최고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력으로도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생산조직 형식과 맞지 않는 로마법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없었다. 민족관습법은 민족조직 형식과 생산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그 원래의 촌락조직, 혹 민족(혹은 씨족) 조직이 보존되어있기만 하면 민족관습법은 정복자의 법률과 맞서며 장기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새로운 통치자가 폭력을 동원해 당지 주민의 생산.생활조직형식(가령 씨족)을 파괴하고, 아울러 무기와 입법 수단에 의지해 새로운 법률을 추진할 때 민족관습법은 비로서 잔재만 남거나, 혹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2. 중국 역사상 민족관습법이 제정법과 조우한 후의 귀결점엥겔스의 민족관습법 이론은 중국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지도적(指導的) 의의가 있고, 동시에 중국 역사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엥겔스가 유럽의 역사를 논술할 때 “민족관습법”은 모두 피정복민족에게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정복민족의 법률(가령 로마법)은 그것에 상응하여 국가제정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누가 통치 지위에 있든지 간에, 중원왕조의 법률은 언제나 국가제정법으로 표현되고, 소수민족의 법률은 그에 따라 민족관습법이 되었다. 이런 인식의 기초 위에서, 후자를 다시 설명하겠다. 유럽 민족관습법의 최후의 귀결은, 혹자는 장구하게 보류되고, 혹자는 부분적으로 남거나 심지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의 민족관습법은 거의 대부분 하나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는데, 곧 우선은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연후에 최종적으로 제정법 속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요· 금 왕조가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요. 금 정권 초기에 소수민족 관습법과 중원왕조 법률은 언제나 처음에는 병존하다가 후에는 차츰 융합되는 추세를 보였다. 첫째, 건국 초기에 요와 금은 모두 한인 거주 지역에는 단독으로 한법을 실행하였는데, 곧 소위 '民族分治'이다. 요 태조는 건국 초부터 거란관습법의 성문법으로의 轉化를 촉진하였다(定制契丹及諸夷之法, 漢人則斷以律令)”. 요 태종 때에는“國制로 거란인을 다스리고 漢制로 한인을 다스리라”고 규정하였다. 사법 심리 방면에서는 南北二院의 분치정책을 실행하였다. 금 태조는 건국 초기, 법제상에서 주로 여진관습법을 채용하였다. 천보(天輔)2년 금 태조는 “國書와 詔令은 마땅히 屬文에 능한 자를 뽑아서 맡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여 마치 성문법 제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제3대 황제인 희종은 천권(天眷)3년(1140) 하남 등지를 공격하여 취한 후, 당지에 “형법은 모두 율문(즉 중원의 한법)을 따른다(“刑法皆從律文”)”고 선포하고, 이후 여진관습법을 강제하지 않았다. 둘째, 중원 한법은 농경문명에 적용되었기에 유목과 수렵 등의 생산방식에 기반한 거란과 여진 민족관습법보다 선진적이었다. 때문에 요와 금의 통치자들은 모두 주동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한법을 흡수하였다. 요대 건국 초기의 정책은 民族分治였고, 태종시대부터 차츰 漢制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는데, 가령 “발해인은 한법에 의거해 통치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거란인으로서 漢官을 받은 자는 漢儀를 따르고. 한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6대 황제 성종 즉위 이후, 전문적으로 율령(당시의 율령이라는 것은 당, 송의 율령을 가리킨다)을 번역하게 하여 요대 법률의 한화 과정이 시작되었고, “거란인과 한인이 서로 때려 죽음에 이르면, 그 법의 [적용]輕重은 균등하지 않다”와 같은 법은 폐지되었다. 제8대 황제 시기에는『重熙條制』를 修訂하도록 명을 내려, 중원 한법 율문인『咸雍重修條制』를 많이 흡수하고 실제로 이것을 적용하였다. 금조는 皇統 연간에 “본조의 舊制로써 수당의 제도를 겸하고 요송의 법을 참조하여 성문법전인『皇統制』를 편찬하였다. 이후『續降制書』.『大定重修制條』.『泰和律義』이 편찬되었다. 원대인 脫脫은『泰和律義』가 “실은 당율이다”라고 여겼다. 이때부터, 금조의 법제는 형식에서 내용가지 전면적인 漢化를 실현하였다. 요금의 민족관습법이 제정법을 만난 이후 병존하다가 이후 융합된 것을 설명하는 사료는 매우 많지만 여기서는 상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3. 엥겔스의 이론으로 중국 역사를 연구할 때 나타나는 특징중국 역사상 중원에 입거하게 된 소수민족 관습법의 귀결은 대부분 “因俗而治”의 법제 방침 아래에서 우선은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후자에 융합되어 갔다. 이는 비록 유럽의 상황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엥겔스가 밝혀낸 역사 규율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중원에 진입한 소수민족은 모두 농경문명을 받아들여 신속하게 봉건화 되고, 생산과 생활조직 형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관습법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因俗而治”는 중국 봉건왕조의 일관된 정책이고, 심지어 중화문화의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禮記. 王制』에서 “中國 戎夷五方의 백성은 모두 본성이 있어서 [강제로 바꾸도록] 推移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때문에 강역 내의 다양한 민족의 상황에 근거해 자신들의 풍속을 따르도록 하고 다양한 정치제도를 실행하였다. 秦昭王 시기 “巴郡랑中夷人” 과 맹약을 맺을 때, “秦이 夷를 범하면 黃龍 한쌍을 보내고, 夷가 秦을 범하면 淸酒 一鍾을 보낸다”고 했다. 한제국은 군현이 설치된 소수민족 지역에 “천자의 법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당지의 舊俗으로 통치했다. 수당왕조도 소수민족에 대하여 “추장을 나누어 설치하고 각각 그 부락을 통치하도록 한다”, “자신들의 풍속으로 다르스게 한다”는 민족정책을 취하였다. 요대의 南北面官制度, 서하와 금대에는 藩漢 官制가 있었다. 원.명.청 시기에는 이 방면에서 더욱 제도화. 법규화가 진행되었다. 역대 봉건왕조의 법치정책이 일맥상통하게 중화문화의 兼容하고 품는 특징과 개방적인 기개를 체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상에서 “大一統”의 전제 하에서 법률형식도 매우 다양했다. 중국 역사상의 국가제정법과 민족관습법이 병존하다가 융합되는 특징은 중화민족 다민족통일 융합이라는 필연적 역사 추세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유럽 내부에서는 많은 안정적 민족공동체가 있지만 통일되는 추세는 없다. 그런데 중국다민족통일 융합에는 필연성이 있다. 첫째는 지리환경적 원인, 둘째는 생산방식적 원인, 셋째는 중원문화의 개방적 성격이다. 요컨대, 엥겔스가 밝혀낸 민족관습법은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방식이 보류되는 기초 위에서 보류될 수 있는 역사규율은 중국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중원농경문명의 선진성 및 중원문화의 개방적 특징은 소수민족이 중원지역에 진입한 뒤에 대부분 주동적으로 중원문명을 받아들이고, 통치 지위에 있든 없든, 그들의 민족관습법은 항상 중원왕조의 제정법과 “병존하다가 융합되었다”. 이는 중국다민족통일과 융합의 필연적 역사추세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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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유학의 시각에서 본 중국전통사학의 해석과 정립 -유이징(柳이징徵)의 중국전통사학관 평론

저자 : 쉬꿔리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14 페이지 : 93-124(32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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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飴徵은 중국현대 사학의 대가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문화 허무주의에 반대하여 중국 역사문화의 진면모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도구이기에 유가사상이 이끄는 중국의 전통사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중국현대 신사학을 건립해야만 국민을 위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과 정신을 결합하였고, 史學本體論, 方法論 및 價値論의 영역에서 모두 서방의 역사와 문화와 대비되는 중국 전통사학 및 정신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정립하였다. 柳飴徵은 중국사학의 기원과 사관제도와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학은 기원에서부터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통치를 보조하였고, 禮는 施政의 근본이자 도구였기에 역사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禮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言史一本于禮”는 柳飴徵의 전통역사관의 핵심이었고, 또한 그가 중국사학과 역사문화에 근거하여 이끌어낸 치밀하고 독창적인 이론이었으며 서방사학의 이론을 중국사학에 적용시켜 해석한 중국사학에 대한 견해는 아니었다. 근대 진화사관에 대한 柳飴徵은 인식을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역사에 진화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의 역사저술에는'진화'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역사의 진화와 퇴보는 종종 교체, 병존한다고 인식하였다. 물질경제는 무궁하게 진화할 수 있으나 도덕과 정신은 반드시 진화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퇴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진화에 관해 그는 중국의 정치와 종교의 규모와 문명은 周代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으며 上古 三代를 숭상하는 복고의 경향을 체현했다고 인식했다. 柳飴徵은 유가의 민본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生民之本”을 중국사학의 요결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聖賢史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역사상 인민의 지위와 작용을 강조하였고, 중국의 고대 특히 三大에 이미 민권과 민치가 존재하였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중국현대 사학의 대가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문화 허무주의에 반대하여 중국 역사문화의 진면모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도구이기에 유가사상이 이끄는 중국의 전통사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중국현대 신사학을 건립해야만 국민을 위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과 정신을 결합하였고, 史學本體論, 方法論 및 價値論의 영역에서 모두 서방의 역사와 문화와 대비되는 중국 전통사학 및 정신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정립하였다. 柳飴徵은 중국사학의 기원과 사관제도와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학은 기원에서부터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통치를 보조하였고, 禮는 施政의 근본이자 도구였기에 역사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禮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言史一本于禮”는 柳飴徵의 전통역사관의 핵심이었고, 또한 그가 중국사학과 역사문화에 근거하여 이끌어낸 치밀하고 독창적인 이론이었으며 서방사학의 이론을 중국사학에 적용시켜 해석한 중국사학에 대한 견해는 아니었다. 근대 진화사관에 대한 柳飴徵은 인식을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역사에 진화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의 역사저술에는'진화'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역사의 진화와 퇴보는 종종 교체, 병존한다고 인식하였다. 물질경제는 무궁하게 진화할 수 있으나 도덕과 정신은 반드시 진화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퇴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진화에 관해 그는 중국의 정치와 종교의 규모와 문명은 周代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으며 上古 三代를 숭상하는 복고의 경향을 체현했다고 인식했다. 柳飴徵은 유가의 민본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生民之本”을 중국사학의 요결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聖賢史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역사상 인민의 지위와 작용을 강조하였고, 중국의 고대 특히 三大에 이미 민권과 민치가 존재하였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전통적인 史德論의 의미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史德은 역사가 忠實과 의문을 중시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인식하고, 實錄의 필법과 정신 및 역사기록이 사회생활 등의 면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것을 강조하였다. 전통사학이 史德을 중시한 것은 중국문화가 덕을 본위로 한 것이 治史에 반영되고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柳飴徵은 “治史之必本于德”을 주장하였고, 史德을 史家의 四長(史才, 史學, 史實, 史德)의 첫 번째에 두어 治史 에서 史德의 중심적인 지위를 부각시켰다. 그의 사상은 중국유가의 以德治世 사상을 구현한 것으로 史德論을 중국문화의 높은 경지로 상승시켜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중국고대 사관제도에 의한 記事는 모두 관련이 있는 제도와 특징을 갖고 있으며 중국 전통사서의 체제를 결정하였고, 특히 紀傳體(혹은 紀傳表志體)는 역사적 사실간의 관계를 서술하는데 치중하였고 또한 능하였기에 사회역사생활의 면모를 전면적으로 반영하였다. 이는 근대 이래 서방의 章節體를 편면적으로 숭상하여 중국사학의 체제와 서술을 부정한 극단적인 사상을 실질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 도덕적 합법성을 국사 서술의 근본적인 준칙으로 삼다. 柳飴徵은 중국사서 저술의 도덕 평판문제를 매우 강조하여 “史之所重在持正義”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상의 각종 正史論과 正統論에 대한 변별과 분석을 통해 전통사학이 실제로는 역사적 정의를 정통으로 삼아 국사를 서술한 것이고, 이로부터 도덕적 합법성을 국사 서술의 근본준칙으로 보았다. 정통론에 대한 柳飴徵의 새로운 해석이 그 원 뜻에 반드시 부합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이론적 가치와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근대 민족국가관과 애국주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유학화된 역사학은 사학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한다. 柳飴徵이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사학에는 蓄德과 明德의 기능이 있고, 사람의 도덕을 배양하는 그러한 기능을 기타 학문은 따라올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유가도덕적 역사학의 기능을 선양한 것이다. 그는 또한 以史致用은 心正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사학으로 심성을 말하는 것과 공로를 말하는 것을 서로 결합시킬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국 역사상 출현한 심성과 도덕의 공론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그르치는 학술적 병폐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柳飴徵은 전통사학의 致用觀을 계승하여 사학이 개인과 국가, 사회에 유용하다고 밝혔다. 그는 治史와 讀史의 의미가 역사적 지식을 얻고 나아가 흥망성쇠를 보고, 과거를 살펴 미래를 아는 것이라고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사학은 이러한 기능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知類通達”할 수 있고, 역사 발전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柳飴徵은 “학문을 위해 학문을 하는” 고증학풍을 반대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이 국가와 민족에 유용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하였다. 사학의 기능은 크게 보아 바로 민족을 부흥하고 국가를 진흥하는 것이다. 국민으로 하여금 중국의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근대이래 민족문화에 대한 허무주의를 반박하고, 역사학이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애국정서를 배양하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중국문화사는 중국문화의 특징과 성취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사학의 기능관은 선명한 민족주의와 애국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柳飴徵은 중국 전통사학의 분석과 정립은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현대 신유학의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대 신유학 및 신유가는 광의와 협의의 구분이 있다. 광의의 현대 신유학은 일체의 현대적 신유학을 포괄하는 것으로 유학과 중국문화에 대해 사실적 측면에서 學理연구에 깊이 몰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신앙적 측면에서 가치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柳飴徵의 사상적 문화적 주장과 현대 신유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로 부합된다. 그는 공자와 유가를 중국 전통문화의 중심이자 주체라고 인정한다. 현대 신유학의 주요한 경로는 철학과 역사학이 있다. 현재 대부분은 철학적 경로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협의의 신유학이다. 현대 신유학에는 아직 역사학의 경로가 남아있다. 즉 유가문화와 사상에 대해 역사학의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학술문화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본적은 의미와 특징은 사학을 중국 학술과 문화의 근본으로 파악하여 經과 史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經學이 곧 史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유가의 심성도덕이 사학에 담길 수 밖에 없고 중국문화의 부흥 또한 사학이 본위가 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史部의 여러 책들은 단지 협의 중의 협의의 역사이다. 그는 중국사학에 숭고한 지위를 부여하여 사학을 문학, 과학과 비견할 수 있는 학문분야라고 칭하였다. 이는 중국사학이 가장 발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며 더욱 중요한 한 것은 인륜도덕이 사학에 담겨있기 때문이며 또한 사학을 통해서 구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사학이 유학이며 곧 경학이다. 현대 신유학의 시야에서 출발하여 중국 전통사학을 해석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유학의 입장에서 유가적 도덕인륜과 인문정신이 전통사학에 발전과 정립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내야 한다. 柳飴徵은 중국 전통사학의 해석과 정립에 대해 특히 『國史要義』에서 이러한 학술적인 특색을 충분히 드러냈다. 둘째, 서방문화사상을 흡수하여 유학사상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부여하여 유학과 중국문화를 현대화시켜 현대적인 활력과 특징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이는 또한 신유학에 '新'이 붙는 이유이다. 柳飴徵은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서방의 문화와 사학을 수용하여 참고할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현대 신유학의 각파는 공통적인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유가문화를 과도하게 추앙하여 이상화시키는 반면에 서양문화에 대한 인정이 부족하여 중국문화 중심론 혹은 유가문화 중심론의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현대 신유학은 “開新”을 강조하여 서양문화사상을 학습하고 융합하여 중국의 현대문화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지만 “返本”과 “據舊”는 많고, “開新”은 부족하여 서양의 문화사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부족하다. 또한 어떻게 중서문화를 융합할 것인가에 대해서 특히 유가의 인문도덕적 이성문화와 서양의 과학기술적 이성문화 사이에 종종 적절한 접합점을 찾지 못하여 사상체계가 치밀하거나 융합하지 못하고 모순된 곳이 많다. 柳飴徵은 현대 신유학의 시야에서 중국의 전통사학을 해석하고 정립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유사한 이론적 한계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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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민국(民國)<남경헌법(南京憲法)>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헌

저자 : 정지앤위한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81권 0호 발행 연도 : 2012 페이지 : 313-333(21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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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중화민국헌법(中華民國憲法)> 본문은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의 결의에 따라 수정된 <오오헌초(五五憲草)>에 근거하여 1946년 제헌국민대회(制憲國民大會)에서 통과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비록 제헌국민대회 참가를 거부하였으나 실제로는 정치협상회의 중 이 헌법 초안의 수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제기하고 정치적 군사적 실력으로 장군매의 주장과 견해를 지지하여 야당 쪽에서 중국국민당에 가장 중요한 동맹자로 다투었다. <중화민국헌법>은 항전후 중국 조야에서 입헌민주와 화평건국의 이념에 대하여 결론이 유보되었다. 본고에서는 중국공산당의 개헌 주장이 <중화민국헌법>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고,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체제 개혁을 이끌었음과 일찍이 지키려고 했던 입헌주의로 회귀해야 할 것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The provisions of the current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which is the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revision of the 1925 Draft Constitution is ratified by the Constituent National Assembly in 1946.Although the Chinese Communist Party rejected to attend the Constituent National Assembly, actually, it made many claims about the revision of the 1925 Draft Constitution in the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and relied upon its political and military forces to support the manuscript and ideas of Carsun Chang, became the most important allies of the Koumingtang`s opposstion parties. Th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totally preserves all ideals of government and opposition about constitutionalism and peaceful founding after the World War II. The goal of this article is not only to reveal the implications of the constitutional claim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for th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China, but also to remind and ask fo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at it should lead the political and economic transit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o return to constitutionalism as what it had clai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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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아시아정신(亞洲精神)』과 현대 중국 문화 건설

저자 : 판윙충 ( Fan Wing Chung )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80권 0호 발행 연도 : 2012 페이지 : 203-250(48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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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중국 사상계에서의 문화논쟁은 이미 90년이 지나갔다. 이들 문화논쟁은 당시 중국 지식인 계급의 서방 문명이 중국 전통문화에 오랫동안 충격을 준 것의 반영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동서 문화의 본질에 대하여 토론하고, 서로 다른 문화 체계 간의 차이점과 우열을 비교함과 동시에 미래 중국 문화의 정확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던바, 궁극적으로는 귀중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남겨 주었다. 이 논문은 1910년대 신문화운동기 전반서화론자들로부터 촉발된 동서문화우열론을 내용과 전개 양상을 집중 검토하였다. 특히 양계초(梁啓超)와 양수명(梁漱溟)의 동서문화론, 과학과 현학 논쟁, 타고르의 중국 방문과 그 반향, 중국과 인도 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및 아시아적가치 등을 설명하고, 각 시기의 문화대안론을 거쳐 전반서화론에 대한최종적 대안으로서 손문의 '왕도문화(王道文化)'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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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연행사(燕行使)가 본청대(淸代) 중국 동북지구 형상

저자 : 왕광의 , 리기기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75권 0호 발행 연도 : 2011 페이지 : 265-271(7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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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행록 문헌에는 중국 동북지구에 관한 많은 견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중국 동북 지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사 문헌이다. 연행사가 청대 중국 동북 지구에 대해 묘사 서술한 것은 이 시기 동북 사회의 역사 변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중국 동북사의 "회통"과 국제화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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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중국(中國)의 길림성(吉林省) 동부변계(東部邊界) 및 두만강 출해인식(出海認識)과 전략(戰略)

저자 : 윤휘탁

발행기관 : 중국사학회 간행물 : 중국사연구 113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263-303(41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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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吉林省東部邊疆和通過圖們江進入東海的問題發生了許多歷史性變化. 1858年“?琿條約”和1860年“北京條約”之後,淸朝失去了烏蘇里江以東的領土. 但是, 中國的船隻能勾通過圖們江進入東海. 然而, 由於淸朝使臣的無能和俄羅斯對東部吉林省的入侵,淸朝船隻無法通過圖們江進入東海. 但是, 1886年淸朝使臣吳大澄通過與俄羅斯的邊境談判恢復了俄羅斯入侵的東部吉林省領土. 日本占領滿洲之後,因爲與蘇聯的領土爭端, 1938年日本造成了張鼓峰事件,但被蘇聯擊敗. 這一事件導致日本封鎖圖們江口而阻止中國船隻穿越圖們江進入東海. 蘇聯也加强了對圖們江地區的控制. 結果, 中國失去了通過圖們江出海的權利. 自中華人民共和國成立以來,中國爲了恢復這一權利持續地努力. 但是, 因爲與中蘇理念爭端, 中韓邦交之後中朝關係惡化, 這個出海問題幷沒有解決. 最近中國正在通過借用朝鮮和俄羅斯的港口來實現出海戰略, 以提高其政治, 經濟和軍事地位. 我們必須針對這些中國推廣戰略制定各種措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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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在1992年中學課程也擴大實行了義務敎育。 因此, 敎育對象大幅擴大, 敎育的內容也必須發生變化. 在這種社會背景下, 於1999年6月在北京擧辦了“第3次全國敎育工作會議”, 表達了對敎學課程的體系和構造及內容進行調整和改革, 確立新的基礎敎育課程體系的意志. 到2001年7月, 頒布了『全日制義務敎育歷史課程標准(實驗稿)』, 幷在義務敎育過程中作爲歷史科課程改革的基礎. 此後, 中國敎育部組成了課程標准的修訂小委員會, 從2007年開始著手修訂工作, 到2011年再次頒布了『全日制義務敎育歷史課程標准(修訂稿)』. 修訂稿根據改進了實驗稿施行10年中出現的一系列問題的目的, 修改了不少內容. 修訂稿與實驗稿相比, 比較明顯的特點如下. 其一, 是社會主義和愛國主義的强化. 比較一下兩者的前言, 實驗稿說以唯物主義和科學敎育理論爲指導思想, 但在修訂稿說在唯物史觀的指導下,弘揚以愛國主義爲核心的民族精神和以改革創新爲核心的時代精神. 其二, 糾正了在實驗稿中指出的一些不井然有序的問題. 試驗稿的古代史和近代史上,在前面提示內容標准, 後面有各主題的內容, 但在修訂稿把相應內容排列在相應時期. ?外, 還大幅增加了王朝興衰中的不足之處. 其三, 在敎育對象中學生的水平上,省略或改善了認爲有些難以理解或者陳腐的部分. 例如, 爲了區分歷史和傳說而省略了“堯、舜、禹的傳說”, 還有把“漢武帝大統一和對他的評價”部分, 改爲“漢武帝的統治”等內容. 其四, 在敎學課程中改進了缺乏彈性和選擇性的缺陷. 修訂稿通史的提出內容標准的同時, 大幅削減了該項目. 如此, 將實驗稿中的許多內容刪掉, 從而擴大了敎學課程的彈性和選擇性. 其五, 新增了一些實驗稿中不足之處而試圖提高完決性. 比如, 在修訂稿中一律刪除了受到不符合中國實情的評價而代替筆試考試的方法, 而對評價的設計和實施以及結果的解釋與反饋等各階段, 進行了詳細的規定. ?外, 在“課程資源開發與利用”中, 除了旣有的內容以外, “選擇和利用歷史課程資源的原則”上, 重新提出目標性、思想性、精選性及可行性等原則是最好的例子. 像這樣, 實驗稿符合中學生的水平, 努力了轉變死記硬背的學習方式而克服專業化和成人化傾向. 修訂稿是檢驗施行實驗稿的過程中出現的整體問題而收集幷頒布的改善方案後頒布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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