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3.149.238.67
3.149.238.67
close menu
KCI 등재
618-629년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고구려-당ㆍ신라 관계의 변화
The Foreign Policy of King Yeongryu and The Change of Relations between Goguryeo and TangㆍSilla in 618-629
김강훈
DOI http://dx.doi.org/10.34159/tkby.66..202003.004

고구려 영류왕대 대외정책은 여러 차례 변동되었는데, 이 글은 618-629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영류왕은 순탄하게 왕위에 올라 평원왕과 영양왕의 정치를 계승하고자 시도하였다. 영류왕과 고구려 지배층은 6 세기 말 이래 대외정책을 계승하여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중원의 정세 변동에 예민하게 대응하면서남방으로는 신라를 공격하여 독자세력권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한강 유역으로 고구려의 공세가 강화되자, 신라는 626년 당에 개입을 호소하였고 당 태종은 삼국 간 화평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기존의 대외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사신으로 파견된 유학자 朱子奢는 『춘추좌전』을 강설하여 고구려가 회맹을 요청하도록 유도하였다. 고구려는 고구려ㆍ신라ㆍ당의 회맹을 요청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한강 유역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회맹을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대외정책의 변동은 영류왕과 그에 동조한 정치세력이 추진한 것이었다. 628년 봉역도 헌상은 626년 회맹 요청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류왕은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실리적 외교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629년 8월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면서 고구려의대외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외정책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대외정책은 다시 변동될 수밖에 없었다.

King Yeongryu aimed to succeed to the policy of government operation of King Peongwon and King Yeongyang. The same thing happened with foreign policy. One was to establish friendly relations with Tang. The other was southward advance on lower Han River basin. Emperor Tang Taizong exhorted an immediate ceasefire and expected to hold Hoemaeng(會盟) in 626. The two pillars of foreign policy have become impossible to proceed at the same time. King Yeongryu chose peace with Silla in the priority of friendly relations with Tang. However, he didn’t unilaterally accept Tang's demand. King Yeongryu tried to use Hoemaeng as a means to restore the Han River basin. He suggested the Hoemaeng with Goguryeo-silla-Tang. The same intention was to send a map of the Han River basin to Tang, which marked it as Goguryeo territory. King Yeongryu actively sought national interest in response to th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hese attempts can be regarded as pragmatic diplomacy. However, his foreign policy failed and political confrontation intensified as Nangbi fortress was taken away by Sil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