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던 아편은 100여 년 가까이 중국사회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명대부터 시작되었던 아편의 흡연은 청대에도 이어지면서 雍正 7년인 1729년에 세계 최초의 아편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하였고 중국의 아편엄금 정책은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더욱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또 다시 패하면서 중국은 영국의 요구에 의해 아편의 수입을 합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아편의 확산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과 이웃한 조선에서의 아편상황은 어떠하였을까?
아편전쟁 전후 이래 조선정부는 중국의 아편 소식을 접하면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1,2차 아편전쟁에서의 청조의 패배는 조선정부에 커다란 충격을 줄만큼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아편문제에 대해서는 커다란 경계심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정부에서는 1876년 이래 각국과의 개항 과정에서 아편의 수입만은 차단하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아편수입 금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국에서 아편문제가 심각한 청국과의 무역왕래가 본격화되면서 아편의 유입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즉 1882년 조선정부와 청정부 간에 맺은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청국 상인들의 상업활동이 확대되었으며, 아울러 영사재판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중국 국내에서 아편의 수입은 물론 생산과 유통 및 판매가 사실상 합법화되면서 청국 상인들의 아편금지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었다는 점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와 같이 개항 이후 유입되어 확산되기 시작한 아편은 흡연 동기가 다양하였지만 질병치료와의 관련성이 가장 컸다. 조선에서의 아편흡연 동기와 관련하여 『황성신문』에 게재된 기사들을 통해 보면 크게 중국인과 교류하면서 중국인의 권유로 흡연하는 경우, 쾌락을 위해 흡연하는 경우, 질병치료와 관련하여 흡연하는 경우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또한 『각사등록 근대편』에 수록된 아편범죄 관련 재판문서를 통해 살펴보아도 대체로 질병치료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았다. 사실 아편흡연과 질병치료와의 관련성은 비단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만과 중국에서도 아편흡연의 주된 동기는 질병치료였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보면 조선의 경우가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정부가 아편전쟁 전후 시기부터 아편문제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대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이 확산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편이 사실상 합법화된 중국과의 통상 교류 증대를 통한 청국상인들의 상세 확대와 아편에 대한 잘못된 정보의 전달, 청국인들의 아편흡연에 대한 유인, 조선 백성들의 대국문화에 대한 동경 등이 아편이 확산되는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아편범죄 위반에 대한 정부의 처벌과 법집행이 엄격하지 못했던 점, 외국인 거주지역에 대한 아편단속이 어려웠던 점 등도 한 몫을 했다고 하겠다.
이들 요인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한 아편이 조선사회에서 어느 정도 심각했던 것일까? 조선정부의 아편 단속법에서 1905년 이전의 경우 아편흡연 위반자에 대해 2년 이상 3년 이하의 감금에 처하였고 아편 범죄자에 대한 처벌 역시 1898년 이전까지는 고시를 통해 시행되었다. 이에 비해 1905년 형법대전 반포 이후 징역 15년에 처한 것을 보면 1905년을 전후하여 아편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901년 한성 시내에서 1일 판매되는 양이 무려 3만인 분이 되었다는 것을 볼 때도 심각한 수준임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06년 일본 측에서 통감부의 시정방침 시행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금해야할 세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면서 조선의 아편문제를 심각한 단계로까지는 파악하지 않았지만 그 수가 증가하고 있어 우려된다고 한 측면을 볼 때도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1910년 전후 아편 흡연자 분포를 보더라도 특정지역의 심각성은 물론 수적으로는 적은 편이지만 아편흡연 인구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대로 방치한다면 심각한 단계로 이행될 수 있음이 우려되었다. 그 외에 조선의 아편문제의 심각성은 아편 치료약 광고를 통해서도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빈번한 자살문제와도 연관되어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조선정부는 1, 2차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아편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유입과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개항 이후, 특히 청정부와 조청무역장정의 체결에 따른 환경 변화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부족했고, 아편 단속에 대한 조선정부의 법적 대응도 미숙하였다. 또한 조선인의 아편해독에 대한 인식 부족도 아편의 확산을 부추겼다. 이러한 결과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미 조선사회에서 아편의 확산은 우려되는 상황에 도달하였고 당국의 엄격한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The opium raised a serious social problem and cast a dark shadow over modern China nearly one hundred years. Opium smoking began in the Ming dynasty. Under the Qing dynasty the regulation on opium prohibition was imposed in 1729. But in 1840 Opium War, First happened. Strict prohibition of opium was impossible. Besides China was defeated in Opium War, Second. By request of England, importing opium in china was legalized. After that opium was widespread in China. Then what circumstance of opium was happened in Korea that neighbored China?
The Korean government(Joseon or Daehan Empire) had wariness of opium from around Opium War period. Korea was not immensely shocked by defeat of China. But the Korean government tightened guard against opium problem.
Since 1876 opening a port to each nation, Korea made a greater effort to block import of opium. Since Opium War the Korean government having wariness of opium had dealed with opium problem. Nevertheless opium was spreading into country. How was that possible? After opening a port opium was brought into country and became more widespread. Especially after 1882, the regulation for maritime and overland trade between Chinese and Korean subjects, there was brisk exchange between Qing dynasty and Korea. The influence of Chinese living in Korea and Koreans’ lack of understanding opium, government’s inexperienced manage and so on played each role to make opium spread.
In Korea there were many opium addicts in the special zones. But though it was a few, opium addicts spreaded all over the nation. Also because opium had effect of pain relief opium was widely used for a suicide method. On this account the seriousness of opium spread to society was noted. Around 1920 the seriousness of the consumption and spread of opium in Korea required harsh measures to govern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