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서 보통 중국 묘지에만 주목하고 있었는데 중국 묘지가 어떻게 해외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고려의 묘지 문화는 중국의 영향에서 왔다고 인식하는데 복잡한 중국 묘지 문화 중에서 강남 묘지는 고려에 영향을 준 중요한 하나이다.
송대 이후 강남 묘지와 고려 묘지를 비교해보면 강남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모양의 장방형 묘지가 고려의 묘지에 모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대 이후 중국 강남 지역에서는 명문 없는 묘지가 고려 묘지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외형 특징과 문서 구조의 두 가지 특징을 비교하면 고려에 영향을 미치는 묘지는 중국 강남 지역의 묘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강남 묘지는 고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2개가 있다. 하나는 강남인이 고려로 이주한 후 남긴 묘지이다. 시기 구분하면 11세기 전반인 전반기와 12세기 전반인 후반기를 나눌 수 있다. 전반기에는 고려 묘지 문화는 주로 강남의 귀화인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후반기에는 고려 문벌사회에서 묘지의 서술은 정치생활을 적응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고려인이 찬술하는 묘지는 송대 강남 문인들의 묘지 작품을 참고하여 자신의 작품에 활용한 것이다. 특히 소식과 왕안석의 작품은 당시 고려인들이 선호하는 대상이었다.
강남 묘지가 고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지리상의 편리함은 양국이 쉽게 왕래할 수 있으며 고려인들이 강남의 묘지 문화 제품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 고려 문단에 고문을 제창하는 것은 묘지를 찬술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송대 강남 고문가의 작품을 참고할 수도 있었다. 셋째, 강남 문인들의 정치의 식은 당시 고려 귀족들의 요구에 영합할 수 있었다.
近年墓誌成為學界關注和研究的熱點. 但對於中國的墓誌文化如何傳播到域外的問題似乎暫未引起重視. 與宋代同一時期的高麗也有使用墓誌的文化. 對於高麗墓誌文化來源於中國的影響這個問題學界的觀點也基本一致, 但是中國的墓誌文化本身由於地域、年代、民族的不同又有著極為複雜的系統. 那麼宋代影響到高麗的墓誌文化是哪一支是需要進一步討論的問題.
就江南墓誌與高麗墓誌的外形比較而言, 江南墓誌中發現的較多大小不一形態各異的長方形墓誌在高麗墓誌中都可以找到. 而中國傳統正方形的“盝頂形墓誌”(或“覆斗形墓誌”)在高麗墓誌中一件也沒有發現. 同時, 五代以後中國江南地區佔比較大的無銘墓誌在高麗的墓誌中也佔據較高的比例. 即, 如果從外形特徵和文本結構比較的結果來看, 影響到高麗的墓誌文化指向的是中國江南地區的墓誌文化.
江南墓誌影響到高麗的方式有兩個. 一種方式是移住到高麗的江南人死後留下的墓誌, 如果時期劃分的話可分為11世紀上半葉的前半期和12世紀上半葉的後半期. 前半期的高麗墓誌文化主要在江南歸化人之間展開. 後半期是高麗進入門閥社會以後, 江南人的墓誌敘述是為了適應政治活動的需要而展開; 另一方式是高麗人撰述的墓誌中. 參考並靈活運用了宋代江南人的墓誌作品, 特別是蘇軾和王安石的作品成為當時高麗人的喜愛對象. 這一方式出現在12世紀上半葉.
江南墓誌能影響到高麗的原因大致有三個. 一是地理上的優勢為兩國的人員往來提供了便利, 高麗人能夠更加便利地接觸到與江南墓誌相關的文化產品. 二是高麗文壇對古文的提倡, 為墓誌的撰寫提供了契機, 而江南古文家的作品又被高麗人所參考. 三是江南文人的政治意識, 恰好迎合了當時高麗貴族社會中政治活動的需要. 把江南文人政治思想寫入墓誌, 表達自己在高麗社會中的政治立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