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禮는 왕실의 혼례 행사로서 특별히 ‘國婚’이라 칭해질 정도로 국가 전례의 하나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관련 연구가 누적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대부분 가례의 의주에 주목하거나 가례 대상자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왕실 혼례의 재원 규모에 대해 접근한 연구는 없었다. 다만 막연히 혼례 비용이 막대하여 국가재정에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상적인 견해만 존재했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의 국혼에 소요되는 비용은 얼마인가? 이 비용이 국가재정을 위협하였는가? 조선에서는 늘 왕실의 행사를 사치스럽게 진행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특히 영조대에는 『度支定例』와 『國婚定例』를 간행하며 왕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18세기후반 간행된 『국혼정례』가 이후 왕실 혼례의 재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19세기 중반 왕실 혼례의 비용 규모가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는 明溫公主의 혼례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 가례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살피고, 신료들이 지속적으로 혼례의 사치를 금단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1749년 『국혼정례』가 간행됨으로써, 국혼과 관련한 주요한 비용이 정식으로 규정되었음을 살폈다. 그리고 2절에서 『度支五禮考』에 적시된 조선후기 왕실의 혼례 비용을 통해, 『국혼정례』가 간행된 이후 그 비용이 절감되거나, 최소한 규정을 벗어난 비용은 없었음을 확인하였다.
3장에서는 공주 혼례에 소요되는 재원을 명온공주의 혼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1절에서는 혼례 직전의 재택마련과 생활비 지급 문제를 검토하고, 2절에서 혼례 의식에 사용된 재원을 검토하였다. 명온공주의 재택을 마련하기 위한 비용은 전 4,590냥으로 이전까지 내려주던 공주의 제택 비용에 근거해 이보다 감소해 내려주었다. 공주에게 주어진 田畓 역시도 『續大典』의 규정을 준수해 내려주었고, 그 비용 역시 정례를 준수하였다. 명온공주의 혼례를 위한 재택마련과 생활비는 적어도 법규를 준수하였고, 오히려 이보다 감소해 마련하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2절에서는 혼례에 소요되는 직접적인 비용을 『국혼정례』와 비교해 확인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비용이 정례와 일치하는 내역과 수량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례에 포함되지 않는 잡물의 경우에도 대부분 호조나 병조 등 중앙관서가 아닌 內需司를 통해 마련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국가의 의례에 소요된 국가재정이 과람했는지 아니면 적절했는지의 판단을 내리기는 조심스럽다. 이는 보다 다양한 의례에 대한 후속 연구와 국가재정에 관한 연구가 진행된 이후에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공주의 혼례에 소요된 비용이, 영조대 정례로 규정해놓은 금액 이상을 소요하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법제를 준수하여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실에서는 의례를 통한 비용 낭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Garye(嘉禮) is the royal wedding, which is called ‘Gukhon(國婚 : marriage of nation)’ and is one of the national rites. This is the situation where related research is cumulative. Most of these studies focus attention on the ceremonies of Garye(嘉禮), and analysis on political character is the main.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no studies that approached the scale of the royal wedding funds to which the national finances were introduced. Then, in fact, how much was the cost used for the wedding of the royal family of Chosun(朝鮮) Dynasty? Did this cost threaten the national finances?
Korea was always wary of proceeding with the royal events extravagant. In particular, for the “King Youngjo(英祖)”, he published “Takjijungrye(度支定例)” and “Gukhonjungrye(國婚定例)” and tried to save the royal expenses. This paper explored what “Gukhonjungrye(國婚定例)” published in the latter half of the 18 th century had on the scale of the royal wedding revenue later. For this reason, the wedding ceremony of “princess of Myoungon(明溫公主)”, where the scale of the royal wedding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remains relatively large, was targeted. As a result, Chosun(朝鮮) Dynasty confirmed that the expenses required for the wedding did not require more than the amount stipulated in the Code such as “Gukhonjungrye(國婚定例)”. Through this, we can carefully think that in the royal family we tried to suppress the waste of expenses through ritu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