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기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지도자인 서상렬은 무반 명문가 출신으로서 출세를 포기하고 척사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김평묵 · 유중교를 따라 배웠으며, 장담으로 옮겨와 유중교의 강단에 동참하였다. 유중교의 사후에는 『성재집』의 편찬을 주도하며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1894년 가을, 재종제인 서상철(徐相轍)의 봉기 때에는 ‘이단’으로 여겼던 동학과 연루되는 것을 피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농민군이 반외세 투쟁에 나선 상황이었기에 동학 세력과 연대하지 않고 의병 항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5년 말, 단발령 이후 ‘제천의진’이 성립하자 군사(軍師)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지도자 구실을 하였다. 제천의진이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으로 재편된 이후에는 영월에서 포군을 모았으며, 1896년 음력 1월 중순에는 ‘호좌소모토적대장(湖左召募討賊大將)’의 자격으로 영남에 진출했다. 이는 영남과 공동으로 투쟁하기 위한 것이었고, 의병 봉기 직후에 좌절하고 있던 영남 의병론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소토진(召討陣)을 이끈 서상렬은 영남의 여러 의진을 강경투쟁 노선으로 집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을 예천에 모아 회맹(會盟)을 주도하였고,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과 직접 격전을 치렀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실패하였고, 안동관찰사의 부임을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영남 북부 지역 의진의 내부 갈등 속에서 그것을 하나로 묶기 위한 노력은 결국 실패했다.
서상렬은 음력 4월 초 예천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단양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중부권을 장악하던 호좌의진이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할 즈음, 서북 지방으로의 이동, 즉 ‘서행(西行)’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했다. 이후 서상렬은 대장진의 서행에 앞장서서 길을 열다가 낭천에서 전사함으로써, 타협 없는 의병론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Seo Sangyeol(徐相烈, 1854~1896) was a leader of ‘Hojwaeujin(湖左義陣)’ in the uprising of righteous armies against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He rejected the foreign influence and gave up a successful career on the time of enlightment, retiring into a country. He looked up to Kim Pyeongmuk(金平黙) and Yu Junggyo(柳重敎) as his teachers, who were famous scholars of ‘the Hwaseo school(華西學派)’ denouncing the foreign power. He moved to Jangdam(長潭) in Jecheon, where Yu Junggyo settled. There Seo Sangyeol learned from Yu Junggyo and assisted him in teaching others. He led the publication of Yu Junggyo’s works after his death. Though he suspended the fight against Japan in 1894 not to be involved in ‘Donghak(東學)’, the peasant uprising, he led the righteous army combat against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in Danyang after a year. When righteous armies were expanded and reorganized into ‘Hojwaeujin’ by Yu Inseok, he leagued together righteous armies of seven Yeongnam counties, led Hojwasotojin(湖左召討陣: the draft and suppressinon of Hojwaeujin), and fought against Japan in Taebong. As he was a radical hard-liner, he was sometimes in discord with the moderate Yeongnam righteous armies. He died in Nangcheon battle(狼川戰鬪) while he was forced to withdraw to the north after the defeat of Hojwaeu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