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진성여왕의 생애 기록을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한 것이다. 진성여왕 김만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장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검증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진성여왕과 김위홍과의 관계는 후대에 설화적으로 분식된 사적(私的) 관계에 근거한 소문에 의해 재생되고 유포되어 왔다. 『삼국사기』에서 김위홍이 진성여왕과 통했다고 하는 기록은 김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초에 병부령이자 상대등이며, 경문왕계 왕실의 종실 대신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역사적 상관관계를 찾는 연구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부호부인을 진성여왕의 유모로, 김요를 진성여왕의 소자로, 양패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한 것도 설화화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진성여왕 김만은 868년(경문왕 8년) 아버지 경문왕과 어머니 영화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위로 김정과 김황 두 오빠가 있었다. 갓난아이때 어머니가 죽어 숙모인 부호부인이 양육하였다. 887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왕실 가족인 공주나 장공주로서 왕궁의 이궁인 북궁에 거주하였으며, 미혼으로 자식은 없었다. 즉위 후에는 숙부 김위홍과 모후의 역할을 한 숙모 부호부인에게 정국운영을 맡겼다. 30세가 되던 재위 11년(897년) 6월에 조카 김요에게 정치적 실정과 건강의 이유로 선위했고, 6개월 후 왕경의 북궁에서 죽었다. 사후 왕경의 황산에서 화장하여 산골하였다.
The expression in 『Samguk Sagi』that Kim Wi-hong had an amour with Queen Jinseong in private should be interpreted in connection with the political situation in which Kim Wi-hong led the administration of the government in the reign of Queen Jinseong as Sangdaedeung(上大等) of the time and a minister of King Gyeongmun royal family. In addition, it is also a narrative image and symbolic expression handed down to posterity to refer to Madame Buho as Queen Jinseong's nanny, Kim Yo as Queen Jinseong's Soja(小子), and Yangpae as Queen Jinseong's youngest son in 『Samguk Yusa』, which is far from the historical reality of the time. Queen Jinseong, Kim Mann, was born in 868 to her father, King Gyeongmun and her mother, Madame Yeonghwa, and had two older brothers, Kim Jeong and Kim Hwang. Until she ascended to the throne in 887 at the age of 20, she lived at Bukgung(北宮), as a princess or Janggongju(長公主),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She was single and had no children. After ascending to the throne, she entrusted the administration of the country to her uncle Kim Wi-hong and her aunt, Madame Buho. In June of the 11th year of her reign (in the year of 897), at the age of 30, she abdicated the throne to her nephew Kim Yo due to political maladministration and health, and died at Bukgung six months later. The funeral was held at Mt. Hwangsan in Gyeongju, and after cremation, her ashes were scatt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