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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등재
17-18세기 임진왜란 참전 명군(明軍)에 대한 기억
17-18世纪对参加壬辰倭乱明军的记忆
우경섭 ( 禹景燮 )
한국학연구 46권 323-354(32pages)
UCI I410-ECN-0102-2022-900-000626983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영향은 17-18세기 조선 사상계에 再造之恩의 이데올로기로 지속되었다. 만력제가 파병한 원군 덕분에 조선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재조지은의 관념은 숙종대 大報壇 설립으로 귀결되었는데, 대보단 이전에도 이미 임진왜란 참전 명군의 흔적을 간직한 몇 곳의 제단과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590년대에 건립된 愍忠壇·武烈祠·宣武祠였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조정의 요청에 따라 설립된 민충단은 평양·개성·벽제·한양 등 4곳의 격전지에 전사한 명군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제단이었다. 그리고 명군의 평양성 탈환을 기념하여 세운 평양의 무열사는 1596년(선조 29)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여기에는 원병 파병을 주도한 병부상서 石星 및 평양 전투를 지휘한 제독 李如松과 楊元·李如栢·張世爵 등 5명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뒤이어 1598년(선조 31)에는 한양 太平館 서쪽에 정유재란 때의 병부상서 邢玠의 화상과 선조의 어필 ‘再造藩邦’을 봉안한 선무사가 건립되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楊鎬의 화상이 배향되었다. 그러나 인조대 정묘·병자호란 및 뒤이은 명청교체의 결과, 명군을 기념하는 이들 壇廟의 제사는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뒤 상당수의 명군들이 군영을 이탈하여 조선에 정착했다. 또한 명나라 멸망 이후 임란 당시 명군 지휘부의 후손들이 대거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임란 종료 후 곧바로 만주족과의 전투에 참여했기에 청조 치하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왜란 당시 자신들이 조선에 베푼 ‘은혜’를 상기시키며 조선인들의 후대를 기대하는 가운데 후손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선 망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청조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던 조선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변방에 숨어 살며 점차 중인 신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선무사를 비롯한 명군의 사당과 조선으로 귀화한 그 후손들의 존재가 尊周大義의 관념 아래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기에 접어든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朝鮮中華主義의 이데올로기 아래 1704년 대보단이 건립된 뒤, 선무사 등 명군 기념물에 대한 제사는 대보단으로 상징되는 尊周大義의 명분 아래 새롭게 편제되었다. 그리고 참전 명군에 대한 추숭 사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조선에 정착한 그 후손들은 皇朝遺民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선무사 뿐 아니라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순절한 조선인들을 기리는 顯節祠와 忠烈祠 등도 함께 중시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명군의 위상은 존주대의의 이념 아래 점차 상대화 되어 갔다. 영조가 1749년 대보단에 三皇을 병향하며 홍무제의 大造之恩, 만력제의 再造之恩, 숭정제의 東援之恩을 병칭하였음을 보면, 이제 재조지은의 관념은 尊周大義의 일부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란 참전 명군의 위상 역시 호란 이후 조선의 순절자들과 동등한 반열에 위치하게 되었다. 명군의 후손들 중 일부는 선무사와 무열사의 제사를 담당하며 명나라의 후예로서 정체성을 유지해 갔지만, 대보단 수직관을 세습하던 隨龍八姓 등 명나라 사대부의 자손들이 주도하던 귀화한인 사회 안에서도 점차 주변부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参加壬辰倭乱之明军的影响, 在17-18世纪的朝鲜王朝思想界以再造之恩的意识形态得到存续。朝鲜王朝得益于明神宗派出的援兵才得以赶出倭寇的再造之恩观念归结为肃宗时期设立大报坛, 大报坛之前已经建有几所带有参加壬辰倭乱明军标识的祭坛和祠堂, 其中具有代表性的便是16世纪90年代所立的愍忠坛、武烈祠、宣武祠。 1593年(宣祖26年) 依照明廷的邀请而建立起来的愍忠坛, 是在平壤、开成、碧蹄、汉城等四处激战地为了祭奠战死明军而建立起来的祭坛。为纪念明军夺回平壤城而建立的平壤武烈祠大约竣工于1596年 (宣祖29年), 祠堂里供奉了主导派出援军的兵部尚书石星、指挥平壤战役的提督李如松和杨元、李如柏、张世爵等五人的画像。接着1598年 (宣祖31年) 在首尔太平馆西边建立了供奉丁酉再乱时候的兵部尚书邢玠的画像和宣祖的御笔 “再造之恩” 的宣武祠, 1604年 (宣祖37年) 该祠堂追加供奉了杨镐的画像。可是, 经历了仁祖时期的丁卯、丙子两次胡乱以及紧接着发生的明清交替的结果, 纪念明军的这些坛廟的祭祀不可能一如既往地正常进行。 另外, 壬辰倭乱结束以后不少明军拒绝回国, 逃离军营定居于朝鲜。而且明朝灭亡以后, 壬辰倭乱当时明朝指挥官的子孙大举流亡到朝鲜。因这些人壬辰倭乱终结以后直接投进与满族的战争, 难以在清朝治下的中国谋生。于是, 他们搬出倭乱当时对朝鲜的 “恩惠”, 期待着朝鲜王朝的厚待, 积极劝导子孙流亡朝鲜。但是, 朝鲜王朝不能不顾忌清廷, 不能公开他们在朝鲜的存在, 他们也只好隐姓埋名于边陲, 逐渐以中人身份定居于朝鲜。 以宣武祠为代表的明军的祠堂和归化于朝鲜的明人子孙后代的存在, 在尊周大义的观念下得到重新解释是东亚格局进入稳定期的18世纪之后的事情。朝鲜中华主义的意识形态认为朝鲜继承了中华文明的正统, 在这种观念的影响之下1704年建成了大报坛, 有关宣武祠等明军纪念物的祭祀在以大报坛为象征的尊周大义的名分之下重新编成。并且开展了对参战明军的推崇, 定居于朝鲜之明朝遗民的子孙被承认为皇朝遗民。 然而, 除了宣武祠之外, 考虑到纪念丙子胡乱当时在南汉山城和江华岛殉国的朝鲜人也得到同等重视, 明军的地位在尊周大义的理念之下逐渐相对弱化。1749年, 英祖在大报坛追加供奉了三位皇帝, 从而把明太祖的大造之恩、明神宗的再造之恩、明思宗的东援之恩并称的情况来看, 再造之恩仅具有尊周大义组成部分之一的意义。于是, 参加壬辰倭乱的明军的地位弱化到与胡乱以后朝鲜殉国人士同样的级别。而且明军的后代子孙中的部分人承担了武烈祠的祭祀, 保持了明朝后裔的认同, 但他们在世袭着大报坛守直官的随龙八姓等明朝士大夫后裔主导的归化汉人社会里面也逐渐地被边沿化。

1. 머리말
2. 전몰 명군을 위한 壇廟 건립
3. 명군 후손들의 귀화와 尊周大義
4. 맺음말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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