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9.175
18.97.9.175
close menu
일제강점기 궁중연향의 변모와 정재전승의 굴절
植民地時代、宮中宴饗の變貌と呈才傳承の屈折
강경호
민족무용 vol. 8 55-82(28pages)
UCI I410-ECN-0102-2021-000-000605461

이 글은 일제강점기, 궁중연향의 변모 그에 따른 정재전승의 굴절,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조선시대 성대하게 치러졌던 궁중연향은 일제시대에 들어 그 규모와 예식절차, 연향악, 정재연행의 과정 등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 대표적 연향이 바로 1913년 거행된 ‘덕수궁 어탄신(御誕辰) 진연’이다. 고종(高宗) 62세 탄신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 진연은 과거 조선시대의 궁중연향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궁중연향과 정재전승의 굴절의 배후에는 일제의 계획적인 식민지문화통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광무 연간부터 일제는 예악을 관장하던 장악원을 폐지하여 이왕직아악대로 축소시켰고, 정재의 전승집단인 기생들을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으로 해체시켜 그 본래의 성격을 변질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궁중의 연향은 축소·중단되었고, 상업적·유흥적 성격으로 나아간 궁중정재는 그 원형과 본질을 잃어버린 채 굴절된 방향으로 전승되었다. <시정오년기념성택무>, 일본음악을 첨가한 <사고무>등은 당대 정재전승의 굴절된 모습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1910년을 전후로 하여, 조선정악전습소를 설립하는 등 우리의 전통음악과 정재를 자생적으로 전승·보존하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있었으나, 일제의 계획적인 전통문화 파괴로 인해 정재전승의 굴절과 단절은 일제시대 전반을 걸쳐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우리의 궁중정재는 그 원형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일제시대의 굴절된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해 그 원형적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本稿は植民地時代, 宮中宴饗の變貌とそれによる呈才傳承の屈折、そして、以上のような變化が発生せざるをえなかった理由に関して考察してみたのである。朝鮮時代、盛大に行われた宮中宴饗は植民地時代にはいってから、規模や禮式節次、宴饗樂、呈才演行の過程上、大きな変化をみせるようになる。その代表的なのズ1913年の「德壽宮御誕辰進宴」である。 高宗62歳の誕生を記念するために開かれた進宴は、過去、朝鮮時代の宮中宴饗とは大きな差を見せているが、このような宮中宴饗や呈才傳承の屈折の背後には日本の計画的な植民地文化統治があったと思われる。光武年間からはじめ日本は禮樂を担当していた掌樂院を閉止し、李王職雅樂隊に規模を小さくし、呈才の傳承集團である芸者を「妓生團束令」と「娼妓團束令」に解体させ、その本来の性格を變質させた。以上のような変化のなか、宮廷の宴饗は縮小·中斷され、商業的で遊興的な性格に変貌し、その原形と本質を失われたまま、屈折、伝承されるようになった。「始政五年紀念聖澤舞」、日本の音楽を添附した「四鼓舞」などは当時の呈才伝承の屈折された姿であった。 以上のような歴史のなか、1910年を前後に、朝鮮正樂傳習所を設立するなど、韓国の傳統音樂と呈才を自生的に傳承·保存しようとする動きもまたあったが、日本の計画的な文化破壞により呈才傳承の屈折と斷絶は植民地時代全般にかけて表れるようになる 現在までも韓国の宮中呈才はその原形の本質を探ることができず、植民地時代の屈折された形をそのまま維持している。よって、これらに関する考察などをもとに、その原形の復原がなされるべきであろう。

1. 머리말
2. 일제강점기 궁중연향 변모의 한 양상
3. 궁중연향의 변모와 정재전승의 굴절양상
4. 맺음말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