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오카 다모쓰(諸崗 存, 1879-1946)가 1938년 11월에 조선에 건너와 당시 광주 지역의 산림기술사인 이에이리 카즈오(家入一雄, 1900-1982)를 만나 한국 남부지방 일대 토산차(土産茶)의 분포지를 현지답사 하고 얻은 차(茶)관계 자료를 모아 1940년, 「조선의 차와 선(『朝鮮の茶と禅』)」이라고 하는 다서(茶書)를 공저 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끽다의 풍습이 쇠퇴한 이유를, (1) 선종과 주자학, (2) 음료수의 관계, (3) 담배와 술 등이라고 하는 3가지 이유를「조선의 차와 선」에 기술하고 있다.
모로오카와 같이 조선시대에 들어 일상에서 차문화가 쇠약해진 원인으로서 먼저 불교의 쇠퇴를 주장하는 연구자가 많다. 차가 선종(禪宗)과 밀착되어 있고 불교를 떠나서는 차의 존재도 없다고 하는 식으로 불교의 쇠퇴가 그대로 차문화의 쇠퇴에 연결된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차를 필요로 하는 집단 속의 하나인 사원의 입장으로서는 스스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사찰소유의 토지에 다촌(茶村)을 두어 주민으로부터 차를 공급받은 곳은 남부지방의 일부 사찰에만 해당된다. 이것은 전체 차산지의 일부분이고 남부지방 외에 차가 생육할 수 없는 지역의 사찰에서는 다소(茶所)를 통해 공급받았다. 따라서 조선차를 사원차라고는 하는 것은 잘못이고, 차문화의 쇠퇴원인을 불교의 쇠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다소와의 관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모로오카는 또 다른 쇠퇴 원인으로 한반도는 수질이 좋아 일부러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양질의 물이 없어서 차문화가 성행했는가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중국의 장강(長江)의 경우, 2005년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56%가 1~2류수일 만큼 수질이 좋다.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 더욱 수질이 좋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도 수질과 관계없이 차를 음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질이 차문화의 쇠퇴를 가져온 주된 원인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단지, 한국 식생활 문화의 특성상 조석(朝夕)으로 나오는 숭늉이 차를 대신 했다고 하는 것이 쇠퇴의 이유로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