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금석문·간독 등 출토 문자자료를 중심으로 신라에서의 유교경전의 수용과 학습 양상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함을 목표로 한 것이다.
2장에서는 낙랑, 고구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죽간·금석문·목간 자료들을 통하여 신라 이전 한반도에서의 유교문화의 수용 정도를 가늠해보았다. 그 결과 『論語』의 전래가 BC 1세기경에까지 소급될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에서의 유교문화도 각각 5, 6세기에 이르러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교육 기관의 설립과 漢籍의 유통에 관한 중국측 기록들을 통하여 신라 이전 한반도 유교문화의 수용 양상을 太學이라는 국가 교육기관의 설립, 『論語』와 五經(『詩經』·『書經』·『易經』·『禮記』·『春秋(左氏傳)』), 三史(『史記』·『漢書』·『後漢書』)와 『三國志』, 『文選』 등의 漢籍의 수용과 유통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신라의 6세기 금석문 중에서 그 동안 『論語』의 직접인용 사례로 주목받아온 울진 봉평신라비, 진흥왕 순수비에서의 “獲罪於天”, “脩己而安百姓”이라는 구절이 『論語』뿐만 아니라, 『三國志』에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論語』의 직접인용 사례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6세기 신라 금석문들에 쓰인 한자어구들에 대하여 중국 고전들(『論語』+五經, 三史+『三國志』)에서의 쓰임새와 비교한 후에 유교경전의 수용 정도를 가늠하고자 하였다. 그결과 진흥왕 순수비에서 史書에는 없고 儒經에만 나오는 ‘乾道’라는 어휘뿐만 아니라, 儒經에도 史書에도 없는 ‘純風, 强戰’이라는 어휘들까지 찾아진다는 점에서 그 이전 금석문들과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나므로 진흥왕대(540~576)에 이르러 신라사회에 유교경전들이 본격 유통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진흥왕 6년의 國史 修撰 기사, 圓光法師의 유년기 修學에 관한 기사및 壬申誓記石(552년 추정)에서의 儒經名 등을 들어 당시 신라에서 유통된 漢籍의 범위가 고구려·백제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어서 경주 안압지 187호 목간, 인천 계양산성·김해 봉황동 『論語』 목간등 7~8세기 목간 자료들을 통하여 國學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시대의 유교경전 학습 열풍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本文以金石文、簡牘等出土文字資料爲主、具體考察新羅從何時開始接受儒家經典、以及如何學習這些典籍。
第二章主要通過樂浪、高句麗和百濟地區出土的竹簡、金石文及木簡資料來探討新羅時代之前朝鮮半島對儒家文化的接受程度。硏究結果發現:不僅《論語》的傳入可追溯至公元1世紀左右、高句麗和百濟的儒家文化也分別在公元5、6世紀時發展得頗具規模。此外、通過考察中國史書裡對敎育機構的設立及漢文典籍流傳的記錄、可將新羅之前朝鮮半島的儒家文化傳播歸納爲:國家敎育機構――太學的設立、以及《論語》與五經(《詩經》、《書經》、《易經》、《禮記》、《春秋(左氏傳)》、三史(《史記》、《漢書》、《後漢書》)、《三國志》、《文選》等漢文典籍的流入與傳播。
在公元6世紀的新羅金石文中、蔚珍鳳坪新羅碑與眞興王巡狩碑上的“獲罪於天”、“修己而安百姓”等文句向來被視爲直接引自《論語》、但本文第三章指出:除了《論語》、這些文句也曾出現在《三國志》裡、因而很難斷定是直接來自《論語》的引用。筆者還對6世紀新羅金石文中使用的漢字語句與中國古代典籍(『論語』+五經、三史+『三國志』)的用法進行比較、以此衡量儒家經典的接受程度。結果發現、眞興王巡狩碑上不僅有儒家經典裡經常出現的“乾道”一詞、而且還使用了不見於儒家經典及史書的“純風”、“强戰”、與此前的金石文有著明顯的區別、因而據此判斷、眞興王在位期間(540至576年)、儒家經典已流傳於新羅社會。支持這種推論的證據包括:眞興王六年有關修纂國史的記錄、圓光法師幼年時期修學相關記錄、以及壬申誓記石(推定爲552年)上出現的儒家典籍名稱。由此可以推斷、當時新羅的漢籍流傳範圍與高句麗、百濟的情況可謂大同小異。接著、以慶州雁鴨池187號木簡、仁川桂陽山城、金海鳳凰洞《論語》木簡等7-8世紀的木簡資料爲主、具體考察統一新羅時代以國學爲中心的儒家經典學習熱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