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39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에게 하드리아누스 성벽 너머 스코틀랜드 남부로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 결과, 오늘날 포스만과 클라이드만(the Firths of Forth-Clyde)을 경계로 하는 안토니누스 성벽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불과 12년 만에 성벽을 포기하고 다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경계로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안토니누스 성벽 이남 지역을 수복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으나 부분적인 수복에 그쳤고, 160년대 이후에는 성벽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안토니누스 성벽의 건립 배경과 목적, 그리고 왜 그렇게 빨리 포기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데 있다.
입양을 통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제위 계승은, 무리한 팽창정책으로 말년을 반란 진압에 소비해야 했던 트라야누스와 달리, 제국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던 하드리아누스의 방위전략을 지속하기 위한 일종의 포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제위에 오른 이듬해 남부 스코틀랜드 원정을 명령했다. 파우사니아스, 카시우스 디오, 그리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전기 작가 등이 원정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지만, 제국주의적 설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남부 스코틀랜드 원정과 안토니누스 성벽 건설은 자신의 군사적 명성 획득과 하드리아누스의 소극적(으로 보이는)인 대외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의원 위무라는 정치적 목적 하에 기획됐을 가능성이 크다. 안토니누스 성벽 건설 초기의 엉성함과 그에 대비되는 디스턴스 슬랩의 화려함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주도한 원정에 정치적인 목적이 보다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40년대 중반, 안토니누스 성벽은 브리타니아 속주 주둔 부대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면서 부분적으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6개의 요새와 뗏장으로 덮인 성벽이 이때까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성벽은 곧 십여 개의 요새와 수십 개의 소형 요새로 보강되었다. 150년대 중반까지, 이 성벽을 경계로 하려는 안토니누스피우스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러나 챠티족과의 전쟁을 위해 브리타니아 속주 부대 일부가 게르마니아 속주로 파견되면서 전력에 공백이 생기자, 그 틈을 타 브리간테스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158년,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율리우스 베루스가 게르마니아 속주에서 온 지원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성벽 유지에 급급해야 했다. 이후 안토니누스 성벽과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의 부분적인 수복이 이뤄지는 듯이 보였으나, 제위 말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관심이 라인-다뉴브 변경 지역으로 이동하고 브리타니아 속주에 반란이 끊이질 않으면서 종국적으로는 포기되기에 이르렀다.
로마제국은 이미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안으론 계속적으로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밖으론 게르만족의 위협에 대응하는 한편, 파르티아 제국과 경쟁해야 했다. 안토니누스 성벽의 포기는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일례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uggest appropriate reasons why the frontier in Britannia was advanced toward the southern Scotland and then so quickly relinquished in the reign of Antoninus Pius. The Roman Empire was under the extremely expanded condition in the late years of Trajan’s reign. An impellent territorial expansion could cause a vacuum of war potential in another frontier. Although Hadrian might have thought that the adoption of Antoninus Pius would be appropriated in such condition, the political atmosphere around this new ruler pushed for a military operation to him. Antoninus Pius established a new frontier in Roman Scotland to earn loyalty of the army and favour of the Senate upon himself. However, this frontier could not maintain long due to external factors. The warfares in the provinces of Mauretania and Germany requested a considerable number of detachments from Britain. The blank of war potential in Britain was filled by continuous attacks of indigenous tribes. Finally, this Brigantian revolt ceased the life of Antonine Wall as an effective frontier line, and then Romans had to reconstruct the previous frontier, the Hadrian Wall. In conclusion, the frontier revision by Antoninus Pius in Roman Scotland was started to achieve his political purpose, but was frustrated by the undeniable military difficul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