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중엽 백제와 왜국의 공적 통교가 시작된 이래로 양국의 지배층이 서로에게 기대했던 것은 각각 왜국의 對백제 군사적 지원과 백제의 對왜국 선진 문물-자원의 제공이었다. 왜국의 대외 관계의 기조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구조에 규제되는 것이었으며 웅진백제 시기의 왜국의 대백제 인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계체, 흠명천황기에 보이는 임나(안라) 일본부의 기사나 영토 할양, 천황에 대한 백제의 신속(臣屬) 태도 등의 기사를 매개로 당시 왜국의 백제 인식을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모두 왜국 야마토 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라는 가공의 설정을 전제로 기술된 내용들이며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5세기 고구려의 위세와 백제의 곤경을 보면서 왜국 내부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경합(경쟁) 의식이 배양되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지만 다시 재흥하는 6세기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일종의 ‘용병’ 제공과 그 대가로서의 선진문물의 교환 관계라는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四世紀中頃百濟と倭國との通交が始まってから、兩國の支配層がそれぞれ相手に對して期待していたのは、倭國の對百濟軍事支援と百濟の對倭國先進文物の提供であった。倭國の對外關係の基調も基本的にはこうした樺組みに規制されるものであり、熊津百濟時期の倭國の對百濟認識というのもそれから外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日本書紀』 繼體, 欽明天皇紀にみえる、たとえば任那(安羅)日本府の關連記事や領土割讓記事, 百濟の天皇への臣屬ぶりの記事などを媒介にして當時倭國の對百濟認識を論じるのは妥當ではあるまい。なぜなら、それらの記事はヤマト王權による韓半島南部支配という架空の設定を前提にしていると思われるからである。五世紀における全盛期の高句麗の威勢や百濟の困境を目にして、倭國內部で高句麗や百濟などに向けての競合(競爭)意識が盛り上がってきた可能性は無視できない。しかし、再び再興してきた六世紀の百濟と倭國との關係は、上記した樺組みとも繫がる、ある種の‘傭兵’の提供とその代價としての先進文物の交換、というものであり、倭國の對百濟認識もそこから探っていくのが妥當であろ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