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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본 광주 경양지(景陽池)
김희태
향토문화 27권 41-64(24pages)
UCI I410-ECN-0102-2018-300-003969988

광주 경양지[경양방죽]은 우리나라 농경의 중심지 호남지방의 중심고을에 자리한 관개용 저수지로서 역사도 오래되었으며, 생활사와 문화교류 현장이었다. 그리고 광주의 형국상 비보의 기능도 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현장을 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고증도 미비하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호남읍지, 여지도서, 고지도류, 광주목사 조희일의 죽음집, 양경우의 제호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목민심서, 아언각비 같은 조선시대 기록을 통하여 경양지의 명칭 유래, 축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는 김방의 행적, 문인들의 시문들을 찾아 정리하면서 잊혀져가는 역사현장과 기록 찾기를 토대로 경양지의 복원활용과 역사인물의 현양의 필요성을 제기해 보았다. 경양지의 명칭은 모두 10여개가 확인되었는데 두 가지 경향으로 크게 나뉜다. 물을 막은 둑을 중심으로 한 금교방축, 경양언, 경양제, 금교제와 가두어 둔 물을 중심으로 부른 경양지, 경양호, 경호, 서방지 들이다. 경호영지, 연지, 영지 등 다른 이름도 더 전해 온다. 경양의 명칭은 고려 조선시기 광주중심의 교통시설이었던 경양역에서 유래하였고, 금교 등 다른 지명도 쓰고 있다. 경양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초기로 알려져 오고 있고, 김방이 축조자로서 여러 가지 전설도 전해온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관련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24년 가을 광주목사 조희일이 지은 시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산 정약용도 청년시절 경양지를 지나면서 시를 남긴다. 17세기 중엽 목민관의 눈을 통해서는 서정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고 18세기말 청년 정약용의 시는 서경적이다. 이들 시문을 통하여 문화교류의 장이었음도 알 수 있다. 복원 활용에 있어서 단순한 외형의 복원보다는 농업관개시설, 문화교류공간, 비보 기능을 지녔던 생활문화사의 현장으로서 인식(認識)의 복원이 더 중요하다. 구시청 일대나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내의 한 공간에 시기별 광주 축소 모형도와 함께 경양지 중심의 모형을 복원하거나, 실제 물을 담는 공간을 확보하여 그곳에 기록과 전설과 모형을 함께 배치하여 역사공간, 문화쉼터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김방은 15세기에 당시 최대의 농업 관개시설인 벽골제를 중수할 때 주도적인 역량을 발휘할 정도로 실학적 기술을 현실에 접목시켰는데, 광주의 역사인 물로서 현양이 필요하다. 잊혀져 버린 역사현장의 복원활용과 역사인물의 현양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1. 서언 -잊혀져가는 역사현장과 기록 찾기-
2. <경양(景陽)>의 명칭 유래와 10개의 이름
3. 조선 초기에 실학적 기술을 현실에 접목한 김방
4. 경양지에서 낚시하며 시를 남긴 광주목사 조희일
5. 맺음말 - 경양지의 복원활용과 역사인물의 현양 -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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